졸업여행

승대재유 합작 제출글


 임승대는 어릴 적부터 누군가에게 다가가거나 친해진다는 행위를 그다지 어렵게 생각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흔히들 원하는 장군감의 덩치에 시원시원한 외모, 털털한 성격까지 하여 그를 이루는 것들은 모두 ‘친구가 많은 인사이더 남성’의 표본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눈치 빠르게 알아챌 줄 알았고, 그것을 이용해 먹을 줄도 아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그가 단지 안부 연락을 보낼 뿐인 행위에 이 정도로 골머리를 앓도록 만드는 건 진재유가 유일했다.

 

진재유, 진재유!

 

그놈의 진재유가 대체 뭐라고 이 시간까지 연락을 보내도 될지 고민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아니, 따지고 보면 뭐가 되긴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난데없이 생각이 나서 남들이 다 자고 있을 시간이 되도록 머릿속에서 도통 나가질 않았다. 그 탓에 임승대는 ‘내가 이놈 자식을 보통 좋아하는 건 아니구나’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진재유가 임승대에게 있어서 쉬이 연락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두 사람이 연락 한 번 하려는데 이렇게까지 고민을 해야 할 정도로 멀거나 어려운 관계인가? 확실히 말해두자면 그건 아니다. 아마 반대로 진재유가 임승대에게 연락하려 했다면 이 정도로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임승대가 진재유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차치하고 고작 중학교 동창인 친구에게 연락 한 번 보내는 것이 어려웠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몇 가지를 꼽아보자면 첫 번째로 임승대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멋있어 보이고 싶은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두 번째로 진재유는 임승대가 속해있는, 흔히들 말하는 ‘멋있는 사람’의 인간 군상을 멋있다고 생각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먼저 연락을 보내는 것조차 가오가 상했다. 세 번째로 두 사람의 마지막 연락이 거의 3년은 된 진재유의 연락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것도 본인이 읽씹까지 했던 연락이었다.

 

그것이 임승대가 대낮부터 오밤중까지 조그만 스마트폰을 붙잡고 끙끙대고 있는 이유였다. 그 빌어먹을 주근깨 소년 때문에!

 

 

*

 

 

[ 그래서 고작 그게 미련 철철 넘치는 구애인처럼 오밤중에 자냐고 선톡 했던 이유라고? ]

[ 고작이라니. 잼민이 니는 나랑 여행 가는게 그냥 고작인 일이야? ]

[ 어이가 없어가지고 그렇지. 니 이제 나한테 그렇게 편하게 연락 할 수 있나 싶어갖고. ]

[ 아 쫌 ]

[ ㅋㅋ 장난이다 장난. ]

 

 

그래도 결국 연락을 하긴 했다. 임승대 치고는 고민이 꽤 길어지긴 했지만. …고민이 길어진 것뿐만 아니라 구질구질한 구애인들의 상징인 [ 자냐? ] 라는 형편 없는 말로 ㅋ톡을 하기까지 했지만 진재유는 몇 분 지나지 않아 [ 안 자는데 왜? ] 라며 아무렇지 않게 답장을 보내왔다.

 

이전에 신경 쓰던 일로 장난을 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니 연락하는 데 혼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도 잠시였다. 임승대는 금세 신이 나서 자신이 가오를 챙기려던 것도 망각한 채 답장을 보냈다.

 

임승대가 이렇게 자존심 다 버리고 구차해지면서까지 연락하게 된 이유는 별거 없었다. 그냥, 진재유가 보고 싶어서.

 

지난 쌍용기에 만나 남은 앙금은 모두 풀었다고 생각 했는데, 며칠이라곤 하지만 단 둘이 만난 것도 아니고 옆에 시커먼 남자들을 한가득 끼고 잠깐 대화 좀 나눈 거론 부족했나보다. 미련이 남으니 낮이고 밤이고 시도 때도 없이 계속 생각은 나는데 막상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미운 정이고 고운 정이고 다 들어서 사랑에 빠지기라도 했던가.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 전부터 좋아하고 있던 걸 수도 있고. 어찌 됐든, 오랜 고민 끝에 냅다 연락부터 했고 만나자고 할 적당한 구실을 찾지 못해 둘러댄 핑곗거리가 ‘졸업여행’이었다.

 

왜 적당한 구실이 없었을까? 임승대의 입장에서 감히 짐작해 보자면 진재유가 지금까지 임승대에게 연락을 하지 않은 이유라 함은 아마도 ‘굳이 연락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프로 농구는 풀이 그리 넓지 않은 스포츠인지라 프로 농구를 지망하는 또래라면 굳이 연락을 주고받지 않더라도 실력 있는 녀석은 어느 대학을 지망하는지, 어느 대학에서 점 찍어뒀는지와 같은 소식 정도는 알음알음 다 알고 있으니까. 그 말은 임승대가 진재유는 주익대에 진학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듯이 진재유 또한 임승대가 준향대에 진학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진재유는 앞으로 농구를 그만두지 않을 게 분명하고, 임승대도 농구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굳이 연락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코트 위에서 만나게 되리라는 확신이 있을 테니 별일이 없다면 언제까지고 지금처럼 아무 연락 없이 지낼 텐데… 당장 진재유를 보고 싶은 나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임승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재유를 만날 구실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본인 스스로도 만약 자신이 진재유였다면 늦던 빠르던 다시 만나게 될 임승대에게 굳이 먼저 연락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 했으니까.

 

 

[ 그래서 어디로 가고 싶은데? 갑자기 연락해서 여행 가자고 하는 거 보니 가고 싶은 데 있는 거지? ]

[ 일단 올라와라. ]

[ 일단? 어디 가고 싶은지 아직 정한 건 아닌가보네? ]

[ 그건 아니고 강화도 한 번 가보게. 서해쪽은 아직 한 번도 안가봤거든. 바다 하면 역시 겨울바다 아니겠냐? 겨울인데 바다 함 가봐야지. ㅋㅋ ]

[ 그럼 처음부터 그렇다고 하면 되지 뭘 일단 올라오란 말부터 하냐. ]

 

 

진재유의 말대로 처음부터 어디 가고 싶은지 따위는 정해두지 않았다. 당연히 급조한 거다. 임승대는 놀러 다니는 걸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만 그게 멀리 나가서 노는 걸 즐긴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임승대가 서울에서 몇 년 살았다고 썸 타는 애랑 어디를 놀러 가야 여행 잘했다고 소문이 날지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애초에 썸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중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오밤중에 숙소에 있는 애들을 깨워서 관광 명소를 물어볼 수도 없었다. 지금 당장 옆 침대에 있는 최종수를 조용히 깨워 ‘종수야. 이 근방에 놀러 다니기 좋은 곳 알아? 분위기 괜찮은 데로 추천 좀 해줘.’ 같은 소리를 한다면… 욕이나 들어먹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그리고 이 자식은 그런 걸 알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최종수가 무슨 여자 친구냐?

 

그렇다 보니 핸드폰으로 급하게 가장 가까운 바다인 서해안부터 검색했다. 거기서 확대해 본 지도에 강화도가 눈에 띄었을 뿐이다. 그제야 임승대는 전화를 건 게 아니라 ㅋ톡을 보낸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전화였으면 그건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는 멋없는 소리나 했겠지. 이미 진재유한테 내다 버린 자존심이었지만 그래도 가오는 포기할 수 없었다.

 

 

[ 언제 가려고? ]

[ 졸업 하기 전에 얼굴 한 번 봐야지. 다음 주 주말 괜찮아? ]

[ 다음 주? 너무 이르지 않아? ]

[ 안되냐? ]

[ 안 되는 건 아닌데... 일단 알았다. 한 번 보고 다시 말 해줄게. ]

 

 

혼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답지 않게 텍스트로 말끝을 흐리는 진재유의 대답에 임승대는 의아함을 느끼기보다는 일단 약속을 잡아 지난 몇 시간 동안의 고민이 깔끔하게 사라졌다는 사실에 후련함을 느끼며 핸드폰 화면을 껐다.

 

아~ 진잼민 이거 얼마 만에 보는 기고. 지난 대통령기 8강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나? 다른 경기는 대진운도 영 좋지를 못해서 마주칠 일이 없었는데 곧 보겠네.

얼마 가지 않아 진재유를 만날 생각에 올라가는 입꼬리와 웃음소리를 숨기지 못한 임승대는 ‘기분 나쁘게 처웃지 말고 잠이나 자라 짜증 나니까.’ 라며 딴지를 걸어오는 최종수의 말에도 그저 ‘어~ 어쩔~’ 이라는 마인드로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

 

 

금요일 밤 부산에서부터 올라오는 KTX가 서울역 플랫폼에 도착한 지 몇 분 후, 임승대는 역에서 밀려 나오는 인파 사이에서도 단번에 진재유를 찾을 수 있었다. 한겨울인 시기를 감안해도 꽤 두껍게 싸매온 옷이나 저렇게 커다란 백팩에 캐리어에… ‘나 타지에서 여행 왔소’ 광고라도 하듯 짐을 한가득 싸 들고 왔으니 못 알아보기가 더 힘들기도 하겠지만 짐을 든 채 김해에서 부산을 거쳐 서울까지 올라오고도 저렇게 힘든 티 하나 없이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요, 진잼민이.”

“오랜만이다.”

 

 

둘은 어렵지 않게 서로를 찾았다. 진재유의 입장에서도 임승대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대한민국 남성의 평균 신장인 누구와는 다르게 임승대는 어디를 가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덩치는 아니니까. 눈이 마주치고 임승대가 오른손을 들어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나면 진재유도 캐리어를 쥐고 있지 않은 손을 들어 이전처럼 익숙하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임승대가 그대로 가까이 다가가 진재유의 손에 들려 있는 캐리어 손잡이를 가져와 자신의 손에 쥐었다. 임승대는 방금 완전 훈남 같았다… 쩔었다. 라는 생각을 하며 자연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무슨 짐을 이래 바리바리 싸왔노. 살림 하나 차리겠네. 김해서부터 들고 오는 거 안 무거웠나.”

“개안타. 그리고 내가 짐이 많은기 아이고 니가 너무 아무것도 안 들고 오는기다. 가방이 그기 뭐고? 크로스백? 무슨 집 앞에 마실 나왔나? 춥진않고?”

“춥기는. 내 이제 서울 사람 다 된 거 모르나? 그리고 니가 이렇게 다 들고 올 줄 알고 갈아입을 거랑 왁스만 들고나왔지. 원래 여행은 지갑이랑 몸만 가는 게 낭만이다.”

“낭만이 다 얼어 죽어삤나… 자랑이다 인마. 어차피 내도 그럴 줄 알고 이래 싸 왔다.”

 

 

이욜~ 울 잼민이 든든한데?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내 뒷바라지 좀 해도. 니 하는 거 봐서. 딱 잘라서 안 하겠다고는 안 하네? 꼬라지를 보니 물가에 내놓은 아 같은데 가만둘 수가 있어야제.

 

사실 임승대는 짐을 들고 올 수 없었다. 곧 졸업할 3학년인지라 숙소에서 짐을 모두 빼야 할 날도 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학 입학 전까지는 본가에 있을 생각으로 며칠 전 택배로 짐을 부쳐버렸고, 그 이후로 갈아입을 옷 몇 가지만 남아있어 짐을 가져오려야 가져올 수가 없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만 곧 2박으로 놀러 가기에 필요한 짐은 남겨뒀어야 했다는 사실을 택배를 부치고 나서 깨달아버린 걸 어쩌겠는가?

 

그 때문에 마치 여행 준비라곤 모두 맡겨놓은 것처럼 구는 임승대의 장난스러운 태도는 남이 보기에는 고운 시선으로 볼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다행인 것은 진재유는 멋대로 의지 좀 했다고 해서 감정이 상할만한 사람은 아니었고 임승대가 다리를 뻗을 만한 곳에서만 뻗댄다는 걸 알고 있다는 점이겠다. 그 사실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는지 큰 불평은 하지 않고 익숙하다는 양 핸드폰으로 임승대가 공유 해주었던 숙소로 가는 경로를 다시 확인했다.

 

버스에 올라타고 이동하면서 들은 진재유의 계획은 이랬다. 임승대라면 보나마나 졸업 여행이나 강화도 같은 것들도 충동적으로 정했을 것이 눈에 훤하니 숙소에서 밤을 보내며 일정을 점검한다. 이 과정에서 부실할 것이 뻔한 임승대의 계획을 진재유 본인이 알아봐 둔 것들로 어느 정도 보충하고, 여차하면 자신이 아예 새로운 일정을 계획한다.

 

계획이 부실하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암만 같이 지냈던 시간이 길어도 그렇지 이런 것까지 알 정도로 오래 알았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계획이라곤 대강 괜찮다는 숙소 좀 잡아놓고 맛있다는 거 먹이고 예쁘다는 거 보러 가는 게 전부였던 임승대는 진재유가 자는 동안 몰래 검색이라도 더 해볼 생각이었기에 괜히 자존심과 가오가 상하는 것도 같았지만 진재유의 말이 딱히 틀리지도 않았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다.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얘도 내가 계획을 잘 세우는 편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 알고 있으니까 괜찮겠지. 자기가 좋아서 하겠다는데. …그런 자기 위로를 하고 있자니 임승대는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이러면 마치 데이트가 아니라 진재유를 노예처럼 부려 먹고 빌붙는 꼴 아닌가. 자기라고 준비를 아예 안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내도 계획 해놨던 거 있다. 니랑 같이 해돋이 볼긴데?”

“해돋이? 그럼 동해나 남해를 가지 와 강화도를 가자 하는데?”

“서해라고 일출 못 본다는 법 있나. 거기도 명소 다~ 있다. 내가 그거 보려고 미리 찾아둔 펜션이라고.”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영 미심쩍다는 진재유의 시선에 임승대는 평소 같았으면 ‘와카는데? 잼민이 내 못 믿나?’ 하며 머리를 흐트러트리는 장난이라도 쳤겠지만 기세등등하게 말한 것 치고는 스스로도 영 자신이 없어 괜히 눈을 굴리며 진재유의 눈치만 봤다. 무슨 계획인지 캐묻지는 않겠지.

 

 

“맞나. 그럼 내가 더 찾아볼 필요 없겠네.”

“그래 인마. 그러니까 진잼 니는 얌전히 따라오기나 해라.”

“알았다 알았어.”

 

 

장난처럼 대답한 것 같더라도 진재유는 한 번 내뱉은 말이라면 어기는 법이 없었다. 임승대는 안도의 한숨이라도 쉬고 싶은 심정으로 식은땀이 나는 손바닥을 바지에 대충 문지르며 한숨 돌렸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잼민이 니는 술 마셔봤나. 인제 민증도 쓸 수 있는데.”

“어. 1월 되기도 전에 부모님이랑 마셔봤다.”

“아 뭔데! 내 빼놓고 니 혼자 마셨나! 내는 니랑 마실라고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연락 한번 없던 놈이 뭔소린데. 그냥 서울에서 같이 마실 아가 없어가꼬 그런 건 아이고?”

“그래가 지금 연락 한 거 아이가. 참나… 내가 진잼 닌줄 아나. 내 을매나 멋있는 사람인데. 서울 아들 내랑 친해지고 싶어서 줄을 섰다. 진짜 니랑 마실라고 기다린 거라고.”

“알았다 알았다. 그럼 오늘 같이 마심 되지. 가는 길에 편의점 들러서 술 사 가자.”

 

 

그래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오다 보니 서울에서도 강화도에 금방 도착했다. 대부분 진잼 니 왜 ㅋ톡으로는 사투리 안 쓰는데? 또 이상한 소리 하네. 니는 글로 사투리 쓰나. …같은 헛소리뿐이긴 했지만.

 

 

“벌써 막차 끊길 시간 다 됐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일찍 만나가 저녁 같이 먹을 걸 그랬다.”

“와. 토요일도 일요일도 여 있을 긴데 금요일 저녁 한 번 같이 몬 먹은 기 아쉽나.”

“아이. 내가 찾아봤는데 여기 근방에 기가 막히게 맛있는 레스토랑 하나 있다카데. 그거 몬 먹어가꼬 아쉬워서 그러지. 내일 가자.”

“오늘 술 마실 거라매. 니 내일 백퍼 뻗을 긴데?”

“뭐고? 내가 이 등치에 술이 약해 보이드나?”

“모르는 일이제. 그래가꼬 내일 하루는 뻗어 있는 게 니 계획인 줄 알았다.”

“아인데? 진잼 니나 조심해라. 니 뻗어 있어도 데리고 나가서 바다 구경 시켜줄라니까.”

 

 

임승대는 진재유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어, 우리 여서 내려야한다. 아저씨 잠만요! 저희 내립니다! 하며 급히 하차벨을 누른다. 거 참 빨리 좀 말할 것이지 문 닫고 나서… 짜증을 내는 기사님을 뒤로하고 버스에서 내린 후 하늘을 보니 겨울이라 그런지 벌써 달이 하늘 한가운데 떠 있다. 어두워지니 미리 봐두었던 길도 낯설다.

 

여기가 어데고. 중얼거리며 핸드폰으로 지도를 켜보니 다행히 숙소가 그리 멀지는 않았다. 바로 여 근처네. 쫌 걷고 있다. 가는 길에 편의점 있드나? 안 봤다. 그래도 널린 게 편의점인데 근방에 하나 정돈 있겠지. 하긴 글네. 가자. 어.

 

 

*

 

 

두 명 모두 강화도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던 탓일까? 펜션 근처에는 생각보다 있는 게 없었고 편의점을 가기 위해서는 한참 먼 곳에 갔다 와야 한다는 사실을 임승대와 진재유 모두 알지 못했다. 술 한 번 마시겠다고 대장정을 거친 뒤 1시가 넘어서야 숙소에 도착한 임승대는 조만간 꼭 면허 따고 돈도 많이 벌어서 큰 차를 사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진재유랑 자차 타고 여행 다녀야지.

 

지친 몸으로 한가득 싸 온 진재유의 짐을 어느 정도 풀어놓은 임승대가 식탁 의자에 걸터앉는다. 힘들다. 쫌만 쉬자. 이제까지 걷느라 힘들었제. 앉아있어라. 니는 낮부터 계속 걸은 게 안 피곤하드나. 내도 힘들지. 그럼 일로 온나. 이것만 꺼내고 씻고 올라니까 쉬고 있어라. …그러던지. 짧은 대화가 오가고 잠시 뒤 수건을 어깨에 대충 걸친 진재유가 욕실에 들어가면 임승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쪼끄만 게 체력은 또 왜 이렇게 좋은 건지. 힘들다면서 와 안 쉬는데. 그럼 이렇게 앉아있는 내는 뭐가 되냐고. 임승대는 한참을 걸어 다니니 힘만 들고 잘 보이고 싶었는데 다 망했다는 생각이나 하면서 마른세수를 했다.

 

진재유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허공을 쳐다보면서 멍때리고 앉아있자니 뭐 하는 거냐…. 싶은 마음에 그만 쉬고 일어나서 짐 정리나 마저 해야지. 술 사온 것도 냉장고에 넣어두자는 마음으로 과자가 가득 든 봉투를 들었다.

 

인마는 뭔 과자를 이래 마이 샀노. 감자칩만 한가득 사놨네. 얼씨구. 홈X볼도 샀네. 잼민이 이런 취향이가. 입맛이 진짜 잼민이네. 나오면 한껏 놀려줘야지. 술은 소주만 5병이나 산 걸 보니 그래도 내가 마이 마실 기라 생각했나 보네. 쫌 뿌듯하기도 하고. 잼민이 오늘 내가 3병 마시고도 멀쩡한 거 보여준다.

 

 

“…뭐 하는데? 니도 홈X볼 좋아하나? 과자를 들고 히죽거리고 앉았노.”

“아 깜짝아! 뭔데? 와 그래 조용히 나오는데? 니가 무슨 귀신이가?”

“뭔 소리고? 안에서 문 열고 불렀는데 조용하길래 그새 잠들어삤나 싶어가 나왔다. 여기서 혼자 부시럭댄다고 못 들었나. 욕실 비워놨으니 드가서 씻으래이.”

 

 

헐벗은 채로 허리에 수건 하나만 겨우 둘러맨 진재유는 그러고서 풀어놓은 짐을 뒤적거리더니 검은색 헐렁한 긴팔 티를 꺼내 입었다.

 

점마는 내가 그래 편한가? 암만 그래도 허리에 수건 하나 걸쳐놓고 나오노. 아, 안에서 불렀다 캤지. 옷 달라고 부른 거였나. 그래도 1학년 때 봤던 그 얼어 죽을 나시는 안 갖고왔나 보네. 겨울이라 나시만 입기에 춥긴 했나 보지. 그런 생각을 하던 임승대는 옷을 꺼내 입는 진재유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간 눈이 마주치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술 냉장고에 넣어둘라고?”

“어.”

“한 병은 꺼내놔라. 어차피 니도 금방 나올 거 아이가.”

“어 알았다.”

 

 

근데 내 씻고 나오자마자 술부터 마실라고? 타이밍을 놓친 질문이 오갈 데 없이 목구멍에 걸렸다. 냉장고 문을 닫고 고개를 돌리면 가지고 가라고 진재유가 들고 온 듯 테이블 위에 곱게 놓인 수건과 그 앞에서 감자칩이나 먹고 있는 진재유가 보였다.

 

인마는 참 속도 편하네. 내는 니랑 술 마실 생각에 벌써 두근거리는데. 그러고 보니 진잼민 주량이 어떻게 된다고 했더라? 뭐 어차피 이따 같이 마셔보면 알게 되겠지. 가벼운 의문을 안은 채 수건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승대 니 잠옷 갖고 드가는 거 깜빡하지 마라. 아 맞다, 땡큐.

 

 

*

 

 

“그러니까… 내도 주익대로 가고 싶었거든. 프로 하고 싶은 놈 중에 만약 주익대 갈 수 있음 안 가고 싶은 놈 몇이나 있는데? 실제로 니도 주익대 갔잖아…. 근데 강인석 금마가 처음엔 서교대 간다더만 다시 마음 바꿨다카데. 그래가꼬 먼저 입학 제의 줬던 준향대에 원서 썼지. 그래도 준향대가 인재를 볼 줄 알드라고. 생각해 보니까 준향대도 나쁘진 않을 것 같고. 이번에 진학한 아들 라인업 나쁘지 않던데. 진잼 니도 알제? 거… 어디더라. 그래. 조형고 잘하는 선수 있잖아. 이름이 뭐더라. 박병찬?”

“어. 근데 것보단 승대 니 인자 그만 마셔야 할 것 같은데. 얼굴이 완전 홍당무다.”

 

 

누구나 처음 술을 마셔보기 전까지 자신은 평균 정도로는 마시겠거니 짐작하고는 한다. 임승대 또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어디 평균뿐인가. 임승대는 어느 정도일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술을 잘 마시리라 생각했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보통 그런 기대는 처참히 무너지고 만다. 마찬가지로 임승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이 두세 병 정도는 거뜬히 마실 수 있길 간절히 바랐지만 슬슬 어지럽고 머리가 멍해지는 것이 정신을 잡고 있는 것이 어려웠다.

 

얼마나 마셨지? 진재유와는 템포를 맞춰가며 마셨고, 비어있는 병 수가 3개에 4병째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보니 겨우 한 병 반에서 두 병 정도는 마신 것 같았다.

 

내가 한 병 반이면 뻗는다고?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임승대는 비어있는 병과 진재유를 번갈아 보았다. 정신을 붙잡고 있기도 힘든 자신과는 달리 태연해 보이는 얼굴로 술을 홀짝이는 진재유의 모습에 임승대는 절망적인 기분이 드는 것도 같았다.

 

 

“승대. 니정도면 다른 아보다 많이 마시는 기다. 객기 부리지 말고 그만 마셔라.”

“걱정 마라. 내 아직 안 취했다.”

“객기 부리지 말라고 방금 말했다. 니 취한 거 맞고 니만치 덩치 큰 아 엎어지면 수습 해놓을 자신도 없으니까 가만있어라. 물 좀 더 떠오께. 해돋이도 봐야 할 거 아이가.”

“…이게 말이 되나! 똑같이 마셨는데 왜 니는 얼굴 하나 안 변하고 멀쩡한 건데?!”

“뭐고? 와 갑자기 화를 내는데? 아이스크림 사다주까?”

“됐다!!!”

 

 

임승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재유는 임승대를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진재유의 입장에서야 취한 임승대가 난데없이 화내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모든 계획을 망친 임승대는 속이 말이 아니었다. 아이스크림을 사다 준다는 배려조차 전혀 기쁘지 않았다.

 

 

“아~ 다 망했다! 내만 따라오라 캐놓고 내일 정신 못 차려서 놀러 못 다닐 기 뻔한데 쪽팔려서 이제 니 얼굴을 우째 보는데!”

“내는 어차피 니 이럴 거 다 알고 있었는데 뭘 새삼스럽게 망했다 하는데?”

“그래서 문제다 아이가!”

“오히려 그래서 망한 기 아이지. 니 어차피 그래 내 한 번 이끌어볼라고 발악하고 눈치 보는 것도 내 좋아해서 그러는 거 아이가?”

“므, 뭐? 뭐라꼬?”

 

 

임승대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진재유의 말에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엥? 다 알고 있었다고? 언제부터?

 

 

“와 그래 놀라노? 니 내한테 갑자기 연락 했을 때부터 수상했다 아이가. 평소에 안 하던 짓이나 하면서 내한테 가오 부릴라 하는 거 모를 줄 알았나?”

“처,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고?”

“처음엔 쫌 긴가민가했는데 지금 확신했다. 그래도 술은 쫌 깼나 보네? 물 갖다줄 테니까 앉아있으래이.”

“지금 물이 문제가?! 니가 지금 무슨 말 한 건지는 아나?!”

“어 안다. 내가 아직 니 마음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얌전히 말 들으래이. 니는 안 당해봐서 모르겠지만 받아주는 입장에선 술 먹고 꼬장 부리는 기 제일 최악이다.”

 

 

지금 내만 대화의 흐름을 못 따라가고 있는 기가? 할 말을 찾느라 말문이 막힌 임승대가 바보처럼 진재유를 쳐다보며 눈만 껌뻑이고 있는 사이 커다란 컵에 물을 한가득 받아온 진재유가 임승대의 앞에 컵을 내려놓았다.

 

 

“진짜 혹시 몰라서 말하는 건데 니 지금 고백 하면 안 받아줄 거니깐 고백 하지 마라. 내도 지금 머리 어지러워가꼬 터질 것 같거든.”

“…그럼 술 다 깨고 고백하면 받아주나?”

“니 하는 거 봐서 생각 해보께.”

“재유… 내 진짜 잘하께….”

“징그럽게 뭐고? 내 아직 니랑 안 사귄다.”

 

 

아무렴 어떤가. 임승대는 징그럽다는 말은 듣지도 못한 것처럼 진재유의 입에서 나온 ‘아직’이라는 말이 기꺼워 히죽 웃었다. 내일 머리가 깨질 것 같아도 꼭 진재유 데리고 끝내주게 예쁜 거 보여주러 가야지. 그런 다짐을 하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 해 뜬다.”

“글네.”

“지금 분위기 딱 좋은데 고백하믄 진짜 안 받아줄 기가.”

“하지 마라 했다.”

“잼민이 까칠하긴.”

 

 

그래도 이 시간까지 깨어 있긴 했네~ 졸업 축하한다. 아직 졸업 안 했는데? 얼마 안 남았으니 미리 하는 거지. 그럼 내는 졸업 하고 나서 말해 줄란다. 그러던지.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오냐.

 

서해 일출도 예쁘긴 하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면 홀리기라도 한 듯 해돋이를 바라보느라 대화가 끊겼다. 그러다 문득 물을 마시고 있던 진재유와 다시 한번 눈이 마주치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우리 지금 뭐 하노. 해돋이도 봤고 양치하고 잠이나 자자. 더 늦게 자면 내일 진짜 아무것도 몬 한다.”

“양치 하기 싫은데 꼭 해야 하나.”

“니 지상고 숙소 있을 땐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장도고 숙소에서도 그러나.”

“아~ 잼민이 할 말 없게 만드네. 알았다. 양치하고 자께.”

 

 

간단히 씻고 각자 다른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면 임승대는 생각했다.

여행 오자고 하길 잘했다. 내일 데이트 하고 나면 분위기 좋은 곳에서 꼭 고백 해야지. 그리고 침대도 같이 쓰자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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