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준

2월 15일

240214 발렌타인데이 기념 쟁준 / 준짝쟁 쟁짝준 쌍방짝사랑

오른쪽 준수 by 오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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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높이 뜬 낮, 교실로 들이치는 햇빛에 준수가 눈을 떴다. 습관적으로 시계를 본 준수가 아직 점심시간이 되긴 멀었다는 걸 확인하고는, 다시 책상에 엎드리려 자세를 잡았다. 팔에 얼굴을 묻고 잠들려는 그때, 준수의 오른쪽 팔꿈치에 무언가 닿는 것이 느껴졌다. 책상 모서리 끄트머리에 간신히 걸친 물건이었다.

‘...?’

다시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그건 초콜릿이었다.

 


2월 15일

w. 오준


지상고등학교의 졸업식은 꽤 느린 편이었다. 여름방학이 남들보다 일주일 정도 긴 영향이었다. 다른 학교 같았으면 이미 종업식과 졸업식을 마치고 다음 해를 준비했을 2월 중순에도, 지상고 학생들은 꼬박꼬박 등교했다. 그래도 오늘은 그런 등교도 마지막이었다. 내일이 졸업식 날이었기에, 학생들은 평소보다 더욱 들떠 있었다.

들뜬 데엔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오늘, 2월 14일. 풋풋한 청춘들이 마음을 전하는 날이다. 화이트데이나 빼빼로데이 같은 경우에는 대놓고 선물을 주고받지 못했다. 그런 상술에 놀아날 바에야 공부나 하라는 선생님들의 압박 때문이었다. 어떤 반은 사탕이나 빼빼로가 눈에 보이는 순간 압수당한다고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시험도 다 끝났고, 학교 인원 중 삼분의 일은 이제 졸업하고 사라질 놈들이라 그런지 선생님들의 규제가 덜했다. 거의 없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자연히 학생들은 잔뜩 신이 났고, 일주일 전부터 수제니 고급이니 하는 초콜릿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준수는 몰랐다. 이러한 기념일을 빼놓지 않고 챙기는 건 그 목적 끝에 우정이든 사랑이든 있는 사람 아니겠는가. 친구는 원래 없는 편인 데다가, 사랑은 애초에 간절하지 않은 게 준수였다. 중학교 시절부터 발렌타인데이 당일 반 학우들이 건네는 초콜릿을 받고서야 오늘이 그날이구나, 하고 깨닫고는 했다. 물론 올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 책상에 올려진 초콜릿을 한 번 보고, 쉬는 시간이 되어 몇 개의 초콜릿을 더 받은 후에야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하고 깨달았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평소처럼 준수네 반 앞으로 가 기다리던 재유는 한참이 지나도 준수가 나오지 않자 반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준수! 하고 부르자 그제야 이쪽을 보는 준수의 표정이 꽤 난처해 보였다. 그 이유를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준수 책상 위를 가득 채우고도 남은 초콜릿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좀 도와주까.”

“어어, 그럼 고맙지.”

준수는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건 다 거절할 것처럼 차갑게 생겼으면서, 막상 받으면 하나라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면이 있었다. 날이 갈수록 그 양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람의 정성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점이 준수의 인기를 더 높게 했다.

“와, 이거 그 백화점에서 파는 거 맞나?”

“어... 그래?”

“준수 니 진짜... 항상 생각하는 건데 참 대단하다.”

부끄러운 듯 뒷목을 긁적이는 준수를 보고 피식 웃은 재유가 초콜릿을 정리하는 걸 도왔다. 친절하게도 쇼핑백을 같이 준 몇몇 아이들 덕분에 정리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준수는 그때까지도 책상 모서리에서 버티고 있던 초콜릿을 마지막으로 챙겨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편의점에서 파는, 평범한 판 초콜릿이었다.

“이거 들고 갈 기가.”

“이걸 다 챙겨서 밥을 어떻게 먹어. 다시 와서 챙겨가지 뭐.”

“그래라, 그럼.”

그러나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준수는 급식실로 가는 동안 여섯 개의 초콜릿을 더 받았다.

 


“님! 초콜릿 몇 개 받음?”

“한 갠디요. 다은 햄 설마 손에 그거 받은 거예요?”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일 학년 농구부원들이 숙소로 들어섰다. 다은의 손에는 다섯 개의 초콜릿이 들려있었고, 상호는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 쿠키 봉투를 소중히 품고 있었다. 그 옆의 희찬은 작은 쇼핑백을, 태성은 고급 초콜릿 박스 하나를 자랑이라도 하듯 당당히 들고 걸어왔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배신자니, 뭐니 하는 말장난은 준수가 가져온 초콜릿의 산 앞에서 뚝 멈췄다.

“...서, 설마 다 받은...?”

“뭐. 불만 있냐?”

“아, 아녀요, 햄. 그냥 쫌 놀래가꼬...”

“형 엄청 많이 받았네요. 좀 봐도 돼요?”

준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자, 마치 구경거리라도 난 듯 우르르 몰려와 준수의 쇼핑백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저건 백화점 거, 저건 고급 제과점 거, 저건 편의점에서 제일 비싼 거... 끝도 없이 나오는 종류에 입맛을 다실 때쯤, 화장실에서 나온 재유가 그들을 말렸다. 연습 시간이 다 되었다는 이유였다. 졸업식 전날에도 연습을 해야 하냐는 야유가 몇 번 들렸지만, 당일에도 연습하고 싶냐는 준수의 일갈에 금세 잠잠해졌다.

 

“니 초콜릿 받은 거 다 누가 준 건지 기억하나.”

“어... 아니, 몇 명은 기억나는데... 다는 모르지.”

“맞나....”

연습이 다 끝난 저녁, 숙소로 가기 전 가볍게 산책하던 중 재유가 그렇게 물었다. 자기 이름이 적힌 포스트잇을 붙여놨거나, 편지를 썼거나, 초콜릿을 전해주던 중 어떠한 일이 생겨 기억에 남는 경우가 아니면 준수는 잘 기억하지 못했다. 사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온종일 초콜릿을 받기만 하는 데도 바쁜데, 아무 이름도 안 적혀 있는 초콜릿이 누구 건지 어떻게 다 기억하겠는가. 그래서 준수는 별생각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 대답에, 재유가 어쩐지 생각이 많아진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재유의 변화를 준수는 굳이 캐묻지 않았고, 그 상태로 둘은 숙소에 도착했다. 저녁은 칼칼한 맛의 부대찌개였다.


다음 날, 학교는 어제 주고받은 초콜릿의 결과에 더해 졸업식이라는 이벤트로 잔뜩 들떠있었다. 하루 사이에 연인이 된 아이들도 몇몇 보였고, 몇몇은 차였다는 사실에 눈물짓고 있었으며, 몇몇은 초콜릿을 하나도 받지 못한 사실에 울분을 터뜨렸다. 등교한 준수는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를 뚫고 제 자리에 가 앉았다. 그런데 무언가 불편했다. 마치 바지 주머니에 뭐라도 든 것처럼. 준수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꺼내본 것은, 어제 처음으로 받은 것이자 점심을 먹기 전 마지막으로 챙긴 그 판 초콜릿이었다. 그새 모서리가 조금 구겨지고, 반으로 부러지긴 했지만... 용케 녹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준수는 아무 생각 없이 초콜릿을 뜯어 한 입 입에 넣었다. 달달한 맛에 기분이 좋았다.

“어, 그거 어제 책상에 있던 거 맞나?”

준수의 옆자리, A가 그렇게 물었다. 준수는 초콜릿을 우물우물 씹으며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아, 맞네~ 니 그거 누가 준 건지 아나?”

“아니. 나 잘 때 두고 간 거 아냐?”

“그래. 그랬지. 그래서 내가 어제 전해준다 그랬었는데. 까먹어뿟다... 미안해가 우짜노.”

들었어도 딱히 달라질 건 없었을 텐데. 준수가 그렇게 생각하며 되물었다.

“누군데?”

“재유.”

“어?”

잘못 들었나? 순간 혀를 씹을 뻔했다. A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니 재유 모르나? 맨날 밥 같이 먹고... 같은 운동부 아니가.”

“아니, 아니... 재유 알지. 진재유 말하는 거 맞잖아.”

“그래. 암튼 걔가 어제 두고 갔다. 난 걔가 직접 말했을 줄 알았는데. 같이 가길래.”

“아니, 말 안 했는데....”

준수가 벌써 반이 사라진 초콜릿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이걸 재유가 줬다고? 왜 어제는 아무 말도 안 했지? 산책할 때 주고받았던 대화가 떠올랐다. 초콜릿을 누가 줬는지 다 기억하냐는 질문. 준수가 아니라고 대답했던 그것.

종이 울렸다. 준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섰다. 준수의 목적지는 평소 잘 가지도 않던 매점이었다. 그리고 운 좋게 마지막 남은 초콜릿을 사고는, 다시 계단을 올랐다. 마지막 목적지는 재유의 반이었다.

“재유!”

무작정 교실 문을 열고 재유를 불렀다. 준수와 똑같은 창가 쪽 뒷자리에 앉은 재유가 준수를 쳐다보았다. 삼 분 정도 남은 쉬는 시간, 준수가 재유에게 다가가 방금 산 초콜릿을 내밀었다. 비닐 포장이 된, 작은 물방울 모양의 초콜릿이었다.

“머고.”

“...어제 너 나한테 초콜릿 줬다며.”

“아... 이제 알았나.”

준수가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구만. 하고 재유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이건 뭔데?”

“...보답.”

“니 모르나. 보답은 한 달 후에 주는 건데.”

재유가 웃으며 농담을 건넸지만, 준수는 초콜릿을 재유의 품속에 밀어 넣을 뿐이었다.

“그냥 받아. 빨리. 종 친다.”

준수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점으로 간 것도, 초콜릿을 사서 재유에게 건넨 것도 딱히 이성을 거친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어제 알아차리지 못한 점이, 하루가 더 지난 후에야 주인을 알았다는 점이 마음에 안 들었다.

“이따 보자.”

종이 울렸다. 준수가 후다닥 교실을 나갔다. 남겨진 재유는 준수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다, 초콜릿 포장을 뜯어 하나를 입에 넣었다.

과하게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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