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상

경주여행

종상러와의 경주여행을 기념하며 적었던 단문입니다.

- by 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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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야. 안 일어나?”

 

저를 마구 흔드는 손길을 이리저리 쳐내기를 몇 번, 이내 정신을 차린 기상호가 눈을 번쩍 떴다. 커헉, 급하게 일어나 입을 닫다 보니 이상한 소리가 나긴 했으나 익숙한 일이라는 듯 그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팔로 대충 제 입가를 쓱 갈무리한 기상호가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켜자 7:00이라는 큰 숫자가 배경에 가득 찼다. 이전부터 계속 기상호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인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제 뭐 찾아본다고 계속 핸드폰 하더니 잘하는 짓이다.”

“아이, 그래도 후딱 준비하면 늦은 건 아이잖아요.”

 

기상호가 괜스레 최종수의 팔목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처음 같이 살 때만 해도 이런 행동들에 수없이 버벅대며 어딘가 고장이 난 로봇같이 굴곤 했던 최종수였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던가. 그 뚝딱이 최종수도 이제는 이런 기상호의 애교쯤은 덤덤하게 받아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최종수가 눈을 흘기며 기상호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잘못한 건 아나 보지?

 

“짐 다 챙겼으니까 얼른 씻고 나오기나 해. 늦어도 일곱 시 반엔 출발해야 하니까.”

“에에. 제가 또 한 빠름 하잖아요? 빠르게 준비해보께요.”

 

한 빠름은 무슨… 제 딴에는 아직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뭉그적거리는 기상호를 잡아 화장실에 쑤셔 넣곤 나오며 최종수가 중얼거렸다. 미리 싸 둔 더플 백을 대충 들어 현관 앞으로 옮겨 두고는 창문 앞에 서자 쾌청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기상호가 난리를 치며 기상 일보를 읊어댔던 통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날씨다. 여행하기 좋은 날씨, 라고 기상호가 그랬더랬지. 최종수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이대로만 가면 좋겠다. 티브이 옆에 걸린 시계를 흘끔 살핀 최종수가 기상호를 재촉하러 발걸음을 옮겼다.

 

*

 

분명… 맑은 날씨라 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경주역에 도착해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마주한 게 흐린 잿빛 하늘이라니. 최종수랑 기상호는 이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프로 농구 시즌이 마무리되자마자 기상호가 강력하게 추진했던 경주 여행이었다. 운전해 가는 것도 좋지만 오랜만에 뚜벅이 여행도 색다르고 좋지 않겠냐며 신나서 기차표부터 덥석 예약했던, 여기저기 어디가 좋겠냐며 최종수를 들들 볶아대던, 그 여행. 어제만 해도 매우 맑음이던 날씨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변할 수가 있단 말인가? 기상호는 절망했다. 제가 먼저 제안했던 여행인지라 안 그래도 기차 안에서부터 최종수의 반응을 조금은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경주와 가까워질수록 눈에 띄게 흐려지는 하늘을 보며 그저 제가 잠에 취해 헛것을 보는 것이길 싹싹 빌었던 게 전혀 소용이 없었나 보다. 흔들리는 시선을 애써 부여잡으며 입을 열었다. 햄… 혹시 우산 챙겼어요? …아니. 와, 망했다. 차도 없는디.

 

하지만 이곳이 어디던가. 어디든 ‘컨비니언스’ 스토어, ‘편의’점이 있는, 편리함에 미친 나라 아니겠는가. 망하긴 뭘 망해. 덤덤하게 답한 최종수는 넋이 나간 기상호를 어디론가 이끌기 시작했다. 기차역이면 하나쯤은 꼭 있다는 스토리웨이에서 대강 제일 커 보이는 우산 두 개를 계산해 나온 최종수가 그중 하나를 기상호 손에 쥐여줬다. 해앰… 기상호가 감동에 젖은 얼굴로 최종수에게 엉겨 붙자 최종수는 야, 야… 하면서도 그런 그를 품으로 받아 작게 토닥였다. 기상호가 어떤 마음으로 준비했는지 알기 때문일까 이렇게 살짝 틀어진 여행에 짜증은커녕 웃음만 자꾸 나 참기 힘들 정도였다. 허둥대는 기상호는 오랜만에 보는 거기도 했고. 은근히 기분이 업된 최종수의 머릿속에 둘의 첫 여행이 잠시 스쳐 간다. 그땐 아무래도 제 쪽이 이런 모습이었겠지. 조금 부끄럽기도 하지만 참 풋풋하다 싶은 시간이었다. 뭐든지 잘 해보고픈 마음을 알기에 이번 여행에서만큼은 기상호에게 조금 너그러워지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이제 어디 가면 되는데?

 

최종수의 계속된 배려에 금세 기운을 되찾은 기상호가 이리저리 붕붕 대며 튀어 나갔다. 일단 황리단길부터 가야 한다 안 해요. 요즘 사람들 다 거서 놀더만. 기상호를 따라 웬 전통 집처럼 생긴 데에 가 커피 아닌 전통차도 마셔보고. 아, 요 와서 박물관 안 가는 건 말이 안 되지, 안 그래요? 하는 소리에 별 관심도 없던 신라 시대 유물들을 멀뚱히 쳐다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고. 희차이가 말해줬는데 첨성대랑 월… 뭐시기 하여튼 요 근처는 야경이 그래 예쁘다카더라고요? 제가 다 공부했다 안캅니까. 내 쫌 멋찌죠?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기상호를 보며 웃기도 하고.

 

젖은 흙냄새, 창문을 두들기는 빗방울, 우산을 탈탈 털어 똑딱이를 채우는 소리, 옷에 묻은 물기를 대충 털어내는 손길, 비가 와 사람이 적은 덕에 더 자주 맞잡을 수 있었던 손들, 길 곳곳에 생긴 웅덩이에 반사되는 경주의 야경들. 혼자 왔더라면 감흥 없이 흘러갔을 것들이 유난히 특별하게 다가와 마음에 쌓였다. 시간이 가는 게 야속할 정도로 붙잡고 싶은 시간이다. 최종수는 제 옆에 서 멍하니 야경을 눈에 담고 있는 연인을 바라봤다. 한참을 그렇게 보고 있으니 이내 시선을 느낀 기상호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쳤다.

 

“예쁘죠. 여기.”

“…응. 네 말대로 오길 잘했네.”

“날씨가 맘처럼 따라주진 않았지만. 그래도 꽤 즐거운 여행이었다 안 해요.” 그의 눈이 별을 머금은 것처럼 반짝였다. 솔직히 얘 눈이 야경보다….

“상호야.”그런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최종수가 걸음을 옮겨 거리를 좁히며 말을 이었다.

“예?”

 

곁눈질로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그가 그대로 고개를 틀어 기상호와 입을 맞췄다. 가볍게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붙었다. 최종수가 살짝 물기 어린 입술을 얕게 머금곤 키스를 종용하기 시작했다. 곧 떨어져 나가겠거니 하고 웃고만 있던 기상호의 몸이 당황으로 흠칫 떨렸다. 최종수가 괜찮다는 양 그의 볼을 검지로 톡 건드리고는 다시금 입술을 잘게 물었다. 끈질긴 요구에 끝끝내 기상호가 백기를 들곤 뻣뻣하게 굳었던 팔을 들어 최종수의 어깨를 잡았다. 각자의 손으로 들고 있던 우산들이 대충 겹쳐진 아래에서 입술이 수없이 붙었다 떨어졌다. 서로의 우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얼굴을 적시고 윤곽을 따라 흐르기 시작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빗물의 맛을 느껴야만 했다. 레몬 맛도 사탕 맛도 아닌 그냥 밍밍한 물맛. 은은하게 반짝이는 야경 앞에서의 밍밍한 맛의 키스. 서로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절대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종수햄.

응.

다음에 또 같이 와 줄 거예요?

그래. 또 오자.

…좋아해요. 진짜, 많이.

나도. 아니다. 난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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