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쫑] 그래도 나랑만 해

[가비지타임/규쫑] 그래도 나랑만 해 - 1

규쫑 by 썬칩
49
0
0

* 『이런 건 나랑만 해』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해당 시리즈를 봐주시는 편이 흐름을 이해하시기에는 더 좋습니다!

* 『이런 건 나랑만 해』 소장본 외전 이후 이어지는 내용이나, 외전을 안보셔도 이해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외전에는 반지를 준비하는 종수가 짧게 등장합니다 ^^)9

* 종수 어머니에 대한 날조가 있습니다. 성함을 '유수아'로 생각 중입니다.

* 내용은 완결 후 전체 분량 퇴고에 따라 수정될 수 있습니다~!

종수는 캐리어를 앞에 두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단연코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짐 싸기였다.

스스로 장애물이 있으면 더 불타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오만이었다. 세상엔 자신만의 힘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장애물도 있었다. 종수는 그 사실을 이번에 절절히 깨달았다.

결혼을 생각했고, 신혼집을 턱 하니 구해온 이규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어 기세 좋게 서프라이즈를 결심하긴 했지만─이규와 함께한다면 그가 다 하고야 말 테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렇게 준비해야 하는 게 많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반지를 준비하려고 보니 제 눈엔 다 똑같아 보였다. 예복을 준비하려고 보니 이규의 옷 사이즈를 정확히 몰랐다. 이규의 옷을 입으면 조금 낙낙하다는 것 정도가 종수가 알고 있는 것이 다였다. 신발도 대충 운동화는 같이 신을 정도가 되지만, 구두는 미묘하게 불편하다는 것만 알았다. 이 정도의 애매한 정보로는 할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커플링을 빌미로 그의 반지 사이즈를 알게 된 건 천운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다른 건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물어보자니 너무 뭔가를 꾸미는 티가 났다. 그래서인지 종수는 지난 몇 달간 정말이지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이규가 일이 있어 집을 비우면 신발장에 있는 그의 신발을 모조리 꺼내 사이즈를 확인했다. 액세서리 함을 뒤져 이규가 약지에 끼곤 했던 반지가 자신의 몇 번째 손가락에 맞는지 체크했다. 슈트 사이즈를 하나하나 확인해 기록했다. 수아가 제가 없는 사이 이규에게 양복을 맞춰주고 싶다며 테일러 샵에 데리고 간 기록이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건 또 처음 아는 사실이었다. 이규와 엄마가 친한 건 좋았지만 제가 모르는 사실이 있어서는 안 됐다. 결국 이글거리는 마음을 참지 못해 왜 저 몰래 이규만 데리고 갔냐고 항변했다 등짝을 맞았고, 제 양복도 거기서 맞춰서 온다는 걸 알았을 때는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이규는 너 사이즈 다 알고 있더라, 얘. 같은 말을 들어 더 그랬다.

아무튼 그 옷을 맞춘 지는 일 년쯤 돼서, 그때의 옷이 지금도 잘 맞는지 봐야 한다는 게 수아가 종수에게 준 미션이었다. 이규라면 뭔가 그럴싸한 상황을 만들어서─예를 들면 레스토랑 예약 같은─ 양복을 입혔을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그럴 성정이 못됐다. 그것보다는 막무가내로 양복을 입혀보는 게 더 자신다웠다. 그래서 다짜고짜 이규한테 그때 맞췄다던 옷을 입으라고 강요했다. 엄마가 너 옷 사줬다는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같은 게 빌미였다. 다행히 이규는 눈을 몇 번 끔뻑이다가 너 미국에 있을 때 맞춰 주신 거라 말할 타이밍이 안 맞았나 보다. 하고는 순순히 옷을 입어줬다.

드레스룸까지 따라 들어가서 지켜보고 있자, 보고 있게? 같은 질문이 들려왔다. 잘 맞는지 보려면 그게 나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이규가 피식 웃더니 순순히 옷을 벗고 셔츠며 바지, 재킷을 꺼내 걸쳤다.

하나하나 입을 때마다 착 감기는 옷이 예뻤다. 엄마가 진짜 잘하는 데 가서 맞췄다고 하더니 그렇게 말할만한 곳 같았다. 종수는 까만 정장을 걸친 이규를 집요하고 자세히 훑었다. 셔츠가 조금 작아진 것 말고는 다행히 별다른 게 없어 보였다. 팔을 이리저리 들며 살펴봤는데도 그랬다. 그 후에는 넥타이를 매는 이규가 야해서 아직 묶이지도 않은 천을 끌어당겨 입술을 부벼야 했고, 어떠냐는 질문에 셔츠는 좀 작아졌네? 라고 답을 했다가……. 이규가 너가 만져줘서 가슴이 커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그대로 옷을 벗긴 채 진탕 뒹굴었었다.

좋았지……. 종수가 그때를 떠올리다가 금세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추억여행을 떠날 때가 아니었다. 그때도 좋았지만, 며칠 뒤면 더 좋을 거였다.

아무튼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준비는 어찌저찌 잘 끝냈다. 예복 색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블랙은 역시 평소에도 본 거라 백 정장을 선택했다. 구두도 마찬가지로 화이트로 골랐다. 행커치프나 커프스 같은 것들도 모두 꼼꼼히 살폈다. 대체로 수아의 도움을 받았지만, 면사포만은 종수가 이규의 사진을 켜놓고 들여다보며 고심해서 결정했다. 이것저것 준비하면서 본 결혼사진 중에, 하나의 면사포 아래에서 맞대고 찍은 사진이 예뻐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규는 예쁘장하니까 까끌까끌한 머리를 하고 있더라도, 그 위에 얹어놓으면 잘 어울릴 것만 같았다.

이렇게 잔뜩 고르고 나니 양이 꽤 됐다. 당연히 캐리어에 담아갈 수 없었다. 이 정도 부피라면 집에 둘 수도 없을 정도여서, 부모님 집에서 잘 포장해서 미국으로 먼저 보내뒀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연락도 받았다. 같은 팀에서 뛰었던, 마찬가지로 남편이 있어 이것저것 알려줬던 동료가 도움을 주기로 해서 참 다행이었다.

결혼 증명서 신청이나 식 예약, 스냅샷 촬영 같은 것도 그가 알려주고 도와준 거였다. 이규는 절대 모르는 일이겠지만, 종수는 두 달 전에 시차까지 맞춰 홈페이지에 접속해 원하는 시간대에 예약을 몽땅 마치기까지 했다. 모든 건 준비 완료였고, 이제 진짜 결혼만 하면 됐다. 여기까지도 정말 정말 힘들었지만 괜찮았다.

문제는 반지를 직접 챙겨야 했다는 거고, 반지가 한 개가 아닌 세 개였다는 거고, 캐리어에 넣자니 분실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됐고, 가방에 들고 타자니 이규에게 들키면 어쩌나 하는 불안에 좀처럼 마음을 정하기 힘들다는 거였다. 종수는 반지 케이스와 캐리어와 가지고 다닐 스포츠 백을 나란히 놓고 치열하게 고민했다.

사실 이것 말고도 걱정이야 많았다. 막상 갈 때가 되니 골라뒀던 프러포즈 장소가 괜찮은지도 걱정이 됐고, 이규가 혹시나 만에 하나 정말로 결혼까지 생각을 안 한 거면 어쩌나 하는 것도 걱정이 됐다. 요즘엔 결혼에는 딱히 생각이 없고 오래 사귄 상태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는 소리를 들어서 더 그랬다.

이규가 너무 좋은 애라 더 고민이 되는 것만 같았다. 걔라면 결혼을 원하지 않는대도, 제가 원한다는 이유로 해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원하지는 않았다. 이규도 자신과 꼭 함께하고 싶어서 결혼을 결심했으면 했다.

이런 생각을 매일 하다 보니 스트레스에 속이 쿡쿡 쑤셨다. 잠도 안 왔다. 이규가 매 순간 걱정하는 걸 알았지만, 이건 이규의 따끈한 몸이 있어도 해결이 되지 않는 거였다. 당연했다. 이규의 팔을 베거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그의 체온이며 심장박동을 느끼고 있노라면, 혹시 모를, 이 모든 게 사라질 미래를 상상하게 됐다.

종수는 너무 좋아서 무서워질 수도 있다는 걸, 이규 덕에 또 새로이 알게 됐다.

“하아…….”

한숨을 크게 내쉰 종수가 얼굴을 벅벅 쓸었다.

종수의 인생은 크게 농구와 이규로 구성됐다. 둘 다 정말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농구를 좋아해서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 자잘한 부상도 있었지만, 그래도 다시 농구를 못할지 걱정에 잠을 못 이루지는 않았다. 농구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으니, 자신이 잘 쉬고 열심히 재활해서 다시 달려가면 됐다.

하지만 이규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제 옆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러길 바라지만, 그라면 한번 뱉은 말은 계속 지켜줄 거라고도 믿지만, 그도 사람이기에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르는 거였다. 종수로서는 드문 걱정이었다.

이 모든 건 프러포즈 장소나 방법을 검색하며 자연스레 보게 됐던 파혼 썰들 때문이었다. 그게 종수의 마음을 시시때때로 심란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진짜 별의별 이유로 결혼을 준비하다 남남이 됐다. 의견 차이로 갈라서는 건 예삿일이고, 식장까지 잡았다가 시부모나 친정 부모와 트러블이 생겨 갈라서고, 신혼집 가구를 다 들여놓고도 신혼여행에서 싸우는 바람에 갈라섰다. 개중에는 10년, 15년을 사귄 사이도 허다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함께했든 간에, 남남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종수는 이규와의 관계가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다. 다툼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크지 않았다. 그런 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편안함이 더 컸다. 이규는 투쟁과 증명의 연속이던 제 삶에서 처음 가지게 된 평화였다. 종수는 그게 참 소중했다. 그런데 보아하니 결혼이라는 건 이런 안정적인 삶에 큰 파동을 불러일으킬 만큼 큰 사건 같았다. 성공한 얘기만큼 많은 실패 사례를 접하다보니 스스로가 잔잔하고 평화로운 수면에 괜한 풍랑을 일으키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태풍이라는 별명이 아까울 정도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아아……. 다시 한번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쉰 종수가 알림창이 깜빡이는 핸드폰을 들었다. 이규에게서 장을 다 봤으니 출발한다는 연락이 와 있었다.

결국 오늘도 실패였다. 종수는 결국 반지 케이스를 적당한 까만 봉지에 넣어,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 놓은 뒤 캐리어를 닫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고민이 되는지 억울할 지경이었다.

 

 

* * *

 

 

“종수.”

“……으응.”

“이제 곧 착륙이래.”

종수가 비몽사몽 안대를 벗고 눈을 떴다. 이규가 웃으며 물었다.

“잘 잤어?”

“응…….”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종수에게 이규가 물을 내밀었다. 종수가 손을 뻗어 물을 받았다. 몸 위에서 덮은 기억이 없는 기내용 담요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종수가 잠시 멈칫하고는 단숨에 물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 후에 기지개를 한번 켜고는 괜히 담요를 다시 덮었다. 이규의 애정이 좋아서 그랬다. 그걸 본 이규가 종수의 손을 잡아 왔다. 담요 안에 있어서인지 차갑지는 않았다.

“추워?”

“아니.”

종수가 이규에게 가만히 손을 내줬다. 이규가 그의 손을 조물거렸다. 종수는 따끈따끈한 이규의 손길을 느끼며 또다시 결혼에 대한 결심을 굳혔다.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담요를 덮은 건 처음이었다. 굳이 담요 같은 게 필요하냐는 생각에 혼자서는 대충 바람막이나 덮고 있었다. 하지만 이규가 요청해서 받았을 담요는 꼭 그처럼 포근했다. 되기만 한다면 가지고 가고 싶어질 정도였다. 이규가 노곤하게 풀어진 얼굴을 한 종수를 보고 입을 열었다.

“그거 하나 살까?”

“응?”

“담요. 요즘은 살 수 있다더라.”

종수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규가 종수의 손에 슬쩍 입술을 부비더니 말갛게 웃어 보였다.

“우리 잔디밭에 누워있을 때 덮으면 좋겠다. 그치.”

종수가 주변을 살피고는 이규의 얼굴에 꾹 입술을 눌렀다 뗐다.

“응. 좋아.”

종수의 입맞춤을 받은 이규가 또 환하게 웃었다. 종수는 괜히 심장이 간지러워, 그의 비니를 쭉 잡아 내렸다. 이규의 눈이 쑥 가려졌다.

“읏, 종수우…….”

이규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게 또 귀여워서 종수가 비니 위에 다시 꾹꾹 입술 도장을 찍었다.

이규는 기분이 좋았다. 내내 못 자는 것 같던 종수가 졸려 하길래 냉큼 안대를 받아다 건넸다. 자는데 몸을 움츠리길래 담요도 덮어줬다. 자는 종수의 얼굴을 보다가, 저장해 둔 영상을 좀 보다가, 또 종수를 보고, 같이 자다 깨서 옆에 있는 사랑을 확인하고, 그런 시간이 좋았다. 비행시간이 길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짧게 느껴지는 순간이 벅찼다. 착륙할 때쯤 깨웠더니 몽롱한 눈동자가 저를 중심으로 단단히 맺히는 게 뿌듯했다. 물 마시는 것도 예뻤다. 그 마음을 못 이겨서 손등에 입술을 부볐더니 뽀뽀를 해줬다. 무려 세 번이나. 돈을 더 주고 퍼스트클래스로 끊은 보람이 있었다.

“넌 뭐 했어.”

종수가 물었다. 이규가 비니를 올리며 답했다.

“뭐, 브이로그 보고.”

“브이로그?”

“샌프란시스코 여행.”

그러고는 고개를 들이밀어 종수와 코를 부볐다. 종수가 낮게 웃었다.

“너도 보고.”

“나는 왜 봐.”

“침 흘리나 안 흘리나 봤어.”

그 말에 종수가 이규를 밀쳤다. 이규가 몸을 물리고는 파하하 웃었다. 종수가 입가를 팔로 문질러 닦았다. 이규가 종수의 거친 손길을 제지하고, 그 손을 맞잡으며 덧붙였다.

“안 흘렸어.”

“……너.”

종수가 이규를 노려봤다. 이규는 그 반응에도 여전히 헤실거리며 달콤한 말을 잔뜩 쏟아냈다.

“흘렸으면 뽀뽀해 줬을 거야.”

“여기 비행기 안인데.”

“너는 뽀뽀했잖아.”

먼저 간지럽게 굴지를 말든가. 종수의 눈에 힘이 더 들어갔다. 이규가 그 매서운 눈을 보고도 큭큭대며 종수의 손을 지분댔다.

“빨리 내렸으면 좋겠다.”

“어.”

무뚝뚝한 종수의 대답을 듣고도, 이규는 종수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뽀뽀 말고 키스하게. 그치.”

종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잡히지 않은 손을 꿈지럭대고, 이규의 손을 꾹 잡더니 결국 그를 밀어냈다. 이규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떨어져 나갔다. 종수가 약하게 씨근덕대며 이규를 바라봤다. 비행기만 아니었으면 당장 입술을 물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안달이 났다. 이규도 그걸 알아 제 속을 긁는 게 분명했다.

종수는 분했다. 역시 이규가 너무 좋았다. 머리 위에 올려둔 반지가 있는 가방이라도 다시 품에 안아야 이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았다. 빨리 프러포즈를 하고 이규를 더 완벽한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완전히 제 것이 된 이규.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뱃속이 찌잉 울렸다.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종수의 귓가가 붉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이규가 손을 댈 수밖에 없는 색에 말랑하고 따끈한 귓불을 만지다가, 결국 종수에게 손을 깨물렸다.

 

 

* * *

 

 

입국심사는 다행히 별문제가 없었다. 종수를 알아본 사람이 있었고, 덕분에 이규도 어영부영 잘 통과했다. 이규는 새삼 종수가 유명인이라는 걸 실감했다. 천하제일다운 면모였다. 빛나는 종수를 저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더 많이 알아가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다만 짐을 찾는 데는 여전히 한세월이 걸렸다.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수화물 찾기는 전용기를 타지 않는 이상 모두에게 평등했다. 한참이나 나오지 않는 짐을 기다리며, 화장실도 다녀오고 양치도 했다. 그러면서 종수는 반지를 가방에 들고 탔던 결정을 내심 뿌듯해했다. 캐리어에 넣었다면 수화물이 나오는 컨베이어 벨트 앞을 잠시라도 비우지 못했을 정도로 안절부절못했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 이규는 물론이거니와, 누구든 간에 캐리어에 뭔가 있나 보다 하고 의심했을 게 분명했다.

분명 함께 접수했는데 한참의 텀을 두고 나온 캐리어를 끌고 둘은 나란히 트램을 탔다. 그 후 렌터카 회사를 방문했다. 거기에도 사람은 여전히 많아서, 확인 후 수령까지 하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그런데도 이규가 함께 있어 그런지 지루하거나 따분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종수는 마음이 들떴다. 이규가 렌터카는 시내에서 픽업할 걸 그랬다며 곤란한 낯을 해도 그저 좋기만 했다. 이규만 있다면 지루한 현재는 평온한 일상이 됐고, 다가올 미래는 모두 기대가 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종수는 또다시 결혼을 결심했다. 이규와 함께라면 분명 평생 행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덕분에 렌터카에 탄 뒤, 썬탠이 잘 돼 있는 걸 확인하자마자 이규의 목덜미를 낚아채야만 했다. 열 몇 시간이 지난 뒤에야 탐하는 그의 숨결은 달콤했다. 아무리 들이켜도 부족했다. 나란히 양치한 덕에 같은 치약 맛이 나는 것도 좋아서, 종수는 이규를 몇 번이고 다시 끌어당겨 입술을 부딪쳤다. 이규가 그때마다 기꺼이 제 숨을 모두 내어주는 게, 종수의 마음을 더 들끓게 했다.

운전대는 이규가 잡았다. 내비게이션에는 숙소 주소를 찍고, 시동을 걸어 출발했다. 첫 숙소는 시내에 있는 에어비앤비였다. 호텔은 취사가 어려웠으므로 내린 결정이었다. 자신이 있는 샌프란시스코에서까지 종수에게 입에 안 맞는 음식을 계속 먹이고 싶지는 않은 이규의 고집이었다.

숙소까지 향하는 길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날씨 앱에서는 점심시간쯤에는 그친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숙소에 도착할 때쯤 비는 거의 멎어있었다.

차고에 주차를 마친 후 렌터카에서 먼저 내린 종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늘의 샌프란시스코는 바람이 덜한데도 추웠다. 비가 와서 그런 것 같았다. 이규가 시동을 끄고 종수를 따라 내렸다. 차 뒤쪽에서 종수를 본 이규가 웃으며 다가와 그를 꾹 껴안았다. 종수는 이규에게 양팔까지 꽁꽁 안겨서, 그가 몸을 움직이는 대로 몸을 흔들거렸다. 확실히 이규와 껴안고 있으니 서늘한 기운이 좀 가시는 것 같았다. 종수가 이규에게 제 무게를 좀 더 실었다. 그 묵직함에 낮게 웃은 이규가 물었다.

“추워?”

“싸늘해.”

“나갈 때 겉옷 챙겨야겠다.”

“응.”

그러고는 종수의 입술에 연거푸 입을 맞췄다. 종수는 이규의 입술을 내내 받아주다가, 이규가 잠시 떨어지는 타이밍에 맞춰 쪽 소리가 나게 입맞춤을 되돌려줬다. 이규가 눈꼬리를 더 크게 휘었다. 종수가 고개를 살짝 비틀어 이규의 입안을 파고들었다. 이규는 또 얌전하게 입을 벌렸다. 종수의 팔은 어느새 이규의 목덜미로 올라와 있었다.

둘은 센서 등이 몇 번이고 깜빡일 정도로 차고 구석에서 입술을 부볐다. 이규는 제 몸을 쥐고 있는 종수의 손에 힘이 좀 풀리고, 그의 눈매가 조금 나른해지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집 보러 갈까?”

종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이규를 꽈악 안았다. 이규도 그런 종수를 마주 안고 또 웃었다.

“안고 있으면 짐도 못 내리는데.”

“왜.”

“내 손이 다 너한테 가 있어서?”

종수는 이규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그를 놓아주지 않은 채로 요구했다.

“알아서 좀 해 봐.”

“나 혼자서 어떻게 해. 너가 도와줘야지이.”

이규는 어째 나이가 들수록 애교가 더 많아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종수는 이럴 때마다 이규가 약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었다. 종수가 결국 팔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못마땅한 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쳇.”

이규가 그 소리에 와하학 웃더니 종수와 거리를 벌렸다. 그러고는 뚱한 얼굴에 연신 입술을 부비며 속살댔다.

“봐주자.”

“뭘.”

“뭐든.”

“내가 왜.”

“그래야 안에 들어가서 마저 더 하지.”

종수가 턱에 힘을 잔뜩 줬다가 결국 이규의 입술을 깨물었다. 이규가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가, 또 금세 헤실거리는 낯을 했다. 종수는 그의 입안을 마음에 찰 만큼 또 거칠게 헤집고 나서야 이규를 놓아줬다.

그 후에야 트렁크 문을 열 수가 있었다. 둘은 캐리어를 끌고 집안을 향했다.

그렇게 들어선 집은 마당에 녹음이 가득한 깔끔하고 아담한 집이었다. 이규는 안에 들어오면 뭔가 더 할 것처럼 굴더니 주방이며 욕실을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종수는 대충 침실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와 슬쩍 가방을 열어 반지를 확인했다. 이규와 입술을 부비는 사이에도 마음 한쪽을 무겁게 했던 존재는 다행히도 얌전하고 안전하게 존재 중이었다. 내내 가방에 품고 있던 것이었는데도 걱정이 돼 견딜 수가 없었다. 젠장. 종수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게 뭐라고 결승 경기보다도 더 떨렸다. 이규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종수. 여기 거실 봤어? 날 맑으면 진짜 예쁠 것 같애.”

들뜬 목소리에 종수가 후다닥 가방의 지퍼를 잠갔다. 그리고 이규의 말에는 답도 하지 않은 채, 아무렇지 않은 척 이규를 돌아보고 말했다.

“밥 먹으러 가자.”

“응. 배고프다.”

이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종수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차이나타운 갈 거지?”

이규는 뒤이은 종수의 말에도 긍정을 표했다. 좀 피곤하다고 잤다가는 시차 적응을 못 할 게 뻔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럴 바에야 첫날에 좀 돌아다니고, 조금 이르게 잠자리에 드는 게 이후 일정을 위해서는 더 나았다.

“그래야겠지? 너 겉옷도 챙기자.”

“가방에 있어.”

“아. 그럼 나만 챙기면 되네?”

이규가 서둘러 캐리어를 풀었다. 종수는 침대에 걸터앉아 동그란 이규의 머리통을 바라봤다. 다행히 제가 뭘 숨기고 있다는 건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역시 밥 얘기를 꺼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규가 뭐든 잘 먹이고 싶어 하는 애인인 것에, 종수는 새삼 감사했다.

 

 

* * *

 

 

숙소에서 나와서 늦은 점심을 먹으러 발걸음을 옮겼다. 오기 전에 함께 본 유튜브에서, 미국 첫 끼는 중식을 먹어야 적응이 된다는 말에 둘 다 묘하게 설득당한 탓이었다. 듣기로는 이곳이 미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차이나타운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검색한 뒤, 종수의 동료에게 교차 검증까지 마친 딤섬 집은 제법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웨이팅이 있었다. 점심을 먹기엔 늦은 시간대인데도 그랬다. 웨이팅 리스트에 이름을 적으며 물었더니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고, 20분쯤 기다리면 될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 둘은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새로운 가게를 찾아 이동하느니, 그냥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게 낫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규는 가게 가까운 곳에 선 채로 고개를 돌려 이곳저곳을 구경했고, 종수는 그런 이규를 지켜봤다. 종수와 눈이 마주친 이규가 입을 열었다.

“여기도 유명하면 웨이팅 있는 건 똑같네.”

“응. 그러게.”

꼭 본인도 이런 건 처음인 것만 같은 종수의 대꾸에 이규가 푸스스 웃었다.

“종수 너는 여기 있으면서 웨이팅 있는 집 안 가봤어?”

“굳이?”

“맛있는 거 먹으면 좋잖아.”

“굳이…….”

너도 없는데. 종수가 뒷말은 삼켜냈다. 이런 유명한 집에 관심을 가지고, 리뷰까지 확인한 후, 말그대로 굳이 찾아와서 기다리기까지 해서 먹는 것도 다 정성이었다. 정성은 들일 대상이 있어야 가치가 있었다. 종수의 관점에서 이런 일들은 모두 이규가 있어야지만 보람이 있었다. 이규가 없다면 모두 성가신 일들일 뿐이었다.

“그래도 나랑 오면 좋지?”

“응.”

다행히 그 말에는 당당하게 답할 수 있었다. 이규도 그 태도를 알아챘는지 종수의 머리를 사락사락 넘기며 말했다.

“다행이다.”

이규가 웃었다. 종수는 만족했다. 이규가 웃으면 저도 좋았다. 잠시 자리를 옮겨 사진을 찍자는 이규의 말에도 몽땅 어울려 줄 수 있을 만큼 좋았다.

이규가 사진을 찍자며 향한 골목에는 그라피티가 가득했다. 그 배경이 이규와 참 잘 어울렸다. 화려한 배경을 바탕으로 이규가 하자는 대로 가서 서 있고, 어떻게 좀 포즈를 취하고, 또 그가 잡아준 위치에서 그대로 이규의 단독 샷을 찍어주다가, 야무지게 챙겨온 삼각대로 나란히 서서 찍기까지 했다. 이규의 신나냐는 물음에 고개를 두세 번 끄덕일 정도로 종수는 마음이 들떴다. 정작 샌프란시스코에 살 때는 두어 번 겨우 와서 별 감흥 없어 돌아본 것이 다였는데, 이규와 오니 골목 하나하나가 다 즐거웠다. 종수는 심장께에 찰랑찰랑 차오르는 감정을 꾹꾹 누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럴 때마다 괜히 가방에 손이 가는 걸 참느라 힘이 들었다.

차례는 금세 돌아왔다. 호명하는 번호에 맞춰 들어선 식당은 굳이 비교하자면 회전 초밥집 같았다. 이리저리 다니는 카트에서 원하는 딤섬을 골라와 양껏 먹으면 됐다. 익숙한 딤섬은 물론이고, 뭔지 모를 것도 골라와서 먹었다. 대체로 다 맛있었다. 쌓여가는 빈 접시들을 보며 뿌듯함에 사진도 찍었다. 먹은 양에 비해 그렇게 비싼 가격도 아니었다. 외식비가 비싼 미국 땅에서, 그것도 그중에서 탑 쓰리 안에는 든다던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정도 양에 이정도 가격이면 아주 흡족했다.

딤섬을 한가득 먹고 나오니 몸이 후끈해졌다. 마침 흐렸던 날씨도 환히 개어서 촉촉하게 젖은 길바닥이 아니면 비가 왔는지도 모를 만큼 화창한 날이 되었다. 바람은 여전히 불었지만, 양지에선 챙겨 나온 웃옷을 벗을 정도로 햇볕이 내리쬐기도 했다. 종수도 오르는 체온에 입고 나온 바람막이를 벗어 가방에 넣었다. 겸사겸사 확인한 반지는 여전히 안전했다.

둘은 샌프란시스코의 거리를 말없이 거닐었다. 이규는 차를 가져오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쾌청한 하늘 아래로 마주하는 따뜻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았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거리가 더 반짝반짝 해 보이기도 했다.

이규는 이 거리에 있었을 어린 날의 종수를 잠시 생각했다. 그걸 함께하지 못한 게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예뻤을 텐데. 후회 같은 건 잘 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날씨도, 장소도, 종수도 모두 예쁘니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종수도 익숙한 듯 새로운 거리를 거닐며 생각했다. 한국으로 간 사이 크게 바뀌지 않은 동네 같은데도, 왜 이렇게 새로운 느낌이 드는지. 관광객의 마음이 들어서 그랬나, 싶다가도 문득 이규가 보고 싶던 나날들이 떠올라 고개를 돌렸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지내는 오랜 시간 동안 제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동료들과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종수는 제법 자주 혼자라는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이규가 제 옆에 없어서 그랬다.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태가 난다더니, 종수는 미국에 있는 내내 이규의 빈자리를 아주 크게 느꼈다. 중학생 때부터 내내 붙어 다녔으니 당연하다 싶기도 했다. 태평양 너머에서는 그가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제법 상실감이 컸던 것 같다고, 종수는 지금에서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고개만 돌리면 시선이 닿는 곳에, 이규가 있었다. 내내 이규를 그리워하게 만든 날씨 안에 그가 있었다.

역시 끝내주게 잘 어울렸다. 샌프란시스코는 영화 같은 구석이 있어 한 번쯤 관광을 해보고 싶다던 이규의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 종수에게는 이제 이국적으로 느끼지는 않는 풍경인데도, 이규가 있으니 느낌이 달랐다. 이규는 팔다리가 길고 패션 센스도 좋아서 그런지, 그가 이 공간을 거닐고 있으니 정말이지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눈을 마주치자 웃어주기까지 하니 더 그랬다. 역시 익숙한 거리가 새로운 건, 이규가 있기 때문이었다. 종수는 잠시 숨을 참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 좋아?”

이규가 코를 찡긋거리며 물었다. 종수는 대답하려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좋다고 말하려니 괜히 울컥하는 느낌이었다. 이규의 웃음이 종수가 이곳에서 생활하는 내내 옆에 있길 꿈꾸던 그것이라 더 그랬다.

역시 상상 같은 건 너무 빈약했다. 제가 지난날 내내 원하던 건 바로 이거였다. 매번 올 때마다 핸드폰에 이규의 사진을 가득 담아가도, 영상 통화를 해도, 그의 인스타를 매번 들여다봐도 실제의 이규를 눈앞에 뒀을 때의 충족감을 손톱만큼도 채우지 못했다.

종수는 머리칼을 흩어내는 바람을 느끼며, 문득 ‘힘들다’는 말을 체감했다.

종수에게 힘듦이란 대체로 육체적인 것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고 폐부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라, 목에서 넘어가는 침에 피 맛이 섞여 나는 것. 다음날 근육통으로 뻐근한 몸을 풀어주는 것. 그런 게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종수는 지난 세월 이규가 옆에 없어 힘들었다는 것을 실감해야만 했다. 그게 아니고서는 이규가 샌프란시스코 하늘 아래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이상한 느낌이 들 수는 없는 거였다. 그 당시에는 힘들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는데, 사실은 안 한 게 아니고 못 한 것 같기도 했다.

이규가 내내 속삭이던 힘들면 말해. 알겠지? 같은 말들이 비로소 이해가 갔다. 이규는 언제나 저보다도 제 마음을 더 잘 아는 애니까, 분명 어느 정도 눈치를 채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하지만 이걸 알아차린다고 바뀌는 건 없었다. 이미 그 시절은 지났다. 자신은 이규의 옆으로 돌아갔고, 지금은 이규와 함께 다시 이곳에 서 있었다. 그렇다면 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속은 메슥거리고 코끝이 찡한지, 종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냥 이규의 품에 코를 박고 싶었다. 그러면 다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종수는 울렁이는 속을 삼켜내며 겨우 손을 들어 이규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심상치 않은 종수의 상태를 말없이 살피던 이규가, 그 손길에 단숨에 종수와의 거리를 좁혔다.

“종수.”

“……응.”

잔뜩 매인 목소리가 나갔다. 이규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종수의 손을 잡고 조금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종수는 그 손을 꽉 부여잡고 그를 따라갔다. 어느새 눈앞에는 푸릇푸릇한 공원이 있었다. 이규는 빠르게 사람이 없고, 시야가 차단된 곳을 찾아냈다.

인적이 드문 곳에 도착한 뒤 숙어져 있던 종수의 고개를 살며시 들어 올렸다. 다시 들여다본 종수는 처음보다도 더 걱정되는 상태였다. 코가 빨갰다. 눈가도 촉촉했다. 이규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물었다. 주변에서는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안 좋은 일이라도 생각났어?”

종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눈에 먼지라도 들어갔어? 봐봐.”

이규가 종수를 꼼꼼하게 살폈다. 종수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코끝이 찡하고 매웠는데 이걸 터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이건 종수의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다.

이번 여행은 행복하기만 해야 했다. 이규에게 자신과 함께면 너도 좋을 거라고 보여줘야 했다. 그런데 이규와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바라지도 않는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아서, 종수는 그냥 말없이 팔을 벌렸다. 이규가 단숨에 종수를 껴안았다.

후우. 이규의 귓가로 종수의 뜨겁고 축축한 숨이 흩어졌다. 이규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종수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아야 했다.

종수는 오늘 정말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랜만에 오는 미국이라 그런지 눈빛에 그리움 같은 것도 있었다. 식당까지 가는 길 동안 종수가 이곳저곳 얘기를 해줬고, 이규는 그 모든 이야기를 꼼꼼히 들으며 제가 모르는 종수의 시간을 상상했다.

웨이팅이 조금 있었지만, 그사이에도 재미나게 놀았다. 보통 두어 장 찍고 됐어. 하는 종수가 말없이 끝까지 어울려 준 걸 보면 그도 만족스러웠던 게 분명했다. 게다가 둘이 함께 고른 딤섬 집도 맛있었다. 가격도 좋았다. 익숙한 맛이라 거부감이 있지도 않았다. 종수의 입에도 맞아 보여 역시 좋은 선택을 했던 거라 뿌듯해했다.

비가 다시 오면 택시를 타든 숙소로 돌아가 차를 가져오든 하려고 했지만, 다행히 날이 개었다.

종수의 말대로 샌프란시스코는 진짜 날씨가 좋았다. 바람은 딱 선선했고 햇볕은 따뜻했다. 그 아래의 종수는 참 예뻤다. 손을 잡고 이 거리를 거닐고 싶을 만큼. 그래서 이규는 종수의 손을 잡을지 말지, 잡아도 괜찮을지 따위를 고민하고 있었다. 해외라도 이만큼 덩치 큰 남자들이 손을 잡고 걸어 다니는 건 안 좋게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종수가 나름 유명인이라는 생각도 들어 더 걱정됐다. 종수가 들으면 또 걱정이 너무 많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규는 종수와 관련된 일에 걱정하지 않는 법을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종수가 걸음을 멈춘 거였다. 들여다봤더니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이규는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화창한 날씨 아래 있는 종수가 유독 위태로워 보여서 더 그랬다.

이규는 이럴 때마다 심장이 꾹꾹 조여들 듯 아팠다. 속상했다. 제가 모르는 곳에서, 제가 모르는 뭔가에 상처받았을 종수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속이 쓰렸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온기를 나눠주는 것밖에 없어서 더 그랬다. 귓가에 크흥 하는 종수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를 껴안은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종수도 이규의 목덜미에 고개를 더 부비며 파고들었다.

이규는 목덜미가 축축하지 않다는 사실에 그나마 안심했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정이 격해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이유를 알고 싶었다. 이규가 종수를 도닥이며 언제 다시 입을 열어야 할지 치열하게 분위기를 살폈다.

종수는 이규를 품에 안고 나서야 조금 진정했다. 이규가 물리적으로 가득 느껴진 탓이었다. 역시 이게 답이었다. 메슥거리던 속이 이규의 냄새로 가득 찼다. 혼자만의 자취방에서 이규의 향수를 뿌린 베개를 끌어안고 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규는 끌어안은 종수의 몸이 덜 들썩이는 것 같자, 그제야 조심스레 입을 뗐다.

“이제 좀 괜찮아?”

종수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목덜미에서 느껴졌다.

“얼굴은 좀 이따 볼까?”

조금 전 행동이 반복됐다. 이규가 종수를 더 끌어안았다.

“그럼 왜 그랬는지 물어도 돼?”

종수가 이번엔 고개를 저었다. 이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걱정되는 상황에서도 어리광을 부리는 종수는 귀여웠다. 머리를 한참 부볐으니 나중에 앞머리를 정리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걱정되는데.”

이규가 손을 들어 복슬복슬한 종수의 머리칼을 손으로 얽었다. 종수는 참 뒤통수도 동글동글하고 귀여웠다. 어머님이 뒤통수를 예쁘게 만들어 주고 싶어 내내 굴려 가며 재우셨다는 데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종수는 이규의 커다란 손이나 단단한 손끝이 두피를 어루만져 주는 게 좋아서, 좀 더 이규를 끌어안았다. 이규의 목덜미에 또다시 코를 부볐다. 이규의 체향과 섞인 향수 냄새가 더 진하게 났다.

“응? 진짜 말 안 해줄 거야?”

이규도 다시 종수를 졸랐다. 종수가 이규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놨다를 반복하다, 목을 몇 번이고 가다듬고는 말했다.

“……별로 걱정할 건 아냐.”

“내가 너 일인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좀 덜 해 봐.”

“못 해.”

“왜 못 하는데?”

“좋아하니까.”

이규의 말에 꼬박꼬박 반박하던 종수가 잠시 답을 멈췄다. 그러고는 작게 꿍얼댔다.

“……흥.”

품에 안긴 커다란 덩치와는 달리 작고 귀여운 소리에 이규가 몸을 잘게 떨며 웃었다. 웃음기가 섞인 달콤한 목소리가 종수의 귓가로 날아들었다.

“나는 너가 종이에 손 베어도 걱정해.”

“걱정이 과해.”

“너 한정이야.”

종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에게만 그러는 거라니, 계속 모르는 척하기에는 지나치게 달콤한 말이었다. 종수는 결국 오늘도 보드랍고 간지러운 이규를 이길 수는 없었다. 이규의 등 위에서 한참이나 손을 꼼질대던 종수가 입을 열었다.

“너랑,”

“응.”

종수가 다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답했다.

“그냥, 너랑 여기 있는 게 좋아서 그래.”

“응. 나도.”

이규가 종수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며 답했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질 종수의 말을 기다렸다. 종수도 이규가 제 말을 기다린다는 걸 알아 입술을 달싹이다가, 자그맣게 덧붙였다.

“……그게 다야.”

틀린 말은 아니었고,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규는 그런 저를 한심해하지 않을 거고, 오히려 걱정해 주겠지만……. 역시 안 그래도 걱정이 많은 그에게 뭘 더 얹어주고 싶지 않았다.

“진짜?”

“어.”

종수의 말이 거짓은 아닐 터였다. 뭔가 다른 이유가 더 있다고 하더라도, 이규는 지금이 물러날 때임을 직감했다. 이규는 몸에 바짝 들어있던 긴장이 비로소 풀리는 것만 같았다. 괜히 품에 안긴 종수에게 제 몸을 더 기댔다.

“하아. 종수.”

“왜.”

“나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뭐가.”

이규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면서도 종수가 괜히 툴툴거렸다. 이번엔 이규가 종수의 고개에 얼굴을 부볐다. 개 같아. 그렇게 생각한 종수가 손을 올려 이규의 비니 위를 벅벅 쓰다듬었다. 비니가 이리저리 벗겨지기 직전으로 흐트러졌다. 거친 애정이 가득한 손길에 이규가 웃음을 터뜨렸다. 한층 가볍고 즐거워진 목소리가 종수의 귓가에 날아들었다.

“애인이 이렇게 울보라 어쩌지.”

“안 울었거든?”

“울 것 같았잖아.”

종수가 잠시 뜸을 들였다. 울 것 같은 상황이긴 했다. 생리적인 반응이 딱 울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찔끔 정도가 다였다. 그것도 닦아낼 필요도 없는 아주 작은 양이었다. 아무튼 울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울지는 않았어.”

“으응.”

“안 울었다고.”

“원래 나이가 들면 감성이 풍부해진대.”

“아니라고.”

종수가 껴안고 있던 이규의 머리통을 꽉 쥐었다. 이규가 부러 아야야 소리를 냈다. 그제야 종수가 손에 힘을 풀었다. 이규가 키득거리며 대꾸했다.

“응. 알겠어.”

“너.”

“응~”

“짜증 나게 굴지 마.”

“하하. 너가 먼저 내 심장 떨어뜨려 놨잖아.”

흥. 하고 작게 중얼거린 종수가 이규의 어깨를 와그작 깨물었다.

“귀여우면 다야?”

“뭐?”

이규가 몸을 떼고 주위를 슥슥 둘러보더니 종수에게 쪽 입을 맞췄다 떨어졌다. 종수가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에 참지 못하고 눈가에도 입술을 꾹 눌렀다 뗀 이규가, 종수의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다시 입을 열었다.

“종수.”

“응.”

종수는 제 눈을 차분히 들여다보는 이규와 똑바로 눈을 맞췄다. 서로의 눈에 서로만이 맺히는 게 좋았다. 여기가 샌프란시스코라서 더 그랬다. 종수가 삐딱하게 흐트러진 이규의 비니를 다시 고쳐 씌웠다.

“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 꼭 말해야 돼. 알겠지?”

“……응.”

종수가 괜히 뜨끔해서는 작게 답했다. 역시 이규는 자신은 몰랐던 뭔가를 알아채고 있었던 게 분명한 것 같았다. 종수가 손을 내려 이규의 등을 더듬었다. 이규는 그걸로도 안심되지 않는지 한마디를 덧붙였다.

“마음이 힘든 일도 마찬가지야. 알지?”

“알아.”

“말만 알겠다고 하지 말고.”

이규가 또 눈썹을 늘어뜨리고 말했다. 종수가 참 못 이기는 표정이었다. 종수는 이럴 때마다 이규가 제법 여우 같다고 느꼈다. 앙큼하고 치사했다.

문득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이라는 상용구가 문득 종수의 머릿속을 스쳤다. 토끼 같은 자식은 없어도 되지만 여우 같은 마누라는 좀 갖고 싶었다. 그렇게 만들고 싶은 상대가 눈앞에 있었다. 종수는 또 마음이 술렁였다. 역시 이규가 좋았다. 이규가 평생 제 것이 되었으면 했다. 하지만 지금 그 얘기를 할 수는 없어서, 종수는 또 너무 좋아서 거칠어진 마음을 내보였다.

“내가 애야?”

“으음…….”

그 말에는 이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종수를 바라봤다. 종수는 이규가 제 계획 같은 걸 알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지레 찔리는 마음에 눈에 힘을 줬다.

“왜 답이 없어.”

이규의 등을 퍽 때리기도 했다. 이규가 클클 웃으며 종수를 다시 끌어안았다.

“그런 면이 귀엽지.”

“뭐라고?”

종수가 또 날을 세운 목소리를 냈다. 이규는 그 기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종수의 귓가에 간지럽게 속삭였다.

“너 좋다고.”

품에 안긴 종수의 몸에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이규가 다시 낮게 웃었다. 역시 이런 면이 귀여웠다. 너무 좋으면 그걸 못 이기고 틱틱대는 거. 그리고 찔리는 게 있으면 대답 소리가 작아진다는 점. 이규가 품에 꽉 찬 종수를 온전히 느끼며, 오늘 밤에 한 번 더 종수에게 그 이유를 물어야겠다 다짐했다. 어떤 애교와 어떤 아양이 먹힐지는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겠지만, 아무튼 이규는 종수의 이런 부분을 모른 척 지나칠 수는 없었다.

[후기]

안녕하세요!! 썬칩입니다.

드디어 다음 편을 들고 왔네요 ! !!!! ㅋㅎㅋㅋ 두 달 간 왜이렇게 뭐가 없었냐! 팽팽 놀았냐! 물으시면... 사실 놀지는 못했고요(ㅋ하아~!) 규쫑 게북 원고를 했고, 2권 분량도 제법 썼는데 다 뒷내용을 써 버려가지구... 들고 오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리고야 말았습니다(따단!)

2권은 쫑수의 우당탕탕 프러포즈 도전기 + 간단한 결혼식 ^^ 까지 해서 생각 중인데 제가 이 모든 내용을 400p 안에 완결 낼 수 있기를 정말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흑흑

저번 연재는 정말 많은 분들이 댓글로 응원해주셔서 ㅠ.ㅠ)9! 힘내서 끝까지 달릴 수 있었어요!! 이번에도 같이 달리실 파티원(ㅎ) 구해봅니다 ^^)7

다음 편도 조만간 써서 슝슝 가져오겠습니다요 ><~!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커플링
#규쫑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