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석현성] 만남은 짧고 그리움은 길다 (上)

대학생 형현 / 롱디는 언제나 어렵다

GarbageTime by 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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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 10,677자

- 롱디(미국-수원) 중 조형석을 찾아가는 이현성

- 분위기, 내용 상 필요한 부분은 영어 원어가 기재 되었으며 번역은 자연스러운 이해를 위해 의역되었습니다!

-p사이트 재업

- Good evening, ladies and gentlemen. Welcome on board. It is a pleasure to have you with us.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과 여행길을 함께 할 수 있어 기쁩니다. 탑승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 비행기는 이륙 준비를 마쳤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던 조형석은 안내 방송이 들리자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 드디어 비행기가 떠오를 시간이다. 다른 말로 하면, NCAA 디비전1을 위해 떠날 때가 왔다. 그토록 기다리던 미국 대학 1부 리그가 눈앞에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바라온 일이었지만,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더 큰 물에서도 농구를 여전히 잘할 수 있을까. 성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조형석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조형석은 주머니에 따로 챙겨놓은 지갑을 꺼냈다. 그 안에는 증명사진 하나가 있다. 살짝 치켜 올라간 듯한 눈썹과 처진 눈매, 무표정임에도 어쩐지 장난기가 남아있는 입. 자꾸만 뜯어보게 되는 그 얼굴의 주인은 이현성. 햇수로만 따지면 벌써 만난 지 3년이 넘어가는 사이였다.

  서울과 부산. 꽤나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 3년 간의 연애를 해온 두 사람은 대학생이 되면 조금 더 붙어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왔었지만. 조형석은 가라앉은 눈으로 증명사진을 매만졌다.

  어떡하지. 벌써 보고 싶은데.

  조형석의 미국행이 결정되던 날. 이현성의 반응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사실 두 사람 모두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하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나 농구가 1순위가 되고 서로는 2순위인 삶.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결정을 했으니 할 수 있는 건 미래를 응원하는 것뿐이었다. 언제나처럼 결정과 다짐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조형석은 그 자연스러움이 자꾸만 불안했다.

  두 사람이 사귀기 시작한 것은 17살, 너무나도 어린 나이. 운동부 남고생다운 성질머리 때문인지 사소한 일로도 치고받고 싸웠지만, 어떻게든 함께 있기 위해 서로 노력해왔었다. 훈련 시간을 빼고는 틈만 나면 연락했었고, 부득이하게 연락이 안 되는 날엔 자기 전에 길게 통화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었다. 그래도 마음이 식는 일은 없었다. 매일 통화를 하고, 종일 메시지를 남겨놓고, 가끔 사진도 보내놓고. 둘은 서로에게 부지런했고 가끔은 서로가 사는 지역으로 찾아가 데이트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서울과 부산은 멀었지만 한국과 미국에 비하면 먼 것도 아니었다. 이현성도 선조대에 입학하면 더 큰 세상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텐데. 그때도 내가 여전히 현성이의 마음에 남아있을 수 있을까?

  조형석이 불안함에 자꾸만 이현성의 사진을 만지는 사이, 비행기는 조금씩 흔들리며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땅에 발을 딛고 있다는 안정감이 사라진 구름 위. 조형석이 탄 비행기는 자꾸만 땅에서 멀어져만 갔다. 꼭 영원히 돌아올 수 없을 것처럼.

***

- ♩♫♩♬

  새벽 6시. 미리 맞춰놓은 알람이 울리자 이현성은 번쩍 눈을 떴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이 눈꺼풀이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닌지, 피로감에 눈이 감겨왔지만 그래도 이 짓을 두 달째 하고 있어서 그런지 나름 버틸 만 했다. 이현성은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로 세수를 했다. 거울 앞에서 몇 번 머리를 매만지고 침대로 다시 돌아오자 여느 때처럼 영상통화가 걸려 오고 있었다.

  노트북 앞에 자리 잡은 이현성은 곧장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모니터에는 익숙한 잘난 얼굴이 하나 떠올랐다. 얼굴만큼이나 농구 실력도 잘난 애인 조형석. 누구 애인이길래 아침부터 이래 잘생깄노. 혼자 생각하며 피식 웃는 사이 조형석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 현성아, 좋은 아침~ 잘 잤어?

"엥간히 잤지. 니는?"

- 나는 현성이 없어서 잘 못 잤지..

"얼굴은 부은 거 다 보인다, 빙시야.“

  입에서는 퉁명스러운 장난이 나왔지만, 표정만큼은 잔뜩 풀어져 있는 것을 이현성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조형석도 그걸 아는지 모니터 앞에 바짝 얼굴을 내밀고 눈을 느리게 깜박거렸다.

- 아침부터 현성이 보니까 너무 좋다. 근데 나 진짜 얼굴 많이 부었어? 좀 못생겼나?

  그럴 리는 없었지만 이현성은 장난스럽게 팔짱을 낀 채 대꾸하지 않았다. 조형석은 신경이 쓰이는지 제 얼굴을 몇 번 만져보다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 아, 현성아. 나 여기서 안경 샀다? 한번 볼래? 쨘. 어때? 나 안경 쓴 게 나아, 안 쓴 게 나아?

"음. 옆으로 좀 가봐라."

- 응? 이렇게?

"어. 그래 가서 화면 밖까지 나가봐라. 그기 제일 낫네."

- 아.... 진짜.... 이현성 너무해...

  잔뜩 울상이 된 조형석을 보다가 이현성은 웃음기를 조금씩 거뒀다.

"조형석이."

- 응, 현성아.

"이리로 와봐라. 얼굴 좀 보자."

  무뚝뚝하고 낮은 목소리로, 애정을 담아서 하는 말에 조형석이 잠자코 화면을 바라봤다. 이현성은 아주 오랜만에 조형석의 얼굴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한국과 다르게 미국 인터넷은 너무도 느렸고, 심지어 잘 끊기기까지 했으니 이렇게라도 얼굴을 보는 것조차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 현성아, 잘 보여?

"그래. 얼굴이 뺀질하니 잘 보이네."

- 현성아. 이렇게 마주보고 있으니까 더 보고 싶어지는데. 어떡하지?

  조형석이 한손으로 턱을 괸 채 모니터 너머의 이현성을 지긋이 바라봤다. 현성아. 이현성. 내 애인님. 몇번을 자꾸만 불러봤다. 와 부르는데. 그래. 내 여 있다. 이현성이 꼬박꼬박 대답해줬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겨워 조형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 현성아. 나 안 보고 싶어? 나만 보고 싶어 하는 건 아니지?

"뭐라카노.. 나라고 왜 니가 안 보고싶겠노."

- 그러면 다행이고.. 나 계속 보고 싶어 해줘, 현성아.

  조형석이 은근한 애교를 섞어가며 말했다. 그 말에 이현성은 순간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사근사근한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서울 출신 애인의 말투는 평소처럼 간지러웠으나, 분위기가 평소와 뭔가 달랐다.

  이 새끼 무슨 일 생겼나? 벤치만 데우고 있어서 자존심이 상한 건가? 그렇다기엔 어제도 팔팔 뛰어다닌다는 이야기를 해줬는데. 여러 가설을 생각해보던 이현성은 자신의 답을 기다리는 얼굴에서 어떤 감정을 읽었다. 꼭 주인이 저를 두고 갈까 걱정하는 강아지 같은..

"조형석이. 니는 내를 그래 못 믿나."

- 못 믿는 게 아니라..

"내가 니 아니면 누굴 보고싶어한다고 그라노. 어이없구로.."

- 현성아아..

"쓰잘데기 없는 걱정 할 시간 있으면 볼이나 한번 더 튕기래이. 내도.."

  이현성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내도 니 마이 보고 싶은데 참고 있는 기다."

  이현성이 드물게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자, 조형석의 눈이 커졌다가, 눈썹이 한순간에 축 쳐졌다. 현성이는 보고 싶다는 말을 나름대로 참고 있었을 텐데. 이럴 때 옆에 있어 주지 못한다니.

  장거리 연애는 정말 쉽지 않다. 매일 봐도 또 보고 싶은 게 연인인데. 친구로도 부족하고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더 가까이 있고 싶어서 하는 게 연애인데. 이렇게 자꾸 멀리에서 그리워만 하고 있다니. 덕분에 둘 사이는 더 애틋해지긴 했지만, 조형석은 싸워도 좋으니 이현성과 가까이에 있고 싶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조형석만이 아니었다. 담담하게 말하는 이현성의 속도 말이 아니었으니까. 대학 생활은 정신없고 바빴지만 그 사이에도 또 어떻게 자꾸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자꾸 조형석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럴 때는 차라리 바쁜 게 고마웠다. 아니면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종일 우울해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세상은 참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레이업이나 덩크나 똑같은 2점인데 그 의미 없는 덩크를 하는 조형석에게 한 눈에 반해버린 것도. 조형석이 서울에 있으나 미국에 있으나 당장 못 만나는 건 똑같은데 같은 나라에 없다고 유난히 더 그리움이 차오른다는 것도. 가만히 연인의 얼굴을 뜯어보던 이현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방학 하면 용돈 모아가 니 보러 한 번 갈 기다. 그러니까 잘 기다려야 안하겠나."

  이어지는 말에 조형석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현성으로서는 조금 충동적인 발언이었다. 그래도, 마침 방학 동안 알바 제안이 하나 들어왔고.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고. 그렇다고 돈이 필요한 구석은 없으니. 조금만 열심히 일하고 미국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은 단순하게 흘렀다.

  조형석을 보고 싶다. 그러면 보러 가면 된다. 조형석이라는 하나의 결론만 있다면 생각이 복잡해질 필요도, 결정을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이현성에게 조형석은 항상 망설임의 이유를 지우는 사람이었다.

- 정말??? 현성아 진짜 여기로 올 거야??? 너한테 너무 무리될 것 같은데.. 힘들면 안 와도 돼.

"하이고.. 말이나 몬하면. 여물고 되는 날짜나 보내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얼굴은 이미 밝아져있는 조형석의 모습에 이현성은 조금 안심했다. 요즘따라 조형석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게 불안해서였구나 싶어서. 불안해한다면 그만큼 자신이 더 사랑해주면 될 일이다. 확신이 들 때까지.

***

  이른 아침, 조형석은 숙소에서 나가는 룸메이트에게 인사를 했다.

[자리 비워줘서 고마워. 잘 놀다와.]

[고맙긴 무슨. 좋은 시간 보내, 조!]

  조형석은 환하게 웃으며 친구를 배웅했다. 애인이 한국에서부터 온다는 이야기를 하자 룸메이트는 고맙게도 자리를 비워줬다. 조형석은 급하게 열쇠와 휴대폰을 챙겨 공항으로 향했다. 드디어 현성이를 만날 시간이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단숨에 공항으로 간 조형석은 도착 시간 30분 전부터 초조하게 비행기를 기다렸다. 잘 오고 있으려나? 연착되지는 않으려나? 너무 이른 시간부터 기다리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빨리 나오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동안 몇 달을 기다려왔는데. 고작 30분 정도 더 기다리는 거야 문제도 없었다.

  그리고 30시간 같은 30분이 지나. 드디어.

"...현성아."

"오야. 잘 지냈나, 석아."

  캐리어를 질질 끌고 온 이현성이 환하게 웃으며 걸어왔다. 살이 조금 빠져있거나, 아니면 오히려 근육이 조금 붙어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이현성은 조형석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그것이 괜히 애틋하고 서러워 조형석은 망설임없이 이현성에게 달려갔다.

"현성아아.. 진짜 너무 오랜만이다.. 너무 보고 싶었어."

"마이 배우고 오라고 보내놨드만 와 더 얼라가 됐노."

  이현성은 덩치 큰 몸을 구기며 안겨오는 조형석을 보며 타박했지만, 한손으로 조형석의 뒤통수를 쓰다듬어주었다. 조형석은 이현성을 더 세게 끌어안으며 웅얼거렸다.

"진짜 현성이라니. 너무 좋아, 현성아. 그동안 알바하느라 고생했어."

"오야.. 내가 진짜 미쳤었다.. 이현성 이 똘개이 새끼.. 조형석 하나 보러 가겠다고 잠 줄여가 돈 모으고 여권도 만들어보고."

"아이고. 배보다 배꼽이 컸네."

"글체."

"그래도 후회는 안하지?"

  조형석이 넌지시 물었다. 의도가 다분한 질문이었다. 무슨 대답을 기대하는지 뻔히 보여 이현성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도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니까, 조금 넘어가 주기로 했다.

"후회를 왜 하노. 니 봐가 좋은데."

"역시 현성이가 최고야."

  물론 매번 이런 식으로 이런저런 변명을 대가며 무르게 굴지만. 그건 조형석만 아는 사실이었다. 조형석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이현성을 잡아 끌었다.

  오늘은 미국까지 찾아와준 남자친구를 위해 여기저기 구경을 시켜줄 참이었다. 오늘을 위해 미리 계획해놓은 코스대로, 음식점과 카페를 찍고, 길거리 트럭에서 간식도 사주고, 너무 많이 먹어 소화가 안 된다고 해서 농구코트에 데려가서 원온원도 한 판 했다.

  이제 남은 목표는 단 한가지. 비어있는 숙소에 데려가서 함께 밤을 보내는 일이었다. 이날을 위해 미리 사둔 콘돔 박스를 떠올리며 조형석이 이현성의 손을 끌었다.

  모든 게 다 조형석의 계획대로였다. 단 하나만 빼고.

"Hey, Jo. You remember what I told ya, right? Make the decision and let me know whether you go on a blind date or not."

(이봐, 조. 저번에 내가 한 말 안 잊었지? 소개팅 갈 건지 아닌지 결정해서 알려줘.)

  숙소로 향하는 길 만난 금발머리의 여자가 일방적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같은 대학에 다녀서 얼굴을 알게 된 앤서니.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고,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도 크게 없었다. 조형석이 주위에 늘 이현성의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데, 이현성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고 있었으니 그것으로도 친분에 대해서는 말을 다 한 셈이다.

  생각해보니 저번에 쓸데없이 소개팅 이야기를 꺼내서 거절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워낙 친구가 많고 약속을 많이 잡는 사람이라 그런지 대답을 들었는데도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안 한다고 제대로 이야기를 한 번 더 얘기해야겠네. 번거로울 것 같은 예감에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 있는데.

"석아."

"응, 현성아. 빨리 갈까? 피곤하지?"

  조형석은 재빨리 이현성을 숙소로 데리고 들어갔다. 하지만 현관에 선 이현성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는 조형석의 팔을 밀어냈다. 조형석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현성의 표정을 살폈다. 이현성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데이트라캤나."

"어?"

"아까 그 가시나가 데이트하자카고 간 거 아니냐고."

  데이트라니. 소개팅(blind date)을 데이트로 들은 모양이었다. 조형석은 재빨리 변명했다.

"어? 아냐, 현성아. 오해야."

"지랄하지 마라. 내가 영어 몬한다고 그것까지 못 들어처먹을 줄 알았나."

"아니, 아니. 진짜 오해야. 저번에 소개팅 해준다는 거 거절했는데 또 물어보는 거야. 내가 다시 한번 거절할게."

  조형석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널 두고 데이트를 왜 해. 이현성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현성에게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조형석이 한참만에 다시 이현성의 이름을 부르려 할 때, 이현성에게서는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는 소개팅 그거 안하면 끝이가. 그냥 그게 끝이냐고."

  조형석이 무슨 대답을 내놓아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이현성을 안은 팔이 스르르 풀리자 이현성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찡그린 눈썹. 조금 촉촉해진 것 같은 눈과 이따금씩 찡긋거리는 코. 입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자꾸만 움찔거렸다. 이현성이 한참만에 말했다.

"지금 니는 뭐가 잘못인지 모르제? 소개팅 하라는 이야기 들은 거 와 내한테는 얘기도 안했노. 그냥 니만 알고 넘어가면 끝이가, 이 똘개이새끼야."

  이현성의 차가운 목소리가 뒤이어졌다. 니 내가 전에 사촌누나랑 카페 갔을 때 이상한 오해 했다 아이가. 그건 기억 안 나나. 그제서야 조형석은 이현성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하던 이현성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현성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렀다. 이현성은 당황한 듯 고개를 홱 돌렸고, 조형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조형석이 곧바로 이현성을 끌어안았다. 미안해, 현성아. 내가 잘못했어.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속삭이면서.

***

  벌써 2년도 더 된 일이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장거리 연애를 하던 고등학생 시절. 조형석이 이현성을 놀라게 해주겠다고 말도 없이 부산에 찾아왔던 건.

  하지만 하필 그날은 이현성이 사촌누나와 함께 카페를 가서 연애상담을 받던 때였고, 조형석은 이현성을 찾아 지상고등학교로 향하다가 이현성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 일로 두 사람은 대판 싸웠다.

- 이현성, 지금 나랑 뭐하자는 거야?

- 그거는 이 빙시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말도 없이 대뜸 부산까지 찾아와갖고 뭐하는긴데.

- 뭐? 지금 내가 찾아온 게 잘못이라는 거야?

- 그기 아니라, 하...

  끝없이 이어진 말싸움은 결국 첫번째 이별로 이어졌다. 사실 헤어질 이유는 없었다. 둘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있었던 건 단순한 오해였고, 대화를 하면서 서로 오해했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하지만 사람은 사랑하고 기대하는 만큼 실망도 더 크게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연애는 신뢰의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장거리 연애가 어렵다. 몸이 멀어진다고 마음이 무조건 멀어지지는 않지만, 상대가 나를 배려하고 있는지 의심이 한 번 들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다. 끊임없이 사랑한다고 확신을 줘도 불안해지는 것이다. 다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만남은 짧고 그리움은 길다. 실수는 짧고 후회는 길다. 장거리 연애는 정말 쉽지 않다. 때로는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을 관두게 되기도 한다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어느덧 따사롭던 빛이 사그라들고 창가로 어둠이 내려앉는 늦은 오후. 침대 위에 앉은 이현성이 차분히 말했다.

"내가 말했제. 니랑 두번 다시는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내는 이기적이고 성질머리가 드러워가 내가 오해하지 않게 니가 미리 말해줘야 한다고."

"맞아. 내가 잘못했어."

  조형석은 이현성의 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 첫 이별의 후폭풍을 호되게 겪은 후, 결국 다시 만나게 되면서 얼마나 다짐했던가. 사소한 오해도 만들지 않겠다고. 12시간이 넘는 시간을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거리에서 연애하는 이상, 사소한 것도 모두 서로에게 말해주고 신뢰를 쌓아줘야 한다고. 그게 당연한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으면서 결국 다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른 셈이니 몇 번이나 혼나도 부족했다. 조형석은 이현성의 어깨에 눈을 묻으며 웅얼거렸다.

"서운하게 해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미리 말했어야 하는데..."

"그래, 몇번을 쳐 말해야 알아듣겠노."

"웅... 잘못했어..."

  조형석이 얼굴을 이현성의 옷에 문지르며 점점 파고들었다. 이현성은 무겁다고 투덜대면서도 밀어내지는 않았다. 이미 화는 다 풀린지 오래고, 오랜만에 본 조형석은 평소보다 더 귀여웠으며, 만날 시간은 언제나 모자랐으니까. 둘은 아직 붙어 있어도 더 붙고 싶은 사이였다.

  물론 아까는 제대로 빡이 돌긴 했었다. 조형석 취향일 것 같이 생긴 외국여자애가 갑자기 데이트 뭐시기 하며 떠들고 있었으니까.

  최근 이현성을 만나지 못해 우울해하던 조형석을 보며 이현성 역시 한동안 불안해해야 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아니면 나에 대한 마음이 식었나. 그 사이에 나보다 더 잘 맞는 누군가를 만나면 어쩌나. 난 당장 조형석의 옆에 있어줄 수 없는데.

  그런 생각을 머리 한켠에 넣어두다 보니 아까 금발 여자를 만나자마자 그 불안함이 다시금 떠오르기 시작했다. 혹시 그동안 이상한 낌새가 보였던 건 저 여자 때문이었던 건가? 역시 사귀다 보니 남자는 별로여서?

 하지만 별 일 아닌 것으로 오해했다고 하니 다행이었고, 또 예전처럼 사소한 다툼이 큰 이별이 될까 봐 걱정했었는데 빨리 화해해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괘씸한 건 변함이 없어 괜히 심술을 더 부려볼까 싶었지만, 눈치 빠른 애인은 이현성의 화가 풀린 걸 알아차리고 또 애교를 부려대기 시작했다.

"근데 내가 너랑 사귀는 거 친한 애들은 다 안단 말이야. 안 친해도 알아. 맨날 네 사진 들여다 보고 있어서.. 아까 걔만 모르는 거야. 걔가 이상한 거란 말이야..."

"변명하고는. 또 기어오를라 하제. 아까처럼 얌전히만 있으면 을매나 좋노."

"알았어. 얌전히 현성이한테만 붙어 있을게. 음, 안 어렵네~ 난 그냥 원래 하던 대로만 하면 되겠다."

  조형석은 그렇게 말하며 이현성의 어깨에 조신히 머리를 기대왔다. 피식 웃으며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이현성은 고개를 내려 제 품에 들어온 조형석을 바라봤다. 이현성이 손을 들어 조형석의 머리카락을 툭툭 쓰다듬기 시작하자, 조형석은 잠깐 몸을 움찔하더니 이내 몸에 힘을 풀었다. 묵직한 무게가 이현성의 다리 위로 느껴졌다.

  어느새 조형석은 은근슬쩍 이현성의 허리에 손을 감아왔다. 은근히 매만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옷 안으로 손이 들어오고 있었다. 귓불부터 뒷목까지 잔뜩 붉어져서는 제 눈치를 살짝살짝 보는 모습에 이현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국에서 출발하면서부터 꿈꿔왔던 순간이다. 조형석과는 아무것도 안 하고 이렇게 함께 있기만 해도 충만감이 들었다. 이현성이 조형석의 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귀엽구로.."

"나 귀여워, 현성아?"

"얼라 같다는 뜻인데."

  그럼 현성이는 어린애랑 사귄다는 거야? 괜히 토라진 척을 하면서 그렇게 장난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조형석은 오히려 그 말에 씩 웃어보였다.

"마냥 애처럼 보이지는 않을 텐데?"

"뭐라카노. 정신 차리고...!"

  습관적으로 대꾸하던 이현성은 갑자기 높아진 시야에 놀라 조형석의 목을 붙잡았다. 순식간에 180cm이 넘는 성인 남성 하나를 들어올린 조형석이 능글맞게 웃었다.

"현성아, 나 그동안 운동 더 열심히 해서 몸 더 좋아졌는데. 확인해볼래?"

  조형석은 이현성을 들어올린 채로 그대로 입을 맞춰왔다. 촉촉한 입술이 맞닿자 입이 자연스럽게 열렸다. 두 사람 말고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정적인 공간 한가운데. 혀가 얽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와 이현성은 옅은 신음을 흘렸다. 더운 숨을 내뱉는 조형석을 보며 이현성이 침을 꿀꺽 삼켰다.

"뭘 할라캐도 일단 씻어야하지 않겠나, 석아. 좀 나와봐라."

"응, 나도 사랑해."

  이미 눈이 반쯤 풀린 조형석은 이현성의 볼과 턱에 짧은 키스를 몇번 남겼다. 이현성은 조형석을 뒤로 밀어냈다. 여전히 조형석에게 안겨 허공에 떠 있는 터라 별 소용은 없었지만.

"아니, 좀. 치아보라고. 아까 우리 농구하면서 땀 흘린 거 기억 안 나나!"

"나랑 마음이 통했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현성아. 뭘 하기 전에 일단 씻어야지."

  조형석은 이현성을 든 채로 그대로 욕실로 걸어갔다. 불투명한 샤워 부스 앞. 조형석이 이현성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물론 같이 씻으면 더 좋고."

  조형석은 싱긋 웃으며 벽에 붙은 샤워기를 켰다. 위에서 떨어지는 물이 옷과 몸을 적시는 동안, 둘은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긴 밤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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