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GHT or FLIGHT

FIGHT or FLIGHT 08

센티넬X센티넬 빵준

성준수는 눈을 떴다. 정수리에서부터 끈적한 액체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것이 느껴졌다. 시야가 온통 까맸다. 피부 위로 까끌까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산등성이 위로 달려가던 중 머리를 맞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아마도 정신을 잃기 전 누군가가 성준수에게 포대를 씌운 것 같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과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전에 없이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했다. 성준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머리가 아팠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신원 확인도 제대로 안 하고 막 받네, 이제? 그게 아니라…. 여러 개의 말소리가 뒤죽박죽 섞여서 들렸다. 성준수는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려 애썼다. 가슴이며 손목, 발목에 심한 압박이 느껴졌다.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의자에 묶여있다는 것을 쉬이 알 수 있었다. 차라리 숲속 포위망에 갇혀 달아나던 때가 나았다. 어디론가 도망칠 수도 없는 상태라는 것은 생각보다 본능적인 공포로 다가왔다. 전에 없던 긴장과 무력감에 잘게 몸이 떨렸다.

"깼네?"

욕이라도 시원하게 해주려 했는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하려 할 때마다 힘이 들어가는 목이 밧줄에 짓눌렸다. 포대 안에서 잔기침을 몇 번 하다가 이내 말하는 걸 포기했다. 저들은 아직까진 포대를 벗겨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막 기어들어 오고 그래, 응?"

"……."

"이번엔 또 어디서 보낸 놈일까? 전쟁통에 기자 보내는 정신  나간 방송국은 없을 테고."

"……."

"독단인가?"

잇달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준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준수가 아직 국가 소속 센티넬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계약 조항을 떠올렸다. 이능력 사용에는 제한이 없으나 상황에 따라 국가에 의한 어떠한 보호나 지원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민간인을 상대로 능력 사용 허가가 떨어진 예외적인 일이었다. 성준수는 지금이 이능력을 써도 괜찮을 시기인지를 가늠하려 했다. 그때 누군가가 얼굴 가까이 다가왔는지 포대 너머로 불쾌한 온기가 훅 끼쳐 들었다.

"현민 씨, 아니 이것도 가짜 이름인가?"

"……."

"마을 반대편으로 뛰어가던 게 뭘 아는 것 같아서. 배후만 불면 놓아줄게."

"……."

"우리 그렇게 막 무식하게 힘쓰고 그런 사람들 아녜요. 누가 보냈어?"

성준수는 웃었다. 허, 저 새끼 봐라, 막 웃네. 주위에 있는 사내들이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한동안 김빠진 웃음소리가 계속됐다. 성준수는 다시 잔기침에 웃음을 멈추었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자신을 소모품처럼 대우하던 국가가 좆 같았던 적이야 많지만, 그렇다고 사이비에 홀랑 넘어갈 만큼 충성심이 바닥난 것은 아니었다. 성준수는 고개를 빳빳이 처들었다. 목에 힘을 주자 압박감에 피가 고이는 것 같았다. 쇳소리가 섞여 나오는 목소리는 제가 듣기에도 낯설었다.

"좆 까."

성준수는 돌아가야만 했다. 무사히.

전영중은 소식을 듣자마자 달렸다. 복귀 신고도 하지 않고, 가이딩도 받지 않고, 피범벅 된 상태로 무작정 이주원의 연구실을 향해 뛰는 중이었다. 언젠가 피떡이 된 상태로 나타났던 성준수처럼. 그저 빨리 이주원에게 성준수의 행방을 물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준수가 돌아오지 않았다. 임무 중에 연락이 불가능한 건 당연했고, 일주일이 훌쩍 넘게 기간이 길어지는 건 다반사였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성준수가 어느 섹터에 파견 나갔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회의실로 호출받은 뒤, 이렇다 할 짐도 없이 숙소를 떠나던 성준수의 뒷모습이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전영중이 나흘만에 지원을 나갔다 돌아온 뒤에도 성준수의 부재는 여전했다. 그런 와중에 이주원이 센터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폐가 찢어질 것 같았다. 수송기에서 내리자마자 가이딩도 받지 않고 내달리고 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 당연한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의 꼴이 누군가를 만나기에는 엉망일 것이라는 생각까지도. 연구실 앞에 도착해 문을 내리치자 손 모양대로 핏자국이 남았다. 굳게 닫혀있던 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스르륵 열렸다.

"선생님."

이주원은 전영중의 모습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마치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 직감하고 있었던 것처럼.

"성준수는 어디 있어요?"

이주원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성준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주변에 있을 사람들의 수를 헤아려보았다. 조금 무리해서 능력을 쓴다면 충분히 제압이 가능할 것 같았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선택해야 했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 있다 죽을 것인지, 혹은 가진 패를 드러내서라도 살아남을 것인지. 성준수는 이미 답을 내린 뒤였다. 손끝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손목을 묶은 로프가 꽝꽝 얼다 못해 바스러졌다. 성준수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눈보라가 치기 시작하는 실내에서 이상함을 느끼지 않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느새 자유로워진 손으로 얼어붙은 로프며 포대자루까지 뜯어냈다. 번쩍거리는 성준수의 손을 마주한 그들은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명만이 울리는 성준수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성준수는 천천히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 눈이 푸르게 빛났다.

진동은 마치 지진처럼 땅을 타고 올라와 안에 있는 이들을 뒤흔들었다. 안에 놓인 가구들이 함께 진동하더니 사방으로 튀었다. 유리창이 망치로 깬 것처럼 터졌다. 겁에 질린 이들을 넘어 성준수는 밖으로 향했다. 더없이 제정신이었다. 밖으로 나가고서야 성준수는 자신이 있던 곳이 소류지 옆 저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류지도 이미 꽝꽝 얼어붙어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따개비 같은 집채들 사이로 얼음 기둥이 솟아 있었다. 개중에는 부서진 집들도 있었다. 마른하늘에서는 눈이며 서리가 펑펑 내렸다. 진노한 신의 벌이 틀림없었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저택 앞으로 몰려들어 백호찬을 찾았다. 교주님, 교주님! 모두가 패닉 상태였다.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그들에게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재난은 신의 형벌일 뿐이었다. 그 와중에 성준수를 제외한 한 남자만 태연한 낯을 했다. 사람들은 달려가 그 남자 앞에 엎드렸다. 부교주님, 하준 부교주님, 저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예? 그 와중에도 성준수는 제 성질머리대로 마을을 뒤엎었다. 증폭과 폭주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줄타기했다.

그때였다. 김하준과 짧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던 백호찬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선리신이여, 저희를 굽어살피기 위해 이 땅에 현신하신 것을 몰라뵌 한낱 미물들을 용서하시옵소서. 이로움이 되겠습니다.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 덜덜 떨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를 따라 납작 엎드리기 시작했다. 이로움이 되겠습니다.

이주원과 오랫동안 실랑이를 벌인 보람도 없이 가이딩실로 보내졌다. 피를 철철 흘리던 만큼 내상도 많아 가이딩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S급인 데다 손잡기 이상의 가이딩을 거부하다 보니 그 속도가 더욱 더뎠다. 그 긴 시간 동안 전영중은 성준수 생각을 했다.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위험한 임무라는 뜻이었다.

전영중이 숙소로 돌아온 것은 가이딩까지 마친 뒤였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익숙한 거실로 들어올 수가 있었다. 모든 것은 전영중이 나가기 전과 똑같았다. 전영중이 임무를 나갔던 동안에도 성준수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괜히 성준수가 야속했다. 자꾸만 성준수는 멀리로 떠나가 버릴 것 같았다. 전영중은 그런 형태의 헤어짐에 익숙해질 줄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자, 무력감에 힘이 쭉 빠졌다. 어디로 가는지 정도는 자신에게 알려줄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성준수를 탓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전영중은 왜 항상 성준수만 죽음의 문턱으로 내밀어지는지를 생각했다. 예전부터 그랬었다. 누구보다도 잦은 임무를 받는 것도, 위험한 섹터에 골라 가는 것도, 이렇게 비밀스러운 지령을 받는 것도 늘 성준수였다. 전영중은 그게 늘 의문이었다. 그렇게 위험한 곳에 내몰리는 대상이 가이딩을 효과적으로 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조형석이나 최종수처럼 능력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언제나 폭주 위험성을 갖고 있는 성준수라는 것이. 현장에 나가 폭주했다가 수습할 수도 없으면 어쩌려고.

'……!!!'

그러다 전영중은 이내 깨달았다. 국가가, 정부가 목표하는 것이 무엇인지. 때로는 모르는 때가 더 나은 것들이 있다. 대부분의 진실이 그러했다.

선리님, 선리님, 선리님. 증폭이 가라앉고 완전한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나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갇혀 있는 곳이 기도당에서 마을회관으로 바뀌었다는 것 정도. 원래라면 저택에서 지낼 수도 있었으나, 성준수가 크게 한 건 한 탓이 컸다. 누추한 곳에 선리님을 모실 수 없다며 그들은 성준수를 저택 다음으로 큰 마을 회관으로 모셨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핑계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신현민이 아니라는 건 진작에 들켰고, 신분도 확실치 않은 외부인을 저택에 놔두기엔 들킬만한 것이 많다고 판단했겠지.

마을 회관은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에는 어울리지 않게 제법 태가 났다. 대리석 바닥이며 커다란 원목 테이블, 가죽 소파에 대형 스크린 TV까지. 마을 회관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별장 같았다. 건물 하나가 성준수를 가두기 위한 감옥이 됐다. 기도당에 있을 때와 다른 점은 구속구로 묶인 성준수의 손이었다. 폭주로 제어가 불가능한 센티넬을 억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구속구가 이런 외딴 마을에도 있다는 점이 큰 의문이었다. 핑계야 좋았다. 위여하신 선리신이 경이로운 권능으로 한낱 미물을 해할까 괘념하여 친히 그 권능을 몸속에 가두시어….

옆에는 역시나 제경민이 함께 있었다. 태도는 전과 달랐지만, 감시 역할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제경민은 선리님께 발을 구르며 화를 냈던 사실이 몹시도 부끄러운지 저자세를 유지했다. 성준수가 무슨 말만 하려 하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때때로는 발목을 붙잡고 곡소리를 내기도 했다. 어, 어…, 선리님. 기다렸습니다. 제가, 제가 미천하여 알아뵙질 못하고, 자비, 부디 자비를…. 그럴 때면 눈물이며 콧물로 얼굴이 엉망이었다. 털어내려 해도 손아귀의 힘이 억셌다. 성준수는 왜 덜떨어져 보이는 제경민이 제 감시 역을 맡았는지를 다시금 실감했다.

"저기, 경민 형제님."

그 말에 제경민은 또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짧게 깎아진 머리통에 흉터들이 보였다. 급하게 이마를 숙인 탓에 제법 묵직한 소리가 났다. 정작 아무렇지 않게 납작 엎드린 제경민 대신 성준수가 인상을 썼다. 제경민은 낮게 웅크린 자세로 웅얼거렸다. 미, 미천한 것에게 말씀을 다 높이시다뇨. 그 말에 성준수는 작게 웃었다. 그들의 맹신은 성준수에게 기회였다.

"경민아."

"네, 네, 말씀하세요."

"내가 마을을 좀 보고 싶은데. 지난번에 못 봤잖아."

불경하게도 너 때문에 들켜서 대가리 후드려 맞느라. 그 뒷말은 성준수의 얼마 남지 않은 인내심을 끌어모아 참았다. 제경민이 고개를 겨우 들고 성준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성준수의 앞에서 선사님을 찾으며 소리를 지렀던 밤이 생각났는지 온몸을 벌벌 떨었다. 어물거리는 제경민의 태도에 성질이 뻗쳤지만 속으로 숫자를 세며 참아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말 것. 전장에 나갈 때 가장 먼저 배운 생존 방법이었으니까.

훈련에 가야 하는데 전영중은 다시 침대에 앉아 고개를 수그렸다. 성준수가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어딜 나가서도 악착같이 살아있을 놈인데도 이상하게 그랬다. 정부도 성준수가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원하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파견 장소도 비밀에 부친 채, 혼자 현장으로 내보냈을 리가 없었다. 유사시를 대비하여 둘 이상의 센티넬이 함께 짝을 이루는 건 유구하게 이어져 왔던 센터의 원칙이었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말이라도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백까지는 아니어도 너 때문에 이 삶을 버텨냈다고, 그래서 고맙다고. 차라리 이 모든 게 한 편의 영화였으면 좋았으리라 생각했다. 그랬다면 청승 떨고 있는 전영중의 뒤에서 성준수가 나타나 낯간지러운 행동은 그만두라면서 핀잔을 주었을 테니까. 그러나 이 모든 건 영화 속 장면이 아니다. 끔찍하고 생생한 현실일 뿐이었다.

전영중은 성준수의 방문에 손바닥을 올렸다. 금속으로 된 두꺼운 문의 매끄러운 촉감이 낯설었다. 전영중은 통신 기기를 만지작거리다가 성준수에게 메시지 몇 개를 남겼다. 어디냐? 무사해? 뭐 하고 있냐? 메시지의 끝마다 궁금증이 따라붙었다. 어차피 현장에서는 해킹의 위험성으로 인해 통신 기기를 사용하지 못했다. 그러니 성준수는 어디에 있든 전영중의 연락을 보지 못할 것이다. 복잡한 마음에 전영중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성준수를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야속했다.

제경민은 머뭇거렸다. 아, 안 되는데…, 교주님이 잘 모시라고 했는데…. 바닥을 짚은 손이 어쩔 줄 몰라 꼼지락거렸다. 성준수만 속이 터졌다. 맘 같아서는 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었으나, 구속구 때문에 능력도 쓰지 못하는데 완력으로 그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성준수는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달래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성지수를 달래는 중이다. 나는 지금 성지수를 달래는 중이다…. 성준수는 제경민과 눈높이를 맞추어 쭈그려 앉아 말했다. 마을을 둘러봐야 어떻게 은총을 내릴지를 알지. 사실상 목적은 돔 근처에 가는 것이었지만.

"마을을 둘러보신다구요?"

"어."

"…근데."

"……?"

"선리님은 원래 보지 않으셔도 모든 걸 다 알고 계신다던데."

하 씨발…. 저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그딴 설정을 성준수가 알 리가 없었다. 성준수를 바라보는 눈빛이 번들거려 불쾌했다. 또 언젠가의 밤처럼 난동을 피울까 봐 걱정이 되었다. 지금은 손도 구속구에 묶여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 더욱 그랬다. 교주님이 그러셨다며 또 목소리를 높일 기미가 보이자, 성준수는 골이 울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결국 강수를 뒀다. 야, 지금 날 의심해? 모 아니면 도였다. 황급히 의심을 거두거나, 이 자는 가짜라며 더욱 크게 울고불고 난리를 치거나. 다행히도 제경민은 전자였다. 아니, 아, 아닙니다! 황급히 이마를 조아렸다. 다시 한번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그냥 바람 좀 쐬고 싶다고. 하루 종일 여기에만 있는데 지금 감히 선리신을 가둬?"

"아니, 그게 아니라, 저, 절대 아닙니다…!"

"걍 밖에만 둘러보고 온다고. 하, 이젠 하다 하다 진짜 별…,"

"나, 나가요, 선리님. 제가 모실게요. 대신 멀리는 안 돼요. 아시겠죠?"

"어. 앞장서."

마을은 평범했다. 산골짜기에 자리 잡은 시골 마을은 저 멀리 난리가 난 저택과 성준수가 있던 마을 회관을 제외하곤 돌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을 회관 아래로는 논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제경민은 어눌한 말투로도 입을 멈추지 않았다. 백 교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예요. 서 계시는 것만으로도 위엄있으시고 후광이 비치듯 아름다우시더라니. 다 놀랐는데 김 부주교님만 태연하시더라니. 어찌 선리님을 모셔 오시고. 선리님 기다리면서 녹두 가루도 팔았어요. 몸에 좋아서 그런지 막 힘이 나고, 선리님 내려오시는 모습도 보이고….

구불구불한 동네 길을 지나니 거리에 내놓인 평상이 보였다.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다가 성준수를 보고 납작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준수는 머리가 아팠다. 그놈의 선리님. 권능. 은총. 녹두 가루. 수많은 정보들이 뒤엉키며 진실이 보일듯 말듯 애매하게 굴었다. 

아휴, 역시 선리님. 비범하신 분. 훤칠하신 데다 인물도 잘나시고. 저 멀리서부터 후광이 보이더라니까요. 마을 사람들이 성준수를 둘러싸고 한마디씩 했다. 기도당에서 본 것처럼 청년부터 노인까지 연령대가 뒤죽박죽이었다. 그런데도 어린아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이 정도 되는 마을에 어린아이가 하나도 없을 리가 없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제경민은 성준수의 속도 모르고 돌아가야 한다며 안절부절못했다. 점점 해가 지고 있었다.

회관으로 돌아왔을 때, 성준수는 거실에 딸린 큰 방으로 밀어 넣어졌다. 손쓸 새도 없이 문이 닫혔다. 높은 곳에 위치한 작은 창으로 노을빛이 간신히 들어오고 있었다. 구속구에 손이 둘 다 묶여있어 문고리도 돌릴 수가 없었다. 씨발, 또 나를 가둬? 짜증이 극에 달해 선리님 컨셉이고 뭐고 욕이 나왔다. 여러 번 문을 들이받았으나 열리지 않았다. 선리님,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나중에 다시 열어드릴게요. 제경민의 모든 말이 아니꼽게 들렸다. 결국 가둬놓겠다 이거잖아. 성준수는 방 안에 있는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머리 위에는 기도당 창고에서 봤던 그림이 걸려있었다. 돔을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성준수는 그럴싸한 말로 제경민을 꼬셔내기 위해 머릿속으로 열심히 대본을 짜내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때 이른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필터 없이도 세상은 하얗고 까맣다. 눈이 고요하다는 말을 처음 이해했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성준수는 지쳐있었다. 인생은 그렇게 조금의 낭만과 대부분의 불안과 함께 뒹굴며 살아가는 걸까. 외로웠다. 외로웠다기보단 조금 공허했던 것 같다. 누군가의 얼굴이 간절하게 생각났다.

전영중이 성준수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사실 여기저기 물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은 뻔했다. 이주원도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는 마당에 평범한 센티넬들이 성준수가 어디로 향했는지 알 리가 없었다. 말이 수소문이지 사실상 한 명을 들들 볶았다. 하루가 멀다고 이주원을 찾았다. 전영중은 가끔 성준수가 이주원을 못살게 군다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정부에서 그나마 무른 곳이 이주원 하나여서 그랬다. 다들 무슨 말을 하든 무감하게 원리 원칙을 따지는데, 이주원만이 인간성을 채 버리지 못한 자라 그랬다. 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도덕성을 채 버리지 못한 사람인지, 혹은 피험자들에게 가지는 측은지심인지. 어느 쪽이든 전영중에게는 환영할 일이었다.

이주원은 처음에는 단호하게 굴더니 전영중이 매일같이 찾아오니 조금씩 곤란한 표정을 했다. 전영중은 그럴수록 더 난처한 표정을 했다. 성준수 걱정에 죽고 못 사는 척을 했다. 저 어차피 아버지께 물어보면 바로 알 수 있는 거 아시잖아요. 그렇게 알게 되면 저도 뭔지 모를 그 임무에 배정될 수도 있는데 그건 선생님도 싫으시잖아요. 센티넬 하나라도 더 지키고 싶은 거 알아요. 그러니까 그냥 맘 놓고 기다리게 어디 갔는지만이라도 알려주세요. 전영중은 한순간의 막힘도 없이 술술 이야기했다. 이주원의 표정은 점점 괴로움으로 일그러져갔다. 진실을 함구하는 게 마냥 쉬운 일은 아니라서 그랬다.

그렇게 며칠 간의 제 목숨을 담보로 한 협박에 가까운 설득 끝에 이주원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진짜 제정신이세요?"

"내 의지가 아니야."

"어떻게 거길 혼자 보내요?"

"나도 통보받았어, 영중아. 거기서 성준수 보내지 말자고 하면, 위에서 순순히 알겠다고 해줄까? 그래봤자 더 위험한 곳으로 보내겠지. 아니면 예전처럼 무턱대고 굴리거나. 영중아, 다 사정이라는 게 있어. 이게 준수가 그나마 살 수 있는 방법이었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못 들은 거로 해. 알아봤자 너 좋을 거 하나 없어."

"……."

지금은 만나 뵐 수 없습니다. 그 대답에도 전영중은 강경했다. 친구끼리는 닮는다는 말도 있던데. 오랜 시간 함께한 탓인지 전영중은 제 성질대로 고집을 피웠다. 마치 성준수처럼. 그 완강한 태도에 결국 센터장실의 문이 열렸다. 센터장이자 총사령관인 그는 전영중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무슨 일로 바로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몹시도 궁금한 눈치였다. 전영중은 마지막까지도 빙빙 돌려 말할지 혹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할지를 계산했다. 전영중은 항상 겉으로 절제되고 자신을 잘 통제하는 것처럼 보여도 내면으로는 두려움과 불안을 느꼈다. 그리고 스스로의 행동과 결정에 대해 심각하게 의심을 품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저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무슨 일인가? 전 씨 아들이라 내 특별히 만나주는 거야."

"네, 감사합니다.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도 공적 좀 올리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섹터 1의 K구역. 성준수 중위만 파견 중이죠?"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것보다는…,"

제가 지원 가겠습니다.

희미하게 스며들어오는 빛과 어둠으로 하루의 흐름을 느꼈다. 정신을 잃은 기간을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으니, 지금이 K구역으로 온 이후 얼마나 지났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심지어 속세 밥은 입에도 안 대신다는 선리신의 괴이한 컨셉 때문에 물 몇 모금씩만 마시며 버텨야 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불확실성이 성준수를 더욱 옥매었다. 상황 그 자체가 목을 옥죄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는 없었다.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지나치게 고요하던 방문이 다시금 열렸다. 급수하듯 일정한 간격으로 물을 받쳐 들고 들어오는 제경민이었다. 그는 진실로 신께 바치는 물이라 믿고 있는지 입으로 흘려보내는 그릇을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매번 굼뜨던 제경민은 문을 잠그고 나갈 때만 행동이 재빨랐다. 성준수는 이번에도 자신을 막아선 제경민을 불렀다. 빈 그릇을 들고 그는 다시 엎드려 벌벌 떨었다. 정말로 그는 이 방에 신을 모신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게 기가 차서 성준수는 픽 웃음을 흘렸다.

사실 제경민은 감시라고 부르기에도 참 민망했다. 그는 성준수를 경외했으니까. 성준수를 막아서면서도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읊었다. 성준수는 대체 어떤 일을 겪어야 사람의 정신이 이 정도로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 궁금했다. 제경민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그저 맹목적인 믿음과 신을 향한 경애만이 남아 있었다. 그의 무지는 안타까웠으나, 그것을 진심으로 공감하기에는 성준수 본인의 명줄이 얄팍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를 이용해야 했다. 이용당하던 입장에서 이용하는 입장이 되었으나, 그것 또한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제경민."

"네, 네. 선리님."

"너 은총 받고 싶지?"

그 말에 제경민이 몸을 움찔하더니 얼굴을 들어 올렸다. 두 눈이 어떠한 욕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성준수는 자신의 말이 제대로 통했음을 느꼈다. 제경민은 분명 흥미를 갖고 있었다. 저한테만 권능을 주시, 주시려고요?

"권능? 어. 그래, 그거. 너한테만 줄게."

"저, 정말요?"

"어. 너한테만."

"그, 그치만 능력을 가두셨잖아요."

"그건…, 내가 가둔 능력이니 내 마음대로 풀 수 있지."

제경민은 정말이지 신이 제게 말을 걸고 있다고 생각했다. 흉흉한 인간 세상을 가엾게 여겨 재림한 구세주. 제경민은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그는 연신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감사의 말을 내뱉었다. 성준수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밖을 보니 밤이 깊은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이 보기 전에 이곳을 나가 돔으로 향해야 했다. 그곳에 무언가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전송한 데이터라고는 삭막한 방 천장뿐이었으니.

"그런데 조건이 있어."

"네, 네네, 말씀하세요."

"나는 그 뭐냐, 선리신이라 빛을 통해서만 권능을 줄 수 있거든?"

성준수는 긴장으로 목이 바싹바싹 타는 것 같았다. 평생 할 거짓말은 이곳에서 다 하는 것 같았다. 제가 생각해도 유치한 대사였지만 이 순진할 정도로 무지한 제경민이 제 말을 믿길 바랄 뿐이었다. 제경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권능을 받는 것과 선리신을 안전한 곳에 모셔놓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 같았다. 네가 잘 모신 덕에 기운이 좋아, 지금. 오늘 아니면 안 돼. 어떡할래? 잠깐이면 되는데. 그는 납작 엎드린 채로 고개만 뻐끔 들어 성준수를 계속 올려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산 위로 가야 할 것 같은데. 달이랑 가까울 수록 큰 권능을 줄 수 있어. 거짓말도 몇 번 해봤다고 그새 실력이 늘었다. 그냥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될 줄 알았던 제경민은 당황한 낯을 했다. 원래라면 안 된다고 거절했을 텐데 그러질 못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랬다. 뭐든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쉬웠다. 밖으로 나가게 해달라는 부탁도 들어줬는데 산등성이 좀 오르자는 부탁을 못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그, 그런데 저기 가면 안 된다구 했는데, 부주교님이. 그러면서 가리킨 것은 예상대로 어둠 속에서도 빛나고 있는 돔이었다. 성준수는 그것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달라며 그를 구슬렸다. 그러다가 이내에는 선리신의 물음에 답하지 않느냐며 호통을 쳤다. 제경민은 겁에 질려 더듬더듬 이야기를 시작했다. 돔은 백호찬이나 김하준만 드나들 수 있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근처에도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유일하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때 묻지 않은 영혼인 어린아이들뿐이었다. 그곳에서 신의 권능을 받아 선仙의 세계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제경민은 선의 세계에 가지 못한 영혼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구원을 바랄 수 밖에 없는 자.

"그런데 다 알면서 왜 물으세요?"

"그…, 하…, 자아 성찰 잘하는지 보려고 물었다. 지금 의심하냐?"

"아니, 아니 그럴 리가요! 제가 그 큰 뜻을 몰라뵙고…."

매 순간이 거짓말과 인내심 테스트의 반복이었다. 제경민은 여전히 눈을 빛내며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성준수는 그에게 팔을 내밀었다. 야, 이걸 풀어줘야 은총이든 권능이든 내려주지. 그 말에 제경민은 다가와 버튼을 눌러대더니 구속구를 쉽게 벗겨냈다. 성준수는 몇 번 손을 털었다. 이제야 일이 제 뜻대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성준수는 금세 제경민의 머리 위로 눈송이가 내리게 만들었다. 우와아아아아. 제경민은 눈을 반짝이며 탄성을 내질렀다. 선리님, 위대하신 선리님!

"자, 이제 눈 감아 봐."

"왜요?"

"하 씨. 왜긴. 권능 준다고."

"눈만 감으면 돼요?"

"어. 지금 추위 느껴지지."

"네, 네, 네."

"그게 안 느껴지면 권능이 흡수된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찬송하면서 있어라. 너무 크게는 말고."

"이 정도 목소리로요?'

어. 절대 눈 뜨지 마. 제경민이 눈을 감고 열심히 찬송가를 부르는 사이 성준수는 소리 없이 몸을 돌려 걸음을 내디뎠다. 제경민의 머리 위로는 눈이며 서리가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열심히 찬송을 하고 있었다. 조금 거리가 떨어졌을 때, 성준수는 힘껏 내달렸다. 저 높이, 산꼭대기 위로. 그가 가야  할 곳, 돔으로.

성준수는 계속해서 달렸다. 돔은 가까워 보였으나 사실은 멀었다. 그저 눈에 잘 보여 가깝다는 착각이 들 뿐이었다. 하지만 언제 제경민이 속았다는 것을 알고 쫓아올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가 뒤를 추격한다는 사실은 꽤나 원시적인 공포였다. 근래 물 말고는 제대로 먹은 것이 없어서 그런지 시야가 어지러웠다. 그럼에도 달렸다. 목이 쩍쩍 갈라지는 것 같았다. 어두운 산에서 길을 잃을 걱정은 덜어서 다행이었다. 달은 밝았고, 은색 돔은 달빛을 받아 더욱 빛이 났다. 성준수는 그저 그것만을 바라보며 달리면 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성준수에게는 그간 받아온 혹독한 임무가 키워준 체력이 있었다. 능력은 불안정하여 별 볼 일 없다 칭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체력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다. 그렇게 앞머리가 푹 젖었을 때쯤, 성준수는 멈춰 섰다. 심장이 목구멍에서 펄떡펄떡 뛰었다. 주변의 소리를 들어보니 아무런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적어도 제경민은 성준수를 쫓아오지 못했다. 성준수는 그제야 매끄러운 돔 앞에 손을 올린 뒤 숨을 몰아쉬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굳게 닫혀 있는 문을 어떻게 열 것인가. 성준수는 돔에 난 틈을 통해 입구를 추측해 냈다. 문은 아래 있는 마을의 것보다는 센터의 것과 비슷한 형태였다. 어딘가에 출입 인식 센서 혹은 비상 개폐 장치가 있을 것이었다. 삐빅. 다급하게 이곳저곳을 더듬거리고 있을 때, 자연스럽게 문이 열렸다. 이유는 몰랐다. 하지만 성준수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그는 크게 입을 벌린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오자, 등 뒤에서 문이 스르륵 닫혔다. 돔 안의 공기는 차갑고 텁텁했다. 마리화나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섞여 났다. 예민한 감각 탓에 채 지워지지 않은 피비린내까지 느낄 수 있었다. 성준수의 움직임을 인식한 듯 자동으로 불이 켜졌다. 돔 내부는 예상한 대로 굉장히 넓었다. 부주교만이 자주 드나든다고 했는데,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 신경을 곤두세웠다. 얼핏 듣기로는 밤에는 저택으로 내려간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데이터 자료들이 가득한 자료실 같은 공간을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성준수가 이해할 수 없는 데이터값들이었다. 혹시 몰라 성준수는 꼼꼼히 시선 안에 담았다. 자신에겐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전송된 데이터는 어딘가에 쓸모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방대한 데이터의 양에 이내 포기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성준수는 1층 중앙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위층으로 향하는 나선형 계단과 그 아래의 작은 공간이 있었다. 자물쇠가 잠긴 벽장. 성준수는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자물쇠는 꽤 낡아 보였지만 아무리 흔들어도 부서질 기미가 없었다. 하지만 이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성준수에게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물쇠를 단단히 얼린 뒤 부수자 파일철이 이리저리 꽂힌 작은 선반이 보였고, 그 아래로 포대자루가 꽉꽉 들어차 있었다. 성준수는 곧바로 코를 틀어막았다. 마리화나 냄새였다. 그는 선반 위의 파일철들을 꺼내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었지만, 그것이 원중 프로젝트의 그것과 흡사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불법 실험의 증거였다. 그 외에는 정체불명의 회계 장부들이 쏟아져나왔다. 성준수는 그것들을 천천히 녹화했다. 마을 사람들이 말하던 녹두 가루는 분명 마리화나였다. 마약 유통을 통해 실험 자금을 조달하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사이에 떨어진 서류 하나가 있었다. 성준수는 그 내용이 녹화되기도 전에 빠르게 주머니 속으로 처박았다. 분명 제가 알아서는 안 될 내용이었다.

성준수는 조심스럽게 위층으로 향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하나의 소리가 아니었다. 규칙적으로, 하지만 제각각 다른 리듬을 가지고 있는 소리. 계단을 오를수록 그 소리가 선명했다. 삐─삐─삐─ 바이털 기계음이었다. 예상대로 2층 전체는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WPC에서 보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거대한 시험관 속에서 잠들어 있는 아이들. 성인부터 갓 걸음마를 뗀 것처럼 보이는 모습까지. 시험관의 수만큼 사람들의 모습도 다양했다. 공통점은 모두 머리가 짧게 깎인 채였다. 시험관에 가까이 다가가자 두피에서 여러번 꿰맨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개중에는 머리통이 열려 뇌가 드러나있는 것들도 있었다. 권능을 받는다는 것은 강제로 센티넬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실험 윤리가 하나도 지켜지지 않는 곳에서 많은 아이들이 희생되고 있었다.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결과를 내기 위해 다짜고짜 머리 뚜껑을 열고 뇌를 꺼내 주물럭거렸겠지. 그리고 죽어간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게 처리되었을 것이다.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채로. 그 사실을 생각하자 금방이라도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실험실 전체에는 쿰쿰한 마리화나 냄새가 났다. 아마도 고통을 줄이겠다고 마약을 함께 사용한 것이 분명했다. 성준수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손끝이 벌벌 떨렸다. 끔찍하더라도 눈에 담아야 한다는 사실이 제법 고통스러웠다. 아무리 성준수라 하더라도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릴 적의 트라우마가 생각났다. 레우논 이식을 받기까지의 과정과, 고통스러웠던 시간과, 그 이후 하루살이 목숨처럼 살아가야 했던 나날들이. 이 안에 있는 아이들은 단순히 얼굴 모르는 아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과거의 성준수이자 전영중이었고, 어쩌면 성지수가 될 수도 있었다. 과거의 그들보다 더한 고통을 받으며 죽은 삶을 사는 자들. 아파요. 너무 아파요. 차라리 죽여주세요. 사방에서 그런 환청이 들렸다.

지원 요청이 필요했다. 피해자 구출을 위해서 당장은 정부의 도움이 필요했다. 증거는 모두 전송되었을 테니, 정부가 개입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때까지 성준수는 버텨야 했다. 살기 위해서는.

인생은 길이다. 성준수는 K구역에서 갇혀 있으면서 자기 인생의 길이 어느 계절을 배경으로 가장 아름답게 이루어졌는지 곰곰 생각해 보곤 했다. 하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여름이라기엔 앙상하고, 겨울이라기엔 태양이 작열했으니까. 그런 메마른 계절. 그게 제 인생 같다고 생각했다. 될 수만 있다면 청량한 여름이나 포근한 겨울 같은 것들을 담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제 안에 담아내는 것들은 처절한 현실뿐이었다.

성준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며 돔 입구로 향했다. 언제 김하준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곳에 숨어있을 수는 없었다. 차라리 산속을 배회하며 기다리는 것이 나았다. 들어올 때와 다르게 아무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오자 시원한 바람이 성준수를 맞이했다. 여전히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성준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동이 터오고 있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리니이임…. 산이 떠나가라 부르짖는 소리는 못 들은 척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나무 사이로 제경민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내 울며 산을 떠돌았는지 여기저기 나뭇가지에 긁힌 흔적이 가득했다. 눈물 콧물 가리지 않고 흘리며 비척비척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돔 근처로 다가오는 걸 꺼렸다. 이 상황에서까지도 교주의 말에 순종한다기엔 뭔가 이상했다. 본능적으로 돔을 꺼리는 것처럼 보였다. 깎은 머리. 머리 위 흉터. 돔에 대한 두려움. 성준수는 마침내 깨달았다. 그는 돔의 실험실이 낳은 실패작이라는 것을. 불행인지 다행인지 죽지 않고 살아나온 개체라는 것을. 그 사실에 무언가가 울컥 올라왔다. 동정심이라기보다는 분노였다. 제경민의 뒤에서 잔뜩 인상을 쓰고 달려오고 있는 백 교주와 김 부교주의 얼굴을 보니 더욱 그랬다. 그들은 신을 만들 수 있다 자부했겠지. 그러나 그들은 틀렸다. 그들이 만들어내려 애쓰는 건 신도, 별인도 아닌 가련한 아이들이었다. 평생 깨지 못할 악몽을 꾸는 아이들. 그들은 절대 실험 대상이 된 아이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성준수와 전영중의 트라우마를, 나의 악몽을.

성준수가 입을 벌리고 숨을 내쉬자, 새하얀 입김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의 손은 푸르게 불타고 있었다. 눈은 이미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온몸에 파랗고 빨간 핏줄이 섰다. 다시 한번 눈앞이 진동했다. 숲에 있는 나무들 위로는 어느새 눈이 가득 쌓여있었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을 잊었다. 기억나는 것은 과거의 악몽과 현재의 분노였다. 왜 이곳에 있는지, 왜 분노하는지, 왜 자신을 선리님이라 부르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온 일대가 크게 진동했다. 이제 막 잠에서 깬 마을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이성을 잃은 성준수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고통을 알 바가 아니었다. 돔을 시작점으로 하여 숲 전체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소류지의 물이 넘쳐 마을을 덮친 채 빙벽이 되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사람들은 교주를, 부교주를 찾아 산 위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산 끝에 도착하자마자 벌벌 떨었다. 선리님이, 선리님이 노하셨다!

마을 아래에서부터 계속해서 경보음이 울렸다. 멀리서 들리는 소리지만 웅웅거리며 고막을 세게 울렸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일 죽으면 오늘의 무엇을 후회하게 될까. 분명 말하지 못한 것을 후회할 것이었다. 보고 싶었다고, 사실 나도 네가 고마웠다고. 솔직하게 말해야 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목적의식이 있었다. 그래서 돌아가야 했다. 한 소년. 동그란 얼굴의 소년. 돌아가야 했다. 살아 돌아가야 했다. 자신의 악몽을 깨워줄 그에게로.

머리가 아팠다. 지끈거리는 고통을 누구도 잠재워줄 수가 없어서 고통스러웠다. 공기 속에 섞여오는 냄새 입자 하나마저도 그를 자극했다. 저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들은 무의식의 공포를 만들어냈다. 끝나지 않는 괴로움에 성준수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씨발, 다 찢어 죽일까보다! 그가 다 뭉개진 발음으로 소리 지르자 공기가 찢기며 얼음조각이 후드득 떨어졌다. 단죄의 시간이었다. 악인들은 얼음조각에 이리저리 찢긴 채 얼음 기둥이 되었다. 눈보라가 거세지며 폭풍이 되었다. 성준수의 코와 입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그럼에도 제어를 잃은 이능력은 멈출 줄 몰랐다. 완전했던 마을 하나가 센티넬 하나에 일그러지며 무너져갔다. 성준수는 악몽인 그들에게 새로운 악몽이 되어갔다.

분노로 들끓었으나 오히려 마음속은 차분했다. 모두가 센티넬의 폭주를 공격적이고,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성준수의 비참함은 갈 곳이 없었다. 그가 슬퍼한다 해도 공감해 줄 이가 없었다. 모두가 센티넬을 도구로 보았기에.

전영중이 지원 부대를 이끌고 섹터 1-K에 도착했을 때 이미 성준수는 폭주하고 있었다. 지원 부대는 백호찬과 김하준을 체포하고 끔찍한 실험실 안에 갇힌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타이밍이 좋았다. 사실 다짜고짜 선화 마을로 쳐들어갈 생각이었으나, 도착 직전에 자료들을 받을 수 있었다. 호버를 타고 가며 인원을 나누었다. 백호찬과 김하준의 위치를 확인하고 체포할 A팀, 피해자들을 구출할 B팀, 그리고 성준수 중위를 찾아올 전영중.

하지만 마을에 도착하자 생각보다 상황이 더 심각했다. 마을은 얼음과 눈으로 뒤덮여 쑥대밭이 되어 있었고, 거세게 눈 폭풍이 불었다. 지원 부대가 진입하는 것조차도 힘겨워 보였다. 전영중은 눈보라의 근원이 산꼭대기 무언가 반짝이는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을 눈치챘다. 그곳에 성준수가 있을 것이다. 제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성준수가.

전영중은 단숨에 산꼭대기까지 달려 올라갔다. 사실은 거의 날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전영중은 성준수의 상태를 센터에 보고했다. 성준수 중위 현재 폭주 중입니다. 최대한 수습해보겠습니다. 수습이라 말은 했으나 폭주한 센티넬을 진정시킬 자신은 전영중도 없었다. 성준수의 주변에는 파랗고 빨간 불길이 번갈아 일렁이고 있었다. 성준수는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파랗게 빛나는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성준수가 입은 허연 옷이 시뻘겋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전영중은 성준수가 잠들었을 때 능력을 제어했던 것처럼 주변의 중력을 조절했다. 성준수의 움직임 또한 둔해졌으나 이능력을 전부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성준수가 A등급이라 하더라도 안정성이 떨어졌을 뿐, 위력만으로 두고 보면 S급 못지않았다. 폭주 중이라면 그 위력은 더했다. 장시간의 대치가 계속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전영중도 슬슬 한계였다. 귀에서 뜨끈한 것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였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다시 한번 명령합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높이 뜬 호버에서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호버 위에서 성준수를 향해 조준한 총구가 보였다. 그 끝에는 테이저가 부착되어 있었다. 곧이어 전영중에게는 현장을 벗어나 피해자 구출팀에 합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전영중은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명령은 명령이었다. 그는 성준수를 돌아 돔 뒤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성준수가 제발 무사하길 빌었다. 테이저건 다음은 실탄이었을 테니까.

날씨가 제멋대로 날뛰었다. 눈보라가 멎는 듯하더니 다시 거세지고, 그러다가 다시 잦아들길 반복했다. 그러더니 곧 맑게 갠 하늘이 보였다. 그걸 통해 전영중은 상황이 정리되었음을 깨달았다. 시험관에 든 실험 피해자들은 그대로 WPC 센터로 이송하기로 했다. 시험관에서 함부로 꺼냈다간 생명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시험관들이 끝도 없이 호버에 실렸다. 지원 부대가 아니었으면 절대 성공하지 못할 구출 작전이었다. 꽝꽝 얼어있던 백호찬과 김하준은 그대로 호송용 호버에 실렸다. 벌벌 떨던 마을 사람들도 심문을 받기 위해 호버에 함께 실렸다. 그중에는 연신 죄송하다며 바닥에 얼굴을 갈고 있던 짧은 머리 청년도 함께였다.

상황이 모두 정리되고 나서 전영중은 성준수를 찾았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성준수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전영중은 다급하게 외쳤다. 성준수 중위가, 성준수 중위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성준수는 어찌 되었냐 물었더니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들려오는 건 단호한 복귀 명령이었다. 아니요, 제가 끝까지 찾다 돌아가겠습니다. 전영중은 단호하게 외치고는 다시 마을 뒤로 이어진 숲으로 달려 나갔다. 어쩌면 최초이자 최후의 불복종이 될 터였다.

돔 입구까지 도착한 전영중은 성준수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어디에도 성준수가 보이질 않았다. 전영중은 여기저기 성준수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복귀 명령이 떨어졌으니 전영중에게도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마음이 자꾸만 조급해졌다. 마음이 다급하니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실수도 했다. 그 와중에도 전영중은 성준수가 그 모습을 보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성준수를 마주한 것 부러진 나무 잔해들 사이에서였다. 푸른 빛이 도는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전영중은 눈밭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날카로운 바늘이 목뒤에 꽂힌 채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자 마음 한편이 쓰라렸다. 짐승을 상대할 때나 쓰는 전류가 성준수의 온몸을 지졌을 것을 상상하니 눈이 질끈 감겼다. 성준수는 온 얼굴이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 안그래도 하얀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손의 온도도 얼굴 못지않게 창백했다.

전영중은 황급히 성준수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댔다. 심장 박동이 희미했다. 심장이 뛰고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전영중은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준수야, 살자. 같이 살자. 우리 또 휴가 나가자. 사진 또 찍자. 우리 같이 찍은 사진 너 때문에 망가졌잖아. 그러니까 다시 찍자.

준수야,

준수야,

내가 사랑하는 준수야,

죽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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