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GHT or FLIGHT

FIGHT or FLIGHT 09

센티넬X센티넬 빵준

전영중은 성준수를 들처업고 달렸다.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가라앉은 마음의 무게는 전영중의 능력으로도 가볍게 만들 수가 없었다. 준수야, 괜찮아? 야, 괜찮냐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등에 닿는 온도가 더없이 차가웠다. 희미하게 몸이 떨리기에 그제야 목숨은 붙어있구나 싶었다. 정신을 잃은 뒤에도 이능력이 새어나가는지 바람이 거세게 일렁이며 서리가 떠다녔다.

자꾸만 불안한 생각이 들어 전영중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고개를 세차게 털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 전영중은 계속해서 성준수를 불렀다. 그러다 보면 한 번쯤은 답해줄 것 같아서. 전영중은 호버가 대기하고 있는 마을 입구로 달렸다. 나뭇가지들에 걸려 생채기가 났지만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센터로 복귀해야  했다. 그렇다면, 만약 늦지 않는다면 분명 살릴 수 있을 것이었다. 목숨줄 하나는 더럽게 긴 성준수였으니까. 분명 이번에도 죽지 않을 것이다. 전영중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전영중은 이능력을 쓸 생각도 하지 않고 온전히 성준수의 무게를 짊어졌다. 와. 준수, 나보다 훨씬 가볍네. 근육 좀 더 붙이라고 해야겠다. 그런 생각이나 하며 자신 또한 패닉에 빠지지 않으려 애썼다. 이능력을 쓰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그렇게라도 무게를 느껴야 성준수가 아직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어서.

"성준수 중위 발견했습니다. 남은 인원과 함께 즉시 복귀하겠습니다."

"……."

전영중의 앞머리는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 성준수를 내려놓자, 등에도 땀이 흥건했다. 전영중은 여러 번 성준수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사이에 미약하던 숨이라도 멎었을까봐. 살면서 이토록 간절했던 적이 있었나? 왜 항상 마지막이 다가올 때쯤에야만 절실해지는지. 원래 뭐든 머뭇거리면 안 돼. 문득 그 말이 떠올랐다. 머뭇거려서는 안 됐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무한한 시간이 주어진 것이 아니므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안하고도 불완전한 삶을 살고 있었으므로.

전영중은 운전병에게 명령했다. 명령이라기보다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빨리, 최대한 빨리 센터로.

센터 내에서는 다시 비상벨이 울렸다. 전영중은 그 비상벨의 대상이 성준수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 없었다. 호버레처에 실려 의료실로 향하는 성준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원칙적으로는 가이드가 대동하여야 했지만, 성준수는 특수한 케이스라 의료진들만 수술실로 향했다. 상태를 검사하고, 적절한 처치를 하고, 필요시 수술까지 한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 가늠해 보았으나 짐작이 가질 않았다. 폭주한 센티넬이 그 뒤에 어떻게 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으니 당연한 얘기였다. 전영중이 아는 것은 이전의 폭주 이후 격리실에서 꽤 오랜 시간 있다가 나왔다는 것뿐이었다.

"안 타세요?"

갈색 머리에 눈 아래 점. 보아하니 기상호였다. 그도 숙소에 내려가는 길이었는지 엘리베이터를 붙잡고 전영중에게 물었다. 살짝 멍하니 서있던 전영중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전영중은 기상호와 있는 것이 불편했다.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데다가 속을 알 수가 없어 느낌이 쎄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속도가 오늘따라 느렸다.

"준수 햄 땜에 걱정 많으신 것 같은데."

"알면 말 걸지 마."

"와 엄청 차가우시네."

도착한 것 같은데. 그 말에 기상호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하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는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가면서 전영중은 한숨을 쉬었다. 기상호고 뭐고 신경 쓸 상태가 아니었다. 아까부터 미칠 듯이 뛰어대던 심장이 도통 진정되질 않았다. 전영중은 스스로에게 괜찮다며 의연한 목소리를 흉내 냈다.

또다. 혼자 있는 숙소는 이제 지긋지긋했다. 그래도 기다리다 보면 안정을 취한 성준수가 돌아올 것이었다. 분명 그럴 것이었다. 그렇게 믿고 있으면서도 정체 모를 불안함이 전영중의 전신을 휘감았다. 센티넬이 되며 발달한 건 오감뿐만이 아니었다. 센티넬 발현과 직감의 상관관계 또한 연구 대상이 될 필요가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의 불안을 단순히 기우로 치부하기엔 찝찝했다. 성준수를 찾아가야 할 것 같았다. 수술실이든, 회복실이든, 그 어디라도.

센터 내 성준수의 행방을 물어볼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전영중은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지상으로 올라가야했다. 이주원의 연구실에 갑작스럽게 들이닥쳤는데도 그는 태평했다. 마치 전영중이 올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이주원은 전영중이 무언가를 묻기도 전에 자신의 뒤편으로 곁눈질을 했다. 그 뒤에는 연구실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호버레처가 있었다. 그 위에는 익숙한 얼굴이 누워있었다. 여전히 의식이 없는 성준수.

"왜 여기 있어요? 병동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능력으로 인한 내상이라 가이딩 아니면 해결이 어렵대."

"그전에도 이런 적 있었을 거 아니에요. 성준수 저 새끼 툭하면 폭주하던데."

"이 정도로 심한 적은 없었어."

"그럼, 그럼 어떡해요…?"

"……."

전영중은 헛웃음을 지었다. 하하, 최대한 보장해 준다는 권리가 이거였어요? 헌신짝처럼 버리기? 그 말에도 여전히 이주원은 침묵을 지켰다.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져있었다. 슬픔과 분노, 그리고 염려의 애매한 그 사이. 전영중은 제가 성준수를 데려가겠다고 말했다. 이주원은 의외로 순순히 비켜섰다. 전영중은 숙소로 호버레처를 이동시키며 생각했다. 주원 선생님, 왜 그런 얼굴을 해요. 그런 표정을 하면 꼭 정부에서 성준수를 살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 같잖아요.

드디어 성준수와 함께 숙소로 돌아온 전영중은 가이딩실에 연락을 넣었다. 부상으로 인해 병동으로 이동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가이딩 지원을 요청합니다. 숙소동 지하…. 전영중은 약간의 거짓말을 섞어 넣었다. 원래 가장 완벽한 거짓말은 진실 속에 숨은 거짓이니까. 움직일 수 없다는 것도 맞고 가이딩 지원이 필요한 것도 맞았다. 높은 등급의 가이드가 필요한 것. 다만 그 대상이 지원을 요청한 전영중이 아닌 성준수라는 점만이 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숙소 문을 열고 한 가이드가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S급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확인차 물었다. 짧은 물음표로 끝나는 불친절한 대답에도 가이드는 그러하다며 친절히 대답했다. 지원 나온 S급 가이드 이수현입니다. 전영중은 가이드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저…, 그런데 부상 때문에 오지 못하신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가이딩이 필요하긴 해. 나 말고 저 놈이."

전영중은 거실 한 편을 차지하고 있는 호버레처를 가리켰다. 이수현이라 밝힌 가이드는 그 위에 누운 얼굴을 보자 사색이 됐다. 저는 못하겠습니다. 원래 부르신 목적과 다르다면 다시 보고를 올린 뒤 지원 요청을 해주십시오. 전영중은 떠나려는 가이드의 앞을 막아섰다. 저도 알고 있었다. 성준수가 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며, 그 탓에 가이딩을 거부한다는 것을. 만약 이런 방식으로 성준수를 살려내더라도 그가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전영중은 간절했다. 이능력으로 입은 내상이 심각하다는데, 가이딩이 필요하다는데, 가이드를 부르는 것 말고 또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전영중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 세수를 했다.

사람 하나 살린다고 생각하고 협조 좀 해주세요. 쟤가 일어나서 개지랄 떨어도 제가 다 막아드릴게요. 일단 당장에 사람이 죽어간다는데 살리는 게 먼저잖아요. 전영중은 서글서글 웃으면서 이수현을 살살 달랬다. 이수현으로서는 진퇴양난이었다. 가이딩 안 받기로 소문난 지랄맞은 센티넬을 가이딩하고 후에 보복을 당하든가, 마냥 사람 좋은 낯으로 웃고 있지만 말투가 서늘한 190이 훌쩍 넘는 센티넬에게 덤비든가. 자신의 일에 늘 보람을 느끼던 이수현은 최초로 약간의 회의를 느꼈다.

방사형으로는 부족할 것이라는 전영중에 말에 이수현은 얼음장 같은 성준수의 손부터 잡았다. 맞닿은 피부를 타고 신경이 연결되는 것 같았다. 성준수의 장기들이 서리가 가득 차있거나 여기저기 긁히고 찢겨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수현은 신중하게 회복력을 불어넣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하지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성준수는 눈을 뜨지 못했다. A등급 센티넬과 S등급 가이드처럼 보여도 사실상 등급 자체에는 의미가 없었다. 위험도나 희귀성만을 따지면 성준수도 S급 그 이상이었으니까. 그런데 내상의 정도가 심해 손을 잡는 것 정도로는 가이딩의 의미가 없었다. 이수현은 고개를 들어 전영중의 눈치를 봤자. 전영중은 알아서 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이내 입술이 겹쳐졌다. 타액을 통해 더욱 깊고 확실하게 회복력이 전달됐다. 질척이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전영중은 이유 모를 불쾌감에 등을 돌렸다. 그저 감정 없는 가이딩이라는 행위를 지켜보는 것이 이토록 불편할 줄은 몰랐다. 타액 접촉도 사실상 인공 호흡과 다를 바 없는 과정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과정 하나에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전영중은 성준수에게서 가이드가 한시라도 빨리 떨어지길 빌었다. 감정에 사랑이란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상대가 무사하길 바라는 것. 미움받더라도 그의 목숨을 우선시하는 것. 그럼에도 작은 일에도 질투를 하게 되는 것.

이주원은 새로운 인공 레우논 개발 연구를 얼추 마치고 돌아온 이후부터 내내 바빴다. 피떡이 된 전영중이 들이닥쳐 성준수의 행방을 묻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그 뒤로 귀찮을 정도로 성준수가 어디 갔는지를 집요하게 물었다. 선화 마을로 홀로 보내졌다고 말을 하기까지 제법 오래 걸렸다. 전영중과 성준수가 서로를 특별히 여긴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남들은 서로를 앙숙으로 생각했겠지만 그 둘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주원은 알 수 있었다. 감응을 통해 가이드들과 짝을 맺는 여느 센티넬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런 둘을 알기에 더욱이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알게 되면 저도 뭔지 모를 그 임무에 배정될 수도 있는데 그건 선생님도 싫으시잖아요. 하지만 전영중의 말에 이주원은 백기를 들었다. 행방을 알려주는 대신 섣불리 나서지 말라고 말을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전영중이 선화 마을로 향했다는 것을 듣자마자 뒷목을 잡았다. 서로 좋아하면 닮는다더니 이렇게 말 안 듣는 것까지 닮아갈 줄은 몰랐다.

이주원은 오늘도 정신이 없었다. 성준수가 거의 송장이 되어 센터로 실려 온 게 엊그제의 일이었다. 내상이 심각해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였다. 최대 병동과 의료진을 갖춘 센터가 센티넬 하나 못 살릴까. 센터는 성준수를 살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것은 꽤 오래된 이야기였다. 아마도 성준수의 첫 폭주 이후부터. 지나치게 많은 임무를 할당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전영중에게 듣기로 성준수의 내상은 얼추 회복되었고 의식도 돌아왔다고 했다. 그랬다가 다시 깊이 잠들었다고. 그걸 듣고 마음을 놓은 것이 불과 아침의 일이었는데. 조금의 안도감도 허용할 수 없다는 듯 센터는 이주원을 회의실로 불렀다. 분명 성준수에 대한 이야기겠지. 이번에는 또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또 어떻게 성준수를 변호해야 할지 머리가 아팠다.

"폐기합시다."

이주원은 펄쩍 뛰었다. 말도 안 됩니다! 상황은 생각보다 더 나빴다. 이주원은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하지만 정신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성준수의 목숨이 한순간에 날아갈 수 있었다. 그동안 죽을 뻔한 적은 많았지만, 이런 말로를 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주원은 사실상 많은 이들의 아버지였다. 그는 원중 센티넬에게 평생의 부채감을 지니고 살아가야 했다. 그중에서도 성준수는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고.

성준수는 A급으로 강등되었으나 사실상 S급에 가깝습니다. 더군다나 엘리멘트 계열 센티넬은 더욱 드물지 않습니까. 잦은 폭주로 인해 걱정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과분한 처사입니다. 그 위력으로 지금까지 쌓아온 공적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심지어 이번 선화 마을 뒤처리도 성준수 덕분 아닙니까. 불안정한 능력으로 인한 폭주의 위험성이나 그 이후의 금전적 비용 부담 또한 염려되는 것도 당연하나 장기적인 이득을 따져 보았을 때….

그 순간 생각난 것은 전영중이었다. 그의 간절하던 눈동자. 어쩌면 저도 그와 같았다. 하하, 최대한 보장해 준다는 권리가 이거였어요? 헌신짝처럼 버리기? 전영중이 했던 말이 뼈아프게 와닿았다. 그 말을 그대로 회의실에 있는 수뇌부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제가 한 연구가 그저 사람을 기계 부품으로 만들기 위한 죄악에 불과하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회의실에서의 여론은 성준수의 폐기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주원의 의견은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 사실상 통보의 자리였다. 이주원은 이번에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그저 연구를 꿈꾸는 사무직일 뿐이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재능이 없는.

이주원은 허탈하게 회의실을 나왔다. 성준수의 불행이 다 제 탓인 것 같았다. 성준수는 원중 센티넬이기 때문에 불행했다. 원중 센티넬인 한 성준수는 그의 트라우마를 평생 져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원중을 놓을 수 없는 상태라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국가를 위해 모든 걸 바쳤다. 트라우마를 마음 깊이 묻어두고 늘 전장으로 향했다. 스트레스의 수치가 남들보다 높다는 것은 검사를 하지 않아도 모두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성준수는 내색하지 않았다. 제게 주어진 임무라면 군말 없이 이겨냈다. 그랬던 성준수의 마지막이 폐기라니. 이럴 수는 없었다. 그들이 적어도 마지막 인간성을 지니고 있다면,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속이 메슥거렸다.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라앉은 마음이 도착한 곳은 가장 깊은 곳, 성준수의 숙소였다. 그새 일어나있었는지 성준수가 일어나 이주원을 맞았다. 전영중은 훈련 시간인지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이주원은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머뭇거렸다. 분명 전영중이 어찌저찌 가이딩을 받게 한 것 같은데 이야기를 꺼내도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괜히 성준수의 성질을 긁고 싶지 않았다. 싸우려고 온 것은 아니었으므로.

"…몸은 좀 어때."

"전영중 그 새끼가 가이딩 받게 해서 괜찮아요."

"아, 걔가 다 말했어?"

"어떻게 몰라요. 몸이 가뿐한데."

길길이 날뛸 줄 알았으나 성준수는 의외로 차분했다. 너 가이딩 극도로 거부했는데, 괜찮아 이젠? 가이딩 앞으로 좀 받아볼래? 이주원의 말에 성준수가 인상을 팍 썼다. 그건 싫어요. 대답이 단호하게 떨어졌다. 모든 대화가 항상 이런 식이었다. 화목한 분위기까진 바라지도 않았으나 늘 냉랭하게 끝났다. 분명 성준수의 깊은 내면 어딘가에는 이주원을 향한 원망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었다. 그걸 알기에 이 모든 건 자신이 감내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주원은 말을 고르고 고르다가 물었다. 준수야, 이번에만 가이딩 받은 거…,

"…혹시 살고 싶었니?"

이번에는. 이번에는 살고 싶었냐고. 모르겠다고 대답했던 성준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그래, 그렇구나. 그렇게 중얼거린 이주원은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숙소를 떠났다. 성준수에게 건강을 잘 챙기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성준수는 이주원이 제게 남긴 말을 되새기며 그가 떠난 뒤 닫힌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 말을 여러 번 곱씹었으나 아직은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준수야.

네.

언젠가 목숨이 정말 위험해지면…,

네.

…원중을 떠나.

기상호는 상황이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센터 내가 최근 들어 자꾸만 뒤숭숭했다. 어느날은 갑자기 지원 부대를 급하게 모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비상벨로 시끄러웠다. 훈련 중에 들은 소리였으나,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전영중의 표정을 보고 그 대상이 성준수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저 햄도 센터에 불만이 많으려나. 성준수에게 했던 것과 같은 이야기를 꺼내볼까 했으나 이내 관두었다. 전영중에게 꺼내기에는 너무 섣부른 주제였다.

모두들 처음에는 기상호를 보고 쎄하다고는 이야기해도 이내 평가를 바꾸었다. 알고 보면 착해. 기상호는 자신에게 따라붙는 평가와 센터 내의 막내 포지션을 잘 활용할 줄 알았다. 햄들 무슨 얘기 하고 계세요? 이런저런 얘기로 떠드는 센티넬 사이에 자연스럽게 껴들었다. 대화 주제는 예상했듯 성준수였다. 그가 사이비 마을에 파견되었다가 감금당했다, 제물로 바쳐질 뻔했다, 아니다 왕 노릇을 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폭주했다, 등등. 진실과 거짓이 혼재했다. 모두들 성준수를 어려워했지만 가십의 소비는 쉬웠다. 센터는 모르는 척하는 게 어려울 정도로 정보가 넘쳐났다. 기상호는 그것들을 그것들을 침착하게 주워 담는 역할을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우연이었다. 복도를 돌아가는 이주원의 뒷모습을 보고 부르려다 멈칫했다. 센터장과 어떠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끼어들 자리는 아니라 생각하고 숨을 죽였다. …는 재고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미 결정 났네. 지금은 완전히 회복했고 가이딩 치료도 조금씩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폐기는 말도 안 됩니다. 지금 내린 결정을 번복하라는 얘기인가? 그렇지만…. 둘 다 그곳에 기상호가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기 전에 자리를 떠야했다. 기상호는 재빨리 왔던 길을 돌아갔다. 본의 아니게 엄청난 것을 들은 것 같았다. 기상호는 대화의 내용을 통해 이야기의 대상을 추려내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성준수의 폐기 건.

기상호는 이것을 성준수에게 이야기해야 할지 말지를 고민했다. 확실히 지하 깊숙이 처박혀 살아가는 성준수를 지상으로 끌고 오기에는 더없는 기회였다. 다만 썩 유쾌한 이야기도 아닐뿐더러 성준수에게 말을 건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복도를 스쳐 지나가면서나, 식당을 오갈 때, 또는 훈련실을 드나들면서 성준수의 얼굴을 뜯어보는 게 습관이 됐다. 섣불리 다가가진 못해도 오늘 기분이 어떤지, 말할 만한 타이밍인지 꼼꼼히 살펴봤다. 그렇게 새삼 뜯어보다 보니 참 잘생긴 얼굴이다 싶었다. 자신 같았으면 전장에서 굴리거나 폐기를 논할 것이 아니라 센티넬 센터 홍보 간판으로 세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야."

"네, 네?"

기상호는 화들짝 놀랐다. 성준수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걸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하긴, 매일같이 빤히 쳐다보는데 누구라도 신경쓰이지 않는 게 이상했다. 꼬라보지만 말고 할 말 있음 하라고. 갑작스럽게 다가온 타이밍에 기상호는 당황했으나,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몰랐다. 그, 그럼 좀 조용한  데서 말하면 안 될까요? 성준수는 한숨을 쉬며 얼굴을 찌푸렸다. 기상호는 또 잔뜩 움츠러들었다.

"진짜 중요한 얘기라서 그런데…."

"허튼소리면 진짜 찢어 죽인다."

그렇게 향한 곳은 병동의 실내 정원이었다. 임무 출정을 나간 전영중은 지금 숙소에 없을 터였지만 어쩐지 성준수는 기상호를 그 안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의 공간에 다른 사람을 들인다는 것 자체가 꺼려졌다. 전영중을 제외하고는. 그게 참 신기했다. 어느새 완전한 타인이었던 전영중이 성준수의 일상에 스며들었다는 게.

"크큭, 준수 햄? 지금 절 두고 한눈을 파시다니."

"내가 허튼소리 하지 말랬다."

"넵."

"뭐 때문에 불렀는데."

알고 계셨어요, 폐기 이야기 나오는 거? 성준수는 심드렁한 반응을 했다. 그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은 아직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기상호는 호흡을 한 번 정리하고 이야기를 내뱉었다. 센티넬 폐기에 관한 이야기와, 그 대상이 성준수라는 것. 그것을 얼마  전 복도에서 들었다는 것. 대화 상대가 센터장과 이주원이었다는 것. 이주원은 말리는 쪽이었다는 것까지.

"근데 그 폐기가 뭔지는 아시죠?"

"대충은. WPC에 있을 때 애들 사라지고 그랬잖아. 죽었겠지."

"아시는구나…."

"너는 어떻게 아는데."

"다 방법이 있죠, 훗."

"또 헛소리."

"…저도 그 뭐냐, 거기 출신이긴 하잖아요."

"아, 그랬지."

성준수는 방금까지 엄청난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덤덤하게 말했다. 기상호는 성준수가 분노해서 길길이 날뛸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성준수는 얼음처럼 차갑고도 차분했다. 마치 이러한 결말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라는 듯이.

"그래서 그런 말씀을 하셨구나."

"뭐가요?"

"이주원 선생님이. 원중을 떠나랬어."

"……."

"그런데 말이 되냐, 씨발? 지수가 인질이 되는데."

"…햄."

"왜."

"혹시나 생각 있으시면 언제든 얘기하세요."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모르잖아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성준수는 고뇌했다. 모두가 성준수를 향해 떠나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성준수는 진실을 알고 싶었다. 정부에서 숨기는 것이 무엇인지. 저 혼자만 모르고 있는 사실은 무엇인지. 이주원은 무엇을 알기에 자신보고 원중 센티넬임을 포기하라 했는지. 그때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김하준의 실험실. 계단 아래의 작은 공간에 있던 서류. 읽다가 황급히 못 본 척 했던 그 서류. 그 서류가 말하는 내용이 전부 다 사실이라면, 선화교에서 조작한 것이 아니라면, 성준수는 정부를 신뢰할 수 없었다. 제가 충성을 바친 국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더 확실한 증거를 찾아야 했다.

'참모 회의실. 그 안에 있는 자료실에 가야 해.'

회의실에 들어갈 방법이 필요했다. 들어가고 싶다고 하여 무턱대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으니까. 적어도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를 노려야 했다. 성준수는 칩이 내장된 팔목을 들여다보았다. 어쩌면. 만에 하나 어쩌면, 열릴지도 몰랐다. 출입 권한을 부여하는 건 통제실에서였다. 내장된 칩은 GPS이자 출입증이었다. 사람에 따라 출입 권한도 다르게 주어졌다. 이 년 전, 전영중이 처음 성준수의 숙소에 들어왔을 때 의문을 가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배정받은 숙소 외에는 출입 권한이 없었으므로. 뭐, 가끔 숙소를 옮긴 사람들이 전 숙소 출입 권한이 지워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성준수는 선화 마을로 가기 직전 회의실에 갔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때 분명히 출입 권한도 함께 받았었다. 통제실 사람들은 종종 부여했던 권한을 직후에 회수하는 것을 잊곤 했다. 성준수도 이번에도 그러길 바랐다.

네 탐지 능력 좀 쓰자. 그는 다짜고짜 기상호를 숙소에서 끌고 나왔다. 부러 새벽 시간대를 골랐으나 전쟁에 밤낮이 있을 리 없었다. 언제든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영문도 모르고 잉잉거리며 끌려온 기상호는 회의실 너머의 기류를 읽었다. 그 눈빛이 서늘하니 제법 진지했다. 아무도 없어요. 그 말에 성준수는 조심스레 손등을 갖다 대었다. 1초, 2초, 3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절로 한숨이 푹 나왔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 생각하며 스르륵 손을 내리려던 순간.

삐빅, 스르르륵. 매끄럽게 문이 열렸다. 야, 됐어. 이제 너는 가. 햄 진짜 너무해요. 기상호가 우는소리를 했으나 같이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말하자면 이건 국가 기밀을 불법 열람하는 행위였으니까. 위험한 일에 저 말고 다른 이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쉬고 있다가 갑자기 끌려온 센터 막내라면 더더욱. 성지수의 나이와 같던데, 그런 애까지 곤란한 상황에 떠미는 건 성준수 입장에서 못 할 짓이었다. 

등 뒤로 문이 다시 닫혔다. 회의실 안은 컴컴했다. 성준수는 최대한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이동했다. 참모 회의실은 일반적인 회의실에 비해 자주 사용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라도 들키거나 CCTV 기록이 남는 건 사양이었다. 가장 안쪽에 위치한 자료실도 참모 회의실 출입 권한과 동일한지 별다른 문제 없이 열렸다. 안에는 여러 서류들과 녹취록이 있었다. 서류들은 대개 전술에 관한 내용들이었으며 녹취록은 원통 형태로 날짜별로 진열되어 있었다. 성준수가 불려 왔던 날짜의 녹취록도 있었다. 그것을 꺼내 버튼을 누르자 공중에 화면이 뜨며 대화 내용이 텍스트로 떠다녔다. 음성도 함께 들려왔다.

─저 못합니다.

─성준수 중위, 요새 그렇다 할 실적도 없던데…, 여동생은 지켜야 하지 않겠나?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다시 버튼을 눌러 녹취록을 끄고 제자리에 돌려 놓았다. 그런데 같은 날짜에 녹취록이 두 개가 있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성준수는 아까 내려놓았던 녹취록과 같은 날짜의 다른 녹취록을 집어 들었다. 전원 버튼을 꾸욱 누르자 음성이 차차 흘러나왔다. 진실의 소리가.

─…폐기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벌써 세 번째인가 그렇습니다.

─일단 그 얘기는 나중에. 지금 김하준 그놈부터 얘기해야 합니다.

─그 마을이 왜 평화롭겠어. 마약 유통에 실험까지 하는 마을이 산골짜기에 있는 것도 웃기지. 일부러 우리 쪽에서 인력 보내서 이번 새로 개발한 레우논 지원도 해주려 했는데 세력이 커지니 모르는 척하는 게 참 괘씸해.

─처리해야 합니다. 이러다 WPC까지 먹으려 들 겁니다, 김하준은.

─어떻게 할까요?

─성준수, 걔를 보내. 실험체 빼내 오는데 성공하면 좋고. 거기서 폭주하면 더 좋고. 우리 쪽이랑 관련 있다는 자료까지 다 사라질 테니까. 그러다 거기서 죽으면 애물단지 하나 처리하는 거니 다 남는 장사지.

뚝.

허억, 허억. 성준수는 재생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계속 듣고 있는 것이 괴로웠다. 자신이 들은 내용이 사실이 맞는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동안 제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국가는 정의롭지 않다. 정부는 선하지 않다. 그들은 성준수가 충성하는 만큼 성준수를 위할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성준수는 무엇을 위해 충성해야 하는가. 하, 씨발.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믿어왔던 정부가 틀릴 수도 있다는, 아니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웠다.

확실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선화 마을의 실험실은 정부와 김하준의 합작품이다. 둘째, 그들은 성준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공병조가 선화교를 처음 만들었을 적에는 정부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세력이 확장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 세상에서 믿음은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물자였다. 정부는 제 한 몸 아끼지 않을 실험체가 필요했고, 공병조는 자금과 센티넬을 만들어낼 능력이 필요했다. 게다가 선리신을 믿는 자들은 믿음 하나로도 죽음에 뛰어들만한 자들이었다. 정확한 이해관계의 합치였다. 그리하여 연구원 중 하나인 김하준이 파견되었다. 가장 뛰어난 연구 실적을 가지고 있으나 윤리의식을 상당히 중요시하는 이주원과 다르게 센티넬 개화를 위해서는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뜻을 갖고 대립하던 자였다. 그는 선리신을 모시는 부주교의 역할을 제법 잘 수행하였다. 선화 마을은 일부 센티넬들을 위한 마약 유통책 역할도 함께했다. 그들은 선리신이 아닌 정부의 비호 아래 안전하고 평화로운 마을을 꾸려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 욕심이라는 건 끝이 없어서 김하준은 제가 신이 되길 바랐다. 정부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독단적인 실험들을 진행하거나 마약 공급량을 제멋대로 조절하기 시작했다. 이를 알게 된 정부는 김하준과 선화교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일명 꼬리 자르기를 시도했다. 그 중간에서 희생된 것은 성준수 자신이었고.

하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성준수는 살아 돌아왔다. 의료진에게 압박을 가해 치료 또한 막았으나 가이딩으로 목숨을 부지했다. 가이딩을 시도했다는 전영중에게 미쳤냐고 개지랄을 떨었는데, 돌아오면 미안하다는 사과 정도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도 식은땀이 뚝뚝 흘렀다.

숙소로 돌아와서도 두근거리는 심장은 진정할 줄을 몰랐다. 잠이 오질 않았다. 언젠가 악몽을 꾸던 나날들의 반복이었다. 출정을 나간 전영중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성준수는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했다. 이렇게나 세상은 진실의 편이 아니다. 진실은 보상받지 못한다. 진실은 언제나 잔혹하므로.

성준수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녹취록의 내용이 반복해서 재생되었다. 신경 안정제를 먹어도 환청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성준수는 원중을 떠나라던 이주원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어쩌면 이주원은 미리 알고 있었겠지. 그래서 그런 말을 남겼을 것이다. 원중을 떠나라고. 원중 센티넬임을 포기하라고. 정부를 믿지 말라고.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온 퀭한 얼굴로 거실을 배회하며 침음에 잠겼다. 서성이던 성준수의 발끝에 젠가가 채었다. 그걸 보자 어느 날의 어린 밤이 생각났다. 여기 들어온 이유를 잊지 마. 아마 어린 제가 어린 전영중에게 해주었던 말. 그 말이 돌고 돌아 다시 저에게로 향했다. 센터에 들어온 이유가 뭐였더라. 나는 왜 이곳에서 충성을 다하고 있었더라. 목적은 하나였다.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하지만 좀 더 근원적인 의문이 들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답은 '아니다'였다. 지킨다는 것이 어떻게 육신에만 한정되겠는가. 성준수는 성지수가 무사하길 바랐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만약 성준수가 죽는다 하더라도 그녀의 정신은 안녕할까? WPC에 자원할 때도 가지 말라 붙잡고, 아끼던 젠가를 양보하고, 휴가 나갈 적이면 언제나 저를 걱정하기 바쁜 여동생이. 분명 울기에 바쁘겠지. 그리고 정부를 향한 의심의 싹도 점점 깊게 뿌리내렸다. 성준수가 죽으면 정부는 끝까지 성지수를 안전하게 보호해줄 것인가? 맹목적으로 정부에 충성할 때는 그러리라 답했겠지만, 지금은 자신이 없었다. 자신만의 정의를 따르고 있다고 믿던 성준수는 사실 선리신을 믿던 선화교도들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괴로운 진실을 마주한 지금, 그의 마음은 외치고 있었다. 정부를 버려야 한다고. 살고 싶지 않냐고. 그러려면 떠나야만 한다고. 이곳에 들어온 이유를 다시금 깨달은 성준수는, 과감히 선택해야 했다.

정부를 버리고 향할 곳은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역시 걱정되는 것은 성지수의 안위였다. 성준수만 홀로 무책임하게 떠나버리면 그녀를 지켜줄 사람이 없었다. 고문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성준수는 떠나가기 전에 성지수를 반란군 쪽으로 빼돌려야 했다. 그러나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성준수는 답답한 마음에 욕을 크게 내지르며 벽에 머리를 박았다. 모든 것이 산 넘어 산이었다. 제가 죽거나 성지수가 죽거나. 결론이 자꾸만 둘 중 하나로 났다. 가지 않은 길, 가야만 하는 길, 이미 걸어온 길, 가고 싶은 길. 그 모든 길들의 무게는 성준수 위에 얹어졌다.

혹시나 생각 있으시면 언제든 얘기하세요. 문득 기상호의 말이 생각났다. 대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인지. 하지만 이 막막한 상황에서 뭐라도 해야 했다. 작은 가능성 하나라도 간절했다. 안 그래도 어제 새벽 강제로 끌려 나온 탓에 잔뜩 피곤한 상태로 훈련에 참여하던 기상호의 뒷덜미를 잡았다. 기상호는 또 잔뜩 쫄아있었다. 해, 햄? 이거 놓고 우리 말로 하, 하죠?

"너 전에 도움 필요하면 말하랬지?"

네? 기상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성준수는 또 욕을 참지 못했다. 성준수는 사람들이 잘 쓰지 않는 비상계단 쪽으로 기상호를 이끌었다. 기상호가 또 이상한 말을 하려 하길래 입 닥치라는 말을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니가 전에 말했잖아. 원중을 떠나니 마니 얘기할 때."

"아아, 진작 얘기하시지."

"거기서 얘기하게? 미쳤냐?"

"아, 아뇨…. 죄송합니다."

"아무튼 방법이 있으니까 그런 말한 거 맞지? 걍 떠본 거면 죽인다."

"동생분 빼내시려구요? 어디라도 상관없어요?"

"어. 안전하게만."

"후회하지 마세요."

"정부 피해서 갈만한 데가 반란군밖에 더 있냐. 후회 안 해."

"……! 그럼 준비해 두겠습니다, 낄낄."

평범하게 얘기해. 그렇게 이야기하며 성준수는 기상호의 뒤통수를 가볍게 쳤다. 기상호는 뒤통수를 문지르며 말했다. 잘 진행되면 알려드릴게요. 걱정 마십쇼.

"야, 전영중."

"왜?"

"너도 휴가지? 나가자, 오늘."

"요 준수, 오늘내일하더니 이제 다 나았나 봐?"

"헛소리 하지 말고."

"헛소리라니, 준수야."

"갈 거야, 말 거야."

"갈게."

생각해 보면 정말 오래간만에 겹친 휴가였다. 그것도 멀쩡히 밖을 나갈 수 있는. 그동안은 휴가여도 어느 한쪽의 몸 상태가 좋지 못했던 적이 훨씬 많았다. 전쟁이라는 게 참으로 사람을 여유 없게 만들었다. 생각해 보니 함께 도심으로 나간 것도 일 년이 훌쩍 넘은 이야기였다. 어쩌면 이번이 전영중과 함께 보내는 마지막 휴가일 것이었다. 기상호로부터 성지수가 안전한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이 어제의 일이었다. 전염병으로 인해 방에서 격리 중인 것으로 알고 있을 테니 며칠 정도의 여유는 있을 것이라며 씨익 웃었다. 필요한 거 잘 챙기시고, 여기로 가세요. 준수 햄, 떠난다고만 했지 어디로 갈지는 아무것도 안 정하셨죠? 성준수는 기상호가 건넨 쪽지를 황급히 숨겼다. 얼핏 보니 위치가 표시된 약도였다. 성준수는 떠날 것이다. 오늘 밤. 쪽지를 받은 뒤 자료실에 들어가 서류들도 훔쳐 왔다. 이런 것이라도 있으면 반란군 측에서 좀 더 자신을 수월하게 받아주겠지. 성준수는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반란 분자가 되었다. 이젠 갈 곳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걸 위해 그러니까 이건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였다. 성준수가 전영중에 대한 마음을 인정한 이후의 첫 데이트.

전영중은 웬일로 네가 먼저 나가자고 하냐며 웃었다. 그러면서도 좋아하는 기색을 감추질 못했다. 감정을 알고 보니 그런 모습들이 훤히 보였다. 틱틱대는 것도 감정에 솔직하지 못해 그렇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주 함께 있는 시간을 만들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는 와중에 다른 건 몰라도 그것 하나는 아쉬웠다. 아주 많이.

도심으로 나아가는 길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마지막이 될 걸 알아서 그랬나. 성준수는 그저 허탈하게 웃었다. 결국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평생을 살아오며 지켜오던 곳을 떠난다는 허탈함에.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므로.

"아, 씨, 더 여유롭게 나올걸."

"왜?"

"왜긴. 전영중 니가 바다 가보고 싶다며."

"다음에 가면 되지. 그땐 멀리 나가자."

전영중은 왜 그런 걸로 성질이냐는 듯이 성준수를 달랬다. 성준수는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우리에게 다음이 있을까. 왜 항상 모든 선택에는 아쉬움이 남는지. 기회비용이 0인 선택이라는 건 왜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 남들이 보기엔 뭐든지 척척 결정해 내는 것 같은 성준수도 이러한 섭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어떠한 순간에는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 때가 온다. 성준수는 가장 후회가 적을 선택을 하기로 했다.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 늦기 전에 진심을 전하는 것. 지나칠 만큼 가까운 거리감을 인정하는 것.

"그런데 준수 네가 웬일로 먼저 나가자고 해?"

"얼마 안 남은 여유 좀 즐겨보려고."

"요 준수, 사치 좀 부리네?"

"평범하게 살고 싶은 게 욕심이냐? 씨발."

"왜 또 화를 내."

오랜만에 나와보는 도심은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한산한 것은 똑같았지만 못 보던 가게들이 여럿 생겨있었다. 일 년도 전에 왔던 도심과는 완전히 다른 곳 같았다. 유행은 왜 이렇게 빨리 낡아버리는지. 이런 세상에서 유행이라는 걸 추구하는 것조차 우스웠다. 여전히 남은 것은 공터와 아직도 굴러다니는 버려진 공이었다. 그걸 보며 둘은 또 옥신각신 싸웠다. 그때 내가 이겼니마니 점수 차가 몇 점이었니, 별 시답잖은 주제였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우리 같아서, 그래서 오래도록 잊지 못할 순간이 되리라 느꼈다. 전영중도, 성준수도. 마치 일 년도 지난 순간들이 여전히 생생하듯이. 오랫동안 그리워할 순간이 되었듯이. 오늘 또한 그러할 것이었다.

시간이 늦어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포토 부스가 있었다. 빠르게 변화하는 도심 사이에서 공터처럼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어쩌면 도심의 일부가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영중은 성준수를 포토 부스 안으로 이끌었다. 성준수는 또 사진을 찍냐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봐."

"전에 찍었잖아."

"준수야, 또 찍을 수도 있지."

"귀찮아."

"전에 찍었던 사진 망가졌어. 네가 방에서 폭주했을 때."

"……."

"신경도 안 썼구나? 진짜 너무하다."

"야야, 찍으면 되잖아. 하 씨발, 그래 찍자."

이번에는 전영중이 먼저 움직였다. 여전히 아날로그 그대로의 감성을 갖고 있는 포토 부스. 지난번처럼 전영중은 홀로그램 화면을 보며 컷을 골랐다. 한 번 해봤다고 손짓이 익숙했다. 고민도 없이 고른 것은 지난번과 같은 두 컷이었다. 곧바로 화면에 둘의 모습이 비치며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포즈는 어떻게 하게? 성준수가 그렇게 묻는 것까지 지난번과 다를 것이 없었다. 전영중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야기했다. 지난번이랑 똑같이 찍자. 성준수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수긍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둘 다 일부러 뻣뻣하게 굳은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어색한 브이 자세는 덤이었다. 그 모습이 웃겨 셔터가 눌리자마자 전영중은 파학학 웃었다. 성준수는 기왕 찍는데 너무 병신같이 나오는 거 아니냐며 짜증을 부렸다. 다음 포즈를 이야기할 새도 없이 다시 셔터가 눌렸다. 훨씬 더 자연스러우면서도 지난번과 같은 상황이 찍혔다. 비슷한 사진 속에 전혀 다른 기억이 담길 수 있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액자도 사서 숙소에 놔야겠다면서 전영중은 사진을 소중히 챙겼다. 성준수도 사진 한 장을 챙기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숙소에 놓인 사진은 아마 영영 다시 볼 수 없을 테니 자신의 몫은 잘 챙겨야 했다. 불행을 재고처럼 쌓아두고 소진하는 삶 속에서도 마음 기댈 곳 하나쯤은 있어야 했으니. 막연한 행복 같은 것을 좇는 것보다는 확실한 대상에서 위안을 얻는 것이 편했다. 사진 속 전영중과 성준수의 스물하나는 그저 말갛기만 했다. 변치 않고 영원히.

전영중은 성준수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성준수는 어딘가 불안하면서도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떠나버릴 사람처럼. 전영중은 성준수가 그런 분위기를 풍길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심장 가운데 돌 하나가 깊이 박힌 것처럼 무거우면서도 따가웠다.

전영중은 거짓을 말하는 것과,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의 가닥 사이에서 고민했다. 성준수가 도주할 것이라 보고할지, 혹은 모르는 척 입을 다물지. 하지만 고민의 시간은 의미가 없었다. 전영중은 짐짓 모르는 체를 했다. 어쩌면 전자를 택하는 것이 전영중 입장에서는 후환이 없을 것이었으나, 제 안위 하나 때문에 성준수를 팔아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전영중은 이제야 어렴풋이 성준수를 이해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것처럼 굴던 성준수를. 가장 강한 자는 지킬 것이 있는 자였다.

사실상 성준수는 전영중에게 잊지 못할 존재였다. 그에게 밤은 여전히 무섭고 힘겨웠다. 해가 지는 게 싫었다. 지하가 싫었고 침대가 싫었다. 침대가 무서웠다. 그 아래 있는 괴물이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이 자신을 빨아들일 것 같았다. 그 안에 빨려 들어가면 또다시 수술대 위에 누워 영영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전영중은 늘 살고 싶었는데 어둠이 올 적이면 그 속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성준수가 전영중의 밤을 어둡지 않게 했다. 이름을 불러주었다. 침대를 벗어나 누군가를 돌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성준수는 그런 존재였다. 그를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위험을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직감했다. 사실상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백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식사를 얼추 끝마치고 나서도 둘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전영중은 머뭇거리며 타이밍을 쟀고, 성준수는 없는 말솜씨로도 단어를 고르고 골랐다. 식당을 겨우 나서서도 말없이 걸었다. 어느새 사람 하나 없는 공터가 코앞이었다. 어색한 정적이 얼마나 흘렀을까. 둘 다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민망함에 둘 다 서로에게 순서를 양보했다. 너 먼저 말해, 로 시작한 양보는 역시나 작은 다툼까지 번졌다. 아, 니가 먼저 말하라고. 이 실랑이가 아무런 영양가가 없다고 느꼈는지 성준수가 한숨을 쉬고 다시 전영중을 불렀다.

"야, 전영중."

"어, 준수야. 먼저 얘기해."

"처웃는 거 보니까 또 말하기 싫어지네."

"먼저 말하겠다며."

"너 그러는 거 보니까 또 말하기 싫어."

"못됐다, 준수야."

"씨발."

"그래서 할 말이 뭔데. 우리 좀 진척을 보자."

성준수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 내뱉었다. 나 너 좋아한다고. 오늘은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성준수다운 고백이었다. 구구절절 장황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깔끔하고 단정한 말들. 말을 고르고 고른 끝에 남은 것은 그 자체의 진심뿐이었다. 하지만 전영중은 그 어떤 고백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처음 듣는 고백이지만 단연 최고였다.

전영중은 안도했다. 걱정했던 말이 아니어서 그랬다. 내내 불안해 보이던 것은 그저 고백할 타이밍을 위해서였구나. 성준수도 저와 같았구나. 전영중은 지난날들을 떠올렸다. 저 혼자 성준수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던 날들을. 성준수가 죽을까 봐 노심초사하고, 그를 업고 간절하게 달렸던 날들을. 그제서야 점점 실감이 나며 벅차올랐다. 준수야, 사실 나도. 농담 아니고 진짜야. 성준수의 고백처럼 전영중의 대답도 담백했다. 센티넬과 가이드 사이가 아닌 센티넬과 센티넬 사이에서도 감응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센터에 돌아가면 이주원에게 방법을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전영중은 이 순간이 깊은 꿈은 아닐지 생각했다. 만약 그렇다면 깨지 않기를 기도했다. 오늘을 영원하게 할 수는 없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성준수가 다시 입을 열기 전까지는 말이다.

"영중아."

전영중 말고 영중아. 방금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기에 부르는 다정한 호칭이라기에는 어딘가에서 질척한 불안이 뚝뚝 묻어났다. 전영중은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바로 이런 말 해서 미안하다. 그래도 좋아한다는 건 진심이야. 전쟁터에서 너 대신 죽을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정의를 포기하는 건 다른 문제더라."

늘 말했듯이 난 내 사람을 지키는 것이 나의 정의야. 성준수가 하는 말이 귓가에 웅웅 울렸다. 전영중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것은 내 생애 최초이자 최악의 고백이다.

"나 떠나려고. 센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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