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GHT or FLIGHT

FIGHT or FLIGHT 10 (完)

센티넬X센티넬 빵준

"준수야, 너 진짜 미쳤어?"

"씨발, 제정신이거든?"

인적 없는 공터에 화를 움켜쥔 둘의 목소리가 흩어졌다. 전영중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왜 항상 불길한 예감은 틀림이 없는지. 왜 이럴 때만 성준수를 알기 쉬운지. 준수야, 나는 여전히 너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온갖 말들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가 가라앉았다. 성준수의 말 하나에 하루의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꿈날을 헤매는 것 같다가 지금은, …지금은 모르겠다. 자꾸만 울렁거리는 검은 감정에 이름을 차마 붙일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 다른 삶은 꿈꿔본 적이 없었다. 전영중의 상상력이 유난히 빈곤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주어진 선택지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영중은 어릴 적부터 정부에 충성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국가에 봉헌하는 센티넬로 자랐다. 그게 너무나 당연했다. 그렇게 전영중의 세계는 좁아져 갔고, 다시 팽창할 줄을 몰랐다. 중력을 제어할 줄 알면서도 세계의 확장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다. 전영중은 성준수가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그저 제 얄팍한 상상 속에서만 그칠 줄로 알았다.

되려 억울하기도 했다. 너도 내가 좋다고 했잖아. 너도 이제 살고 싶잖아. 같이 바다에 가고 싶잖아. 평범한 나날들을 꿈꾸고 싶잖아. 전영중은 성준수보다도 성준수의 미래가 걱정되었다. 두려웠다. 무서웠다. 그 불확실한 앞날이. 하지만 성준수는 자꾸만 나아간다. 전영중을 뒤에 남겨두고 빠르게 전진한다. 전영중은 지금 내뱉는 말들이 얼마나 구차하게 들릴지 알면서도 입을 멈추지 못했다. 말끝마다 입술을 깨무는 것은 눈물을 참기 위한 마지막 노력이었다. 성준수는 전영중의 말을 들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기에 탓할 수가 없었다. 그저 상황이 이랬을 뿐이다.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이 모양이라. 기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들의 운명 또한 기구할 수밖에 없었다. 삶을 살기 위해서 사랑은 지나치게 낭만적이었다. 평범함은 욕심이자 사치였다. 전영중은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발음은 마지막 남은 그의 자존심이었다.

"준수야, 제발 목숨 좀 아껴. 너는…, 너는 무섭지도 않아?"

성준수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전영중은 다시 외쳤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왜? 이번에는 센터를 떠나는 게 네 임무야? 또 너 아니면 할 사람이 없대? 왜 항상 위험한 길이란 길은 혼자 다 걷냐고!

"하…씨. 야, 나도 무서워. 누구는 안 무서운 줄 알아?"

그런데 어떡해. 영중아, 나도 이제 살고 싶어. 그런데 어떡해 씨발. 계속 사지로 내모는데. 안 무서운 척이라도 해야 내가 살 것 같은데 어떡해. 나를 속이지 않으면 뭣도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그런데 너까지 그렇게 말하면, 나는 어떡해.

전영중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듣는 성준수의 깊은 내면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서려 있었다.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는 듯한 목소리. 그마저도 성준수다워서. 씁쓸한 마음에 전영중은 그저 입술을 짓씹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왜 마음의 무게는 제 뜻대로 할 수가 없는 건지. 무거운 마음을 추로 사용할 순 없는 걸까. 성준수를 잡아둘 무거운 추로.

"준수야, 다시 생각해 봐."

"…장난해?"

"왜 떠나려고 하는데."

"전영중, 너도 잘 생각해. 정부는 절대적인 정의가 아니야."

"무슨 소리냐고 그게."

"너한테까지 내 생각 강요할 마음은 없어.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좀 바꿔보려고. 혁명 좀 해볼까 싶어서."

"미쳤어, 너?"

"어. 약간."

가지 마. 아니,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줘. 성준수는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다 생각났다는 듯 입술을 씹었다. 성준수는 한숨을 한 번 쉬고 말했다. 그럼 나는 생일 선물 쓸게. 나 보내 줘. 나 가야 돼, 전영중. 그 간절함에 전영중은 할 말을 잃었다. 전영중은 후회했다. 자신이 아껴뒀던 소원권을 미리 쓰지 말 걸. 아껴두고 아껴놨다 이렇게 필요한 순간에 쓸걸.

"준수야, 너 혼자 뭘 바꿀 수 있는데."

"글쎄, 혼자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그 하나하나가 모이면 변화의 물결이 되는 거 아니겠냐. 나는 그 물결 중 한 점이 되려고 하는 거고. 성준수는 결연하게 말했다. 붙잡는다고 하여 붙잡힐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물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되겠느냐고. 평소처럼 틱틱거리는 말 속에 진심을 숨기는 일은 진작에 관뒀다. 전영중은 직접적으로 말했다. 네가 걱정이 된다고. 정부에서, 센터에서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네가 살기를 바란다고.

영중아, 나는 살기 위해 떠나는 거야. 성준수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하 씨, 어차피 네가 많이 알아봤자 좋을 거 하나 없어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성준수는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 또한 심경이 많이 복잡해보였다. 자세히는 말 못 해줘. 그래도 간단히 말하자면 정부에서는 폐기하려고 해, 나를. 성준수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없었다. 스스로 그 말을 내뱉기까지 몇 번의 의심과 체념을 겪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제 고작 스물한 살이었다. 원중 센티넬로 살아온 건 칠 년이었으니 인생의 삼분의 일을 센터에 몸담고 있었다. 아무리 남들과 거리를 두는 성준수라 하여도 아무 감정이 없을 수는 없었다. 많은 시간 적을 둔 곳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참담했을까.

안타까운 마음에 전영중은 엉망이 된 성준수의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정리해 줬다. 성준수는 순순히 전영중의 손길에 머리를 내맡겼다. 그 모습이 고맙기까지 했다. 전영중은 그저 이 모든 상황이 안타까웠다. 제 의지와는 다르게 이리저리 휩쓸려야 하는 이 사실이, 중심을 잡는 것이 고작인 현실이.

전영중도 알고 있었다. 성준수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떠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그의 결정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전영중에게 남은 선택지는 결국 두 가지였다. 성준수를 따라 떠나거나, 혹은 그대로 남거나. 성준수를 남게 한다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였다.

"너는 어떡할래, 전영중."

덤덤하게 뱉는 소리에 숨이 턱 막혔다. 고백했을 때와 별다른 것 없는 목소리인데도 그랬다. 전영중이 모르는 순간부터 고민했을 성준수의 시간이 무겁게 담겨 있어서 그랬다. 갑작스럽게 내밀어진 선택의 순간에 전영중은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갑작스러웠다.

"준수야, 나는 너무 당황스럽다."

"시간 없어. 나 가야 돼, 이제. 선택해."

"나도 내 입장이라는 게 있잖아."

"어떡할 거야. 강요는 안 해."

"준수야."

"떠날래, 남을래."

긴 침묵이 이어졌다. 여기 들어온 이유를 잊지 마. 전영중은 혼란에 빠졌다. 자신이 이곳에 몸담은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목적을 위해 싸우는지, 자신의 정의는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성준수를 지키고 싶었다. 이 망해가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소중한 한 사람을.

"머뭇거리지 마."

"……."

"선택해야 해, 전영중."

"…준수야."

"어, 말해."

"……."

"……."

"…나는 남아야겠어."

"……."

"…미안."

"그게 네 정의면 어쩔 수 없지."

"……."

"말했잖아. 강요할 생각 없다고."

성준수는 긴 침묵 속에서 얼굴을 찌푸렸다가, 전영중의 대답과 함께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쩌면 전영중이 그러한 선택을 내릴 줄 알았다는 듯이. 성준수는 덧붙였다. 나는 내 사람들을 지키는 게 내 정의야. 그래서 가는 거야. 줄곧 의연한 성준수의 태도에 전영중은 말문이 막혔다. 담백하게 내뱉는 모든 문장들이 상처였다. 숨이 차올랐다. 가빠지는 호흡은 울음의 신호였다. 답도 없이 넘쳐 버리기 전에 참아내야 했다. 성준수. 전영중은 간신히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하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인지는 처음 알았다.

"너 가면, 지금보다 행복할 수 있는 거 맞지."

임무 뺑이치는 짓도 안 하고. 억지로 괜찮은 척도 안 하고. 매일 약을 한 움큼씩 먹는 것도 안 하고. 가끔만 불행하게. 욕심 좀 더 부려서 약간은 평범하게. 전영중은 성준수를 좋아한다고는 생각했으나, 어느 정도의 크기로 들어차 있을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마음의 크기가 생각보다 컸다. 빠져나가려는 그 부피감이 된통 뻐근했다.

"…그건 모르겠는데."

"모르면 어떡하게. 너 진짜 대책 없다 준수야."

좀 멋있게 보내주고 싶은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야속했다. 풀린 신발 끈처럼 미련이 꼬이고 꼬여 발끝을 잡았다. 그 와중에 성준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가. 너 먼저 가. 떠나는 건 성준수면서 전영중이 먼저 발을 떼길 종용했다. 그렇게 떠나는 자와 남겨지는 자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둘은 서로를 떠났고, 동시에 서로가 남겨졌다.

영중아. 그 말에 마음 한편이 콕콕 찔리는 것 같기도 했고, 쥐어짜는 듯 아프기도 했다. 단 한 번도 그렇게 다정하게 불러준 적이 없으면서. 성준수는 이상하게도 전영중을 잘 알았다. 뭘 좋아하고 뭘 잘하는지는 관심도 없으면서 전영중이 무엇에 약한지는 귀신같이 알았다. 지금도 그랬다.

가. 빨리 가. 가서 말해. 성준수가 사라졌다고. 싸운 뒤에 혼자 돌아왔는데, 그 뒤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그렇게 보고해. 그 목소리가 따뜻하면서도 더없이 차가웠다. 목소리에서 온도가, 그것도 상반된 온도가 느껴진다니. 전영중은 지금 자신이 환각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성준수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며 웅웅 울렸다. 그러니까 성준수는, 지금 저를 버리라고 하고 있었다. 떠나지 않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을 팔아 목숨을 부지하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대체 어디까지 전영중을 비참하게 만들 것인지. 전영중은 소리 없이 울었다.

"또 우네. 나 없으면 네 눈물 받아줄 사람 없어서 어쩌냐?"

그러게. 너 없이 어떻게 지낼까, 내가. 전영중은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켰다. 이번에 입을 열면 정말로 흐느끼는 소리가 터져나올 것 같아서 그랬다. 이별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성준수도 오늘을 위해 몇 번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수없이. 치사하게 혼자만.

뒤늦게 울음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 전영중은 거칠게 눈을 부볐다. 이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고작 몇 시간 전만 해도 사진을 어떻게 찍니 마니하며 떠들었는데. 전영중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데. 그것만은 나도 좀 알자.

"모르는 게 나아."

"넌 꼭 그런 식이더라."

"널 위해서라고 씨발."

"그런 거 필요 없다고."

"됐다, 네가 뭘 알겠냐."

"마지막이라면서 꼭 이래야 하냐? 진짜 너답다."

전영중은 그대로 성준수를 남겨두고 뒤를 돌았다. 마지막에는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그게 부끄러워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빨라지는 발소리만큼 심장박동도 빨라졌다. 그러다가 이내 멈춰 섰다. 마지막에 잘 가라는 말은 해줄걸. 그래도 건강하라고 빌어줄걸.

전영중은 다시 공터로 달렸다. 성준수가 멀리 가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성준수가 있던 곳에는 혈흔과 함께 GPS 내장 칩이 허무하게 떨어져 있었다.

전영중은 홀로 숙소로 돌아왔다. 겨울의 밤이 유난히 차가웠다. 그래서 자꾸만 주변에 성준수가 있다는 착각이 들게 했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아침은 지금까지의 밤과는 다를 것이었다. 더 이상 방을 얼어붙게 만들어 전영중을 추위 속에 눈뜨게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함께 훈련을 갈 사람도. 빈 숙소를 지키며 돌아올 자리를 기다리게 만드는 사람도. 괜히 능글거리며 이름을 부르면 바로 반응해 줄 사람도.

당장 내일부터 다시 오지 않을 그 아침이 전영중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여태까지 성준수가 없던 방과 앞으로 성준수가 없을 방은 완전히 달랐다. 이제 그는 영영 돌아올 일이 없으므로. 괜히 어린아이처럼 서러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라도 따지고 싶었다. 왜 이런 세상에서 태어나야 했냐고. 왜 내 사랑은 이렇게나 비참하게 승화하고 있냐고.

성준수를 따라갔어야 했나 잠시 후회했지만 그만두었다. 둘 다 센터를 떠나갔다가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전영중은 그것이 두려웠다. 전영중은 어떤 선택이 더 나았을지를 계속해서 고민하기만 했다. 여러모로 꿈같던 밤을 지나 어쩌지 못할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날 센터는 발칵 뒤집혔다. 이유는 보나마나 뻔했다. 어젯밤 내내 복귀하지 않던 성준수 때문이었다. 도심에 고정된 GPS는 성준수의 부재를 확실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이주원까지 찾아와 전영중에게 성준수의 행방을 물었다. 그의 눈동자 또한 당황과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전영중은 또다시 고뇌했다. 센터를 버리고 떠났다고 이야기해야 할지, 혹은 모르겠다고 대답해야 할지. 떠났다고 말하기엔 타이밍이 너무 늦었고, 모르겠다고 말하기엔 비겁했다. GPS 추적도 안 되는데 네가 어떻게 알겠니. 이주원은 혼자 중얼거리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전영중은 또다시 머뭇거렸다. 찰나의 대답조차도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그 사실이 비참했다. 하지만 이주원이 나간 순간, 잠시라도 안도했다는 사실이 가장 비참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장 군인들이 숙소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왔다. 전영중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이런 비슷한 광경을 예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다급하게 외치는 전영중을 향해 여러 개의 총구가 겨눠졌다. 순순히 가겠다니까요, 우리 말로 합시다.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실탄 대신 테이저의 날카로운 바늘이 목에 꽂혔다. 센티넬을 대하는 취급은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온 전류가 그의 모든 세포를 지지기 시작했다. 몸이 뻣뻣하게 굳었고, 전영중은 서서히 정신을 잃었다.

전영중은 드문드문 정신을 차렸다. 온몸이 묶인 채였다. 처음으로 본 광경은 심문실 안쪽이었다. 언젠가 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본 적이 있었는데. 눈을 감고 뜰 때마다 다른 사람이 그를 반겼다. 머리가 온통 어지럽고 사방이 돌았다. 감각이 교란되고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약물과 투입 용량을 훨씬 넘긴 진정제에 절여진 뇌가 전원이 다 된 듯 깜빡거렸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혹은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낯이 익은 남자들이 그에게 무어라 웅얼거렸다. 성준수. 도주. 예상. 위치. 다시 도주. 도주. 배신. 단어들이 짤막하게 끊겨 들렸다. 물 속에 있는 것처럼 뿌옇게 들렸다. 숨을 들이마쉬고 내쉴 때마다 폐가 타는 것 같았다. 바닥은 차갑고 공기는 뜨거웠다.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가 노이즈가 가득 낀 것처럼 흐릿해졌다. 공간이 기이하게 휘었다. 분명히 묶인 채로 앉아 있는데 몸이 기우는 것 같았다. 심문실 천장과 바닥이 바뀐 듯한 착각이 들었다. 공간감이 엉망이었다. 천장 위에 거꾸로 매달린 것 같기도 했다. 성준수. 위치. 예상. 서류 도난. 배신. 도주. 성준수. 반복적인 단어들이 뇌를 지졌다. 정신이 너덜거렸다. 자백. 구속. 심문. 전영중은 단어들을 통해서 상황을 추측했다. 심문의 첫 단계였다. 감각 교란과 약물을 통해 센티넬의 정신을 무너뜨리기. 고통 속에서 전영중은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냥 죽이지 그러세요. 그마저도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이었다.

고문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센터의 목적은 전영중을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전영중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 누더기가 된 정신 상태에서 원하는 정보를 말하게 하는 것. 그 과정에서 죽지 않게 하는 것. 하지만 센터가 진정제의 투입량을 조절하지 않아도 전영중은 죽지 못했다. 이미 걸레짝이 된 학대당한 정신은 자꾸만 잠에 빠져들었다. 성준수가 자의로 떠나갔음을, 그리고 그것을 미리 알았음을 말하지 않겠다는 것을 택한 무의식의 방어 기제였다. 바닥을 알 수 없는 낙하 끝에 어둠으로 떨어지면, 공터 앞의 성준수가 꿈에 나왔다. 전영중은 그저 눈물을 흘렸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전영중을 풀어주지 않았다.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그를 묶은 구속 장치를 풀지 않을 것이다. 감각 교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리 능력을 써봐도 무용지물이었다. 과다 투여된 진정제와 손발을 묶은 구속 장치가 전영중의 노력을 무력화했다. 피로가 누적된 몸은 더 이상 발작을 일으킬 힘도 없었다. 전영중은 끝까지 입을 다물다가 코피를 흘리며 까무룩 정신을 잃기를 반복했다.

기억은 언제나 완전하지 않았고, 그래서 쉽게 상했다. 망설이지 말고 차라리 말을 해. 성준수는 분노하는 것 같기도, 걱정하는 것 같기도, 혹은 동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제야 전영중은 울면서 입을 열었다. 아파요. 너무 아파요. 살려주세요. 아파서 죽을 것 같아요. 살려주세요. 다 말할게요.

전영중은 성준수의 배려에 기대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벗어날 수 있었다. 전영중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이야기했다. 싸운 뒤에 혼자 돌아왔는데, 그 뒤로 성준수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성준수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 보긴 했는데, 이미 없었다고. 하지만 어디로 갔는지는 전혀 모른다고. 정신 검사 결과 진실로 판명 났다.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은 것은 전영중을 염려하며 떠나간 성준수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전영중은 숙소로 돌아와 울었다. 악몽은 깊은 밤이나 침대 밑 따위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다. 악몽은 현실 그 자체다.

"왜 그랬어."

이주원이 전영중을 찾아와 물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쉬이 대답하지 않았냐는 뜻일 것이다. 왜 고문까지 불사하면서 입을 열지 않았냐고.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몰라요."

무의식적 생각은 정신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을 때 발생했다. 마주한 벽에서 뇌가 만족스러운 분석과 해석을 찾는 것에 실패했을 때 말이다. 막다른 곳에서 벗어나려는 의식적인 시도는 가끔 성공하기도 한다. 일부 정보는 버리고, 그 대신에 다른 정보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단서의 다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지식의 다른 부분을 들춰내려 할 것이다. 아마도 제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러한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답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성준수를 도와야겠다'라는 메커니즘을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다. 저를 두고 떠나겠다 홀로 결정 내린 야속한 성준수를 도울 이유는 전혀 없음에도. 그래서 그럴싸한 이유를 붙였다. 도망치기가 겁이 나. 하지만 떠나지 않은 것도, 고문 속에서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성준수를 지키고 싶다는 생각.

그냥 겁나서 그랬나 봐요. 제정신은 아니었잖아요. 그런 무의식의 형태까지 파악할 수 없는 전영중은 성의 없게 대답했다. 이주원은 그런 전영중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 모든 일이 제가 내뱉은 한마디의 나비효과가 불러온 거대한 비극 같았다. 결국 성준수는 원중을 떠났고, 전영중은 그걸 알면서도 남았다.

"네가 성준수 위치를 알고 있을 줄 알았나 봐."

"근데 저도 진짜 몰라요. 말 안 해줬어요."

"알아. 그런데 얻어낸 게 없으니 결국 준수 위치 파악에는 실패했나 보더라. 네 진술만 기다렸다가 지연됐대."

"그래요?"

그렇게 되묻는 전영중에 눈에 약간의 생기가 돌아왔다 이내 숨겨지는 것을 이주원은 놓치지 않았다. 전영중이 남은 것은 어쩌면 성준수를 지키기 위함일지도 몰랐다. 이주원에게도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맹목적인 충성인지, 한낱 남은 양심인지. 자신의 정의를 정의해야 했다.

센터의 수뇌부는 여전히 어수선했다. 센티넬의 탈주보다도 유출된 전술 보고서가 더 시급한 문제였다. 그것을 들고 사라진 성준수의 행방을 도통 추적할 수가 없었다. 하나 남은 여동생의 행방도 묘연했다. 그와 마지막까지 있었던 전영중이 무언가를 알 것이라 생각하고 안일하게 굴어 추적의 골든타임을 놓친 것도 한몫했다. 어쨌거나 명백한 배신이었다.

길고 긴 회의가 지속되었다. 성준수를 어떻게 잡아 올지, 혹은 처분할지에 대한 논의였다. 만약 반란군으로 넘어간 상황이라면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주요 엘리멘트 계열 센티넬이 적진으로 갔다면 전세가 뒤집힐 수도 있는 큰 문제였다. 일각에서는 그러니 폐기 일자를 앞당겼어야 한다는 발언까지 나왔다. 다른 이들은 이렇게 될 줄 알았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회의장은 순식간에 저급한 시장통이 됐다.

"제가 할게요."

회의실에 난데없이 나타난 건 겨우 몸을 회복한 전영중이었다. 신경 안정제가 투여되고 있는 링거 바늘을 주렁주렁 매단 채였다. 그럼에도 전영중은 조금의 떨림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찾아올게요. 맡겨주세요.

사람들이 온통 술렁였다. 전영중을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 의견이 갈렸다. 전영중은 다시 한번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지금 제 꼬라지 보이시죠? 누구 덕에 이렇게 된 것 같아서 그 허연 낯짝이라도 다시 보려고요, 하하. 저만한 적임자가 없을 것 같은데.

논의의 주제가 바뀌었다. 전영중이 성준수 수색팀 리더에 걸맞은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들은 못 하는 소리가 없었다. 둘이 자주 다니던데 친구라고 봐주는 프락치가 되겠다는 거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을 때는 전영중도 움찔거렸다. 이야기는 점점 전영중과 성준수 사이가 어땠느냐로 변해갔다. 결국 그 지지부진한 말싸움에 이주원까지 끌려 올라왔다. 이주원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금방 이야기의 논점을 파악했다. 전영중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친구라기 보단 라이벌이었고, 둘은 매일 싸웠습니다. 전영중 중위는, …그자가 공적을 혼자 쌓는 것에도 평소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만한 적임자가 없습니다.

그는 한 명 한 명의 원중 아이들이 소중했다. 그는 원중 센티넬들이 조금은 덜 불행하길 바랐다. 그리하여 이주원은 전영중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주원의 정의는 마지막까지 사라지지 않은 도덕성이었다.

전영중과 성준수에 관한 소문은 무성하게 자라났다. 성준수가 따라다니며 전영중을 괴롭혔다. 임무에 자주 나간 것도 공적을 독차지 하기 위해서였다. 성준수가 국가를 배신하고 떠나갔다. 같은 숙소 쓰던 전영중은 영문도 모르고 고문을 받았다. 소문은 다소 과장되어 있었으며 거짓 또한 중구난방으로 섞여 있었다. 전영중은 그 소문들을 바로잡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성준수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이야기하여 수색 임무를 받아낸 마당에, 그 소문들을 바로잡아봤자 이득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의를 봐야 했다. 전영중이 성준수 수색 임무를 자원한 까닭은 여러 가지였다. 팔자에도 없는 고문을 받은 것이 억울해서 주먹부터 날려주고 싶기도 했고, 그를 찾는 척만 적당히 하며 성준수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전영중이 적임자는 자신이라고 확언할 수 있었던 이유. 성준수를 누구보다 보고 싶어 하는 건 전영중 자신이었으니까.

수색 임무라고 해봤자 거창할 것도 없었다. 평소와 같이 임무를 나가되, 그 빈도수가 이전보다 잦고 파견 범위가 넓었다. 대신 현장에서도 성준수를 찾는 것을 가장 최우선으로 했다. 정부에서는 전영중에게 이야기했다. 성준수를 발견하면 생포해 와도 좋지만, 여건이 되지 않으면 죽여서라도 시체를 가져오라고. 그렇게라도 국가를 배신한 센티넬의 말로를 널리 알려야 한다고. 사실 전영중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으나 앞에서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성준수를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들이 허망하게 흩어졌다. 숙소는 옮기지 않았다. 전영중은 여전히 지하 꼭대기 층에 살았다. 전영중은 영원히도 외롭게 지하 깊숙한 곳에서 돌아오지 않을 성준수를 기다릴 것이었다. 숙소가 유독 넓어 보였다. 혼자 살기에 이리도 넓은 곳에서 성준수는 어떻게 혼자 살아갔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전영중은 다시금 가구를 채워넣기 시작했다. 그러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성준수가 뒤에서 말을 걸 것 같았다. 야, 그냥 다 치워, 라고. 그런 순간이 오면 전영중은 다시 바닥에 주저앉아 작게 웅크렸다. 그러면 조금이나마 외로움이 해소되는 것 같았다. 발끝에 이제는 할 상대가 없는 젠가가 채였다. 그걸 본 전영중은 한 번 더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어떤 관계는 젠가 같다. 새로운 시간들을 계속 쌓아나가면서도 점점 더 불안해지고 위태로워진다. 서로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으려 조심하지만 단지 그뿐. 그러다가 정말 어느 한순간, 아주 미약한 건드림만으로 쌓아 올려왔던 것들은 와르르 무너진다. 그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그 하나를 건드릴 수밖에 없도록 이미 너무 많은 서로의 부분들을 함께해왔기 때문이다. 그 많은 나무토막들을 함께 쌓아왔기 때문이다. 전영중과 성준수의 관계가 그랬다.

전영중은 여전히 남아있는 성준수의 연락처를 들락거렸다. 어차피 받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준수야, 잘 지내? 제법 전남친 같은 메시지가 마지막으로 전송되어 있었다. 역시나 읽음 표시는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그 멈춘 화면 속의 문장을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전영중의 굵은 손가락이 키패드 주위를 빙빙 맴돌았다.

준수야.

이름을 썼다가,

살아 있어?

안부를 묻다가,

보고 싶어.

결국에는 지워낼 진심을 썼다.

전영중은 적었던 말들을 모두 지웠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보내지 못할 문장의 발치를 서성거리는 것뿐이었다. 어차피 닿지 않을 연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답장은 영영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괜찮은 척. 모르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전영중은 이제 그 많은 '척'들에 치가 떨렸다. 홀로그램 화면 위로 희미하게 비치는 자신의 얼굴은 역시나 울기 직전의 사람 같았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황급히 화면을 껐다. 다시 적막뿐이다.

갑자기 모든 것이 그리워졌다. 손가락이 다섯 개라는 걸 가장 잘 아는 때는 손가락이 잘렸을 때라는 말처럼 성준수가 사라지고 난 뒤에서야 그가 그리웠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매일 밤마다 생각했다. 진작 좋아한다고 말했어야 한다고. 뭐든 머뭇거리면 안 된다던 성준수의 말처럼 망설여서는 안 됐다고. 그래서 좀 더 많은 휴가를 함께 보내고, 좀 더 평범한 데이트들을 많이 해야 했다고. 괜히 성질을 긁는 말을 하기보다는 다정한 말 한마디라도 더 해줬어야 한다고. 매일 그런 생각을 했다.

봄날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봄날인지 모른다. 지나고 나야 그때가 봄날이었다는 것을,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알게 된다. 결국 가장 좋은 날들은 언제나 과거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성준수와 함께했던 나날들이 바로 그런 날들이었던 같기도 했다. 사실은 넘치게 소중하고 소소하게 행복해서 행복하단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일상의 편린들. 훈련에 나가고, 임무 출정을 갔다가 복귀하고. 맛대가리 없는 밥을 먹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성준수를 내려다보고. 그 모든 일상들이 그리웠다. 다시는 오지 않을 날들이라는 것을 알아서 더욱 간절했다. 시린 겨울 속에서 이미 지나간 봄날의 흔적을 그러쥐고 그 향기를 그리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다에 가볼 걸 그랬다는 후회가 남았다. 모든 건 생각 났을 때 바로바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뒤늦게야 들었다. 성준수도 바다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고 했는데. 내색은 안 했지만 내심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건 하나의 확신이었다. 전영중은 이런 것에 있어서는 성준수의 모든 걸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함께 바다에 갈 기회는 오지 않겠지. 영원히. 후회는 언제나 늦기 때문에 후회다.

그 모든 마음들이 그릇을 감당하지 못하고 사무칠 때면 눈물로 비져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 감정을 인정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좋아한다는 마음이 제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컸다. 그럴 때면 진심이 제멋대로 비어져 나왔다. 준수야, 왜 나를 버리고 떠났어. 너의 사람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지. 그럼 나는 너의 사람이 아니야? 언젠가 너무 많이 울었고 까맣던 밖이 희어지는 걸 지켜보았다. 머리가 아팠다.

전영중은 종종 열패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기억은 주관적이었고 그만큼 쉽게 조각이 났다. 마지막 선택의 순간이 여러 번 분해되고 재조립되길 반복했다. 그것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자꾸만 떠오르는 불가항력인 일이었다. 기억 속의 성준수는 여전히 멋있는데 센터에 남은 자신은 초라하게 느껴져서 그랬다.

스물두 살의 전영중은 제 나이대보다 어른스러웠다. 제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볼 줄 알았다. 전쟁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오늘 살아남아도 내일 죽을지 모르는 곳에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아야 했다. 그것만이 후회를 줄일 수 있는 길이었기에. 물론 그 감정을 잘 다룰 수 있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지만.

현실과 싸우거나 현실로부터 도망치거나. 전영중은 자신이 후자를 택했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성준수처럼 현실과 싸우는 길을 택했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한때 성준수가 영웅병에 걸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쏟아지는 임무와 반복되는 출정에도 군말하지 않는 게, 꼭 세상을 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그런 게 다 헛된 이상이라고, 쓸모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늘 항상 자신보다 앞서가는, 세상을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나아가는 성준수의 등을 보면서 괜한 질투를 느끼기도 했었다. 그래, 그건 질투였다. 거기에 사랑이 더해지며 동경이 됐다.

열패감에 젖어있다가도 성준수의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지기도 했다. 그럴 떄면 침대 위에 누워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썼다. 가슴이 옥죄어드는 것이 마음 때문인지 공기 때문인지 모르도록. 그 행위는 일종의 도피처였다. 끊임없는 걱정의 도피처. 자꾸 걱정이 되었다. 잘못되었으면 어쩌지, 죽었으면 어쩌지. 그러한 걱정들. 하지 않으려고 해도 하면 할수록 자꾸 그런 걱정이 들었다. 성준수는 어딘가에 멀쩡히 살아있을 텐데도 그런 걱정을 자꾸 한다는 것은 전영중이 내일을 걱정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신의 삶을 걱정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영중의 삶이 그렇게 되어버릴까봐. 내일의 목숨과 안위를 확신할 수 없으니까. 그런 걱정들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들곤 했다. 그렇게 무의식에서라도 만나볼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성준수는 야속하게도 얼굴 한 번을 내비치질 않았다.

요즘 따라 이상하게 기상호와 마주치는 빈도가 잦았다. 출정할 때도 현장마다 불가피하게 부딪쳤다. 모른척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주위를 빙빙 맴도는 게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놈의 햄햄 거리는 이상한 호칭도 거슬렸다. 성준수 찾기도 전에 기상호 때문에 신경 쓰여 죽을 것 같았다.

"영중 햄, 이번에도 같이 나가네요."

"왜 자꾸 아는 척이야?"

"아는 햄이 영중 햄밖에 없으니까요."

"……."

"말 걸지 말까요?"

"…맘대로 해라. 장기 파견은 처음인데 괜찮겠냐?"

"뭐…, 되는 데까지는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파견될 작전에 대한 브리핑을 듣고 나오는 길에 기상호는 미적지근하게 말했다. 열심히 제 주변 쫓아다니길래 이런 일에도 열정적일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 보다. 그렇다기에는 최근에 위험 지역들로 자발적으로 지원 나가는 걸 보면 확실히 괴리감이 있긴 했다. 그런 모습들에 순간 누가 겹쳐 보이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니까. 전영중은 자꾸만 주변의 모든 것들에서 성준수를 찾아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중증이었다.

전영중은 그러다가 퍼뜩 다시 대화 주제로 돌아왔다. 수상할 정도로 주위를 알짱거리는 기상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았으나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묻기로 결정했다. 요새 왜 자꾸 따라다녀. 그 말에 기상호는 뻔뻔하게 고개를 처들고 말했다. 아까 대답했잖아요. 작전 나갈 때마다 햄밖에 아는 사람이 없다니까요? 전영중은 한숨을 쉬며 질문을 바꿨다.

"할 말 있으면 해.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와 이런 거 보면 준수 햄이랑 똑디네요. 말하는 게."

"여기서 걔 얘기가 왜 나와."

"영중 햄이 그 햄 찾는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요."

"야, 기상호.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내가 시간이 많진 않아서."

"다른 할 말 있던 건 아닌데, 오늘은 이거 전해드리려고요."

그 말과 함께 기상호가 건넨 건 두 번 접힌 종이였다. 사실 전에 드리려고 했는데 영중 햄이 볼만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아서. 지금은 괜찮고? 네, 아마도요. 기상호는 고저 없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숙소에 가서 펼쳐보라는 말과 더불어 전영중을 지나쳐 걸었다. 야, 이게 뭔데? 그 말에는 대답 없이 유유히 손을 흔들었다. 전영중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쟤도 제정신은 아니다.

전영중은 지나치게 넓은 숙소로 향했다. 혹여나 누가 볼세라 방문까지 꼭꼭 닫아 잠갔다. 가벼운 종이 한 장을 붙드는데도 헛손질이 거듭됐다. 전영중은 한참 동안 단정하게 접힌 종이를 응시했다. 떠날 거면 그냥 좀 떠나지. 모질어질 거면 끝까지 그렇게 굴어야지. 성준수는 왜 자꾸 전영중에게 일말의 희망을 갖게 만드는지.

겨우 펼친 종이 안에 있는 것은 분명한 성준수의 필체였다. 기상호가 어째서 이것을 갖고 있는지까지는 전영중이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 편지를 대신 전해달라 했을 성준수의 생각도, 마음도. 감히 짐작할 뿐이었다. 짧은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는데 자꾸만 눈앞이 희뿌예졌다.

영중아.

이거 보고 있다는 건 넌 남기로 택했다는 거겠지.

내가 떠나기 전에 말했으려나. 좋아한다고.

타이밍이 안 좋아서 못 말했으면 어쩌나 싶긴 하다.

만약 말했다면 최악의 고백이긴 하겠네. 그래도 진심이었으니 의심은 마라.

내가 말해준 대로 잘 전달했어?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성준수의 독단이라고.

내 말 더럽게 안 처듣는 전영중이 이번만은 내 말을 들어줬길 빈다.

그러니까 잘 살아. ■■■■■■ 잘 살아야 되는 거 까먹지 말고 살아. 너 원래 덤덤하게 뭐든 잘 이겨내잖아.

나 찾겠다고 괜히 헛수고하지 말고 네 정의대로 거기서 잘 살아라. 난 그거면 돼.

그리고 미안하다.

그러니까 잘 살아.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 뒤의 공백에는 어설프게 글자가 지워져 있었다. 전영중은 쉬이 그 단어를 예측할 수 있었다. 성준수, 이 치사한 개새끼. 내가 지 좋아하는 거 다 알고 있었잖아. 자만에 가득 찬 웃기는 편지였다. 그런데 이상하지. 우스운 편지에 왜 자꾸 눈물이 나는지.

성준수는 자신을 찾지 말라 했으나, 전영중은 그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언제는 성준수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대신 전영중은 자신의 정의대로 살아갈 것이었다. 이곳에 들어온 이유를 오래 돌아와서야 깨달았다. 망해가는 세상에서도 성준수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으니까. 그게 꼭 곁에 있는 것이 아니더라도. 성준수를 적으로 정의한 국가 속에서 홀로 성준수를 지켜내는 것. 그 이유만으로도 전영중은 살아가야 했다.

정말 오랜만에 전영중은 성준수의 꿈을 꾸었다. 그가 나오자마자 본능적으로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꿈인 것을 알아차려도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영중은 그저 자신의 몸에 갇힌 채로 꿈의 흐름을 지켜보기만 했다.

꿈속에서 둘은 도심을 걷고 있었다. 성준수는 전영중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손을 타고 말할 수 없는 벅참이 차올랐다. 가이딩을 받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도심 곳곳에는 낙엽이 떨어져 있었다. 낙엽이 쌓인 길을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내딛는 발의 방향과 박자가 딱딱 맞아 떨어져셔, 그게 또 기분이 좋았다.

전영중은 문득 꿈속에서 영영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좀 더 영원하게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전쟁이니 전투니, 국가니 반란군이니 하는 복잡한 것들은 다 잊고 그저 특별하게 평화로운 하루를 되풀이하면서 사는 것. 아주 깊은 꿈속에서 사는 것. 성준수로 시작한 꿈이 끝이 없길 바라는 것.

그 생각은 매일이 오늘 같았으면 좋겠다는 시답잖은 문장으로 내뱉어졌다. 성준수는 그 말을 듣더니 그저 작게 웃었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할 할 줄 알았는데. 역시 꿈은 꿈인가보다. 그렇게 계속 걸었다. 도심은 끝이 보일 줄 몰랐다. 성준수는 어느 순간 멈춰서서 말했다. 야, 전영중. 그래도 우리 살아야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그 말과 함께 퍼뜩 꿈에서 깨어났다. 전영중은 여전히 닫혀있는 성준수의 방문 앞으로 향했다. 차가운 문 위에 손을 가만히 얹고 생각했다. 네가 이대로 내 옆 방에 살았으면 좋겠다고. 이상하게도 마음이 시렸다.

세월은 누군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별의 횟수도 늘어갔다. 그들은 성준수와 같이 영영 볼 수 없었으나, 생사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궤를 달리했다. 은근히 신경 쓰이게 하던 기상호도 어느 순간 알게 모르게 사라졌다. 그 또한 성준수와 같은 길을 걸은 것인지, 혹은 원중 센티넬이라 장례식조차 없던 것인지 전영중은 알 길이 없었다. 주어진 임무를 다하기에도 바빴다.

전영중은 비상벨 하나에도 불안한 낯을 하고 장례식 한 번에도 슬퍼하던 과거와 달랐다. 그 많은 이별들에 슬퍼할 여력이 없었다. 그는 덤덤한 얼굴을 하던 성준수를 떠올렸다. 그 또한 자신과 같았을까. 큰 이별 후에야 이별에 덤덤해질 수 있었던 걸까. 성준수는 종종 전영중의 머릿속에 나타났다.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성준수는 여전히 제멋대로였다.

시간은 무심히도 흘러 또 겨울이 왔다.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계절이었다. 네가 떠나갔던 계절이었다. 또 다른 누군가가 떠나는 계절이었다. 전영중 안의 성준수가 죽어버리는 계절이었다. 그래, 무수히 많은 것들이 그 한가운데서 죽어버리는 계절이었다. 전영중은 몇 번이고 성준수가 떠나갔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 이 년 전 일이 이틀 전처럼 생생하기도 했고, 때로는 이십 년 전처럼 아득하기도 했다. 묻고 싶은 말과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희미해졌다. 전영중은 여전히 성준수를 찾아다녔다. 최선을 다했으나 열성을 다하진 않았다. 전영중은 성준수를 찾고 싶었으나 찾고 싶지 않았다. 저 스스로도 제 마음을 몰라 복잡했다. 정부의 눈에 띄지 않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생사를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몇천 번 반복하여 교차했다. 그러면서 전영중은 알게 모르게 성준수를 닮아갔다. 가이딩을 받는 횟수가 줄었다. 이주원이 걱정했으나 들은 체도 안 했다. 그냥 성준수가 가이딩을 받던 모습을 떠오를 때면 저도 모를 구역감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정부에서는 슬슬 성준수 수색 작업에 힘을 뺐다. 열세에 몰리며 성준수 하나에 신경 쓰기 어려운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센터의 모두가 점점 성준수를 잊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모두의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 가는데 본보기를 보여주겠다느니 하면서 자원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잠정적으로는 죽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에 따라 전영중에게는 슬슬 다른 임무들이 주어지기 시작했다. 수색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전영중은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난처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날들이었다.

이번 출정의 가장 큰 목표는 섹터 3의 수복이었다. 작전 개시 후 하루 이틀은 역시나 정신이 없었다. 동선 파악하랴 적진 체크하랴 몸이 두 개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만성 가이딩 부족으로 예민한 오감이 작은 소리에도 날을 세우게 했다. 주변에 다른 색의 군복이 보이면 주저 없이 중력장을 만들면서 소음기를 장착하고 조준했다. 전영중의 사격 실력에 너절하게 늘어진 시체들이 쌓여갔다.

이틀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하고 나무가 빼곡한 산지를 돌아다녔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시야를 확보하려 높은 곳에만 있다 보니 잠자는 건 자연스럽게 건너뛰었다. 베이스캠프로 돌아가면 당장 조금이라도 눈 붙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앞에 익숙한 군복이 아닌 다른 옷이 보이면 잠시 주춤거렸다가도 방아쇠를 당겼다. 머리에 구멍 난 시체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시체가 아는 얼굴이라면 다른 이야기일 것이었다. 조준에 뜸을 들이는 것도 다 그 때문에 생긴 나쁜 버릇이었다.

일이 터진 건 베이스캠프로 복귀하기 직전이었다. 이주원이 우려한 대로 충분하지 못한 가이딩은 만성 두통을 불러일으켰다. 서서히 귓가에 이명이 들리고 있었다. 이제 막 복귀하려는 차에 적군의 기습이 있었다. 센티넬의 숫자가 제법 많았다. 하늘을 휘젓는 자들도 여럿 있었다. 모두가 비행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닐 테니 어딘가에 사이코메트리 센티넬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자부터 처리해야 했다. 전영중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는 적군 사살을 목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멈춰 섰다.

시야를 빠르게 스쳐 지나간 한 반란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 낯이 익어서. 손끝에 비치던 푸른 빛이 잘 알던 누군가의 것과 같아서. 성준수?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먼저 나갔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전영중은 전투에서는 절대 가만히 멈춰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상식마저 잊을 정도였다. 누가 당기는 것처럼 머리 근육이 뻣뻣해지는 것 같았다. 감각 교란을 겪는 것도 아닌데 시야가 울렁거리며 점멸했다. 만약 성준수라면, 만에 하나 정말로 그라면.

멀지 않은 베이스캠프에서부터 울리는 경보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었다. 상대방도 분명 전영중을 보았을 것이었다. 바보같이 소리치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그랬다. 위치를 신속하게 옮겨야 했다. 가만히 있는 것은 위험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겨우 정신을 추스르려 애썼다.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할 때, 아까보다 더 심한 이명이 울렸다. 전영중은 탄식을 내뱉으며 휘청거렸다.

그때였다. 전영중은 거센 힘에 의해 바닥으로 쓰러졌다. 충격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을 때는 제 위에 올라탄 반란군이 보였다. 그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전영중이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자 얼굴을 가린 천이 흘러내렸다. 전영중은 숨을 멈췄다. 성준수, 준수야.

"내가 나 찾지 말랬지."

성준수는 그렇게 말하며 손끝의 빛을 밝혔다. 주변의 온도가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따뜻한 재회를 바란 건 아니었으나 전영중은 이런 상황은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금세 자신이 안일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우리는 싸구려 로맨스 소설 따위에서 살아가는 게 아닌, 참혹한 현실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성준수는 자신의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애쓸 것이며, 전영중과는 대척점에 서고 말았다. 전영중은 자꾸만 시리던 마음의 원인을 깨달았다.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것. 성준수가 떠나던 그날부터,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그랬다.

"준수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 꼴에 친구라고 죽이기는 망설여지나 봐?"

그래도 전영중은 살고 싶었다. 성준수가 계속 살아가라 말했으므로. 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그게 비록 성준수라 하더라도.

"시바거, 못할 것 같지, 내가."

전영중의 눈앞이 파랗게 물들었다. 모든 빛이 꺼졌다. 바야흐로 망해가는 세상에서의 엇갈린 운명의 종지부였다.


하트, 댓글 항상 감사합니다. 본편 관련 질문은 스핀스핀에 남겨주시면 스포가 되지 않는 선에서 답변해드립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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