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대공의 눈여우는 그 가슴에 머리를 둔다
가비지타임 최종수 드림 | 반고님 커미션
안아봐도 될까. 너의 그 한 마디를 듣기 위해 이곳의 눈은 줄곧 차갑고 서럽게…… 품에 안았을 때 따듯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최종수는 북부를 제 편으로 삼았어. 내리는 눈이 시린 이유 따위 그뿐이야.
로판 AU에서 종수가 북부대공이면 규리는 수도에 인질로 잡혀있는 (?)친구. 집안끼리 알고 지낸 사이도 약혼녀도 뭣도 아니라서 남들이 보기에는 어떠한 연결점도 찾지 못하지만 하필이면 황제한테 덜미가 잡혀서 종수는 변경에, 규리는 함께 떠나지 못한 채 여전히 수도에 발이 묶여있어. 신분은 백작가 출신에 지나지 않지만 그럭저럭 유서가 깊어 대대로 중앙관리직을 맡아온 집안에서 규리는 특히 출세가 빠른 편. 황제의 서기관이라는 위치는 남들이 보기에는 부러울 따름이겠으나 규리 입장에서는 범의 아가리에 있는 기분이야. 중앙궁에서 매일을 외줄타는 기분으로 일하고 있어.
그렇게 아슬아슬한 건 비단 강규리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따지면 북부와 황실의 관계에서 시작됐어. 원래도 조금씩 벌어져가던 사이였지만 조금씩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은 이야기로, 원인은 최종수의 아버지인 현 북부대공이 왕도에서 가장 귀한 아가씨를 아내로 맞아들인 것. 그저 여인으로 아름답기만 하면 모르겠으나 어엿한 공작가 영애였던 그녀는 척박한 북부에 상당한 지참금을 들고 안주인 자리에 이름을 올렸고, 얼마 뒤 낳은 아들은 날 때부터 제국에서 가장 귀한 신분이었어. 그 아이의 탄생이 도화선이 되어 북부와 황실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시작했을 듯.
그런 종수는 어릴 적에는 수도에서 생활하면서도 언젠가 북부로 떠날 생각을 하며 자라왔는데, 의례적으로 입학한 아카데미에서 강규리를 만나고… 간소하게 챙기려던 짐의 목록 맨 위에는 그 애 이름 석 자가 적혔어. 너도 마음에 들 거야. 종수가 그렇게 말하면 규리는 본 적 없는 눈밭을 떠올려. 두꺼운 망토가 필요하겠네. 겨울에도 호수가 얼지 않는 수도에서조차 추위를 타는 규리가 손가락을 접어가며 헤아렸어. 목도리도, 장갑도, 목이 긴 부츠도. 그렇게 껴입으면 걷기 힘들겠지만 규리는 걱정하지 않았어. 그럼 종수는 분명 손을 잡아줄 테고, 그가 북부에 있다는 것이 실감날 테니까.
강규리는 눈 내리는 고향에 있는, 최종수가 마음에 들었어. 아버지가 물려준 피를 속이지 못하고 남들보다 훌쩍 큰 종수에게 이곳은 갑갑해 보였지. 웅크린 사자 같은 종수를 가두는 게 없는 곳이라면 분명 북부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어. 가보고 마음에 들면… 나도 평생 거기서 살까. 에둘러 전한 진심은 투명한 창문에 입김처럼 번지고 그 위를 덧그리듯 약속을 나눈 어린 날. 하지만 변해가는 국경 정세에 최종수는 일찍 수도를 떠나게 되었고 그 일행에 강규리는 없었어. 종수야, 너는 갈 길이 멀고 하루가 급하잖아. 짐은 가볍게 하고 떠나. 네겐 저렇게 많은 옷가지, 필요 없잖아. 이것도 저것도 챙겨갈 게 많은 규리는 자신이 짐만 될 거라며 종수를 재촉했고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이별.
이성적인 설득으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던 종수가 물러나준 건 강규리가 여기서 더 배우고 싶은 게 있다고 했기 때문이야. 그렇게 북부로 돌아간 종수는 조금씩 전장에서의 삶을 익혀갔고, 정작 규리가 필사적으로 갈고 닦은 건 처세술. 가끔 그리운 이름으로 온 편지에 마지못해 써넣은 것처럼 공부는 잘 되어가고 있냐는 물음이 담겨오면, 답장을 쓰려 펜을 든 규리는 한 세기의 난제를 마주한 학자 같은 표정을 지어. 무엇을 배웠냐니, 네게는 도저히 자랑할 수 없는 것들 뿐이야. 그렇게 강규리가 허무와 싸우면서까지 스스로를 예법과 가식으로 무장한 건 들켰기 때문이야. 황제에게, 종수와의 사이를.
하필이면 황태자와 최종수의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았기에 황제에게 있어 아카데미란 후계자와 범새끼를 함께 넣어둔 우리나 마찬가지. 자주 들여다 보는 게 인지상정이었지. 그러다 노회한 그의 눈에 강규리의 그림자가 걸려든 거야. 그래서 최종수가 수도를 떠날 때 규리를 묶어뒀을 듯. 종수를 따라가선 안 된다는 부모님의 명령과도 같은 말씀에 규리는 예로부터 황실을 섬겨온 집안이 북부와 거리를 두고 싶어한다고 이해했지만, 얼마 안 가 입김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 부모님이 넌지시 흘려주신 정보에서 강규리는 북부의 상황과 함께 자신의 처지가 인질이라는 걸 받아들여야만 했어.
서둘러 익숙한 면면들이 섞인 일행을 떠나보냈지만, 최종수도 북부로 가는 길 위에서 그 사실을 눈치챘을 것 같아. 당혹스러움과 배신감이 사무쳤지만 이제 와서 말을 돌릴 수는 없으니… 칼바람이 부는 북부에 도착할 때즈음에는 싸늘하게 식은 가슴에 종수가 할 수 있는 건 규리한테 억지를 부리지 않는 게 최선이었겠지. 하지만 이따금씩 다 버리고 곁에 남아달라고 하고 싶을 때가 있어. 주로 강규리가 약속대로 아카데미의 방학에 북부에 방문하는 시기겠지. 겨우내 규리가 덮을 털망토를 고르며 종수는 잠시 고민해. 조금 더 얇은 걸 입히면 네가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지 않을까, 북부의 감기는 지독해서 한 번 걸리면 한참은 앓아누워야 하니까... 끝내는 무거워서 말 타기 불편하다는 투정을 들을 걸 알면서도 가장 두꺼운 걸 고르겠지만.
이윽고 수도에서 출발한 조촐한 행렬이 도착하고, 오랜만에 보는 종수가 왜인지 어김없이 심통난 얼굴로 손을 잡아주면 규리는 조금 울고 싶어졌어. 어깨를 감싸는 묵직한 감촉. 왜 멀쩡한 마차 놔두고 고생하냐. 양팔로 안아 안장에서 내려준 종수의 시선이 빨개진 코에 닿자 규리는 내심 안도했어. 눈물도 매서운 추위 탓으로 돌릴 수 있겠다 싶어서. 도중까지는 마차 타고 왔는데… 말꼬리를 흐리자 눈썹을 들썩이는 종수의 목을 끌어안고 속삭여.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봄의 인사 이동이 다가오기 전까지 규리가 북부에 머무는 동안 둘이서 이틀에 한 번은 설산으로 산책 가는데 하루는 여우 사냥에 나섰으면. 설산 여우는 털이 새하얘서 눈밭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데 종수는 잘만 찾아냈을 것 같아. 그런데 규리가 너무 좋아하니까 죽이는 대신 산 채로 붙잡아주겠지. 아니면 덫에 걸려있던 걸 구해주는 것도 좋아. 누구 덕에 목숨을 건졌는지 알아챈 건지 여우도 유난히 규리를 잘 따랐을 듯. 웬만해서는 단둘이 있는 시간을 방해받고 싶어하지 않는 종수지만, 내내 강규리의 품에 안겨 관심을 독차지하는 여우는 싫지 않았을 것 같아. 언젠가 북부가 마음에 들면 평생 살겠다던 그 말을 바보 같이 믿고선 뭐라도 애착을 가져줬음 해서.
그래서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재촉하는 대신 물었어. 그렇게 아쉬우면 데리고 가서 길러보던가. 그러자 강규리는 한참이나 그 여우를 미련 가득한 눈으로 보다가 숲으로 돌려보냈을 것 같아. 괜찮아. 나는 곧 이곳을 떠나잖아. 헤어질 걸 알면서 정을 주면 가여워. 얼마 안 가 규리는 수도로 돌아가고 종수만 홀로 나무가 빽빽한 숲에 다시 찾아가는데, 그때 그 여우랑 재회해주길. 특이하게도 그 여우는 새하얀 등에 점처럼 일부만 새까만 털이 자라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겠지. 결국 그 여우는 종수가 키우게 됐을 것 같아. 보기 드물게 영특한 탓인지 눈에 띄는 생김새 탓인지 몇 년 사이 괴물처럼 전공을 올린 소공작의 신기한 여우로 소문났을 듯.
그러는 사이에 아카데미를 졸업한 강규리는 황제를 지척에서 모시게 되어 지금에 이르렀어. 분쟁 지역인 북부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는 황제의 눈에 닿기 전에 반드시 강규리의 손을 거치는데, 점점 악하되어가는 상황에 눈을 질끈 감아. 이제는 편지보다도 위태로운 승전보로 종수의 소식을 접하지. 그럼에도 강규리는 보급을 늘려주지 못하고 계속해서 싸우라는 명령에 직접 검토 도장을 찍어야 하는 거야… 마찬가지로 걱정하는 편지 한 통 보내지 못하면서.
그러다 종수를 빌미로 들이밀어진 혼담을 규리가 받아들이면서 이 소식이 북부에 전해지는 걸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보고 싶었어. 새까만 투구와 갑옷을 쓴 기사들과 함께 흙먼지를 일으키며 수도로 들어온 최종수와 자신의 결혼식 준비를 직접 지휘하던 강규리. 몇 년만에 만난 규리에게 종수는 결혼 선물이라며 키우던 북부 여우를 안겨주는데…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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