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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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비지타임 최종수 드림 | 반고님 한계님 커미션


발굽 소리로 궁전의 호수가 진동했다. 상아궁을 혼란으로 차게 하며 단호한 발걸음을 지면에 디딘 그가 견고한 얼굴로 하얀 사자의 대가리 속으로 들어간다. 북부의 서리를 몰고 오는 괴물. 빛의 가장 가까운 곳에 다가가기 위해 짐승의 피를 묻히고 온 백수의 왕. 존재만으로 뭇사람들을 움츠리게 하는 칠흑의 군림자. 굳게 닫힌 성문을 기어코 열게 만든, 그것은 내 곁에 있어야 한다는 표정. 황제를 알현할 수 없음을 알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울린 범과 같은 음성. 

백작 영애는 어디 있지.


흑과 백은 제국의 근간. 칭제 당시 혁혁한 공을 세운 황제의 형제는 스스로 변경직을 청했다. 제국을 지키는 검에게 황제는 대공의 자리를 주었고 그것으로 제국의 오랜 계약은 시작되었다. 가장 밤이 긴 어느 날의 촛불 밑보다도 까만 머리칼을 가진 공작가의 핏줄은 수도의 평화를 위해 봉사했다. 백색으로 빛나는 상아궁은 수백 년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황제는 모든 공작가의 후계자들에게 수도의 영애를 선물했다. 공작가의 흑발을 그대로 물려받고 태어난 최종수에게 운명이란 정해진 것이었다. 변경을 지킨다. 황제의 명령으로 정해진 상대와 결혼한다. 다음 대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자신과 똑같은 인생을 살도록 한다. 그것뿐이었다. 강규리는 그런 최종수에게 가끔 알 수 없는 눈길을 주었다. 최종수는 그 눈길에 섞인 동정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폐하께서 너를 공작령으로 보낼지도 몰라. 글쎄. 그럼 좋겠지만 난 네가 정말 원하는 상대를 골랐으면 좋겠어. 최종수는 그것이 완곡한 표시임을 알았다. 찻물 위의 꽃잎처럼 부드럽게, 미래란 제게 열린 것처럼 말했다. 제가 정말로 강규리에게 공작령으로 와 달라고 한다면 생각이라도 해 볼 건가. 내게 인생을 선택할 권리란 건 없는데. 제국의 역사와 피로 묶인 황가와의 계약을 가장 잘 아는 것은 규리 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강규리는 수도의 백작가에서 차출되어 직접 황제를 보좌했다. 혹자는 그가 그러한 요직을 받은 것에는 백작가 소유의 철도 부설권을 황가와 나눴기 때문일 것이라고 음해했다. 그러나 그것은 의도적으로 뿌려진 이야기일 뿐. 강규리는 제국 아카데미를 다니는 내내 역사상 누구보다 유능한 인재라고 평가받았다. 황태자를 제치고서였다. 부족할 것 없는 백작가에서 편히 그녀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해 제 곁에 붙여 놓은 것은 황제의 욕심이었다. 강규리의 시야를 가지고 가장 빛을 누리는 자는 다름 아닌 제국의 백이라 칭해지는 황가였다. 제국의 국고는 넘쳐났다. 강규리와 최종수가 성년이 되고 단 3년 만의 일이었다. 최종수는 여전히 강규리를 생각했다. 강규리가 황제의 인장을 대신 찍었을 것이 분명한 출전 명령서를 입술에 대보고는 했다. 수도의 온건한 날씨를 떠올렸다. 모든 것은 날이 갈수록 분명해졌다. 최종수가 찾을 수 있는 안식처를 황제가 북부로 보내 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백작가는 제 여식의 혼처로 공작가를 올리지도 않았다. 철저한 손익계산의 저울 위에서 최종수는 그저 화살을 막고 말을 타고 전진했다.

강규리가 처음 최종수를 이름이 아니라 ‘소공작’으로 불렀을 때 최종수는 흔치 않게 당황했다. 귀족 자제로서 아카데미의 필수 몇 년만을 수료하고 북부에서 나머지 교육을 마친 최종수는 북부로 돌아온 뒤 아카데미에서 졸업까지 한 강규리와는 달랐다. 최종수와 강규리는 휴가 기간에나 가뭄에 콩 나듯이 만날 수 있었다. 다소 직설적인 최종수가 강규리를 오랜만에 볼 때마다 강규리는 그와는 달리 수도의 예법으로 무장되어갔다. 최종수가 더 먼 국경지로 떠나기 전 몇 년 동안 강규리는 북부를 가끔 방문했다. 여름과 겨울에만 치중된 둘의 만남은 언제나 서늘했다. 북부에 잡힌 신세인 최종수에게 강규리는 아카데미의 이야기를 들고 왔다. 최종수는 강규리를 위한 망토를 준비했다. 

강규리는 승마에 재능이 있었다. 갑갑한 수도 생활을 떨쳐내기라도 하듯 북부의 평야를 달리는 규리의 검은 머리칼이 흩날리면, 종수는 손을 뻗고 싶었다. 네가 내 친구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우리 처음 봤을 때 기억 나? 웃으며 묻는 규리에게 종수는 툴툴대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넌 아직도 그 얘기냐. 성인이 된다는 것은 곧 결혼 시장에 진입한다는 뜻이었다. 점차 혼인 얘기가 나오자 최종수는 한 사람만을 떠올리게 됐다. 그 사람 외에는 딱히 바라는 것도 없었다. 걔가 아니라면, 즐거울 수 있을까.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규리가 겨울 휴가를 맞아 북부를 방문했을 때 둘은 설산을 둘러보러 다녔다. 종수의 정찰에 규리가 따라나선 것이었지만 날이 안정된 기간이라 소풍에 가까웠다. 언 나뭇가지에 눈이 쌓인 광경을 보며 규리는 감탄했다. 수도에서는 절대 이만큼 눈이 오지 않는데. 

“예쁘다. 온 세상이 깨끗하네.”

“그럼 더 자주 와서 보든가.”

“가능하면 그러고 싶어.“

또다른 거절의 표현을 받은 종수는 괜히 설산 아래를 바라봤다. 친구라는 영역은 너무 아무 일이 없어서 불만이었다. 최종수는 생각이 많은 편인 강규리의 성격을 알았다. 그걸 쉽게 침범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이럴 때마다 묻고 싶었다. 너는 어떡할 건데. 나 말고 다른 결혼할 사람 있어? 그러나 겨울 토끼처럼 규리가 도망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매번 입을 다물었다. 강규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일들은 언제나 최종수가 이해하지 못할 만큼 넓은 범위였다. 그런 규리에게 선택권도 없는 공작가의 아들이 내뱉기에는 철없이 호기로운 말이기도 했다. 강규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답이 되기에는 아직 자신은 부족했다. 생각에 잠긴 종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자 규리가 나무 위의 눈을 작게 쓸어모았다. 퍽. 가볍게 던져진 눈 뭉치를 맞은 종수가 어이없다는 듯 규리를 쳐다봤다. 멍청히 검은 머리 위에 눈을 얹고 자신을 보는 최종수에 규리가 크게 웃었다. 하하, 바보 같아!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헤집어 눈을 털어낸 종수가 차분히 물었다. 애야?

“그래, 아직 성인도 아닌데!”

“그래?”

그렇단 말이지. 말에서 내린 종수가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내려 봐. 왜? 그냥. 의심스러워하며 손을 잡고 내린 규리의 두 발이 지면에 제대로 닿기도 전에 종수가 그의 몸을 통째로 들어 올렸다. 

“뭐야!”

“뭐긴 뭐야. 수도 구경.”

“아니, 필요 없거든?“

큭큭 웃으며 종수는 큰 나무 아래에 규리를 안아 데려다 놓고는 발로 나무를 슬쩍 건드렸다. 우수수 떨어진 눈에 하얀 눈사람 꼴이 된 규리가 종수를 노려봤다. 재밌어?

“그래. 아직 성인도 아닌데.”

“얄밉다, 진짜.”

강규리의 까맣고 긴 흑발에서 눈이 장식처럼 흘러내렸다. 머리칼 끝을 잡은 종수가 순간 생각했다. 흰색이 잘 어울리는구나. 상아궁 아래의 강규리는 아름답겠지. 그러나 최종수가 황제궁에 들어갈 일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을 떠올린 최종수의 표정이 침잠하는 찰나 눈을 털어내고 걸음을 옮기던 규리가 종수를 불렀다.

“종수야, 이것 봐!“

”이런 광경은 처음 봐, 일부러 여기 오자고 한 거야?“

”...나도 몰랐어.“

거짓말이었다. 이곳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흔치 않은 풍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왔다. 맑고 깨끗한 겨울 날씨가 계속되어야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늘어진 나무 덩굴에 투명한 얼음들이 맺혀 얼어 있었다. 이렇게 깊은 곳까지 사람들이 잘 들어오지 않기에 혼자 알고 있는 장소였다. 강규리에게 여길 보여주고 싶었다. 작은 정원처럼 펼쳐진 공간에서 샹들리에 같이 덩굴 끝에 달린 얼음들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규리가 황홀하다는 듯 그 사이를 지나다니며 구경하다 종수를 돌아봤다. 너무 예쁘다. 순간 최종수의 입가가 올라갔다. 황제궁의 상아 천장이 얼마나 아름답든 지금, 이 순간만큼 강규리를 밝혀 주지는 못할 것이다. 

“어?”

신나게 얼음을 건드리며 돌아다니던 규리가 탄성을 냈다. 종수는 빠르게 다가가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규리가 가리킨 곳에는 죽은 덩굴에 몸이 낀 작은 여우가 있었다. 북부 여우네. 종수가 규리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여우?”

“응. 이 녀석은... 무늬가 있네.”

등에 까만 반점이 두 개 있는 여우가 불편하다는 듯 발버둥을 쳤다. 움직일수록 덩굴에 끼어 혼자서는 나올 수가 없다는 걸 깨달은 여우가 곧 몸에서 힘을 뺐다. 눈처럼 새하얀 털과 대조되는 까만 네 발이 축 늘어졌다. 어떡해, 얼른 꺼내 주자. 손을 뻗으며 규리가 바로 웅크려 여우를 도왔다. 종수는 성체 눈여우는 북부의 상위 포식자라는 걸 말하려다 눈물이 찬 눈으로 규리를 바라보는 여우를 보고 말없이 손을 보탰다. 덩굴 틈에서 무사히 나온 여우는 조금 쉬며 기운을 차리더니 규리 주위를 빙빙 돌았다. 마치 자신을 도와준 게 강규리라는 걸 아는 듯이 규리의 냄새를 맡고 손에 주둥이를 갖다 대기도 했다. 조심스레 규리가 여우를 안아 들자 얌전히 안겨 왔다. 와, 너무 귀여워!

“데려가서 키울까?”

“응?”

“널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아…”

규리가 여우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냐, 괜찮아. 원래 북부에 사는 아이잖아.

“어차피 나는 곧 떠날 텐데.“

“헤어질 걸 알면서 정을 주면… 가여워.“


강규리는 정해진 일정에서 하루도 더 지체하지 않고 수도로 돌아갔다. 최종수 또한 자신의 일과로 돌아갔다. 북부는 최종수의 마음과 달리 청명하고 추운 날이 계속됐다. 다시 종수가 규리와 함께 갔던 덩굴 숲을 돌아볼 때 종수는 흰 눈여우를 만났다. 무언가 풀숲에서 부스럭거려 총을 들며 눈을 찌푸린 종수가 여우의 등에 찍힌 동그란 검은 점 두 개를 발견했다. 총구를 내린 최종수가 중얼거렸다. 뭐야. 너.

폴짝 뛰어 종수의 근처로 온 눈여우가 그때 그 인간은 어디 있냐는 듯 킁킁대며 종수를 올려다봤다. 너도 강규리 찾냐.

“갔어, 너 두고.”

귀를 쫑긋거린 여우가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걔는 멀리 갔다니까. 그런 건 모르겠다는 듯 여우는 종수의 근처에서 폴짝댔다. 덩굴에 걸렸을 때 진작 가족은 여우를 두고 떠난 것 같았다. 뒤돌아 묶어 둔 말에게 가려던 종수가 뒤에서 쫓아오는 작은 짐승 소리에 한숨을 쉬었다. 강규리는 북부의 것은 여기 남기고 간다고 했다. 그게 흰 여우 얘기인지 자신 얘기인지 최종수는 헷갈렸다. 폭삭대며 눈 위에 조그마한 발자국을 찍던 눈여우가 종수의 다리 근처를 콕 주둥이로 찍었다. 알았어. 여우를 안아 들며 최종수는 생각했다. 강규리. 난 너와 달라서 그딴 거 몰라.


“야, 하양이.”

“네가 보기엔 이게 무슨 뜻인 것 같냐?”

유서 깊은 강 백작가의 영애가 황태자와의 혼인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수도의 저질 가십지에는 벌써 황태자와 강규리 각자의 이상형에 대한 브리핑이 한바탕이었다.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얘기는 없었지만 그런 매체의 한 페이지에 연애 이야기로 단 둘이 거론되었다는 건 안 봐도 뻔한 짜임새였다. 각종 신문사 편집실이 북적일 게 눈에 훤했다. 왜 하필 황태자 놈인데. 복잡한 심경의 최종수 옆에서 눈여우가 입이 찢어지게 하품했다. 야. 하품이 나오냐. 네가 좋아하던 강규리가 결혼을 한다고. 말이 아닌 종수의 표정을 빤히 보던 여우가 앉아 있던 쿠션 위에서 내려오더니 어디론가 뛰어갔다. 

하. 헛웃음을 터트린 최종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늙은 황제 새끼.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황태자와 강규리가 연애 결혼을 할 리는 절대 없고. 황태자와는 아카데미 시절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강규리는 전혀 그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니, 혹시 내가 북부로 오고 난 후 규리 혼자 아카데미를 다니며 황태자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렇지만 성년이 될 때까지도 강규리의 입에서 황태자가 나오는 일은 국정에 관련된 게 아니면 전혀 없었는데. 최종수는 한쪽 발을 탁탁 바닥에 구르며 책상을 짚었다. 무리한 출정 명령도 강규리를 생각해서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그 결과가 이거란 말인가? 규리를 황궁에 영원히 가두려고? 부족한 물자, 당연히 받아들이는 희생, 벌이지 않은 일에 대한 비난, 감당하기 힘든 책임,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모두 조용히 감내했다. 하지만, 정말, 내가 가장 원하는 사람의 혼담 소식을 이렇게 알게 해. 최종수가 강규리에게 품은 마음은 차치하고서라도, 먼저 규리와 종수는 오래된 사이였다. 그런데도, 강규리는 최종수에게 아직까지도 일언반구조차 없었다. 황제는 대체 무슨 생각인건가. 설마 강규리에 대한 내 마음을 알아챘을까. 황태자는 주변국의 왕녀와 혼담이 오가는 게 아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혼담에는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고민하던 종수의 발치에서 뭔가 움직였다. 시선을 옮긴 종수는 리본을 매고 온 여우를 발견했다. 여우가 주둥이를 들이밀며 종수를 쿡쿡 찔렀다. 최종수는 이대로 이 혼담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최소한 강규리를 직접 봐야만 했다. 규리에게 가는 길은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네가 영특하긴 하구나.”

여우가 그것 보라는 듯이 꼬리를 살랑였다. 최종수는 문을 열었다. 내 친우의 혼사를 축하하러 수도에 갈 테니 채비를 하라. 북부의 가솔들은 그날 소공작의 전언에 대해 얘기하느라 입이 마르지 않았다. 성 안의 모두가 들썩였다. 이게 얼마 만이야? 무조건 화려하게 해야 해. 그런데 기사님들은 왜 모두 불러들이신 건데? 아직도 모르겠어, 바보야! 

- 우리 소공작님이 드디어 황궁으로 쳐들어가는 거라고!


“수도가 시끄럽구나.”

“제국의 빛에 관한 일이니까요.”

“그 녀석은 뭘 하고 있느냐?”

“제국의 작은 빛께서는 검술 훈련에 매진하고 계십니다.”

“아니, 최 소공작 말이다.”

“…뭐라 귀띔할 일이 아니겠지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소공작은 영애에 대한 마음이 그렇게 깊지 않은 건가. 그렇다면 영애만 안타깝게 되었군. 황제는 턱을 쓸었다. 제 부족한 황태자는 벌써 후궁 후보를 물색하는 모양이었다. 듣기로는 영애는 흑운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미인이니 주위에 밝은 색 머리칼의 이국적인 미녀들을 여럿 함께 두면 좋겠다고 떠들었다고 했다. 내 아들이지만 부족하구나. 영특한 백작 영애를 궁에 묶어 두면 이런 아들을 조금이나마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황태자의 왕위 계승에 부정적인 여론도 줄어들 것이고. 보답받지 못할 마음을 가졌다면 백작 영애에게도 다른 누구와 결혼하는 것보다는 제국 최고의 여인의 자리에 앉는 것이 더 좋을 터였다. 최소한 백작 영애가 그저 ‘친구’라는 소공작에게 보이는 깊은 의를 보면 영애는 황태자를 배신하지는 않을 듯했다. 겨우 친구 사이에도, 공작령의 입지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치는 의지를 가졌으니. 

“소공작은 어떤 영애와 맺어지게 될지 궁금하지 않으냐?”

“…그것은 오직 소공작만이 알겠지요.”

“그때는 네가 내명부를 쥘 테니 원하는 만큼 축복하여도 좋겠구나.”

“제국의 빛에 감사드립니다.”

어쩌면 공작령에서 반기를 들고 공국으로 독립하겠다고 나설지도 모르지. 같은 선조의 핏줄을 가지고 있으니 그 성질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 정도면 순순히 잡혀 있어 준 게 용할 정도로 오랫동안 공작가는 제국에 충성을 다했다. 게다가, 공작령의 땅은 제국에 없어도 될 정도로 척박하기도 했고. 최근 강규리의 토지 개발 사업 인허가로 인해 남부의 새로운 땅을 개척한 결과가 매우 흡족했다. 국고의 배를 불리는 만큼 백작 영애는 욕심 나는 인재가 되었다. 강규리는 황제의 곁에 섰다. 괜히 시큰한 듯한 발목을 살짝 돌렸다. 전에는 몰랐는데. 발끝이 아렸다. 최종수가 신발 끈을 묶어주던 북부의 따뜻하고 푹신한 부츠가 신고 싶었다. 왕궁에 있는 것은 지겨웠다. 앞으로 영영 이곳에서 매여 살겠지. 하얗게 빛을 내는 궁전과 금박 두른 장식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북부의 코가 아플 정도로 시원한 공기가, 섞여 들어오는 울창한 숲의 내음이… 강규리를 지난한 짐에서 해방했다. 그러나 이제는 점점 희미해질 기억이겠지. 황궁에 잡힌 이상 북부에 갈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래도 괜찮아. 강규리는 자신을 다독였다. 


- 소공작의 혼사를 네가 정하거라. 

- 제가 말입니까?

- 그래. 여기 있는 영애들 중 네가 골라 보거라.

강규리는 방 안에 다소곳하게 일렬로 서 있는 영애들을 보며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여기 계신 영애들은… 모두 북부의 소공작에게 청혼서를 내실 생각이십니까? 어떤 이는 당당하게, 그리고 어떤 이는 망설이며 대답했다. 강규리는 아주 오랜만에, 울고 싶어졌다. 내게 이 혼사를 결정할 황가의 권한을 준다는 것은 너무 잔인하잖아. 이건, 닭장 속의 닭들과 다를 바가 무어란 말인가. 결혼이란 관습은 치열한 손익 계산이다. 나는 종수가…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아. 

- 외람되오나, 전하. 잠시… 독대를 청합니다.

역시 황제는 강규리와 최종수의 절친함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강규리가 최종수를 얼마나 특별하게 여기는지, 상처 주고 싶지 않아 하는지, 아끼고, 아끼는지까지. 제국의 빛은 강규리의 마음을 이미 비추어 보았다. 강규리를 제 곁에 더 단단히 묶어 놓는 방법, 강규리의 마음을 헤집는 길까지 모두. 

처음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북부에서 사업을 하려던 강규리를 붙잡아 놓을 때와 똑같았다. 그때도 황제는 백작가와 북부로 가는 물자 조정권을 내세우며 강규리를 가뒀다. 강규리는 밤을 새워 적은 편지를 면목도 없이 북부로 보냈다. 북부로 올 강규리를 기다리던 최종수는 괜찮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건 정말 최종수가 최선을 다해 발휘한 인내심이었다. 강규리가 수도에서 더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하니까. 황제 곁에서 나랏일을 배워보고 싶다고 하니까. 핑계인 것이 분명하지만 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니까. 강규리의 얄팍한 변명을 아직은 웃으며 믿어줄 정도로, 우리의 관계는 중요하니까. 너의 이유를 무시하고 내 곁으로 잡아 올 생각을 못 할 정도로, 너와의 친구 관계라도, 유지하고 싶으니까. 

너와 소공작은 연인 관계도 아니고 약혼을 한 것도 아닌데, 네게 이 혼담을 정하지 못할 연유가 무엇이지. 답을 알면서 묻는 황제에게 강규리는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소공작의 인생이… 자유롭길 바랍니다. 황궁에 들어와 처음으로, 어떻게 들릴지도 미처 계산하지 못하고 내뱉은 진솔한 절박함이었다. 최종수의 대로부터 뿌리 깊은 황가와 공작가의 계약을 끊는 제물로 강규리는 자신을 바쳤다.


북부에서 소공작이 수도로 출발했다는 전령이 도착한 지 반나절 만에 최종수는 황성의 문을 통과했다. 얼마나 달렸는지 마차와 수레는 행렬의 저 뒤로 뒤처져 있었다. 꼭 자신의 머리칼처럼 검은 털의 명마를 타고 궁에 당도한 최종수는 비단으로 덮인 물건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황궁 기사의 만류에 최종수가 당당히 내민 것은 현 공작의 직인이 찍힌 알현권이었다. 오랜 황가의 우방으로서 사용할 수 있는 권한. 가장 먼저 알현을 청할 수 있는 자의 앞을 막았다간 기사의 목이 먼저 떨어질 터였다. 

햇살에 빛나는 황제궁에 들어서자마자 최종수는 강규리를 찾았다. 황제를 보러 왔다는 사람이 접견실은 고사하고 강규리가 있을 만한 곳만을 찾아다녔다. 고개를 숙이는 아무 기사나 붙잡아대며 물어물어 강규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수도의 주요 세력 귀족들과 회의를 하던 강규리는 문밖에서 들리는 소란에 눈을 꾹 감았다. 오늘 새벽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긴 했다. 규리가 원탁 중앙에 앉은 황태자에게 넌지시 회의를 중단하기를 청하려 했을 때였다. 문이 부서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최종수가 들이닥쳤다. 전장의 무공으로 받은 모든 훈장을 단 채, 보석으로 단추를 장식한 화려한 정복 차림의 소공작이 사소한 일을 방해했다는 듯 작게 귀족들에게 눈인사했다. 

"소공작!"

"아, 제국의 작은 빛을 뵙습니다."

"이게 무슨 짓인가?"

"매우 급하게 전할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방해 됐습니까? 묻는 최종수의 눈이 형형했다. 기실 작위만으로 공작가와 겨룰 수 있는 사람은 없었기에 귀족들 모두 눈길을 피하며 말을 아꼈다. 경우가 아닌 상황에 황태자가 소공작을 불렀다. 정신 차리라는 황태자의 일갈에도 최종수는 뻔뻔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내내 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종수가 앞뒤 따지지 않고 달려들자 혼란스러워진 규리가 종수를 부르려 했다. 그래도 적어도 적절한 절차를 거쳐 티타임을 청할 줄 알았는데.

"소공작님."

"백작 영애. 영애는 나와 할 얘기가 있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아, 우선 이것부터 받으시죠."

뒤로 종수가 손짓하자 시종이 비단이 덮인 커다란 물건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최종수는 씩 웃었다. 불길한 그 웃음에 규리가 사로잡힌 사이 비단이 걷혔다. 

총천연색의 보석으로 장식된 케이지 안에 흰 눈여우가 얌전히 앉아 있었다. 등 부근에 검은 반점이 둘. 요요히 빛나는 눈동자로 반갑다는 듯 규리와 눈을 맞추는 그 여우를 강규리는 한 번에 알아보았다. 목에 거대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건 여우가 흑진주로 주변이 세공된 다이아몬드를 이것 보라는 듯이 살랑 흔들었다. 어떻게, 공작가에서 이런… 웅성거리는 귀족가 가주들 사이에서 규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종수, 너 결국 얘를…

"이 녀석이 오고 싶어 한 거야."

"도대체,"

"친우인 백작 영애가 혼사를 앞뒀다는데, 선물은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잘못한 어린아이가 된 듯 입을 딱 다문 규리에게 여우를 꺼내 안겨 준 최종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여우는 규리의 어깨에 얼굴을 올렸다. 마침 이 장면의 관객이 되어준 귀족들이 황태자와 소공작을 번갈아 바라봤다. 네가 이런 조건을 두고 저런 놈에게 갈 수 있단 말이지. 최종수는 속으로 짓씹었다. 황태자는 이 회의가 예상보다 이르게 끝날 것을 직감했다. 아카데미에서는 그저 꼬마들 소꿉장난인 줄 알았는데. 강규리를 못 얻는 건 좀 아쉽군. 황태자는 귀족 중에서도 사랑을 지키는 고리타분한 사람들을 알았다. 아직도 낭만을 간직한 부류들. 그중 하나인 최종수는 완벽한 수도 예법으로 인사했다. 


회의가 흐지부지 끝나자마자 공작가의 타운하우스로 찾아간 강규리는 편한 의복으로 갈아입은 최종수를 만날 수 있었다. 침실로 냅다 쳐들어가자 신문을 보던 종수가 테이블에 신문을 내려놓고 규리를 맞이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건 내가 할 말 같은데."

"…미리 말 못 한 건 미안해. 하지만 오늘 일은 심했어."

"심해? 내가?"

심한 건 그 황태자 녀석과의 혼담을 기껏 가십지로 듣게 하는 너 아니야?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내게. 최종수의 말에서 틀린 게 없긴 했다. 오는 길 내내 생각해뒀던 변명을 까맣게 잊게 하는 최종수의 앞에서 강규리는 눈을 피했다. 

"날 봐."

"종수야. 난."

"내가 빌어야겠어?"

제국의 소공작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에 퍼뜩 고개를 든 규리가 반쯤 풀어헤쳐진 종수의 셔츠를 목격했다. 가까이 다가온 최종수는 아주 부드럽게 규리의 팔꿈치를 건드렸다. 넌 내가 남자로 안 보이나 봐. 

"내가 너를 가두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렇게 침실에 함부로 들어와."

"…너는 내가 싫어하는 짓은 하지 않잖아."

"글쎄. 난 네가 가둬지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면 상아궁이 마음에 든 건가. 거기서 안 나오길래. 네가 원하는 거라면 해 주려고 했지. 십 년 지기 친구로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아니면 황제궁을 줄까?"

"소공작!"

"그렇게 부르지 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

"너야말로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긴 해?"

강규리. 네게 황태자를 선택해야 할 이유는 없어. 감정도 없는 결혼을 해야 했던 이유가 있다면 모를까. 내 말이 틀려?

"…감정 없이 결혼하는 게 문제가 돼?"

"문제는 없지, 최소한 네가 솔직한 선택을 했다면."

차라리 마음껏 재고, 따져서 골라. 내가 아는 강규리라면 하기 싫은 결혼을 하게 할 조건을 네 손으로 없앴으면 없앴지, 얌전히 결혼해 줄 리가 없거든.

"대체 왜 황태자와 결혼하려는 건데? 네 하녀를 바라볼 때도 그것보단 나은 눈이었어."

"눈빛이라니. 그런 근거도 없는 얘기로…"

"거울이라도 갖다줘?"

"황제가 널 붙잡은 그 조건, 나지?"

거짓말 할 생각 마. 내가 지금까지 참은 감정들, 우습게 만들지 마. 도대체 뭐 때문에 네가 이렇게 고민하고 혼자 희생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럴 필요 없다고. 

"그동안 그 적은 전쟁 물자만으로 어떻게 북부가 살아남았을 것 같아?"

"…설마."

"여우가 걸고 있던 목걸이 걸어 봤어?"

더는, 북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 내가... 정말로 황제궁을 무너뜨리기 전에. 

"이 정도면 알아들을 만하잖아. 넌 똑똑하니까."

"…종수야."

"나도 생각이란 게 있어."

정말로 네가 이 말도 안 되는 혼담을 고집하겠다면, 어디 한 번 막아 봐. 최종수가 입꼬리를 올리며 속삭였다. 강규리는 매번 고민했다. 최종수에게 가는 길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두드리고 또 두드리다 문제가 생기면 건너지 않았다. 완벽하고, 안전하고, 누구도 다치는 일이 없는 방도만을 찾았다. 열에 아홉이 괜찮아도 하나의 결함으로 떠나지 못했다. 그런 강규리에게 최종수가 재난처럼 들이닥쳤다. 수백 개의 안 되는 이유 사이를 걸어, 단 하나의 빛나는 이유를 찾아서. 다른 모든 것은 상관 없다는 듯 제 전부를 걸고. 왜냐면, 난.

"난 너 아니면 안 되겠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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