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외전) 복분자가 너무해

#복분자병이_폭발해서_방이_사건현장처럼_되었을_때_님캐의_반응은

*원피스 세계관에도 아무튼 복분자가 있다는 설정의 드림구몬

*엔딩 이전의 시간대

세피어르는 바닥에 누운 채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지금 이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적당히 기분이 좋았었다. 여름섬에 근접해 가는지라 점점 더워지기는 했으나 6번대가 개발한 얼음 선풍기가 밤새 방을 시원하게 해준 터라 방 안에만 있으면 크게 더운 것도 못 느껴서 좋았으며, 한 달 가까이 골머리를 썩이던 상단의 서류들도 슬슬 끝을 보이는 참이라 좋았었고, 목이 타서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4번대의 숙성고에서 푹 재운 듯한 색의 롤링 베리 브랜디를 획득한 것도 좋았다.

그 롤링 베리 브랜디가 사실은 복분자주였다는 사실만 빼면 말이다.

그리고 그 복분자주가 숙성시킨지 엄청 오래된 듯하고, 하필 우리 배는 여름이 온 여름섬을 향하고 있어 복도는 제법 더웠고, 4번대의 숙성고와 내 방은 그리 멀지 않았으나 배의 구조상 제법 돌아와야 했으며, 아침부터 약간 들뜬 기분에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손도 가볍게 흔들었다는 점이 문제였을까...

방에 도착하자마자 조금 경쾌한 리듬으로 책상 위에 병을 내려놓는 순간 코르크 마개가 날아가며 내용물이 터져 나왔다. 뿜어져 나오는 붉은 액체의 기세에 놀라 한 걸음 물러나다가 바닥에 대충 쌓아둔 책에 걸려서 허둥대며 뒤로 넘어져 버렸고, 그렇게 넘어지며 본능적으로 쫙 펼쳐버린 날개가 옆의 약선반을 후려쳐서 모양새가 좁은 병이 서너개 떨어져 깨졌으며, 그와 동시에 발로 차올린 책상에서 주방에 갖다주지 않고 묵혀둔 컵들이 넘어져 우르르 깨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고쳤다.

너무 한 번에 몰아친 상황에 정신이 쏙 나가버린 기분이긴 했으나 자신이 사고를 쳤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하게 인지되었다. 후회하자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게 안일했던 방금까지의 일들을 짧게 복기한 세피어르는 생각했다. 음, 어쩔수없지. 머릿속에서 생각을 가볍게 털어내곤 부스스 몸을 일으켜 제자리에 앉은 세피어르는 자신의 방에서 늘 약품을 다룬다는 이유로 6번대 형제들이 사방팔방 방수 처리에 용을 써뒀던 사실에 새삼 감사했다. 적어도 이 지독한 복분자주의 냄새가 배의 나뭇결에 스며들어 열날닷새동안 방에서 퍼질 일은 없을테니 말이다.

다다다다다닥. 쾅!

“세피 대장! 뭔가 엄청난 소리가 난 거 같은데!!”

당황한 기색으로 방문을 부술 듯이 열어제끼며 들어온 이는 7번대의 이반도였다.

“어...”

세피어르는 이반도와 눈을 마주친 순간 살짝 고장나버렸다. 그도 그럴 게 방안이 어지간히 엉망이지 않은가. 검붉은 액체가 사방팔방 흩뿌려져 있고 오만 유리가 깨져서 바닥을 나뒹굴며 심지어 쏟아진 책더미까지 제 옆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사람 하나 잡아다가 죽였대도 이상하지 않은... 아니 잠깐만, 진짜 사람 하나 죽인 꼴로 보이는 게 아닐까? 세피어르는 조금 당황했다. 물론 아주 멍청한 당황이었지만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잡생각이 튀느라 굳어버린 세피어르의 반응에 이반도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지고 표정이 아연해졌다.

“대장, 아니...”

세피어르는 생각했다.

“세피, 세피어르...”

그래, 지금 이 꼬라지가 대장이란 호칭을 바닷물에 말아잡술 정도로 물자관리부대 입장에서 보기엔 끔찍할 수도 있겠다 싶...

“우리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었... 응?

세피어르는 제 형제놈의 낯짝이 급격히 감수성에 촉촉해져서는 무슨 맥락에 안 맞는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뭘 이러지 않기로 한다는 거지? 모비딕에 1,800명의 형제가 있으면 그중에 1,600명은 미친 듯이 튕겨 다니는 고무공 같은 해적놈들이다. 자신도 가끔 육신이 생각을 따라주지 않아서 의도치 않게 망가트리는 물건이 생긴다지만 저런 약속을 했을 정도로 무언가를 부수고 다닌 적은 없다. 2번대의 최고 망아지인 벨처가 한 달 동안 부숴먹은 정도를 10년 동안 부셨을 정도라 이 말이다.

“네가 이럴 때마다 삿치가, 삿치가 슬퍼해...”

아니, 브랜디 좀 쌔볐다고 삿치가 슬퍼할리가 없다. 애초에 4번대 중에서 저장고에 술 좀 사라졌다고 슬퍼할 놈이 있을리가 없다. 술 관리 담당인 이삭이 허리춤에서 넙적한 고기용 칼을 꺼내서 악귀처럼 쫒아오면 모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도 이반도가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바닥에 흩어진 유리조각과 세피어르를 계속해서 불안한 듯 번갈아 보며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오다가 느릿하게 손을 뻗는다.

“아니, 아니야.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마르코한테 가자.”

“갑자기 마르코는 왜?”

“일단 치료부터 받아야지!”

“딱히 까진 데도 없는데 굳이?”

“무슨 소리야! 피를 이렇게 흘렸는데!”

“피?”

“그래, 피.”

“복분자인데”

“그래 복분, 뭐?”

“복분자주.”

“머?”

“너 이 냄새 안 맡아져?”

“코 막혔는데.”

“…”

“…”

바보 같은 문답이 오간 후 둘 다 바보같이 얼빠진 얼굴이 된 채 어색한 정적이 찾아왔다. 어쩐지... 낯짝이 촉촉해져서 목소리도 촉촉해진 줄 알았더니 그냥 코맹맹이 소리였던 것이다. 10분 같던 10초의 정적 이후 먼저 입을 연 것은 세피어르였다.

“아니 너는 코가 막혔으면 약처먹고 처잘 것이지 여긴 왜 기어 왔어?”

“너한테 약 받으려고 그랬지.”

“16번대한테 가야지 왜 나한테 약을 찾아?”

“니가 말아주는 약이 효과가 끝내준다니까?”

“약이 술이냐? 말게?”

“아무튼 칭찬이야.”

“애들한테 잔소리 듣기 싫은 거 아니고?”

“그것도 있지.”

쯧!

세피어르는 이반도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버린 후 슬쩍 고개를 돌려서 터진 복분자주 병을 한번 바라보곤 다시 이반도를 바라보며 가볍게 턱짓했다.

“피는 무슨 소리야. 이러지 말라는 건 또 뭐고.”

“아니...”

“뜸 들이지 말고 그 커다란 머리통으로 무슨 오해를 한 건지 빨리 이실직고해.”

“아니이......”

말꼬리를 늘어트리며 시선도 점점 옆으로 늘어트리는 제 형제를 쳐다보는 세피어르의 눈매가 점점 세모꼴로 변해가며 스멀스멀 압박감이 조여왔다. 아니 쟤는 왜 이런 데다가 살기를 쓰고 그래... 이반도는 대장의 살기를 견디기와 잠깐 쪽팔리기 사이에서 갈등했으나 이내 세피어르는 그래도 다른 형제새끼들 마냥 놀림감 하나 가지고 2년은 놀려먹고 나이를 처먹어 세월이 어찌 흐르는지도 체감 못해서 아직 1년밖에 안 놀렸다며 수줍어하는 편은 아니니 그냥 눈 딱 감고 잠깐 쪽팔리기를 선택했다.

“나는 네가... 아니 그니까... 하...”

세피어르의 눈초리가 점점 더 매서워졌다.

“나는그러니까니가이주전부터기운없고우울해보여서걱정되었는데기어코또자해했나싶어가지고놀래서그랬어”

“…”

머리끝까지 화난 이조가 플린트락 네자루로 연사를 갈길 때보다 더 빠르게 문장을 내뱉은 이반도는 말을 마치자마자 입을 꾸욱 다물고 눈치를 봤다. 세피어르가 방금 한 단어로 들린 말을 머릿속에서 문장으로 쪼개는 동안 이어진 그 잠깐의 침묵도 못 버틴 이반도는 냅다 무릎을 털썩 꿇고 앉아서 온몸으로 저 반성중이에요를 표출하는 것으로 제 맘 약한 형제가 화를 내지 못하게 배수진을 까는 고난이도의 밑장빼기까지 선보였다.

“그러니까... 코가 막혀서 복분자 냄새를 못맡아가지고 이 피가 전부 내꺼인줄 알았다?”

“그렇지.”

“그리고 내가 ‘또’ 자해를 한줄 알았다고?”

“응”

“사유는 이주 전부터 기운 없고 우울해 보여서?”

“맞아.”

“이 새끼 멍청인가.”

“아니 너는 사람이 걱정을 해줘도..."

잘못했어요 표정에서 억울해요 표정으로 바뀐 이반도의 촉촉한 눈을 마주한 세피어르는 몸을 작게 떨며 시선을 피했다. 사십 넘은 아저씨가 울망하게 쭈그러진 낯짝으로 맑고 촉촉한 눈을 해봤자 그냥 징그러울 뿐이다.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억울한 것은 되려 이쪽이었다. ‘또’라니? 누가 들으면 내가 밥 먹듯이 자해를 해댄 줄 오해할 것이다. 자신은 한 번도 의도하고 자해를 한 적 없으며 그저 옛날에 바로바로 재생할 때 가볍게 살던 습관이 좀 남아있을 적에 있던 일들 가지고 괜히 주변에서 야단 떨었을 뿐이다. 가족들이 갑판에서 구르기만 해도 팔이 부러진다고 부산을 피운 후부터 자신을 얼마나 과보호했는지 굳이 말해봤자 입만 아프고 이놈은 분명 끝까지 반박만 해댈것이니... 세피어르는 그냥 지금 이 자리에서 괜한 입씨름을 할 바에야 방이나 청소하는 쪽을 선택했다.

“어휴... 됐고, 약 받고 싶으면 온 김에 청소나 도와.”

세피어르가 한숨을 쉬며 일어나 빨래통에서 쓰고 넣어둔 수건을 꺼내 냅다 던지자 이반도는 그걸 잽싸게 받아낸 후 군말 없이 바닥을 슥슥 닦기 시작했다. 세피어르는 그 옆의 쓰레기통을 들고 와서 쭈그리고 앉아 약선반 아래에 흩어진 유리조각부터 주워 담기 시작했다. 일단 여기를 치워야 저 웬수놈에게 약을 줘서 내쫒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세피어르는 날아간 코르크 마개가 천장등을 깨지 않은 것에 그나마 위안을 얻으며 잡생각과 함께 손을 재게 놀렸다. 웬 놈이 미간에 총구를 대고 쏴도 눈 하나 꿈쩍 안 하던 제가 고작 발효주 터지는 소리에 놀라서 뒤로 넘어지다니 솔직히 말하면 조금 창피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평화롭게 살아서 늘어진 게 좋은가 싶기도 했다. 제가 평화로웠던 만큼 제 형제들도 평화로웠다는 소리 아닌가. 세피어르는 좋은게 좋은거라 생각하며 애써 스스로의 기분을 달랬다. 그리고 마냥 창피해하기만은 또 애매한 것이 코앞에서 대포가 쏘아지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있는 힘껏 팽창된 술병이 터지는 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그냥 경쾌하게 샴페인을 따는 팡 하는 소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밀가루 포대가 터지는 양 펑 하는 소리도 아닌...

뻙!!!!!!!!!

그래. 이 소리......

“…”

“…”

“두병이였냐?”

“그렇게 됐다.”

... 겨울이 온 겨울섬의 밤바람보다 서늘한 정적이 잠시 방안에 돌았다.

“그냥 4번대에 이실직고하고 6번대한테 치워달라고 하자.”

“나도 지금 그렇게 생각했어. 너도 약은 16번대에서 받자.”

“그래.”

“그래.”

두 해적은 복분자주 두 병의 아득한 위엄 앞에 빠르게 패배를 선언하고 제 발로 잔소리를 받으러 터덜터덜 선실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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