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필링필링

외전1. 그 사람의 상담차트

스푼의 상담사

망상요람 by Z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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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1: 까마귀 혼혈, 사사.

 

똑똑-

“들어오세요, 사사 씨.”

사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좋은 향기가 났다. 램프는 눈이 따갑지 않은 따뜻한 색의 조명이었고, 갓 끓인 허브차 냄새가 풍겼다. 이솝우화 속 할머니의 집이 이럴까,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꾸며진 작은 상담실은 들어가는 사람의 긴장을 풀어내는 데에 톡톡히 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있는 사람만 할까? 사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반년 전, 어린 나이에 갓 입사한 스푼의 심리 상담사. 반년 조금 안 되는 시간 만에 특기를 숙지하고, 그를 활용하여 효과적인 상담 및 치료가 가능하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다정하게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으니 거부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저를 믿어주세요, 라고.

“써주신 것 잘 봤어요. 발음은···. 저도 연습해왔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안된다면 필담도 부탁할게요.”

여기, 수첩이랑 펜 준비해봤어요.

두 손에 수첩과 펜이 고이 쥐였다. 그마저도 타냐를 닮은 가을 낙엽의 색이었다. 사사는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하 마리 업스먼···.”

“음- 그건 곤란해요. 50분만 부탁드리면, 안될까요?”

상담이 아니라, 신입과 함께 수다를 떠는 시간이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타냐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사사는 그것이 어쩐지 조금 부담스러워, 슬쩍 시선을 피했다. 여전히 입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어쩌면 극히 방어적이라고 할 수 있는 태도에 사사는 지레 찔려 타냐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게 타냐는 멀쩡했다. 오히려 사사를 배려하는 그만을 위한 마지노선을 정해주는 것이다.

“그럼 좋아요. 제가 질문을 할게요. 곤란한 질문이면 고개를 저어주시고, 괜찮다면 그냥 솔직하게 말해주시면 돼요.”

아,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많은 사사로서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선택지가 매력적이었다. 사사는 곧 고개를 끄덕였고, 본격적인 상담이 그제야 시작되었다.

“그럼, 사사 씨. 지금 어느 조에도 속해 있지 않은 것 같은데, 맞나요?”

“으응.”

“그럼 보통 어떤 임무를 맡아서 하시나요?”

“어굴 마담···. 아니먼 덩부기간 엄무 지어늘···.”

“얼굴마담이라니 정말요? 하긴, 어쩐지 너무 잘생기셨다 싶긴 했어요. 그럼 보통 일과를 어떻게 보내세요? 출근이 언제죠?”

-퇴근은요? 취미는 있나요? 아, 저도 좋아해요 그거. 그럼 혹시 악몽을 자주 꾸는 타입인가요?

···그리고 각오했던 것과는 다르게, 너무나 일상적인 것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하루에 몇 시간이나 자는지, 어떤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지, 같이 어울리는 사원들이 있는지. 너무나 가벼워서 차마 대답하지 않겠다고 거절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사사는 단 50분 만에 일과를 탈탈 털렸다. 타냐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상큼했다.

동시에, 사사는 타냐의 손이 빠른 속도로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내가 대답하면서 보이는 반응 같은 것을 적는 걸까?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심리학적 견해라도 내린 걸까? 보여달라고 해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차마 뺏어서 볼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자, 그럼 얘기해주셔서 고마워요. 고생 많았어요.”

“···아녕.”

“네,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타냐와 함께하는 첫 50분이 지나갔다.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참으로 실속 없는 상담 시간이었다.


일주일은 왜 그리도 빨리 지나가는지. 사사는 다시 긴장되는 마음으로 상담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의료실의 레인이 사사의 맘도 모르고 '타냐쌤한테 반했어~?'라는 둥의 소리를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저 반쯤의 기대감과 반쯤의 불안함에 예민하게 깃털을 세울 뿐이었다. 그러다,

“사사 씨, 들어오세요~”

화들짝, 날개가 한 번 퍼덕인 것에 레인이 뿜었다. 사사는 빨갛게 물든 귀를 하고서 괜히 날개를 정돈하는 척했다. 상담실 문은 곧 열렸다.

두 번째 상담의 시작이었다.

“안녕하세요, 사사 씨. 잘 지내셨나요?”

“응.”

“그래요. 오늘은-”

MBTI입니다!

덜컥, 사사는 대뜸 일어날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자신에 대해서 털어볼 만한 얘기는 지난번에 다 말했다고 생각해서, 이번에야말로 과거에 있던 일을 묻지 않을까 불안했다. 그래서 상담실 문 앞에서도 한참이나 망설였고, 뭐, 어쨌든- 이렇게 난데없이 유사 과학을 꺼내 들 줄은 몰랐다는 말이다.

“저도 사사 씨에 대해 분석하고, 사사 씨도 자신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는 거죠.”

저도 같이할 테니까요, 네?

결국 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냐는 화색을 지으며 내향형이니 외향형이니 하는 소리를 하며 검사표를 주었다. 체크만 하면 되는 것이니 조용할 것이란 예상도 빗나갔다. 타냐가 다양한 상황을 예시로 들며 어떻게 하겠냐 물어보는 것에 대답해주다 보니, 사사는 다시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약속이 잡혔는데, 상대가 1시간이나 늦는다고 해요, 어떨 것 같나요?”

“…카뻬에더 기다딘다?”

“에이, 어떨 것 같냐니까요. 기분을 말해야죠.”

“음….”

-타냐에 대해서는, 예상이 맞을 때가 단 한 번도 없다.

“반짝이는 걸 좋아한다고 하셔서 비즈 공예를 준비해봤는데 어때요?”

“서로 하나씩 물어보기!”

“-사사 씨, 악몽의 내용이 뭔지 알려줄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은 흘러갔다. 그만큼 사사와 타냐 사이의 시간도 점점 쌓여갔다. 결국 타냐는 사사의 그리 두껍지도 못한 가시를 녹여내는 것에 성공했다. 말이 하루 이틀이지, 상담 간격을 생각하면 두세 달이나 걸려서 말이다. 그것이 시간 낭비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타냐에겐 그만큼의 소득이 있었으니까.

이제 타냐는 사사의 과거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며, 그의 과거 동료가 다 죽은 것으로 인한 불안감도 알고 있다. -그의 절친한 친구가 사사를 배신하고 나이프로 들어간 것 역시. 그것은 타냐가 사사의 불안을 이해하고, 상실을 공감하는 것에 큰 도움을 주었다. 결국 사사는 상담실이라는 큰 장막 아래 울고 웃는 모습을 몇 번씩이나 보여주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관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저 상담사와 내담자. 하지만 분위기를 확실히 변해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는 가시고, 좀 더 부드러운 친밀감이 자리했다. 그 오랜 기간 타냐와 사사는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익숙해졌고, 다시 점점 말이 없어졌다. 좋은 의미였다. 이제는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들을 공유한 뒤 아예 독서 시간을 갖는 일이 잦아졌다. 이래도 되나, 스스로 생각할 정도였다. 그래서 사사는 직감하고 있었다.

이 시간의 끝을.

“사사 씨, 다음이 마지막 상담이에요.”

“!”

상담 시간이 끝나기 10분 전, 책을 덮은 타냐가 통보했다. 아니, 예고했다.

사사는 복잡 미묘한 기분이 들었으나, 뿌듯하면서도 아쉬운 감정에 무슨 이름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그동안 많이 나아졌던가? 사사가 보기엔 그리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사사는 언제나의 사사였고, 여전히 혀가 짧고, 여전히 팀원이 없었다. 대체 뭘 보고 상담을 그만두자는 걸까?

그 순간, 사사는 자신이 아쉬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가 사사 씨와의 상담을 진행하면서 세운 목표는 하나였어요.”

“이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하기.”

하지만 그 아쉬움을 붙잡고 있기에, 타냐의 설명은 다정했다.

“이제 사사 씨는 필요하고 원할 때면 언제든 이곳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땐 솔직하게 도움을 청하시면 돼요.”

이것은 끝이되 끝이 아니리라.

타냐는 그저 사사에게 기댈 곳을 하나 선물해준 것이었다. 그것은 언제든 날개를 쉴 수 있는 둥지와 같아서, 그가 기억하는 온기를 그리며 또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사실 사사는 그것이 전부였다. 필요한 것의 전부였다.

“전 언제나 여기 있으니까요.”

넌 그걸 알고 있었던 걸까.

타냐는 잔잔하게 웃으면서 사사의 손을 잡았다. 특기는 쓰지 않았다. 손에 뭔가 쥐여주는 감각이 느껴졌다. 따뜻하게 데워진 금속이었다.

“이건,”

“손거울이에요. 특별히 뚜껑은 제가 자수를 넣은 거예요.”

은색으로 반짝이는 손거울. 사사는 거울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타냐의 말대로, 앞의 뚜껑에는 섬세한 자수가 놓여 있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빨간 꽃, 겨울 호수와 덤불이 있었다. 남자가 들고 다니기에는 조금 화려하고 또 지나치게 섬세한 장식의 거울이었다. 방에 고이 모셔놔야겠다···.

“고마어.”

“뭘요. 전 항상 상담이 끝난 분들께는 선물을 드리거든요. 좋아하셔서 다행이에요.”

하지만 정성이 가득 담긴 선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사사는 손에 들린 것을 소중하게 그러쥐었다.

이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라면, 이미 진작에 성공했다. 타냐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몇 차례 지켜보며 신중하게 판단한 것이다. 타냐의 말이 맞았다. 악몽을 꾸는 날이면, 사사는 누구에게든 털어놓고 싶어 타냐를 찾아올 것이다.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또 언제나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그중에서 타냐는 더욱 특별했다. 그것이 상담의 끝이었다.

그 이후로, 사사는 문제가 있다면 금요일의 자유 상담 시간을 찾으며 타냐를 만났다. 단 6개밖에 없는 상담 시간을 갖기 위한 경쟁은 치열했다. 다행히 사사는 그중에서도 빠른 편이었다. 제일 이른 시간에 이름을 적으며, 사사는 다시 타냐를 떠올렸다.

상담 그 이후, 사사는 동료로서의 타냐를 보게 되었다.

보통 여사원들과 함께 다니는 타냐는 어딘가 차가운 구석이 있었다. 사사가 인사를 건네면 안녕하세요, 해맑게 인사는 하지만 애써 안부를 묻거나 대화를 시작하지 않았다. 사사도 비슷하게 구는 바람에, 둘이 대화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것이 사사는 조금 낯설었다.

상담실에서의 타냐는 집요했다. 안부를 물어보고, 대화가 끊기면 안 된다는 듯이 굴며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혹은 자신의 얘기를 하거나- 어쨌든 대화에 적극적이었다는 소리다. 하지만 사사가 보기에 타냐는,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친한 여사원들과의 대화에서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같았다.

상담실 안에서의 타냐와 밖에서의 타냐는 다르다.

사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타냐가 점점 멀어져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 전에 다시 상담 일정을 잡고, 또 이름을 적고, 다시 상담실로 들어가고···. 이것을 반복했다. 상담실에 들어갈 때면 타냐는 언제나 다정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것에 또 안심한다.

한 번은 생각했다. 좀 친해지면 나을까? 하지만 사사는 누가 챙겨주거나 그쪽에서 먼저 다가오면 다가왔지 말을 걸겠다고 끙끙거려본 적이 없었다. 결국 혼자 끙끙대다가 직접 물어봤을 때는-

“도아하는 게 머야···?”

“? 마실 거요. 이온 음료, 탄산, 차, 커피, 과일, 안 가리고 다 좋아해요.”

그리고 그것이 가끔 사사가 타냐에게 마실 것을 사다 바치는 이유였다.

“사사 씨! 오늘도요? 감사해요. 사사 씨는 뭐 좀 드셨어요?”

저 샌드위치 싸 왔는데, 하나 드실래요?

그 결과, 아침의 짧은 대화뿐이지만 성과는 있었다. 타냐가 상담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정하게 웃고 있었으니까. 사사는 그런 타냐를 따라 슬쩍 웃었다. 그것이 영 부족하게 느껴질지라도-

그래, 사사는 이것으로 만족했다.

 


 

Case 2: 판다 혼혈, 귀능

 

귀능은 단언컨대, 단 한 점의 기대도 없었다.

“들어오세요, 귀능 씨~”

상담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긴 하지만, 말하는 것이 어떻게 특별히 도움이 되겠는가. 상담 시스템도 뭐, 찡찡거릴 곳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생긴 곳 아닌가? 귀능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귀능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전혀, 단 1그램도 없었다. 그래서 들어가자마자 '다른 사원들의 시간을 뺏지 않겠다'며 빠져나올 계획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인생은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타냐 양~”

“좋은 아침이에요, 그렇죠?”

주어진 지 반년쯤 된 상담실은 어느새 타냐의 취향으로 한껏 꾸며져 있었다. 익숙한 서류 냄새가 스치기는 하지만 책장에 가득 꽂힌 책들의 냄새로 따뜻하기만 했고, 티 포트와 찻잔을 두는 찬장이 앤틱해서 기분이 좋을 정도였다. 한 마디로- 누가 와도 포근함을 느낄 법한 분위기였다. 귀능은 오, 감탄하며 소파에 앉지도 않고 말했다.

“타나 양, 저는 딱히 상담이 필요하지 않은데 차라리 그 시간을 다른 사원에게 양도하는 게 어떨까요?”

“그런다 해도 지금은 이미 귀능 씨에게 주어진 시간이니까요. 50분 동안 그냥 차나 마시고 갈래요?”

“뀽, 해봐야 할 업무가 있어서-”

“음, 서장님이 귀능 씨에 대해서 당부하신 게 있어서요-”

아마 돌아가도 문 안 열어 주실 거예요. 하하. 뀽?!

귀능은 결국 돌아갈 길을 차단당한 채 자포자기하며 소파에 앉았다. 타냐는 자연스럽게 그 앞에 녹차와 대나무를 내려놓았다. 아주 재빨랐다.

서장님이 수를 쓰셨을 줄은 몰랐는데. 하긴, 펫숍 얘기만 나오면 발작적으로 목을 긁는 것을 못마땅하게 보시긴 했다. 하지만 그건 상담으로 어떻게 될 일이 아니다. 차라리 약을 먹으면 먹었지-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 진짜 업무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대화를 주도하는 것밖에는···

몇 가지 계산으로 빠르게 회복한 귀능은 바로 대화를 시작했다.

“타냐 양, 지금 상담이 완료된 사원들이 있나요?”

“그건 나중에 정리해서 서장실로 보고할 생각이에요. 귀능 씨는 보통 몇 시쯤 출퇴근하시나요?”

“뀨, 그건 그때그때 달라서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려운데요.”

“그러면 건강에 좋지 않을 텐데···. 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20대에 밤샘을 하는 건 미래의 생명을 당겨쓰는 거라는 말.”

“에이, 전 혼혈이라 괜찮을 거예요.”

“아, 판다 혼혈이라고 하셨죠?”

그리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뺏겼다. 평범하게 출퇴근 시간을 하던 게 왜 혼혈 얘기까지 나왔지? 드물게 당황한 귀능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여기서 펫숍 얘기까지 나오면 제 과거를 떠벌리게 될 것 같아 불안했다. 물론 입을 딱 다물면 되겠지만 그럼 서장님한테 보고가 올라가는 게-

“맞아, 상담실의 내용은 무조건 비밀이라는 거 아시죠?”

“넹? 그런가요?”

“그래서 제가 상담내용은 따로 보고하지 않잖아요. 그건 내담자와의 비밀이니까요. 서장님도 허락하셨고….”

“오- 그래도 중요한 건 슬쩍,”

“안 돼요.”

“에이~ 나이프의 스파이가 있어도요?”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타냐는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 책망하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귀능은 머쓱하게 머리를 만지며 하하 웃어넘겼지만,

“-그래도 상담내용은 비밀이에요. 차라리 상담실 밖에서 다른 증거를 잡겠죠.”

타냐는 단호했다. 귀능은 오히려 조금 언짢아졌다. 보고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다른 사원들한테만 비밀이고 서장님한테는 공개하는 융통성 정도는 있어도 괜찮지 않나? 투덜거리는 말이 절로 나왔지만, 겨우 안으로 삼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탓에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이건 내담자들의 신뢰 문제예요.”

상담내용을 여기저기 다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에게 누가 얘기하고 싶어 하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서장님한테는 보고해도 다들 납득할걸요?”

“귀능 씨도요?”

귀능은 흠칫했다. 괜히 이런 걸로 싸웠다는 내용까지 보고가 올라가면 다나에게 지옥의 꿀밤 한 대는 맞을 것이다.

“거봐요. 싫죠?”

“아니, 전 괜찮-”

“그러니까 다 공평하게 말하지 않는 거예요. 누구에게나 맘 편히 털어놓을 곳은 필요하니까.”

전 취조가 아니라 상담을 하는 거예요, 귀능 씨.

뀽···. 할 말이 궁색해진 귀능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타냐는 그런 귀능을 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저것도 재능이다. 귀능은 짧게 생각했다.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타냐가 작게 웃으며 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보통 하루 일과는 어떤가요?”

“서장님을 따라다니죠. 현장에도 가고~ 타 기관 방문할 때도 가고~ 서류처리도 함께~”

“와, 그럼 엄청 바쁘시겠네요. 그래서 그때그때 출퇴근 시간이 다르다고 하셨구나.”

“아무래도 그렇죠. 급할 땐 서장실 소파에서 잔답니다?”

“그럴 땐 차라리 절 불러주세요. 5분 만에 잠들게 도와드릴 수 있는데.”

그 뒤는 편안한 분위기에서의 잡담이었다. 타냐는 그동안 스푼에 적응하면서 궁금한 것이 많았고, 귀능은 스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타냐가 타고나기를 상대를 배려하는 이야기꾼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귀능은 타냐가 더 이상 캐물을 의도가 없어 보이는 것에 안심했고, 오기 전 각오했던 것과는 다르게 꽤 괜찮은 티타임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영양가 없는 대화만 해도 되나요?”

“영양가가 없나요?”

그래서 그런 질문을 한 것은 당연했다. 이것은 상담 시간이라기엔 편안한 휴식 시간이었다. 만약 모든 스푼 사원들이 상담 시간을 이렇게 이용하고 있다면, 그것에 의미는 있나? 철저히 서장 비서로서의 판단에 따르면, -굳이.

“음, 타냐 양을 계속 고용해야 할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저런, 그러면 안 되는걸요.”

“그렇다면 제가 특이한 경우인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귀능 씨처럼 자신의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많으니까요. 이건 일종의 탐색시간이죠. MBTI 한번 해볼래요?”

타냐의 장난 같은 농담에 귀능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자신감이 보통 있는 게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소심하고 말랑해 보이는 타냐에게서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던 모습이기도 하다. -아, 이럴 때의 타냐는 누구든 무심코 '아, 그렇구나'하고 그를 믿어버리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아, 시간이 다 됐네요. 귀능 씨, 다음에 봐요.”

“저, 또 오는 건가요?”

“네? 당연하죠.”

서장님이 부탁하셨다니까요. 타냐가 해맑게 웃었다.

그 이후에는 타냐에게 끌려가는 일의 연속이었다. 귀능은 밀어내려 했고, 타냐는 그것을 두고만 보고 있는 것처럼 굴어놓고 매일같이 귀능을 당겨왔다. 어쨌든 일주일에 하루, 있을 수밖에 없는 상담 시간은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귀능은 이제 굴복했다. 그 옛날, 가족들과 있었던 일까지 얘기하고는 했던 것이다.

사건은 그 와중에 일어났다.

“오늘은 어떤 업무를 하셨나요?”

“펫숍 신고가 들어와서 서장님은 출동하셨고- 제가 관련 기관에 따로 인계했죠.”

“그랬구나. 사실 저에게도 연락이 들어왔어요. 피해자 정신 건강 관리 쪽으로.”

“뀽, 아무래도 그렇죠.”

펫숍은 트라우마가 장난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귀능은 무의식적으로 목을 긁었다. 아까 그렇게 긁고 붕대를 감아놓은 것으로 모자라 그 부위를 또 날카로운 손톱으로 긁어대는 것이다. 덕분에 그 주변의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귀능 씨,”

“네?”

“손을 잡아도 될까요?”

스푼에서 타냐의 '손을 잡다'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연히 귀능도 알고 있다. 귀능은 잠시 제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멋쩍게 고개를 저었다. 상담사 앞에서 명백한 불안 행동을 보였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멀쩡한 사람으로 보여서 최대한 상담을 빨리 끝내는 게 목적이었는데···.

“아뇨, 괜찮아요.”

“그래요?”

덥석, 타냐는 귀능의 거절을 무시했다. 타냐는 늘 사전 동의를 얻고 나서 접촉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귀능은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따뜻한 기분이 감도는 것과 동시에 심장박동이 느려지고 몸이 이완됐다. 상담실에 있을 때면 언제나처럼 느끼던 바로 그 기분이었다.

언제나 나를 반겨주는 편안한 곳에 있을 때의 기분.

“···이렇게 억지로 특기를 쓰기도 하나요?”

“자해하시는 분 한정으로요.”

손을 땐 타냐는 상큼하게 웃으며 휴지를 뽑아 귀능의 손을 하나하나 닦아주었다.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이 나이 먹고 남이 손을 닦아주는 것을 받고나 있어야 한다니···. 서장님이 보셨다면 십 년 치 놀림감이었겠다. 귀능은 잠시 안도했다.

하지만, 그 손 위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자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타냐 양?!”

“아, 죄송해요. 이러면 안 되는데···.”

“아니, 죄송할 건 아니죠. 그보단 휴지-”

“킁, 괜찮아요. 금방 멎어요.”

결국 한참 동안 천장을 올려다보던 타냐는 살짝 젖은 눈으로 멋쩍게 웃었다. 창피한 모양이었다. 타냐가 운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귀능은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원래 이렇게 반응하는 편인가요?”

“음, 그건 아니고···. 저에게 자해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고, 제 앞에서 자해를 한다는 건 더더욱 속상한 일이라서 그래요.”

“…”

귀능은 그제야 타냐의 특기 발현 계기가 자해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한창 우울증에 시달렸던 고작 고등학생이, 어떤 마음으로 자해를 저질렀을지는 알기 힘든 일이다. 분명 과거를 극복했다고 생각하는 귀능이 아직도 과거의 그림자에 사로잡혀 있는 이유를 알 수 없듯이.

하지만, 그때의 고통만은 어쩐지.

“음, 어쩌면 그 고통을 알기에 더 많은 사람과 공감할 수 있는 법이죠.”

그래서 저는 자해하는 사람을 생각할 때 너무 속상해요. 특히 제 말이 하나도 통하지 않을 때요. 어떤 상처가 그들이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꼭 도와주고 싶은데, 그 사람들이 굳이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저는 무력하니까요.

“분명 자해하는 그 순간에는 자신이 혼자라고 생각할 텐데 말이에요.”

“···”

“하지만요, 전 그 행위 자체를 멈출 수 있는 힘이 분명히 있어요. 적어도 그때의 감정의 격류를 멈춰줄 수 있으니까요.”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그 말은 정확히 귀능을 향하는 말이었다.

귀능의 양해를 구하고 휴지로 코를 닦은 타냐는 다시 말을 이었다.

“상담으로 마음을 털어놓는 것은 바라지 않아요. 다만, 자해를 할 때 한 번이라도 저를 떠올리고 도움을 구했으면 좋겠어요···.”

이걸 멈추고 싶어서 주변에 도움을 구하려고 할 때,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는 건 너무 슬프잖아요. ···그걸 타냐 양이 왜 슬퍼하시는지 저는,

귀능은 드물게 횡설수설하며 타냐의 시선을 슬며시 피했다. 그것에 타냐가 소리 내 웃었다. 그제야 분위기가 가볍게 풀린 것 같아 귀능은 한숨을 쉬었다. 타냐가 자신을 걱정하는 것은 알겠지만, 이건 너무나 부담스럽고 무거운 감정이었다. 이것을 자신이 받아도 될까, 싶을 정도로···.

“그냥 제가 그렇다는 거예요. 귀능 씨,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말아요.”

“울지 않으셨다면 훨씬 덜 부담스러웠을 것 같은데요···.”

“그건 죄송해요. 제 눈물샘은 오늘따라 유난히 말을 듣지 않아서요.”

“눈물이 많으신가 봐요?”

“네, 엄청 많아요.”

이후의 대화는 어색함 없이 매끄럽게 흘러갔다. 귀능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아득해졌다.

그다음 상담도, 그다음의 다음 상담도, 그다음도··· 상담은 이어졌다. 귀능은 자신에게 별 변화가 없고, 의미가 없는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전처럼 그만두자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

무심코 목을 긁으려 할 때면, 타냐가 먼저 생각나게 되었다.

“쯧, 타냐한테 다녀와.”

“넹~”

‘제가 필요할 때마다 부르기 싫다면, 직접 병원에 가서 필요시 약을 처방받는 것이 좋아요. 하지만 약보다 제 특기가 좋다면··· 언제든지 찾아와요.’

이제 타냐는 귀능에게 ‘사원’보다는 ‘선생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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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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