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필링필링

1.5 그는 숨기는 것이 있다

망상요람 by Z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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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타냐 언니!”

여기야 여기!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던 타냐는 엘리베이터 근처에서 혜나와 마주쳤다. 정확히는 랩터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헤나를. 아, 어색한데. 타냐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가갔다. 그래도 혜나가 부르는 것이니, 거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랩터.

나이프의 보스인 백모래가 사랑하는 사람. 애초에 이 사람과의 연애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나이프의 존재 이유이다. 물론 본인은 그것을 격렬히 거부하고 있어 동생인 스텔, 연인인 헤이즈와 함께 팀을 짜고 스푼에 들어왔지만···. 자신이 스푼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출장 간 것으로 타냐는 알고 있다.

그러니까, 몇 번 보지도 못한 아주 어색한 사이라는 소리다.

“혜나야, 안녕. 안녕하세요, 전 타냐예요. 전에 한 번 인사했었죠?”

“아~ 그 상담사 선생님? 나 그때 말 놨었지?”

다행히 랩터가 아는 척을 해주자, 분위기가 유해졌다.

“그런데 여기서 누구 기다리세요?”

“나가 오빠 기다려. 케이크 사러 나갔거든.”

“내가 사는 건데, 타냐도 먹을래? 허락해줄게.”

“진짜요? 그럼 너무 감사하죠.”

“너도 케이크 좋아하는구나?”

“타냐 언니는 티라미수만 먹어!”

“그럼 나가한테 연락해야겠네. 티라미수는 꼭 사 오라고.”

“아니, 꼭 그러지 않아도···!”

랩터는 그 짧은 대화 사이에 타냐가 놀리기 쉬운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린 듯했다. 잘 속아 넘어가고, 콕 찌르기만 해도 크게 반응하는 타냐는 전부터 늘 놀림의 대상이었다. 굳이 찌르지 않아도 조금의 칭찬이면 타냐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 랩터를 옆에서 혜나가 거들었다.

그러다 랩터가 들고 있는 가짜 손가락을 보고 대경실색해서 어디 다쳤느냐고 물어본 것이 하이라이트였다. 랩터와 혜나는 건물이 떠나가라 웃고, 타냐는 부끄러워 죽으려 했다.

“타냐 선배, 안녕하세요.”

“안녕, 하세요, 나가 군···.”

“와아, 케이크!”

“?”

-타냐 선배 괜찮은 거야? 괜찮아, 부끄러워서 저래. ???

타냐는 애써 랩터와 혜나의 웃음기 가득한 얼굴을 모른 체하며 테이블을 정리했다.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이는 케이크 몇 개가 테이블에 놓였다. 딸기 생크림, 초코무스, 베리무스, 크레페, 티라미수··· 얼마나 나오는 거야? 타냐는 조금 당황했다. 인원은 4명인데 열 개쯤은 되어 보이는 케이크가 줄줄이 나오고 있었다.

“우리 막내가 자기 돈 아니라고 아주 신나서 사 왔나 본데?”

“아, 아니에요!”

각자 먹을 케이크를 하나씩 골라잡고 나니 정말로 많이 남았다. 타냐는 그것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나와 귀능이 생각났다. 매번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니까, 잠시 당 보충 겸 쉬어가는 시간을 가져도 좋을 것 같았다. 문제는 이게 타냐가 산 케이크가 아니라는 점이다. 타냐는 조금 눈치를 보다가, 슬쩍 말했다.

“랩터 씨, 혹시 남는 케이크 몇 개는 서장실에 보내는 게 어때요?”

“응? 안 그래도 그러라고 하려고 했어. 스텔이랑 헤이즈도 서장실에 있거든. 네가 갈래? 난 혜나랑 좀 더 붙어있을 거야.”

눈치를 본 것이 무색하게, 랩터는 쿨하게 허락해주며 혜나에 볼에 마구 얼굴을 비볐다. 혜나가 질색하긴 했지만, 언뜻 보기에는 제법 흐뭇한 광경이었다. 타냐는 기뻐하며 랩터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럼 전 서장실로 가볼게요.”

“응, 다음에 또 봐~”

그렇게 타냐가 가볍게 손을 흔들면, 혜나와 랩터가 느긋하게 손을 흔든다. 나가만이 꾸벅거리며 인사할 뿐이다. 안 그래도 되는데 너무 공손하다니까···. 타냐는 그런 생각을 하며 서장실에 도착했다.

“케이크?”

“랩터 씨가 혜나랑 먹으려고 나가 군한테 심부름을 시켰는데, 너무 많이 사 와서요···. 서장님 생각나서 들고 왔어요.”

스텔 군이랑 헤이즈 씨도 있다면서요? 말간 얼굴이 하얗게 웃었다. 타냐는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살짝 긴장한 기색이었다. 서장실에 케이크를 가져다주는 게 목적이었지만, 갑자기 모르는 사람과 말을 트게 생겼으니까 말이다.

랩터 씨와는 인사라도 했었지만, 스텔 군과는 고갯짓으로 까딱거리기만 했고, 헤이즈 씨는 아예 본 적이 없었다. 대체 뭘 하셨길래 그렇게 바빴던 걸까···? 타냐는 다나가 문을 열어주자 테이블로 가 앉았다.

“타냐, 우유 마실래?”

“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타냐는 스텔과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고 아래층에서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테이블을 정리했다. 자리를 닦고, 포크를 내려놓고, 각자 접시를 앞에 두고, 케이크 박스를 고이 접어 예쁘게 정리하고···. 그동안 다나는 컵 두 개를 들고 와 스텔과 타냐 앞에 내려놓았고, 타냐는 그제야 옆에서 바라보던 시선을 마주했다.

헤이즈, 랩터의 연인.

그 외에는 아는 게 없어 설명할 말이 없는데, 아까부터 타냐를 보자마자 뭔가 묻었나 싶을 정도로 보고 있어서 부담스러웠다. 타냐는 먼저 인사를 건네기로 했다.

“저, 안녕하세요? 전 타냐라고 하고요, 스푼의 상담사예요···.”

“안녕하세요. 헤이즈입니다.”

“? 너네 한 번도 안 봤냐?”

“네. 딱히 마주칠 일이 없어서.”

드디어 시선이 떨어졌다. 헤이즈는 곧 쌀로 점을 치는 것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였다. 타냐는 바짝 긴장했던 어깨를 늘어뜨리고 편하게 티라미수를 먹었다. 덤으로 다나가 스텔을 과식시키는 모습도 보았는데, 덕분에 스텔은 먹느라 정신이 없어서 정상적인 대화 상대는 다나 뿐이었다. 아무래도 랩터조 일행과 친해지는 것은 앞으로도 요원한 일 같아서 아쉬웠다.

“타냐 씨. 아까 잡귀가 붙어 있던데 어떤가요? 사례비는 이 정도-”

“네?”

“이 사기꾼이,”

정도가 헤이즈와 한 대화의 전부였으니 말 다했다.

“그런데 이제 곧 내려갈 시간 아닌가?”

“벌써요? 하긴 아까 랩터 씨를 만난 게 5시 좀 넘어서였으니까···.”

“여기 냉장고에 케이크 넣어줘? 이따 다시 찾아가면 되니까.”

“그래도 될까요? 감사합니다!”

타냐는 그제야 시간을 보고 담담하게 놀랐다. 다나가 챙기지 않았더라면 시간 감각을 완전히 잊을 뻔했던 것이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타냐는 허겁지겁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근무 가시는 겁니까?”

하지만 그런 일련의 대화가 말하는 게 뭔지 몰랐기 때문에, 스텔이 의문스럽게 질문했다. 타냐는 잠시 고민했다. 근무는 맞는데, 스텔이 상상하는 것처럼 현장에 나가는 게 아니라 스푼 내에서 악수회를 한다는 걸 어떻게 짧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악수회 하러요,'는 너무 짧고, 설명하자니 제 특기부터 말해야 해서 말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았다.

“오냐. 밑에 로비에서 할 거니까 보고 싶으면 같이 가던지.”

“···?”

“아, 그럴래요? 같이 가요. 서장님은 미리 해드리고 갈게요. 오늘도 침착하게, 아시죠?”

“어.”

“?”

스텔은 그렇게 타냐에게 납치당했다. 스푼의 악수회까지 10분 전이었다.


나이프가 나타났단다.

타냐는 사방에서 들어오는 지원요청에 뛰쳐나가는 히어로들을 하나하나 배웅하며 스텔 역시 보내주었다. 다들 어디선가 인명을 구조하거나, 화재를 수습하거나, 나이프를 붙잡고 있을 것이다. 취약한 신체 능력에, 전투에는 맞지 않는 특기와 신념을 갖고 있는 타냐가 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다들 돌아올 때까지 멍을 때리다가, 무사한 걸 확인하고 나서야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보디가드요?”

그리고 다음 날, 타냐는 아침부터 오수의 전화를 받았다. 꽃집에 경호원을 겸한 알바생을 새로 뽑는다는 말인 것 같은데, 왜 나한테···? 타냐는 반사적으로 입술에 손을 올렸다. 그대로 질문하기엔 너무 무례한 어투가 될 것 같았다.

음···.

“제가 뭘 도와드릴까요?”

[네, 네···. 쌍둥이들이 장 보러 간다고, 저한테 면접을 보라고 했는데 영 자신이 없어서요.]

“아···.”

[11시에 오기로 약속되어 있는데, 괜찮으시면 같이 점심까지 먹고 가시면 어떨까요···!]

그거라면야. 타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 전 상담 타임이 비어있으니 그때쯤 가서 점심까지 먹고 오면 딱 맞겠다!

···그것이 지금 타냐가 꽃집에서 바퀴벌레 혼혈 그레고르를 대면하게 된 이유였다.

“그, 그레고르 씨,···. 어머니가 인간이시군요.”

거대한 바퀴벌레 그 자체를 목격한 오수가 떨어뜨린 컵을 맨손으로 주우려는 대참사를 겨우 막아낸 후, 타냐는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오수와 그레고르를 살폈다. 멀쩡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겁내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는 웬만한 독에는 내성이 있거든요.”

“그러시구나···.”

하지만 타냐도 벌레를 무서워하는 것은 비슷했다.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벌레는 척결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파리채나 진공청소기를 찾고 싶었다. 그나마 오수보다 나은 점은··· 너무 거대해서 벌레보다는 벌레 모양 인형 탈을 쓴 사람 정도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아, 물론 자아를 가진 더듬이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은 소름이 돋았다.

“저, 제가 질문해도 될까요, 오수 씨?”

그것과는 별개로, 더 이상 오수에게 면접을 맡기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로 느껴졌다. 타냐가 말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부여잡는 것이, 취미가 달리기라는 대답에서 바퀴벌레가 빠르게 기어가는 장면을 연상한 것이 분명했다.

“네, 음···. 그레고르 씨, 제가 이어서 하도록 할게요.”

홀리 몰리. 타냐는 제 웃는 얼굴이 제발 어색하지 않기를 바라며, 몇 안 되는 알바 경험을 살려 두어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대화를 나눠보니 저 얼굴과 신체조건(···)을 갖고도 착하고 건실한 성격을 가진 혼혈이었다. 그게 타냐의 죄책감을 가중했다. 이런 사람을 고작 겉모습 때문에 벌벌 떨며 면접을 진행하고 있다니···!

하지만 사이가 심히 멀리 떨어져 있는 두 겹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은 너무 큰 심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다행히, 타냐는 본능과 양심의 끊임없는 줄다리기 중 어느 쪽이 이기기 전에 면접을 끝낼 수 있었다.

“이제 가보셔도 될 것 같아요. 사흘 내로 연락드릴게요.”

“네, 네!”

오수 씨, 배웅해야죠. 타냐가 면접을 진행하는 동안 마음을 가라앉히고 골똘히 앉아 생각을 거듭하고 있던 오수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타냐 역시 비슷하게 얼굴이 창백해져 있는 것에, 죄책감이 느껴졌는지 연신 죄송하다며 속삭였다.

그 사이에 그레고르는 어째선지 문가를 서성이며 뭔가를 망설이고 있었다.

“그럼, 안녕히···”

“저, 감사합니다.”

“? 저요?”

“네. 제가 겉모습이 이래서···. 제대로 눈을 마주치면서 면접을 해주시는 분이 없었거든요.”

-붙지 않아도, 좋은 기억이 될 것 같아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그레고르는 꾸벅이며 멀어져갔다. 무사히 일이 끝났다는 쾌감과 죄책감에 얼이 빠져 있던 오수와 타냐는 너나 할 것 없이 소파에 늘어졌다. ···혼이 빠져나가 널브러져 있던 둘이 일어난 것은 일호와 이호가 장을 보고 온 후였다.

“일호 씨···. 면접자가 바퀴벌레 혼혈인 거 혹시 모르셨나요···?”

“네?!”

-그 뒤로, 나름의 보답이었던 밥을 잘 얻어먹은 타냐는 식후 커피를 쪽쪽 빨며 스푼으로 복귀했다. 다른 한쪽 손에는 커피 두 잔이 꽂힌 캐리어가 있었다. 단골 카페에서 사 온 아메리카노였다.

가짜 나이프와 스푼 건은 제법 가깝고, 큰길만 한번 잘 건너면 그리 사람이 많지 않은 골목이 있어 타냐가 마음을 놓고 돌아다닐 수 있는 몇 없는 길 중 하나였다. 그 한 가운데에 단골 카페가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오늘, 타냐는 쿠폰을 다 채우기까지 남은 스탬프가 겨우 3개가 남은 것을 보고 귀능과 다나 몫의 커피까지 사 오는 참이었다. 스탬프가 끝까지 찍힌 쿠폰에 흐뭇한 웃음이 나왔다. 이걸로 다음엔 공짜 커피다!

어차피 가짜 나이프에서 있었던 일도 보고해야 하고, 가는 김에 가져다드리면 되겠지?

몇십 분 전, 오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레고르에게 채용 연락을 했다. 당장 다음 날부터 출근이었다. 이것도 나름 가짜 나이프의 동향이고 소식이기 때문에, 타냐가 오수 대신 해당 사항을 전하겠다고 자원한 것이다.

보고와는 별개로, 타냐는 앞으로 가짜 나이프 아지트에 갈 때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가기로 다짐했다. 혹시나 보자마자 면전에서 깜짝 놀라는 무례를 저지르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솔직히 그 얼굴만 생각하면 앞으로 웬만한 다른 벌레 혼혈들은 전혀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공포랄까.

“타냐.”

“···?”

그때, 뒤에서 타냐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오랜만에 듣는 것이긴 했지만,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뭐, 스푼? 거기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렇게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는데?’

아. 맞다. 1년하고도 반 만이었다. 이렇게 말해 놓고 보니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그사이에 많은 일이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생각보다 그가 타냐에게 큰 지분을 차지하지 않아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타냐는 그를 본 마지막 날 이후로 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손에 꼽았다.

“우디, 맞죠? 인상이 많이 달라졌네요.”

그야 타냐는 스푼에서 아주 만족스럽게 일하고 있고, 여러 갱생 프로그램에도 나오며 이름을 알리고 있는 나름 유망한 히어로였다. 잘은 모르지만, 암암리에 팬들도 있다고 하고···. 어쨌든 타냐에게 전 남자친구인 우디는 이제는 완벽하게 잊힌, 딱 그 정도의 위치였다. 타냐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 사이에 무슨 존댓말이야. 편하게 말해, 응?”

‘야, 네가 지금 그럴 자격이 있냐?’

“···우리 그럴 사이 아니잖아요.”

타냐는 어색하게 웃었다. 우디는 그에 희망을 느낀 모양이지만, 타냐의 머리는 이 상황을 벗어날 생각으로 가득했다. 곤란한 상황일 때 누르라고 준 벨이 있긴 하지만, 이건 타냐의 사건 체질로 인한 사고가 있을 때 누르라고 준 건데. 이런 개인적인 일로 눌러도 되는 걸까?

결국 이 상황은 본인이 알아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자, 타냐는 최대한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타냐, 왜 연락 안 받았어?”

‘구질구질하게 연락하기만 해봐.’

“차단했으니까요. 전 이제 갈게요.”

“한 번만, 한 번만 나랑 얘기해주라 응? 나 진짜 한참 동안 너만 찾아다녔단 말이야.”

“이거 좀 놓고 얘기해요.”

전 남친, 전 남친 하며 악명이 높은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꽉 잡힌 손목을 노려본 타냐는 포기하고 힘을 풀었다. 처음부터 도망을 쳤어야 했다. 그래도 잡혔겠지만···. 이렇게 제 신체 능력이 저주스럽게 느껴진 것은 오랜만이었다. 나름 운동은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생명 연장 수준이었나 보다.

“이러지 않으면 안 들어줄 거잖아. 그럼 차단이라도 풀어줘.”

“···차단 풀면 놓는다고 약속해요.”

“그래. 손 불편하지? 내가 이건 들어줄게.”

‘우디’라고 저장해놨네. 욕이라도 적어놨을 줄 알았는데. 하긴, 넌 누굴 미워하는 성격이 아니니까. 이제 연락받아줄 거지?

말, 말, 말! 타냐는 할 수 있다면 전 남친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애초에 타냐는 저장명을 별명으로 하는 사람도, 욕으로 해놓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걸 가지고 무슨 희망을 느꼈는지, 더욱 달라붙는 것에 생리적인 거부감이 올라왔다.

침착하자, 이 인간은 모르는 사람이다. 서로에게 나쁜 기억을 공유한 사람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 더 기분 나빠할 것도 없이, 잘 빠져나오기만 하면 된다···.

“됐죠? 이제 놔줘요.”

“응? 손목은 놔줬잖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슬금슬금 들어온 팔이 허리를 감싸는 것에, 타냐의 눈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떨어져요. 싫은데? 의 반복. 타냐는 계속 스푼으로 가고자 했지만 우디는 안 그런 척 끝까지 방해했다. 한참을 그렇게 실랑이를 하다가, 우디가 곧 질렸는지 타냐를 놓아주었다. 커피 캐리어도 다시 돌려받을 수 있었다.

전에도 변덕이 심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훨씬 더 심해서 종잡을 수가 없다. 타냐는 돌아가자마자 다시 차단할 생각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오늘 연락할 거야. 기다려야 해?”

···멀리서 들려오는 불안한 말을 애써 무시하며.


“아지트에 강도가요? 그레고르 씨는 괜찮대요?”

[네, 그런데 집이 엉망이 되어서요, 일호가 벽지를 새로 바른다고-]

타냐는 어수선한 기분으로 업무를 계속했다. 그동안 상담 일정이 없다고 좋아라 나돌아다닌 게 슬슬 양심에 찔리기 시작했다. 뭐라도 하고 싶었다. 이대로는 월급 먹는 루팡이 되어버릴 거야···! 일주일에 24타임 있는 상담 시간 중 차 있는 시간은 17타임 정도. 나머지 사원들은 상담을 졸업하고 출퇴근 시간에 케어만 받고 있거나, 출장으로 잠시 쉬고 있었다.

그래서 타냐는 쉬는 시간에 새로운 내담자를 구해보기로 했다!

스푼의 전 직원을 케어한다고 해도, 빈 구멍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출장을 가서 얼굴을 볼 수 없었던 랩터네 조와 새로 들어와 적응하기 바빴던 나가 같은 경우.

정기적인 상담 일정을 잡진 않아도, 학기 초 담임과 함께 하는 상담처럼 한 번은 얘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랩터와 헤이즈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가 군이나 스텔 군은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나이 먹은 어른일수록 마음의 벽이 단단한 편이고, 강제가 아니라 권유인 만큼 쉽게 시간을 내 줄 것 같지 않았다. 헤이즈 씨는 더더욱···. 그 시간에 돈을 벌러 가야 한다고 하지 않을까? 타냐는 정답에 가까운 생각을 하며 나가를 찾아갔다.

그렇게 타냐가 나가를 찾는 한편,

“오빠 왜 그래? 어제부터 좀 이상하다.”

“혜나야···.”

“무슨 일 있으면 좀 말해~”

나가는 전날 불로불사 일족인 일호의 머리가 떨어졌다가 다시 붙는 광경을 목격하는 바람에 그 광경을 머릿속에서 무한 재생 중이었다. 그 단면이 계속 생각나서 회식 때에는 고기도 못 먹었다. 게다가 비밀이기까지 해서 아무에게나 말도 못 한다. 나가는 으아악, 소리를 내며 다시 머리를 헤집었다.

“무슨 고민 있나요?”

“타냐 언니! 마침 잘 왔다, 나가 오빠가 이상해~”

“으엉?”

“마침 차라도 마시러 올 생각 없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갈래요?”

“엥?”

어, 어?

···그렇게 상담실로 오게 되었다. 오빠 이따 봐~ 해맑게 손을 흔드는 혜나의 모습에서 데자뷔가 느껴졌다. 아니 이 상황 자체에 데자뷔가 드는 건가? 지난번 듄의 비밀 때문에 찝찝해하던 일 후로 처음 찾는 상담실은 그때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타냐의 옷 정도? 그마저도 비슷한 스타일이라서 뭐가 바뀌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탁, 따뜻한 차가 나가의 앞에 놓였다. 흔히 볼 수 있는 녹차 티백의 상표가 달려 있었다.

“출근한 지 몇 시간 안 됐죠? 오늘은 뭘 하셨나요?”

“어, 듄 쌤과 훈련을 좀···.”

“정말요? 듄 씨는 가르치는 걸 정말 잘하시죠. 오늘은 어떤 걸 하셨는데요?”

“···”

“그 인형이랑 관련이 있나요?”

나가는 제 품에 안겨 있는 인형을 다시 보았다. 인체의 강도와 비슷하게 만들어졌다는 인형. 손쉽게 북, 찢어지던 인형의 잔상이 눈앞에 스쳐 갔다. 나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가, 어물어물 말했다.

“어, 사람이랑 같은 강도로 만들어진 인형이라서. 이걸로 힘 조절을 연습한다고···.”

“저도 비슷한 걸 했는데. 나가 군도 했나 보네요.”

“타냐 선배도요?”

“당연하죠.”

타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가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듄에게 대강 얘기를 듣긴 했지만, 타냐는 능력을 파악하자마자 완벽하게 조절했을 것만 같은 인상이 있었다.

무엇보다, 인간에게 전혀 위협적이지도 않고···. 감정을 조절하는 게 뭐 대수겠는가. 어쨌든 나가에게 중요한 건 자신의 특기로 아주 간단하게 사람을 죽여버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제가 실수로 능력을 썼을 때, 최대 지속시간이 얼마나 될 것 같아요?”

“음··· 24시간?”

“1년. 제가 능력을 써도 개인의 노력이나 상황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가 있을 수 있는데, 그걸 감안해서 1년이에요.”

-심지어 진심으로 했을 때 최대가 얼마인지는 아예 몰라요. 그래서 힘 조절이 아주 힘들었죠. 실습을 아주 많이 했어요.

나가는 짧게 감탄했다. 최대가 얼마인지 모른다면, 어쩌면 평생의 감정을 쥐고 흔들 수 있다는 뜻 아닌가? 그런데 몇 시간씩 쪼개서 쓰고 있으니, 힘 조절이 힘들 법도 했다. 대체 능력의 몇 할을 쓰는 걸까? 5%? 그런 쓸데없는 계산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크게 위험한 능력은 아니니까 괜찮지 않나요?”

타냐는 아주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할 말은 많지만 나가 군, 듄 씨 사건 때 기억 안 나나요? 아···.

“하지만 기분이 나쁘고 마는 정도라면···.”

“-나가 군, 혹시 힘 조절을 못 해서 사람을 해칠까 봐 겁이 나요?”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나가는 흠칫, 몸을 떨었다. 다시 백모래가 일호의 목과 팔을 댕강 날려버리던 장면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것은 생각보다 끔찍한 일이었다. 차라리 그냥 보는 데서 끝났다면 며칠 고기 못 먹는 거로 끝났을 수도 있는데, 자신이 그럴 수 있다고 상상하자···.

“그 인형을 터뜨리는 게 굉장히 쉬웠나요?”

“···네.”

“사람을 죽이는 게 생각보다 쉽다는 건 무서운 일이죠. 그렇죠?”

사람이 아주 말랑말랑해 보이거든요. 나가는 타냐가 이해한다는 듯이 말해오는 것에서 괴리감을 느꼈다. 벌레 하나 해치지 못할 것처럼 생긴 사람이 지금 사람을 죽이는 것을 입에 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가의 입장을 정확히 대변하는 말이기 때문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 자꾸 제 손짓 하나에 사람이 잘리거나 터져나가는 게, 그 단면이 막 상상돼서···.”

“흠, 일단 제가 손을 잡아도 될까요? 좀 덜 불안하게 해드릴게요.”

나가는 순순히 손을 건네주었다. 손이 닿자마자 불안하게 뛰던 심장 박동이 정상으로 돌아가고, 정신이 평온하게 바뀌었다. 도리어 졸리기까지 했다. 이건··· 식곤증?

“조금 졸리죠? 학생이라면 제일 익숙한 기분일 것 같아서요. 큰 자극이 없다면 30분 정도 지속될 거예요.”

“확실히 그러네요.”

굿 초이스. 나가는 엄지를 들었다.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머리에서 싹 사라진 건 아니지만, 자신이 그럴 수 있다는 불안감은 어느 정도 가신 상태였다. 진작에 올 걸 그랬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나가 군, 최근에 누군가 다치는 걸 자세히 본 적이 있나요?”

“네, 그, 일호 형이 다친 걸 좀···.”

“아아, 어쩐지 지나치게 디테일하게 불안해하는 것 같았는데. 실제 상처를 봐서 더 구체적으로 상상이 됐나 봐요.”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는 말에, 나가는 잠시 타냐가 독심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했다. 하지만 진짜 할 수 있었다면 지금 당장 나가가 쌉 생각을 하고 있는 것조차 읽고 있을 테니 그건 아닌가 보다. 다행이었다. 일호가 불로불사의 일족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도 절대 알려서는 안 되는 비밀이니까. 애초에 그게 비밀이라서 이렇게 고민을 돌려 돌려 말하고 있지 않은가.

“제 얘기를 좀 해주자면, 전 실제 사람을 대상으로 연습했어요.”

“아, 확실히··· 그래야 했겠네요.”

“네, 동물과는 또 다르게 적용이 되더라구요. 그래서 사람에게 직접 알아볼 수밖에 없었죠. 게다가 사람에게 쓸 수 있는 능력의 상한선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구요. 그럼 자칫 대강 했다간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 수도 있잖아요? 제 능력도, 생각보단 위험하답니다.”

어, 동물까지 가능한 거였어···? -그보다 폐인?

나가는 이빨을 드러내던 맹견이 타냐의 쓰다듬 한 번에 발라당 눕는 것을 상상했다. 물론 다나는 눈빛만으로 가능한 일이었지만, 뭔가, 뭔가 결이 많이 달랐다.

타냐는 나가가 이상한 상상을 하는 줄도 모르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정말 미미한 최소한의 능력을 쓰다가, 점점 늘려가는 형식으로 지속 시간을 가늠했어요. 하지만 나가 군, 나가 군은 그 인형이 망가지는 데에 들어가는 힘을 알죠?”

-그러니까 그걸 마지노선으로 두고, 그 이하의 힘만 들인다고 생각해요. 애초에 지금 나가 군이 초능력을 활용하는 방법은 주로 압박하는 힘이니 살이 베일 일은 없겠죠. 인형을 떨어뜨리는 걸로 연습을 해도 좋지 않을까요? 떨어지는 인형을 어떤 세기로 잡아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터질 일이 없을지···.

“나가 군은 사람이 다치지 않게 상대할 때 써야 할 힘의 최대 용량을 알게 된 거예요. 저보단 훨씬 명확하죠. 그러니까 연습하면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나가는 모두 타냐의 말대로 이루어질 것 같아 잠시 자신이 세뇌를 당하지는 않았는지 의심했다. 하지만 타냐는 정말로 굳게 믿고 있다는 듯이 자애롭게 웃고 있었고, 불안감에 날뛰던 마음은 평온해진 지(일호의 비밀에 대한 고민은 여전하지만) 오래였다. 자신의 능력으로 사람이 터져나가는 고어한 상상을 하던 30분 전과는 180도 달라진 변화였다. 이 변화를 반가이 받아들이며, 나가는 그제야 맘 편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자, 아직 시간이 20분 정도 남았는데. 더 얘기하고 싶은 거 없나요?”

남은 20분은 그전의 30분보다 더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이어졌다. ···나가는 타냐가 역시 천사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혜나? 안녕.”

“아, 타냐 언니!”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나가 군?”

나가는 스푼의 예언자, 아모르를 방문하기 위한 매뉴얼을 찾아들고 자료실을 나오려던 참이었다. 선물로 생물을 가져갈 것. 산의 꽃을 함부로 꺾지도, 작은 벌레를 죽이지도 않을 것. 가죽이나 비단옷을 입지 않을 것···. 참 많기도 많다. 그것을 혜나와 읽고 있던 나가가 마침 복도 코너에서 피곤한 눈을 비비며 걸어 나오는 타냐를 마주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무슨 책이야?”

“아모르를 찾아갈 때의 매뉴얼!”

“아모르? 아···.”

타냐는 아모르를 잘 모르는 듯, 한참이나 머리를 굴리다가 '아!'라는 소리를 냈다. 나가는 타냐도 잘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에 놀라 반사적으로 물어보았다.

“타냐 선배도 잘 모르세요?”

“아, 네. 사원들에게 별로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럼 언니도 같이 보고 찾아가 볼래?”

“음··· 미안. 다음에 일정이 있어서 안 될 것 같아. 원하는 대답을 들었으면 좋겠다.”

“힝, 아쉽다.”

그와 별개로 타냐와의 동행은 실패했지만. 나가는 아쉬워하는 혜나를 달래며 병아리를 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냐는 어색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배웅했다.

나가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하···.”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

타냐는 매뉴얼대로 화분을 사 들고, 풀 한 포기라도 밟지 않게 조심하며 산을 올랐다. 혼자 인적 드문 곳만 골라서 다니기엔 야심한 시각이었지만, 아무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은 질문이 있었다. 그래서 타냐는 안 그래도 빈약한 체력으로 헉헉대며 산을 오르고 있는 것이다.

아모르.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

물만 마셔도 살 수 있으며, 모든 생물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그들의 사랑을 받는다. 제일 중요한 점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타냐는 과거, 라는 지점에서 멈칫했다. 만나기가, 조금 껄끄러워져서.

사람은 살면서 수많은 죄를 짓는다. 살인이 죄라 할 수 있다면, 타냐는 한 끼 밥상에서도 얼마나 많은 살해를 저지르게 되는가? 살기 위한 살인은 인도적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럼 그동안 ‘보기에 아름답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밟고 올라와 있는가? 편하게 살겠다는 욕심으로 얼마나 많은 공해를 끼쳐왔는가? 그를 묵인하고 받아들이는 자신은 얼마나 무력한 죄인인가.

그것만 있다면 더 말하지 않겠다. 자신은 특기로 죄를 저지르기까지 했다. 사실 나이프를 보고 죄인이랄 게 아니다. 나 자신 자체가 용서 못 할 죄인이었으니까. 이것을 아모르는 틀림없이 알고 있겠지.

···그래도 속죄하려고 열심히 노력해왔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타냐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무엇보다, 지금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체력이 한계를 보이고 있는 걸.

“안녕하세요?”

“아, 아모르 씨···!”

그렇게 타냐가 지쳐 쓰러지기 직전이 될 때쯔음, 마침 나타난 아모르가 천사처럼 보였다. 타냐는 거의 눈물이 나올 지경이 되어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모르는 좀 더 일찍 올 걸 그랬다며 미안해했다. 듣던 대로, 아니 읽은 대로 온화하고 상냥했다.

“아니에요, 여기 화분···. 전 다육 식물이 좋더라구요.”

“맞아요, 통통하고 귀엽죠? 생명력도 강하고!”

“네. 그래서 다육이만 키우다 보면 다른 식물은 겁이 나서 못 키우겠어요. 죽일까 봐.”

“알아요.”

흠칫, 타냐는 잠시 눈치를 살폈다. 아모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하지만 타냐는 알 수 있었다. 아모르가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다는 것을.

“괜찮아요.”

“네?”

“타냐 씨는 무척 ‘윤리적’인 편이잖아요. 그래서 죄책감도 많이 느끼는 거 아는데, 전 괜찮으니까 굳이 신경 쓰지 마세요.”

-산다는 건 다른 생물의 희생을 발판 삼는다는 거니까요. 타냐 씨 정도면 아주 정이 많은 편이죠.

타냐는 잠시, 생각을 멈췄다. 아모르가 대체 어떤 존재이길래 신을 대변하듯이 타냐에게 면죄부를 선사하는지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것만으로도 구원받은 기분이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이게 바로 아모르의 마력인 걸까. 절로 눈가가 뜨거워지는 기분에, 타냐는 입을 앙다물었다.

“자, 그럼···. 어떤 일로 온 건지 들어볼까요?”

입이 말랐다. 산을 오르느라 헉헉대서가 아니라, 긴장으로 인한 입 마름이었다. ···타냐는 사실, 미워할 이유를 찾기 위해 아모르를 찾아왔다. 타냐도 이게 미련한 짓거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보다 정신적으로 편안한 길은 없을 것 같았다.

“오래 고민해온 문제가 있어요.”

게다가 이 방법은 결국, 답을 남에게 떠넘기는 짓이나 다름없다. 타냐는 이마저 죄책감을 느꼈지만, 비록 충동적일지라도 이미 선택한 것. 이젠 되돌릴 순 없다. 그리고 아모르에 대해 알려진 바로는, 그는 이런 자신의 행동조차 예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에 답하여 이리 나타난 것은, 그에 대답할 의사가 있다는 소리라고 봐도 될 것이다.

“모두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기준으로 도덕적인 판단을 해본 것이 너무나도 오래전이라, 미워하는 게 정말 힘들거든요. 좀, 모두를 장발장처럼 보는 경향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게 -10이라면··· 전 -3도 가지 않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타냐는 눈물이 주륵, 흘러내리는 것을 결국 막을 수 없었다. 그조차 심란했다. 눈물은 단 한 번도 타냐의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담담하고 싶을 때, 화내고 싶을 때, 굳세어 보이고 싶을 때···. 그 모든 때에 타냐는 제 의도와 상관없이 여린 사람이 되어버리고야 말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모르에게 자신이 여리고 가여워 보인다면, 아무래도 좋을지도.

“그런데 미워서, 미워해야 해서, 미워하면 그게 또 죄책감이 들고 말아서. 하지만 그럴 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어서요. 이대로는 제가 더욱 답답해져서 스스로가 싫어질 뿐이라···.”

그래, 타냐는 결국 나이프를 죽여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든 그 핑계를 찾고 싶어서요. 혹시, 나이프가··· 저를 죽이는 미래가 있나요?”

“흠···.”

아모르의 대답에 따라 자신의 마음가짐이 달라질 것이다. 타냐는 손을 꽉 쥐었다. 빈약한 힘으로는 피도 나지 않았다.

타냐는 나이프를 한 생명이 아니라, ‘그럴만한’ 서사가 있는 안타까운 어떤 생명이 아니라, 그저 죽여야만 하는 범죄자로 보고 싶었다. 하지만 자꾸 과거 내담자였던 다른 이들과, 혹은 자신마저 크게 다를 것 없다고 생각돼서···. ‘그럴 수 있다’는 애매한 마음으로는, 사고를 회피하려는 마음가짐으로는 각오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직접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면 다르지 않을까?

“···”

“네.”

아모르의 짧은 긍정에, 타냐는 파아아- 하는 한숨을 겨우 뱉어낼 수 있었다. 그래, 이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미래에 자신을 죽일 사람들이라면 정당방위로 제압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은가? 미움과 공포, 혹은 처치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해도 전혀 찔릴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이런 신체 능력으로는 도움도 되지 않지만 원칙을 깨서라도, 직접 총을 들어서라도 그들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감사합니다, 아모르 씨.”

아모르는 그런 타냐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빙그레 웃고 있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는지도 모른다.

“타냐 씨.”

“네?”

“요즘의 골칫덩이 말이에요.”

이렇게 폭탄을 떨궜으니 말이다.

흠칫, 타냐의 떨리는 눈동자를 아모르가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연히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거기에 고민거리를 더욱 안겨주는 부모님까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저 무시하고 있던 문제였다. 아마 아모르라면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는 사람이니까.

“스푼에 말하면 2주···. 아니 늦어도 1주. 그 정도면 끝나요.”

“!”

“그럼 잘 가요.”

그날의 밤 산책은 그렇게 끝났다.


“저, 스토커가 생겼어요.”

“타냐 언니한테? 또?!”

“또?!”

나가는 익숙하다는 듯이 짜증을 내는 혜나와 사사를 보며 낯섦을 감추지 못했다. 스토커가 어디 흔한 일인가? 그런데 저렇게 짜증을 낼 정도라면 꽤 자주 일어나는 일인 듯싶었다. 나가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요지경이 신기하기만 했다.

“타냐 선배한테 스토커가 자주 생기나 봐요?”

“아마 이게 다섯븐재.”

“?!”

“처음엔 카페에서 한 번 본 알바생. 다음엔 자취방 이웃 주민. 그래서 사원 숙소로 들어오니까 한 번 고백했다 차인 의뢰자. 또 다음에는 듄에게 교정을 받으러 방문했던 불량 학생. ···어휴.”

혜나는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전적을 말해주었다. 나가는 기함했다. 스푼에 들어오고 나서만 이만큼이면, 대체 평생 어떤 삶을 살아온 거예요?

“지방에서 여중 여고, 여기 와서도 여대 나왔대.”

“아.”

“그대도 딥차카는 다라믄 잇섯대찌···.”

“나이 먹으면서 다들 관뒀지만요.”

타냐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제 전적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나가는 그런 타냐의 등을 토닥이며 그럴 수 있다 위로했다.

“근데 이번엔 어떤 사람이야?”

“으응, 전 남자친구···.”

“입사하 때 헤어지지 아낫서?”

“네. 근데 갑자기 일주일 전쯤에 찾아와서 연락하기 시작했어요.”

“뭐?! 어쩐지 요즘 들어 언니 밖에 나갈 생각을 안 하더라!”

“왜 애기 아냇서.”

“으, 전 남친이라니···.”

사사는 한숨을 쉬었고, 혜나는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나가는 인터넷에서나 보면 전 남친 밈을 생각하며 반쯤은 멍을 때리고 있었다. 자니? 같은 연락을 하는 건가. 애초에 나가는 타냐에게 전 남자친구라는 존재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타냐는 누굴 찰 성격이 아니고(드물게 정확한 추측이었다), 어느 누가 감히 타냐 같은 사람을 차겠는가. 다시 말해 타냐는 차지도 차이지도 않을 사람이었다.

“잡아다 경찰서에 넣으면 되는 거야?”

“아뇨. 사실 이번엔 그럴 수가 없어서 이렇게 말하게 된 거예요.”

“마니 심가캐?”

“아버지가, 전 남자친구를 많이 좋아하셔서. 아마···. 경찰서에서 벌금 내고 나와봤자 부모님 핑계로 또 보자고 할 거라”

네 사람은 어이를 잃었고,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연락을 무시하면···. 아버지가 다시 한번 좀 만나보라고 잔소리를,”

“무서워!!”

“게다가 절 기다리다가 연락한 것 외에는 또 딱히 위해를 끼친 적이 없어서, 차라리 아버지를 설득해 주셨으면 합니다···.”

“혹시 생각해두신 방법이라도 있을까요···?”

나가의 질문에 타냐는 우물쭈물 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으로 사사를 가리켰다.

“더 나은 상대가 있다고 말하면 될 것 같아서 생각해봤어요.”

“?”

“아버지가 사사 씨 동생인 사라 씨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그럼 사사 씨도 좋아할 것 같아서···.”

애인인 척 사진 몇 번만 찍어주셨으면 합니다. 나?!

사사 선배 동생분이 연예인이었어요? 나가는 처음 알게 된 사실에 신기해하며 짝짝 박수를 쳤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았다. 중요한 일은 사사에게 맡기고 옆에서 대충 사진만 찍을 생각이 만만이었다.

“아, 그리고 가능하다면 전 남자친구의 의도도 알면 좋을 것 같아요.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은데 증거가 없거든요. 오늘 만나러 갈 건데 몰래 따라와 주실 수 있을까요?”

아, 날로 먹기 실패. 나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네 사람은 간단히 계획을 세우고, 나가기 전까지 먼저 타냐의 부모님께 보낼 사진을 찍기로 했다.

“나! 나! 내가 찍을래!”

“그런데 무슨 사진을 찍어야 하죠?”

“사실 저도 그건 잘···.”

하지만 하필 사진에 찍혀야 할 두 사람이 굉장히 부끄럼을 타는 성격이었다. 사실 타냐는 평소에도 모두에게 다정하니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웃기만 해도 잘 찍힐 테지만, 사사가 문제였다. 나가는 아직도 그때가 생각난다. 되도 않는 아재 개그를 쳤다가, 사사가 특유의 음침한 표정으로 썩소를 지었던 것을···. 사사는 그 정도로 얼굴 근육이 경직되어 있었다.

어쨌든 혜나는 타냐에게 제일 익숙한 공간인 상담실에서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찍었다. 사사는 누가 봐도 붉어진 어색한 얼굴로 입꼬리를 떨고 있었지만, 사진에는 옆모습만 담기니 오케이였다. 오히려 수줍어 보이니 나름 더 좋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가는 그 결과물을 가만히 보며 생각했다.

“···애인이라기엔 너무 평소의 타냐 선배 같지 않나?”

“헉, 그러네!”

좀 더 연출이 필요해! 여기더 더?! 나가 오빠! 라져.

나가는 혜나의 지시에 따라 당장 초콜릿을 몇 개 사 왔다. 2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런 나가를 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직감한 사사의 얼굴이 더 이상 달아오르지 못할 정도로 붉어졌다. 타냐도 먹여주기는 조금 허들이 높아서일까, 드물게 곤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자! 서로 먹여주기!”

“이런 건 어디서 배워온 거야 혜나야···.”

“드라마!”

하지만 혜나는 멈추지 않았다···.

“···후”

혜나도 역시 서장님의 동생이라니까.

그런 폭풍 같은 시간을 넘기고, 타냐는 외출을 준비했다. 1시간 안에 대화를 끝내고 돌아오려면 마음의 준비가 많이 필요했다. 전화를 먼저 끊지도, 대화하던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지도 못하는 타냐로서는 너무 난이도가 높은 미션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전 남자친구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더 심한 말도 하고 나올 각오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스푼의 건물을 나오자마자, 혜나로부터 문자가 날아왔다.

[녹음파일]

[언니, 그냥 오래 볼 필요 없이 뻥 차고 나와도 되겠는데?]

“?”

잠시 디용, 하고 멈춰있던 타냐는 그래도 끝을 보긴 해야겠다며, 좀 더 부탁한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나를 기다리면서 무슨 말이라도 했나? 나중에 사진을 보낼 때 들어봐야겠다.

타냐는 마음을 더 단단히 먹고 저 멀리 보이는 전 남자친구가 가까워질수록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이, 가까워질수록 싸해지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타냐! 너무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들어가서 얘기하자.”

“아뇨, 여기서 얘기해요.”

“아직도 화났어? 그때 바람핀 건 잘못했다고 했잖아. 다시 안 그런다니까?”

“안 믿어요. 아니, 그런다고 해도 너랑은 다시 안 만나.”

찬바람이 쌩하니 불었다. 나가는 처음 보는 타냐의 모습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안경 쓴 미인이 까칠하기까지 한 모습을 보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 나가의 정신을 불러온 것은 혜나의 야무진 손바닥이었다. 오빠, 정신 차려! 그래, 세 사람은 대화를 듣고 증거를 잡기 위해 잠복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가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대화 내용에 집중했다. 당연히 녹음 중이었다.

“하, 이제야 말 놓기로 한 거야?”

“이제 안 볼 사이니까.”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너희 부모님이랑 우리 부모님이랑 그렇게 친한 사인데?”

아, 부모님끼리 친한 사이. 그거 애매하지. 나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네 부모님과 부모님끼리 친해서 덩달아 친해진 사하라나 오터 같은 경우엔 애초에 남자고, 그럴 생각도 없지만 타냐의 경우에는 사귀었다가 헤어지기까지 했다. 그것도 상대의 바람기 때문에, 아니 그냥 상대가 나쁜 놈 아닌가? 왜 타냐 선배가 불편해해야 하는 거지? 점점 속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나개 퍼그네···.”

“쉿, 좀만 더 참아. 지금 분위기 진지하잖아.”

그 와중에 좁은 골목에 숨어 있던 사사는 날개의 고통을 토로했다. 혜나같은 작은 아이나 나가처럼 마른 학생은 괜찮은 정도였지만, 사사는 날개가 눌려야만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폭이었던 것이다. 나가는 잠시 애도를 표했다. 그사이에 대화는 점점 과열되고 있었다. 타냐는 숫제 울고 있을 정도로.

“왜 그렇게 까다롭게 굴어? 너 이런 애 아니잖아.”

“네가 나한테 빨대 꽂으려는 게 빤히 보이니까 그래!”

“뭐? 누가 그래?”

“대학을 자퇴했으면 알아서 할 일을 찾던가. 이렇게 찾아와서 돈을 뜯어 가려고 하면 당연히 그렇게 보이지!”

“뭐? 야, 그건 다 사정이 있어서···.”

“몰라, 무능력한 인간!”

“···와, 타냐 선배가 저렇게 심한 말을 하는 거 처음 봤어.”

“저게 심한 말이야? 난 답답해 죽겠는데.”

“타냐 기주네서능 충부니 디만 마리지···.”

혜나는 타냐가 눈물을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답답하다고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사사는 아직도 날개가 신경 쓰이는지 조금씩 꾸물거리고 있었고, 나가는 아침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었다. 본능적으로 팝콘이 먹고 싶었다. 와, 돈도 뜯으려 했다니. 대체 어디까지 받아주려는 거였을까, 타냐 선배는.

“너 나한테 이래도 되겠어? 네가 한 짓을 당장···”

“그러던가! 어차피 아무도 안 믿어, 사회에서 도태된 한심한 백수의 말 같은 거!”

“이게···!”

그때, 억센 손이 위로 올라갔다. 타냐는 당차게 말해놓고 스스로 후환이 두려웠는지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어, 저거 위험하지 않나? 텔레포트를 하려던 나가는 뒤에서 박차고 나가는 사사를 보며 다시 손을 거두었다.

“넌 뭐야?”

“···”

“하, 얘 애인이라도 되냐? 얘가 얼마나 음침한 애인지 알기는···”

“···”

“하, 냐고···.”

젠장! 타냐의 뺨을 후려치려던 전 남자친구는 사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에 지레 겁을 먹고 튀어 나갔다. 전형적인 강약약강이네···. 나가는 사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제법 무서워 보이는 편이라는 것을 새삼 기억해냈다. 충격적으로 짧은 혀 길이 때문에 그 이미지가 날아가 버려서 아예 잊고 있었다.

타냐는 사사에게 고맙다며 꾸벅꾸벅거렸다. 나가는 녹음을 멈춘 휴대폰을 도로 집어넣고 골목에서 빠져나갔다. 하지만 혜나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혜나야? 나가는 뒤를 돌아 가만히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혜나의 등에 손을 올렸다.

“오빠, 이 정도면 완벽해 보이지 않아?”

“응?”

그리고 혜나가 보여준 핸드폰 화면에는 타냐의 뺨을 치려던 전 남자친구의 모습과 타냐의 겁먹은 얼굴, 그리고 그 손을 잡아챈 사사의 얼굴이 정확히 나와 있었다.

“오.”

이 정도면 확실히 해결될 것이다.

 

-그것은 이기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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