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필링필링

1.4 그는 타협하지 않는다

스푼의 상담사

망상요람 by Z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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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냐의 능력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조절하는 거지만,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약은 잘 먹고 계세요?”

“어··· 솔직히 말하면, 아뇨.”

“음, 일상생활이 힘들다면 도움을 드리고 싶은데. 어떤가요?”

“역시 좀 거부감이 들어서···. 제가 누구 맘대로 조종당한다고 생각하면 좀 불쾌하거든요.”

아, 여전히 그러시구나. 병원은 따로 다니고 계시죠? 네.

타냐는 앞에 앉은 스푼 직원의 파란 눈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마음 역시 이해할 수 있었다. 남의 능력 하나로 감정이 좌우되는 것은 당연히 묘한 일이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하다. 어쩌면 자유의지를 침해당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부작용이 있고 사람마다 효과가 다른 약(pill)을 복용하는 것보다는 부작용도 없고 효과도 일괄적인 능력으로 감정(feel)을 조절하는 게 나을 텐데.

조금은 안타까웠지만, 타냐는 오늘도 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저희 좀 더 오래 봐야겠네요.”

“그··· 역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이게 제 역할인데요.”

잠시 쉬는 시간, 타냐는 전기 포트에 물을 받으며 생각에 잠겼다. 부모님, 친구, 애인···. 제 실수로 어떤 하루하루가 진창에 처박힌 사람들의 면면이 떠올랐다. 처음 특기를 발현했을 땐 조건이 뭔지도 모르고 조절할 줄도 몰라서 여럿 괴롭게 했었다. 그러니 이 능력이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이제 와서 그들을 원망하진 않는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이니까. 하지만 가끔 이렇게 생각이 날 때면 어쩔 수 없이 기분이 가라앉는다.

뭐, 그래서 늘 능력을 쓸 땐 동의를 얻고 시도하니까···. 그게 타냐가 직접 제압 현장에 나서지 않는 이유다. 인질극을 벌이는 범인에게 '너무 흥분하셨어요. 능력 좀 써도 될까요?'라고 허락받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물론 예외도 있긴 하지만, 다나 외에 그런 처방이 필요할 경우는 극히 적었다.

콰장창-

그때, 상담실의 창문이 깨져나갔다. 바닥이 흔들리고, 소파가 덜걱거리는 것에 화들짝 놀란 타냐는 무작정 복도로 뛰쳐나갔다. 모든 천장과 벽, 바닥에서 우지끈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스푼 건물에만 재난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럴 만한 능력자가 있었나? 심지어 이 정도 규모라면··· 나가 군? 이럴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는데, 화났나? 그럴 수 있겠다. 하지만 왜?

“-그냥 몽땅 다 마음에 안 든다고요!”

그리고 나타난 복도의 모습에, 타냐는 얼어붙은 듯이 멈춰 섰다. 듄과 나가가 마주 보고 서 있는 모습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듄이 잠시 특기를 막아놓았을 것이다. 타냐도 입사 초기에 한 번 경험해봤다. 그때 자신은 어땠더라?

‘특기가 없으셔도 침착하시군요.’

‘음··· 제 역할에 있어서 특기는 보조일 뿐이어야 하는걸요.’

-하지만 속마음은 정말로 그랬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무서웠다니 죄송합니다···. 하지만 몸으로 겪어보는 편이 더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이 공포를 경험했으니 이제 다시는 방심하지 않을 겁니다.”

“···”

“으아아아!!”

그리고 타냐는 생각을 멈췄다. 나가가 분노를 견디지 못해 벽에 머리를 박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멈춰 있을 수 없었다. 차라리 화를 내면 냈지, 자해라니!

“언니?”

타냐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에 모두가 놀랐지만, 이내 어떤 기대감을 품었다. 하지만 타냐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은 당장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렇게 했다가 찾아올 후환이 두려운 걸 어쩌겠는가. 당장의 일보다, 그 이후의 일이···.

“나가 군, 진정해요.”

타냐의 능력은 아주 편리하다. 아무리 흥분한 사람도 갓 일어나 졸린 얼굴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남발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거부감 때문이다. 당장 타냐는 나가의 팔을 잡는 작은 접촉만으로도 1시간 정도는 진정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뒤는?

지속시간이 끝난 후 더 불처럼 화내는 사람이 있다. 이 경우엔 타냐에게 불똥이 튀니 보호만 받는다면 대처하기가 쉽다. 더욱 우울해하는 사람이 있다. 말만 통한다면 소통으로 진정시킬 수 있으니 좋다. 혹은 이게 타냐의 능력 탓인지 아니면 자신의 진짜 기분인지를 구분 못 해 혼란스러워하는 사람. 타냐는 이런 경우를 제일 어려워했다. 아무리 얘기해도 믿지 않는 경우는, 정말로 소귀에 경 읽기나 다름없으니.

그래서 나가의 어깨를 잡은 타냐는 지속시간을 대폭 줄이는 것을 선택했다. 단 5분. 당장 나가를 얌전하게 만드는 것과는 거리가 먼 선택지였다. ···나중에 조금은 덜 화내주지 않으려나.

“오빠, 진정했어···?”

“아니, 하···. 말로 알려줬어도 충분했잖아요.”

“나가 씨···”

“내가 지금까지 행동으로 안 보여주면 말 안 들었던 것도 아니고, 난 지금 날 갖고 놀았단 생각밖에 안 들거든요?”

“아닙니다!”

나가는 짧게 심호흡하고 있었지만, 언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분노의 전조였다. 저런, 특기가 생각보다 빨리 풀린 모양이다. 타냐는 한 번 더 특기를 써야 할지를 가늠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아니'였고-

결국 3분 뒤, 나가는 더 불같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타냐의 손은 뿌리친 지 오래였다.

“나가! 그만해!! 건물 다 무너지겠다!”

“싫어요, 서장님도 여기 동참했을 거 아니에요!”

“아니? 난 처음 듣는데? 전부 저놈 혼자 꾸민 일이야.”

그때였다. 나가의 눈이 돌아가는가 싶더니 귀능이 들고 있던 샌드백의 머리가 날아갔다.

“그럼 타냐 선배는요? 타냐 선배도 멋대로 한 거예요? 화내는 사람한테 대뜸 와서 특기나 쓰고, 얌전하게 굴지 않으니까 입맛대로 주무르고! 만만하게 말이나 잘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그거, 기분 나쁘다고요!

나가의 날카로운 눈이 타냐를 똑바로 바라봤다. 듄과 스푼에게 향하던 분노가 반절은 타냐에게 옮겨간 것 같았다. 반쯤은 예견했던 결과가 타냐를 향하자, 타냐는 듄과 눈을 맞췄다. 사과할까요? 네, 아무래도. 그래도 타냐 씨는 잘못이 없으니까··· 짧은 의사소통이 오고 갔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생각 없이 굴었나 봅니다.”

“!”

“그렇게 민감한 문제라곤 생각 못했습니다. ···화가 풀릴 때까지 맞겠습니다.”

“···으으으,”

타냐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건물에 다시 금이 가고 덜걱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오빠, 진정해! 혜나가 소리쳤지만 나가는 그마저도 들리지 않는지, 부들부들 떨며 얼굴을 가리고만 있었다. 타냐는 그것이 안타까워 다시 다가갔다.

제대로 스트레스가 풀리지도 않은 상황에서 억지로 진정시키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감정이 남에 의해 조절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더더욱···. 그러니까 이건 단순한 걱정이었다.

“만지지 마요!”

“!”

더 다가가기도 전에, 나가는 다시 타냐를 노려보았다. 아까의 불쾌한 경험을 다시 겪고 싶지 않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그 자리에 굳어버린 타냐는 슬며시 눈빛을 피해버렸다.

나가의 아버지가 와서 나가를 데려갈 때까지.

“-오빠 다시 데려와!”

그렇게 덩그러니 남겨진 다섯 사람.

나가가 스푼 건물을 떠난 뒤, 혜나는 곧 타냐에게 안겨 펑펑 울었다. 혜나는 타냐가 그를 순식간에 달랠 수 있지만 함부로 능력을 쓰지 않는 것을 알았다. 그래, 타냐는 직업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 능력을 쓰지 않았고, 항상 조심했다. 아까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타냐도 천천히 의사를 묻고 능력을 썼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울고 있는 것은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듄에 대한 원망과, 타냐에게 날카로운 소리를 한 나가에 대한 속상함이 원인이다. 혜나는 와아앙- 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타냐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혜나를 끌어안고 달래주었다.

“괜찮을 거야, 혜나야.”

“언니는 어떻게 그렇게 침착할 수가 있어? 도와줬는데 되레 화낸 거잖아!”

-혜나가 지금으로부터 두 살은 어렸을 때부터, 타냐는 누구보다도 상냥한 사람이었다. 처음엔 존댓말을 쓰길래 '왜 나한테 존댓말 써? 애잖아.'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대답이···

‘아껴주고 싶어서 그래요. 반말을 쓰면 마음이 풀어져서, 자기도 모르게 함부로 대하게 될 때가 있거든요.’

‘그래도 반말이 편하다면 그렇게 할까요? 언니가 조심할게요.’

음, 역시 언니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늘 상대의 의견을 먼저 묻고, 상냥하게 웃으며, 화를 낼 만한 일에도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들어보자며 주변 사람들을 말리곤 했다.

그래서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언니가 능력을 쓴 게 뭐라고! 만약 그때 타냐가 나가를 말리지 않았더라면 이마가 크게 찢어졌을 것이다. 아직 많이 어린 혜나는 지금 타냐가 혜나에게 능력을 쓰지 않은 이유를 몰라서, 나가가 화를 내는 이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대로는 잡아둬도 의미가 없을 거야. 초능력은 기분에 따라 위력이 달라지니까 억지로 시켜봤자 별 도움은 안 되겠지. 빨리 기분을 풀어줘야 해.”

“그래서 그걸 어떻게 할 거냐고!”

타냐는 다나에게 소리치며 씩씩거리는 혜나를 다시 붙잡아 토닥였다. 조금 창백해진 얼굴이 제법 자연스럽게 웃음 짓고 있었다.

“음··· 듄 씨는 아무래도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요?”

“삼고초려로 가야겠습니다.”

“그냥 귀찮게 하는 거잖아! 오히려 사람 열받게 만들겠다!!”

 


 

똑, 똑-

밖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왔다. 그뿐만 아니라 천장에서는 물이 배관을 타로 흐르는 소리가 우르르, 울리고 있었다. 이곳이 화장실이기 때문이다. -그래, 타냐는 화장실 한 칸에 박혀 앉은 채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특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왜··· 왜 지금.”

타냐는 당황과 무력감, 자책으로 뒤범벅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머릿속은 이미 온갖 생각들로 진탕이었다.

그렇게 없어지라고 저주할 때는 없어지지 않더니, 왜 이제야 특기가 사라진 거지? 그것도 하필이면 그걸 제대로 활용해서 일해보려 할 때. 덕분에 쓸모가 사라진 난 이제 그만둬야 하나? ···그럼 스푼이 아닌 난 뭘 할 수 있지? 왜 내 삶은 항상 희망을 주고 앗아가는 거지?

아아아···.

나, 대체 뭘 할 수 있는 사람이지?

타냐는 무력함에 눈물만 쏟아 내렸다.

똑, 또옥-


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왜 참지 않았느냐고 다그치던 아빠의 모습이 계속 떠올라, 다시 걷는 속도가 느려졌다. 내가 왜 그랬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내 잘못이 아닌데 왜 나만 참아야 하냐고···.”

악의 조직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능력이 사라졌다. 솔직히 그 상황에서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거기다 능력이 감정에 반응하는 건 나가 그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건물을 부순 것도 그 순간 특기 조절이 불가능해서 그런 거라 고의가 아니었다.

아슬하게 흔들리던 건물과 난장판이 된 복도. 깍듯하게 사과하던 듄과··· 어느 정도는 예상했단 얼굴로 시선을 피하던 타냐. 그래, 다른 것보다도 타냐에 대한 문제가 제일 머리 아팠다. 명백히 잘못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아, 어떻게 얼굴을 보지···.”

나가는 그렇게 작게 속삭이며 이마를 짚었다. 아마 타냐가 순식간에 나가를 진정시키지 않았다면 이마가 크게 찢어졌을 것이다. 타냐는 단순히 자해를 막기 위해 능력을 쓴 것이다···. 아마 입맛대로 조종하려거든 지속시간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늘리거나 했겠지. 타냐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었다. 결국 타냐는 스푼 건물이 무너져가는 와중에도 나가의 감정을 존중한 것이다.

잘못했지만 깍듯하게 사과해서 차마 화낼 수 없는 사람 한 명, 머리가 식고 나니 적반하장으로 굴었던 거라 차마 얼굴 보기가 두려운 사람이 한 명. 멍 때문이 아니라, 진짜로 머리가 아파졌다.

“왜 참으려고 해?”

백모래가 나타난 건 그때였다. 나이프의 보스. 모든 삿된 것을 순식간에 정화할 수 있는 능력과, 인 외의 신체 능력을 가진 인간. 겉보기에는 찐따 같고 허술해 보여도 수많은 사람을 죽고 다치게 한 범죄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째선지 나가의 특기를 알고 영입하고자 애쓰는 인물이기도 했다.

“누가 열받게 했나 봐? 다나? 아니면 비비안? 그것도 아니면 헤이즈? -아니면··· 듄?”

흠칫,

정곡을 찔린 나가가 정직하게 반응을 내보였다.

“이렇게 할까? -나이프에 들어와라. 그럼 듄을 죽여줄게.”

“싫거든요?! 죽이긴 누굴 죽여!”

“음, 그럼··· 듄이 죽는 게 싫다면 나이프에 들어와라!”

아.

어이가 없어서 나가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다음 날, 백모래에게 단단히 질린 나가가 스푼으로 복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빠아!”

“나이프로 갈둘 아랏떠···.”

“너무 극단적인 판단인데요?”

나가는 어쨌거나 백모래가 미친놈이라는 사실만 재확인한 채, 알고 싶지도 않았던 듄의 숨기고 싶은 과거까지 알게 된 채 스푼으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듄은 꿋꿋하게 부모님을 설득하고 돌아갔었고. 그럼 이제 남은 건 타냐의 일인데···. 나가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어쩌지? 답이 안 나온다.

“아, 나가 군. 어제 무슨 일 있었나요? 듄 군이 좀 이상해서요. 기운도 없어 보이고···. 여자한테 차였나 했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아, 백모래가···. 나이프에 들어오라고 듄 씨로 협박을,”

꾸욱, 귀능에게 더 대답하려던 입이 굳게 닫혔다. 더 이상 얘기하면 듄의 과거가 나오고, 그걸 말하면 남의 과거를 고자질하는 것 같아서 찝찝했다. 남의 험담을 주워듣고 그걸 다른 사람에게 옮기고 다니는 인간이 되는 기분이었다.

“-빠? 오빠!!”

화들짝, 옆에서 사사가 흔드는 것도, 혜나가 부르는 것도 모른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나가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정신없이 걸어온 것 같은데 여기가 어디지? ···의료실?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

“어, 딱히 아무것도···.”

“그럼 다녀오기나 해!”

“?!”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열린 문 안으로 밀쳐졌다. 그러고 보니 여기 상담실···! 혜나가 자신을 이런 상황에 냅다 내던져버릴 줄은 몰랐던 나가는 부들부들 떨리는 시선으로 타냐를 마주했다. 모처럼 흰 가운을 입고 있는 타냐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제 인테리어, 따뜻한 색의 러그와 커튼. 그리고 갈색의 푹신해 보이는 소파에 앉아있는 옅은 색채의 타냐. 전체적으로 포근한 분위기를 풍겼다. 심지어 타냐는 긴 스커트에 니트, 가디건 위에 가운까지 겹겹이 걸치고 있었다. 추위를 많이 타시나? 하지만 여전히···.

···아니, 이럴 게 아니라, 마음의 준비도 못 한 채 욕을 들어먹게 생겼다. 화내려나? 역시 화내겠지? 나가는 이런 상황에 자신을 던져 넣은 혜나를 원망하며 어정쩡한 자세로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이마는 좀 괜찮아요?”

“그, 죄송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말을 꺼낸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타냐는 그런 상황이 웃겼는지, 쿡쿡 웃으며 다시 말을 꺼냈다. 나가가 예상했던 것과는 180도 다른, 여느 때처럼 편안한 분위기였다.

“나가 군, 원래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의지가 침해받는 것에 굉장히 예민해질 수밖에 없어요.”

“네?”

“그러니까, 그때의 일은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구요. 누구나 나가 군 같은 반응을 보이니까. 제 능력은 사람의 감정을 붕 뜨게도 하지만, 순식간에 진창으로 박아버릴 수도 있거든요. 그런 반응은 당연해요.”

“아니, 그래도 도와주신 거였는데. 그때 제가 너무 예민해져서···.”

“음, 나가 씨.”

“네?”

“특기를 쓸 때, 저는 늘 허락을 구하거든요. 그런데 예외가 있어요. 정말 무례하게 억지로 특기를 쓸 수밖에 없는 몇 없는 경우죠. 뭔지 알아요?”

나가는 잠자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타냐의 능력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기분을 진창에 박아버릴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에는 동의했다. 타냐가 좋은 쪽으로만 능력을 써서 망정이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사방에 정신적 공격을 뿌리며 단체 패닉 사태를 만들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새삼 타냐가 이런 사람이어서 다행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상해를 입힐 때예요. 한 마디로 자해할 때죠.”

“!”

“그래서 전 나가 군에게 굉장히 무례한 짓을 저질렀지만, 사과하지 않을 거예요. 나가 군의 반응도 감수하고, 제 원칙대로 움직인 것뿐이니까. 그러니까 나가 군도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당연한 반응인걸요.”

하지만 그때, 상처받은 것 같았는데. 나가는 제 시선을 피하던 창백한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타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나가에게 상냥하게 웃어 보이고 있었다. 상처라곤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사람처럼.

그래도 스푼에 돌아오면서 제일 컸던 고민이 해결되었기 때문에, 나가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제야 편하게 어깨를 내리자, 타냐가 녹차 마실래요? 라며 물어왔다. 어느새 구석의 전기 포트에서는 물이 바글바글 끓고 있었다. 나가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 종이컵에 녹차를 따라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무슨 고민 있어요?”

“네?”

“그냥 오해를 푸는 정도라면 상담실 밖에서 하면 되는데, 혜나가 여기까지 나가 군을 데려왔다는 건 고민이 있어 보였다는 뜻이거든요.”

혜나는 똑똑한 아이니까요. 아···.

나가는 어색하게 볼을 긁적였다. 아까 너무 생각에 잠겨 있긴 했다. 옆에서 사사 선배가 흔드는데도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이 정도면 누구나 고민이 있겠구나, 싶은 모양새였다. 그러네.

다시 정적이 흘렀다. 분명 고민은 맞는데, 막상 판을 깔아주니 할 말이 없었다. 나이프는··· 스푼이니까 당연히 알 테지만, 듄 씨의 그런 과거에 대해서는 모를 텐데. 걸러서 얘기하자면 또 남는 게 없었다. 나가는 그래도 거르고 걸러서 얘기해보려 입을 열었다. 뭐라도 말해야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어제 백모래가 나이프에 들어오라고 듄 씨를 가지고 협박을 했거든요.”

“그랬구나. 어쩐지 아침에 듄 씨 얼굴이 안 좋아 보이더라고요. 기분이 어땠나요? 많이 무서웠을 수도 있는데.”

“아뇨, 그렇다기보단··· 좀 당황스러웠는데. 말도 안 통하고요.”

“아, 일반적인 사람의 사고방식과는 좀 다르죠?”

나가는 격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 백모래가 말 한 헛소리들에 대해 아무에게도 터놓고 얘기한 적이 없었다. 나이프에 들어오면 듄 씨를 죽여준다길래 질겁했더니, 나이프에 들어오지 않으면 듄 씨를 죽이겠다고 말을 바꾸고, 난데없이 저를 데리고 듄 씨를 찾아가질 않나···.

나가는 한번 입이 트이자마자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막 스푼에 복귀한 참이라,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얘기들이 타냐 앞에서는 줄줄 나오고 있었다. 타냐 특유의 분위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함께 있으면 무장 해제되는 듯한 분위기 말이다.

그렇게 줄줄이 털어놓고 있던 나가는 듄의 과거 얘기로 이어질 시점에서 헙, 입을 다물었다.

“···”

“하하, 더 안 물어봐요. 나가 군,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요. 어쨌든 힘들고 피곤했을 텐데, 오늘 이렇게 와서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화아악, 나가의 얼굴이 밝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백모래가 무슨 얘기를 했던, 나가 군이나 스푼에 크게 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면 너무 무게를 두지 않는 것을 추천해요.”

그리고 다시 거멓게 죽었다. 졸지에 들어버린 듄의 과거가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이프가 벌인 학살의 현장. 모두 전멸한 상황에서 듄은 살아있는 동료를 두고, 친구를 데려갔지만 그조차 이미···.

그런 상황을 만든 장본인이 백모래인데, 듄을 배신자로 몰아가는 것이 아주 같잖았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미 나이프와 관련된 과거를 알아버렸으니 이것을 보고할지, 말지 고민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타냐 씨는 넘어가 주었지만.

“제가 직접 백모래를 만나본 건 아니지만, 여러 얘기를 들어봤을 때- 그는 궤변을 그럴듯하게 말하는 재주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무시해도 괜찮아요. 스푼의 아무도 나가 씨를 탓하지 않아요. 어쨌든, 백모래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있는 건 나가 씨인걸요? 많이 우울하면 여기 초콜릿이라도 먹어요.

“···”

···듄의 얘기 이후로도 타냐는 약 20분간 무해하게 웃는 얼굴로 나가의 일상과 기분을 묻고, 다정하게 웃으며 공감해주었다. 상담보다는, 성격 좋은 선배와 가볍게 실컷 수다를 떠는 분위기였다. 그게 바로 나가에게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가는 초코바를 입에 물고 상담실 밖으로 나왔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뭔가 멍청하게 백모래의 일부터 요즘의 일상까지 다 털린 기분인데.

타냐 선배는 진짜 천사가 아닐까? 날개를 숨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 정도의 생각을 하며 멍청한 얼굴로 초코바를 씹는 나가에게 혜나와 사사가 다가왔다.

“어때, 화해했어?”

“아, 응. 타냐 선배 진짜 성격 좋다···.”

“그럼, 우리 언니가 얼마나 착한데!”

“그보단 기대들 아나는 게 아니까···.”

의문이 담긴 두 쌍의 눈이 사사를 향했다. 사사는 눈동자를 굴리더니,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감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나가 씨는 다른 특기자들과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네? 어디가요?”

나가는 듄과 함께 초능력을 활용한 방어를 연습 중이었다. 첫 만남은 최악이었고, 다시 만났을 때도 영 어색했지만 지금은 자연스럽게 듄쌤, 하며 대화를 나눌 정도는 되었다.

그렇게 나가네 어머니의 교육법, 백모래의 구애 상대인 스푼의 여사원까지 이야기가 오가고 나자- 어느새 대화는 한 가지 주제로 흘러갔다.

“-그러고 보니 타냐 선배도 이런 훈련을 거친 건가요?”

“네. 물론 전투와는 어울리지 않는 특기이기 때문에 능력의 연구와 활용 위주였죠.”

“능력의 연구와 활용···?”

“음, 타냐 씨는 뒤늦게 특기를 발현해서 능력의 발동 조건과 한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발동 조건이 포옹인 줄 알았죠.”

“네?! 처음부터 자유자재로 썼을 줄 알았는데요.”

“진짭니다. 처음 타냐 씨를 봤던 눈사태 현장에서도 아이들을 대상으로 프리 허그를 하고 계셨으니까요···.”

“그때도 타냐 선배는 타냐 선배였네요···.”

나가는 타냐가 다짜고짜 다가와 ‘안녕하세요, 감정을 조절하는 특기자인데요, 포옹을 해도 될까요?’라 묻고 다니는 장면을 상상했다. 초면인 사람이 들으면 굉장히 당황스러울 법한 대사였다.

“그런데 타냐 선배에게도 능력의 한계가 있나요? 못 들어본 것 같은데.”

“능력 자체는 무한으로 사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그 감정을 경험해봐야 한다는 점이 한계였죠.”

“네?”

“울어본 경험이 있어야 상대를 울고 싶은 기분으로 만들 수 있는 거죠.”

“아···.”

“그래서 상쾌하게 일어나는 기분을 느껴보겠다며 몇 날 며칠을 숙면만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어엌ㅋㅋ

나가는 타냐가 금방이라도 쓰러져 자고 싶은 기분을 느끼기 위해 며칠 밤샘과 향초, 따뜻한 욕조 목욕과 코코아를 준비했다는 말에 결국 참지 못하고 웃고 말았다. 타냐라면 충분히 할 법한 일이었다. 하지만 너무 귀여운 노력이라서 없던 긴장감조차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훈련은 그리 즐겁지 않았으니까요. 그리 재밌기만 한 건 아니었죠.”

“어푸푸- 왜요?”

실수로 물총을 맞아버린 나가는 뒤늦게 초능력으로 방어막을 만들며 되물었다. 지난 일을 잊은 것이 뻔히 보이는 대답이었다. 듄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세한 건 말하기 어렵지만···. 타냐 씨의 능력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다는 점만 말하겠습니다.”

“아···.”

나가는 그제야 자신이 타냐에게 버럭 화냈던 일을 기억해냈다. 그때 그가 지었던 표정도···. 창백해졌던 얼굴은 그다음 날 멀쩡해져 있었지만, 왠지 뒤가 찜찜했다.

“그래도 금방금방 회복하셔서 다행이죠.”

“네···.”

그보단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는 쪽이 맞겠지만. 듄은 뒷말을 삼키며 계속해서 물총을 쐈다. 나가는 어느새 다시 어색해진 분위기에 몸서리쳤다.


“괜찮은 거, 확실합니까?”

“네?”

“아까, 그, 뺨을 맞은···”

“아, 이거. 좀 아프네요. 그래도 괜찮아요.”

듄은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이는 타냐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벌써 이번이 여섯 번째였다. 최대한 많은 실습을 통해 숙련도를 쌓는 게 좋기는 하지만, 지금으로도 충분하니 멈추자고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해하니 괜찮아요. 누가 제 감정을 마음대로 조종하는데 좋아하겠어요?”

“그래도, 사전 고지를 통해 충분히 의사를 확인했는데도 이렇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마음은 늘 바뀔 수 있는 거잖아요.”

전 괜찮아요.

타냐는 해맑게 웃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한쪽 뺨이 괜히 더 애처로워 보였다. 듄은 드물게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기대하지 않으십니까?”

“네?”

타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듄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했다. 말하면서도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젠 다른 사람들에게 아예 기대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그게 왜요?”

타냐가 당연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게 뭐 어떠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듄은 말문이 막혔다.

“어- 무슨 생각 하시는지 알 것 같은데, 전 진짜 괜찮아요. 생각하시는 것처럼 나쁜 의미로 그러는 게 아니라, 음- 이해가 되니까 말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요.

타냐는 되레 듄의 손을 두어 번 토닥이고 먼저 일어났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니까.”

타냐의 단단한 눈가는 눈물 한 점 달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미움받기를 무릅쓰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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