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심
bll 드림
“무지개가 어떻게 생기는지 알고 계신가요?”
“뭐?”
이사기가 딱 죽기 직전까지 트레이닝을 하고 있을 때, 아이젠은 태연하게 말을 걸었다. 과연 ‘걸었다’인지 ‘시작했다’인지는 모르겠다만, 이사기는 본능처럼 착실하게 그에 대답해주었다. 아이젠이 뜬금없이 저를 방해하는 것이 한두번인가. 이젠 시답잖은 질문을 듣는 것도 훈련의 일종이 되었다. 탕, 총소리같은 축구공의 마찰음 뒤로 말소리가 울렸다.
“…비 온 다음에.”
“비가 오기 전에도 생긴답니다. 정확하게는 대기 중 물방울에 빛이 반사되면 보인다고 해요.”
시끄럽네. 방금 전의 대답도 땀에 푹 젖은 뇌로 간신히 답해준 것이다. 한계에 닿을 정도로 몸을 움직이니 이내 아이젠도 성가시게 느껴졌다. 언제는 안 성가셨겠냐만은, 일종의 콩깍지가 벗겨지는 느낌이라고 이사기는 생각하고 있다. 정확히 같지는 않지만.
“예쁘지요, 무지개. 언뜻 보면 흐릿하지만 소나기가 그친 후에 생긴 무지개는 얼마나 눈부시게 비치는지 몰라요.”
“……그게 지금 꼭 내 앞에서 해야 하는 소리냐고!”
인생을 걸고 훈련 중인 사람 옆에서 조잘조잘 떠들기나 하는 모습에 기가 막혀 확 소리를 지르고는 다시 헉헉대며 숨을 몰아 쉰다. 젠장, 이 놈의 체력! 화풀이하듯 공을 쳐냈다. 팅. 공은 점수가 되지 못하고 골대에 빗맞는다.
“에에, 허접.”
“너 때문이잖아!!!”
“소녀에게 책임을 무는 남자라니 최악~”
반쯤 누워서 이 생고생을 팔자 좋게 놀리는 녀석에게 듣고 싶지 않아…. 지잉, 다시 새로운 공이 발 앞에 놓인다. 아이젠은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속내를 모를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본다. 제일 가까이 있으면서도 제일 멀리 있는 듯이 방관하는 눈. 마음에 안 든다. 하지만 어쩔 수 있나. 이를 악물고 공을 차는 수밖에. 이미 한계에 달한 몸, 골대의 정가운데를 노리고 뛰어든다. 탕!
“본론!!”
삐이익! 스피커로 건조하게 울려퍼지는 휘슬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아이젠의 눈은 단박에 달라져 있었다.
“그러니, 무지개가 빛나기 위해서는 비가 필요하다는 뜻이랍니다!”
…아. 이사기는 그 눈을 본 적 있다. U20 경기 중에 보여줬던 얼굴이다. 그 90분 간 이사기는 아이젠과 단 두 번 눈을 마주쳤다. 처음은 무감흥과 없다시피한 기대감. 마지막은 혼란과 함께하는 욕심. 방금까지 필드 옆에서 늘어져 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되지 않는 감정. 또 ‘뭘’ 찾아낸 거야?
“이사기 군은, 음, 무지개라고 하기에는 부족해요. 우리 회사의 오퍼가 최고치가 아닌 건 놀라웠지만 딱 그 정도?”
골대 뒤의 전광판은 시끄럽게 번쩍거리며 단 한 단어를 비추고 있었다.
GOAL!!!
“팬 운운하면서 똑같은 소리 할 거면 됐어. 나는 인기 따위가 아니라 나의….”
“그으러니까.”
타박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이젠 리사에가 잔디 위로 올라온다. 축구화도 운동화도 아닌 구두굽에 밟히는 잔디는 한층 풀이 꺾여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아이젠이 손수건을 꺼내 이사기는 흐르는지도 모르고 있던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눈이 마주친다. 저 눈동자 안에서 이글거리는 것은 열망인가, 분노인가. 이내 손수건에 시야가 가려진다.
“왜 네가 미래의 무지개라고 생각하는 거지?”
툭 내뱉은 한 마디였다.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아이젠 리사에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질적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존댓말.
안 쓰고 있지?
“다른 인재는 아직도 많아요. 블루록 프로젝트가 생각보다 성공해서 이제는 해외 주니어도 접촉할 수 있게 됐고요.”
이사기는, 솔직하게, 훈련 후의 열기 때문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대화를 시작할 때는 최대한의 존중으로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고 있었지만, 이젠 정말 무리다. 존중같은 걸 해줄 여유가 없었다.
“마음에 안 들면 이사기 군이든 누구든, 구름으로 만들어버릴 거에요. 저는 어떻게 해서든 무지개를 보고 싶으니까.”
그렇게 머릿속에 들어차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나를 보고 저의 증명이라느니 재미있다느니 할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별로라고 차선책을 구하는 거야? 기가 막혔다. 블루록에서 날 쳐다볼 때는 언제고. 다른 동에 린이나 시도같은 선수가 있어도 내가 제일 마음에 든다면서 명함을 내밀 때는 언제고?
솔직하게, 네 인정 따위 상관 없는데.
“손수건은 세탁해서 돌려주셔야 해요.”
툭, 시야의 절반을 가리던 물체가 떨어져 나가 이사기의 손에 쥐어졌다. 자수가 새겨진 손수건이었다. 愛染 莉沙絵. 하, 이사기는 헛웃음을 뱉으며 시선을 위로 올렸다. 아이젠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번쩍거리는 전광판은 이젠 글자를 앞뒤로 회전시키기까지 하며 겨우 공 하나가 큰 쇳대 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화려하게도 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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