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주

너랑 술 한 번 마시기 참 힘들다

샤디브 언니의 생일을 축하하며…샤디브 언니댁 아스타브 (가 아니라고해서 정정) 타브아스를 상정하고 썼읍니다. 이 글은 2막중반까지밖에 진행하지 못한 뒷심없고 디앤디 알못인 타브가 작성했습니다…. 캐해와 고증이 다를시 제가 틀리고 여러분이 맞습니다….


그날은 그러니까, 언제나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아니, 그럴 터였다.

여전히 올챙이를 제거할 방법은 오리무중이었고, 그 와중에 누군가의 도와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지 못해 잠깐 샛길로 샜다가-그에 이어 쏟아진 아스타리온의 빈정거림을 귓등으로 흘리고-, 두어 번의 크고 작은 전투까지 거쳐 녹초가 된 끝에 오늘은 도무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며 야영을 결정한 것까지는 똑같았다. 식사 후 모닥불을 쬐고 있자니 기분 좋은 나른함이 몰려와, 멍하니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날들이 계속될까, 애초에 이렇게 떠돌기 시작한 지 며칠이나 지났지, 하고 멍하니 날짜를 헤아려 보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다.

“어, 나 오늘 생일이었네. ”

툭 내뱉은 한 마디는 의외로 명료하게 야영지 내에 울려 퍼졌고 (다들 잠을 청할 준비를 하고 있던 터라 야영지는 제법 고요했기 때문으로, 결코 목소리가 컸던 것은 아니었다), 다음 순간 당신은 시선이 느껴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라고 새삼스레 깨달았다. 누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또 누구는 그저 누워있던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워 당신을 바라보았고, 뒤이어 작은 소란이 벌어졌다. 오 이런, 진작 알았더라면 뭐라도 준비했을 텐데. 내 말이! 지금이라도 파티를 열까? 츠크, 말도 안 되는 소리. 내일 향할 곳이 얼마나 험한지 잊었나? 그래도 아쉽긴 하네. 티격태격하는 목소리와 부스럭대는 소리, 짧은 웃음소리가 찻잔 속의 태풍처럼 몰아쳤고, 정신을 차려보니 당신의 품엔 소박한 선물들이 한 아름 안겨 있었다. 험난한 여정 중에, 그것도 이 밤중에 느닷없이 대단한 물건을 준비할 수 있을 리 만무한 터라, 그 종류는 기껏해야 야영 물자나 연금술 재료로 쓰려 했던 약초며 들꽃, 혹은 잇자국이 남은 공 정도였다. 하지만 단출한 짐을 살피며 저마다 고민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이것들을 단순히 잡동사니라 치부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적어도 이 야영지 내에는-없을 것이다. 아,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아, 오늘의 주인공이 행차하셨군.”

선물들을 정리하기 위해 당신의 텐트로 향하자니 몇 걸음 앞에서 과장스레 점잔 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단란한 한때에 그 만이 부재했음을 깨닫고 시선을 향하면 여느 때와 같이 두꺼운 책을 손에 든 엘프의 창백한 낯이 보인다.

“그래, 넌 선물 안 줘?”

유치한 비아냥에 유치하게 대꾸하자 아스타리온은 코웃음을 치며 들고 있던 책장을 한 장 더 넘겼다.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당신이 무어라 말을 덧붙일 새는 주지 않고 “뭐, 미모의 뱀파이어와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낼 기회라도 줄까?”라고 선심 쓰듯 말하는 것이다. 기가 차 반사적으로 허, 하고 헛웃음이 새어 나온다. 예상은 했다지만 뻔뻔스레 웃어 보이는 뺀질한 낯짝이 여간 밉살스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얄망한 표정이 마냥 싫지만은 않은 게 더 문제다.

“하아…뭐, 그래. 그럼 따라와.”

야영지 내의 궤짝에서 포도주 두어 병과 말린 고기 몇 점을 꺼내 배낭에 담았다. 소박한 선물 교환식이 끝난 후 각자 밤 인사도 나눈 뒤이다. 이제 와서 고단한 동료들의 휴식을 또다시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인 탓에, 야영지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에 작게 불을 지피기로 했다. 두 사람의 텐트가 비교적 외곽에 떨어져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낙엽이며 나뭇가지를 적당히 그러모아 쌓은 뒤 소마법을 영창하면 어렵지 않게 불이 붙고 밤바람에 조금 식었던 몸이 기분 좋게 데워진다. 포도주의 뚜껑을 열어 오크 잔에 따르고 있자니 동행인은 어느새 병째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그의 고상한 평상시 행동거지와는 대비되는 제법 호방한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사실, 야영지에 굴러다니는 오크 잔은 더럽거니와 잔에서 나는 나무 냄새가 고약하다는 우아하기 짝이 없는 이유가 있으나 결과적으로 병나발을 불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엔 잔뜩 얼굴을 찌푸리곤 여느 때와 같이 야영지에 있는 와인의 저급함에 대해 투덜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같은 주제로 이렇게 다양하게 불평을 늘어놓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하지만 이대로 밤새 그가 야영지의 부족한 물자 탓에 얼마나 큰 심적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고 싶지는 않은 탓에, 당신은 시선을 병의 라벨로 향했다.

“장밋빛아침 불포도주야, 그냥 싸구려 와인이 아니라. 라벨에 적혀있잖아?”

심드렁하게 되묻자, 전직 치안판사는 코웃음쳤다. 무슨 이름을 붙여도 그건 그냥 형편없는 포도로 만든 형편없는 술일 뿐이라나. 이 자는 항상 이랬다. 도대체가, 이 작자의 마음에 차는 게 세상에 있기나 할까. 그러면서도 병을 기울이며 그 ‘싸구려 와인’을 축내는 모습이 얄미워 괜스레 핀잔을 던졌다.

“가끔 넌 네가 이 불포도주인 것처럼 굴어.”

그 말에 아스타리온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벌써 취했어, 자기? 그건 또 무슨 쌩뚱맞은 소리야, 같은 말이 따라붙기 시작하면 여간해선 법조인-이었던-자의 입을 멈출 수 없을 것이 뻔하기에 재빨리 말을 잇는다.

“조금이라도 열기가 닿으면 열화돼서 맛이 변할까, 아니면 불이 붙을까 두려워서 지레 멀리 떨어지잖아.”

불씨를 끼얹기라도 한 것처럼, 마침표와 함께 내려앉은 정적이 낯설어 반사적으로 흘긋 시선을 옆으로 향했다. 그 덕에 엘프의 낯에 일순 당혹감이 스친 흔적을 가까스로 붙잡을 수 있었지만, 그것은 이내 불쾌감으로, 또 적의로 모습을 바꾸었고 뱀파이어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조소했다.

자기, 한두 번 함께 밤을 보낸걸로 나에 대해서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귀엽네. 하지만 완전히 틀렸어.”

비뚜름하게 올라간 입술 사이로 씹어뱉듯 쏘아붙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는가 싶더니 병을 쥐고 있던 손을 가볍게 펼쳤다. 날카로운 파열음, 직후 깨진 병의 내용물이 모닥불의 불씨를 꺼트린 덕에 피부에 묻은 것이 파편에 베여 스며 나온 피인지, 아니면 그저 튄 포도주 방울인지 분간할 수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이거 불포도주였잖아. 자칫 잘못했다간 작게나마 폭발이 일 뻔했다는 사실에 뒤늦게 등골이 서늘했다. 그 사이 병을 다 비우기라도 한 걸까, 같은 생각은 우선 제쳐두고, 야, 위험하잖아. 핀잔을 던지며 묻은 것을 가볍게 털어낸 뒤 고개를 들면,

눈이 마주쳤다.

달빛을 등지고 선 흡혈귀의 눈빛은 꿰뚫는 듯 선득해서, 암시야가 없었더라도 그 시선의 행방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말없이 돌아서서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었다. 언제나처럼.

그리고 당신만이 남았다.

에라, 성가신 녀석. 한숨을 내쉬고 축축하게 젖은 모닥불의 흔적으로 시선을 옮긴다. 생일에 이런 식으로 바람이나 맞다니. 기분도 모르고 휘영청 뜬 달에 신세 한탄이라도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성질도 급하지. 아니, 내가 급한 건가? 그래도 사람 말 끝까지 듣지도 않고 가는 쟤도 쟤지. 해가 뜨고 얼굴을 마주하면 아스타리온은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똑같은 미소를 띠고 야영지를 나설 것이다. 그 표정은 거절이다. 당신이 오늘 일을 다시 입에 올릴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그렇지만, 어쩌면….

고개를 들어 어둑한 나무 사이를 살핀다. 여전히 뱀파이어의 기척은 없다. 귀를 기울여도 들려오는 것은 기껏해야 풀벌레 소리, 그리고 자신의 숨소리 정도 일까.

…하지만 그는 항상 그렇게 모습을 숨기고 틈을 노리곤 했다. 그러니 어쩌면 자리를 떠난 체 하곤 숨죽여 지켜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생일에 산통을 다 깨트렸으니 당신이 시무룩해한다든가, 짜증을 낸다든가, 아무튼 기분이 상한 꼴을 보고 싶어서라는 이유로. 그렇다면 뭐, 선심 써줄까. 아직 잔도 다 비우지 못했으니.

한 모금 머금자 특유의 독한 향에 절로 콧잔등이 찡그려진다. 그에 비해서 어정쩡하게 시큼하고 달짝지근한 맛이 입 안을 가볍게 감돌고, 목으로 넘기면 뒤이어 뭉근하게 열기가 퍼진다. 쩝, 가볍게 입맛을 다시고는 입을 연다.

“네가 스스로를 싸구려 와인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지, 실제로 그렇다고 한 적은 없다고.”

오크 잔 바닥에 낮게 깔려 찰랑이는 와인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제야 어쩌면 그 엘프의 까탈스러운 성정상 당신의 기분이 어떤지 따위를 고려조차 하지 못할 만큼 모멸감에 사로잡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동의를 표하듯 숲은 고요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유 없는 확신이 들었다. 아주 가까이 있지는 않더라도, 그가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라는. 남은 것을 한 번에 털어 넣고 몸을 일으킨다. 자신의 날숨에 거친 포도 향이 감도는 것이 느껴져 절로 입가에 웃음기가 맴돈다. 새카만 어둠 속에 가볍게 시선을 던지고, 말을 잇는다.

“뭐, 네가 이 술이랑 닮았다고 생각한 건 맞지만…”

거짓말은 썩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못한다. 어설프게 말했다간 이 섬세한 뱀파이어는 더 심하게 토라질 뿐이니까 인정할 것은 빠르게 인정해야 한다. 인공적으로 색을 더했다 한들 결국 본질은 단순한 것이 그와 닮았다고 생각하긴 했다.

“…난 제법 좋아해, 불포도주. ”

값 따위 중요하지 않다. 입에만 맞으면 된 일이다. 그러지 않아도 골칫거리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섬세하게 얽힌 향과 맛을 구분하며 즐기는 것도 그 나름의 재미겠으나 복잡하지 않은 명쾌함 또한 매력이다. 물론, 솔직하진 않다. 그러나 얇은 거짓말과 꾸며낸 웃음 따위는 결국 첨가제 정도에 불과해서, 아무리 그 색과 향을 더해도 술을 처음 마시는 햇병아리가 아닌 이상 뻔히 들여다보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끝까지 숨기려 애쓰는 모습을……
…귀엽다고 느끼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쩔 수 없지. 이런 술은 취기가 빨리 돌기 마련이다.

꺼진 불가에 놓여있던 배낭을 들어 올리면 기분 좋은 묵직함이 손끝에 실린다. 잠시 흥은 깨졌다 해도 아직 밤은 길다. 마저 오늘을 만끽하러 가보실까, 하고 돌아서서 걸음을 내딛으려다,

“더 마실 거면 늦지 않게 와. 많이 남진 않았거든. ”

…손 많이 가는 동행인에게도 한 번쯤은 더 초대장을 쥐여주는 친절을 베풀기로 한다. 감사하시지, 아스타리온. 오늘의 주인공은 나니까 내가 봐준 거야. 포도주 병이 부딪히는 소리를 박자 삼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긴다. 올 테면 오고 아니면 말라지. 거절하면 거절하는 대로 야영지의 모닥불을 벗 삼아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제법 낭만적일 거다. 곁에 누가 있든 아니든 마지막엔 건배와 함께 오늘을 마무리하자. 건배사는…장밋빛 아침을 위하여.


▼이하 아무래도 좋은 중얼중얼…▼

술 종류 정하는게 제일 힘들었다….

사실 장밋빛아침 불포도주가 진짜 싼 와인인지 아닌지 모름…하지만 위키에 써있는 설명이 제법 적당해보여서 골랐습니다

  • 장밋빛아침 불포도주
    이 와인의 색은 매력적이지만, 코끝은 거칠고 입안에서는 밋밋한 느낌이 들기 때문에 속지 마세요. (라고 번역사이트가 말해줬습니다 정확한 한글판 설명은 저도 모릅니다)

원랜 먼바다늪지 포도주로 쓰려고 했던 것 같은데…왜 중간부터 이 와인으로 바꿨지? 기억안납니다…하지만 이게 더 이름도 예쁘고 하니까 괜찮을지도…. 비록 먼바다늪지(Farsea Marsh) 한글로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오천년 고민했지만……….(ㄱ-) 여담으로 설명중에 공식적으로 나쁜 와인이라고 써있는건 이거뿐이더군요……근데 너무 좋은 설명이 1나도 없어서 차마 이걸론 못씀……. 그냥 1막 막바지 연회에서 식초맛나는 싸구려 와인밖에 없다고 투덜대던 아스타리온이 생각나서…와인은 더 금방 휘발되려나…정도의 생각으로 구상하기 시작했던건데 언제부턴가 포가튼렐름 내의 술에 대해서 찾는 시간이 제일 오래걸림……(먼바다늪지 포도주 저 이름 맞긴 한가? 제 야영지엔 없더군요…사실 장밋빛아침 불포도주또한…몰라…그냥 수도원이랑 이름 같길래 베껴씀….)

아무튼 생일기념으로 쓰기 시작했던건데 생일 다 지나가서야 드리게 되네요…정작 샤디브 언니네 타브 설정도 아스타리온에 대한 캐해도 아직 어중간하겠지만 갑자기 쓰고 싶어져버려서…샤디브언니네 아스타브는 희생 당하고 만 것입니다……. 그래도 즐거운 덕질중인 샤디브 언니가 앞으로도 행복하시길 바라는 마음만은 진짜…. 중얼중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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