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신+티할라카드] 귀향

발더게3 by 권태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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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윅스님과 연성교환으로 쓴 글입니다*

“……계십니까? 할신이라는 분을 찾으러 왔소이다.”

아이들에게 데친 채소와 구운 버섯으로 만든 점심 식사를 챙겨 주고 방에 길게 늘어져 오후 휴식을 즐기던 드루이드 할신은,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마 위협이 될만한 인물이거나 하다못해 잡상인이기라도 했다면 방 밖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몇몇 동료들이 저지했을 것이므로, 불안하진 않았으나 의구심이 컸다.

“들어오시오, 내가 할신입니다. 뉘신지요?”

“아, 드디어 찾았군. 여기까지 오는데 정말 오래 걸렸소.”

방으로 들어선 사람은 다부진 체격의 인간 여성이었고 정확한 나이를 짐작하긴 어려웠으나 인간의 나이로 마흔 정도 되어 보였다. 그을린 피부에 건강해 보이는 사람이었음에도 꽤 고단한 여행길이었던 티가 나서, 할신은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딱히 그에게 용무가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왠지 차 한 잔, 꿀 과자 하나 대접해야 할 것 같은 몰골의 나그네였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으나 내게 용무가 있다면 잠시 앉는 게 어떻겠소?”

할신이 방문객에게 의자를 권했지만, 방문객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기골이 장대한 드루이드가 할신 본인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품을 뒤지더니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 순간에도 밖에서는 고아원의 아이들 중 식사를 빨리 마친 녀석들이 뛰어 다니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은 할신 앞에서 가죽 주머니를 열어 그 안의 물건을 확인했고 할신은 그런 그의 신중한 태도를 천천히 주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꽤 중요한 일처럼 느껴져 괜스레 긴장이 됐다. 한참 가죽 주머니 안의 물건을 만지작거리던 방문객은 마침내 그것을 다시 잘 정리하고 닫아서 할신에게 건넨다.

“……이게 무엇이오?”

할신은 낡았지만 깨끗하고 바느질이 잘 돼있는 가죽 주머니를 열었다. 그 안에는 예쁜 자투리 천들을 이어 붙여 만든 손수건이 들어있어 그걸 꺼내 펼쳤더니 그에게 익숙한 목걸이 하나가 나왔다. 자세히 살펴 보니 목걸이의 구석구석에 검붉은 피가 굳어 붙어 있었다.

“보시다시피 목걸이요. 목걸이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용서하시오. 일부러 닦아내지 않았소. 우리가 발견한 그대로 돌려 드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티할라카드.

할신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이며 조용히 연인의 이름을 읊조렸다.

 


티할라카드는 티르의 팔라딘이었다. 그들이 함께 그림자 땅의 저주를 풀고, 또 종말을 건 네더브레인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난 이후 할신은 발더스게이트를 떠나 가족을 잃은 많은 아이들의 가족이 되어주기로 했더랬다. 할신의 젊은 연인은 그 선택을 잘 받아 들이는 듯 했고, 계속 함께 할 순 없어도 365일 중 몇 달 정도는 고아원에 머물렀다. 그들은 성실하게 아이들을 돌보고 진실 되게 사랑을 나눴다.

그들의 애정과 신뢰는 변치 않았으나 할신도 아직 젊은 청년인 티할라카드를 굳이 붙잡아두고 싶진 않았기에, 그의 연인이 자신만의 여정을 하며 순례길을 떠나겠다고 할 때마다 항상 그 결정을 지지했다. 편지를 자주 못 보내도, 주기적으로 꼭 고아원으로 돌아오던 티할라카드였기에 평소보다 좀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더라도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할신은 연인의 전투 실력과 지성, 판단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므로 막연하게 낙관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티할라카드가 마지막으로 고아원을 방문한지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째에 접어 들었을 땐 걱정도 되고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변을 당한 거라면 진작 연락이 왔을 것 같았고, 그게 아니라면 그들의 관계가 끝난 것일텐데 이런 방식은 정중하고 헌신적이며 고지식한 그의 연인이 선택할만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고아원에는 돌보아야 할 아이들이 많았고, 또 하나 둘씩 느리지만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으므로 낮 시간 동안은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할신은 아이들이 잠깐 낮잠을 자는 시간이나, 모든 일정이 끝난 깊은 밤 혼자 방에 남겨지면 그제야 연인의 굳은 입매를 떠올리곤 했다. 그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와 이곳을 그리워하고는 있을까. 우리는 이렇게 끝인가……? 그래도, 더 이상 함께 하고 싶지 않다는 내용의 짧은 편지라도 보냈다면 좋을텐데.

무정한 연인이 원망스럽진 않았으나 못내 아쉬웠다. 인연이라는 것은 본디 끊어졌다가도 이어지고, 축복처럼 내려 앉았다가도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이라, 그저 자신의 곁에 머무를 때 진심 전력을 다 해야한다는 것이 할신이 하는 사랑의 방식이었다. 그는 티할라카드 역시 그런 사랑에 동의했을거라 확신했더랬다.

 


“아, 역시 영웅의 이름을 알고 있군요. 목걸이를 알아 보시겠소?”

“……영웅?”

방문객은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묘하게도, 그는 오래 묵은 빚을 청산한 눈빛으로 할신을 올려다 보았다.

“그 목걸이의 주인은 자신의 이름이 티할라카드라고 했지요. 성은 듣지 못했소이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땐 말을 하기 정말 힘든 상황이었어서, 모두가 그의 유언을 들은 게 기적이라고 했을 정도였소.”

할신의 호흡이 잠시동안 멈추었다. 그의 가슴이, 놀라움도, 슬픔도, 경악도 아닌 무거운 정적으로 채워졌다. 전령은 할신의 낯빛을 살피며 그간 있었던 일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가 사는 마을은 고아원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작은 강이 흐르며 수 백년 묵은 커다란 고목이 몇 개 있는 평범한 농촌이었다.

마을 근처에는 그리 넓지 않은 숲이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숲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왔다고 했다. 그 근처를 지나가던 사악한 누군가가 마술이라도 부렸거나 저주를 내렸는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불온한 짐승의 새끼와 알들을 버리고 갔을 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숲으로 버섯과 약초를 캐러 간 마을 사람들이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점 사악해지기만 했던 그 작은 숲에서 놀이며, 거미며, 머리 셋 달린 이름을 알 수 없는 짐승들이 쏟아져 나왔고 이렇다 할 전투 능력을 갖춘 자가 거의 없었던 작은 농촌 사람들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숲에서 괴물들이 튀어나오고 사흘 째 되던 날, 얼굴에 커다란 문신을 하고 단정하게 굽이치는 흰 머리칼을 가진, 키가 큰 팔라딘 한 사람이 우연히 마을 근처를 지나가다가 괴물 소동에 뛰어 들었다는 것이다.

작은 마을이었지만 그곳에는 전쟁과 전염병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과 고아들이 꽤 있었고 그들은 확실히 갑자기 숲에서 나타난 괴물들의 공격에 취약한 이들이었다. 그들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 줄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이 없었기에 폭풍 속의 촛불보다도 더꺼지기 쉬운 목숨들이었다.

너무나 배가 고팠던 고아 어린이 둘이, - 그 둘은 남매였다 – 버려진 방앗간에서 밀가루나 버려진 빵 조각이라도 주워 보려 집 밖으로 나왔다가 변을 당할 뻔한 것을, 그 백발의 젊은 팔라딘이 구해준 것이다. 아마도, 그는 어린이들의 비명 소리를 듣자마자 멀리서부터 장검을 들고 달려온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한참동안 이야기를 듣던 할신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구석에 처박아 둔 담뱃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나의 할라드가 맞소. 티할라카드 알데룬이오. 티르의 팔라딘이지.”

아이들의 비명 소리에 앞뒤 안 가리고 뛰어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맥이 풀리는 기분이다. 그런 행동을 할 사람은 자신의 연인 밖에 없었다. 전령은 느릿느릿 담뱃대를 찾아 걸음을 옮기는 할신을 바라보며, 티할라카드는 아이 둘을 구했지만 괴물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고 했다. 겁에 질려 있던 마을 사람들조차 모두 농기구를 들고 뛰쳐나오게 할만큼, 팔라딘의 마지막 순간은 참혹하고 숭고했다고…….

할신은 방문객에게 양해를 구하고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지금 연인의 죽음을 전하는 방문객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의 담뱃대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묵묵하게 바라보던 연인의 모습이 눈 앞에 선했다. 무엇을 그리 보는 게요? 할신이 장난스럽게 물으면 수줍은 눈빛으로 심각하게 굳어있던 얼굴을 묘하게 무너뜨리던 청년.

마을 사람들이 달려 나갔을 땐 이미 팔라딘의 숨은 끊어지기 직전이었고, 전할 말이 있냐고 물었을 땐 자신의 이름과 할신의 이름을 언급했다고 했다. 그의 고아원과, 숲의 이름과, 드루이드 할신. 그리고 자신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있는 힘을 다해 뜯어내어 유언을 듣던 마을 사람의 손에 쥐어 주곤 영원히 눈을 감았단다.

드루이드 할신이 태운 담배 연기로 방 안이 천천히 채워진다. 그는 연인이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은 게 아니라 돌아올 수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담배 연기처럼 흐리고 가느다랗게 그 사실을 받아 들이고 있었다. 건네 받은 가죽 주머니와 피 묻은 목걸이를 말없이 만지작거리고 있는 할신을 보며, 잠시 머뭇거리던 방문객이 입을 연다.

“혹시 팔라딘 티할라카드의 마지막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소?”

“…….”

“그러니까, 어디를 어떻게 다쳤냐거나, 어떤 부상을 입었고 어떤 처치를 받았는지 같은 것 말요.”

담뱃대를 물고 있던 할신이 조용히 고개를 젓자, 방문객은 안도하는 듯 보였다. 아마 그들의 은인인 티할라카드의 유언을 전해 듣고 유품을 가질만한 사람이라면 아주 가까운 관계일테니 그의 마지막을 상세하게 듣고 싶어할거라고 생각했나보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괴물에게 당했다면 그의 시신도 온전하진 못했을 터, 이 충직한 전령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아마 그 사건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울 것이다.

“그대는 이미 내게 가장 필요한 일을 해주셨소. 혹시 티할라카드가 그 외에 다른 말을 하진 않았소?”

“그럴 여유는 없었소. 사실 우리는 그가 유품을 건네주고 유언을 남긴 것도 그의 고결함과 대단한 의지의 산물이라 생각하지요.”

담뱃불을 끈 할신이 방문객에게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한 후, 고아원에 손님용 방이 있으니 여독을 풀고 가라 권했지만 방문객은 고아원의 살림살이를 축내고 싶지도 않고 자신이 하루 빨리 돌아오길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다며 할신의 호의를 한사코 거절했다. 연인의 마지막을 전해준 방문객은 할신의 축복을 받으며 숲을 떠났다.

담뱃대에 담뱃잎을 한 번 더 채우고 다시 불을 붙였다. 그 날의 오후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손님을 만난 후 조금 멍해져 있는 할신을 두고 고아원의 동료들 몇몇이 걱정스럽다며 말을 걸었고 할신은 그들에게 티할라카드의 부고를 전했다.

 

나의 티할라카드가 죽었소. 손님은 그의 유품을 가져온 사람이었소. 나의 티할라카드가 죽었소…….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할신에게 동료들은 슬퍼하며 위로를 건넸지만 할신은 괜찮다고 대답했다. 어쨌든 그의 죽음을 이제라도 알았고, 그가 전한 유품도 받았으니 괜찮다고. 상황이 이보다 더 나쁠수도 있었다고 했다.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저녁을 먹이고, 평소처럼 곰으로 변해 놀아주기도 했다. 잠들기 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길 원하는 아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드루이드 동료 두 명이 들어와 할신에게서 아이들을 떼어 놓았다.

오늘 할신은 좀 생각할 것이 있을테니 우리 방해하지 말자.

할신은 굳이 그럴 필요 없다 했고 아이들도 투덜거렸지만 동료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순식간에 찾아온 밤의 고요 속에서 할신은 물을 끓였다. 찬장을 열어 몇 달 전에 말려 둔 카모마일 꽃잎을 꺼내 차로 우려낸 후, 의자에 앉아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 보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티할라카드를 보았던 날을 떠올렸다.

여느 때처럼 바쁜 아침이었고, 티할라카드의 새로운 순례길을 축복하며 전날 밤엔 울고 웃으며 사랑을 나누었다. 할신은 갓 구운 따끈한 빵과 삶은 달걀 네 개를 종이에 잘 싸서, 긴 여행을 할 연인에게 건네주고,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굳은 표정의 팔라딘은 절도 있는 태도로 음식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가, 이마에 닿는 드루이드의 입술을 느끼자 눈을 감는다.

할신은 티할라카드가 머뭇거리던 것을 기억한다. 그의 젊은 연인은 음식 꾸러미를 꽉 쥐고, 들고 있던 장검을 잠시 내려 놓더니 어색하게 할신을 잠시동안 끌어 안았다가 떨어졌다.

 

- ……할신.

- 왜 그러시오, 내 사랑.

- …….

 

젊은 팔라딘이 그의 성정만큼이나 맑고 푸른 눈으로 할신을 똑바로 바라 보았다. 그 때 할신은 짧은 헤어짐이 아쉬워 그런가보다 싶어 헛헛하게 웃었다. 티할라카드가 입고 있는 갑옷은 항상 차갑고 무겁고 검소했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을 보고만 있는 연인이 싱거워 할신은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장난스러운 입맞춤을 한 번 더 해주었다.

…… 이제 충분합니다. 이거면 됐어요, 할신.

몇 년 전의 일인데도 마치 어제처럼 선명했다. 할신은 이제 충분하다는, 연인의 한숨이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모든 것이 느리게만 흘러간다. 아마 할신이 보았다면, 날씨가 좋다고 기뻐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고함치며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사악한 짐승과 저주받은 것들로부터 벗어난 아이들이 어른들을 부르러 갔었나 보다. 쓰러져 있는 풀밭에서 익숙한 냄새가 난다. 나의 드루이드와 함께 맨발로 흙을 밟았던 때가 떠오른다. 점점 흐려지는 눈 앞에, 내 입과 코로부터 흘러나온 피가 천천히 작은 웅덩이를 만드는 게 보였다.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어쩌면, 추운 겨울의 도시 한복판에서 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더 나은 마지막인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힘겹게 나를 일으켜 세웠다. 울컥하고 피를 토했고 난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치유사를 불러오겠다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선량하고 딱한 사람들……. 맑은 봄날인데도 설원을 걸을 때보다 더 춥게 느껴진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따뜻한 품에 안겨 계속 피를 토하면서도 겨우 손을 뻗어 목으로 가져갔다. 목걸이를 뜯어내 내게 계속 말을 거는 마음씨 좋은 촌부에게 건네 준다. 드루이드 할신, 그의 고아원, 숲의 이름을 마치 주문처럼 되뇌이며 그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나의 유언을 듣던 사람은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또박또박 따라하며 자신이 제대로 듣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몸에서 힘이 점점 빠져 나간다.

괴물들을 죽이는 와중에도 거대한 참나무가 하나 보였더랬다. 나를 그 나무 아래에 묻어 주시오. 그것이, 이 마을이 내게 베풀어 줄 수 있는 최고의 관대함이며 가장 큰 선물이오. 내가 한 말들을 상대방이 알아들었을지 잘 모르겠다. 이제는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다. 눈꺼풀이 무겁다. 이 순간 귓가에 할신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내가 미쳐가는 게 아닌가 싶다. 그게 아니라면, 나의 영혼과 육체가 아반도르로 향하고 있는 중일지도.

눈 멀었으나 모든 것을 보는 나의 신을 위한 순례길은 항상 똑같았는데, 이번에는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왜 나는 할신과 보낸 마지막 아침에 그렇게나 망설였던가. 숲, 동료, 아이들은 내버려두고, 이번에는 나와 함께 떠나주면 안 되겠냐는 그 한마디를 차마 하지 못했지. 밤새도록 고민했으면서, 막상 내게 웃어주는 그의 두 눈을 보니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티르의 팔라딘 티할라카드 알데룬, 후회하는가? 나의 신이 내게 말을 거시는 건지, 꺼져가는 나의 영혼이 내게 말을 거는 건지도 모르겠다. 할신이 이런 나의 모습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가 곁에 있으면 좋겠고, 곁에 없어서 다행이다. 눈을 감지 말라, 잠들지 말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지금으로선, 둘 다 매우 어려운 주문이다.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요.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할신은 아주 오랜만에 여행길에 올랐다. 고아원에 남아있는 아이들은 이제 다섯이 채 못 되었고, 나머지 녀석들은 장성해서 각자 자신의 삶을 찾아 고아원을 떠나 버렸다. 그는 며칠 전에 드루이드 동료들에게 곧 장기여행을 떠나겠노라고 말했다. 할신이 고아원 운영을 시작하고 난 후, 아이들을 돌보면서 단 하루도 편안하게 쉰 적이 없다는 것을 아는 동료들은 흔쾌히 그의 여행을 받아 들였다.

그는 어느 날 오후에 피 묻은 목걸이를 들고 자신을 찾아왔던 낯선 이를 떠올리며, 그가 말했던 작은 마을을 향해 기약 없는 발걸음을 했다. 밤이슬을 맞으며 숲에서 자고, 사람들이 버리고 간 폐가에서도 생활하며 걷고 또 걸었다. 맑은 하늘을 올려다 보면 저것은 그대의 두 눈과 같고, 그 하늘에 구름이라도 끼면 그것은 그대의 머리칼과 같다.

드루이드는 고목과 강이 있다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작은 마을을 향해 몇 달을 걷고 뛰며 그가 평생 연인에 대해 생각했던 모든 시간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시간동안 티할라카드를 떠올렸다. 인간이 나고 죽는데에 순서란 없다해도 할신과 티할라카드 중 누군가가 먼저 죽는다면 그건 당연히 할신이어야 한다고, 너무 당연하게도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래서 할신은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티할라카드의 목걸이를 직접 들고와서 전해준 이의 말은 전혀 거짓이 아니었다. 할신의 고아원에서 그 작은 농촌 마을까지는 몇 달을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늙은 드루이드는 새삼,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신을 위해 어려운 걸음을 했던 중년 여성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을 구하다가 낯선 팔라딘이 죽은 날로부터,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한 전령이 할신을 방문한 날로부터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할신은 이 마을에 티할라카드를 아는 사람이 있긴 할까 싶었다. 인공물이랄 것이 별로 없는 작은 마을. 티할라카드는 어쩌다가 이 근처를 지나가게 되었나?

긴 여행은 정력적인 할신조차 지치게 만들었다. 그는 과거 전령이 말했던 작은 강을 찾았고 그곳에서 시원하고 깨끗한 물에 목욕을 했다. 소 두 마리가 있는 헛간을 발견하곤, 그 헛간의 주인 내외가 사는 집을 찾아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 준 인간 부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문 앞에 서 있는 거대한 엘프를 올려다 보더니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오래전에 이곳에서, 길고 흰 머리칼을 가진 팔라딘이 죽지 않았소?”

할신은 자신의 말이 바보같다고 생각했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할만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는 평소에 자신이 잘하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유머 감각이나 관대함과 친밀함을 이용한 화법을 완전히 잊어버린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자신을 경계해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더라도 할 말이 없겠다고 생각할 즈음, 꽤 연배가 있어 보이는 부부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들은 할신을 앞에 두고 자기들끼리 뭔가를 속닥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할신을 집 안으로 초대했다. 놀랍게도 부부는 티할라카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헌신적이고 용맹한 팔라딘이 구한 두 아이를, 자기들이 입양해서 키워 독립도 시켰다고 이야기하는 부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할신은 목이 탁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 집에서 약간의 요깃거리와 따뜻한 차를 대접 받은 후, 할신은 자신이 이 곳에 온 목적인 연인의 무덤에 대해 물어보았다. 부부는,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 알고 있다며 자기들이 직접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호의여서, 할신은 감사 인사를 하고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얼마나 걸었을까. 바로 저기가 그 팔라딘이 묻힌 곳이라며 부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을만큼 오래 되고 거대한 참나무가 서 있었다. 부부는 할신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주었고, 그는 그들의 배려에 감사를 표했다. 인적 드문 시골 마을에, 오랜 세월을 견뎌내며 홀로 서 있는 참나무를 보자 할신은 왠지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언젠가 잠자리에서 할라드에게 들려줬던 가족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 특히 그의 혈족들과 가족들은 전부 참나무 아래에 묻혀있다고, 자신도 숨이 끊어지면 그들과 함께 참나무 아래에 묻혀 아반도르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때 무뚝뚝한 그의 젊은 연인은 그저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로 그 이야기를 듣고는 할신의 손을 한 번 꼭 잡아 주었더랬다.

걸음을 옮겨 나무에 가까이 갈수록, 심장이 전에 없이 쿵쾅거린다. 이 나무 아래에 그의 연인이 묻혀 있으니, 이제 연인은 이 참나무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인간의 손에 의해 다듬어지지 않은 고목은 거칠고 단단했다. 할신은 나무 기둥에 손을 뻗어 꺼끌꺼끌한 껍질을 몇 번 쓰다듬다가, 조용히 자신의 이마를 댔다.

“……미안하오.”

맑은 날이었다. 주변에서는 바람 소리만 들렸다. 촌부들이 심어둔 곡식들이 익어가며, 바람결 따라 누웠다 일어나는 것처럼 춤추고 있었다. 그는 티할라카드가 눈을 감았던 날도 이렇게 아름다웠길 바랐다.

“내가……. 너무 늦었지요, 티할라카드.”

지친 드루이드의 몸에 무성한 참나무 이파리 사이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닿는다. 할신은 품에서 티할라카드의 끊어진 목걸이를 꺼내 손에 쥐고는 나무 아래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티할라카드 알데룬.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격정적이며 올곧았던 티르의 팔라딘이여. 나의 연인, 나의 사랑. 부디 평온하시오.

드루이드 할신은 그날 자신의 가슴 한구석에 작은 무덤을 만들었다. 애도할 시간은 아주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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