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일+피피] 더러운 손

발더게3 by 권태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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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스카님께서 맡겨주신 소설 커미션입니다. 

신청 감사합니다. 

<지옥에서 한 위저드의 범죄를 목격한 어느 캠비온의 증언>

 

전 평소처럼 아베르누스를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별 볼일 없는 하루였습니다. 예정된 전투도 없었고 괴롭힐 영혼도 없었죠. 우리 캠비온들에게 그런 지루한 날이 흔치 않다는 걸 여기 계신 모두가 알거라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제가 그 날을 아주 강렬하고 정확하게 기억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 동의하실 겁니다.

지옥의 거주민인 우리는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얼마 전 희망의 저택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에 대해 다들 들어 보셨겠죠. 그 일을 모르는 악마와 마족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저택의 주인인 라파엘이 비명횡사한 그 사건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가 있다면, 아마 이곳에 끌려온 지 얼마 안 된 얼뜨기 영혼이거나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일 겁니다.

네, 네. 저도 잘 압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분들 중에 라파엘에게 썩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당연히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그 화려한 저택에서 벌였던 연회의 향락은 다들 좋아하지 않았나요? 물론 거들먹거리는 태도와 멸시하는 눈빛으로 입맛이 달아나게 하는 재주는 있었지만 말이죠. 그래도 라파엘 그 친구가 목소리 하나는 참으로 훌륭하지 않았습니까? 인정할 건 해야 한다고 봅니다. 현학적이고 몹쓸 자기애에 빠져 있긴 했어도 아베르누스의 음유시인 라파엘이 만든 노래들은 꽤 아름답지 않았느냐, 이 말입니다.

흠, 야유하는 분들이 계시는군요. 좋아요. 라파엘이 아무런 재주도 없는 형편없는 악마였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저택에서 그런 식으로 불타 없어져도 되는 건 아니죠. 세상에,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지옥에서, 악마가, 불 타 죽었다니요! 정확히 말하면 폭발해서 터져 죽은 거라지만, 아무려면 어떤가요. 그는 그렇게 악마로서는 아주 모멸적이고 비참한 방식으로 소멸해 버렸고, 희망의 저택은 집주인을 죽인 자들에 의해 구석구석 유린 당하고 털리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더군요. 통탄할 노릇입니다.

악마 살해자들(Devil Slayers). 맞아요. 그들입니다. 곧 지옥의 아귀에 떨어질 운명이었던 한 티플링과 인간 위저드가 주축이 된 무뢰배들이었죠. 몇 명이었던가요?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고작 한줌도 안되는 지상 피조물들의 손에 라파엘과 그의 저택이 쑥대밭이 됐다고 믿고 싶진 않군요. 만약 그랬다면 제 일이 아니더라도 같은 지옥 거주자로서 굉장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제가 사적으로 목격했다는, 기괴한 범죄 이야기를 하던 중에 라파엘 사망 사건 이야기는 왜 하냐고요? 아주 명료하게 잘 짚어 주셨습니다.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거든요. 오늘따라 참으로 무료하다고 느끼면서, 어디 괴롭힐만한 임프나 저주받은 영혼이 없나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이 갈라졌습니다. 음, 어쩌면 땅이 갈라졌는지도 모르겠어요. 너무 놀란 나머지 날갯짓도 멈추고 허공에서 떨어질 뻔했지 뭡니까.

공간에 작은 균열이 생기더니 점점 커졌습니다. 그리고 곧 누군가 그걸 찢고 나오더군요. 실로 매우 이상하고 놀라운 광경이었죠. 왜냐하면 거기는 별 볼일 없는 레무어와 임프 몇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거든요. 지상에서든, 천상에서든, 하여간 지옥에 속하지 아니한 자들이 탐내어 훔쳐갈만한 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그런 아베르누스의 평범한 황무지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허공을 찢고 나온 자는 마치 정확하게 계산이라도 한 것처럼 여유롭게 한 지점에 떨어졌지요. 그가 사뿐히 내려앉은 지옥땅 바로 앞에는 레무어 하나가 외따로 서 있었습니다. 저는 허공에 떠서 눈을 의심하며 잠시 날갯짓을 하고 있었죠.

그곳에 있던 레무어들에게 별다른 특징이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천 수만의 레무어들 중 하나였을 뿐이에요. 레무어가 되기 전엔 이름이 있는 사람이었겠지만, 그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해주는 이는 여기엔 없으니까요. 기억해 줄 필요도 없고 말입니다. 저는 그곳에 레무어와 임프들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그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고나 할까요? 도대체 누가 거기에 레무어들을 둔 겁니까? 하긴, 황무지였으니 대단한 임무를 맡긴 건 아니었겠죠. 기껏해야 순찰이라거나, 경비 같은 일이었을 거예요.

허공에서 공간을 찢고 나온 이는 위저드였습니다. 공중에 생긴 균열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위브로 만들어진 구멍도 아니었어요. 정말 문자 그대로, 균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위저드는 그 균열을 마치 커튼을 걷듯이 걷어 올리고 뛰어 나오더군요. 제 집의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건너가듯, 자연스러운 동작이었습니다. 균열의 뒤편으로 슬쩍 보이던 공간이 뭐였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상에 가본 적이 있어야 말이죠.

어쨌든 한 손에 지팡이를 든 채로 지옥땅에 도착한 위저드는 전혀 망설임 없는 태도로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레무어를 향해 걸어 갔습니다. 당연히 레무어는 그 위저드를 공격했죠. 레무어들이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지옥에 와서 좋을 게 없고 와서는 안 되는 존재가 눈에 띄었을 때 아무런 거부감 없이 도륙하고 그 피와 살점을 이 땅의 일부로 만드는 일 말입니다.

공중에 떠서 상황을 지켜보던 저는 당연히 레무어가 위저드를 끝장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레무어가 하나도 아니었고요. 주변엔 임프들도 있었다고 말씀드렸죠? 침입자인 위저드가 도륙되는 건 시간 문제였습니다. 위저드는 상당히 험악한 인상의 사내였습니다. 캠비온인 제가 험악한 인상 운운하면 웃을 거라는 거 압니다. 벌써 웃는 분들 계시는데요. 그래요. 마음껏 웃고, 저를 비웃으시죠. 하지만 지옥에 침입한 위저드의 인상이 정말 나빴다는 걸 알아 주시길 바랍니다.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홀홀단신으로 지옥의 벽을 찢고 들어오는 인간의 영혼과 내면이라는 것이, 그리 부드럽고 말랑말랑하진 않을 겁니다.

흉물스러운 지팡이를 들고 지옥으로 기어 들어온 그 위저드는, 자신을 공격하는 레무어를 향해 몸을 잠시 기울이더니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그 정신 나간 위저드는 자기 앞의 레무어에게 무려 ‘이름’을 불러주고 있었답니다. 마치 레무어가 누군지 알아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죠. 상상이 되십니까? 정말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날갯짓 소리까지 느릿하게 죽여가며 귀로 똑똑히 들었다니까요.

싸구려 사랑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뭔가를 떠올린다면, 레무어가 자신의 이름을 알아 들어야겠지만 매우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다들 짐작하시다시피, 레무어가 자신을 보며 웃는 위저드를 가차없이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자비랄 게 없더군요.

하긴 아베르누스 구석에서 레무어가 인간 위저드 하나를 죽이는 것쯤은 대단한 일도 아니죠. 눈 앞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면 참 즐거웠겠습니다만, 위저드는 무슨 수를 썼는지 레무어의 공격을 한 대도 맞지 않더군요. 마치 우리 마족들은 잘 모르는 어떤 보호를 받고 있거나 신묘한 술책을 쓰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러더니 손짓 몇 번으로 레무어를 포박했습니다. 거기서부터 저는 조금 긴장했지요. 차원의 벽을 찢고 지옥으로 혼자 넘어온 것부터가 이미 제정신이 아닌 놈인데, 레무어를 포박했으니 그 다음은 뻔할테니까요. 전 흐물흐물 녹아 사라질 레무어를 기대하며 오랜만에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잔잔한 떨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눈 앞에서 펼쳐진 광경은 철저하게 기대를 배신하더군요. 위저드는 레무어를 포박하더니 무력화 시키고는 자신이 가져온 작은 주머니에 홀라당 넣어 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 와중에도 근처의 임프들과 다른 레무어들이 위저드를 공격하러 다가오고 있었고 실제로 공격을 한 녀석들도 있었지요. 그런데 위저드는 그곳에 자신과 자신이 주머니에 넣은 레무어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었어요. 굉장히 기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지금도 잘 이해가 안 됩니다. 행복에 겨워 웃고 있던 위저드가 갑자기 있는 힘껏 잔뜩 인상을 찌푸리더니, 지팡이를 높이 쳐들었어요. 그러자 불타는 지옥의 하늘이 열리고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태초의 홍수가 그런 광경이었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비가 내렸어요. 과장하지 말라고요? 직접 봤다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텐데 말입니다. 제가 본 광경에 동의할만한 건 역시 친애하는 라파엘 뿐인데 애석하게도 이 자리에 없군요.

그 자리에 있던 레무어들 – 그 미친 위저드가 자신의 주머니에 넣지 않은 나머지 레무어들 말이에요 – 과 작은 임프들은 전부 그 비를 맞았지요. 사방이 수증기로 가득했다니까요. 지옥에, 아베르누스 땅에 수증기라니 상상이 되십니까? 그런데 그 다음 순간 누가 배관을 막기라도 한 것처럼 비가 뚝 그쳤습니다. 그러고는 천국 같은 적막이 찾아왔죠. 저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무의식중에 아주 세차게 날갯짓을 하고 있었답니다. 저의 지옥 생활이 이제 80년째인데 이토록 불안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나 싶군요.

위저드는 자기 손에서 작은 불빛을 만들어 냈습니다. 아, 그래요. 그는 정말 말이 많았어요. 저도 떠들기라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캠비온인데 그 위저드에겐 비할 바가 못 됐습니다. 그는 자신의 품에 넣은 주머니를 향해 계속 말을 걸고 있었죠. 정말 기괴한 광경이었습니다. 마치 자신의 가슴, 심장과 대화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그러다가 말 걸기를 멈추면, 그 순간부터 재앙이 시작 됐어요. 그의 손바닥 위에 떠오른 작은 빛이 점점 커지더니 임프의 머리통만해졌다가, 나중엔 캠비온 하나만해졌죠.

……그것은 번개였습니다. 위저드는 자기 손 안에서 파직파직 소리가 나는 새하얀 번개를,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제 몸보다도 더 크게 만들었고 그걸 잠시 들여다 보다가 하늘로 고개를 들더군요. 그제야 저는 날고 있는 저의 그림자가 그 위저드의 시야에 들어갔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오, 다시 떠올리니 소름이 끼칩니다.

그 위저드 말이죠, 인간이 맞기는 했을까요? 만약에 제가 목격한 광경을 우리 지옥의 주민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 위저드와 그가 데려간 레무어가 바로 라파엘을 죽인 ‘악마 살해자들’이라는 진실을 알지 못했다면, 저는 그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자신의 손바닥 위에 거대한 번개 구체를 띄우고 하늘을 날고 있는 캠비온인 저와 눈을 마주쳤던 존재는 도무지 사람 같지 않았어요.

그는 홀홀단신으로 불타는 땅에 서서 지옥 피조물들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의 두 눈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눈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네요. 마치 그가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만들고 있었던 번개 구체처럼 말이죠. 난 나도 모르게 안돼, 그만, 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제 발 아래에 있던 모든 레무어와 임프들이 전부다 숯덩이가 되었습니다. 한 순간에,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요. 그들은 비명소리조차 내지 못했어요.

부끄럽지만 고백해야겠군요. 그 위저드가 공중에 떠 있던 목격자인 저를 죽일까 봐 정말 겁이 났습니다. 그렇게 많은 악의 피조물들이 한꺼번에 죽는 것은, 전투가 벌어졌을 때나 볼 수 있는 거죠. 그런데 그 수염난 위저드가, 그 잔혹한 악마 살해자가 공중에 떠서 날개를 펄럭거리고 있던 저를 쳐다보더니 자신의 오른쪽 검지를 입술 위에 대더군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듯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놀랍게도 마치 현혹이라도 당한 것마냥 입이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위저드는, 나타났을 때처럼 자취를 감췄어요. 자신이 만들어낸 균열로, 마치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듯 자연스럽게 넘어갔습니다. 그 광경을 다시 떠올려봐도, 정말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나 싶게 비현실적이네요. 위저드가 사라진 균열 주변, 제 발 아래에는 지옥 주민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습니다. 레무어 하나는 사라졌고요. 우리는 그렇게 지옥의 작은 자산 하나를 도둑 맞았고, 위저드에게 납치 당한 그 레무어는 결국 이 아베르누스에서 자신의 계약을 완료할 수 없게 된 겁니다.

참으로 극악무도하지 않습니까? 이 위저드는 마치 산책 나오듯 지옥으로 건너와서, 레무어를 훔치고 지옥의 피조물들을 살해했다고요. 다음 번은 누구 차례가 될지 모르죠. 처음엔 라파엘이었고, 두 번째는 레무어, 세 번째는 여기 서서 이 잔학한 범죄를 고발하는 저나 저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당신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대로 이 납치범을 그냥 놔둬야 합니까?

그러니 제가 이 자리를 빌어 여러분을 대표해서 묻겠습니다. 악마 살해자가 훔쳐간 지옥의 자산을 되찾아 오실 분 어디 없습니까?

 

*

 

피피, 나야. 집에 왔어. 많이 기다렸지? 미안해. 오늘은 학생들이 워낙 말을 많이 걸어서 말야. 너도 그렇고, 우리 벗들도 그렇고, 내게 항상 말이 많다고 했지만 오늘 시험 결과를 받고 내게 항의하던 아카데미의 학생들에 비하면 난 아주 점잖고 과묵한 게일 데카리오스 교수였어. 시험 성적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은 참새처럼 떠들고, 나는 인내심의 화신이 되어 그 모든 투정과 항의를 받아 줬다고.

환영 마법이 얼마나 재미있고 위대하며 낭만적인 것인지 열심히 설명하다가 목이 잠겼지. 이건 어쩌면 나의 불찰일지도 몰라.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난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잖아. 너는 처음엔 그런 나를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했다면서도 나중엔 즐겁다는 얼굴로 들어줬지. 사실 그거면 충분했어.

내 목이 잠겨서 쉰 소리가 나는 게 거슬렸는지, 그것도 아니면 아니면 그저 불쌍했는지 학생 하나가 꿀에 절인 허브를 병에 담아 들고 와서 건네더군. 차를 끓여 마시라고 했어. 붉은 머리에 주근깨가 있는 학생이었는데, 얼굴을 보니까 기억나더라. 내 수업을 정말 열심히 들어. 환영 마법에 관심이 많은가봐. 놀랍지 않나? 열심히 노력하면, 그 학기에 환영 마법을 사랑하는 학생을 한 둘 쯤은 정말로 만들 수가 있다니까. 이걸 다른 교수들과 조교들은 ‘기적’이라고 이야기하지. 하지만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내 사랑? 그들은 진짜 기적이 뭔지 몰라. 한 번도 기적을 겪어본 적 없지.

집에 오는 길에 무릎이 꽤 아프고 쑤시더군. 피피, 혹시 오늘 비가 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 꽤 서글픈 얘기지만, 난 이제 비가 오면 그 전날부터 알 수 있어. 물론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너는 싫어하겠지. 그렇게 몸이 아프면 하루쯤 휴강하라고, 차라리 눈에 띄는 곳에서 네 곁에 있으라고 얘기하겠지. 세상에, 네가 정말로 그렇게 말해주면 좋겠어. 그러면 나는 나의 예리한 지성과 환상적인 화술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환영 마법학 강의와, 내가 쓴 책과, 내가 내주는 과제를 기다리며 몸부림치는 학생들이 엄청나게 많다고 네게 과장해서 대답하는거야.

나는 종종 우리가 함께 했던 모험을 떠올리곤 해. 내가 틈에 끼어 있을 때 나를 붙잡았던 네 손바닥의 감촉 같은 것 말야.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이 이야기를 네게 한 적이 있었던가?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어. 네게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말을 하지 않았는지. 돌이켜 보면 난 네게 항상 뭔가 말했고, 너는 들었지만 그 중 의미있는 말은 몇 마디나 되었을까 싶네. 이미 했다고 착각하는 바람에 실제로는 하지 않은 말도 많을 거야. 난 네가 듣고 있지 않을 때조차 네게 말을 걸고 있었거든, 피피.

혹시 들은 적 있어? 네가 시끄럽다고, 목 나가겠다고, 그만 이야기해도 된다고 할 때조차 무시하고 그냥 떠들 걸 그랬어. 이제야 네게 말할 수 있게 됐네. 나는 차원의 틈에 끼어 죽음을 기다릴 때, 내 손을 붙잡아 준 너의 손이 내 손아귀에 쥐었던 그 어떤 것보다 따뜻하고 부드럽다고 느꼈어. 그런 손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를 믿고 맡겨도 되겠다 싶을만큼, 그렇게 좋은 손이었어. 물론 실제로 밖에 나가서 만난 너는 나를 경계하고 의심하고 눈을 부라렸지. 곱고 부드러운 손도 아니었어. 상처투성이에 거칠고 굳은 살이 배긴 지저분한 손바닥이었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단 말야. 피피, 너는 어땠어? 오셀 피파르, 너는 어땠느냐고.

내가 지금 간절하게 너의 대답을 구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아냐. 왜냐하면 이제 곧 네가 하는 말을 육성으로 들을 수 있을테니까.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묻고 싶겠지. 난 항상 너의 놀란 얼굴을 보는 게 좋았어. 네게서 표정을 읽어내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나는 할 수 있었잖아. 이제는 내가 너의 손을 잡아 끌어 당겨줄 차례야. 백 번 천 번이고 당겨줄거야. 아, 그래…. 드디어 네게 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군.

…나, 조만간 너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네 영혼이 마땅히 가야할 곳, 네 원래 몸에 보내주는 일에 무참하게 실패한 뒤로 사흘 정도 식사를 제대로 못했어. 의식의 세부적인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걸까? 이전에 내가 익히고 공부했던 주문이 아니라서 철자 하나가 틀렸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발음이 이상했을수도 있고. 어쨌든 그건 내 잘못이었어. 이럴 가능성을 미리 예측해서 대비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야. 망연자실하게 네 앞에 서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실시간으로 너의 영혼이 흐려지는 게 느껴졌지. 넌 내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어. 내가 그걸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절망하는 시간조차 내게는 사치라는 사실을 이제는 아주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너를 상실하는 일이 쉬워지지는 않더라.

첫 번째 계획이 실패하면 두 번째 계획으로 넘어가면 돼. 두 번째 계획이 실패하면 세 번째 계획으로 넘어가면 되지. 내가 몇 개의 계획을 세워뒀는지 넌 짐작조차 할 수 없을거야. 흠, 그래…. 살짝 귀띔을 해줄 순 있어. 너는 내가 하는 말들이 너무 어렵고 이상해서 하나도 못 알아 듣겠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언제나 감이 좋았잖아? 네가 갖고 있던 수많은 아름다움 중 아주 작은 부분이긴 했지만 말야.

나를 의심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면서도 내가 손을 내밀면 잡아주었지. 내가 너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잘 모르면서도 언제나 한 걸음 떼어 줬잖아. 내가 네게 무엇을 요구해도, 그게 아무리 불편하고 어려워도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천천히 나만을 바라보며 따라와 주었잖아. 그렇지 않았나, 피피?

드디어 육신을 구했어, 내 사랑. 난 내가 해낼거라 믿고 있었지. 선하고 용감하며 상처 받은 너의 영혼과 가장 잘 어울릴 육신을 구하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어. 나 혼자 하려면 할수 있긴 했지만 그러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어. 그래서 남의 도움을 약간 받긴 했지. 내가 이미 빚을 지운 상대들이니까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세상에 우리의 일을 구체적으로 아는 이는 아무도 없어. 우리와 함께 네더 브레인을 처치했던 동료들도, 나의 계획을 정확하게는 모를거야. 솔직히 그들에게 제대로 상의해 본 적도 없어. 너도 알다시피, 어떤 친구들은 상당히 꽉 막혔잖아? 신뢰하지 않는 건 아냐. 단지 방해가 된다면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나도 알 수 없어서 그랬어.

오, 이런. 피피. 설마 울고 있는거야? 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 넌 지금 레무어고, 우리가 함께 살았던 워터딥의 보금자리 지하실에서 꿈틀거리고 있군. 미안해. 나는 너를 자주 만져보곤 해. 그리고 그건 꽤 괜찮은 기분이야. 네가 나의 말을 전혀 알아 듣지 못한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어쨌든 이 끈적거리고 물컹물컹한 몸뚱아리 안에는 네가 있잖아. 혹시 알아? 내가 매일 검은 지팡이 아카데미에서의 일과를 마치고 헐레벌떡 이곳으로 뛰어와서 그날 있었던 일들을 이렇게 쏟아내고 있으면 네 영혼의 아주 작은 부분이 그걸 듣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내가 많은 것들을 읽고 보았고 또 사유했기 때문에 알고 있는 마법 지식들이 많이 있지만말야. 우리가 자주 말했던 것처럼, 세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들로 가득한 걸. 네가 다시 나의 품으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함께 그것들을 찾아 탐험을 시작할 수 있을거야. 소설을 쓰고 싶다는 이야기도 한 적이 있잖아. 내가 쓸 모험담의 주인공은 언제나 너야, 피피.

검은 지팡이 아카데미에서, 부활 의식에 관련된 책은 한 권도 빠짐없이 다 읽어 보았어. 약간 의구심이 드는 책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납득 되는 내용들이었고 도움이 됐지.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야. 비록 누덕누덕 기워진 상태이긴 했지만 난 너의 육신을 날려버린 거나 다름 없어. 스스로를 용서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지. 나의 품에 네가 돌아온 이후에 나를 원망하고 탓해도 이해할게. 그러니 제발 내게 돌아와 줘.

비교적 온전하고 상태가 좋은 육체를 구했어. 조만간에 이곳으로 배달 될거야. 내 사랑, 물론 내가 알던 너에 비하면 아름답지 않지만 상관 없어. 네가 어떤 육체 안에 들어있든지 그건 너잖아. 그 육체 안에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네가 있고, 그걸 내가 느낄수만 있다면 어떻게 되든 좋아. 솔직히 너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네 영혼이 이 안에 온전히 들어있기만 하다면 이 레무어 육체도 상관없을 정도야. 아까도 말했지? 난 이제 너를 만지는데에 익숙해졌다니까. 이런 말을 할 때 네가 돌려줄 법한 반응이 몇 가지 떠오르는군.

‘게일,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너 같은 녀석이 왜 나를 사랑하는거지? 가끔은 이 모든 게 거짓은 아닌지,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내가 아무리 설득하고 항변해도 믿지 않다가 결국에는 무너지며 내 말을 다 믿는다고 했잖아. 네가 가져본 것 중에 가장 좋은 게 나였다며. 이제는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네. 네가 그 말을 할 때마다 마음에 구멍이 하나 더 생기는 것처럼 아팠지만 동시에 행복했고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꽤나 추악하고 고상하지 못한 마음이지. 그래도 사실이야. 안도했어. 네가 가져본 것 중 가장 좋은 게 나여서.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너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남고 싶었어. 아마 곧 그렇게 될거야. 기대해도 좋아, 피피.

지옥에 침입해서 너를 훔쳐오는 건 나로서도 좀 두려운 일이었지만 큰 문제없이 성공했잖아. 내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곳에서 너를 돌보며 의식과 주문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하는 매 순간이 정말 행복했다니까?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우리 둘만의 신혼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말야. 검은 지팡이 아카데미에서 일을 하고 귀가해서 지하실로 이어진 계단을 천천히 하나씩 밟으며 내려오는 순간에 나는 항상 웃고 있어, 피피. 하루 중 가장 기쁘고 신나고 영혼이 충만해지는 시간이거든.

 

*


게일 데카리오스 교수는 공강 시간에 따사로운 햇빛을 맞으며 검은 지팡이 아카데미의 교정 구석에 구부정하게 앉아 있었다. 몇몇 학생들이 웃고 떠들며 걷다가 그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고 동료 교수들도 목례를 하며 지나갔다. 게일은 조금 전에 낯선 이가 쭈뼛거리며 자신에게 건네주고 간 빳빳한 봉투를 차마 다시 꺼내보지 못하고 외투의 주머니 안에 넣은 채로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그 봉투 안에는 짤막한 서신이 들어 있었다. 그의 집 지하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연인에게 가장 적당한 육신이 커다란 가방에 담겨 내일 집으로 배달될 거라는 암호문이었다. 중간에 그 서신이 사라지거나, 모르는 사이 누군가 훔쳐갈 것을 대비해서 굳이 암호를 만들어 쓰기로 한 건 잘한 결정이었다. 게일은 페이룬 최고의 상아탑 중 한 곳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서, 아주 평온한 얼굴로 금지된 의식의 첫 주문부터 마지막 주문까지를 다시 한 번 주워 섬기고 있었다.

아베르누스에서 연인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게일은 오른쪽 허벅지 옆에 두꺼운 마법서적 두 권을 놓아두고, 허물어지듯 벤치에 기대어 앉아 공간을 찢던 순간을 떠올렸다. 계산에 따르면 정확하게 바로 그 지점에 피피가 있어야 하는 게 맞았지만, 그가 이전에는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는 차원문 마법이었고 또 혼자서 지옥에 가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실패할 경우를 염두해야했다. 게다가 부활 의식에 사용할 피피의 시신을 완전히 잃어버린 뒤였으므로 지옥으로 향하는 게일의 정신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성공했다. 눈 앞에서 자신을 공격하는 레무어가 연인이라는 걸 알아본 순간 지옥이 떠나가라 웃었고, 그의 이름을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하게 불렀다. 피피, 보고 싶었어. 내가 다시 만날거라고 했잖아. 게일은 레무어를 작은 주머니에 접어 넣으면서 피피가 죽던 날을 떠올렸다.

그는 그런 식으로 죽어서는 안 됐다. 물론 거친 성정 가장 안쪽엔 워터딥의 치즈와 버터 조각보다 더 말랑말랑하고 잘 녹아 없어지는 다정함과 연민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죽을 위기에 처한 난민과 어린이를 구하다가 목숨을 잃고 그 길로 지옥에 끌려가 레무어가 되어 버리는 것.

피피가 악마와 계약을 했고 그 내용의 결말은 언제나 레무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게일은 단 하루도 이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지옥으로 끌려간 피피를 되찾아오는 생각. 아주 오랫동안 게일의 꿈엔 미스트라가 나왔다. 그게 아니면 가슴에 있던 네더릴 폭탄이 점점 커져서 얼음처럼 차갑고 심해처럼 깊은 시커먼 입마냥 게일 자신과 주변을 전부 삼켜버리곤 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미스트라도, 네더릴 폭탄도 꿈에 등장하지 않았고 대신 피피가 나왔다.

상처가 많은 연인은 게일의 꿈 속에서 죽고, 죽고, 또 죽었다. 어떤 때는 병에 걸려 죽었고, 어떤 때는 누군가를 구하다 죽었고 어떤 때는 자살을 했다. 벤치에 기대어 있던 게일은 멍하니 과거에 꾼 꿈을 생각하다가 어이가 없어져서 그만 혼자 웃고 말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폭탄을 터뜨릴 생각 따윈 말고 그저 살아 있어 달라고, 너를 만날 줄 알았으면 악마와 계약 따윈 하지 말 걸 그랬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욕설처럼 거칠게 진심을 내뱉던 피피가 게일의 꿈 속에서는 너무 쉽게 스스로 목숨을 끊곤 했다.

그렇게 꿈 속에서 죽고 나면 피피는 영혼 동전이 되기도 했고 레무어가 되기도 했고 캠비온이 되기도 했다. 그게 아니면 아예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거나 투명해졌다. 게일은 모든 최악의 상황을 그렇게 자신의 머릿속에서 이미 수없이 겪은 다음 지옥에 발을 들였다.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어서 피피를 품에 안고 돌아오기 전에 모든 목격자를 살해했다. 어차피 지옥의 피조물들이니까, 인간이 아니다. 한 때 인간이었을지는 몰라도 지금은 아니고, 그거면 충분했다.

살점이 타는 냄새는 지옥에 어울렸다. 게일은 여기 어딘가에 칼라크와 윌이 있을거라는 걸 알았지만 그들을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을 도와줄 거라는 확신도 없었다. 그의 피피는 이제 레무어였으니까. 목격자들을 전부 제거하고 하늘을 올려다 봤을 땐 한 캠비온이 날갯짓을 하며 떠 있다가 헐레벌떡 도망가는 게 보였다. 누군가에게 일러바치거나 보고 한다고 하더라도 그때쯤이면 자신은 지옥을 뜨고 없을테니 상관없겠다 싶었다.

게일은 코를 한 두 번 훌쩍였다. 쓰고 있던 안경이 코 밑으로 점점 흘러내려 시야가 흐려졌다. 그는 연인이 자신의 부활 의식을 반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피피는 의외로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가장 험악하고 무뚝뚝한 얼굴로 상냥한 짓을 하곤 했다. 게일은 그의 그런 면을 사랑했지만 동시에 그 성정이 언젠가 자신에게서 그를 빼앗아 갈 거라는 강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오셀 피파르를 만나기 이전에도 게일은 공부와 연구를 위한 유랑 생활을 하며 워락을 여러 명 만나 보았지만 그의 삶을 스쳐 지나갔던 워락들 중 오셀 같은 사람은 없었다. 후원자와 계약을 해서 그 힘을 끌어다 쓰는 워락들이 전부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게일이 마법 연구를 하다가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했다.

그들은 거대한 힘을 추구했고, 욕심이 많았으며 야망이 있었다. 때로는 바로 그런 탐욕 때문에 목숨을 잃거나 가장 소중한 것들을 빼앗겼지만 그래도 자신이 가질 수 있는 힘을 한 번 맛 본 이후로는 후원자의 존재와 계약에서 쉬이 빠져 나오기 힘들어 했다. 게일은 그들과 사적으로 친밀한 사이가 될 순 없었으나 마법 지식을 익히고 연구를 할 때는 잠깐의 동료로 꽤 괜찮았기 때문에 연락을 하며 지낸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피피는 어땠나? 그의 연인 피피는 야망이랄 게 없는 사람이었다. 머릿 속의 올챙이를 빼내고, 세계의 종말을 가져올 수도 있는 엘더 브레인을 막고자 야영지에서 생활하며 함께 여행을 할 때에도, 이 험상궂은 티플링 사내는 그리 대단한 걸 원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 게일은, 자신이 사랑하게 된 이 워락이 도대체 왜 악마와 계약을 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다가 피피에게는 이름도, 그 이름을 지어줄 부모도, 가족도, 친구도 없었고 그래서 ‘더이상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의 영혼을 걸고 하는 계약에 다시 없을 기회를 얻은 것마냥 기뻐하며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가 빌린 힘으로 의뢰를 받아 문제를 해결하고,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게 되어서야 겨우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는 잔혹한 이야기. 사정을 알게 된 이후에 게일은 한 번도 피피에게 왜 하필이면 악마와 계약을 했냐고 묻지 않았다.

‘어쩌면, 네가 악마와 계약을 한 게 차라리 가장 나을지도 몰라.’

게일은 배고파하는 연인에게 먹이기 위해 끓인 매콤한 스튜를 국자로 저으며 직접 이야기 한 적도 있다.

‘…그래도 내가 지옥에는 갈 수 있으니까 말야. 저 우주 밖의 어디로 가는 것보다는 지옥에 가는 게 훨씬 낫지. 검은 지팡이 아카데미에서 나와 함께 수학한 위저드들 중에선 지옥의 가장 허술한 부분에 구멍을 뚫어서 아예 문을 만들어 두고 내킬 때마다 방문할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도 있었거든. 그 사람들이 참 의미 없는 연구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 세상에 그렇게 자주 지옥을 왔다 갔다 해야 할 일이 뭐가 있겠어? -이제와서 보니 내가 그들의 연구를 도와줬던 이유가 있었던거지. 바로 너를 위해서였던 거야, 피피. 흠, 이제 이 스튜 간을 좀 봐주겠어? 약간 싱거운 것 같아서 말이지.’

피피는 종종 겁에 질린 소년처럼 굴었다. 조용히 게일에게 다가와서 넌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는 있냐고 물었다. 물론 그걸 몰라서 묻는 건 아니었다. 연인에게 이름을 준 악마는 게일의 예상보다 더 냉정하고 잔인했다. 피피가 선량하고 정의로운 일을 하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선 수업도 내팽개치고 현장으로 달려갔을 때 그의 영혼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피피를 잃었던 날을 계속 떠올리는 것은 정신건강에 확실히 좋지 않았다. 게일은 술이 늘었고 아무런 음식 없이 술병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타라는 투덜거리며 그의 건강에 우려를 표했지만, 침식이 문란해진 와중에도 그는 최대한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연인을 되살릴 방법을 찾고 있었기에 과거 미스트라에게 버림 받았을 때보다는 상태가 훨씬 나았다.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입에 담기도 싫은 첫 번째 의식의 실패 이후, 이제 두 번째 도전이다. 게일은 행복한 얼굴로 현관문을 열었다. 검은 지팡이 아카데미에서 피피가 기다리고 있는 집 지하까지는 걸어 다니기에 그리 녹록한 거리는 아니었다. 학교에서 너무 가까운 곳에 집을 얻으면 아무래도 교수들이나 학생들과 오며 가며 마주칠 일이 있을 것이었고 피피는 그것을 썩 반기지 않았더랬다.

게일이 연인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오랜 시간 이름 없이 살아온 이 거친 사내를, 세상이 알아줘야만 했다. 그의 오셀은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네더 브레인과의 전투가 끝나고 난 후 게일은 워터딥으로 돌아와 오래도록 피피를 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피피는 언제나 게일처럼 가진 게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을 줄 몰랐다고 고백했다. 그는 혼란스러워하거나 어리둥절해하고 멋쩍어하다가 결국엔 수줍어했지만, 게일은 항상 말하고 싶었다. 나를 살아있게 한 것은 너고, 나를 구원한 것도 너라고. 의구심으로 불타는 피피의 두 눈에 영원히 불타는 장작을 넣어 확신을 심어주고 싶었다.

아카데미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외투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 바스락거리는 종이의 감촉을 느꼈다. 두 번째로 시도해보는 부활 의식은 실패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고 그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질 지경이었다. 피피를 지옥에 빼앗기기 전 그와 함께 산책하던 그 길을, 이제는 혼자 걷고 있었다. 최근에는 날씨가 계속 나빠서 게일은 종종 지팡이를 들고 다녀야했다. 쑤시는 무릎이 무리하지 않게끔 무게를 분산시킬 용도였지만, 꽤 멋쟁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가 지팡이를 짚고 부지런히 집을 향해 걷고 있는데 스쳐 지나가던 동네 주민 한 둘이 그를 알아보고는 가볍게 인사를 했다. 그는 그제야, 학교 근처에 집을 구하지 않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역시, 피피는 선견지명이 있단 말야. 항상 자기가 너무 바보같다고 자책하곤 했지만, 그처럼 육감이 뛰어난 녀석은 만난 적이 없지.

지팡이를 흔들던 게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 그의 머리칼을 건드렸고 그는 마치 피피가 자신의 근처에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 들었다. 주변을 둘러 보니 인간처럼 생긴 건 자기 자신 뿐이어서, 그는 얼른 피피에게 달려가고 싶어졌다.

“피피, 나 왔어.”

현관문 옆에 지팡이를 세워 두고, 옷걸이에 외투를 걸어둔 다음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레무어인 피피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겠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내일, 늦어도 모레면 그가 자신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고 그러면 모든 게 예전처럼 완벽해질 거라는 사실을 알려줘야 했다. 게일은 잔뜩 들떠서 콧노래까지 부르며 거실과 부엌을 정리했다. 꼭꼭 잡가둔 지하실 문이 부서져 있는 광경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누군가 침입을 한 모양이다. 검은 지팡이 아카데미로 출근을 하기 전 매일 레무어인 피피에게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 지하실에서 올라오면 문에 마법을 걸어두곤 했다. 자물쇠를 한 번 채우고, 두 번 채운 뒤, 마법으로도 한 번 더 걸어 잠가서 그의 옛 동료인 아스타리온조차 열기 어려울 정도로 그렇게 매일 문단속을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문을 무참하게 부순 것이다. 침입자는 몰래 들어올 생각 따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적대적이고 폭력적으로 파괴의 증거를 남겨 놓았다. .

“……피피?”

내 사랑, 제발 대답 좀 해 줘. 게일은 레무어인 피피가 대답할 리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바로 어젯밤에도 피피가 도망칠 수 없게 그려둔 마법진 밖에서 밤새도록 그의 연인에게 말을 걸고, 질문하고, 그 질문에 혼자 대답했다. 부서진 문에서 떨어져 나온 나무 조각들이 발에 밟힌다. 피인지 그을음인지 모를 불길한 자국이, 질질 끌려가듯 지하로 향하는 계단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게일 데카리오스는 미친 듯이 날뛰는 심장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일부러 크게 외쳤다.

“피피? 나 왔어. 오늘은 정말 좋은 소식을 들고 왔다니까. 우리가 몇 달 동안 손꼽아 기다렸던 편지를 받았어. 나, 내려갈게. 네가 얼마나 기뻐할지 계속 떠올라서 강의 시간에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지 뭐야…….”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며, 게일은 지하실 전부를 불태울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레무어가 된 피피는 특정한 몇 몇 방법을 제외하면 딱히 죽일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당장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해도 얼마든지 부활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게일 입장에선 차라리 다행이었다.

침입자가 아직 지하실에 남아있는 거라면, 자신의 집에서 훔쳐갈 거라곤 마법 서적들과 오랫동안 숙성시킨 진귀한 술 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살아나가지 못하게 하면 될 일이다. 집의 지하실에 레무어를 감금 시켜두고 있는 검은 지팡이 아카데미의 교수라니, 이 일이 새어나가는 걸 반드시 막는 게 좋겠다.

유황 냄새.

지하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아무도 없었다. 오셀 피파르도 그곳에 없었다. 침입자들은 게일이 그려둔 마법진을 해제하고, 레무어인 피피를 살해했다. 이 방에는 함정도 많이 설치해 두었는데 그 중 몇 몇은 아예 망가지거나 해체 되어 있었다. 지하실 바닥은 홍수라도 난 것처럼 물이 흘러 넘쳤고 피피가 그 한가운데에서 흉측하게 녹아 내린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게일은 그 광경을 보자마자 그 물이 성수라는 사실을 알았다. 레무어인 피피가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는지, 그의 시신 근처에 여기저기 침입자의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오, 피피…….”

게일은 성수와 피와 고름이 뒤섞여 있는 지하실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허물어졌다. 그는 젤리처럼 녹아내린 레무어의 살점을 양손에 가득 쥐었다가, 그걸 다시 뭉치면 연인이 돌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미친 듯이 자신의 품으로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산을 뿌려두었는지 미치광이 위저드의 고운 양손바닥에서 연기가 났다. 게일은 아픈줄도 모르고 피피의 이름을 부르며 고통스럽게 울었지만 흐물거리는 레무어의 살점은 그의 손가락 사이로 무력하게 빠져나갔다.

“피피, 미안해……. 내가 네 곁에 있어야 했는데. 왜, 난, 네가 죽임 당할 때마다 네 곁에 없는걸까. 넌 모든 순간에 나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왜 나는, 너의 마지막을 두 번이나 지킬 수 없는거지? 난 정말 최악의 연인이야.”

울부짖던 게일은 문득 자신의 손바닥이 조금 녹아내렸다는 걸 깨닫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레무어의 살점과 고름과 피와 물이 묻은 옷을 입은 채로 느릿느릿 지하실의 계단을 올라갔다. 화상에 좋은 약을 찾아 손바닥에 천천히 개어 바르면서, 어쩌면 침입자가 누구인지 찾아낼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유황 냄새와 피 냄새가 나는 더러운 옷을 벗고, 위스키를 따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성수에 죽었으니 이로서 그가 시도하려고 했던 부활 의식은 공중 분해되었다. 레무어의 몸뚱이가 사라져버린 것뿐만 아니라 피피의 영혼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차근차근 공들여 쌓아둔 탑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발로 차서 무너뜨렸다. 게일 데카리오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불청객을 반드시 찾아내겠다고 마음 먹었다. 10년이 걸리고 20년이 걸려도 상관 없다.

숙성시킨 위스키의 알콜이 뇌세포를 씻어내리며 소독하는 동안 게일은 세 번째 의식을 떠올렸다. 망자를 소생시키기 위해 필요한 건 멀쩡한 시체 1000구 였다. 대신 그 외의 어떤 것도 필요치 않았다. 심지어 죽은 자의 영혼도 시신도 필요 없는 의식이라 했다. 죽은 자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고 말을 섞은 적도 없으며 서로의 존재 자체를 전혀 알 수 없었던, 순수하고 무결하며 무지한 시신이 1000구 필요했다.

다급한 마음에 음료처럼 삼켜버린 위스키가 뒤늦게 식도와 위장을 씁쓸하게 태웠다. 그는 예전에 가슴에 네더릴 폭탄을 품은 채로 만났던 셀루네의 클레릭 하나를 떠올렸다. 그 클레릭의 아버지는, 자신의 죽은 자식을 부활시키기 위해 멀쩡한 시체를 몇 구나 파헤쳐서 망가뜨렸을까? 어떤 불경한 행위를 했길래 죽은 자를 그렇게 완벽하고 깨끗하게 부활시킬 수 있었던 걸까? 죽은 자들의 신, 머큘의 선택 받은 자였던 그를 죽인 게 후회된 유일한 순간이었다. 어쩌면 이미 땅에 묻혀 있는 시체만 가지고는 그렇게 온전하게 되돌리는 것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잔에 조금 남아있던 술을 마저 마신 게일은 손에 붕대를 감으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랑해, 피피.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너는 나를 증오하게 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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