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타리온+샤테이엘]

발더게3 by 권태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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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참(거장)님께 써 드리기로 했던 글

너무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초대받은 불청객 Welcome Uninvited

 

행운을 빌어주면 좋겠지만,

솔직하게 말해볼까?

나는 네가 절규하며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I would say good luck out there, but honestly?

I hope you die screaming.

 

롤쓰의 클레릭인 샤테이엘은 엘더브레인이 네더브레인으로 진화하던 절망적인 순간에 바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심한 두려움에 떨면서도 한걸음씩 내디뎌 부상을 입은 동료들을 치유했고, 깊은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면서도 장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마침내 야욕으로 가득차 있던 네더브레인이 허망하게 패배했을 때, 머릿 속에서 꿈틀거리던 올챙이가 사라지는 걸 느끼며 그는 단 한 사람만을 떠올렸다.

아스타리온.

치열한 전투로 엉망진창이 된 사람들이 부둣가에 우두커니 서서 네더브레인이 폭발해 수장된 시커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장검을 검집에 넣는 것도 잊은 채 황망히 수평선을 응시하는 그에게 동료들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모두가 한 사람을, 아니 한 뱀파이어 스폰을 떠올렸지만 진절머리난다는 듯 작은 소지품 하나까지 전부다 야영지에 버려두고 사라진 과거의 동료를 그 순간에 언급할 수는 없었다.

그는, 샤테이엘이 전쟁을 끝내고 종말을 막은 이 영광의 순간에 태양을 잃었다. 샤테이엘은 자신을 떠난 연인이 얼마나 간절하게 태양을 갈구했고 그림자로 돌아가기 싫어 했는지를 떠올렸다. 언젠가 발더스 게이트의 한 허름한 여인숙에서, 아스타리온이 자신의 형제 중 하나를 붙잡아 햇빛으로 끌고 갔을 때 살이 타들어가는 걸 보며 뱀파이어가 흐느끼던 걸 기억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무사히 그늘을 찾아 몸을 숨겼을까? 자조적으로 이야기하던 하수구에서 들끓는 쥐떼 사이를 헤매고 있는 건 아닐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머릿속에서 올챙이가 빠져나가는 걸 느낀 그 순간부터 그가 자신을 더욱 맹렬하게 증오할 거라는 사실이었다. 샤테이엘은 그만 장검을 바닥에 떨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말았다.

롤쓰는 길 잃은 그의 말없는 망나니 자식을 버리지는 않으신 모양이다. 하긴, 샤테이엘은 롤쓰를 섬기는 클레릭으로서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을 수많은 일을 해왔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거미여신의 이름을 높이고 즐겁게 하였기에 롤쓰는 가여운 샤테이엘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저 놓아두셨다.

 

네더브레인과의 전투가 끝나고 30여년이 흘렀다. 직접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그 난리통을 겪고 살아남은 자들 중 상당수는 땅에 묻혔고,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는 자들의 기억도 차츰 흐릿해졌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더라? 갑자기 하늘에 함선이 나타났었던가? 눈 앞에서 웃고 떠들던 이웃이 주홍빛 안광을 뿜는 일리시드로 변했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를 잃고 비통해하면서도 승리를 기뻐했는지, 종말이 오지 않았음을 행복해했는지 이제는 바드들의 입에서나 들을 수 있었다.

네더브레인과의 전투가 끝난 후 모든 게 순식간에 회복되기 시작했다. 발더스 게이트에 가족이 있는 자헤이라는 도시를 복구하겠다 하였고 동료들 중 몇몇은 그런 그를 돕느라 도시에 남았다. 샤테이엘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고향을 등진 그는 어디에서나 이방인이었고 그 사실은 세상을 구한 영웅이 되었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는 책임져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뱀파이어 스폰 7천명.

이들은 샤테이엘의 책임인가? 내성적인 롤쓰의 클레릭은 그의 연인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7천명의 목숨을 그에게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잠깐 생각했을만큼. 그는 아스타리온과 함께 여행을 하는 내내 그 뜻을 거슬러 본 적도, 대놓고 싫은 소리를 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에 그는 마음을 바꿨다. 연인을 배신한 것이다. 샤테이엘은 아스타리온이 분노할 거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런 식으로 자신을 저주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질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아스타리온의 형제들 중에선 검은 미사 의식의 제물로 바쳐져 묶여 있는 동안 의식불명인 자도 있었고, 깨어 있었어도 끊임없이 벌어지는 전투와 그 속에서 난무하는 굉음, 비명 때문에 샤테이엘 일행과 카사도어 사이에 정확히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무력한 카사도어가 관에서 끌려 나오고 난 이후, 아스타리온과 샤테이엘이 굉장히 심하게 대립했고 분명 모두를 죽일 것처럼 보였던 아스타리온이 카사도어를 죽이자마자 사라졌다는 것 뿐이었다.

……어쨌든 롤쓰의 클레릭은 7천명의 은인이었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가 그에게 감사했다. 샤테이엘은 아스타리온이 버려두고 간 짐들을 챙기면서, 역시 그의 연인이 남겨두고 간 헐벗고 굶주린 스폰들을 하나 하나 눈에 담았다. 드로우는 자신이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던, 그래서 뛰쳐나올 수 밖에 없었던 어두운 고향으로 그들을 인도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사지로 걸어들어가는 기분이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칠흑같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그곳을 가장 잘 아는 자신이 선두에 서면, 길을 잃을 위험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샤테이엘은 스폰들 중 대다수가 언더다크에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런 끔찍한 곳에 그들을 가둬둔 채로 버려두고 갈 수는 없었다.

언더다크로 가는 도중에 많은 스폰이 사라졌다. 죽거나 납치되고 실종됐다. 납치되거나 실종된 이들도 결국엔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샤테이엘을 원망하진 않았다. 자기들끼리 의견 대립을 하고 분위기가 험악해질 때는 종종 있었지만, 얼굴에 진흙과 포자를 잔뜩 묻히고 헝클어진 머리칼로 롤쓰의 클레릭이 달려오면 다들 적당히 싸움을 멈추곤 입을 다물었다.

언더다크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이들 중, 억세게 운이 좋거나 아주 튼튼한 이들만이 살아남았고 그들이 그 땅을 자신의 울타리라고 여기게 되기까지 수십년이 걸렸다. 샤테이엘은 스폰들에게 더이상 자기가 필요없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다시 언더다크를 떠날 채비를 했다. 아스타리온의 형제들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거르 족의 아이들도 내심 그가 떠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지만, 차마 가지 말라고 말을 하진 못했다.

전 연인의 형제들 중 한 둘은 어떻게든 아스타리온에게 소식을 전해 보려고 여기저기 수소문하는 것 같았지만 아스타리온은 수십년간 행방이 묘연했다. 그들은 아스타리온이 죽었다고 생각했으나 샤테이엘 앞에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샤테이엘은 뱀파이어 스폰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저 눈치만으로도 알 수 있었고, 그런 추측을 애써 부정하고 싶었음에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선 그게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을 갖고 있었다.

언더다크를 떠나는 것은 이것으로 두 번째다. 샤테이엘은 한 명의 드로우가 고향을 두 번이나 등질 수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이제는 정말로 혼자다. 연약한 드로우의 피부를 햇빛으로부터 보호해줄만한 두건과 망토는 이미 준비해두었다. 언더다크에서 지상으로 다시 올라온 뒤, 이제는 수백명 정도 밖에 남지 않은 뱀파이어 스폰들이 지극정성으로 마련해준 간식을 조금씩 맛보았다. 버섯을 찌고 포자를 모아 발효시켜 만든 작은 빵이나 파이 따위였는데, 예의상으로라도 좋다고 말하기 어려울만큼 형편없는 맛이었다.

샤테이엘은 커다랗고 평평한 그늘진 바위 위에 앉아서, 선물 받은 파이를 작게 오물거리며 땀을 닦았다. 환경이 환경인지라 언더다크의 음식은 ‘지상인’의 기준으로 도저히 맛있다고 할 수 없는 것들이었으나 큰 상관은 없었다.

그는 애초에 언더다크 출신이었고, 처음으로 고향을 등지기 전까진 비슷한 음식을 먹으며 그리 유쾌하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래도 그 때는 이 정도로 맛이 없진 않았는데, 어쩌면 그에게 호의를 베풀고 싶었던 이들이 뱀파이어 스폰들이라 그런가 싶었다. 피, 그리고 약간의 술만 마실 수 있는 뱀파이어들의 미각은 굳이 예민하고 좋을 필요가 없었다.

태양이 떠 있었지만 뜨거운 날씨는 아니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간식을 다 먹은 후 다시금 짐을 챙겨 발걸음을 옮겼다. 동쪽으로 나 있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한없이 걷는다. 따스한 햇살과 그의 신발 밑창에 아주 작은 자갈들이 밟히는 소리, 발바닥에 닿는 울퉁불퉁하고 마른 땅의 감각.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새소리와, 이따금씩 그가 걷는 길을 방해하려는 듯 이쪽에서 저쪽으로 유유히 몸을 구불거리며 지나가는 뱀까지.

‘자기, 무슨 생각해?’

 

노틸로이드가 추락한 이후 그 속에서 생존한 사람들을 동료로 만들었을 때, 첫눈에 샤테이엘을 사로잡았던 창백한 뱀파이어는 자주 그렇게 물었다. 처음에는 불안해하며 물었고, 나중에는 정말로 궁금해했다. 지금 혼자 걷고 있는 것과 비슷한 길을, 동료들과 함께 참 많이도 걸어다녔고, 감각이 예민해 함정을 잘 찾아내는 그의 창백한 연인이 대부분 앞장서곤 했다.

샤테이엘은 연인의 뒷모습을 기억했다. 그들은 짧은 시간동안 참으로 많은 걸 나누었는데, 이제와서 자신의 손으로 떠나보낸 연인을 떠올려봐야 기억나는 건 그 곱슬곱슬한 머리칼과 다부진 어깨, 그리고 자신이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며 뒤를 쳐다 보느라 살짝 틀어진 턱선 뿐이라는 게 어처구니 없을 정도였다.

그는 분명 아름다웠고 어느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는 넘치는 생명력이야말로 그 아름다움의 끝이었는데, 얼굴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발더스 게이트에 갔을 때 화공이라도 찾아 그의 얼굴을 남겨둘 걸 그랬나. 하지만 샤테이엘은 그들의 이별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네가 절규하며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서로 속삭였던 사랑의 밀어들이 있는데도 샤테이엘의 고막에 각인된 건 분노로 가득차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내뱉은 저주같은 말 뿐이다. 차라리 악감정이 들끓어 욕을 한 거라면 좋았을텐데, 그 깊은 절망과 분노 속에 꼭꼭 감추어진 배신감과 슬픔 때문에 방황하는 롤쓰의 클레릭은 밤잠을 설쳤다.

아스타리온이 그 순간에 커다란 배신감과 슬픔을 느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그들의 뇌에 박혀 있던 올챙이들이 공명을 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 고독한 뱀파이어 스폰과 유일하게 깊은 유대를 가진 게 자신 뿐이었기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샤테이엘은 자신이 엿본 아스타리온의 배신감과 슬픔이 진짜라는 걸 알았다. 그건, 그냥 갓 알에서 깨어난 거북이가 바다의 방향을 아는 것처럼, 들으면 바로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에게 안 된다고 말했다면 달라졌을까? 검은 미사의 존재를 알게된 순간. 자신이 제물로 바쳐질 거라는 사실을 목도한 아스타리온이 의식을 빼앗겠다며 도와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건 아무래도 꺼림칙하다고 말렸어야 했을까? 하지만 당장 라파엘에게서 검은 미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그날 밤에도 아스타리온은 악몽을 꾸며 괴로워했다.

게다가 샤테이엘은 롤쓰 드로우 사회에서 뛰쳐 나오긴 했어도, 여전히 드로우였다. 그는 아스타리온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나머지 형제들을 제물로 쓸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해 큰 반감을 갖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연인이 평안을 찾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 방법이 복수 뿐이라면, 복수도 괜찮았고, 형제들에게서 목숨의 위협을 느끼거나 받은 적이 있다면 그들을 죽일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언더다크에서는 이미 흔히 일어나는 일들 아닌가. 당연히 자신은 끝까지 아스타리온의 편에 설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래야만 했다.

혼자 하는 여행은 오랜만이었지만 생각보다 금방 익숙해졌다.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며 적당히 숨어 지내고, 클레릭의 치유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받은 약간의 음식이나 보수로 생활을 이어가는 일. 한참동안 길을 걷다가 술집이나 여관이 나오면 여독을 풀고, 아침이 밝으면 다시 길을 떠나 걷는다. 클레릭의 축복이 필요한 사람에게 축복을 내리고 – 그 중엔 당연히 롤쓰의 축복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 다시 문을 나섰다.

묵을 곳이 없을 땐, 노틸로이드에서 추락한 후 한동안 그랬던 것처럼 혼자 야영을 했고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아 야영조차 불가능할 땐 염치불고하고 창문에 불이 켜진 집을 찾아 문을 두드렸다. 외딴 마을일수록 낯선 이를 경계했지만, 비가 오고 천둥이 치는 날씨에 자신들의 집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후드를 뒤집어 쓴 클레릭이라는 걸 알아차리면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을 베풀어주곤 했다.

마땅한 손님 방 조차 없는 낡고 허름한 집에 들어서면, 마른 지푸라기들이 쌓여 있는 헛간에서라도 잠을 청해야했다. 조금 망설이던 샤테이엘은 등에 메고 있던 장검을 풀어 옆에 세워두지 않고 끌어 안았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나 은은한 말똥 냄새가 날 때도 있었지만, 뽀송하게 마른 깨끗한 짚더미 위에 눕는 순간엔 모든 게 괜찮아졌다.

굵은 빗방울이 지붕 위로 떨어지며 내는 소리가 꽤 요란하고, 먼 곳에서 하늘이 갈라지고 있다. 축축하게 내려앉는 공기의 비냄새 때문에 코끝이 싸늘해졌다. 한 번 코를 훌쩍인 샤테이엘은 드로우식 명상에 빠져들기 전에 자신의 낡은 장검집을 품에 안고 눈을 깜박거렸다. 그에게 외로움이란 피에 새겨진 것이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는데,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처럼 가끔 이유없이 텅 빈 곳에 던져진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안아도 도저히 따뜻해지지 않던 연인은 자신이 먹이던 피를 통해서만 겨우 미지근해지곤 했다.

끔찍한 악몽 – 아마도 카사도어가 나오는 게 분명한 – 을 꾸면서 식은땀을 많이 흘리면 저녁 내내 흡혈로 겨우 올려놓은 체온이 또 떨어질까 싶어 연인의 땀을 말없이 닦아 주었다. 샤테이엘은 뒤척거리며 과거를 떠올리다가 무의식중에 손끝을 목덜미에 가져갔다. 거울을 보진 않았지만 물결치는 긴 머리칼에 가려진 작은 흉터가 분명히 존재했다.

아스타리온이 마지막으로 피를 마신 것도 수십년이나 지났는데, 놀랍게도 그가 남긴 작은 흉터는 사라지지 않았다. 잃어버린 소중한 물건을 찾듯이, 샤테이엘은 굳은살이 배긴 손가락을 조심스레 흉터 위에서 더듬거렸다. 200여 년간 굶주렸다는 연인에게 무엇이든 주고 싶은 마음에, 거의 매일 흡혈을 제안했던 나날이 떠올랐다. 아스타리온은 때로는 망설였고, 때로는 사냥 짐승처럼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조급하게 샤테이엘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 넣을 때조차, 최대한 상처를 작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샤테이엘은 자신이 클레릭이니, 아스타리온의 흡혈로 인해 생기는 빈혈은 쉬이 치유할 수 있어 많이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으나 상당량의 혈액을 잃는 일이 매일 반복되자 어느 순간부터는 치유 마법으로도 예전처럼 빠르게 회복되지 않기 시작했다. 아스타리온은 샤테이엘의 제안을 거절하기 시작했다.

- 내가 꼭 지성체의 피만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잖아, 샤티.

- …하지만 내가 곁에 있는데 굳이 네가 동물의 피를 마실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

- 너를 봐. 거울을 가지고 다니길 잘했네. 옳지, 한 번 잘 봐. 네 예쁜 눈 아래가 거뭇해진 걸 한 번 보라고.

- …….

 

뒤에서 끌어 안으며 자신이 들고 다니던 손거울로 얼굴을 비춰주던 게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누워서 목덜미를 만지던 샤테이엘은 모든 동작을 멈추고 몸을 움츠렸다. 정작 자신의 얼굴은 거울에 비치지도 않는데 참 끈질기게도 거울을 들고 다니던 사람이었다. 주변에 동료들이 없을 땐 샤테이엘 곁에 서서 둘의 얼굴을 같이 거울에 비춰보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귓가에서 속살거리던 낮은 목소리가 떠오르자 너무나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세상 어딘가에 그 뱀파이어가 살아있을 거라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분명히 죽었을 거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샤테이엘은 드디어 자신의 정신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 버린 건 아닌가 싶어 두려워졌다.

짧디 짧은 명상에서 깨어난 김에 밤을 지낸 어수선한 헛간을 좀 정리하기로 마음 먹었다. 굽이치는 긴 머리카락 중간중간에 지푸라기가 붙어 있어 그걸 떼어내는 것만도 큰일이었다. 처음엔 샤테이엘이 드로우라 잔뜩 경계했던 집주인 부부는, 낯선 손님을 깨우는 김에 양젖을 한 잔 주러 왔다가 깔끔해진 헛간을 보고는 낯빛이 밝아졌다.

샤테이엘은 이런 종류의 일에 잔뼈가 굵었다. 이제는 누구에게 하는 건지도 모를 기도를 올리고, 근처의 우물에서 길어온 물을 받아 얼굴과 손, 목을 씻은 다음 말간 얼굴로 잠시 나무에 기대 여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그를 재워준 나이든 농부가 작은 보따리를 들고 왔다. 그 안에는 직접 만든 오트밀 쿠키 몇 개와 햄 한 덩어리가 있었다.

“부탁도 안 했는데 헛간을 청소해준 사례요.”

“…이런 걸 받으려고 한 일은 아니야.”

“클레릭이니 어련하겠나. 그래도 행색을 보아하니 여행중인듯한데 걷다가 기운 빠지면 큰일 아니오. 별 것 아니지만 드시게.”

“…….”

이런 종류의 친절엔 익숙해질 듯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언더다크의 드로우들 사이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자신에게는 차라리 이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두 손으로 보따리를 받아 들고는 공손히 인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계속 걸을 생각이라면, 적어도 사나흘 정도는 노숙을 할 각오를 해야할 거요. 해가 지기 전에 미리 잠자리를 잘 봐두쇼.”

샤테이엘은 주의 깊게 농부의 조언을 들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도 그 정도 걸으면 꽤 큰 마을이 하나 나올텐데, T 라는 곳이오. 뜨내기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지. 무법지대라는 말도 있지만 그 정도는 아닐거요. 몇 달 전에 가 봤는데 약간 흉흉하긴 했어.”

그는 샤테이엘이 등에 메고 있던 장검을 흘끔거리곤 어깨를 으쓱했다.

“보아하니 내 키보다 큰 장검을 들고 다니는 클레릭이라면 별 문제 없긴 하겠수다. 그곳엔 여관도 많고 식당도 많을테니, 그때까지만 잘 버텨보시오. 해가 빨리 지고 날씨는 나쁜 곳이오.”

 

*

 

친절한 농부가 건네준 햄과 쿠키를 다 먹어 봇짐을 버려야 할 때쯤, 그가 알려주었던 T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은 샤테이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마을이었고, 정말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다. 사람이 많고 다들 분주해 보였으나 어느 누구도 남에게 큰 관심이 없었고 모두가 평균보다 방어적이고 적대적이었다. 농부의 말처럼 마을 초입부터 배를 채울 곳과 몸을 뉘일 곳이 참 많았지만, 샤테이엘은 마을을 좀 더 둘러보기로 했다.

거리는 꽤 포장이 잘 되어 있었음에도 지저분했고, 군데군데 씻기다 만 핏자국이나 흙발자국도 많이 보였다.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클레릭은 몸을 움츠리며 장검집을 붙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예전에도 한동안 이런 곳에서 지내본 적이 있다. 무언가 자극을 찾아서, 금을 찾아서, 혹은 사랑과 원한을 찾아서 사람들은 돌고 돌아 이런 곳까지 흘러들기 마련이었고 운이 없으면 눈에 뵈는 게 없는 이들과 엮이기 십상이었다. 물론 샤테이엘이 드로우라는 걸 알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슬슬 피하기도 했지만, 드로우라는 종족에 대한 세간의 편견은 모두에게 똑같은 건 아니었던지라 성가신 일에 휘말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어떤 마을이든 그 마을의 초입에 있는 장소에 사람이 가장 많은 관계로, 샤테이엘은 남북으로 구역이 나뉘어진 T 마을을 대충 다 둘러본 이후에야 비교적 한산한 마을 남부의 여관을 골랐다. 페이룬 공용어로 <살구빛 토끼 발바닥>이라는 낡은 철제 간판이 붙어 있는 여관의 문에는 커다란 토끼 발바닥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오래된 여관이라 그런지 일부가 지워져 간판의 이름이 아니라면 토끼 발바닥 문양이라는 걸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도 샤테이엘이 정찰을 해 볼 겸 돌아다녔던 여관들 중에서는 그나마 1층 로비가 가장 깔끔하게 청소된 곳이었고 여관에 묵는 투숙객들의 개인정보를 구체적으로 요구하지 않음에도 꽤 안전하고 정돈된 느낌을 주었다.

 

※ 외상 사절 ※

※ 숙박요금에는 식사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

※ 객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외부에서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

 

여관의 카운터 앞에 붙여둔 작은 칠판에 분필로 눌러 쓴 것처럼 적혀 있는 마지막 안내 문구 때문에 괜찮은 걸까 싶긴 했지만 그래도 다른 곳들의 위생 상태가 너무 불결해 보여서 샤테이엘은 이곳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적어도 객실을 들여다 보았을 때 침대에 빈대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해질녘 마을 입구에 도착을 했는데,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시간을 너무 써버린 지라 벌써 자정에 가까워졌다. 샤테이엘은 눈을 내리깔고 약간 지친 얼굴로 카운터 앞에 섰다. 활달한 하프오크 여성인 여관 주인은,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로브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 쓴 샤테이엘을 흘끔 보다가 말을 걸었다.

“실례지만 후드 잠깐 내려서 얼굴 좀 보여 주겠어요?”

“…왜지?”

“이목구비를 조목조목 뜯어볼 생각인 건 아니고요. 여기가 호화로운 곳은 아니어도 주인인 이상 묵는 손님들한테 눈도장은 찍거든요. 필요한 게 있으면 구해다 주고 마련해 줘야 하는데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편의를 제공하는 건 좀 어렵죠?”

샤테이엘은 조용히 머리에 뒤집어 쓰고 있던 후드를 뒤로 젖혔다. 여관주인은 흘러 넘치는 그의 긴 머리칼과 새하얀 속눈썹에 약간 놀란 듯 했지만, 더 말을 얹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드로우 클레릭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머리칼을 정리한 뒤 다시 후드를 뒤집어 썼다. 여관에서 꼭 지켜야 할 규칙들은 특별한 게 없었고 그리 엄격한 편도 아니었다. 여관 주인은 샤테이엘에게 혼자 묵을건지, 동반 투숙객이 있는지, 반려동물이 있는지를 물었고 정말 놀랍게도 그 순간 그는 스크래치를 떠올렸다.

발더스 게이트를 향하는 동안 동료들과 함께 데리고 다녔던, 흰 털을 가진 순하고 활달한 강아지였는데 샤테이엘은 한 번도 그 강아지를 자신의 반려동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그저 원래 주인이 놀에게 끔찍하게 살해 당한 걸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마음씨 좋은 새 주인을 만날 때까지 잠깐 돌봐준다고 생각했다. 정이 많이 들긴 했지만 스크래치는 방랑생활을 하는 샤테이엘이나 야영지 동료들의 반려동물이 되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아, 도시에 정착해서 사는 한 가족을 만나 예쁨 받으며 살다가 강아지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아, 아니. 강아지는 없어.”

편안하게 있을 때 별로 말이 없던 아스타리온이 스크래치에게 있는 힘껏 공을 던졌던 게 떠올라서 괴로웠다. 샤테이엘은 뱀파이어 스폰들을 데리고 언더다크를 향해 내려간 이후 수십년 간 한 번도 스크래치를 떠올린 적이 없었는데 이게 갑자기 무슨 조화인가 싶어 당황스러웠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낯선 이방인의 마을에서 몇 개월 만난 강아지를 다시 떠올리다니?

여관 주인은 자신이 ‘반려동물’이라고 언급했음에도 처음 보는 투숙객이 ‘강아지’라는 단어를 굳이 고른 것을 보고 강아지를 키운 적이 있나보다 짐작했다. 현재는 혼자인 걸 보면 죽었거나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그는 1인실의 열쇠를 주면서, 여관의 1층은 바처럼 운영되고 있고 간단한 술과 음식은 주문할 수 있다는 것도 알려 주었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려면 밖에 나가서 식당을 찾는 걸 추천해요.”

“그래.”

“귀찮으면 여기에서 대충 해결해도 되고요. 자정까지는 술도 파니까요.”

“…….”

그 말을 듣고 카운터 옆의 바 같은 공간을 둘러보니 어두컴컴한 와중에 사람들이 여기저기 꽤 많이 흩어져 앉아있었다. 여행이든 의뢰든 순례든 간에 고된 하루를 마치고 이곳으로 들어와 침대 위에 쓰러지기 전 술을 한 잔 하기엔 괜찮은 곳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샤테이엘이 이 마을에 머물며 앞으로 어디로 가는 게 좋을지 정보를 얻으려면 좋든 싫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이런저런 소식을 듣는 게 필수일 것이다.

근처를 둘러보면서 신전이나 빈민 구제소 등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곳은 항상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했고, 운이 좋으면 꼭 금전이 아니어도 무언가 의미있는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여관 주인에게 일주일치 숙박료를 선불로 내겠다고 하고선, 품을 뒤져 작은 가죽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 건넸다. 여관 주인은 돈을 받아들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혹시라도 숙박 도중 방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문제가 생기면 빈 방 여부에 따라 원하는 곳으로 바꿔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창문과 문이 있고, 커튼이 있으며, 깨끗한 시트와 이불, 베개가 존재하는 침실. 샤테이엘은 자신이 묵을 작은 객실의 낡은 문을 열어 놓고 한참동안 문앞에 기대어 방을 바라보았다. 얼마만에 이런 침실에서 잠을 자는건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아마도 네더브레인과의 최종 전투가 끝난 이후, 언더다크로 내려가기 전에 하루 이틀 정도 엘프의 노래 주점에서 머물 때가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각자 개인적인 문제들로 골머리를 썩던 동료들도 있어,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스폰들의 계획도 손 봐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엘프의 노래는 꽤 좋은 시설을 갖춘 곳이었지만 샤테이엘은 그곳에서조차 휴식다운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특히 여관 한구석에 놓여 있던 아스타리온의 짐을 보면서도 그걸 치워버릴수가 없어서 침대에 앉은 채로 그가 남겨둔 무기와 책들, 옷가지를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건 자유롭고 홀가분했지만, 자신이 일일이 신경써줘야 하는 스폰들이 주변에 하나도 없으니 너무 고요해서 잡생각이 많이 드는 게 흠이다. 그는 결국 크게 숨을 들이키면서 객실로 한걸음을 내디뎠고, 장검을 풀고 침대의 머리맡에 세워두었다. 이 여관은 3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샤테이엘이 얻은 객실 역시 3층이었다. 아마도 그가 건강해 보여서 계단을 쉽게 오르내릴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어쩌면 그게 나을지도 몰랐다. 1층과 2층에도 객실이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소음이 큰데다 먼지도 잘 쌓였다. 샤테이엘은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을 땐 하루종일 객실에 있을 거고, 그게 아니면 장시간 외출을 할테니 객실이 높은 층에 있는 건 별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3층 정도면 뭐.

짐을 풀고 씻기 전에 전망이 궁금해서 창문쪽으로 다가갔다. 이미 깊은 밤이고, 조명이나 가로등이 잘 되어 있는 마을이 아닌지라 야경이 예쁘진 않을 것 같았지만 잠들기 전 환기도 좀 시키고 싶었다. 두꺼운 천으로 된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자, 끼익 하며 녹슨 경첩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3층짜리 건물은 이 마을에서 낮은 편은 아닌지, 크게 시야를 가리는 것 없이 마을의 북쪽에 위치한 산이 하나 보였다. 드로우의 암시야 덕분에 근처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대충 보였고, 언더다크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하늘의 수많은 별 덕에 잠시나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건물 벽을 살펴보니, 객실마다 작은 난간이 있긴 했지만 투숙객의 추락 방지를 위한 최소한의 받침대 정도의 느낌이라, 이런 종류의 일에 아주 숙련된 사람이 아니라면 그걸 타고 올라오거나 내려가긴 몹시 어려워 보였다. 샤테이엘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다시 끼익 소리를 내는 창문을 닫고 잠들기 전 몸을 씻었다.

상하수도가 제대로 잘 갖춰진 곳에서 비누를 사용해 몸을 씻는 것은 배가 고플 때 음식을 먹는 것만큼 큰 만족감을 주었다. 샤테이엘은 자기도 모르게 낮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품을 냈다. 어디에서 들었는지도 기억나지 않고 어떤 노래였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몸을 씻는 일이 끝나고 난 후 욕실에서 나오면서 모든 걸 잊어버렸다.

1인용 객실이라고는 해도 침대의 크기가 아주 작지는 않았다. 2명이 함께 눕긴 어려워도 한 사람이 명상을 하기엔 꽤 널찍했다. 간만에 느끼는 뽀송뽀송하고 깨끗한 섬유의 질감에 지친 클레릭은 순식간에 명상에 빠져들었지만, 새벽에 갑자기 벽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나는 바람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벽을 사이에 두고 옆 객실이 이어진 구조의 건물인데, 옆방의 투숙객은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각에 입실을 한 것 같았다.

뭔가 대화라도 하는 것처럼 두 사람이 웅얼웅얼하는 소리가 좀 들리고 한 두 번 또 쿵하더니 이내 잠잠해져서, 객실에 묵는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일이 생겼다가 해결됐나 싶었다. 소음이 오래 지속됐거나 비명소리 같은 거라도 들렸다면 나가봤거나 여관 주인에게 물어봤겠지만 소란이라고 할만한 정도도 아니었기에 샤테이엘은 다시 명상을 시도했다. 꽤 괜찮은 첫날밤이었다.

 

*

 

T 마을은 생각보다 일거리가 많았다. 당분간은 언더다크로 돌아갈 일이 없으니 지상 생활을 해야하지만, 어디로 가는 게 좋을지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앞으로 어디를 여행하고 머무르든간에, 최소한의 자원은 가지고 있는 게 좋았으므로 클레릭은 일을 쉬지 않기로 했다. 이곳은 제법 북적이는만큼 다양한 정보를 얻기도 편해서 그의 목적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라도 탐방하기 좋은 곳이었다.

굴뚝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집에서, 주인이 새벽부터 구워낸 작은 빵에 얇은 햄과 치즈를 넣어 천천히 씹으며 아침식사를 해결했다. 네더브레인을 처치하기 위한 여정 중 야영지에서 종종 먹을 수 있었던 워터딥 치즈 조각에 비해서는 풍미가 떨어졌지만 샤테이엘의 입에는 충분히 사치스러운 식사였다.

빈민 구제소에서 짐을 나르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치료해 주거나 가벼운 저주를 해제해주기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마을은 밤에 본 첫인상과는 달리 낮에는 활기찬 곳이었고, 워낙 이방인이 많아서인지 마을 사람들은 처음 보는 샤테이엘의 얼굴에도 눈에 띄게 경계심을 보이거나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원하는 걸 얻으면서도, 적당히 마을의 그늘에 자신을 숨기기 좋아서, 장검을 든 클레릭은 이곳이 조금씩 편안해졌다.

그래도 밤에는 여전히 약간 흉흉한 분위기가 있어서, 사람들도 그걸 의식하는지 거리가 상당히 빨리 조용해졌다. 낡고 갈라진 건물들의 벽이나 담벼락에는 목에 현상금이 걸려있는 범죄자들의 몽타주가 많이 붙어 있었고, 그 중 어떤 것들엔 시뻘겋게 X자가 그어진 채 ‘사망’ 이라고 쓰여있기도 했다.

샤테이엘은 현상금 사냥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데다 수배가 될만한 가까운 이도 없었기에 별로 신경을 쓰진 않았지만, 이곳을 지나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그 몽타주들을 유심히 살펴보곤 했다. 마을에 머문지 나흘 째에는, 벌써 그가 첫날 보았던 몽타주들 중 절반 가까이 사라졌고, 새로운 얼굴로 절반이 채워졌다.

목에 큰 돈이 걸려 있는 수배범들 중에는 교회나 신전에 몸을 숨기는 이도 많고, 샤테이엘이 잔심부름을 하고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빈민 구제소에 빈민이나 난민처럼 위장해 들어오는 경우도 많았다. 당장 오늘 오전에도, 샤테이엘이 불안 때문에 두통에 시달리고 악몽을 꾼다는, 머리를 다친 빈민을 돌봐주고 있을 때 우당탕 하고 큰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바람처럼 그를 밀치며 문 밖으로 달려가는 광경을 봤다.

무슨 일인가 하니, 거적때기를 뒤집어 쓴 채로 빈민 구제소에 숨어들어 밥을 얻어 먹고 있던 한 사람이 알고보니 꽤 악명 높은 살인마였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은신해 있는 곳을 추적자에게 들켰다는 정보를 전해 듣자마자, 욕설을 하면서 있는 힘껏 그곳을 뛰쳐 나갔다.

샤테이엘은 그런 살인마가 두렵진 않았으나 혹시라도 이 안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거나 전투가 벌어지면 정말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죽는 일이야 페이룬에서 흔한 일이라고 하지만 빈민 구제소에 있는 자들은 대부분 병자, 노인,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들이었기 때문에 이 안에서 피바람이라도 불면 자기 몸 하나도 지킬 수 없는 애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었다. 그는 특별히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아무렇지 않을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일이 많아?”

“어떤 일이요? 살인마가 숨어드는 일이요?”

샤테이엘이 조용히 묻자 그의 곁에서 물을 길어다 걸레를 빨고 있던 봉사자가 되물었다. 이방인이 고개를 끄덕이니 열심히 주무르며 때를 빼던 걸레를 내려놓고는 어깨를 으쓱 했다.

“저 정도로 목에 걸린 액수가 크고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살인마가 숨어드는 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죠. 좀도둑이나 사기꾼은 종종 여기로 몸을 숨기러 와요. 현상금 사냥꾼들이 이 잡듯이 뒤질 때도 있지만 용병대가 직접 들어올 때도 있어요.”

그는 비누 거품 묻은 걸레를 다시 주물럭거리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여기로 흘러 들어오는 사람들은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다들 아프고 병들고 굶주렸는데 골라도 하필 여길 골라. 양심 없는 것들. 하긴 양심이라는 게 없으니까 그 모가지에 그렇게 돈이 걸렸겠지…….”

실제로 몇 년 전에는 숨어든 범죄자가 인질극을 벌이는 바람에 붙잡혔던 어린애 하나가 목숨을 잃은 적도 있다고 했다. 샤테이엘은 그 이야기까지 듣고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어차피 T 마을에 오래 있을 것도 아니라 여관은 일주일치 숙박료만 결제해 둔 터였다. 더 머무를 일이 있다고 하면 숙박기간을 연장하면 될 일이었지만 봉사자의 이야기를 들으니 여기에 장기간 머물러봤자 좋은 꼴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빈민 구제소에서의 일을 마친 후,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꽤 규모가 큰 잡화점 앞에서 쓰러진 짐마차를 발견해 물건들을 가게로 옮기는 걸 도와주었다. 마차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은 잡화점 주인의 가까운 친척이자 마을의 유지였는데, 다행히 가벼운 타박상을 입은지라 샤테이엘이 상처에 치유 마법을 써주고 가지고 있던 약을 발라주니 씻은 듯이 나은 것 같다며 기뻐했다.

마차에 타고 있던 손님과 잡화점 주인은 이방인인 샤테이엘에게 보답을 하고 싶어했다. 그들은 T 마을에서 가장 물건이 많은 잡화점 안으로 샤테이엘을 초대해, 원하는 것들을 챙겨가도 좋다고 했다.

유용한 제안이며 솔깃한 보상이었지만, 드로우 클레릭은 방랑자였고 많은 짐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평소 음주를 자주 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그날따라 참으로 이상하게 술을 마시고 잠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샤테이엘은 꾸벅 감사인사를 하고서는 주류를 정리해놓은 곳으로 갔다.

‘…이 정도의 사치는 부려도 되지 않을까.’

포도주가 잔뜩 쌓여 있는 곳으로 가서 천천히 라벨을 확인하고, 그나마 비교적 고급스러운 숙성 포도주를 두 병 골랐다. 한 병이어도 충분했는데 왜 괜히 욕심을 부리게 되는지. 그래도 내려놓고 싶지 않아서, 포도주 두 병을 옆구리에 끼고 술과 함께 먹을만한 산뜻한 치즈도 한 덩이 골랐다.

샤테이엘에게는 오랜만의 사치였는데, 잡화점 주인과 손님에게는 우스울만큼 소박한 보상이었는지, 여관 입구에 도착한 후 종이 봉투를 확인해보니 큼직한 육포 두 개와 딱딱한 빵, 작은 초콜릿 조각과 휴대용 상처 치유 연고 한 통이 함께 들어 있었다.

빈민 구제소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유난히 피곤해서, 움푹 꺼진 눈을 하고 객실 문 앞에 섰더니 문에 종이쪽지 하나가 붙어있는 게 보였다.

‘문의 사항이 있으니 입실 시 직원을 찾아 주십시오.’

지친 클레릭은 문에 붙어 있던 쪽지를 떼어 주머니에 넣고는, 침대 옆의 낮은 협탁에 포도주 두 병과 종이 꾸러미를 놓아두었다. 여전히 등에는 장검을 멘 채로, 아래층으로 터덜터덜 걸어내려가니 카운터에서 고개를 숙이고 장부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던 직원이 샤테이엘에게 아는 체를 했다. 그는 처음에 여관에 방문했을 때 샤테이엘에게 방을 내준 하프오크가 아니라, 목소리가 좋은 드래곤본 남성이었다.

“…문에 붙어 있던 쪽지를 봤어. 무슨 일이지?”

“쪽지……?”

“3층 4호실이야.”

샤테이엘이 자신이 묵고 있는 객실의 호수를 말하자 직원이 아아, 하고 탄식을 하고선 말을 이었다.

“사실 여관에 묵고 있는 누군가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서.”

“내 도움?”

샤테이엘은 의아했다. T 마을에 들어온 게 이제 겨우 나흘째고 여관에서는 직원 제외 누구하고도 말을 섞은 기억이 없는데 도움을 필요로 한다니? 그의 표정에서 의아함과 경계심을 읽은 직원이 안심시키며 말을 이었다.

“3층 3호실, 그러니까 손님의 옆 방에 묵는 사람이 현상금 사냥꾼인데 가끔 여기에서 며칠 지내요. 그런데 오늘 새벽에 자기가 일을 하다가 좀 다쳤다면서 아는 치유사가 없나 묻더라고요. 어느 정도의 실력이 필요하냐고 했더니 클레릭 정도면 충분하다길래. 보수도 준다고 하던데 어때요?”

클레릭은 어깨를 으쓱하며 조금 냉담하게 대답했다.

“내 옆 방에서 묵는 투숙객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걸. 뭘 믿고 만나라는거지?”

“직원들은 얼굴을 본 적이 있는데요. 이상한 사람 같지는 않았어요. 가끔 오긴 하지만 숙박비가 밀린 적도 없고. 항상 예의 바르고요. 맨 처음 얼굴 보여준 이후로는 거의 가리고 다니는 것 같지만 그건 다들 그러잖아요.”

직원은 열심히 정리하던 장부를 내려 놓더니 자기 앞에 놓여 있던 술잔을 하나씩 꺼내 마른 행주로 닦기 시작했다. 하긴 샤테이엘 본인도, 누군가가 보기에는 꽤 수상쩍은 사람일 것이다. 특별히 보수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지만 어쨌든 누군가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고 클레릭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했을 때 굳이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곳에 자주 들르는 현상금 사냥꾼이라면 얼굴이 알려진 곳에서 쉬이 허튼 짓을 하진 않을 거라는 추측도 가능했다. 샤테이엘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자,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옆 방 투숙객에게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 손님의 생활 패턴을 보면 좀 늦은 시간에 방문할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언제쯤?”

“보통 빨라야 자정 이후에 입실하더라고요. 하루종일 일해서 너무 피곤하면 미리 좀 쉬어 두는 게 어때요?”

“…좋아. 참고할게. 노크하고 누군지 알려주면 들여 보내주겠다고 말해줘.”

제안을 받아 들이고 다시 객실로 올라갈 때 직원이 미소짓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옆방 투숙객이 적당한 클레릭을 소개시켜 주면 사례하겠다는 약속을 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기껏해야 팔다리에 작은 찰과상, 혹은 몸싸움 도중에 생긴 멍이나 자상일 것이다. 샤테이엘은 다시 객실로 들어와 따뜻한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쉴 때나 잠잘 때 입은 가벼운 실내복을 입고, 객실 안에 있는 낡은 나무 테이블 앞에 앉아서 지도와 책, 수첩을 펼쳤다.

빠르면 사흘, 늦어도 닷새 안에는 이 마을을 떠날 생각이었다. 당분간 쓸만한 여행 경비도 어느 정도 모았고, <살구빛 토끼 발바닥 여관>은 몸과 마음을 회복하기에 좋은 공간이었다. 샤테이엘은 바다 위에서 네더브레인을 파멸시킨 이후 처음으로 속 편하게 휴식시간을 가졌다는 생각에 약간의 홀가분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의지가 생겼다. 벽에 기대어 서거나 벤치에 몸을 늘어 뜨리고 이글이글한 산 너머로 떨어지는 주홍빛 노을을 보고 있을 때면 종종 공허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곧 익숙해질 것이다.

클레릭은 객실 문을 두드릴 방문객의 노크 소리를 기다리면서, 꾸깃꾸깃한 지도를 탁자 전체에 펼쳐 두고 앞으로 가고 싶은 곳에 붉은 잉크를 찍은 깃펜으로 동그라미를 쳐 표시했다. 그가 한 번쯤 방문하고 싶었던 곳은 대부분 T 마을의 북쪽이나 동쪽에 위치한 지역들이었다. 샤테이엘은 얼음과 눈을 볼 수 있는 지역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앉아서 자세를 바꿀 때마다 작게 삐걱삐걱 소리를 내는 의자에서 일어나, 낮에 잡화점에서 받아온 와인을 가지러 갔다.

곧 낯선 사람이 방문할텐데 술을 마셔도 될까 잠시 망설였지만 과음을 할 게 아니라면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의 치유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3호 투숙객이 꽤 늦은 시각에 방문할거라고 했고 그를 치유하는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볼 일을 다 보고나서 술을 마시면 내일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받아온 포도주 두 병 중에 좀 더 오래 숙성된 것을 골라 마개를 열고 냄새를 맡아 본 후 평소에 들고 다니는 야영용 머그컵의 절반 정도를 포도주로 채웠다.

술을 마신지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유난히 풍미가 진하고 향긋하게 느껴졌다. 포도주가 이렇게 맛있는 술이었나? 컵에 따라둔 포도주를 천천히 한 모금씩 마시다가 작은 칼을 꺼내 주먹만한 치즈도 조그맣게 잘라 입에 넣어 보았다. 많은 양의 술이 아니어서 취하진 않았지만 기분이 조금 들떠서, 샤테이엘은 살펴보던 지도를 잠시 내려놓고 컵에 조금 남아있던 술을 한 번에 입 안으로 털어 넣은 다음, 치즈 조각을 다시 오물거리며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 앉았다.

객실에 들어온 후 씻을 때 머리도 감는 바람에 그의 긴 머리칼은 아직 덜 말라 약간 축축했다. 환기를 시키려고 열어둔 창문을 통해 서늘한 바람을 타고 맑은 밤공기가 들어왔다. 머리카락은 곧 마를 것이다. 침대에 앉은 채로도 보이는 창 밖 너머의 어두칙칙한 산등성이와 그 사이에 떠 있는 어그러진 달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다.

 

똑똑.

 

객실문을 두드리는 소리였고 시간을 확인하니 자정이 조금 지나 있었다. 잘못 들었을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단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똑똑.

 

4호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분명해서, 문 앞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누구지?”

“옆방에 묵는 사람이요. 3호 투숙객.”

문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가면이나 입마개 같은 것으로 입술을 덮었을 때 나는 것처럼 약간 불분명했다. 낮고, 굵은 남자의 목소리였고 필요한 말만 하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현상금 사냥꾼이랬지.

“…보리스가 말해뒀다고 하던데.”

“…보리스?”

“드래곤본 직원 이름이오.”

“아, 맞아.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지. 당신, 거기에서 그러고 있으면 다른 객실 손님들이 잠에서 다 깨겠어. 어서 들어 와.”

샤테이엘이 잠긴 문의 걸쇠를 돌려 열자마자, 문 앞에 서 있던 옆방 남자가 얼굴을 가린 복면 안으로 낮게 소리내어 웃더니 객실 안으로 오른쪽 발을 들이밀며 음산하게 말했다.

“초대해줘서 고마워, 샤티.”

샤테이엘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있는 힘껏 다시 복도로 밀치려 했지만 이미 방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바위가 문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전혀 움직이지 않아서 두려움과 절박함에 소리를 질렀으나 그마저도 방문객에게 붙잡혀 우악스럽게 입을 막히는 바람에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클레릭이 필요하다던 옆방 투숙객은 우아하다고 느껴질만큼 여유로운 동작으로, 왼쪽 발을 들어 문을 밀어 닫았다.

장갑낀 오른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고, 나머지 팔로 허리를 꽉 붙잡은 채 못 움직이게 하는 이 남자를 처음 만났던 날 생각이 났다. 그 때는 돌아다니는 지능포식자를 죽여달라며 나약한 척을 하고 샤테이엘을 속였는데, 지금은 그 때와 얼마나 달라졌지?

“소리지르지 않을건가?”

“…….”

샤테이엘은 입이 막힌 채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는 이 남자를 30년만에 보는 것이었다. 헤어질 때 본 마지막 모습이 너무 엉망진창이라 꿈에 나올 정도였지만, 지금은 기억 속의 모습보다 훨씬 깔끔하고 잘 정돈된 상태였는데도 몇 배는 위험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넌 여전히 다정하고 착하네.”

남자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잔뜩 비꼬는 중이라는 게 목소리와 어조에서 확실하게 느껴졌다.

“사실, 소리 질러도 상관없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목을 물어 뜯어 죽여버린 후 저 창문을 열고 도망가면 그만이겠지.”

입이 막힌 샤테이엘의 두눈이 크게 떠졌다.

“몸이 굳었네. 겁나나 봐? 내가 너를 죽일까봐 겁나나? 걱정되나? 그렇다면 빠져나가보지 그래.”

귓가에서 속삭이는 말은 사실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소리에 가까웠다. 샤테이엘은 진심으로 자신을 붙잡고 있는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무언가가 많이 달라졌다. 샤테이엘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자 김빠지기라도 한 듯 초대받은 불청객은 팔뚝에서 힘을 풀고 샤테이엘을 밀치듯 놓아 주었다. 그는 문 앞에서 잠시 클레릭을 노려보는 것 같더니 쓰고 있던 후드와 복면을 벗었다.

“아, 아스타리온.”

“음, 그래. 내 이름을 기억하는군. 난 또 네가 내 이름도 잊어버린 줄 알았지. 부르지도 않길래. 아, 그렇지, 내가 네 입을 막아버렸구나?”

여행자들이 많이 입는, 흔해 빠진 낡은 검은색 후드 로브를 걸치고 있는 아스타리온은 놀랍게도 매우 아름다웠다. 샤테이엘은 목숨을 잃을수도 있는 상황에서, 헤어진 옛 연인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아스타리온은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창백했고, 눈빛이 더 붉었으며 한 번도 깨져본 적 없는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샤테이엘이 잔뜩 경계하는 얼굴로 뒷걸음질치는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 비명을 지르는 장검이 있는 방향이었다.

“잔뜩 겁에 질려 있군. 새햐안 눈밭에서 잡아 먹히지 않으려고 덜덜 떠는 흰토끼 같은 꼴이야. 볼썽 사나워.”

아스타리온은 왼쪽 입꼬리를 올리며 샤테이엘쪽으로 한 걸음 크게 성큼 다가갔다.

“왜? 그 장검으로 나를 베기라도 할 거야?”

샤테이엘이 클레릭으로서 한 번도 말뚝을 박아본 적 없는 뱀파이어 스폰은 자신의 머리칼을 한 손으로 쓸어 넘겼다. 그는 잠시동안, 수십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가 이내 머릿 속에서 지워버렸다. 검지를 들어 자신의 흰 목덜미를 천천히 가로지르는 것처럼 선을 그으며 말을 잇는다.

“어차피 자를 거라면 여기를 이렇게 잘라 봐. 목을 자르라는 얘기야. 그래야 칼을 쓰는 보람이 있지. 그 검이 비명을 먼저 지를지, 내가 먼저 지를지 궁금하지 않나?”

“…그만해.”

분명 술을 아주 조금 마셨는데도, 취기가 올라오는 것처럼 홧홧했다. 샤테이엘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마도 자신의 뺨과 귀, 목덜미까지 남의 눈에 띌 정도로는 붉게 상기됐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더다크에서 뱀파이어 스폰들과 지내는 시간동안 너무 무뎌진걸까. 어쨌든 언더다크의 뱀파이어 주민들은 자신을 그들의 구도자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갈등할 일이 별로 없었다.

낯선 사람을 방에 들이면서, 전혀 방어할 수 없는 얇은 실내복에 무기도 손에서 내려놓은 이 허술함과 흐트러진 모습을, 아스타리온이 비웃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왠지 목이 막히는 것 같았다. 슬금슬금 몸을 뒤로 물리면서도 옛 연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가 너무 그리워서인지, 아니면 이게 현실이라는 걸 아직 실감하지 못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너무나도 두려워서인지 샤테이엘은 알 수 없었다.

탁, 하고 등이 차가운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그의 손에 익숙한 장검집이 들렸다. 아스타리온의 빈정거림과는 달리 검의 주인은 자신의 검이 노래 부르길 원치 않았다. 검은색 로브를 입고 팔짱을 낀 채 샤테이엘을 바라보고 있는 옛 연인은 그 자체로 영혼 없는 하나의 그림자 같았다. 그는 클레릭의 손에 쥐어진 익숙한 장검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탁자를 향해 걸어가는 몸에는 기척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순간 그는 한 마리의 하얀 뱀이었고, 유령이었으며, 샤테이엘의 죄책감이었다.

“…여행 중이었나?”

아스타리온은 부주의하고 성의없이 굴었다. 그는 여전히 장갑을 낀 손으로 샤테이엘이 펼쳐둔 지도를 함부로 뒤적이고, 가지런히 정리해 쌓아놓은 책과 수첩들도 허락없이 들어서 촤르륵 넘겨 보곤 다시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두었다. 마치 범죄자의 소굴을 탐색하러 들어온 군견이나 용병처럼 물샐틈 없이 완벽하고 능숙한 동작이라 두려울 지경이었다.

“흠, 아니면 혼자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을지도 모르겠군.”

아스타리온은 포도주 병을 발견하고선 라벨을 아주 주의깊게 확인했다. 그는 샤테이엘이 잘 막아둔 코르크 마개를 손쉽게 따서, 병 입구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더니 그대로 입을 대고 마셨다. 꿀꺽꿀꺽 포도주가 뱀파이어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조용한 새벽의 객실에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술을 삼킨 뱀파이어는 병에서 입을 떼고, 쩝, 하고 입맛을 몇 번 다시더니 포도주가 꽤 마음에 든 듯 고개를 갸웃하고 한 번 더 마셨다.

“너, 나 없는 동안 취향이…”

여전히 한 손에 술병을 든 채로 아스타리온이 잠시 멈췄다. 그는 단어를 고르는 것 같더니 야비한 미소를 지었다.

“꽤 고상해졌네.”

샤테이엘은 아스타리온이 뱀파이어 스폰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식은땀을 흘리며 그의 옛 연인을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 자기가 정말로 그를 잘 알고 있는 게 맞긴 한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함께 여행할 때의 아스타리온은 햇빛 아래에 서 있을 수 있었고, 본인의 말에 의하면 뱀파이어로서 갖는 치명적인 불리한 점 몇 가지가 사라진만큼 뱀파이어만의 능력도 사라지거나 많이 축소된 것 같다고 했었다. 이를테면 짧은 순간이지만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뱀파이어의 매혹’ 이라든가, 비인간적으로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고 재생되는 능력이라든가, 매우 뛰어난 반사신경과 힘 같은 것들….

드로우 클레릭은 처음으로 실감했다. 클레릭들이 말뚝을 박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는, 토벌대상으로서의 괴물인 뱀파이어 아스타리온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그가 침을 삼킴과 동시에, 마치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술병을 들고 있던 아스타리온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과장되게 몸을 흔들며 웃음을 터뜨렸다. 샤테이엘은 그가 가장 사랑했던 뱀파이어의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들이 떨어져 지냈던 수십년 간 뭔가가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만 들었다.

“침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자기. 아주 깜찍해.”

아스타리온은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곤, 혀로 입술을 한 번 핥은 뒤 어깨를 으쓱했다. 갑자기 과거의 망령을 마주한 드로우는 검을 뽑아 양손으로 꽉 쥐고 힘을 주면서도, 자기 앞에서 술병을 내려 놓고 있는 저 사내를 베어 죽일 수 있을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었다. 언더다크의 스폰들 중 상당수는 그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고, 샤테이엘 역시 종종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와의 재회를 전혀 상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 상상 속에서 매번 아스타리온은 샤테이엘을 크게 원망하고, 울부짖고, 상처 입힌 뒤 죽였다.

“음…? 무슨 짓이야? 죽고 싶어?”

살기 등등하게 빛을 뿜고 있던 장검을 다시 검집에 넣고 침대 위로 던져버리자, 아스타리온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샤테이엘은 그의 옛 연인과 싸우고 싶지 않았고, 대화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도망치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아스타리온은 저주하며 미련없이 자신을 떠났지만, 자신은 그를 떠난 적이 없었다. 과거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에, 지금이라도 그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나는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아끼고 있어.’

실로 비겁하고 추악한 마음이다. 그는 분명 자신의 망설임과 우유부단한 성정 때문에 아스타리온에게 큰 상처를 주었고 수십년간 혼자 떠돌게 만들었다. …잠깐, 혼자? 어쩌면 아스타리온은 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잠깐동안이지만 그의 곁에 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죄어 들었고 이 와중에도 그 때문에 괴로워지는 스스로가 가증스러웠다.

“심장 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서 시끄러울 지경인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너.”

왼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틀린 미소를 짓는 그가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데도 샤테이엘은 얼어 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만약 아스타리온이 자신을 죽이려고 마음 먹는다면,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들 정도였다. 물론 죽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남자 자신의 죽음만을 원하고 있다면, 샤테이엘이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스타리온은 클레릭의 코 앞에 서더니 미소를 거두었다. 마치 마법의 힘이 깃든 가면처럼, 뱀파이어는 순간 순간 빠르게 표정을 바꾸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예전에 둘이 함께 여행하던 때 샤테이엘이 종종 보았던, 아주 복잡하고 까다로운 자물쇠를 앞에 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스타리온이 다시 장갑낀 손을 내밀어 샤테이엘의 목덜미를 손끝으로 쓸어 올리기에, 처음처럼 다시 입을 막히거나 목이라도 졸릴까 싶어 잔뜩 긴장했다.

의외로 그런 폭력적인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샤테이엘이 한쪽 눈을 질끈 감자, 그의 옛 연인은 그제야 얼굴을 바라보곤 아주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아스타리온은 풀어헤친 긴 머리칼을 슬쩍 건드려 뒤로 넘기더니 샤테이엘의 목덜미에 남겨진 흐릿하고 작은 송곳니 흉터를 확인했다. 푸훗, 하고 바람이 빠져 나가는 것마냥 한 번 웃더니 이내 다시 멀찍이 떨어졌다. 샤테이엘은 아스타리온의 장갑 끝이 닿았던 자신의 목덜미가 서늘하고도 근질거려 손바닥을 대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옅어지고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객실을 한 바퀴 돌며 뭔가 뒤적거리고, 꺼내 보고, 다시 집어 넣기를 반복하더니 샤테이엘이 지도를 펼쳐두고 술을 마시고 있던 테이블 앞의 낡은 나무 의자를 드르륵 소리가 날 정도로 시끄럽게 꺼냈다. 의자의 등받이에 팔을 걸칠 수 있게끔 다리를 벌리고 거꾸로 앉은 그는, 장갑을 한쪽씩 벗고선 오른쪽 눈썹과 눈꼬리를 천천히 문질렀다.

“…아스티.”

샤테이엘은 아스타리온을 도발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침대 끝에 걸터 앉았다. 사실 이 순간까지도, 그의 머릿속은 온통 혼란스러운 생각 뿐이었다.

“그래.”

아스타리온이 걸치고 있는 로브는,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니 검은색이 아니라 아주 짙은 갈색이었고, 그가 신고 있는 장화는 꽤 낡고 더러웠다. 야영지에서 함께 생활할 때에도 옷이며, 신발이며, 본인의 몸의 청결에는 유난히 신경을 쓰던 사람이라 왠지 걱정이 되었다.

‘…걱정?’

순간적으로 자신의 뻔뻔함을 질책하고 있을 때, 아스타리온이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의자의 등받이 위에 올린 두 팔 위에 턱을 괴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쩌다가 이곳까지 오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야, 샤테이엘. 여기엔 범죄자가 많아. 그리고 난 이 마음에 가끔 들러서 거물급을 죽이곤 하지. 보통은, 죽이든 살리든 상관없는 놈들이 대부분이라.”

그는 무표정하게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객실 주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여기 흘러 들었다는 건 첫째날에 바로 알았지. 그리고 둘째날엔 나와 같은 여관에 묵는다는 걸 알았어. 셋째날엔 내 옆 방이라는 걸 알았고, 넷째날은… 이렇게 네가 내 앞에 있군. 이 모든 걸 하루아침에 다 할 수도 있지만, 너도 알다시피 난 이제 낮에는 움직일수가 없잖아.”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어. 네 형제들이….”

샤테이엘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스폰들 몇몇이 네가 있을만한 곳을 찾아 편지를 보냈다고 했는데 답장도 없고 받았는지 확인도 안 된다고 했었어.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아스타리온은 어이없다는 듯 턱을 괴고 있던 팔을 내리고 상체를 똑바로 세웠다. 그는 상당히 심기 불편한 얼굴이었고, 샤테이엘의 단어 선택을 비웃고 있었다.

“카사도어가 만들어준 내 형제들과 사이가 아주 돈독해졌나 봐?”

아스타리온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몰랐기에, 샤테이엘은 계속 망설였다. 그는 뱀파이어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목숨을 위협받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마치 날 때부터 피에 새겨진 것처럼, 아스타리온 앞에서 이 드로우는 전례없이 약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언더다크에서 보낸 편지들 말하는 건가? 받았지. 읽지 않고 찢어 버렸어.”

샤테이엘은 마른 침을 삼켰다. 만약 이 방에서 살아 나간다면, 아스타리온이 살아있다고 언더다크에 소식을 전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다.

“언더다크라니, 세상에. 내게 주지 않은 굶주린 칠천을 전부 거기로 데려간 거야, 샤티? 내려가는 길에 많이들 죽었겠군. 그 녀석들은 다들 너를 믿었겠지? 네가 자기들을 살려준 걸 봤을테니까.”

아스타리온의 목소리가 직전보다 약간 격앙된 게 느껴져 샤테이엘은 다시 긴장했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울고,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가장 두려운 상황은, 아스타리온이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럴 때 샤테이엘은 아무런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갇혀 있던 그 사람들을 그곳에 내버려둘 수는 없었어, 아스타리온. 그리고 네말대로 너무 오래 굶주려 있었기 때문에 길거리에 풀어 놓을수도 없었지. 그러다가 생각난 곳이 언더다크였고, 나는 그곳 지리를 잘 아니까….”

아스타리온은 떨고 있으면서도 차분하게 또박또박 이야기를 하고 있는 샤테이엘을 바라보며 기묘한 기분이 사로잡혔다. 솔직하게 인정해야 했다. 자르 궁전의 지하 미궁에서 모든 걸 버리고 뛰쳐나온 후 한동안은 샤테이엘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만 하며 살았더랬다.

머릿속의 올챙이가 언제 빠져 나갈지 알 수 없었으므로, 낮 시간에도 마음 편히 태양을 즐기지 못했다. 그래서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 서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숨을 곳을 찾아 헤매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샤테이엘과 그의 옛 동료들이 엘더 브레인을 처치하지 못하고 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저주를 한 건 아니었다. 태양을 잃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게 일리시드가 되는 것이었기에. 머릿속에서 올챙이가 빠져 나가고, 엘더 브레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 싫지만은 않았다. 올챙이는 분명히 아스타리온이 다시는 누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기쁨을 잠시나마 되돌려 준 고마운 존재였고 덕분에 카사도어를 죽일수도 있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이별해야 할 녀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형언하기 어려운 이상한 기분이었다. 머릿속에서 올챙이가 무력화되어 사라졌을 때 아스타리온은 발더스 게이트의 아랫도시에 있는 하수구 중 한 곳의 구석에 앉아 있었다. 초월체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주인인 카사도어는 죽은 뒤였으므로, 사실상 아스타리온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세상에 없는 셈이었다. 밤에는 남들의 눈에 거의 띄지 않고 발더스 게이트 구석구석을 쏘다닐 수 있다 하더라도, 낮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햇빛이 들지 않는 곳을 찾으려면 찾을수야 있지만, 확실하게 햇빛으로부터 그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곳은 이름 모를 사람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영묘 안이거나 하수구 뿐이었다. 아랫도시의 하수구 안에는 아스타리온만 있는 게 아니었다. 넓은 하수도 구석구석엔 쥐들도 많았고, 갈 곳 없는 난민이나 부랑아, 길드 회원들, 떠도는 바알 신도들이 숨어있었다.

뱀파이어의 능력을 다시 얻게 된 아스타리온에게 그들은 크게 위협적이진 않았으나, 자신의 정체를 남들에게 드러내서 좋을 일은 없을 것이다. 카사도어에게서도 일리시드에게서도 자유로워짐을 느낀 순간 뱀파이어는 옛 연인을 비롯한 야영지의 동료들을 떠올렸다. 그들 모두 살아있을까? 샤테이엘은 죽었을까? 행운을 빌어주고 싶은 마음 따윈 없다고, 내가 훔칠 수 있었던 의식을 막은 네가 고통스럽게 절규하며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저주할 때 창백하게 질리던 그의 슬프고 겁 먹은 얼굴이 떠올랐다.

엘더 브레인과의 전투는 결코 녹록치 않을 것이기 때문에 동료들이 전부다 살아남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상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아스타리온은 샤테이엘이 그 전투에서 죽었을 거라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에 죽어야 했으니까. 일리시드로 변이할 위험에서 자신을 구해준 자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제 손으로 죽일 생각을 하는 건 확실히 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그가 눈 앞에 서 있는데도 예상했던만큼 강한 살의를 느끼지 않는 자신에게, 아스타리온은 놀라고 있었다.

“내가 낮 시간을 보냈던 발더스 게이트의 하수구와 네게 홀린 다른 뱀파이어들이 지내던 언더다크 중에 더 최악인 곳을 고르라면 역시 언더다크이려나? 너와 함께 불레트를 때려 잡았던 게 떠오르는군, 샤티. 좋은 시절이었지.”

샤테이엘은 아스타리온이 그들의 과거를 비웃고 있는건지 진심으로 추억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수구? 발더스 게이트의 하수구에서 지냈어?”

“정확히 말하면 태양이 떠 있을 때 아랫도시의 하수구만큼 안전한 곳이 없어서 어두워지기 전까지 거기에서 지냈지.”

아스타리온은 다시 상체를 기울여 의자의 등받이에 올려둔 두 팔로 턱을 괴며 송곳니를 드러내고 미소지었다.

“왜? 내가 거기에서 돌아다니던 쥐라도 잡아 먹었을 것 같나? 죄책감 느껴져? 너도 그 하수구가 어땠는지 기억 나겠군. 바위 군주를 찾느니, 바알 신전을 찾느니 하면서 그 안을 엄청나게 싸돌아 다녔잖아, 자기.”

“…….”

샤테이엘은, 그들이 헤어진지 수십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스타리온이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선 그 사실을 기뻐했으나, 곧 그가 그 기억 속에 꼭꼭 잘 담아 묵혀 두었을 오랜 원망과 분노, 혐오에까지 생각이 미쳐 불안해졌다. 아스타리온이 과거를 청산하고 싶어한다면 그것을 이 자리에서 피할 순 없는 것이다. 피해서도 안 되었다.

“…내가 왜 이곳에 찾아왔는지 궁금하겠지.”

아스타리온은 시끄러울 정도로 자신의 귓가를 때리는 샤테이엘의 심장 박동을 감미로운 음악처럼 즐기면서 말을 이었다.

“네 예쁜 얼굴을 보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곱게 물결치는 그 머리칼을 한 번이라도 더 만지고 싶어서? 그것도 아니라면…?”

수십년 동안을 범죄의 땅에서 해결사로 굴러다닌 뱀파이어는 혼란에 빠진 샤테이엘을 가지고 노는 게 아주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보고 싶어서, 만지고 싶어서는 당연히 아닐거고 그렇다면 죽음으로 끝맺는 복수 뿐이 아닌가. 클레릭은 일단 던지기만 하면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 말뚝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 자신이 아스타리온에게 그걸 던질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시작하기도 전에 패배하는 싸움. 아스타리온과의 전투란 샤테이엘에겐 그런 것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을 때, 공중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산뜻한 웃음 소리가 어둠의 피조물에게서 튀어나왔다. 아스타리온은 송곳니를 전부 드러내며 꽤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바보 같으니.”

“…….”

“너를 죽일 생각이었으면 넌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기도 전에 죽었을 거야, 샤티.”

아스타리온은 의자에서 일어나 머리를 두어번 긁적이다가, 꼬깃꼬깃하게 접혀 있는 뭔가를 꺼내 펼친 후 샤테이엘에게 건네 주었다. 그건 마을의 구석구석에 붙어 있던 수많은 현상금 수배 몽타주들 중 하나였는데, 거기에 그려져 있는 얼굴이 왠지 모르게 눈에 익었다.

“나를 위해 누군가를 죽여줬으면 해, 샤테이엘.”

“누구를? …이 자를?”

“아하, 역시 왜 죽여야 하는지 묻지는 않는군. 그럴 줄 알았지, 예쁜이.”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짓던 아스타리온은 샤테이엘이 침대에 앉아 몽타주를 들여다 보는 동안 열려 있는 객실의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서늘한 새벽의 공기가 불청객처럼 창틀을 타고 넘어와 바닥에 깔리고 있었다. 딱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만 뺨과 귓가를 간질이며 불어오는 산바람 덕분에 커튼이 하늘거렸다. 아스타리온은 자신이 묵고 있던 옆 객실의 전망이 어떤지 보고 싶은 것처럼 창문 밖으로 상체를 내밀었다가, 재빠르게 상하좌우로 시선을 던진 다음 창문을 닫으며 문틈 사이에 작은 골무를 하나 끼워 두었다.

몽타주에 정신이 팔려 있던 샤테이엘은 아스타리온이 창문을 닫고 다시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하자 약간 긴장이 풀렸다. 그는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몽타주에 적혀 있던 단어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꼼꼼하게 읽었고 끝까지 다 읽었을 때엔 어느 새 현상금 사냥꾼이 자신의 바로 옆에 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수배서를 함께 내려다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사람 낯이 익어.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데.”

“그래, 당연하지. 왜냐하면 넌 오늘 낮에 이 자를 만났거든. 네가 일하고 있던 빈민 구제소에서 도망쳤던 녀석, 기억나?”

샤테이엘은 아스타리온이 그 일을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상당한 위험 인물로 소문나 있는 범죄자를 자신이 죽여야 한다는 사실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여관 직원은 분명 옆 객실에 묵는 투숙객을 ‘현상금 사냥꾼’으로 소개했었다. 그들이 헤어지고 난 이후부터 쭈욱 그런 식으로 사냥을 하고 다녔다면, 아스타리온은 매우 뛰어난 사냥꾼일 것이다. 자신의 질문에 샤테이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만족한 뱀파이어는 말을 이었다.

“난 이 일을 꽤 잘하지. 나의 진짜 이름, 정체, 얼굴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어쨌든 수십년간 이 바닥에서 조금씩 이름을 알렸어. 사실 그런 명성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야. 그래도 아주 재미있지. 적어도 아직까지는 지겹지 않아. 사냥은 매번 새롭거든.”

아스타리온은 침착하게 말하는 듯 했지만 샤테이엘은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구겨져 있는 광기에 가까운 흥분과 짐승 같은 욕망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이 차분한 드로우 클레릭을 두렵게 만들면서 동시에 크게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의 연인이었던 이 뱀파이어는 함께할 땐 다정하고 상냥하며 유쾌한 사람이었으나 확실하게 원하는 게 있을 땐 우리를 부수고 뛰쳐 나가고 싶어하는 야수처럼 몹시 폭력적이기도 했다.

“요즘 당신의 표적이 이 사람이라는 거야?”

“그렇지. 이놈의 목에 많은 돈이 걸려 있어. 죽여도 돼. 꼭 살려야할 필요가 없어서 나로선 편한 표적이지. 솔직히, 돈이 문제가 아냐. 너무 오랫동안 추적했어. 이제 지겹거든.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말야.”

아스타리온은 야영지에서 자주 그랬듯, 습관적으로 소맷동을 매만지고 있었다. 샤테이엘은 그의 사소한 습관 하나하나에 흔들리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건 그들의 좋았던 시절을 떠오르게 했으며, 곁에서 무방비하게 웃던 아스타리온의 허탈한 웃음소리를 듣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마른침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이 사람을 죽여줬으면 좋겠어? 너를 위해서…?”

침착하게 묻는 샤테이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의 심장 소리는 여전히 숨길 수 없을만큼 강하게 고동쳤기 때문에 아스타리온은 속으로 웃었다. 뱀파이어는 자신의 사냥감을 삼십년 전 헤어진 연인에게 헌납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나 그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걸 원한다고 하면, 죽여줄텐가?”

샤테이엘은 잠깐동안 고민했다. 아스타리온의 요구사항은 그리 부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죄없는 자를 죽여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었고, 사적인 복수의 대상도 아니었다. 뱀파이어 현상금 사냥꾼이 쫓던 상대는 굳이 살려야만 돈을 받을 수 있는 종류의 범죄자도 아닌, 극악무도한 연쇄살인범이었던 것이다. 아마 아스타리온이나 자신이 처치하지 않아도 어차피 조만간에 누군가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을 것이다.

“이 자는 범죄자이니, 당신이 원한다면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

약간의 한숨이 섞인듯한 목소리로, 하지만 어느 정도 체념한 듯 샤테이엘이 자신의 결심을 이야기하자 아스타리온은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웃었다.

“넌 아직도 내가 어떤 놈인지 모르는군. 이런 대어를 죽이는 즐거움을 너한테 양보할 리가 없잖아. 게다가 나는 목을 가져다 주고 돈을 받아야 한다고. 거물급을 죽이는 건 나여야 해, 샤티. 너는 낮 시간동안 내 눈과 귀가 되어주면 돼.”

비웃던 뱀파이어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옛 연인의 근처로 다가와서 음울하고 싸늘한 겨울 안개처럼 축축하게 말했다.

“누구 덕분에 낮에 돌아다닐수가 없게 돼서 말이야. 해결사로 일하는데에 애로사항이 꽤 많은 거 있지? 돈을 조금 쥐어주면 뭐든 갖다 바치는 부랑자들이 있긴 하지만 쓸만한 정보통을 구하기란 요즘 같은 시대에 상당히 어려운 일이지.”

아스타리온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고 내가 자헤이라에게 연락을 할 수는 없잖아. 가만, 그 늙은 고위 하퍼 아직 살아 있던가?”

“살아 있어.”

샤테이엘은 대답하며 겨우 그의 얼굴을 바라 보았고, 그 표정을 보자마자 아스타리온이 이미 자헤이라의 생존 여부를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방법은 몰라도 그는 샤테이엘이 이야기해주지 않은 많은 것들에 대해 이미 알고 있으며, 어쩌면 샤테이엘이 모르는 것들까지도 전부 알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우리 나쁜 엄마가 명줄이 정말 길군. 뱀파이어일지도 몰라.”

싱거운 농담을 하던 아스타리온은 잠시동안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잠자코 바라보더니 꿈꾸듯 말을 이었다.

“창문을 닫아서 잘 보이지 않겠지만, 샤테이엘. 멀리서부터 동이 트는 게 느껴져. 곧 닭이 울고 짐승들이 잠에서 깨어나겠지. 너는 어때? 여전히 햇빛을 힘들어 하나? 아니면 이젠 나보다도 더 지상생활에 적응을 잘한 드로우가 됐어?”

그는 저벅저벅 문 쪽으로 걸어가며 차갑게 웃었다.

“나는 이제 옆방으로 가서 잠을 청할거야. 후환을 없애고 싶다면 내가 잠든 동안 말뚝을 들고 찾아와도 재미있겠지. 거기에서 재미를 못 찾겠다면, 내일 해가 질 때까지 그 몽타주에 있던 녀석에 대한 정보를 알아다 주는 게 좋을거야. 최근 목격된 곳이든, 시체의 위치든, 숨어 있는 곳이든 상관없어.”

말을 마친 아스타리온은 다시 후드를 뒤집어 쓰고 복면으로 눈 아래를 가리더니, 조금 과장된 몸짓으로 상체를 숙이며 객실 주인에게 공손히 작별 인사를 하고 문을 열었다. 샤테이엘은 무겁게 닫힌 문에 기대어, 옆 객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고, 그 다음엔 천천히 방의 벽에 손을 짚으며 따라 걷다가 싸늘한 벽에 귀를 대었다. 옆 객실에서는 한동안 물소리와 둔탁한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이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아스타리온과 헤어진 후 긴장이 풀린 클레릭은 평소보다 늦잠을 잤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시간을 확인하곤 황급히 탁자 위의 지도와 수첩 등을 쓸어 담듯 가방에 욱여 넣고 장검을 챙겼다. 긴 머리칼이 엉켜 있었지만 제대로 손질할 여유도 없었다. 객실을 나와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따라 뛰어 내려가려다가 문득 옆 객실로 다가가 문 앞에 섰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음. 방해하지 말 것.

 

몇 번 본 적 있는 뱀파이어의 필체였다. 여관에서 직접 마련해준 팻말은 아니었고, 아스타리온이 손수 써서 문 앞에 붙여둔 것 같았다. 너무나도 그리운 필체여서, 샤테이엘은 자기도 모르게 팻말의 글씨에 살짝 손을 얹었다. 200년 넘게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자르 궁전에서 읽고 쓰기를 금지 당했었다는 아스타리온이 처음으로 깃펜을 들었던 순간이 기억났다.

그는 걸신들린 것처럼 닥치는대로 아무거나 읽어대곤 했다. 너무 오랜만에 책을 읽어서 금방 눈이 아프다는 둥, 아예 활자가 제대로 안 보인다는 둥 불편하거나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런 투덜거림도 잠시, 전투와 탐색 사이에 아주 짧은 짬만 생겨도 탐욕스러우리만큼 야영지에서 책을 읽었다. 샤테이엘은 그들이 연인이 아니라 동료였을 때에도 그런 그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 보다가 읽을 거리를 구해다 주곤 했다.

주인이 없는 잉크병과 깃펜, 종이도 여정 중 은근히 많이 찾아 챙길 수 있었다. 클레릭은 자신이 아끼는 사내에게 잉크병과 깃펜도 선물로 주었다. 그날 아스타리온은 샤테이엘의 옆자리에 엎드려서 종이에 그들의 이름을 천천히 썼다. 아스타리온과 샤테이엘. 아스타리온과… 샤테이엘….

‘이게 네 이름의 철자가 맞아? 자기는 이름도 참 예쁘다.’

 

중얼거리던 아스타리온은 펜을 너무 오랜만에 잡아서 손이 떨린다고 했다. 물론 수없이 많은 자물쇠를 따고 함정을 해제하는 섬세한 손재주를 가지고 있어 금방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펜을 쥐고 글씨를 쓰는 데에 쓰이는 근육은 확실히 평소에 쓰는 근육은 아니었다. 처음에 그는 그들의 이름만 서너번 쓴 후 펜을 내려 놓았으나, 시간이 좀 흐른 후에는 종종 샤테이엘에게 장난스러운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오늘 밤 네 잠자리를 뱀파이어처럼 습격할게.

- 뱀파이어 A.

 

아스타리온의 글씨체는 예상과는 다르게 화려하거나 장식이 많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나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고 깔끔한 필체에 가까웠다. 서류를 작성할 때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신경 쓴, 인쇄기로 찍어낸듯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샤테이엘은 그의 필체를 꽤 인상적으로 느껴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하얗고 긴, 굳은살 배긴 손가락 끝으로 하염없이 팻말의 글씨를 더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얼굴을 붉히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해가 지기 전에 해야할 일이 많았다. 아스타리온과 재결합 할 일은 아마 없을 것이고, 그가 자신을 여전히 증오하고 있을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 잡혀있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고 싶었다.

아스타리온이 가장 원하던 보상을 자신이 빼앗은 거나 다름 없으니, 이렇게라도 그가 원하는 걸 들어줘야만 했다. 완전히 보상이 되진 않을 거고, 청산을 할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그를 다시 만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바위처럼 거대한 의무감과 부채감이 가여운 샤테이엘을 짓눌렀다. 그는 낮 시간 내내 T 마을의 곳곳을 뛰어 다니며 헐떡였다. 며칠 머무르지 않은 마을이었지만, 이 아름다운 드로우 클레릭이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그를 꽤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빈민 구제소라든지, 작고 오래된 신전이라든지, 잡화점이 있는 지저분한 골목 같은 곳에서 그가 했던 일들이 엄청나게 대단한 선행은 아니었지만 드로우 종족에 대한 세간의 인식 때문인지 훨씬 더 관대한 평가를 받았다.

그렇다고 여기저기를 너무 티나게 들쑤시고 다니는 것은 위험해서, 햇빛 아래에 오래 두어 빛바랜 낡은 드로우 갑옷을 입고, 망토를 두른 후 후드를 뒤집어 쓴 채로 조용히 정보를 모았다. 빈민 구제소에서 일하던 청소부가, 자신에게 치즈를 나눠 주었던 클레릭을 알아보고는 그가 원하는 정보를 주었다. 청소부가 소개해 준 신문팔이와 구두닦이 소년은 샤테이엘 건네 준 금화 한 닢에 하늘을 뚫을 듯 펄쩍 뛰며 기뻐하더니 반나절만에 연쇄살인범의 은신처를 알아 왔다.

“저는 정말 모든 사람의 구두를 닦아주거든요.”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소년의 맑은 목소리에 샤테이엘은 어젯밤에 보았던 아스타리온의 더러운 장화가 떠올랐다.

“혹시 가죽 장화도 닦아?”

“사냥꾼들이 신는 거 말인가요? 말해 뭐해요. 당신의 얼굴이 비칠만큼 반짝반짝 광을 내줄 수 있어요. 어때요? 금화를 줬잖아요. 공짜로 해줄게요.”

“그게… 내 장화가 아니라서. 밤 늦게까지 일하지는 않지?”

“원래는 해가 지면 아지트로 돌아가야 하지만, 알다시피 여긴 뜨내기가 많아서요. 밤에만 일하는 해결사나 사냥꾼도 많아서 돈을 많이 준다고 하면 자정 다 된 시간에도 일할 때가 있어요.”

겨우 열 두셋 밖에 안 돼 보이는 앳된 소년의 일상이라고 하기엔 꽤 고되어 보였다. 물론 언더다크에서 드로우 소년으로 사는 것보단 낫지만…. 샤테이엘은 아스타리온이 자신의 스폰 형제들과 함께 납치했던 거르 족 소녀 체사를 떠올렸다. 언더다크를 떠나올 때 체사의 한 쪽 팔에는 스폰 중 누군가가 만들어준 큼직한 곰인형, 다른 쪽 팔에는 낡은 동화책이 들려 있었다.

그 아이는 구두닦이 소년과 비슷한 나이처럼 보였지만 이미 30년을 넘게 살았기 때문에 어른처럼 말하곤 했다. 그래도 다른 뱀파이어 스폰들이 보기엔 그저 어린애였을 뿐인지, 그 애에게는 항상 귀엽고 예쁜 물건을 주려 했고 그 앞에선 험한 말을 쓰지 않으려 했다. 샤테이엘은 갑자기 그 아이가 보고 싶어졌다. 아스타리온이 이 사실을 알면 매우 불편해하거나 엄청나게 화낼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클레릭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거 꽤 위험하게 들리네.”

“늦게까지 돌아다니면서 일하는 거요? 아무래도 그렇죠.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도저히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니까요. 당신의 장화가 아니라 애인 장화를 닦아주고 싶은거죠? 다 알아요.”

“…….”

샤테이엘은 할 말을 잃었지만 애써 부정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아이에게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자신은 공정한 거래가 뭔지 안다며 한사코 돈을 받지 않으려 하기에, 샤테이엘은 음식이라도 나눠 주겠다고 말했다. 클레릭은 가난하고 돈이 없다던데 금화를 줘서 놀랐다며 너스레를 떠는 소년에게 샤테이엘은 조용히 말했다.

“이런 곳에서는 정보가 목숨만큼이나 귀한 법이니 그렇지. 네가 전해 준 정보는 질 좋은 정보니, 아무에게나 헐값으로 팔지 말려무나.”

고개를 끄덕인 소년은 드로우가 등에 메고 있던 장검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그가 알려준 여관의 이름을 듣더니 잘 아는 곳이라며 반가워했다. 객실 번호까지 알려주고 소년과 헤어진 후, 샤테이엘은 아스타리온이 노리는 연쇄살인범에 관한 정보를 되짚어 보았다. 그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곳은 T 마을의 북동쪽에 위치한 오래된 대장간이었다. 과거에 상당히 이름난 대장장이가 운영하다가 전염병으로 가족이 전부 죽는 바람에 더 이상 이곳에서는 살 수 없다며 버리고 간 곳이라고 했다.

‘대장간이라….’

녹슬고 무딘 날붙이들이 아직 그곳에 많이 남아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스타리온에게 알려주고 그가 사냥을 하러 갈 때 쫓아가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왠지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뱀파이어의 사냥감이 그 안에 혼자 있을지 아니면 여럿이 있을지도 모를 일인데다, 어떤 종류의 무기를 사용할지도 알 수 없었으므로 동행이 있는 게 훨씬 나을 것이었다.

잡화점에 들러 부상을 입었을 때 필요한 약품들 몇 개와 붕대를 구입했고, 자신이 치유 마법을 쓸 수 없을 때를 대비해 치유 물약도 몇 병 샀다. 샤테이엘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잡화점 주인이 물건들을 계산해 주며 어디 전쟁이라도 나가냐고 물었지만 샤테이엘은 그저 흐릿하게 미소만 짓다가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여관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진 뒤였고, 꽤 지친 모습의 클레릭이 여관의 계단을 향해 발을 뻗자 데스크에 서 있던 보리스가 샤테이엘에게 아는 체를 했다.

“어젯밤 옆 방 투숙객은 만나 봤어요? 얘기가 잘 됐나 모르겠네요.”

“그러게. 잘 됐다고 해야 할까.”

“둘 다 목숨 붙어 있으면 잘 된 거라고 봐야겠죠.”

목소리가 감미로운 드래곤본 직원이 그에게 윙크를 하며 너스레를 떠는 바람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잠들어 있던 낮시간동안 성과가 있었는지 알아 보고 싶다 하더라도 해가 지자마자 자신을 찾아올 것 같지는 않아서, 아스타리온을 만나기 전까지 잠깐이라도 눈을 붙일까 생각했다. 옆 객실의 문을 보니 여전히 팻말이 붙어 있었다.

‘설마 아직 자는 건가? 그럴 리가 없을 것 같은데….’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 다시 자신이 묵는 방 앞에 서서 열쇠를 돌려 문을 열 때, 샤테이엘은 무의식중에 숨을 멈췄다.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하자마자 아스타리온이 발을 문틈 사이에 끼우고 몸으로 밀어부쳤던 순간의 공포가 떠올랐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간 객실은 어두웠다. 그가 꼭 필요한 물건들만 주워 들고 뛰쳐나간 그대로였다. 누군가 침입하거나 숨어든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샤테이엘은 어두운 곳에서도 잘 볼 수 있는 드로우였지만, 이제는 습관적으로 객실에 들어오면 등불을 켜곤 했다. 글씨가 빽빽한 서류나 책을 읽고 자료를 찾아야 할 땐 그래야 하기도 했고, 너무 어둡게 있으면 지상의 사람들은 의구심을 가지고 그를 이상하게 보기도 했다. 평범한 종족도, 외모도 아니었기에 괜히 더 눈에 띄거나 의심을 사서 좋을 일은 없었다.

오전에 마구잡이로 물건을 잡아챈 탓에 엉망이 되어 있는 탁자를 다시 깔끔하게 정돈하고는, T 마을의 전체 구역이 상세하게 나와있는 지도를 펼쳐 두었다. 여분의 깃펜에 붉은 잉크를 찍어 북동쪽에 위치한 버려진 대장간에 크게 동그라미를 친 뒤,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그곳까지 가는 지름길을 찾기 위해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이전에는 범죄자를 이런 식으로 소탕해 본 적이 없어서, 샤테이엘은 자신이 잘 하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왠지 답답하고 조급한 마음이 들어 어젯밤 아스타리온이 먹다 남긴 술병을 다시 열어 낡은 머그잔에 조금 따라 마셨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주 작은 소음 때문에 샤테이엘의 길쭉한 귀끝이 쫑긋거렸다. 그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의자에 앉은 채로 천천히 몸통을 뒤로 돌렸다. 창문의 손잡이가 스스로 돌아가면서 매우 느리게 열리고 있는 게 보여 소름이 끼쳤다. 여기는 3층이고,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확인한 바로는 외부에서 누군가가 창문을 통해 침입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곳이었다.

탁자 곁에 세워둔 장검을 향해 손을 뻗어 검집째로 들고, 아주 조심스럽게 창문쪽으로 다가가려는데 바로 그 순간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창문이 부서질 듯 세게 열렸다. 창문 틈 사이에 끼어 있던 작은 골무가 완전히 찌그러진 채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지더니 데굴데굴 굴러 샤테이엘의 발 앞에 멈췄다. 창문 밖에는 긴 후드망토를 쓴 아스타리온이 옷자락을 펄럭거리며 서 있었다.

“어젯밤 네가 나를 초대하고 취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스타리온은 아슬아슬하고 매우 위험하게 창문 밖의 난간 위에 서 있었다. 해가 지긴 했지만 먼 곳의 하늘에는 아직 어스름하게 주홍빛이 남아있다.

“나는 우리가 항상 그랬듯 내가 원하기만 하면 네 방 자물쇠가 영원히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릴 수도 있지. 그런데 그건 좀… 뻔하고 시시하잖아. 난 이제 정말 뱀파이어 스폰이거든. 너는 뱀파이어와 여행 다녀본 적 없지?”

여기까지 말한 뱀파이어는 여전히 난간 위에 서서 언제라도 추락할 것처럼 하늘거리고 있었다.

“너와 내가 함께였을 땐 나는 온전한 뱀파이어 스폰조차 아니었지. 햇빛을 볼 수 있는 대신 그 외의 거의 모든 능력을 잃은 상태여서 반쪽짜리였어. 넌 클레릭이긴 하지만 실제로 뱀파이어를 죽여본 적은 없다고 했던 것 같네. 그래도 방법은 알고 있지?”

아스타리온은 몸을 수그려 창문 안으로 넘어 오고 있었다. 샤테이엘은 아스타리온이 객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창가로 가서 창문 밖을 내다 보았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3층까지 사람이 올라올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를 확인해봤지만 도저히 가능해 보이지가 않았다. 창문을 통해 객실로 들어온 뱀파이어는 샤테이엘이 고개를 빼고 밖을 내다보자 헛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지 궁금해?”

마른 침을 꼴깍 삼킨 클레릭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스타리온은 어깨를 으쓱하고선 침대 끝에 걸터 앉았다.

“벽을 타고 올라왔지 어떻게 올라왔겠어?”

그는 매우 심드렁한 말투였다.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방문한 손님은 깨끗하게 정돈된 침대의 이불을 한 번 손으로 쓸어 보더니, 다리를 꼬고 앉아서 제법 거만한 얼굴로 클레릭을 바라 보았다. 샤테이엘은 붉게 타오르고 있는 아스타리온의 시선을 애써 피하면서, 그에게 손짓으로 지도가 펼쳐진 탁자를 가리켰다. 현상금 사냥꾼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듣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대장간이라…. 어딘지 알아. 예전에 한 번 가 본 적이 있거든. 이 자식은 내가 자신을 쫓는다는 걸 알고 있어. 문제는 내가 뱀파이어라는 걸, 왠지 눈치챈 것 같단 말이지. 그래서, 사실 이것 때문에라도 죽여야 해.”

아스타리온의 말에 의하면 그의 이번 사냥감은 연쇄살인범일 뿐만 아니라 젠타림 정도 규모의 거대한 범죄조직의 2인자 정도 되는 권력자라 처치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샤테이엘은 옛 연인의 목소리와 말투에서 불안과 위험을 감지했다. 아스타리온은 혼자서 이 일을 해결할 셈이며 – 적이 아스타리온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정황이 있어서 단독 행동이 필수인 것 같았다 – 그 때문에 오랜만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나를 데려가.”

“내가 너를 왜 데려가야 하지?”

“…돕고 싶어.”

“그러니까… 왜?”

집요한 아스타리온의 물음을 듣던 샤테이엘의 뺨과 목덜미가 수치심과 죄책감, 부끄러움 때문에 조금씩 붉게 달아 올랐다. 그는 자신이 감히 이런 말을 옛 연인에게 할 수 있는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해도 전부 기만처럼 들릴 것만 같아서, 그는 수십년동안 매일같이 혼자 중얼거렸던 말을 삼키고 또 삼키다가 겨우 한 번 내뱉었다.

“아스티, 미안해.”

“…….”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자격도 염치 없지만, 그래도 이 말을 당신에게 꼭 해야했어.”

샤테이엘은 아스타리온이 무슨 말이든 해주길 바랐으나 초저녁의 객실은 개미 한 마리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노련한 뱀파이어가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음에도 그걸 마주볼 자신은 없었다. 샤테이엘은 처분을 기다리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습관적으로 귀 뒤로 넘기다가 자신의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나와 아스타리온이 신고 있는 낡고 더러운 장화 위에 떨어지는 걸 보았다.

이제와서 꼴사납게 그에게 용서해달라고 무릎을 꿇거나 엉엉 울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얼마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혼란에 빠져 있던 그를 제대로 붙들어 주지 못했던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자신을 스스로 얼마나 원망했는지는 알려줘야 했다.

야영지 동료들 사이에서도, 스폰들에게서도 떨어져 나간 그가 혼자서 햇빛은 잘 피했는지, 토벌대의 습격 따위를 받아 외딴 곳에서 죽지는 않았는지 걱정하며 밤을 지새우다가 악몽을 꾼 적도 많았다.

아스타리온은 조용히 눈물을 한 두 방울 흘리고 있는 샤테이엘을 응시했다. 말문이 막혔다고 하기엔, 애초에 하고 싶은 말이 별로 없었다. 이제와서 전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답장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 뿐, 그는 사실 언더다크에서 보낸 편지를 전부 받아서 읽어보았다.

자신을 반강제적으로 비참하게 만든 연인이 뱀파이어 스폰들을 전부 책임졌다는 놀라운 소식을, 꼴보기 싫은 스폰 형제의 삐뚤빼뚤한 글씨로 처음 알았을 때 그는 이름도 알 수 없는 더러운 도시의 한 도살장 옆에서 쏟아지는 새벽비를 피하고 있었다.

빗물 때문에 잉크가 계속 번져가고 점점 글씨를 알아볼 수 없어졌기 때문에 그는 편지지가 젖어 모든 글씨가 뭉그러질 때까지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아스타리온이 수십년동안 혼자 방랑하고 떠돌면서 샤테이엘에게 궁금했던 건 단 하나였다. 지금 이 순간에 울고 있는 그의 멱살을 잡고 물어 보고 싶은 것도 단 하나였다.

 

똑똑.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두 남자는 얼어 붙었다. 아스타리온은 샤테이엘에게 뭔가를 말하려다 말고 입을 꾹 다물고는 후드를 뒤집어 쓴 뒤 복면으로 눈 아래를 가렸다. 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 민첩하게 이루어져서 놀라울 지경이었다. 샤테이엘은 급하게 눈물을 닦고는 매서운 눈으로 장검을 들었다. 뱀파이어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있었지만, 그의 두 손은 품 안에 있는 두 개의 단검을 꽉 쥐고 있었다.

“누구지?”

장검을 든 채 문 앞에 서서 밖의 기척에 집중하는 샤테이엘은 드로우 암살자 같았다. 얼마나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있을지 모르는 범죄조직의 2인자이자 연쇄살인범이 아스타리온의 정체를 알고 있을수도 있다는데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순 없었다.

“저예요. 구두 닦으러 왔는데요.”

문 밖에서 나는 앳된 목소리에 복면 위로 비치는 아스타리온의 붉은 눈이 느슨하게 풀어지더니 의구심 때문에 왼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샤테이엘은 그제야 장검을 내려놓고는 심호흡을 한 뒤 객실 문을 열었다. 소년은 약속을 지켰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은지, 객실을 한 번 둘러 보고선 침대에 앉아있는 아스타리온에게로 뚜벅뚜벅 다가갔다.

“당신 장화를 닦으러 왔어요. 신발이 정말 더럽네요. 저기 있는 클레릭 형이 자기 애인 신발을 닦아줄 수 있냐고 물었거든요.”

복면 안쪽에서 바보같은 웃음 소리가 들렸다. 아스타리온은 앉아서 그의 낡고 더러운 장화를 닦기 시작하는 소년에게 동전을 하나 꺼내어 내밀었다. 소년은 이미 클레릭 형에게 대가를 다 받았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복면을 쓰고 있던 뱀파이어도 지지 않았다.

“내 애인에게서 받지 않겠다고 한 거지, 내게서 받지 않겠다고 한 게 아니잖냐?”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샤테이엘은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소년에게 제대로 설명을 할 걸 그랬다. 아스타리온이 뭐라고 생각할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의 머릿속이 머리칼보다도 더 하얗게 질려 백지 상태가 되었다. 구두 닦이 소년은 중간중간 자신이 추가로 알아낸 연쇄살인범에 대한 정보를 아스타리온과 샤테이엘에게 이야기해줬고, 아스타리온의 장화를 거의 다 닦았을 때 쯤에는 못 생겼냐고 물어보았다.

“못 생…. 지금 나한테 물은거냐? 못 생겼냐고?”

“저 클레릭 형은 정말 예쁜데 당신은 얼굴을 다 가리고 있잖아요. 이 동네에서는 보통 얼굴에 큰 상처가 있거나 누가 알아보면 안되는 아주 흉악한 사람들이나 그렇게 얼굴을 가리거든요. 못 생겨서 가린거죠?”

아스타리온은 어이없다는 몸짓을 하면서도 끝내 소년 앞에서 복면을 벗진 않았다. 그는 황당하다는 듯 너, 그게, 흠, 같은 말을 몇 번 하다가 체념한 듯 어깨를 늘어 뜨렸다.

“그래, 못 생겨서 가렸다. 어쩔래.”

“목소리는 좋은데 안타깝게 됐네요. 인생은 그런 식으로 공평한거죠. 와, 깨끗해졌다. 난 이 마을에서 신발을 가장 잘 닦아요. 여기에는 한동안 더러운 거 안 묻을걸요.”

소년이 아스타리온에게서 받은 동전으로 손장난하면서 나가자 샤테이엘은 아이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서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스타리온이 자신을 향해 크게 비웃거나 화를 낼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다시 복면을 내리고 후드를 벗은 채로 얌전히 침대에 앉아있었다. 샤테이엘이 살펴보니 소년이 닦고 나간 자신의 낡은 장화를 들여다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스타리온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반짝반짝 윤이 나는 자신의 사냥꾼용 가죽 장화의 앞코를 바라 보고 있었다. 기묘하게도 소년이 얼마나 가죽에 광을 냈는지, 장화의 앞코에 자신의 얼굴이 아주 흐릿하게 비쳐 보였다. 거울로는 볼 수 없는 얼굴이, 광을 낸 가죽에 비쳐 보인다니. 물론 정확한 형태를 볼 순 없었지만, 비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해서 아스타리온은 몸을 숙이고 신발을 바라보았다.

“저 맹랑한 꼬맹이에게 나를 애인이라고 말했겠다?”

여전히 장화를 내려다 보며 아스타리온이 중얼거리자 샤테이엘은 몹시 당황했다. 사과하고 싶었지만 뭐라고 말해야할지 바로 떠오르지 않아서, 그답지 않게 침착함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가련한 드로우의 걱정과는 다르게 아스타리온은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그들은 곧 폐허가 된 대장간으로 찾아갈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더러운 땅바닥이었고, 비명을 지르는 장검은 손에서 떨어져 저만치 나뒹굴고 있었다. 샤테이엘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팔을 뻗어 보았지만 무엇이 잘못 됐는지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주변에는 작은 피웅덩이처럼 보이는 게 있었는데, 그게 자신의 피라는 건 꽤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깨달았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고막이 터졌거나, 아니면 귀에 뭔가가 들어간 것 같았다. 함께 대장간을 공격하기로 하고, 시간을 정했는데 아스타리온이 나오지 않았다. 콜록, 하고 기침을 하자 피거품이 섞인 타액이 땅바닥에 흩뿌려졌다.

아주 잠깐, 그와 함께 공동의 적을 무찌르는 상상을 하며 단꿈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다시 시작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저 용서 받고 싶었다. 초월체가 아닌 어둠의 존재로서 그림자 속에 살면서도 그 안에 잡아 먹히지 않은 그를 동경한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하고 싶었던 수천 마디의 말은 이렇게 피와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버려진 대장간의 뜨거운 불길 속으로 끌려 들어가 시커먼 재가 되어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샤테이엘은 아스타리온의 배신이 그리 놀랍지 않았다. 옛 연인은 아마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이곳이 범죄 집단의 본거지였으며, 상당수의 적들이 이미 매복한 상태라는 사실을. 그렇다. 이곳은 연쇄 살인범의 단순한 숨은 은신처 따위가 아니라 모든 무기와 화약, 돈, 그리고 그의 수하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솔직하게 말해볼까?

나는 네가 절규하며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그의 바람대로 절규하며 죽어버리면 보기 좋았을텐데, 성대를 다친건지 폐를 다친건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절규도 할 수 없었다. 전투를 하다가 이렇게 크게 다쳐본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 사고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장미의 아침 수도원이었던가? 일릭 양성소가 있었던 그곳…. 그것도 아니면 바알 신전에서 바알 신도들과 오린을 상대로 전투를 했을 때였던가? 고통스러워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와중에도 과거의 일이 어제의 일처럼 기억나는 게 신기했다. 샤테이엘은 과거에 맡았던 베르가못과 로즈마리 향을 떠올렸다. 정말 그 냄새가 나는 것처럼 생생했다. 아스타리온과 붙어서 전투를 할 땐 항상 피비린내 사이에 은은하게 톡 쏘는 그 허브향이…….

쓰러진 상태로 반쯤 뜨고 있었던 눈 앞에 더러운 바닥과 어울리지 않는 아주 깨끗한 가죽 장화 한 짝이 한 발씩 다가와 멈춰 서더니 샤테이엘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장화가 잠시동안 눈 앞에 멈춰서 가만히 있길래 샤테이엘은 장화의 주인이 자신을 참수하거나 칼로 찔러 확인 사살하려는 줄 알았다. 그에게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계속 피를 조금씩 땅에 토하면서 맨들맨들한 장화의 앞코를 바라 볼 뿐이었다.

너무 졸음이 쏟아져서 잠을 잘 생각으로 양쪽 눈꺼풀을 천천히 아래로 내리다가 아예 눈을 감고 몇 초나 지났을까? 갑자기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온몸이 차갑게 젖고, 심하게 고통이 엄습했다. 샤테이엘은 자신이 치유 물약을 온몸에 뒤집어 썼다는 걸 바로 깨달았다. 아스타리온이 쭈그리고 앉아서 치유 물약에 젖은 그의 얼굴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죽지 마.”

“…….”

“네가 내 모든 걸 망쳐 버려서 난 너를 스폰으로 만들수도 없어. 그러니까 죽지 말라고.”

샤테이엘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너는 나를 죽이고 싶어서 함정을 판 것 아닌가?

“오는 길에 평소라면 그냥 뛰어서 건널 수 있는 물이 불어 있었어, 젠장. 난 이제 그런 물은 건널 수가 없어서 방법을 찾아야 했을 뿐인데. 샤티, 넌 왜 이리 성격이 급해?”

더러워진 드로우의 흰 뺨 위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스타리온은 혀를 차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영창을 하더니 샤테이엘에게 투명화 마법을 걸었다. 예상치 못한 뱀파이어의 행동에 샤테이엘은 투명해진 채로 누워 눈알만 도륵도륵 굴리고 있었다.

“네 몰골 말야. 지금 아주 끔찍하거든. 아름답지 않아. 그러니까 이 마법 풀릴 때까지 여기 누워서 양이나 세고 있어. 그리고 지금은 조금 자도 돼, 자기.”

 

이상하게 몸이 계속 흔들리고 움직여서 잠깐 눈을 떴을 땐, 공중에 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하늘을 날고 있는 건 분명 아닐텐데, 그것과 비슷한 기분. 추웠다. 샤테이엘은 잠결에 이게 어찌된 일일까 생각하다가, 자신이 지붕 위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날고 있다 착각 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스타리온.”

“왜.”

“…….”

“아하, 이게 궁금한 건가?”

아스타리온은 샤테이엘을 업은 채로 지붕 위를 뛰어다니다가 잠시 멈추더니 피가 뚝뚝 떨어지는 커다란 가죽 주머니를 내밀었다. 보나마나 사냥감의 수급이 들어있을 것이다. 샤테이엘은 아스타리온에게 다시 주머니를 돌려주고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자신의 등에 갖다 댔다. 아스타리온이 잊지 않고 챙겼는지 팔라 알루베가 얌전히 검집째로 등에 매달려 있었다.

“롤쓰가 이 꼴을 보면 재미있다고 무릎을 치겠군.”

“…….”

뱀파이어는 동이 트기 전에 여관을 가야 한다는 생각에 최대한 빨리 밤공기를 가르려 했다. 샤테이엘은 여전히 온몸이 아팠고, 자신이 입고 있는 갑옷이 피에 젖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왠지 곧 다 괜찮아질 거라는 바보같은 희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확실히 예전과는 달랐다. 그는 샤테이엘을 업고 뛰면서도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말이 달리기지, 반쯤 날고 있다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은 길고 검은 후드 망토를 입은 채로 달리고 있었으므로, 멀리서 누군가 이 광경을 보면 아주 커다란 박쥐가 지붕위를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네게 묻고 싶은 게 있어, 샤테이엘.”

여전히 지붕 위를 달리면서 아스타리온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그랬어?”

클레릭은 쏟아지는 달빛을 맞으며 업힌 채로 뱀파이어의 목을 조금 더 끌어안았다.

“나를 사랑한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왜? 왜 그랬던거야?”

그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아스타리온은 자신의 등 뒤에 업혀 있는 피투성이 클레릭이 기절해 있다가 조금 전에 깼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익혀둔 투명화 마법을 샤테이엘에게 걸어준 뒤 대장간은 불바다가 되었다. 아스타리온의 사냥감은 샤테이엘을 아스타리온으로 착각한 것 같았다. 그들에게는 비슷한 면이 있었으니 이해가 갔다.

뱀파이어 스폰으로서 방심하고 있는 인간 몇의 목숨을 빼앗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범죄자들이 죽어가며 지르는 비명소리를 듣는 게 즐거웠고 특히 샤테이엘을 여러 번 칼로 찌른 녀석의 몸은 세 동강으로 분리시켜주었다. 샤테이엘은 아스타리온이 아주 조금만 늦게 도착했어도 죽었을 것이므로, 현상금 사냥꾼은 딱히 자비를 베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넌, 내가 하고 싶은 건 뭐든 하게 해줬지. 딱 그거 하나만 빼고. 난, 내가 초월체가 되는 걸 너도 원하는 줄 알았는데. 넌 갑자기 내게서 등을 돌렸잖아.”

아스타리온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말을 이으며 평정을 약간 잃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야영지를 떠나고서는 너를 죽일 생각 밖에 안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니까 어떻게든 살아지더군. 분노가 가라앉고 나니까 그 이유가 궁금하더라고. 왜 그랬을까? 그렇게 다정하고 순하고 관대하고 상냥했던 네가, 왜 그 순간에만 고집을 꺾지 않았을까?”

<살구빛 토끼 발바닥> 여관의 지붕에 도착했을 때, 아스타리온은 여관의 문을 이용하지 않고 샤테이엘을 업은 채로 벽을 타고 내려와 자신의 방 창문을 열었다. 아주 어두운 방이었고, 창문에는 시커먼 암막 커튼이 달려 있었다. 뱀파이어는 아주 능숙한 동작으로 창문을 통해 객실로 들어간 후 샤테이엘을 자신의 침대에 눕혔다. 곧 동이 터올 것 같아서 마음이 급했다. 그는 창문을 닫고 암막 커튼을 친 뒤 객실 문을 열고는 팻말을 걸었다. 객실 전체에 불이라곤 촛대 위에 올라간 짧아진 촛불 하나 뿐이었다.

사냥에 성공한 현상금 사냥꾼은 촛대를 들고 샤테이엘에게 다가와서 누워 있는 그의 얼굴을 잠시동안 촛불로 비췄다. 촛농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들여다 본 드로우의 얼굴은 핏기가 없이 매우 창백했지만 호흡은 안정적이었고 치유 물약 덕분에 가장 심각한 고비는 넘긴 듯했다. 들고 있는 촛불을 끄면 이 방은 아주 어두워질 것이기에, 아스타리온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검은색 담요를 가져왔다. 그는 샤테이엘의 옆에 누우며 마치 밤을 뒤집어 쓰듯 커다란 검은색 담요를 덮었다.

“오늘 해가 진 직후에도 내가 네 목숨을 붙여 놨다면, 넌 많은 것에 대답해야 할거야. 알겠어?”

눈을 뜨지 못하는 샤테이엘이 아주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알아챈 아스타리온이 여명을 온 감각으로 느끼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성가신 녀석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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