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신+미네르바] 독백 (1)
낭패로군.
고블린 부락의 핵심부까지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런 방식으로 여기를 조사할 생각은 아니었건만, 생각이 짧았다. 실바너스시여, 굽어 살피소서. 지금 나는 곰의 형상이고, 워그 우리로 끌려와 갇힌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다. 시야가 좁아지고, 눈 앞이 뿌얘진다.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곰으로 형상을 변환한 상태를 오래 유지할수록 머릿속에 담아둘 수 있는 과거와 미래의 간격이 현저히 짧아진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의식의 끄트머리를 어렵사리 비틀어 쥐었다.
밤의 노래. 그 이름을 에메랄드 숲에서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발더스 게이트 출신이라던 모험가 아라딘은, 한 위저드가 밤의 노래를 언급하며 거액의 보상금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밤의 노래, 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의 정신은 100년도 더 전의 과거로 끌려간다. 그 과거는 마치 그날 이후 내가 한 번도 벗어나 본 적 없는 거대한 쇠사슬처럼 나의 목덜미를 칭칭 감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분명 에메랄드 숲에 마련된 내 서재 근처에서 담배를 물고 서 있었는데,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지고 매캐한 죽음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여기저기에서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난 허겁지겁 그들의 시신을 끌어안았다. 하퍼들이 던지는 창과 드루이드들이 쓰는 마법은 케더릭 토름과 그의 군대 앞에서 무력하게 부러지고 사라졌다.
케더릭 토름이 원하는 것은 종전이 아니라 종말이었고, 승리가 아니라 절멸이었다. 모두의 죽음만을 위하는 이에게 항복이나 휴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피와 뼈, 썩은 살점들과 그것들을 태우는 불길이 그득했다. 쓸모없는 나의 두 손으로 직접 흙을 파내 동료들을 땅에 묻어 자연으로 돌려보냈으나, 나중에는 그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지평선 끝에서부터 서서히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던 검은 그림자를 피해 숨가쁘게 달리고 있다. 내 등에 업혀 있는 스승님께 괜찮으시냐고 말을 걸고, 넘어지고 일어나길 반복하며 바람처럼 달리는 나의 뒤로 죽어가는 이들의 신음과, 나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내가 그때 울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의식이 없는 스승님을 부르며 겁먹지 않은 척 했었던가? 얼마나 쉬지 않고 오래 뛰었는지 돌아와서 보니 발톱이 빠져 있었지. 담뱃대 안의 담뱃잎이 전부다 재가 되었을 때에야 나는 겨우 나의 몸이 에메랄드 숲에 있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네티에게 전하는 말을 쪽지에 급하게 휘갈겨 쓴 후, 아라딘에게 나를 안내해 달라고 말했다. 케더릭이 밤의 노래라는 유물을 어딘가에 숨겨두고 그 힘을 이용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다. 밤의 노래가 무엇이고, 어디에 그게 있는지는 100 년만에 처음 들었기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림자 때문에 그 무엇도 살아남을 수 없는 저주 받은 땅이 되어버린 라이스윈과 그 일대는 퇴각하던 날 이후로 가 본 적이 없었다.
고블린의 공격 때문에 숲 밖을 돌아다닐 수 없다는 티플링 난민들이 에메랄드 숲 안에 막 자리를 잡은 후였고, 그들의 우두머리인 팔라딘 제블로어가 나를 붙잡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그가 하는 말이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그 즈음 나의 허약한 정신은, 이미 100년 전의 전쟁터에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밤의 노래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고, 고블린 부락의 근처에 있는 한 신전을 통하면 된다는 브라이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막무가내로 고블린 부락을 향해 간 것이 화근이었다. 고블린의 숫자가 그렇게까지 많을 거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조금만 깊이 생각을 해봤으면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후회했을 땐 이미 늦었다. 잔혹한 고블린들은 우리를 에워싼 뒤 밤의 노래를 찾을 수 있는 신전 입구, 그곳의 문을 여는 암호에 대해 알고 있었던 브라이언을 눈 앞에서 살해했다.
난 그의 살점이 타는 냄새를 맡으며 고블린의 살의와 나의 살의를 느꼈다. 아라딘이 동료 몇과 함께 나를 등지고 도망치는 게 보였다. 그건 새삼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만, 도망치는 아라딘의 뒤를 고블린 한 무리가 쫓는 것을 보고 난 망설이지 않고 곰으로 변신했다. 아라딘이 고블린들을 에메랄드 숲으로 이끌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눈 앞에 있는 고블린 둘을 죽인 게 고작이었고, 나와 리암은 부락 안쪽 깊은 곳으로 끌려갔다.
리암은 고문당할 것이다. 그가 얼마나 오래 버틸지는 알 수 없었다. 곰으로 변한 내가 워그 우리의 문을 부수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그 이후가 문제였다. 워그 우리에 있는 모든 고블린을 다 죽인다 해도, 그 밖에는 또 고블린들이 있다.
‘할신, 너는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히면 그 문제가 해결되거나 완전히 흥미가 식을 때까지 오로지 그것만 생각하는구나. 너의 그런 성정은 때로 네가 만든 너의 감옥이 될 것이다.’
나는 분노에 가득차 우리 안을 돌아다녔다. 스승님이 여러 번 충고해주신 나의 성격은 350살을 먹어도 도무지 고쳐지질 않는다. 고블린 셋이 우리 앞에서 떠들며 내게 돌을 던졌다. 날아오는 대부분의 돌은 빗나가거나 맞아도 별로 아프지 않았지만, 가끔 한 두 개가 얼굴을 때릴 때가 있었다. 그들은 내가 워그 우리로 잡혀 오기 전에 죽였던 고블린 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우리 안에 있는 내게 돌을 던지고 데리고 놀다가 워그를 풀어 죽일 생각이었다.
이를 간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건 곰이 으르렁거리는 소리였다. 참을성이 점점 바닥나고 있었다. 마법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인간의 육신은 수많은 적을 상대하기에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상황이 급변하지 않는 이상 죽을 때까지 곰으로 존재할 것이다. 송곳니를 드러내며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리자 돌 두 개가 더 날아왔다.
밤의 노래를 찾으러 가야 한다. 케더릭 토름의 비밀을 파헤쳐야 한다. 내가 도망치느라 미처 해결하지 못하고 그대로 죽음의 땅이 되도록 내버려둔 라이스윈을, 치유하러 가야만 한다. 그곳에서 그림자 저주를 몰아내고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한 뒤 다시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물이 흐르게 만들어야만 했다. 나는 100년 동안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해왔고, 그것만이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라 믿었다. 내가 승리하지 못한 전쟁과, 비겁하게 등졌던 젊은 날로부터 당당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
어차피 계속 갇혀 있으면 고블린들이 나를 고문하다가 죽일 것이고, 이곳을 뛰쳐 나가도 결국엔 죽는다면 적어도 고블린 몇을 죽이고 명을 다하는 게 나을 것이다. 실바너스시여, 힘을 주소서. 에메랄드 숲의 아치 드루이드, 저 할신은 오늘 이곳에서 오래 묵은 과오와 어리석음을 뉘우치며 숲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숨까지 아낌없이 쓸 것을 맹세하나이다. 숲에서 아둔한 스승을 기다리고 있을 제자들과, 고향 잃은 이들을 굽어 살피소서…….
내가 크게 심호흡하고 워그 우리의 쇠창살을 막 부수려 할 때, 고블린들이 드나드는 우리 외부의 문이 열리며 고블린 아닌 이들이 몇몇 들어왔다. 그들이 열어제낀 문으로부터, 내가 갇혀 있는 우리까지 길고 가느다란 바람이 불어왔고 그 바람 속에서 난 고블린의 피냄새를 맡았다. 살육. 내가 갇혀 있는 사이 저 밖에서 엄청나게 많은 고블린이 죽었다. 나의 피가 끓었다.
우리 앞으로 다가온 자들은 피투성이였다. 그들의 몸에 묻어 있는 게 고블린의 피라는 건,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었기에 나는 쇠창살에 딱 붙어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놈들을 저지하고 나를 풀어주시오. 우리 밖에 서 있던 낯선 자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는 키가 큰 엘프였는데, 한 손에는 검을, 다른 손에는 방패를 들고 있었다. 그들 중 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 아무도 없어 보였다. 나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린다.
나를 풀어 주시오.
당장 놈들을 해치우시오.
검을 들고 있던 피투성이 팔라딘과 우리 안에 있던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이곳에 오기까지 많은 싸움이 있었던 듯 굳은 표정이었고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눈만은 차갑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가 미세하게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칼을 들어 공격태세를 갖추자마자 나는 우리의 문을 부수고 튀어나갔다. 기대하지 않았던 아군이 생겼다. 이곳에서 시체가 되지 않을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피를 보고 싶은 본능을 억누르기가 무척 어려웠다.
피범벅을 만들 생각으로 우리 문을 부쉈고 그 바람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고블린 하나의 숨이 끊어졌다. 팔라딘이 데려온 사람은 총 셋. 곰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나를 포함해 아군은 다섯이다. 해볼만한 싸움이었다. 이곳에서 살아서 나갈수만 있다면, 내게 다시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숲을 지키고 그림자 저주를 해제할 기회가.
가능성은 낮았지만, 혹시라도 아라딘이 지원군을 데리고 올 경우에 대해서도 생각했었다. 차라리 어느 누구도 데려오지 않는 게 낫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살아서 나갈 확률이란 건 바늘구멍보다 작다는 사실이 새삼 곰의 심장을 묵직하게 때렸더랬다. 그런 나에게, 갑자기 고블린 학살자들이 찾아온 것이다. 그들은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이미 전투를 겪었고 그래서 지쳐있었을텐데도 워그 우리 안에 있던 고블린들 몇과 워그 두 마리를 손쉽게 해치웠다.
워그 우리를 정리한 후 내가 다시 동굴 곰이 아닌 우드 엘프 할신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푸른 눈을 형형하게 빛내고 있던 긴 머리칼의 팔라딘은 놀라지도 않았다. 나중에 물어보니 워그 우리 근처에서 고문당하고 있던 리암을 구출했고, 리암으로부터 내가 곰으로 변한 채 끌려갔다는 걸 들었다고 한다. 자신의 이름을 미네르바라고 밝힌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난 내 이름도 밝혔다.
미네르바 일행에게는 문제가 있었고, 그들은 치유사로서의 나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나는 우선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전 나의 몸에 치유술을 사용해 정신과 신체를 약간이나마 가다듬었다. 곰의 모습을 하고 있다가 드루이드로 돌아오니 확실히 살의가 줄어드는 것이 느껴진다. 갇혀 있던 나를 구해준 광인 친구들의 문제는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오랫동안 연구해왔던 일리시드 올챙이에 감염됐지만 아직 변이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아는 한에서 숙주를 변이시키지 않는 마법에 걸린 올챙이에 대한 정보를 주었고, 올챙이에 감염된 사람들이 달오름탑으로 모여들고 있다는 사실 역시 알려주었다.
밤의 노래, 올챙이, 그리고 달오름탑. 이 모든 것들이, 100년 동안 죽은 듯이 잠들어 있던 과거를 갑자기 내 눈앞에 들이밀며 마치 손을 뻗으면 잡힐 것처럼 점점 뚜렷해진다. 우선적으로 에메랄드 숲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고블린의 우두머리 셋을 처치해주면 그들이 달오름탑으로 가는 여정을 함께 하며 아는대로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당장 올챙이를 뇌에서 뽑아낼 수 없음에 팔라딘의 동료들 중 둘은 크게 실망한 것 같았고, 나머지 하나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푸른 눈의 미네르바는 작게 한숨을 쉬었지만 표정에 큰 변화는 없었고, 자신이 나를 구하러 오던 중 이미 거트 여사제와 민타라는 처치했으니 라그즐린만 손을 쓰면 될 것이라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기쁘고 다행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놀랐다.
에메랄드 숲을 돕기 위해 고블린의 우두머리들을 처치한다는 것은 분명 수고로운 일일텐데 미네르바는 흔쾌히 수락한다. 나는 아치 드루이드로서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도움을 그와 그의 동료들에게 줄 것이며, 그들과 함께 무시무시하게 차갑고 어두운 그림자 땅으로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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