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지아스더지] 태양 아래 가장 짙은 그림자 (2)

성가신 녀석의 곁을 지키기

발더게3 by 권태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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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안에 들어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올챙이를 없애버리기 위해 시작된 이 끔찍하고 기괴한 여정을 함께하는 이가 점점 늘어났다. 조용히 잘 웃고, 종종 멍한 표정을 짓는 음유시인 녀석은 신기하게도 사람을 잘 모았다. 누군가를 유혹하는 매력을 겨루는 대회가 있다면 아스타리온은 그 분야의 챔피언이 될수도 있었겠지만, 음유시인의이 발휘하는 매력은 술집에서 취한 상대를 칭찬하며 침실로 끌어들이는 종류와는 꽤 달랐다.

그건 아스타리온도 별로 겪어본 적 없는 것이어서, 그는 ‘디온’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그 녀석이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자신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유심히 관찰하곤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녀석에겐 눈앞에 있는 사람들의 경계를 풀고 의심이 사라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크지는 않지만 듣고 있으면 기분 좋아지는 낮은 목소리에, 보통 사람들은 쓰지 않는 기묘한 어조가 또렷한 발음과 더불어 그의 말에 금세 집중하게 만들곤 했다.

아스타리온은 자신이 항상 연기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 그렇게 다소 과장된 표정을 짓고 연극적인 몸짓을 하고 달콤한 목소리를 꾸며내야 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카사도어는 아스타리온이 자기 자신으로 있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카사도어의 스폰이 된 후, 아스타리온은 가장 먼저 자신의 눈 색을 빼앗겼고, 음식을, 옷가지를, 책을, 음악을, 표정을, 목소리를 차례차례 약탈당했다. 그런데 저 녀석에게선 어느 누구도 그 모든 걸 빼앗아가지 않았군.

디온은 왜 지금 당장 산길을 따라 기스양키 양성소로 향할 수 없는지 열심히 레이젤을 설득하는 중이었다. 레이젤은 확실히 음유시인을 이 작은 모임의 리더로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었는지, 요즘엔 꽤 협조적이다. 티플링들이 설치해 둔 함정 때문에 나무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을 때부터였던가? 아스타리온도 마찬가지지만 레이젤이 보기에도 디온의 말이나 행동에 마뜩하지 않은 구석이 분명 있었을텐데 보통은 툴툴거리면서도 결국엔 그의 말을 따르는 게 신기했다.

대화를 나누다가 무언가가 잘 안 풀렸는지, 디온이 긴장한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는 게 보였다. 아스타리온이 거의 매일 밤 그의 목덜미에 구멍을 뚫어 놓기 때문에 그 작은 두 개의 상처는 완전히 아물기는 어려워 보였다. 음유시인의 목덜미엔 꽤 크고 짙은 문신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주 자세히 그의 목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은 잇자국을 발견하기 힘들었으나, 그래도 꽤 자주 녀석은 옷깃을 올려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는 듯했다.

목덜미로 가져간 손바닥이 움찔하더니 다시 스르륵 내려가 얌전히 바지 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간다. 그 모든 동작이 마치 무용을 하는 것처럼 끊김없이 계산된 것처럼 이루어져, 무척 아름답고 동시에 매우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아스타리온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서늘한 녹색 눈동자 때문에 움찔했다. 그의 피를 너무 자주 먹어서일까? 태양 아래에 서서 아스타리온을 바라보는 음유시인은 값비싼 도자기를 빚어 놓은 것처럼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어지럽진 않아?”

바지 주머니 속에 넣은 그가 양손을 어린애처럼 꼬물거리고 있는 게 보여서 좀 우스웠다. 몇 살이나 먹은거지?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하는 녀석이 나이를 기억할 리 없었다. 그래도 아스타리온은 막연하게 그가 자신보다는 어릴 거라고 생각했다.

“당신에게 피를 제공하는 것 때문에 묻는 거라면, 예, 괜찮습니다.”

“보기보다 꽤 건강해서 다행이야.”

디온은 그가 좋아하는 뱀파이어가 이렇게 잠깐씩 말을 걸어주는 시간을 사랑했다. 매일 밤 야영지에서 조금 떨어진 숲으로 가 그에게 목을 내어주고, 갈증을 해결한 그와 격렬하게 몸을 섞을 때에도 디온의 머릿 속, 귓가, 마음 속에서 그를 찢어버리라고 소리질러대는 충동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뿌옇게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마치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서랍 속에서 유일하게 엉키지 않은 깨끗한 실타래 하나를 조심스렇게 건져 올리듯 아스타리온이 내는 모든 소리와 자신을 더듬는 손길에 집중했다. 그러면 잠시라도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착각할 수 있었으니까.

아스타리온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걸 알아채는지, 스스로도 의아할 지경이었지만 아무튼 다 보였다. 야영지의 누가 자신을 좋아하고, 별로 관심이 없는지 마치 수치로 나타낸 표를 보는 것처럼 너무나 명확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서도 전부다 느껴졌다. 적대감이 호의로 바뀌는 순간의 공기를 들이마시기도 했고, 호감이 혐오로 바뀌며 피냄새가 나는 경우도 있었다. 거의 짐승과도 같은 감각으로, 디온은 그런 순간들을 마치 사냥하듯 시간의 흐름 속에서 포착하고 끄집어내 본인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만들곤 했다. 하지만 아스타리온은……. 어쩌면 그는 눈치가 지나치게 빠른 걸지도 모르겠다.

바지 주머니 속에 넣고 있던 손을 꺼내자 손이 덜덜 떨렸다. 아스타리온이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 보는 게 느껴져서 주먹을 꽉 쥐었다. 정말 괜찮은거야? 하고 꽤 상냥하게 묻는 목소리가 마치 물 속에서 듣는 소리처럼 먹먹했다. 죽여. 죽이라고. 단검, 지금도 갖고 있잖아. 넌 누구보다도 칼을 잘 쓰지. 어젯밤에도 숲에서 죽일 수 있었잖아. 지금도 눈 앞에 있지. 뭘 망설이는거야. 아무도 모르게 죽일 수 있었잖아!

“안색이 안 좋은데.”

“…….”

“오늘밤은 내 배를 채워주지 않아도 괜찮아.”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사실 당신을 위해서만 피를 주는 건 아니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아스타리온을 바라보니 하얀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꿈틀거렸다. 그의 미세한 얼굴 근육의 움직임은, 걱정과 상냥함, 그리고 깊은 혐오감이 뒤섞여 있었기에 디온의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실망한 얼굴이네. 섹스는 해도 좋아. 너도 나도 그짓 하는 거 좋아하니까.”

“아, 아니……. 네, 그래요.”


 

디온은 아스타리온이 자신을 처음으로 마셨던 날을 떠올렸다. 암살자처럼 그림자 속에 숨어서는, 편안하게 잠들어 있을 동료를 마시기 위해 살금살금 고양이처럼 걷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음유시인의 모든 감각은 너무 예민해서,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아스타리온의 움직임을 눈 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자신을 공격하면 품에 지니고 있던 칼로 어디를 어떻게 찌르고 베어야 할지 1,2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동안 계산이 끝났고 심지어 그런 계획을 짜는 동안 상당한 희열과 만족감을 느꼈다.

손에 든 날카로운 단도를 보고 아스타리온은 제법 놀란 듯 했고, 묘하게 자책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건 디온이 이해할 수 없는 태도였기에, 흥미가 생겨 도대체 뭘 하는거냐고 속삭이듯 물었을 때 아스타리온은 자신이 뱀파이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올챙이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 받을 수 있었던, 죽은 쥐. 지옥같은 허기, 빠져 나가는 기력, 지성체의 피를 한 모금이라도 마시고 싶다는 미칠듯한 갈망.

손에 쥐고 있던 칼을 천천히 품에 다시 넣었다. 그는 아스타리온이 부탁을 하기 전에 이미 그에게 자신의 피를 제공할 의지가 있었지만, 참을성있게 뱀파이어의 제안을 기다렸다. 아스타리온은 이상한 짓을 하려던 게 아니라며 어설프게 변명했고,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에 당황한 듯 보였다.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야영지의 동료에게 달려들려고 했다는 사실이, 아스타리온 본인에게도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디온은 어둠 속에서 뱀파이어의 두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는 탁월한 암시야를 가지고 있어서, 눈을 감아버리지 않는 한 암흑 안으로 뛰어 들어도 뭐든 볼 수 있었다. 붉은 두 눈은 아주 오랜 허기와 갈망 때문에 활활 불타다 못해 버석하게 말라 붙어 있었다. 공허함.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피에 굶주린 짐승을 남에게 내보였기 때문에 느끼는 수치심, 그럼에도 포기하기 어려운 피 한 모금. 음유시인은 눈을 감았다.

당신을 믿어 보겠다고 했다.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 넣고 흡혈하는 내내 뱀파이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물을 마시는 사람처럼 거친 숨을 내쉬었다. 몸에서 점점 힘이 빠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을 때 디온은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아스타리온의 두 어깨를 꽉 붙잡곤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다음에도 마시고 싶다면 나를 지금 죽여선 안되겠죠.”


 

“음, 뭐야, 자기……. 왜 그래?”

흡혈은 건너 뛰었지만, 분명 평소처럼 잡아먹을 것처럼 서로의 육체를 탐하고 의식이 흐릿해졌던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꿈을 꾼 건지 모든 게 모호했다. 옷을 대충 걸쳐입은 아스타리온이 자신의 턱을 잡아 위로 올렸을 때야 비로소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오, 젠장. 몸이 불덩이인데. 카를라크처럼. 내가 만져본 적은 없지만,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거야.”

“모르겠어요. 아프네요.”

“‘아프네요’? 바보처럼 그렇게 말하지 마. 너 지금 정상이 아냐.”

“누가 제 온몸을 찢어 놓은 것 같아요.”

“아니, 이런. 너 지금 울고 있잖아……. 섀도하트나 게일을 불러야겠어.”

벌거벗은 채로 최대한 몸을 웅크려 고통을 완화시켜보던 음유시인은 다급하게 아스타리온의 다리를 붙잡았다. 오늘만 이런 것도 아니었다. 몸이 갈갈이 찢기거나, 머릿속이 갈갈이 찢기거나, 둘 다 찢겨 나가거나. 가끔은 폭탄을 맞은 것처럼 몸이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 들어서 눈에 띄는 것들 중 아무거나 자기가 느끼는 기분처럼 똑같이 산산조각 내고 싶어졌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자신의 발목을 꼭 붙잡고 있는 걸 본 아스타리온은 성가시다 생각하면서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정말 아파서 우는 거로군.”

아스타리온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깨를 들썩이며 숨죽여 우는 녀석의 벗은 등을 보자 참담한 기억이 떠올랐다. 잠시동안 역한 기분이 들었음에도, 이내 떨쳐내고 녀석의 옆에 함께 누웠다. 그저 고통을 견뎌내기 위해서 최대한 작은 소리로 흐느끼는 건 아스타리온도 과거에 많이 해 본 일이었다.

왼손을 들어 검지로 그림을 그리듯, 괴로워하는 음유시인의 목덜미부터 어깨를 거쳐 등과 허리까지 천천히 긁어내렸다. 그의 등에 가늘고 긴 선을 몇 개나 그었을까? 어느새 울음이 그치고 호흡이 안정되는 게 보였다. 섹스할 때까지만해도 괜찮아 보였고, 도대체 왜 이러지 싶을 정도로 자신에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해서 귀찮았는데, 잠깐 눈을 감는 것 같더니만 짐승처럼 끙끙거리며 아파하다니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당신에게 내 피를 처음 준 날을 생각하고 있었어.”

완전히 잠긴 목소리로, 디온이 중얼거렸다. 여전히 그의 옆에 누워서 아픈 이의 안색을 살피던 아스타리온이 약간 신경질적으로 웃는다. 그는 동료의 몸에서 잠시 손가락을 떼고 싸늘해진 눈빛으로, 입가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아프다고 죽어가면서 도대체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거야. 내게 주는 피가 그렇게 아까우면 다시 주지 않아도 돼.”

“그게 아냐…….”

디온은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를 해치고 숨통을 끊어놓고 싶다는 충동과 싸우고 있었다.

“당신에게 피를 주는 게, 그걸 먹고 갈증이 해소된 행복한 얼굴을 보는 게 좋았는데.”

“아, 그래? 정말 다정한 말이네. 지금처럼 땀에 푹 젖어 죽어가면서 할만한 얘긴 아닌 것 같지만.”

살육에의 충동을 잠재우려면 그 괴물의 말처럼 누군가를 꼭 해쳐야할까. 하지만, 이 충동이 식욕이나 성욕 같은 굶주림이라면, 채워주면 채워줄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하고 갈망하게 될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아스타리온이 매번 자신의 피를 마시면서도 적당한 순간에 입을 떼고 물러서는 걸 볼 때마다, 자신의 욕망도 저렇게 다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아스타리온이 뱀파이어라는 걸 고백했을 때 자신이 그를 받아준 것처럼, 매일같이 그를 살해하는 충동을 느낀다고 고백했을 때 그가 자신을 받아줬으면 좋겠다고, 참으로 헛되고 추악하며 불가능한 일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품는다.

연인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아, 그저 친구로, 아니 동료로라도.

“어떻게든 견딜테니까요…….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아스타리온은 눈 앞의 상대가 맥락을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갑작스레 보여주는 환한 미소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러니 조금만 곁에 있다가 가요. 귀찮겠지만……. 아주 잠깐이면 돼요.”

“그렇게 예쁘게 웃지 마. 너 그럴 때마다 나한테 말뚝 들고 달려오던 성직자들 같아.”

차가운 새벽 이슬을 맞으며, 아스타리온은 자기 옆의 남자가 짐승처럼 끙끙 앓다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몇 번 내쉬는 걸 들었다. 마침내 괴로워하던 그가 안정을 찾고 다시 완전히 잠든 걸 확인했지만, 왠지 당장 자리를 뜨고 싶다는 기분이 들진 않아서 그대로 계속 누워있었다. 겉보기엔 튼튼해 보이고 눈에 띄는 상처도 거의 없는데 뭐가 문제인지 정말 모르겠다. 이용할 가치가 있어서 붙어 지내는 녀석에게 필요 이상으로 신경써야 하는 건 사절인데 말야.

“……아스타리온.”

“응?”

“이제 가도 됩니다.”

“자기, 착각하지 마. 너 때문에 여기 계속 누워있는 게 아냐. 새벽달 때문이지.”

잠든 줄 알았는데 그냥 눈만 감고 있었나보다. 아스타리온은 음유시인의 말을 무시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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