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지아스더지] 태양 아래 가장 짙은 그림자 (1)

첫 경험 : 햇빛 아래에서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기

발더게3 by 권태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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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아래 다시 설 수 있게 된 이후 누군가와 가진 첫 잠자리였다. 야영지에서 조금 떨어진 수풀에 자리를 마련한 후 기다리고 있노라니 쭈뼛거리며 녀석이 다가왔다. 뱀파이어 스폰인 자신보다 더 기척없이 다닐 때가 많은 음유시인인지라, 아스타리온은 반갑게 마중을 하면서도 괜스레 불쾌해졌다. 가벼운 웃음과 은밀한 시선으로 던진 유혹을, 말도 표정도 없이 굳어 있던 그가 넙죽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을 꽤 높게 점쳤던 모양이다. 200년 동안 수도없이 써먹었던 ‘그 매력’으로 타인을 조종하지 못할까 봐 불안해하는 건 전혀 자신답지 않은데도.

야영지의 리더 격인 녀석의 정신과 육체 모두 확실하게 벗겨 먹어야겠다는 결심을 세운 건 더러운 늪지에서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고 있을 때였다. 에메랄드 숲의 난민 캠프에서부터 끊임없이 헛소리를 하던 미친 할망구가 너무 웃겨서, 아스타리온이 자기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허공에 웃음을 흩뿌렸더니 바보같은 음유시인이 할망구의 초대에 응해버렸다. 화창한 날씨에 아름다워 보였던 습지가 게일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썩은 늪지로 변하는 걸 지켜보면서, 아스타리온은 아무래도 할머니의 집엔 가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늪지에서 에메랄드 숲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거르 족 괴물 사냥꾼을 만났는데, 우리의 깜찍한 음유시인께서는 어찌나 정중하고 사랑스럽게 사냥꾼의 호감을 사는지, 아스타리온이 보기에도 징그러울 정도였다. 그는 거르 족 사냥꾼을 보자마자 단검에 손을 갖다 대었다. 바이올린을 등에 메고 있는 예술가가 거의 매일 밤 그에게 피를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뱀파이어 스폰의 힘은 넘쳐 흐르고도 남았다. 음유시인은 거르 족 사냥꾼의 사정에 공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걱정스러운 얼굴로 무엇을 사냥 중인지 물었고 사냥꾼의 입에서 아스타리온이 이름이 튀어나왔다.

“이 분이 당신을 사냥하고 싶다는데요, 아스타리온.”

마치 바람결에 귓가를 간질이는 음악과도 같이,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만큼 크면서도 기묘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스타리온은 그 때의 공기 냄새와, 귓가를 스치던 녀석의 나긋한 목소리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도 선명하게 들리던 거르 족 사냥꾼의 쿵쾅거리는 심장소리, 자신의 손 끝에 닿던 차가운 단검 자루, 게일이 흘리던 작은 땀방울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아스타리온이 할 일은 그저 튀어나가서 사냥꾼의 몸 깊숙한 곳에 단검의 칼날을 박아 넣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약간 주춤하며 허락을 구하듯 음유시인을 바라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차가운 바다 같은 예술가의 녹색눈과 붉은 뱀파이어 암살자의 눈이 마주쳤을 때, 아스타리온은 사실 허락을 구할 필요조차 없었음을 깨닫곤 거대한 파도같은 만족감을 느꼈다. ……거르 족 사냥꾼 살해는 간단하고 지저분했다. 전투가 끝나면 언제나 그랬듯이 음유시인은 피투성이가 된 사냥꾼의 시신을 뒤적거리며 전리품을 취하곤 마치 어떤 의식이라도 하는 것처럼 사후강직이 오기 전에 시체의 자세를 바꿔 놓았다.

전투를 하느라 땀에 젖어 칠흑같은 머리칼이 마구 헝클어졌는데도, 그는 이 작업을 할 때는 머리를 정돈하거나 피가 묻은 얼굴과 손을 닦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린 듯 완전히 몰입하곤 했다. 그가 사냥꾼의 옷가지와 품을 뒤져서 꺼낸 물약과 땅에 떨어진 무기 등을 섀도하트에게 넘겼고, 그걸 받아든 섀도하트가 ‘네가 아스타리온을 위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라고 말했다. 아스타리온은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섀도하트에게 더이상 따져 묻진 않았다.

“아……. 왜 그렇게 생각해요?”

음유시인이 사냥꾼의 피에 젖은 두 손을 들고 섀도하트에게 부드럽게 웃었다. 그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수줍었고, 동시에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팔짱을 낀 아스타리온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작은 대장님의 두 손을 지켜보다가 말없이 물병을 가져와 그의 손에 콸콸 쏟아 부었다.

“이건 너무……. 당연한 일 아닌가요? 아스타리온을 사냥하러 왔으면 사냥당할 각오도 해야 하는 거잖아요.”

…… 그 순간, 아스타리온은 그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로 마음 먹었다.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 오르는 노틸로이드의 잔해 근처에서 작은 몸싸움 끝에 아스타리온이 그의 야영지에서 함께 지내기로 하고 이름을 물었을 때, 무표정하던 녀석의 얼굴이 당혹감에 젖었다. 그는 오늘 이전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며, 머릿속을 맴도는 이름도 하나가 아니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 짜증이 솟구친 아스타리온이 ‘머릿속을 맴도는’ 이름 중에 가장 부르기 편하고 짧은 이름이 뭐냐고 하니 그는 작게 ‘디온’이라고 말했다. 하, 이름 예쁘네? 내 이름과 운도 맞는 것 같고.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어.

그리고 지금 이렇게, 목덜미에서 가느다란 피를 흘리며 디온이 자신의 곁에서 잠들려 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손아귀에 넣는 일이 이다지도 쉬운데, 왜 그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밤바람을 맞으며 초조해했는지 스스로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섹스는 뻔하고, 단순하고, 조금은 재밌었지만 가장 즐거웠던 건 평소에 좀처럼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디온이 몹시 흥분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는 점이었다.

“왜 그래, 내가 널 물어 뜯어서 죽이기라도 할까 봐 무서워?”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는 아스타리온의 입에선 디온의 피냄새가 났다. 아주 영리하지만 자주 바보같은 음유시인 녀석은 통째로 날아간 기억 속에서 얼마나 많은 악기를 연주해댔는지 굳은살이 잔뜩 배긴 두 손을 꼭 쥐었다가 펼치고, 다시 꼭 쥐었다가 펼쳤다.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자신의 손에 힘 주는 법을 배우듯이, 그렇게, 천천히.

“아니야, 아스타리온. 그건 아니에요. 그게 아닙니다.”

“그럼 뭔데? 너무 떨고 있잖아. 섹스가 처음이야?”

당혹스러운 표정에서, 갑자기 반항하듯 눈썹이 일그러지며 초록색 눈이 번뜩인다. 오, 꽤 무서운데.

“모르겠어요. 기억이 안납니다. 하지만 처음은 아닌 것 같아요.”

음유시인이라 그런가,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아스타리온은 잠깐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어떤 음유시인들은 그저 음율과 속삭임만으로 정신 공격을 한다던데 이 자식도 혹시 그런 부류 아닌가? 기분이 끝없이 좋아지면서도 아주 입맛이 더러웠다. 그래, 처음은 아니겠지. 그는 드로우니까. 꽤 예뻤다. 유연하고, 민첩하고, 거의 모든 악기를 다룰 줄 알았으며 노래도 잘 불렀다. 게다가 카사도어가 발더스게이트의 귀족들을 만날 때보다도 더 정중할 때가 많아서 보고 있으면 울화가 치밀었다. 어디 언더다크에 있는 내로라하는 드로우 귀족 집안의 애매한 자식이거나, 가모장의 정부, 그런 거였을지도.

보통 흡혈은 한 번이면 충분했고, 오늘은 특별히 전희처럼 좀 일찍 한데다 딱히 배가 고팠던 것도 아닌데 극도로 흥분한 것처럼 맥박이 펄떡이는 녀석이 뚫어져라 자기를 쳐다만 보고 있는 게 이상하리만치 불쾌하고 화나서 한 번 더 물었다. 지옥으로 생명이 꺼지는 듯한 깊은 한숨과 신음. 포식당하는 아픔은 익숙해지지 않는가보다. 고장난 것처럼 쿵쾅거리던 맥박이 조금씩 느슨해지더니 이내 얌전하게 고개가 처진다. 아스타리온은 자신이 극도의 자제력을 발휘해서 적당히 피맛에 취했다는 걸 알았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심한가요?”

“……뭐가?”

반쯤 감긴 녹색눈을 뜨고, 고개를 늘어뜨린 디온은 나른한 목소리로 아스타리온에게 주술처럼 말을 걸고 있었다.

“…… 피를 마시고 싶은 당신의 충동이요.”

“뭐? 아니, 딱히 그렇진 않아.”

아스타리온은 가식적으로 웃어 보였지만, 그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짐승의 피만으로는 도저히 전투를 할만큼 몸의 상태가 좋아지지 않아서,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던 지성체의 피를 마시고 싶어 미쳐 날뛰었던 밤은 어쨌든 지나갔다. 그리고 그 이후엔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이 자주 피를 마시게 해줬으니…….

아스타리온의 무심한 대답에 디온은 약간 실망한 것 같았다. 아스타리온을 올려다 보는 음유시인은 매우 피곤해 보였지만, 원하는 것을 다 얻은 뱀파이어 스폰은 디온의 피곤함이 섹스와 흡혈 때문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 이상한 놈은 낮에 아무리 격렬한 전투를 해도 밤에 잠들지 못한다.

“실망했어? 물론 네 피는 아주 맛이 좋아. 내가 전투하면서 물어 뜯는 놈들과는 다른 맛이 나지. 뭔가가 첨가된 것처럼.”

이것도 역시 사실이었다. 디온의 피는, 아스타리온이 200여년만에 처음으로 맛본 지성체의 피라는 걸 감안해도 아주 독특한 맛이 났다. 그건 전투 중에 적으로 만나는 모든 피조물을 흡혈하겠다고 선언한 뒤 오히려 더 확실해진 진실이다. 방금 전에 맛을 봤지만 그의 피를 생각하니 자기도 모르게 다시금 입맛을 다시는 아스타리온이었다.

두 번의 흡혈, 한 번의 절정, 그리고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입맞춤. 그것이 그들의 첫날밤이었고, 기운이 빠진 음유시인은 아스타리온 옆에 누워서 달빛을 받다가 조용히 콧노래를 불렀다. 제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하면서 아주 많은 노래와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게 정말 신기한 노릇이다. 마치 뇌의 어떤 부분만 누군가 인위적으로 제거한 것처럼.

“곧 해가 뜰테니까.”

아스타리온은 자신의 잠자리 상대에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자 둬. 해가 뜨면 또 함께 걸으면서 뭔가를 죽여야 하잖아?”

“아, 그거 정말……. 듣기 좋은 말이네요.”

그는 너털웃음을 짓다 말고 순식간에 길 잃은 아이처럼 꿈결 어딘가를 헤매는 것 같았다.

“내일 밤도, 그 다음날 밤도, 나를 마시고,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세요. 생명을 마셔 없애고 싶은 충동을 잠재웠을 때의 만족스러운 얼굴을 내게 보여줘. 그러면 난 당신의 야비한 입가과 살가죽을 찢는 송곳니로 노래를 지을거야. 힘줄로 만든 바이올린을 켜고 척추로 만든 피리를 불면서, 당신이 얼마나 잔혹하리만치 인내심 강한지를…….”

아스타리온은 귀를 의심하며 누워있는 디온의 곁에 바짝 엎드렸다. 킁킁 냄새를 맡듯이 누워있는 드로우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댔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자기, 지금 잠꼬대 하는거야? 정말 별나네.”

깊이 잠든 음유시인의 이마와 콧날에 라샌더의 축복이 천천히 쏟아졌다. 카사도어의 저택에 있던 조각상들이 춤추는 횃불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눈을 감은 디온의 얼굴에도 그늘이 진다. 엎드린 채 턱을 괴고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잠든 얼굴의 음영이 바뀌는 모습을 구경하는 건 생각보다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를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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