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 그들은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태권도 이름이 박힌 노란색 등원 차량이 아니라 검은색 밴이었다. 흠집 하나 없는 이 차량은 몽연이 가지고 온 것이었다. 당연히 운전도 몽연의 몫이 되었고 이자하는 조수석에 앉았다. 뒷좌석에서는 육합과 검마가 도란도란 서로의 근황을 묻고 있었다. "경호 일 하면 다칠 일은 없소?" "몇 번 있긴 했
“셋째야.” 옆에서 조용히 길을 걷던 검마가 이자하를 불렀다. 이자하가 그쪽을 보자 검마는 이자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요즘 잠은 잘 자고 있느냐?” “잘 못 자지. 못 자서 미칠 것 같소.” “어어, 미치지는 마라. 뒷감당이 두렵다.” 몽연의 농지거리에 이자하는 입으로만 웃고 다시 검마를 봤다. “모용 선생은 뭐라 하더냐.” 검마가 진지한 어
원장실에서 나오자 몇몇 아이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봤다. 한두 명은 대놓고 주위를 맴돌기도 했다. 교주는 아이들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원장님이 잘 해주시냐?” 이자하는 그중 한 아이를 보며 물었다. 아이는 우렁차게 대답했다. “아뇨!” “엥?” 이자하는 두 눈을 끔뻑였다. “오늘도 과자 못 먹게 했어요.” “야, 그건 네가 너무
근무를 마치고 퇴근할 때가 되어서야 모용백은 깨달았다. 그는 이자하에게 연락처를 주었지만 이자하의 것은 받지 않았다. 퇴근할 채비를 하던 그는 문득 그 자리에서 ‘하오문 태권도’를 검색해봤다. 해당하는 이름의 태권도는 전국에 한 곳뿐이었다. “역시 유일무이하다니까.” 모용백은 소리 내어 웃으면서 지도 애플리케이션에 표시된 하오문 태권도의 전화번호를 저장했
“좀 전에 아는 사람이라는 건 혹시 청장님입니까?” “오, 어떻게 알았지?” “현생에서도 알고 지내는 사람 중 TV에 얼굴 비출만한 사람은 청장님뿐이라서요. 언제 만나셨습니까?” “얼마 안 됐어. 애초에 사대 악인이 모인 것도 최근의 일이고.” “모두 모인 겁니까?” “그래. …전생처럼 몰려다니면서 사고 치지는 않을 거니까 그렇게 걱정스러운 눈으로 볼
육합은 잠시 입을 닫았다. 이들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자신도 전생을 잊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생생한 기억처럼 느껴졌다가 그저 이상한 꿈이 되지 않았던가. 그 속을 읽기라도 한 듯 이자하는 읊조렸다. “잊어야 하는 기억이면 잊는 게 나을 수도 있지.” 답하기에 따라서 그가 다시는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번 생에 비하면 전생에 훨씬
띵동. 대문과 연결된 초인종이 울렸다. 육합은 일하며 땀 흘리고 흙 묻은 상태 그대로 대문 쪽으로 나와 담 너머의 인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고개를 뻗어 안쪽을 기웃대던 몽연과 눈이 마주쳤다. “큼큼, 일손 필요하지 않나?” 몽연이 헛기침하며 말하자 옆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됐고, 빨리 열어. 내가 전생에 갈고닦은 낫질 실력을 보여주마.” 육
사내는 달렸다. 그리고 그들 중 운전석에 타려는 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워메 시벌 깜짝아 뭐야?” “아, 죄송, 아니, 어, 그러니까…… 내가 왜…….” 산발 청년은 말없이 한숨을 쉬더니 슬쩍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잘 생긴 청년이 그 손목을 붙든다. “미친놈아 뭐 하려고?” “오락가락하는 것 같길래 한 대 맞으면 정신이 들까 해서.” “셋
사내는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한참 동안 사무치는 그리움 속에서 꿈을 헤매곤 한다. 이상하리만큼 생생한 꿈을 꾸고 일어나면 꿈의 내용과 현실이 분간되지 않는다. 꿈속에서 사내는 강호인으로 사대 악인 중 둘째였으며 멸문당한 문파의 생존자였고 종남에서 문파를 세웠다. 그럴 때마다 사내는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정신이 들 때까지 거울 속의 자신을 오랫동안 바
“그만 가겠네.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군. 기회가 된다면 또 보지.” “살펴 가게.” 그렇게 검마도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겨진 임소백은 반쯤 열린 집무실의 문을 닫으며 벽에 반사되는 적막을 들었다. 그러나 곧 기다렸다는 듯이 책상 위의 전화가 울리며 그 적막을 지워냈다. 수화기를 집어 들자 수행비서가 일정을 알려온다. “알았다.” 무뚝뚝하게 대꾸
이자하는 둘을 따라 웃으며 아연하기도 하고 안심되기도 하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기억해봤자 좋을 게 없다는 임소백의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현생에서 행복을 찾은 자들. 두 번째 생에서 느껴본 감각을 떠올렸다. 추억이 추억으로 대체되는 느낌. 마주한 현실이 충만하다고 느낄 때 과거의 기억은 빛이 바래고 만다. 하지만. 이자하는 생각했다. 그는 망각을 깊이
“잠깐 얼굴만 보면 된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세상에 안 되는 일은 없어. 하면 돼.” “자리에 안 계신다니까요?” “그럼 기다리지 뭐.” “자꾸 이러시면…….” “무슨 일인가?” 경비가 무언가 조처를 하려던 차에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잘랐다. 더불어 자신과 실랑이 하던 이가 경직된 얼굴로 제 너머를 향해
며칠 뒤, 어느 교차로에 면한 건물 2층의 카페 구석. “자자, 사부님과 셋째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외로워서?” “겠냐고.” 이자하와 몽연의 농지거리를 들으며 검마는 묵묵히 따뜻한 허브차가 담긴 머그잔을 들었다. 두 모금 정도 마시자 둘의 아웅다웅하는 목소리가 셋째의 ‘똥싸개’로 끝이 났다. 아니, 정확히는 검마가 끝을 냈다.
몽연은 입을 삐죽이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 곧 그 화면을 이자하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린 이자하가 고개를 뒤로 물리고 화면을 보니, 자신의 얼굴을 한쪽 구석에 띄운 뉴스의 한 장면이었다. 검마 선배가 말했던 게 이건가. “사실 나도 긴가민가했는데, 이름까지 보니까 직접 확인해봐야겠더라.” “두 달
“그나저나 육갑이나 똥싸개 놈들 소식도 있소?” 검마를 배웅하러 따라 나온 이자하가 물었다. 이번에도 저 혼자일 거라 여겼으나 검마가 제 눈앞에 나타나고 보니 나머지 사대악인도 환생했을지, 환생했다면 그와 검마처럼 기억을 떠올렸을지 궁금해진 것이다. 검마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답했다. “듣지 못했다. 그런데.” 뒷말은 한 박자 쉬고 이어졌다. “임 맹
상상과 현실이 구분되고 망상과 실재가 나눠질 때쯤, 이자하는 자신의 기억이 사실임을 알았다. 영문은 알 수 없었으나 혼란은 없었다. 그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나아갈 뿐. 이자하는 이곳에서 나아갈 길을 찾아야 했다. “자하야, 탕수육이 그렇게 좋아?” “응.” 이번 생의 부모는 아직 살아있다. 조부모와의 관계도 원만하다. 경제적인 여유도 넘치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