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마환생

광마환생 11화

육합은 잠시 입을 닫았다. 이들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자신도 전생을 잊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생생한 기억처럼 느껴졌다가 그저 이상한 꿈이 되지 않았던가. 그 속을 읽기라도 한 듯 이자하는 읊조렸다.

“잊어야 하는 기억이면 잊는 게 나을 수도 있지.”

답하기에 따라서 그가 다시는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번 생에 비하면 전생에 훨씬 힘든 일이 많았던 건 사실이다. 그래도…….”

잠시 복숭아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그래도 잊고 싶지 않아서 꿈에라도 붙들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몽연은 입꼬리에 슬쩍 미소를 올리더니 기운차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다 쉬었으니까 남은 일 해야지?”

육합도 따라 일어섰다.

“말 잘했다. 이제 저쪽으로.”

이자하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육합과 몽연의 뒤를 따라갔다.

“잊어야 하는 기억이라.”

그러면서 그는 나지막이 자신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함께 떠오른 상념은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바람에 흩어졌다.

 


그 날 밤, 답례로 복숭아를 또 한 상자 받은 이자하는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태권도장에 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텅 빈 도장이 자신을 반긴다. 잠시 정자세로 숨을 고른 이자하는 샌드백 하나에 발차기를 연속으로 넣었다. 마지막으로 한 방에 팡, 하고 튕겨 나간 샌드백이 다시 돌아오자 이자하는 그것을 안아 멈춰 세우고 스르륵 바닥에 앉았다.

그는 자연스레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았다. 이전 생에서 운기조식을 위해 자주 하던 자세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단전에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는 익숙해진 허전함을 채울 무언가를 찾기 위해 이자하는 제 속을 헤집었다. 머릿속에서 전생과 현생의 기억들이 뒤섞인다. 엉킨 기억과 함께 감정들이 밀려온다. 이자하는 그 안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애썼다. 그에게는 잊어야 하는 기억도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도 없다. 흘러가도록 놔둘 뿐. 그렇게 몇 개의 줄기가 잦아들고 나서야 그는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쯧. 오늘도 일찍 자긴 글렀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모용백은 긴장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일어나니 기분이 복잡했다.

이 병원에 있으면서 그는 망상 환자들을 전문적으로 진료하고 있다. 그것을 병이라 부른다면 그도 같은 병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전생을 잊지 못해서 혹은 잊고 싶어서 고통받는 이들이 있다면 돕자는 생각을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내심 만약 이자하가 이곳에 온다면 어느 쪽일지 궁금했다. 그는 전생 때문에 고통받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잊어가고 있을까.

대답을 기다리는 모용백에게 이자하는 대뜸 말했다.

“내가 화가 많은데, 이걸 어떻게 다스리면 좋을까.”

모용백은 이자하의 입에서 나오는 반말이 어쩐지 반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 확신할 수 없었기에 그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주로 어떤 상황에 화가 나십니까?”

“강자가 약자를 부당하게 괴롭힐 때.”

모용백은 그답다고 생각하며 조금 더 자세히 물었다.

“가장 최근에 그런 기분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까?”

“뉴스를 보면.”

“예?”

“TV 틀어놓고 뉴스를 보고 있자면 항상 그런 기분이 들지. 뭐, 이건 모든 사람이 그럴 것 같다만. 그래서 티비를 잘 안 봐. 그런데 요즘 아는 사람이 가끔 티비에 얼굴을 비춘다는 걸 알게 돼서 틀어봤더니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 같다.”

“혹시 밤에 잠은 잘 주무십니까?”

“아니.”

“그러시군요. 화가 쌓이면 여러 가지 병으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먼저 잠을 잘 자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게 좋겠습니다. 불면증에 좋은 약을…….”

“선생은.”

“네?”

“선생은 잠을 잘 자나?”

“…….”

모용백은 말문이 막혔다. 환자들이 자신의 안부를 묻는 일은 종종 있다. 그것은 그만큼 환자에게 힘이 생겼다는 뜻이기에 그러지 않던 환자가 먼저 안부를 물어오면 보통 기쁜 징조로 여긴다.

다만 이자하의 물음은 안부 이상의 뜻을 품고 있었다.

둘은 잠시 눈을 마주 보았다. 먼저 눈을 감으며 한숨을 쉰 것은 모용백이었다.

“시험해보신 겁니까?”

이자하는 태연하게 웃으며 답했다.

“나도 긴가민가해서. 이제 확실해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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