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밤, 꿈, 그대

[마도조사&진정령][망기무선] 보름달 밤 꿈 그대③

네가 가르쳐 줬잖아. 위로하는 법이라고.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들어 줄게.

나를 떠나고 싶다는 것만 빼고."

"겨울이구나."

어느새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 그 말은 즉, 위무선이 이곳에 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는 뜻이었다. 눈 내리는 정원을 바라보며 언제쯤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한탄하고 있던 위무선에게, 소하가 다가왔다.

"참, 오늘 귀공의 나라에서 사절단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잠시 후 있을 연회에 참석하시라는 폐하의 명이 있으셨답니다."

사절단?

누가 왔을까. 그 어떤 이가 와도 반갑겠지만 위무선은 누님인 강염리가 가장 보고 싶었다.

"자, 어서 채비하시지요. 곧 시작하니까요."

"그러죠."

위무선은 콧노래를 부르며 나갈 채비를 하러 들어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소하는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연회장은 약소국의 사절단을 맞이하는 것치고는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성대하게 차려져 있었다. 그것이 자신을 위한 남망기의 배려임을 알 리가 없는 위무선은 조금 이상하게 여겼지만, 어쨌든 고국의 사람들이 홀대받는 것보다는 과한 편이 나았다. 위무선은 한참 연회장을 둘러보다가 연석에 앉은 사절단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아선아!"

그가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 그를 가장 아껴주었던 그의 누님, 공주 강염리가 그를 불렀다. 위무선은 금세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누님!"

"우리 선이, 좀 야윈 것 같구나. 밥은 잘 먹고 있니?"

여전히 다정하고 걱정 가득한 그녀의 말에, 결국 위무선의 큰 눈에서 눈물이 똑 떨어졌다.

"누님이 해 준 연근 갈비탕이 먹고 싶어요…."

마음고생이 심했지, 강염리는 따뜻하게 웃으며 손을 뻗어 위무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위무선도 소매로 얼굴을 쓱쓱 닦아내고 따라 웃었다.

"그래도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

"그래, 우리 선이는 씩씩하니까."

그때, 이 태감이 황제를 모시고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연회장의 모든 사람이 황제가 들어오는 쪽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위무선은 눈에 띄지 않게 살짝 고개를 들어 황제를 주시했지만, 그는 얼굴을 가리는 천이 달린 관을 쓰고 있어 생김새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대국의 황제는 옥안을 쉬이 드러내지 않는 존재인가? 위무선은 의아했지만 아쉬움을 접고 다시 반듯하게 예를 갖추었다.

위무선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남망기는 그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그토록 원망하는 황제가 어찌 생겨 먹은 인간인지 퍽 궁금하였겠지. 그러나 남망기도 순순히 얼굴을 드러내 보일 생각은 없었다. 고심 끝에 고안해 낸 묘수가 바로 관에 천을 달아 얼굴을 가리는 거였다. 본디 예법에 맞는 관이 아니니 위무선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가득했으나, 누구도 그것을 감히 지적할 수는 없었다.

황제가 자리에 앉은 후에야 비로소 다른 사람들도 연석에 다시 착석할 수 있었다. 위무선은 오랜만에 만난 고향 사람들과 이런 저런 소식을 나누며 기쁨을 나누느라 남망기의 시선이 줄곧 자신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누님, 강징은 어떻게 지내요?"

"징이는, 아니 전하는 왕위에 올라 국정을 수습하느라 많이 바쁘시단다. 지금은 많이 안정되었어. 피해도 많이 복구되었고."

강징이 왕이라니.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였고 전쟁 중에 선왕의 국상國喪을 치렀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국왕이 된 강징의 모습을 상상하니 조금 낯설기는 했다.

"그래서 전하가 몇 번이나 충성 서약을 보내면서 너를 돌려보내 달라고 청했는데 번번이 거절당해서 이번엔 내가 직접 온 거야."

황제 입장에서는 이런 약소국의 왕자 따위는 인질로 잡아 둘 가치조차 없을 텐데. 어차피 그의 나라는 제국에 대항할 힘도 없었다. 데리고 있는 것이 더욱 귀찮을 것이건만 어째서인지 황제는 그를 붙잡아 두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강징이 위무선을 내달라고 거듭 청하는 건 꽤 부담이 컸을 터. 그 점에 감동해야 하는 건지 그럼에도 놔 주지 않는 황제에게 화를 내야 하는 건지 위무선은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누님, 무리하지 마요. 황제의 심기를 거슬러 화를 입을까 걱정돼요."

"그래도, 아선이 너를 여기 두고 우리는 한시도 마음 편한 적이 없었단다."

"황제가 변덕을 부려 괜히 여기 있는 사람 모두를 억류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전 괜찮아요. 언젠가는 놔 주겠지요, 뭐."

위무선은 애써 담담하게 말했지만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러자, 위무선의 손을 꼭 잡은 강염리의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졌다.

그 모습을 죽 지켜보던 황제, 남망기는 조용히 일어나 연회장을 떠나버렸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연회가 끝나고 다시 먼 길을 떠나야 하는 고국의 사절단도 잘 배웅해 준 후에 위무선은 홀로 별원에 돌아왔다.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만 같았다. 사랑하는 가족과 그리운 고국의 사람들을 만났던 것이. 그들이 너무나 보고 싶었던 나머지 애타도록 짧은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은 기분이었다.

위무선은 한숨을 깊게 내쉬며 침상에 풀썩 드러누웠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 몸이 무거웠다. 사르르 눈이 감겨 가던 차에, 누군가 침소의 문을 두드렸다. 겨우 몸을 일으키며 들어오라고 하자 문을 연 것은 남망기였다.

"위영."

"남잠, 어서 와."

위무선은 소매로 얼굴을 쓱 닦고 애써 웃으며 남망기를 맞이했다.

"…울었어?"

"아니거든."

위무선이 괜히 밀려드는 민망함에 고개를 돌리자, 남망기는 살짝 눈치를 보더니 위무선에게 다가와 붙어 앉았다.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위무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왜 그래?"

"네가 가르쳐 줬잖아. 위로하는 법이라고."

그 말에, 위무선의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결국 그는 남망기의 옷에 얼굴을 묻고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렸다. 남망기는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손을 뻗어 위무선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위무선이 마음 놓고 감정을 흘려보낼 수 있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위무선이 실컷 울고 진정되기까지 그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었다. 잠시 후 위무선이 고개를 들자 촉촉이 젖은 눈가가 빨갛게 부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남망기는 왠지 명치께가 싸늘하게 아팠다.

알고 있었다. 그를 붙잡아 놓는 게 정치적으로 큰 의미는 없다는 것을. 볼모를 요구해 놓고 그런 요구를 했던 사실 자체를 잊어버릴 정도였으니. 그럼에도 남망기는 위무선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도대체 왜? 남망기가 조서에 옥새만 한 번 찍으면 위무선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그토록 그리워하는 고향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에 둘러싸여 행복한 웃음만 지으며 즐거운 날들을 보낼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안에, 나는 없잖아.

그러니까 나는, 네가 고독과 원망으로 메말라 가더라도 끝까지 내 곁에 숨겨둘 거야.

"남잠, 남잠?"

생각에 잠긴 남망기의 귀에 어렴풋이 위무선의 목소리가 닿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는 거야? 사람이 불러도 대답도 않고."

"아무것도 아냐."

"네 앞에서 부끄러운 꼴을 보였네. 미안해, 놀라게 해서."

위무선은 다시 평소처럼 씩씩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남망기에게는 조금 전의 눈물보다 더 비통한 절규처럼 느껴졌다. 남망기는 손을 뻗어 위무선의 볼을 감쌌다. 하얗고 말랑말랑하네, 따뜻하고.

"왜 그래…?"

남망기는 대답 없이 그저 굳어버린 것처럼 위무선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위무선은 이 기묘한 상황이 괜히 쑥스러워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남망기가 자신의 얼굴을 잡고 있어 그러지도 못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위무선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남망기가 참 잘난 사내긴 하구나…, 라는 것이었다.

사실이 그랬다. 옥과 진주를 갈아 피부에 스민들 이보다 밝고 투명할까. 한겨울 서릿발이 휘날려도 홀로 푸르게 우뚝 선 소나무와 같이 고고한 자태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옅은 색 눈동자는 마치 고요하고 맑은 호수처럼 잔잔히 빛났다. 담대하나 내세우지 않았고, 진중한 성품이나 물러서지 않았다. 닭의 무리에 세워 놓은 학처럼 어디에 세워 놓아도 돋보일 터. 신선이 강림한들 이보다 우아할까. 그야말로 아정雅正이라는 단어의 현신과도 같은 사내, 그것이 위무선이 남망기를 보며 느낀 감상이었다.

문득, 그 잔잔히 빛나던 호수에 한 줄기 바람이 스쳤다.

흔들리는 남망기의 눈동자, 꾹 다문 입술 너머로 위무선은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몇 달 전 두 사람이 함께 뱃놀이를 나간 날, 분위기에 휩쓸려 해버렸던 입맞춤. 왜 그랬을까, 남망기에게 물어보면 알까? 아니면 자신이 그렇듯 그도 이유를 찾고 있을까. 그날 이후 수개월이 지나도록 두 사람은 그날의 일을 서로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마치 없었던 일인 듯 잊고 살았고,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위무선은 지금, 바로 여기서, 그 일을 다시 꺼내야 함을 직감했다.

"우리, 같이 배 타러 나간 날 기억해?"

남망기의 반응은 위무선의 예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는 귓가를 새빨갛게 물들이더니 아무 말도 못 하고 벌떡 일어나 급히 자리를 떠나버렸다. 아니, 내가 못 할 말이라도 했나. 별안간 일어난 이 갑작스러운 일에 위무선은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차라리 실수였다든가, 뭐라도 한마디 하고 가지. 남망기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길래 저러는 걸까.

"첫날밤에 소박맞은 신부도 아니고, 이게 뭐람."

스스로 한 말이면서, 농담 삼아 한 혼잣말에 위무선은 놀라고 말았다. 그러는 나는, 대체 남망기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하늘에 맹세코 자신은 사내를 좋아해 본 적도 없었고 그럴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남망기와는 왜 이렇게 얽히게 되는지 아무리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려 해도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

"모르겠다…. 아, 술 마시고 싶어."

위무선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중얼거렸다. 긴장이 풀리자 피로가 몰려와 눈을 꼭 감았지만 이상하게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황실 연례행사 중 큰 행사라고 하면 단연 황제가 주관하는 야렵대회를 빼놓을 수가 없었다. 음기가 가장 강해지는 겨울에는 각종 귀(鬼)와 요마(妖魔), 주시 등이 횡포를 부려 민가에 해를 끼치는 경우가 잦기 때문에 이를 토벌하는 야렵대회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이 대회에는 무림의 내로라하는 가문들이 참가해서 이름을 드높이기도 하고, 개인으로 나와 좋은 성적을 거두어 조정의 무관으로 특채되는 경우도 있어 인기가 좋고 경쟁도 심했다.

"그럼, 그 대회에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위무선의 질문에, 소하가 답했다.

"뭐, 이 나라 사람이라면 접수만 하면 됩니다만, 공자 같은 경우에는 황제께서 윤허하셔야겠지요."

그 말을 마친 소하는 순간 아차, 싶었다. 위무선의 질문이 어떤 의도인지 뻔히 읽혔기 때문이었다.

"폐하께 여쭈어달라고 하실 작정이지요? 위 공자."

"역시, 소 공공은 길게 말하지 않아도 아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소 공공은 눈물을 머금고 이 태감에게 가야만 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물론 소 공공의 말을 들은 이 태감은 딱 잘라서 거절했다. 소하가 이 상황이 낯설지 않은데, 라고 생각하던 그때, 아니나 다를까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허한다."

"폐하!"

"단, 야렵대회 중 짐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짐을 알아봐서는 안 된다."

즉, 참가자 중 황제의 옥안을 알아볼 만한 자들에게는 미리 손을 써두라는 뜻이었다.

"허나 폐하, 이는 너무도 위험합니다. 야렵대회에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가 섞여 있으면 어찌하옵니까."

"그렇다면 더욱 황제임을 숨기는 편이 안전하지 않겠는가."

"폐하, 왜 이리도 수고스러운 일을 하시려 하십니까."

"그가,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는가."

너무도 단순한 이유에 이 태감도, 소하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위무선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황제가 주관하는 대회라면 당연히 황제가 나올 것이고, 기회를 노려 그를 없애거나 하다못해 치명상 정도는 입힐 자신이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위무선 본인의 안위는 보장할 수 없겠지만, 복수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 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찾아와 한 말에, 위무선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야렵대회에서, 나와 함께 다녀야 해."

남망기는 담담하게 그것이 황제가 윤허하는 조건이라고 말했다. 위무선으로서는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긴 셈이었다.

"하하…, 그것도 좋지. 너와 함께 다니면 안전하겠네."

위무선은 코를 긁으며 웃었다. 아무래도 이번 야렵대회를 노리려는 계획은 쉽지 않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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