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밤, 꿈, 그대

[마도조사&진정령][망기무선] 보름달 밤 꿈 그대②

네가 궁금해졌어. 왜 너만 보면 이렇게 열이 나는지.

"돌이켜보니,

너는 차가운 얼음이 아니라

포근한 눈이었어."

절경도 하루이틀이지, 위무선은 황궁에서의 일상이 이미 지겨워진 지 오래였다. 선계仙界를 노니느라 다 늙도록 세월 가는 줄 몰랐던 어느 어부처럼, 신나게 놀고 나니 그제야 이곳이 마음 둘 곳 하나 없는 낯선 타국이라는 사실이 떠올라 새삼 서글퍼졌던 것이다. 그 잘난 황제에게 외출 허락을 받아 준다던 소하에게서는 며칠째 소식도 없고, 기다림에 지쳐 개구멍이라도 찾아볼까하던 그때 문밖에서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 공공입니까? 들어오시죠."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소 공공이 아니었다. 이 사람은,

"남 공자?"

"위 공자, 나갑시다."

"어, 어디를요?"

"소하에게 나가고 싶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맞지만, 왜 갑자기 그쪽이 튀어나오는 건데? 위무선은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를 따라나섰다.

"남 공자, 황궁에서 일하는 분이었습니까?"

위무선의 질문에 남망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은 아니니까, 라고 남망기는 생각했다.

그들은 거리로 나섰다.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시장 구경을 하며 돌아다니다, 가장 번화한 주루 앞에 섰다.

"날씨도 좋고, 이런 날에는 역시 술이지. 갑시다, 내가 살 테니."

위무선이 말하자, 남망기가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돈은 있습니까?"

가만 생각해보니, 없었다. 볼모로 끌려온 신세에 돈이 있을 리가 없지. 세상에, 그래도 내가 왕족인데 돈이 없다는 소리를 해야 하다니. 위무선은 조금 서글펐지만 머쓱한 듯 웃었다.

"없군요."

민망해진 위무선이 주루를 그냥 지나치려 하자, 별안간 남망기가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당황한 위무선이 남망기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자, 남망기는 그대로 위무선을 끌고 주루로 들어갔다.

"난 있습니다."

"하하…, 그러면 신세 좀 지겠습니다."

곧 음식과 술이 나왔다. 위무선은 배가 고팠는지 젓가락을 바삐 움직였지만, 남망기는 차만 마실 뿐이었다.

"남 공자, 술은 안 드십니까?"

"술은 안 먹습니다."

이 사람, 말이 별로 없어서 재미없네. 위무선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혼자 먹고 마셨다. 그런 그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남망기가 물었다.

"황궁 음식이 입에 안 맞았습니까?"

위무선은 술을 병째로 들이키며 답했다.

"음식도 술도 다 최고지만, 새장 안에 갇힌 새가 모이가 고급이라고 기뻐하는 것을 봤습니까."

위무선은 그저 웃었지만, 남망기에게는 어쩐지 그 모습이 슬프게만 보였다.


위무선뿐만 아니라 남망기도 궁 밖에 자주 나오는 편은 아니었기에 그들의 눈에는 새롭고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그들은 온종일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재주꾼의 곡예놀음을 보거나 쓸데없이 예쁘기만 한 장난감 따위를 사들였다. 특히 위무선은 객잔의 이야기꾼이 펼쳐내는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해서, 이야기꾼의 앞에 은자를 몇 개나 얹어 주기도 했다. 물론 그 모든 비용은 전부 남망기가 감당할 몫이었지만, 남망기는 온종일 위무선이 눈을 반짝이며 바삐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어쩐지 즐거웠기에 군말 없이 주머니를 내주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상인들도 하나둘씩 문을 닫고 들어가자 거리는 텅 비어버렸다. 걷다 보니 마을 외곽의 낡은 전각 앞에 다다른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붕 위에 나란히 올랐다. 남망기는 단정하게 앉았고, 위무선은 반쯤 드러누워 술병을 꺼냈다. 둥글고 푸르스름한 보름달과 점처럼 보이는 작은 별들이 보석처럼 콕 박혀 빛나는 밤하늘이,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지친 위무선의 마음을 포실히 감싸주었다.

"남 형, 오늘 정말 고마웠어."

위무선이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전혀 고마워하지 않을 텐데. 남망기는 자신이 왜 정체를 숨기고 싶은지, 왜 그와 함께 나오고 싶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새 마음이 편해진 것인지 위무선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살던 왕궁에는 연못마다 연꽃이 가득했어. 그래서 연화오라고도 불렸어. 달밤에 보면 정말 절경이 따로 없다니까. 여기도 아름답지만. 음…, 그리고 연방을 줄기째로 꺾어서 까 먹으면 정말 맛있는데. 음…, 오늘 달이 참 예쁘네. 봐, 보름달이야…."

취기가 살짝 오른 탓일까, 위무선은 떠오르는 대로 아무 말이나 하고 있었다. 남망기는 연한 분홍빛 물이 살짝 든 하얗고 고운 뺨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남 형, 이름이 뭐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남망기는 조금 당황했다. 남망기가 솔직하게 답해도 좋을지 고민하는 사이에 위무선의 말이 이어졌다.

"난 위영이야. 남 형 같은 친구가 생겨서 너무 좋아."

"남잠."

"응?"

"내 이름, 남잠이라고."

"아…. 남잠, 나 너무 졸려. 여기서 자도 돼?"

당연히 안 되지만, 이미 위무선은 잠든 후였다. 지켜보던 남망기는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지만, 이내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띄웠다.

남망기는 잠든 그를 둘러업고 황궁으로 향했다. 성문을 지키던 호위부터 궁 안을 바삐 오가던 환관과 궁녀까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망기가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별원에 도착해 침상에 안전하게 그를 내려놓을 때까지 남망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망기는 위무선의 장화를 벗겨주고 이불을 덮어 준 다음, 침상에 앉아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 위무선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안해 보였다. 하얀 흙으로 섬세하게 빚어놓은 도자기 같은 얼굴에 발그스름하게 윤기가 나는 입술, 촉촉하고 긴 속눈썹이 영락없는 미남이었다. 남망기는 자기도 모르게 그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려다 불에 덴 듯 놀라며 손을 멈추었다.

남망기는 방의 촛불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문앞에는 소 공공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었다.

"잠들었으니, 조용히 하라."

그러고는 문 쪽을 향해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잘 자, 위영."

다음날, 별원의 모든 연못에 연꽃을 심으라는 어명이 내려졌다.


"폐하께서 춘추가 있으시니, 이제 마땅히 배필이 있으셔야 할 줄로 아옵니다."

어전회의에서 이런 주제가 나온 것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대신들도 작정을 한 것인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짐은 아직 할 일이 많소."

"후사를 생각하셔야지요."

확실히 제왕에게 있어 후계는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전혀 생각이 없는데 부인이 생긴다고 해서 원자가 태어날 것이라는 기대는 너무 앞서나간 것이 아닌가. 남망기는 기가 차서 말했다.

"황후가 들어온다 한들 짐의 뜻이 이러한 것을."

그러나 이미 대신들은 저들끼리 어느 가문의 여식이 좋을지 논의하고 있었다. 남망기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러고 보니, 요사이 폐하께서 조용히 별원을 자주 찾는다지요. 혹여 이미 정인이 있으신 것 아니십니까?"

황제가 나가고 나자, 대신들의 이목이 황제의 심복인 이 태감에게 쏠렸다. 이미 황궁 안에는 황제가 별원에 숨겨둔 애첩에 푹 빠져 황후를 들이지 않으려 한다는 소문이 만연했다. 별원에 패전국의 왕자가 기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함구한 적은 없으나, 그렇다고 굳이 알린 적도 없으니 대신들이 여인을 숨겨둔 것으로 오해할 만도 했다.

"별원에 계신 분은 그저 폐하의 친우이실 뿐입니다. 억측은 삼가시지요."

"폐하께서 친우분을 왜 하필 그곳에 숨겨두십니까? 친우분이 여인이라도 되시는지요."

이 태감은 별원의 모습을 떠올리며 음, 하고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여인네들이 좋아할 만한 공간이긴 하지.

"그분은 일전에 적국에서 오신 왕자라 기거할 곳이 없어 임시로 내드린 것입니다."

대신들은 황당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런 위험인물을 가까이 둬서 되겠소."

이 태감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황제의 고집을 꺾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여기 모인 그 누구라도 아는 사실이었다.


"남잠! 오랜만이네!"

남망기가 별원으로 들어서자, 활짝 핀 연꽃을 구경하던 위무선이 손을 흔들었다. 남망기는 그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요즘 바빴어? 잘 안 보이더니."

"조금."

"마침 잘 왔어. 연방이 잘 익었는데 하나 먹어볼래?"

남망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위무선이 손수 껍질을 까서 몇 알 건넸다. 연방을 내미는 그의 웃음이 너무나 밝게 빛나서, 남망기는 방금 전 대전에서의 일을 모두 잊고 말았다.

"위영."

둘이서 연방을 한참 까먹던 중, 남망기가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왜?"

"우리, 나갈까."

처음 외출한 날 이후, 언제나 먼저 나가자고 하는 쪽은 위무선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남망기가 먼저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위무선은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그가 말하기 전까지 먼저 묻지 않기로 했다.

"좋아!"

두 사람은 나루터로 향했다. 시내는 이제 몇 번이고 나다녔기에 지겹기도 했고, 무엇보다 남망기가 조용한 곳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남잠, 배 타봤어?"

"응. 몇 번."

"나는 물이 있는 곳에서 자라서 정말 많이 타 봤거든. 노는 내가 저을게."

위무선의 말에, 남망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렇게 물살을 가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이 느낌이 좋더라. 강바람 맞으면서 풍경을 바라보면 마음까지 시원해지잖아. 적당히 바람 쐬고 나면 이제 강가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에게 과일이랑 술을 사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거야."

한참을 혼자 떠들던 위무선은 남망기가 조용한 것을 느끼고 조심스레 그의 반응을 살폈다.

"남잠, 무슨 일 있었어?"

"괜찮아."

"난 그게 뭔지도 모르는데 괜찮다고 하는 거야?"

남망기는 잠시 주저했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하기 싫은 일을, 강요받아서."

위무선은 노를 내려놓고 남망기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에 팔을 살짝 걸쳤다.

"뭐 하는 거야?"

"보면 몰라? 위로해주는 중이잖아."

위무선이 씩 웃었다. 남망기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그는 애써 가볍게 말했다.

"하기 싫은 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싫으면 그냥 하지 마. 남이 대신 살아주는 인생도 아니잖아."

"너는?"

위무선은 남망기의 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는 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아, 내가 여기 온 거…,"

"싫지 않았어?"

"당연히 싫었지. 지금도 고향에 가고 싶어. 그런데, 좋은 일도 있더라고."

"좋은 일?"

"음…, 예를 들면, 남잠 너를 만난 거."

위무선은 그렇게 말하면서 옆에 앉은 남망기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기에 위무선은 남망기의 얼굴이 평소보다 가까이에서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얼굴은 최상품 옥을 장인이 정성들여 세공한 듯 빛이 났고, 청아하고 고운 눈동자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입매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저도 모르게 넋놓고 바라보던 위무선은 기묘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조금만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데…,

남망기의 입술이 살짝 열리려는 순간, 위무선은 정신을 차렸다. 분위기에 취한 걸까. 위무선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그에게서 떨어지려던 그때, 자신의 입술을 틀어막는 촉촉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 위무선은 충격에 몸을 떨었다.

새의 깃털이 위무선의 머릿속을 간지럽히는 듯, 홀려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남망기의 혀가 들어와 거세게 휘젓자 위무선의 온몸에 얕은 전율이 흘렀다. 술을 궤짝 채로 들이부었을 때보다 심장이 더 크게 뛰었고, 눈앞이 새하얗게 흐려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저항하려 해도 팔다리가 돌처럼 굳어버려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저항할 마음이 있었던가. 두 사람의 입술과 혀는 혼란스럽게 뒤엉켜 끝을 모르고 서로를 탐닉했다.

이윽고, 조금 아쉬운 듯 남망기가 위무선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떨어졌다. 두 사람은 어색함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망기는 어김없이 별원까지 위무선을 데려다주었다. 평소처럼 안전하게 들어가는 것을 보고 뒤돌아서려는 순간, 위무선이 그의 팔을 잡았다.

"같이 술 마실래?"

술은 안 마실 생각이었지만 남망기는 거절하지 않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위무선의 침소 지붕에 나란히 올랐다. 늘 그렇듯 남망기는 단정하게 앉았고, 위무선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남잠, 기억나? 우리 처음 나간 날, 그날도 보름달이 떠 있었는데."

그 말에 남망기가 하늘을 보니,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었다.

"나, 처음 왔을 땐 이 나라의 모든 것이 미웠거든.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도 걱정되고, 내 나라를 짓밟고 날 이곳에 끌고 온, 얼굴도 모르는 황제라는 작자에게 정말 너무 화가 나더라고."

위무선의 말에, 황제인 남망기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지금도, 황제를 미워해?"

남망기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지만 위무선은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당연하지. 이 원한을 어떻게 잊어? 아, 이건 비밀이야, 비밀. 남 형, 비밀 지킬 거지? 이거 알려지면 난 죽을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위무선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예상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남망기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기분이었다.

위무선은 그 사이 다 비운 술병을 옆에 내려놓고 피리를 꺼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남망기도 고금을 꺼냈다. 두 사람은 미리 맞춘 것도 아닌데 같은 곡을 합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처음 만난 날, 정원에서 함께 연주했던 그 노래를.

깊은 밤 슬프도록 고운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보름달만이 환하게 그들의 머리 위를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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