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달

[채햄] 내 사랑이 되어 주세요 - 下

채햄 / 손톱달 외전

내 사랑이 되어 주세요 - 下

w. 주인장


거, 되게 거슬리게 하네.

기현은 늦게 강의실로 들어온 온 탓에 가운뎃줄 맨 앞자리에 앉아 버린 자신을 꾸짖으며, 제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려 제 손바닥 두 개를 올려 놓아도 여백이 남는 큰 시험지 위에 고개를 부러 더 처박고 있었다. 산문집을 몇 번이고 읽었는데도, 피피티를 밤새도록 읽고 외웠는데도, 이 교수는 선배들의 경험담이나 족보 같은 게 돌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건지 생각지도 못한 문제를 던져 주었다. 뭐, 어차피 기현은 예상 문제를 나눌 동기도 몇 없는 복학생 나부랭이이긴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싶은 거다.

제 주변에서 사각거리며 종이를 긁는 펜 소리 대신에 각각 다른 템포로 작고 깊은 탄식 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것은 전염성이 강한 것이라 제 속에서도 깊은 한숨이 차올랐으나, 결국 입으로 내뱉지 못하고 코로만 흐응- 하고 내뱉으며 속을 가다듬어 본다. 제 앞에 서 있는 이의 귀로 제 한숨 소리가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가을의 중턱을 맞이한 강의실에는 벌써부터 찬 기운이 온 공간을 지배해서 손끝부터 시린 감이 올라오고 있었으나, 제 정수리 만큼은 뜨끈하게 열이 올라온다. 모자를 썼기 때문도 아니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기 때문에도 아니고, 순전히 제 머리통에 닿는 시선이 포근해서인가 싶다.

형원을 다시 마주하게 된 건, 시험 전에 함께 저녁을 먹은 날 이후로 오늘이 처음이었다. 무서울 정도로 제 시선의 끝에 머물러 있던 선배는 그냥 바빴던 건지, 아니면 고백 했으니 됐다는 건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췄었다. 그날 버스에서 대단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고작 맥주에 취해서 속에 엉킨 알코올 냄새를 입으로 후- 하고 뱉고 있으면, 속은 괜찮냐며 옆에서 조심히 검은색 비닐봉지를 가져다주는 게 다였다. 괜찮다고 손사래 치며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선 이어폰을 꺼내려 하면, 저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제 오른쪽 귀에 이어폰 한 쪽을 꽂아 주고는 나머지 한 쪽을 그의 귀에 꽂았던 게 다였다. 선배와 노래 취향은 달랐지만, 적당히 집 가는 동안의 정적을 무마하기에는 문제 없었기에 그냥 제 귀로 흘러들어오는 멜로디를 음미하기로 했다.

그래도 노래는 좋네. 다음에 연습해 봐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제법 짧고 깊은 잠에 들었던 것 같다. 그래도 귀소 본능에 특화된 몸 덕분에, 기가 막히게 세 정거장 전에 잠에서 깬 기현은 형원의 어깨에 뉘어 있던 고개를 번쩍 들어서, 여태 내리지도 않고 머리를 하염없이 끄덕이며 졸고 있는 형원을 흔들어 깨웠다.


‘선배, 저 이제 내려요.’


옛날 티비 광고에서 들은 적 있던 멘트가 제 입 밖으로 나오는 게 제법 어색했다. 제 말에 눈을 반만 뜨고서 부랴부랴 짐을 챙긴 형원은 기현이 내리는 정거장에서 함께 내렸더랬다. 어디로 가느냐는 기현의 물음에, 친척 집이 이 근처라고 돌아오는 대답이 거짓말인 것 정도는 빠르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런 갑작스러운 우연이 어디 있어. 누가 봐도 낯선 길을 걷는 걸음인데, 그걸 모를 리가. 그럼에도, 아직도 미미하게 잠에 취해 있는 형원에게 기현은 저를 바래다 주는 것이냐고 묻지 않았다. 이 고요하게 빛나는 밤과, 찔끔 남은 술기운과, 그 모든 게 뒤섞인 선배의 눈 때문에, 스스로의 감정을 더 생각하지 않고 덜컥 그를 받아 버릴지도 몰랐으니까.

그렇게 기현이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서면서 눈에 담았던, 양 볼이 방싯 올라가서는 저를 보며 손을 흔들어 보이는 모습이 마지막일 줄 알았던 형원은, 피곤에 절어 있는 얼굴과 걸음걸이로 뜻밖의 장소에 다시 나타난 거다. 강의실에 들어서서는 교수님께서 학회 준비 때문에 바쁘신 관계로 대신 감독하게 되었다는 사무적인 말투와 함께 안을 두리번거리는 형원에게서, 기현은 일부러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숙였다. 왜 그랬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다. 형원이 보이지 않는 동안 그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시선으로 그를 마주할까 봐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펜을 다시 고쳐 쥔 기현은 종이 위에 뭐라도 적어 보자는 심산으로 거침없이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검은색의 진한 잉크가 종이 위에 자취를 남기고, 곡선과 직선을 연달아 남기며 한 줄씩 제 영역을 넓혀 간다. 1 번 문제의 답을 어느 정도 적고 나서 얼얼한 손날을 진정시키기 위해 펜을 놓고 오른손을 한번 털어낸다. 허공을 흩트리듯 갈라내는 손가락들이 둔탁한 무언가에 부딪히고, 고개를 들어 보면 이제야 컨디션이 돌아온 건지 눈을 또렷하게 뜨고 저를 내려다보는 형원과 시선이 마주친다. 소리 내서 사과를 할 수도 없었기에 당혹감을 담은 미소로 작게 고개를 까딱이면, 형원은 다 괜찮다는 듯 큰 손으로 제 정수리를 덮고는 토닥여 준다.

그의 시선과도 같은 포근한 손이 내려앉는 촉감은 낯선 것이 분명했는데도, 그 온기 때문인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든다. 그 낯선 익숙함 때문에, 숨죽인 채로 혼자 제 할 일만 하던 심장이 갑자기 요란하게 수축과 이완을 빠르게 반복하고, 차갑게 식어 있던 손끝까지 뜨끈하게 피가 돌게 한다. 열이 올라 움직임이 부드러워진 오른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반복한 후에, 짧게 숨을 집어삼키고 다시 펜을 들어 본다. 빨리 1 번 문제를 끝내고 다음 문제로 넘어가야 했다. 고작 세 문항밖에 되지 않는데도 한 문제의 답을 적기까지 오래 걸린 건, 제 몸을 달구는 뜨끈한 감이 이제야 돌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험 종료 5 분 남았습니다.”


제 머리맡에서 나직이 내려앉는 맹맹한 목소리에 부러 손에 더 힘을 쥔다. 지금 이 강의실에 남아 있는 인원은 손에 꼽힐 정도로 있으리라는 건 안 봐도 뻔했다. 시험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머쓱한 걸음으로 팔랑이는 빳빳한 시험지를 제출한 녀석도 있었고, 기현이 2 번 문제 답을 열심히 써 내려가고 있을 때 압력에 눌려 너덜너덜해진 시험지를 공손하게 내고 나가는 녀석도 있었다. 5 분이라는 시간은 시험을 마무리하기에 충분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시간이 지나면 제 앞에 선 남자가 저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기에 괜히 마음이 조급해진다. 원래도 깔끔하지 않은 제 글씨가 점점 날아가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렇게 강의실 밖으로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소리가 커지고, 제 옆으로 한두 명이 더 강의실을 벗어나고 나서야, 기현은 탁 소리 나게 볼펜을 내려 놓고 고개를 든다.


“다 했어?”


마치 이 공간에 기현과 형원, 단 둘만이 남은 듯이, 교탁에 팔꿈치를 괴고서 손으로 턱을 받치고 있던 형원은 그의 시선 만큼이나 부드럽게 말을 뱉는다. 제 몸에 긴장이 탁 풀리면서 몸이 노곤하게 녹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이 시험을 끝으로 중간고사가 끝났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선배가 여전히 저를 눈에 담고 때문인 걸까. 기현은 어색하게 시험지를 형원에게로 내밀고, 시험지에 많고 많은 여백을 남겨 두고 제 손 위로 스치는 형원의 손에 재빨리 손을 떼어낸다.


“어려웠어?”

“예, 뭐, 시험이 다 그렇죠.”


제 의도와 다르게 퉁명스럽게 나가는 언사에 기현은 괜히 입을 합 다문다.


“맞아, 이 교수님이 특히 더 해. 이번에 좀 예민하셨었거든.”


그런데도, 제 말을 부드럽게 받아치는 선배를 보면 괜한 미안함마저 위로받는 느낌이 들고 만다.


“많이 바쁘셨어요?”

“응?”

“요새 잘 안 보여서요.”


그래서 용기를 내 본 걸지도 모르겠다. 기현은 제 입 밖으로 멋대로 튀어 나가는 말들을 굳이 거두어 가지 않았지만, 그와 눈을 맞출 용기는 나지 않아서 괜히 가방 정리를 이어 간다.


“기다렸어?”

“그런 건 아니고.”


그런가? 선뜻 답을 할 수 없어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다. 기다린다는 건, 그를 위한 목적이나 그에 대한 명분이 있어야 했는데, 지금 당장 생각해 보자면 딱히 떠오르는 것들이 없었다. 아, 굳이 하나를 고르라면 목적과 명분에 해당하는 한 가지가 있긴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시험 끝났지? 시간 돼?”

“아, 저 알바 있어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아쉬움에 입을 느리게 떼어 내는 형원 만큼이나, 자리를 벗어나는 기현의 움직임이 평소보다 확연히 느리다. 아무래도 선배를 오랜만에 봤다는 반가움 만큼이나 아쉬움이 큰가 보다. 기현은 형원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강의실을 벗어나면서 그렇게 생각 했다. 기현은 강의실이 있는 인문관을 벗어난 뒤에야 걸음 속도를 줄여 나가기 시작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걷다 멈춰 서서 흘깃하며 뒤를 돌아보면, 언제나 그랬듯 복도 창가 쪽에는 형원이 서 있다.




평소에도 짐을 적게 들고 다니는 편은 아니었지만, 무려 2박 3일이나 떠나야 한다는 학과 단합대회 일정 때문에, 기현은 제 몸 만한 배낭을 메고 미리 대절한 관광버스가 있는 곳까지 무겁게 걸음을 옮긴다. 솔직히 이 정도 학번이면 이런 사소한 행사에는 빠질 만도 한데, 불참하면 불이익이 있을 거라는 전공 교수의 솔직한 협박 때문에 빠질 수도 없는 거다. 울며 겨자 먹기로 겨우 버스 앞에 다다른 기현은, 이미 바글바글하게 모인 제 후배들 사이에서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가방을 등에서 내려 놓고, 제 가방을 받아 대신 짐칸에 밀어 넣는 이에게 인사치레를 한다.


“어, 고맙다. 무거울 텐데.”

“어, 고맙다?”


당연히 집행부 후배일 줄 알았다. 보통 이런 잡일은 안타깝게도 그 친구들이 하니까. 기현은 저와 눈을 맞추고 있는 검은색 져지 차림의 형원을 보고는 2 초 정도 벙쪄 있다가, 서둘러 변명을 늘어놓는다.


“아, 민철이인 줄 알았어요. 죄송해요.”

“아, 괜찮아. 장난이야.”

“아니에요, 진짜 죄송해요.”

“왜, 나는 나쁘지 않았는데.”


이 선배는 그런 재주가 있었다. 그저 웃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아니, 편한 정도가 아니라 녹게 만드는 그런 재주가 있었다. 형원의 마지막 말에 뭐라 더 말을 잇지도 못한 채, 먼저 들어가 본다는 말만 던지고 등을 돌린 기현의 뒤로 발걸음이 따라붙는다.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는 버스의 차창에 비치고 있었으니까. 져지를 목 끝까지 올린 형원은 기현의 뒤통수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그의 뒤를 따랐다.


“기현아.”

“예?”

“너 이 버스 타?”

“네.”

“너 같이 앉을 동기 있어?”

“… 복학생한테 그런 건 왜 물어보세요.”

“없으면 같이 앉게.”

“그러세요, 그럼.”


뒤에서 조심스럽게 물어 오는 목소리가 제법 수줍어서, 기현은 피식 웃음이 샌다. 뭐, 언제는 물어보고 앉았나. 맨날 마음대로 옆에 앉고, 앞에 앉고 했으면서. 일찌감치 버스에서 인원 점검을 하고 있던 학과 조교는 버스에 오르는 기현을 반갑게 맞아 주었고, 그 뒤에 따라 들어오는 형원을 보고는 새삼 놀란 표정을 짓는다.


“뭐야? 어떻게 같이 와?”

“그냥 앞에서 만났어요.”

“야, 형원아. 너 자리 배정 미리 알려 줬어?”

“아, 누나.”

“예?”

“둘이 넷째 줄 오른쪽 자리. 같이 앉으면 돼. 야, 채형원, 너 이거 비밀이라니까. 기현이한테 알려 줬어?”


기현은 슬쩍 고개를 돌려 형원의 얼굴을 확인하고서는, 먼저 저벅저벅 버스 통로를 걸어 들어가 다짜고짜 창가 쪽에 몸을 앉힌다. 곧바로 쭈뼛거리며 제 옆에 조심히 몸을 내리는 형원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기현은 그저 시트 헤드 부분에 머리를 편하게 기댄 채로 눈동자만 굴려 그를 응시한다.


“선배.”

“응?”

“자리가 미리 정해져 있었나 봐요.”

“어, 그렇지, 사람이 많으니까.”

“선배도 같이 짰어요?”

“누나가… 도와 달래서… 응.”

“참나, 근데 왜 옆에 앉아도 되냐고 물어봤대. 이러나저러나 옆에 앉을 거였으면서.”

“불편하면 자리 바꿔 줄까?”

“아뇨, 뭐 새삼스럽게.”


차라리 선배 옆자리가 나아요.

이 말은 그냥 속으로 삼킨 채, 기현은 이어폰을 꺼낸다. 왼쪽 귀에 하나를 꽂아 넣고서 반대쪽에도 꽂아 넣으려다가, 머쓱하게 형원 쪽으로 손을 뻗는다.


“들을래요?”


그제야 방싯 웃는 그의 얼굴에 마음이 편해져서, 기현은 형원의 손에 오른쪽 무선 이어폰을 놓아주고서는 대충 형원의 취향에 맞을 법한 노래를 골라 본다.

몇 곡의 노래를 들은 건지 셀 수도 없었다. 이어폰 배터리에 빨간색 알림 표시가 뜰 때쯤이 되어서야 숙소에 도착한 형원과 기현은 각자의 방에 가방을 내려 놓고서 산행에 올랐다. 물론 젊은이들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은퇴를 목전에 둔 정교수 몇 명의 의견으로 강행된 산행이었다. 머리만 희끗하지, 아직 정정한 두 교수가 선두에 서서 성큼성큼 산을 오르면, 그 뒤로 부교수와 대학원생들이 뒤따랐고, 그저 이 일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학부생들은 느적느적, 최대한 교수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천천히 바위 계단을 오른다.

아니, 국어국문인데 산을 왜 타는 거야?

대다수의 사람들이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지만 하필 기현의 입을 통해서 공기 80, 소리 20으로 얇게 새어 나온다. 다행스럽게도 그 말은 형원의 귀에만 들어간 건지, 앞장 선 교수님들은 ‘산 공기가 좋지 않니?’ 하고 호쾌하게 웃으며 걸음을 나섰고, 다른 이들은 제 숨 고르기에도 바쁜 듯 그들만의 페이스에 맞춰 산길을 오른다. 별안간 기현을 돌아본 형원의 얼굴도 오랜 움직임으로 인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지만, 기현만큼 붉지는 않았다. 저 선배는 맨날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서 힘들지도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며 피곤함에 날이 선 눈으로 기현은 형원과 눈을 맞춘다.

등산을 꼭 넣었으면 한다는 교수들의 의견과 함께, 학과 단합 대회 장소를 이 산으로 정한 건 형원의 의견도 있었다. 사실, 형원에게 있어서 이 산은 고향과 비슷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 감상의 이유를 찾자면, 그의 전생의 기억에 있을 것이다. 과거에 매일 같이 이 산을 오르내리던 길은 이제 잘 다듬어진 등산로가 되었지만, 얼마쯤 걸으면 뭐가 있는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정도 고도에서, 등산로로 다듬어지지 않은 숲길을 더 가면 너와 처음 조우했던 큰 고목이 있는 그 숲이 나올 것이다. 그 숲에 대한 기억이 네게는 티끌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제게는 못내 아쉽지만, 그곳은 네게 아픈 기억만 가득한 곳일 테니 차라리 그 숲까지 길이 다듬어지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슬슬 체력의 한계에 다다른 건지, 등산로를 따라 얼마간 더 걸음을 내딛던 정교수들 사이에서 여기까지만 오르고 다시 슬슬 내려가자는 의견이 모이고, 그들의 뒤에 있던 학과 조교가 뒤따르는 학부생들에게 공지하자, 이내 탄성 같은 환호성이 들려 온다. 형원은 마침 잘 됐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여기서 더 올라가는 건 미련한 일이었다. 저 위에는 노장들이 원하는 탁 트인 풍경도 없었을 뿐더러, 애초에 이 산은 모진 석산이라 편하게 앉아서 정상의 공기를 마실 자리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제 주변으로 하나둘 주저앉는 인파 사이에서 형원은 기현을 찾는다. 흙바닥 위로 겨우 고개를 들이민 바위에 걸터앉아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는 그를 안심하듯 바라보다, 형원은 몰래 조심히 걸음을 옮긴다. 이 정도 고도에 자리해 있었다, 너와 내가 함께 묵었던 허름한 오두막은.

저를 부르면서 지치지도 않냐 타박하는 조교의 목소리에, 형원은 앉으면 더 힘들다는 말을 던지며 가볍게 옛 집터를 찾아 걸음을 옮긴다. 기억에 의지해 발을 내디디다 보면, 제 무릎까지 자란 잡초들이 서로 부딪히며 사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 소리에 괜히 마음이 편해지는 걸 보면, 제 전생의 기억이 허망한 거짓은 아닌 듯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어디 가요, 선배?”


형원은 불현듯 들리는 저를 붙잡는 외침에 경쾌하던 걸음을 멈추고, 무겁게 고개를 돌린다. 이상하게도, 그 자리에는 꼭 잿빛의 눈동자를 가린 네가 서 있을 것만 같았다. 너를 다시 마주하고서는 느낀 적 없던 노파심과 두려움이었다. 너를 부러 이끌고 이 산길에 들어오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혹여나 자비롭지 않은 신께서 변덕을 부리실까 봐.

그럼에도 너는, 기어코 이 험한 산길을 스스로 자처해서 걸음 하는구나. 설마 네게도 전생의 기억이 꽃을 피울까 하는 이기적인 미련한 기대가 피어나지만, 이내 그것은 서로에게 상처가 될 것임을 알기에 형원은 서둘러 생각을 거두고 제 시야에 기현을 온전히 담는다.


“아니, 불러도 대답도 안 하고. 사람들 다 저기 있잖아요.”

“… 왜 따라왔어?”

“조교 누나가 가 보래서요.”


아, 산행이 많이 고됐나. 비싸게 라식한 눈이 갑자기 침침하게 흐릿해지는 것에 기현은 형원을 따라가던 걸음을 멈춰 서서 손등으로 눈을 비빈다. 그에 표정을 굳힌 형원은 한달음에 그의 앞으로 다가가, 기현의 뺨을 그러쥐고서 저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그의 고개를 살며시 들어 본다. 제 움직임에 따라 눈을 감은 채 저항 없이 들리는 그의 얼굴에, 지금 기현의 얼굴 위로 과거의 그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항상 너를 둘러싼 어둠에 익숙해져, 낡은 천 안에 네 눈동자를 숨기며 눈을 감고 다니던 너였다.


“눈… 떠 봐.”


기현은 잘게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형원의 말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본다. 두 개로 흐릿하게 번졌다가 다시 하나로 모이는 시야 속에서, 오로지 형원만이 또렷했다. 그리고 동시에, 형원은 안도하며 엄지로 그의 눈가를 천천히 쓸어 낸다. 다행이다, 여전히 네 눈동자가 맑은 검은 빛을 띄고 있어서.


“… 뭐 하세요?”

“그냥, 너 눈에 뭐 들어갔을까 봐.”


머쓱하게 기현의 얼굴에서 손을 거둔 형원은 허전한 손을 옮겨 제 뒷머리를 헝클이며 주변을 살핀다. 분명 이 근처였다. 이 근처에 있던 우리의 오두막이 허물어져 사라졌다면, 이 언덕 위에 틀림없이 동굴이 있을 것이다. 네가 처음 내게 안겨 잠들었던, 내가 네게 처음 목소리를 들려주었던 그곳이.

둘 사이에 풀벌레 소리만이 가득 울리던 중에, 기현이 형원의 움직임을 살피다 그 정적을 먼저 깨 버린다.


“여기로 가면 뭐 있어요?”

“여기?”

“네, 어디 급하게 가시길래. 지금도 계속 둘러보고 있잖아요.”

“그냥, 궁금해서.”

“에이, 풀밖에 없잖아요. 다시 가요, 누나가,”


신의 변덕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산행의 초반에는 맑기만 했던 하늘에 순간 구름이 자욱하게 깔리더니, 이내 얇은 빗방울을 한두 방울 떨구기 시작한다. 기현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뺨 위로 떨어진 빗물을 닦아 내자마자, 제 손을 잡고 겁 없이 걸음을 내딛는 형원을 뒤따라 정돈되지 않은 걸음을 내디딘다.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을 그에게 던질 수도 없었다. 그의 걸음은 목적지가 정해진 듯 확고해 보였다. 지형도 알 수 없을 만큼 높게 자란 풀을 익숙하게 헤치던 형원은 원래 이곳을 잘 알고 있었던 듯, 다소 작지만 비를 피하기엔 충분해 보이는 동굴로 기현을 이끈다.

드디어 찾았다. 우리가 그 옛날, 처음 함께 공간을 나눴던 곳. 형원은 제 어깨를 툭툭 털다가, 주머니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을 들어 귀에 가져다 댄다. 멋대로 대열 벗어나서 어디로 간 거냐는 날카로운 윽박 소리가 제 귀에 꽂히고, 형원은 대충 청설모를 구경하다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둘러 댄다. 옆에 기현이와 함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까지 덧붙인 형원은 통화를 마치고서, 흥미롭게 동굴을 둘러보는 기현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비가 굵게 오는 건 아니니까 좀 사그라들면 다시 내려가자.”

“선배, 여기 어떻게 알았어요?”

“어렸을 때 와 봤어.”

“선배, 진짜 입만 열면 거짓말이네요.”

“방금은, 사람들이, 어? 괜히 걱정할까 봐 그랬던 거지.”

“아, 그래요?”


어차피 전생 얘기해도 안 믿을 거면서.

형원은 기현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투덜거리고서 동굴의 초입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동굴 안을 살펴보려다 칠흑 같은 어둠에 은근한 겁을 집어먹은 기현은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동굴 초입으로 돌아와 형원과 두 뼘 정도의 거리를 남기고 자리한다.

동굴 안쪽에서 무겁게 습기를 머금은 물방울이 느린 속도로 뚝뚝 떨어지며, 바닥에 부딪혀 크게 공명을 울린다. 둘 사이에 다섯 번째 물방울 소리가 울릴 때까지 기현에게 무슨 말부터 건네면 좋을까 고민하던 형원에게, 기현은 조심스레 말을 뱉는다.


“선배.”

“응?”

“제가 좀, 생각을 해 봤는데요.”

“응.”

“선배는, 제가 왜 좋으세요?”

“한결같아서.”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그것이었다. 이 생에서의 제 감정의 시작은 비록 부질없는 전생의 기억 때문이었으나, 여전히 고운 너의 목소리도, 여전히 선한 너의 눈매도, 여전히 단정한 너의 행동들도, 모두 그 예전에 제 가슴을 뛰게 만들던 것이라 좋았다.

기현은 예상치 못한 답변에 별다른 대답을 찾지 못하고, 그와 자신의 사이에서 단단한 바위의 틈을 뚫고 피어난 토끼풀을 손끝으로 살살 건드리다 조심스레 입술을 떼어 낸다.


“저도 생각을 해 봤거든요.”

“응.”

“… 선배가 싫진 않아요.”

“….”

“선배가 안 보이면 보고 싶고, 같이 있으면 왠지 모르게 편하고요. 제가 원래 누구 손 타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선배가 하면 그게 싫진 않아요.”

“….”

“… 솔직히 말하면, 좋은 것 같아요.”


기현은 제 손끝에서 느리게 흔들리는 토끼풀 한 송이를 조심스럽게 꺾어서, 무심하게 형원에게 들이민다. 형원과 처음 만났던 날, 그가 제게 처음 전했던, 그때는 자신이 외면했던 고백이었다.


“선배가 알려 줬잖아요, 그 꽃말.”

“찾아봤어?”

“내 사랑이 되어 주세요. 그렇게 돼 있던데.”

“…이걸로 반지 만들 수 있는 거 알아?”

“저 만들 줄 아는데, 만들어 드릴까요?”


형원은 기현에게서 토끼풀을 받아 들고는 그의 옆에 바짝 다가가 앉아 왼손을 내민다. 기현의 손이 형원의 왼손 약지에 닿자 거짓말처럼 비를 뿌리던 하늘이 맑게 개고, 구름 뒤에 가린 햇볕이 둘을 비추는데도 둘은 반지를 나눠 가질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 내 사랑이 되어 주세요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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