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햄] 내 사랑이 되어 주세요 - 中
채햄 / 손톱달 외전
내 사랑이 되어 주세요 - 中
w. 주인장
그냥 한 학기 더 쉬고 복학할걸 그랬나.
기현은 여느 때와는 달리 한산한 강의실 앞 복도에서 90도로 열린 제 몫의 캐비닛 문을 잡고 우두커니 서서 생각한다. 그의 맑고 검은 눈동자의 끝을 따라가 보면, 캐비닛 입구 가까이에 잔뜩 시들어서 흰색 꽃잎 끝자락부터 갈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비쩍 마른 토끼풀 한 송이가 자리해 있다. 평소 같으면 가지런히 책을 정리해 넣고 필요한 것들만 간결하게 꺼낸 뒤 다음 행선지로 향했을 테지만, 때마침 수업이 일찍 끝난 탓에, 때마침 갈 곳도 마땅치 않은 탓에, 그 시든 꽃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거다.
왜 고작 저 말라비틀어진 풀 같은 꽃 한 송이를 버릴 수가 없는 걸까? 사실, 이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그냥, 버리면 안 될 것 같아서. 버리고 나서도 계속 생각이 날 것 같아서.
도대체 무엇이 생각날 것 같으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그에 대한 대답을 생각보다 쉽게 뱉어내지 못하는 것이 답답한 부분이었다. 이미 답이 정해져 있음에도 다른 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저가 생각하기에도 미련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으나, 이미 진작에 나온 답을 순순히 인정하자니 스스로가 납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 그 선배가 제게 이 꽃을 꺾어다 준 것인지, 나를 보고 왜 울었던 것인지,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는지.
도대체 그 선배는 누구인지.
답지 않게 불필요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꼭 오랜 시간 서랍 구석에 방치된 빛 바랜 목걸이처럼 손 쓸 수도 없게 지들끼리 뒤엉켜 풀 수조차 없게 되어 버린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속에서 손톱 만하던 짜증이 스멀스멀 몸집을 키워 가기 시작한다. 복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이미 이번 학기의 중간고사가 코앞에 있는데, 불현듯 나타난 복병이 지난 학기에 받아 놓은 엉망인 성적도 아니고, 군입대 당일에 저를 보란 듯이 차 버렸던 첫 여자친구도 아닌, 겨우 얼굴 정도만 아는 까마득한 학교 선배라는 게 어처구니가 없는 거다.
그저 제게 꽃을 가져다 준 것으로 그쳤다면 복병이라고 칭하지도 않았을 테지. 그 이후로 그 선배를 마주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건 안일한 착각이었다. 원래 대학원생이 학부생이랑 이렇게 자주 마주치나 싶을 정도로 그 선배는 제 시야 내에 줄곧 존재하긴 했다.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에서 벗어나면 저 복도 끝에서 저를 보고 있다거나, 교양 수업을 들으려 다른 건물로 이동하는 중에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면 학과 창문에 그 선배가 서 있다거나, 카페에서 테이크아웃 잔을 받고 등을 돌리면 그 선배가 제 뒤에 있다든가.
제 등으로 복도 창에서부터 쏟아지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따갑다고 느껴질 때가 되어서야 기현은 눈을 감고 목을 좌우로 느리게 꺾으며 작게 낮은 탄성을 뱉어낸다. 일단 당장 눈앞에 있는 중간고사와 발표 과제부터 해치워야 한다. 이 토끼풀인지 뭔지 하는 거나, 그 이상한 선배나, 어차피 시험이 끝나고 아르바이트하며 바쁘게 살다 보면 한순간 잊혀질 게 뻔하니까.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 넘겨 버리기로 한 기현은 자신의 캐비닛 문을 닫자마자 나타난 인영에 놀라 나자빠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낸다.
"안녕?"
약간의 긴장감이 서려 있는 얼굴을 하고서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한 손을 올려 인사를 하는 모양새가 퍽 부자연스럽다. 무슨 귀신도 아니고, 사람이 이렇게 인기척 없이 갑자기 나타날 수가 있나. 아, 차라리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제 눈에만 거슬리게 나타날 리가 없을 테니까. 기현에게 버퍼링이 걸린 듯이, 꼭 인터넷에서 본 놀란 햄스터 사진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빤히 바라보는 것에 형원은 더욱이 민망해져서 여태까지 들고 있던 자신의 오른손을 제 뒷통수로 가져가서는 괜한 뒷머리칼만 쥐어 뜯듯이 만지작거린다. 노크라도 했어야 했나. 뭐, 이미 열린 캐비닛 문에 노크를 했다고 한들, 얘가 안 놀라지도 않았을 것 같은데.
"뭐 해? 여기 가만히 서서?"
"아, 안녕하세요."
형원이 큰 키를 내세워 기현의 캐비닛 문 너머로 그 안을 들여다보려 하자, 기현은 다 시들어 버린 채로 방치된 토끼풀을 들킬까 봐 서둘러 캐비닛을 닫아 버린다. 저 멀리 복도 끝에서 서너 명 정도 돼 보이는 한 무리가 내는 백색소음만 들리던 복도에 낡은 철제문 소리가 요란하게 퍼지며 둘 사이의 정적을 완전히 채운다. 사실, 쾅 소리를 내며 캐비닛 문을 닫은 직후에 '이거 좀 시든 게 뭐 어때서?'라는 오만과 '아, 이렇게까지 오버 할 필요는 없었는데'라는 민망함이 교차했으나, 이미 둘 사이를 둘러싸며 흐릿해지는 캐비닛의 메아리 속에서 기현은 그저 제 앞에 선 선배를 보며 휘어진 눈으로 웃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기현이 이때다 싶어 형원에게 멋적게 꾸벅 인사하고 자리를 벗어나려 했으나, 채 고개를 다 숙이기도 전에 형원의 말 한마디로 다시 그 자리에 붙잡힌다.
"수업은? 다 끝났어?"
"예? 예, 다 끝났죠."
"뒤에 뭐, 더 할 거 있어?"
"예, 뭐, 시험공부 하러 가야죠, 중간고사 얼마 안 남았으니까."
하하하, 하고 웃는 제 웃음소리가 소름 끼치게 어색하다. 그간의 행적으로 봤을 때, 제 눈앞에 있는 게 헛것인지 아닌지부터 확인하고 싶었으나 함부로 그에게 손을 뻗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상황에서 저가 취할 수 있는 베스트는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라는 확신이 선다. 다시 한번 기현이 그를 향해 ‘선배도 파이팅 하세요!’ 하며 양손을 엉거주춤 들고서 눈을 맞추자, 빠르게 하지만 조심스럽게 제 왼쪽 손목을 잡아오는 손길에 자연스레 그곳으로 눈이 간다.
이 선배가 나를 만졌다. 다행히도 헛것이 아니라 산 사람이긴 한가 보다.
“가게?”
“예… 가야죠? 선배는 안 바쁘세요?”
나? 나도 바쁘긴 하지. 바쁘긴 한데….
기현의 물음에 제게 밀려 있는 일들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논문에 쓸 다른 자료도 읽어 봐야 하고, 교수님이 부탁한 수업 자료도 정리해서 드려야 하고, 내 논문도 수정해야 하고…. 형원은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다시금 부여잡고서야 저를 바라보는 기현의 표정을 살핀다. 그 언젠가, 아득히 먼 옛날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유한 것이었다. 적당히 휘어져 있는 눈꼬리라든가, 경직되어 있어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올라가 있는 입꼬리라든가. 결코 호의적인 반응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들이었으나, 고작 이런 것들에도 형원은 어쩐지 마음이 놓여 붙들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어 낸다.
"저녁은?"
"… 이제 4 시 조금 지났는데요?"
"아, 그래?"
"예, 그럼,"
"그러면, 같이 도서관 갈래?"
"같이요?"
"공부해야 한다며. 나도 해야 해서."
이제 네 주변을 겉도는 건 그만하고 싶어.
기회는 먼저 움직이는 자가 쟁취하는 거라고 했던가. 형원은 어떻게든 기현의 시야에 들기 위해 애썼던 그간의 제 노력이 헛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그의 시선을 집요하게 좇는다. 지금 기현의 답을 기다리는 짧은 순간조차도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다. 지금 기현이가 나를 거절하면,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 빌어먹을 하늘을 저주하면서 평생 삐뚤어진 채로 살 테다. 박사고 나발이고.
“그래요, 뭐, 상관없어요.”
감사합니다, 하늘이시여.
어차피 제가 속한 과의 특성 상, 시험 공부라고 해 봐야 굵디 굵은 고전산문집을 읽고 교수님이 강의 시간에 보여 준 방대한 양의 피피티 자료를 외우는 게 다였다. 일단은 그냥 봐도 몇백 페이지는 족히 넘어갈 것 같은 책을 읽어야 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집중해야 이 책의 반절 정도는 읽을 수 있을 텐데, 기현은 책상 밑으로 내린 다리를 왔다갔다 꼼지락거리며 애써 제 앞자리에 앉은 이의 시선을 무시하는 데에만 애쓰고 있었다.
저 선배는 분명 할 게 많다고 해 놓고는 노트북만 펼쳐 놓고 뭘 하고 있는 건지, 저 시선이 노트북 화면에 꽂혀 있는 시간보다 제 정수리에 꽂혀 있는 시간이 더 길다는 데에 이번 학기 성적을 걸 수 있을 정도였다. 차라리 저를 대놓고 쳐다보고 있으면 제 정수리에 뭐가 묻었냐고 말이라도 하겠건만, 신경 쓰여서 눈동자를 들어올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노트북을 보고 있거나, 목 좀 축이려 커피를 홀짝이면서 눈동자를 굴리면 잠시 마주치는 시선에도 눈을 접어 웃어 보이는 선배 때문에 되려 제가 먼저 훔쳐보다 걸린 기분이 드는 것이다. 제게 꽂히는 시선이 뜨거운 건지, 제 머리 위를 비추는 LED 전등이 뜨거운 건지, 기현은 냉기가 거의 다 식어서 물방울이 맺힌 테이크아웃잔을 내려 놓고서는 책상 위에 펼쳐 놓았던 책을 세워 들고, 그것을 그늘 삼아 더욱 고개를 푹 숙인다.
도서관까지 오는 길은 제법 순탄해 보였다.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로 모르는 사람인 척 도서관까지 올까 싶기도 했으나, 원체 본인의 타고난 기질이 그렇지 못한 탓에 제 뒤를 졸졸 따라오는 이에게 이래저래 말을 붙였더랬다. 그럼 선배는 몇 학번인 거냐는둥, 박사 과정은 힘드시냐는둥, 저는 지금도 힘들어 죽겠는데 대학원은 못 갈 것 같아요 라는둥. 그에 이 선배는 그제야 저와 거리를 좁히면서, 원래 웃는 상도 아닌 것 같은데 제가 하는 질문이 귀엽고 반갑다는 듯이 양볼을 방싯 올리고는 묻는 족족 재잘거리며 잘도 답해 주었더랬다. 그러면서 저에 대해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몇 학번이냐느니, 제대하고 복학한 거냐느니, 전공 수업을 들을 만하냐느니.
사실, 기현은 이 선배에 대한 긴장을 한시도 놓을 수가 없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경계 없이 이 선배를 대하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요즘처럼 흉흉한 세상에 거의 초면이다시피 한 제게 풀꽃으로 접근해서 호시탐탐 제 시야에 머물다가 예기치 않게 호의적으로 말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기현이 형원을 의심할 이유는 충분했다. 요즘에는 사이비가 캠퍼스 안에도 깊숙히 침투해 있다는데. 사이비가 다 수상한 차림은 아닐 거 아냐. 이 선배처럼 그냥 펑퍼짐한 갈색 체크 셔츠 입고 다닐 수도 있는 거지.
“집중이 안 돼?”
기현은 제 책 위를 톡톡 두드리는 끝이 붉은 얇은 검지손가락에 고개만 빼꼼 들어 그 손가락 너머에 있는 이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대단한 것도 아니고 고작 시험 기간에 할 수 있는 통상적인 안부일 뿐일 텐데, 무슨 제게 큰일이라도 생긴 것마냥, 잔뜩 걱정 어린 목소리로 저를 살피는 노트북 너머의 얼굴에 언제 그렇게 잔뜩 긴장하고 있었냐는 듯이 이상하게 마음이 동해 버린다. 왠지 모르게, 이 선배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어딘가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경우에는 별것도 아닌데 너무 오버하시는 거 아니냐며 당황스러워하는 것이 보통이겠으나, 오랜 시간 언제나 저를 이렇게 대해 왔다는 듯이, 제 귀로 흘러들어오는 다섯 음절에 불협화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기현은 갑자기 눈에 몰려드는 피로감으로 아득히 흐려지는 시야를 바로잡으려 양손을 빠르게 비비고서 손바닥에 남은 잔열로 눈 위를 마사지하듯 천천히 문지른다.
"괜찮아? 책이 안 넘어가길래."
"아, 예, 좀 피곤한가 봐요."
"나갈까?"
"아뇨, 저 아직 할 거 많은데…."
형원의 시선은 기현이 천천히 문지르고 있는 그의 눈에 꽂혀 있었다. 인간은 전생의 흔적을 조금씩 가지고 태어난다고는 하는데, 그게 부디 눈과 관련된 것만은 아니기를 형원은 기현을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마음 속으로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기현이 눈 위에서 손을 떼어 내고 흐릿한 초점을 바로 맞추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는 찰나에,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제 왼쪽 눈꼬리로 형원의 엄지가 슥 하고 지나간다. 당황스러움에 뭐냐고 바로 되받아치면, 형원은 그렇게 물을 줄 알았다는 듯이 '눈썹에 먼지 붙어 있어서'라며 미리 준비된 거짓말을 늘어 놓는다. 그렇게 능청스럽게 대답하고서 씩 웃는 얼굴은 기현이 처음 보는 것이었으나 그 또한 익숙한 느낌의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 관자놀이를 타고 지나간 엄지손가락의 감촉이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어서 그 웃는 얼굴마저 그렇게 느껴진 걸지도 모르겠다.
처음 접하는 것에서 오는 익숙함이라는 것은, 기현으로 하여금 묘한 긴장감을 불어 넣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이전에 느끼던 경계심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꼭 저가 조금이라도 방심한다면, 이 아련한 긴장감이 제 눈을 가려 저항없이 이 익숙함에 푹 적셔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기현은,
"배는 안 고파?"
"조금 고프긴 한데, 집 가서,"
"같이 먹자. 사 줄게."
"아니에요, 저 집 가서,"
"치킨 좋아해?"
"네."
이미 제 눈가에서부터 그 익숙함에 젖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냥 콜라나 마실걸. 맥주를 마시지 말걸 그랬다.
기현은 두 번째 갈아치워지고 있는 제 몫의 500cc 맥주잔을 보면서 확실히 제 몸이 평소 컨디션과는 다름을 느낀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어느 무리에서 술을 마시더라도 '너 술 좀 마신다'에서의 '너'를 담당하고 있었으며, 이제 맥주 같은 걸 술이라고 해야 하나 하며 친구들끼리 허세 섞인 농담을 던져도 '너라면 그럴 만하지'에서 '너'를 담당하고 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하얗게 서리가 낀 차가운 맥주잔을 바라보다가, 제 앞에 앉은 이는 어떤가 하고 고개를 돌리면 기다렸다는 듯이 저와 눈을 맞춰 오며 주전부리로 나온 짭짤한 팝콘을 하나씩 집어 입에 넣고 있는 채형원이라는 선배가 멀끔하고 반듯하게 앉아 있다. 저 선배는 저보다 더 마셔 놓고 왜 저렇게 멀쩡하지. 얼굴 색 하나 안 변했네.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기현은 술기운에 차오르는 숨을 한숨처럼 포옥 뱉고 나서 제 앞접시 위에 놓여 있던 먹다 남은 닭날개를 집어 마저 입에 쑤셔 넣는다.
"괜찮아?"
저놈의 괜찮냐는 말 좀 안 할 수 없나. 내가 언제 선배를 그렇게 걱정시켰다고. 기현은 입술 밖으로 삐져 나온 깔끔한 닭뼈 두개를 손으로 집어 빼내고서, 스테인리스 통에 댕그랑 소리 나게 툭 던져 놓는다.
"예, 괜찮아요."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
궁금한 건 내 쪽이 더 많은 것 같은데. 기현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눈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 홀짝인다.
"버스킹은 언제부터 한 거야?"
"수능 끝나고부터요."
"잘 부르던데."
"그런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그냥 취미로?"
"취미죠. 박수 받으면 기분도 좋고."
그거 말고 다른 게 있나. 한때는 그쪽으로 진로를 잡아 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땐 그렇게 음악에 간절하지도 않았고, 그냥 취미로만 둬도 만족할 수 있겠다 싶었던 게 지금 생각해도 한이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이미 제대하고 1학년 2학기로 복학까지 했는데. 기현은 형원의 말에 고개까지 끄덕이며 답하다가 다시 고개를 제대로 고쳐 들고 제 앞에 앉은 저보다 6살 정도 많은 선배를 빤히 바라본다. 툭 튀어나온 목울대를 위아래로 움직여 가며, 제 것보다 큰 손으로 저 잔을 들고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 저 선배는, 분명 남자다. 제 말을 받아치는, 맹맹하지만 적당히 낮은 목소리도, 남자의 것이다.
"나 또 궁금한 거 있는데."
"뭔데요?"
"혹시… 전생 같은 거 믿어?"
뭐야, 진짜 사이비인가. 기현은 순간 멍해지는 머리에 저가 준비한 질문까지 까먹을 뻔했다. 지금이라도 빨리 가방 챙겨서 도망쳐야 하나. 그런데 밥 먹기 전에 기도도 안 하는 거 보면 종교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게다가 저가 입 안에만 굴리고 있는 그 질문은, 지금 이 분위기가 아니면 도저히 내뱉을 수 없는 것이라, 기현은 최대한 '저 사람 이상한 사람 아냐?'하는 티를 지우기 위해 제 앞에 놓인 맥주를 한 모금 더 홀짝인다.
"아뇨, 안 믿어요."
"그래…."
"지금이 중요하죠, 뭐. 그런 게 뭐가 중요해요."
"그럼 눈은? 원래 좋았어?"
"눈이요?"
"응, 뭐 시력이 안 좋다거나, 아니면 다른 불편한 게 있다거나."
"눈은… 뭐… 라식 했어요."
"언제?"
"수능 끝나고요."
"수능 끝나고 많이 바빴네."
형원은 잔을 내려 놓으면서, 본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삐딱하게 고개가 꺾여 있는 기현과 눈을 맞춘다. 단지 그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벅차오르는 것은 비단 술 기운 때문은 아니리라 확신한다. 잠시 스쳐지나가듯 시선을 맞출 때에는 조바심이 일었지만, 지금처럼 제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맞춰 오는 것에는 안도감을 느낀다. 형원은 제 깊은 옛날의 기억 속에서 흰색의 비단으로 눈을 가리고 있던 기현을 꺼내어 지금의 기현 위에 겹쳐 본다. 그 천 안에 숨겨 놓았던 탁한 잿빛의 눈동자가, 색을 찾으니 이렇게나 반짝이는구나. 형원은 꼭 귀한 보석이라도 발견한 듯,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 손으로 턱을 괴고 기현을 가만히 응시한다.
"저도 궁금한 거 있는데요."
"응, 뭔데?"
"저, 그 토끼풀 꽃말, 찾아 봤거든요."
"잘했네."
"…선배."
"응?"
"저 좋아하세요?"
"응."
"…."
"왜?"
"아… 남자한테 고백 처음 받아 봐서요."
"괜찮아, 나도 남자한테 고백 처음 해 봐."
근데 뭐가 저렇게 자연스러워. 기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형원의 대답에, 그가 제 물음에 대답했다는 사실을 3 초 뒤에 깨달았다. 아니, 저 얼굴이면 좋다는 여자가 줄을 설 것 같은데 왜 굳이 나를? 그런데 갑자기 휘몰아치는 영문 모를 언짢은 기분은 저 선배의 대답 때문인지, 저 스스로 곱씹었던 쓸데없는 생각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기현은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형원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고 제 앞에 있는 맥주로 복잡한 속을 달랜다. 술이 목을 따라 제 몸의 중심까지 흘러 내려가고, 냉기가 서서히 혈관을 따라 퍼지는 기분이 들지만 이상하게 손끝과 얼굴은 더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든다. 확실한 것은, 이 감각의 원인이 절대 부끄러움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자연스러운 신체적 반응인 거다, 술로 인한. 그래, 술 때문이다. 술 때문에 괜한 걸 물었고, 저 선배도 술 기운에 되는대로 답한 거다.
"선배, 저 막차 끊기기 전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아, 빨간 버스 타야 돼?"
"네, 그거 한번 놓치면 언제 올지도 몰라서요."
"데려다 줄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진짜 괜찮은데. 기현이 주섬주섬 옆에 놓인 제 가방과 테이블 위에 올려진 제 휴대폰을 챙기면서 천천히 일어나자, 형원도 계산서와 제 짐들을 챙겨 들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한다. 기현은 순간, 먼저 가게 나가서 집 갈까, 하는 생각이 스쳤으나 너무 예의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라서 그저 가게 입구에 멀뚱히 서서 형원을 기다리기로 한다.
버스 정거장까지 가는 길이 이렇게나 멀었던가. 도서관으로 올라가는 길에 벌어진 거리를 좁힌 건 형원이었으나, 늦은 밤 정거장으로 향하는 길에 다시 거리를 벌리는 건 기현이었다. 둘 사이를 채우던 스몰토크도 이 요란한 대학가의 밤에는 사치라는 듯이, 둘은 별다른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버스 정거장으로 발걸음만 옮길 뿐이었다.
기현은 어지러운 시야를 붙잡고 도착 예정 안내 표시를 빤히 바라보다가, 자신이 탈 버스가 머지않아 도착하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한시름 놓는다. 뭐, 고백 같은 건 술 마셔서 기억이 안 난다고 내빼면 그만이니까. 어차피 내일이면 또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니까. 이 선배가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야, 피하고 무시하면 그만이니까. 기현은 이 모든 것들을 가볍게 넘기기로 해 놓고, 제 뒤에 서 있는 형원을 향해 비틀거리며 돌아서서 저녁 잘 먹었다며 꾸벅 인사를 하고서는 마지막일지도 모를 해사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 순간 제 입에 쓴맛이 감돌았던 건, 그저 맥주가 남긴 텁텁한 뒷맛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기현이 가방을 고쳐 매며 도로 쪽으로 몸을 돌리는 중에 순간 휘청거리는 것을 형원이 겨우 잡아 바로세워 준다. 기현은 제 팔뚝에 닿는 그 온기가 낯설지 않다는 데에서 또다시 근원을 알 수 없는 정의 내려지지 않은 감정이 들어 저 멀리 제가 탈 버스가 정거장에 다다르기도 전에 한 발 더 내디뎌 인도의 끄트머리에 다가가 선다. 아직 그 선배가 제 뒤에 있다는 것 정도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으나, 부러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예의랍시고 뒤를 돌아보았다가는, 이 낯선 익숙함과 술기운이 겹쳐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짓을 하거나, 보란듯이 그 선배가 잡는 대로 잡혀 줄 것 같았다. 기현은 자신이 올라탈 빨간색 버스가 더디게 다가오는 것을 속으로 답답해 하다가, 제 앞에 멈춰서서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 들듯이 올라타 눈에 보이는 아무 자리에 몸을 앉히고서는 눈을 감고 깊게 심호흡을 들이마셨다가 내쉰다.
이 정의하지 못한 감정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낯설지 않다 느끼는 이유는, 내가 무의식 중에 잊고 살았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인가. 그런 종류의 것이라면 기억해 내지 못할 리가 없는데. 아니면, 어쩌면, 저 선배가 그냥 싫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
기현은 결국 '모르겠다' 한 구절만 머리에 띄워 두고 버스가 출발하는 것에 맞춰 잠을 청하려 했으나, 덜컹거리며 급하게 멈추는 버스에 앞으로 튕겨나갈 뻔한 몸을 간신히 다시 앉혀 두고 번쩍 눈을 뜬다. 버스 앞자리에서 기사님이 크지 않은 소리로 잔소리 비슷한 것을 쏟아내는 것이 들리고, 이윽고 버스 앞쪽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제 옆자리로 와서 조용히 앉는 이는,
채형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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