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햄] 내 사랑이 되어 주세요 - 上
채햄 / 손톱달 외전
내 사랑이 되어 주세요 - 上
w. 주인장
행여나 여즉 자신들을 향해 겨눠진 화살이 기현에게 꽂힐 세라, 형원은 등에 불이 붙은 것 같은 통증에도 꼭 죽은 듯이 그를 제 품에 가만히 안고만 있었다. 형원은 주변의 기척이 사라진 후 한참이 지나서야 제 품 안에서 고요히 잠들어 있는 제 작은 연인을 바라본다. 이 고을의 병사들은 자리를 뜬 지 오래였으므로 그들을 비추던 횃불도 사라져, 제 그늘에 가린 연인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제 몸을 비켜 그의 얼굴로 달빛을 내린다. 반인반수의 몸은 수십 발의 화살을 맞고도 그 숨이 쉬이 꺼지지 않음에 그는 고통스레 얼굴을 구기며 제 품에서 기현을 천천히, 조심스레 놓아 준다. 그의 목에 난 두 개의 동그란 상흔을 짐승의 털이 여즉 남아 있는, 인간의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손으로 조심스레 쓸어 본다. 그 크지 않은 구멍으로 여즉 벌건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으나 처음의 온기는 간데 없고, 그 작은 온기마저 가신 그의 차가운 목덜미는 꼭 잘 다듬어진 목재 인형의 것처럼 딱딱하기 그지없다. 저와 함께 하고 싶다 하던 이에게서는 이미 그 여린 생명의 불씨가 소리없이 저버렸는데, 왜 이 부질없는 숨은 쉬이 꺼지질 않는 것인가. 혼자 두지 말라 하였는데. 너를 혼자 두어선 안 되는데. 나도 어서 이 숨을 거두고 너와 함께 황천길로 가는 배에 두손 맞잡고 올라야 하는데.
자신의 부상 때문인지, 형원은 서서히, 아주 느리게, 인간의 형상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제 등과 팔에 꽂혀 있던 화살은 두꺼운 짐승의 가죽도 제대로 뚫지 못했던 건지, 형원의 몸이 작아질수록 그 납이 스르르 빠져 바닥에 나뒹군다. 완연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형원은 이제야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것에 한탄하며, 기현의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뒤늦게나마 깊은 잠에 빠진 연인의 이름을 되뇌어 본다.
"기현아… 기현아…"
"참으로 딱하구나."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제 것과 비슷한 음성이 들린다. 꼭 본능적으로 제 연인을 지키겠다는 듯이, 기현을 제 등 뒤에 숨기고 형원은 몸을 돌린다. 느리게 눈꺼풀을 내렸다 올리는 사이로 들어오는 형상은 백의를 입은 연분홍빛 머리칼을 한 사내였다. 한 번 더 눈을 느리게 깜빡이자, 그 자는 제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쪼그리고 앉아 이리저리 제 안색을 살핀다.
"그 사내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대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
"…."
"아,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지. 그대의 그리 괴로움 가득한 얼굴을 보았더라면 편히 떠날 수 있었겠는가."
"…."
"그대의 상흔은 깊지 않은 듯하니, 조금만 치료를 받으면 나을 성싶구나."
"되었소. 저리 비키시오."
이 자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있다. 신선이라 불리는 사내, 언제 태어나 언제 명을 다할 지도 모른다는 불로불사의 사내. 그에게는 영험한 힘이 있어, 병약한 이를 치유할 줄 안다 하였으니 형원은 최대한 그에게서 멀리 몸을 떨어트려야 했다. 제 연인을 이리 만든 내가 어찌 비열하게 제 숨은 붙들려 한단 말인가. 형원이 제 몸을 뒤로 물리며 품에 기현을 안고서 백의의 사내를 응시한다. 그 사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형원과 기현을 번갈아본다.
"혹여, 내가 그 사내를 해코지라도 할까 싶어 그러는 것이냐?"
"나으리가 누구신지, 내 잘 알고 있어 그런 것입니다."
"그럼 내가 왜 직접 찾아왔는지 또한 알고 있겠구나."
"제 명을 이으실 생각이시거든 접어 두십시오."
"네게 남은 명이 한참이거늘, 어찌 그러는가?"
"그따위 것 필요없습니다."
"하늘께서도 네 처지를 딱하게 여겨 나를 보낸 것인데."
"하늘이 그리 자비로우셨다면, 이 미천한 것을 생에 나게 하지 마셨어야지요."
형원은 초점을 잃어 가는 동공으로 하늘을 쏘아봤다가, 다시 제 앞에 눈높이를 맞추고 있는 산신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그는 눈썹을 들어올리며 형원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그 말엔 나 또한 동의하는 바이기도 하지. 아, 그대가 미천하다는 것이 아니라, 저 하늘이라는 존재가 그리 자애롭지는 못하시는 말이네."
나만 하여도 그렇지. 산신은 씁쓸한 얼굴을 해 보이며 잠시 바닥을 응시했다가, 이내 무상함을 담은 얼굴로 형원을 바라본다. 형원은 몸에 힘이 없는 제 연인을 더 제 쪽으로 끌어 안으며, 자신의 어깨에 힘 없이 툭 얹어지는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그리고 이내, 형원은 결심한 듯이 목소리에 힘을 준다. 알고 있는 대로라면, 저 사내는 인간의 숨을 거두어 갈 수도 있다 하였으니.
"청이 있습니다."
"살려 준다는 것도 마다한 이에게 무슨 청이 있느냐?"
"… 제 숨을 거두어 가 주십시오."
"허, 차라리 죽겠다?"
"어차피 살아도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삶이었습니다."
백의의 사내는 피를 흘리며 저를 바라보는 이가 자신과 퍽 닮아 있다 생각한다. 우습구나. 그토록 죽음을 바라는 나에게 죽음을 달라 애원하는 이라니. 사내는 뒷짐을 지고서 형원의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는 기현을 바라본다.
"허나, 이 사내를 만나 삶다운 삶을 살아 본 것일 테지."
"그러니, 이 자가 없는 제 삶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늘께서 네 처지가 갸륵하다 여기시어 다음 생을 약속해 주셨건만, 저 인간은 어찌 될지."
반쯤 내린 눈꺼풀 안으로 형원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형원은 여전히 기현을 안은 채로, 반대 팔을 힘겹게 들어올려 사내의 백의 옷자락을 절박하게 쥐어 본다. 사내는 제 의복을 붉게 물들이는 손을 쳐내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기현을 응시할 뿐이었다.
"용설란, 부디,"
"…."
"부디, 기현에게, 내세를 주십시오."
"그것은 내 소관이 아니네."
"그렇다면 하늘에 청해 주십시오."
"그 또한 하늘의 뜻인 것을."
"이 생을 고통 속에서 산 사내입니다. 부디, 부디 이 자에게도 삶다운 삶을 주시옵소서."
"…."
"이 세상을 보게 해 주시고, 더는, 고통 없이 살아낼 수 있도록…."
용설란은 기현에게서 향해 있던 시선을 형원에게로 돌린다. 먹먹한 목소리에 가득 들어찬 것은 필시 저 자의 눈에서 툭 떨궈지는 눈물일 테지. 메여 오는 목으로 숨이 잘 들지 않는 것인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형원이 힘겹게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들고 백의의 사내와 눈이 마주친다.
"내 그대에게 다시 묻겠다."
"…."
"생을 더 이어 가겠는가?"
"…죽음을 주십시오."
백의의 사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차분한 제 눈동자를 드러내고, 형원의 정수리에 제 손을 얹는다. 가엾고도 딱하구나. 제 생을 버린다 하여 이 자와 함께 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것을. 이내, 형원의 입에서 단발마의 고통에 찬 신음이 터지고 사내는 무심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본다. 제 손 위로 하얗고 짙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제 손을 타고 흘러 오던 형원의 생이 이내 허공에 흩어진다. 형원은 제 단전 깊은 곳에서 텅 비는 듯한 고통에 사내의 옷깃을 더 세게 움켜쥔다. 한참 동안 형원의 머리 위로 일렁이던 백색의 연기가 사그라들고 나서야, 그는 편안하게 눈을 감은 채로 기현의 머리 위로 제 머리를 포갠다. 제 옷깃을 쥐고 있던 손 또한 스르르 떨어짐에, 백의의 사내는 그들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끝이 붉게 물든 제 의복을 내려다본다.
하늘이시여. 이 자를 정녕 딱하게 여기시거든, 이 자의 기억을 거두시 마시고, 내세에 때가 된다면 꺼내 볼 수 있도록 마음 깊은 곳에 묻어 주십시오. 연을 다하지 못한 이가 그 삶마저 다하지 못했으니, 후에 남은 연이라도 이을 수 있도록 허해 주소서.
용설란은 뒤돌아 걸음을 나서려다, 목덜미에 두 개의 상흔을 달고 있는 여윈 사내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그의 앞에 다가가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서 기현을 빤히 바라본다.
참으로, 많이도 닮아 있구나. 나 또한 연을 다하지 못했는데, 이리 부질없이 숨만 이어가고 있으니. 차라리 그대들이 나보다 나을 성싶다.
용설란은 기현의 목덜미에 난 상처를 손으로 잠시 덮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손을 떼어 낸다. 이 몸이 과연 영험하다고는 하나 죽은 이를 살릴 수는 없기에 이렇게라도 하는 게 낫겠지. 그대 또한 이 자를 쉽게 찾아 내려거든, 그 표식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시끄러운 번화가의 거리. 사방으로 갈라진 거리 중 몇 개는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어, 그 작은 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두 개의 길이 합쳐진 큰 거리가 나온다. 형원은 지친 몸을 이끌고 간판의 네온사인을 조명 삼아 무거운 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오늘 유달리 몸이 가뿐한 이유는, 매주 같은 요일이면 그 큰 거리를 조금이나마 채우는 한 남자의 노랫소리 때문일 것이다. 안 그래도 북적이는 걸 싫어하는 탓에 사람이 많이 몰리는 거리로는 다니지 않았으나, 오늘 만큼은 꼭 그 길을 통해서 지하철역으로 향해야만 했다. 제 정신을 사납게 만드는 두 덩이의 무리를 지나고 나서야 자신이 원했던 목소리가 희미하게 공명처럼 들린다. 오늘도 앞줄에 서 있기는 글렀다 생각하며 바쁘게 걸음을 옮긴 형원은 평소와 달리 한산한 것에 내심 기쁘면서도 마음 한 켠이 불편한 것이다. 앰프에 연결된 다이나믹 마이크를 들고 노래하는 남자는 그 슬픈 선율에 완전히 동화된 듯이 눈을 감고 애절하게 노랫말을 내뱉는다. 형원은 제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서는, 아직 막차 시간까지 넉넉하게 남았다 생각하며 남자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선다. 이 거리에 버스킹하는 사람들이야 세고 셌지만, 유독 이 남자의 목소리에 끌렸던 이유는 형원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가 밝은 노래를 부를 때조차도 제 가슴을 저리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오늘처럼 구슬픈 노래를 불렀더라면 그 곡에 저도 심취한 것이라 여길 수 있을 테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이해하기 힘든 심리였다. 노래가 클라이막스에 다다르고, 이내 차분히 결말을 맞이할 때까지 넋을 놓고 노래를 듣던 형원은 서서히 들어올려지는 남자의 눈꺼풀 안에 숨어 있던 칠흑 같은 눈동자를 처음으로 올곧게 마주한다. 그 순간 제 숨이 멎는 것처럼 '헙' 하고 숨을 멈춘 형원은 이내 왜인지 모르게 툭 떨궈지는 제 눈물에 잠시 그 이유를 생각하다가, 남자가 희미하게 웃어 보이자 꼭 제 가슴에 박힌 커다란 쐐기가 쑥 빠진 듯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넘쳐 흘러 목을 타고 올라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날은 남자의 노래를 오래 듣지 못했다. 아니,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그의 미소를 본 순간 더는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어서 바로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 그 짧은 사이에 시작된 두통은 형원의 온몸을 울렸고, 결국 역의 입구까지 몇 걸음 채 남겨 두지 않고 그는 인적 드문 골목으로 들어가자마자 주저 앉아서 제 왼쪽 가슴팍을 퍽퍽 두드린다. 분명 지금 제 몸에 이는 통증은 체기와는 다른 것이었으나, 형원은 원인 모를 두통과 답답함에 '먹은 것도 없는데 왜 이러나' 생각하며 한참 동안 골목 구석에 쪼그려 앉아서 소리 없이 눈물만 툭툭 떨굴 뿐이었다. 여전히 제 귓가로 남자의 노랫 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지고, 그 소리를 진정제 삼아 두통을 가라앉히려 눈을 감고 고개를 푹 숙이자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머릿속에 토끼풀로 만든 꽃반지가 떠오른다. 다시 가슴께가 꽉 막히는 기분에 가쁜 숨을 몰아쉬고서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들면, 골목가 아스팔트를 비집고 자라난 토끼풀 두 송이가 제 눈앞에서 사부작거리며 흔들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뜨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기가 많이 허해진 건가. 요즘 논문 준비에 아르바이트까지 하느라 잠을 잘 못 자긴 했지. 형원은 그저 그렇게 생각하면서, 어서 집에 가서 푹 쉬어야겠다며 힘겹게 몸을 일으켜 골목을 나선다.
며칠을 열병처럼 앓았을까. 이어지는 어지러움과 답답한 가슴이 해소되지 않아 결국 참지 못하고 병원에 가 봤으나, 의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스트레스에 피로가 많이 누적된 것 같으니 수액이라도 맞고 가라 답하는 게 다였다. 교수에게 제출할 진단서를 주머니에 잘 접어 넣어 두고, 결국 그날 팔에 주삿바늘을 꽂고서 3 시간 정도 깊은 낮잠에 들었다. 꿈을 꾼 것 같기는 한데 개꿈이었던 건지 명확한 이미지는 떠오르지 않고, 겨우 기억을 더듬어서 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면 녹음이 가득한 울창한 산 속에 자신이 서 있고 그 앞에는 어떤 사람이 엎드려 있는 것 정도였다. 께름칙한 기분을 해소하지 못한 채 학교로 향한 형원은 담당 교수의 연구실 문을 두 번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서서 진단서를 제출한다. 교수가 저에게 따뜻한 걱정이나 위로 따위를 해 줄 것이라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제 예상과 한치도 어긋나지 않고 '중요한 논문이니까 지장 가지 않게 몸 챙겨라'라고 말하는 노년의 남성을 보며 속으로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해댄 형원이다. 명망 높은 교수라 아직 학교에 붙어 있는 거지, 아니었으면 가차없이 때려 치웠을 논문은 자그마치 형원의 박사 학위 논문이었다.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한 건 자의가 아니었으나, 꼭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어렸을 때는 죽어도 싫던 고전 문학을 제대하고 나서부터 파헤치기 시작했던 형원이다. 교수 연구실을 나서서 목을 한번 빙 돌린 형원은 잠깐 숨 좀 돌릴 겸 커피 좀 얻어 마시자 싶어 학과 사무실로 향한다. 노트북과 두꺼운 공책 몇 권이 든 가방을 어깨에 짊어지고서 학과 사무실 문을 열어 젖혔을 때, 형원은 겨우 잠잠해졌던 통증들이 다시 이는 기분이 드는 것과 동시에 제 눈 앞에서 저를 돌아보는 얼굴에 손잡이를 쥔 채로 굳어 버린다.
"야, 왜 안 들어와?"
"아… 안녕하세요."
형원은 저에게 인사하는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어쩌면 얼굴보다 그 목소리가 제게는 더 익숙할 것이라 생각한다.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던 자신이 좋아하는 목소리를 가진 남자가 우리 과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잠시, 형원은 순간 갑갑하게 막혀오는 숨에 일부러 숨을 몰아서 쉬기 시작하고, 제 앞에 있던 남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살피며 학과 조교에게서 종이 한 장을 받아 가방을 챙긴다.
"기현아, 그거 챙겨서 본관 3층에 제출하면 돼. 쟤는 왜 아직도 저러고 있어?"
"예, 알겠어요. 그런데 누구세요, 저 분은…?"
"아, 우리 과 대학원생. 지금 박사 준비 중이거든. 기현아, 너는 함부로 대학원 가지 마라. 쟤가 지금 사람 꼴이 아니다."
아, 차라리 이상하다 싶을 때 바로 문 닫고 모른 척 지나갈걸. 형원은 기현이라는 남자와 시선이 얽히자마자 급하게 학과 사무실 문을 닫아 버리고, 또 영문도 모른 채 떨어지는 눈물을 손으로 슥 훑어 내며 작게 욕을 내뱉는다. 기현이라는 녀석이 학과 조교의 농담에 웃으며 저를 쳐다보는 걸 보지 말았어야 했다. 그 남자의 웃는 얼굴을 다시 보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이유도 모른 채로 청승맞게 질질 짜는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형원은 일부러 눈에 뭐가 들어간 척, 한 손으로 오른쪽 눈을 비비면서 곧장 흡연 구역으로 내려가 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학부생들의 수업 시간이라 이 시간에 아무도 없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분명 담배와 함께 들어 있었을 라이터인데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아 한참 동안 제 바지 주머니를 뒤진다. 얄팍한 500 원짜리 싸구려 라이터를 겨우 손에 쥔 형원은 선선한 바람이 옅은 불씨를 꺼트리지 않게 한손으로 바람을 막으며 부싯돌을 돌린다. 싼값에 산 것이라 그런지, 아니면 뽑기 운이 좋지 않았던 건지, 한참을 헛도는 부싯돌에 형원은 작게 '씨발' 하며 라이터를 두어 번 흔들어 본다.
다시 라이터를 자신이 문 담배 앞에 가져가기까지 그 짧은 순간 형원의 머릿속에 가득 들어 찬 생각은, 도대체 저 사람이 뭔데 며칠 전부터 이 지랄인 건가 하는 것이었다. 그 남자와 제대로 눈을 맞추고 난 뒤로 이러잖아. 그 녀석이랑 눈만 마주쳤다 하면 숨이 막혀 오잖아. 걔가 웃는 것만 보면 어이없게 눈물이 나잖아.
네가 뭔데. 네가 도대체 누군데.
그렇게 형원이 겨우 라이터에 불을 붙였을 때였다. 싸구려 라이터는 그 화력을 조절하는 레버가 제 마음대로 돌아가 있기도 해서인지, 그 화력을 최대로 돌려 놓은 적도 없는데 순간 제 입가에서 눈앞까지 치솟는 라이터 불씨에 순간 형원의 눈앞이 캄캄해진다. 그 찰나의 열기와 눈부심에 눈을 질끈 감았을 때, 불현듯 감긴 시야로 보이는 광경에 형원은 어지러움을 느끼고 비틀거리다 뒤에 있던 벤치에 주저앉는다. 자신을 가득 둘러싼 횃불, 저를 겨누고 있는 수십 개의 화살, 그리고 자신의 앞에 있는 한 사람. 며칠 전부터 저를 괴롭혀 오던, 그 언젠가 항상 웃게만 해 주고 싶었던 얼굴이었다. 그 야윈 얼굴을 쓰다듬자, 그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고 다소 절박한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같이 가….'
'나 혼자 두지 마.'
두 마디의 말이 제 기억을 훑고 지나가면서,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모를 기억들이 터져 나오며 형원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연분홍색에 흰 실로 자수가 놓인 댕기와, 서로의 손에 나눠 낀 토끼풀을 엮은 꽃가락지, 제 팔에 났던 흉터, 그리고 그것과 비슷한 형태의 자신이 새긴 당신의 목덜미의 상흔.
'입 안이 저릴 정도로 달아. 그 만큼 고와.'
'그저 네가 나의 온몸을 기억할 수 있도록, 그리 하면 돼. '
자신의 목소리. 그리고 그 모든 기억들을 비추는 붉은 손톱달.
형원은 감았던 눈을 번쩍 뜨자마자, 제 입에 물려 있던 불도 지피지 않은 장대를 바닥에 던져 버리고 화단에 핀 토끼풀 하나를 꺾어서 주머니에 챙긴 뒤 가방을 들고 내달리기 시작한다. 네게 내세를 달라 그리도 애원했건만, 어떻게 나는 눈 앞에 너를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을까. 한참을 내달려 자신이 채 들어가지도 못했던 학과 사무실의 문을 벌컥 잡아 열고서 다급하게 발을 들인다.
"아, 깜짝아!"
"기현이는요?"
"뭐?"
"기현이, 유기현 어디 갔어요?"
"기현이? 걔,"
"빨리요."
"걔 뭐 발표 준비한다고 도서관 간다고 했어. 그런데 너 요새 왜,"
"고마워요."
조교 누나의 뒷말은 형원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우연이 잦았다고는 하지만, 언제 다시 너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행여나 이 기억이 제게서 날아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피어오르는 듯했다. 형원은 도서관으로 뛰어 가는 내내 머릿속에 '유기현'이라는 세 글자만 담은 채로 되뇌이고, 또 되뇌었다. 도서관 앞에 다다라서 무릎을 짚고 차오르는 숨을 가다듬은 뒤, 건물 안으로 들어서서 층별 안내도 앞에 우두커니 멈춰 선다. 어디에 있을까. 네가 있을 곳을 내가 바로 알아낼 수 있을까. 꼭 그 옛날에, 내가 그 산속에서 너를 찾아냈던 것처럼. 한참 작은 문자들이 늘어져 있는 화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형원은 제 직감을 믿기로 하고서 곧장 3층으로 향한다. 계단을 두세 칸씩 건너 뛰며 올라가 책 넘기는 소리와 작은 숨소리만이 가득한 공간에 다다라 제 발걸음 소리를 낮춘다. 마른 침을 삼키고서 조심히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제 머릿속에 그간 묻혀 있던 기억들이 하나둘 피어오른다. 떨리는 눈동자로 커다란 책장 사이를 살피며 느리게 걷던 형원은, 네 번째 책장과 다섯 번째 책장 사이에서 제 키보다 높은 곳에 책을 꽂아 넣는 기현을 발견하고서 보폭을 넓혀 그에게 다가간다. 막 책을 놓는 그 손의 주인이 떠나기 전에, 형원이 다급하게 책을 집자 제 앞에 있던 남자가 놀라 고개를 돌려 저를 응시한다.
아, 회백색이 아니라 다행이다. 너의 검은 눈동자가 빛을 내고 있어서 다행이다. 너의 눈동자에 내가 가득 담겨서 다행이다.
기현이 당황한 얼굴로 몸을 뒤로 빼자 형원이 그와의 거리를 더욱 좁힌다. 두 사람의 거리가 한 뼘도 채 되지 않을 거리에서, 형원이 꼭 그를 품에 안듯이 몸을 숙여 기현의 귓가에 속삭인다.
"한참 찾았어."
"네?"
"많이 아팠겠다."
내가 너의 숨을 끊는 동안에 얼마나 아팠을까. 너는 내 품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형원은 무례함을 무릅쓰고 잘게 떨리는 엄지 손가락을 들어 기현의 목에 나란히 자리한 두 개의 점을 살살 어루만진다. 얼마나 깊었으면 그 상흔이 흉터가 되어 내세에 이리 흔적으로 남았을까. 형원은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그에게서 제 손을 천천히 떼어 내고서 애써 입꼬리를 올려 빙긋이 웃어 보인다. 그래도 내가 너를 기억해 내서 다행이다. 네가 다시 삶다운 삶을 살아낼 수 있어서, 여즉 그 고운 목소리를 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늦어서 미안해, 기현아. 그래도 나 자신에게, 너에게 약조한 것이 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게.
아직 기현에게 차마 토로하지 못할 고백을 속으로 삭히면서 형원은 책장을 빠져나간다. 그리고 그가 저를 기억해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기현의 이름이 적힌 물건이 있는 자리로 가서는 주머니에 있던 토끼풀을 꺼내 그의 공책 위에 올려 두고 자리를 벗어난다. 그 짧은 찰나의 재회가 아쉬웠기 때문일까. 쉬이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두 발을 애써 옮겨 두 걸음 정도 떼어 냈을 때였다.
"저기요."
저를 불러세우는 목소리에 대답도 하지 못했다. 버석하게 마른 목구멍이 메어 와서 마른침으로 축여 보려 했으나, 뜨겁게 열이 오른 속이 그 마저도 집어 삼키는 듯하다. 형원이 힘겨운 걸음을 멈추자, 기현은 형원의 앞으로 와서 서서 토끼풀을 내밀며 그와 눈을 맞춘다.
"이거, 선배가 두고 간 거예요?"
"…."
"선배, 저 본 적 있죠? 저는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
"또 어디 가게요. 저 안 그래도 선배 보면 하고 싶은 말 많았는데."
"…."
"기분도 이상하고요. 그때 처음 봤는데도 전에 본 적 있는 것 같고 그랬다고요. 우리, 혹시 전에 본 적 있어요?"
형원은 꼭 옛날의 자신이 짐승이었을 적처럼 그 어떠한 단어도 꺼낼 수 없었다. 그저 기현을 향해 빙긋 웃어 주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할까. 그 옛날 신선과 주고 받았던 대화도 어렴풋이 떠오르는 듯하다. 하늘은 그리 자애롭지 못하다더니, 너에게는 전생의 기억을 남기지 않으셨구나. 아, 어쩌면 남기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내가 네게로 향하는 걸음이 그리도 늦어 버렸으니, 너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지. 형원은 제 앞에 내밀어진 토끼풀을 가만히 내려다 보다가 기현의 얼굴로 시선을 옮긴다. 여전히 당혹감이 가득 들어찬 그 얼굴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오로지 이것뿐인 것을. 헌데, 곧장 네게 내뱉는다면 너는 되려 나를 밀어내지 않을까. 형원은 심호흡하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고서는 입을 연다.
"늑대인간 발표 준비하나 본데, 거기 토끼풀 나오잖아."
"네?"
"꽃말 꼭 찾아 봐.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은 다음에 같이 밥 먹으면서 해."
기현은 알 수 없는 말만 내뱉고 사라진 남자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다가, 제 손에 쥔 토끼풀을 잠시 내려다 보고서는 곧장 제 자리로 가서 휴대폰으로 검색 포털을 연다. 그래, 도움된다잖아. 무려 박사 학위 준비하는 사람이. 초록색 검색창에 '토끼풀 꽃말'을 입력하고서 검색 버튼을 누른 기현은 이내 떠오르는 창을 복잡한 얼굴로 내려보다가,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은 제 짐을 서둘러 챙기고서는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급하게 걸음을 옮긴다. 대뜸 나타나서는 제 목을 쓰다듬질 않나, 공책 위에 풀떼기를 두고 가질 않나. 그것도 그냥 풀떼기도 아니고. 기현은 단숨에 도서관 건물을 벗어나 주변을 둘러보지만, 그새 어디로 간 건지 형원의 자취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 지금 고백 받은 거야? 이렇게 갑자기? 내 버스킹 관객 중에 한 명이었던, 날 보면 우는, 통성명도 안 한 남자 선배한테?
기현은 앞머리를 쓸어올리면서 방금 전 제 휴대폰 화면 가운데에 떠 있던 짧은 문구를 되뇌어 본다.
토끼풀의 꽃말, 내 사랑이 되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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