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채햄] 3일간의 기록

3일간의 기록

w. 주인장

'팟' 하는 부싯돌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울리고 이내 손톱 만한 불꽃이 인다. 기현은 입에 문 기다란 하얀색 담배 끝에 불을 가져다 대고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인다. 입 안으로 스멀스멀 퍼지는 매캐한 연기를 속 안으로 삼키고서 남은 희뿌연 연기를 대기 중으로 길게 내뱉는다. 한여름 쏟아지는 뜨거운 햇볕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자신이 서 있는 저택을 바라본다. 도심에 이 정도로 웅장한 건축물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위엄을 뽐내는 대저택은 언제 세워졌는지 모를 정도로 군데군데 물때도 끼어 있었고 먼지도 내려앉아 있었으나, 그 모든 것들이 오랜 세월의 훈장임을 자랑하는 듯하다. 기현은 경찰 측에서 이 저택에 대해 기록해 둔 메모를 한 장씩 넘겨 본다.

- 집에 거주하는 자 없음

- 용의자 지문 발견 안 됨

- 의문의 발소리가 계속해서 들리나 침입의 흔적은 없음

그리고 끄트머리에 '존나 커서 둘러보기 드럽게 힘듦'이라고 적힌 낙서를 보고서는 피식 웃는다. 등줄기에 땀이 맺히는 것이 느껴질 즈음에 기현은 거의 다 타 들어 간 담배를 바닥에 던져 발로 비벼 끄고서는 대저택의 입구 문을 밀어 연다. '끼익' 소리를 내며 무겁게 열리는 문은 태양열을 얼마나 받은 것인지 잠깐 손대는 것만으로도 제 손을 얼얼하게 만든다.

입구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양옆으로 너저분하게 방치된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일자로 가지런히 늘어진 통로를 걷는 와중에도 주변을 살피는 것을 빼먹지 않는다. 침입의 흔적이 없다고는 했으나, 놈이 주도면밀한 놈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주머니에 자신의 리볼버가 잘 들어 있는지도 확인하고서 저택의 현관 앞에 서서 작게 심호흡한다. '후-' 하고 내뱉는 소리가 공기 중에 섞여 들어갈 법한데도, 기어코 제 귀를 통해 다시 들어오면서 자신이 현재 상당히 긴장한 상태라는 것을 또 한번 각인 시킨다.

이 집에 방문한 지 벌써 세 번째. 이번에도 허탕이라면, 밤중에라도 당장 서로 찾아가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인 줄 아냐'며 이 사건의 수사팀장의 멱살이라도 잡겠다 다짐한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오크(Oak)로 만들어진 듯한 나무 문은 이 집에 아무나 들일 수 없다며 으름장을 놓는 듯, 대저택의 입구에 놓인 철문보다도 열기 무거운 것이었다. 단전에 힘을 주고 문을 힘껏 당겨 열면 그제서야 또 '끼익'하며 낡은 경첩 소리가 나고 겨우 제 몸 하나 밀어 넣을 만한 공간이 생긴다. 그 틈으로 서둘러 몸을 집어 넣고 나면 현관문은 '쾅' 소리를 내며 무섭게 저를 이 집 안에 가둔다. 기현은 제 여름용 코트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면서 주위를 경계한다. 지난 두 번과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청소된 내부는 이 건물의 외관과는 상당한 괴리감이 있는 터라 꼭 다른 차원에 온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기현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자신의 발소리가 3층 짜리 대저택에 웅웅거리며 울린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기현이 무슨 일로 이 낡은 대저택에 온 것인가 궁금해할 것이다.

일가족 실종 사건. 그가 경찰에게 의뢰 받은 사건이었다. 이 동네에서 오랜 세월 동안 이 가문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어마어마한 부를 자랑하는 집안이라고 했다. 선조가 아주 훌륭한 장사치였던 건지, 아니면 운이 좋아 금싸라기 땅을 미리 사 둔 덕분이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 저택의 크기를 보면 그들의 부를 가늠할 수 있다. 실종된 인물은 이 집의 가장과 그의 부인, 그리고 그들의 자녀 둘이라고 했다. 실종 사건이 들어온 것은 그들을 보좌하던 기사의 신고였다.

'저는 사장님 출퇴근길을 맡는 기사입니다. 매일 아침 8시에 집 앞에서 사장님 차를 몰고 대기하고 있죠. 사장님께서는 늘 8시 10분쯤에 집에서 나오시는데, 그날은 9시가 다 되어 가도록 나오지 않으셨어요. 전화를 해도 받질 않으시고. 그래서 무례를 무릅쓰고 집 안으로 조심히 들어가 봤더니, 사모님도 계시지 않았다는 겁니다. 어쩌면 사장님께서 저를 해고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면서도 집안을 다 돌아다녔어요. 그래도 그분들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죠. 화장실도 언제 쓴 건지 모를 정도로 버석하게 말라 있었고요. 그날 이후로 집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저택 앞에서 3일을 더 기다렸어요. 혹시 모르니까요. 그런데도 오는 사람도 없고 가는 사람도 없어서, 심각하다 싶어 신고했습니다.'

용의자 후보 선상 그 첫 번째에 놓인 기사의 말이 녹음된 휴대용 카세트테이프가 멈추고, 남자의 마지막 말이 집 안에 메아리 치며 울린다. 이 집안 식구들이 실종된 건 운전기사가 이 집에 오기 하루 전으로 예상되며, 이로써 실종된 지 약 일주일째. 기현은 자신이 메모해 둔 것들을 머릿속으로 상기시키고 양손에 흰색 면장갑을 끼면서 3층부터 차례로 집안 곳곳을 살펴본다.

아들과 딸이 쓰던 방 안에 놓인 커다란 침대 위의 이불은 방금 막 자리에서 일어난 듯 너저분하게 한 쪽으로 걷어져 있을 뿐, 사람의 온기는 식은 지 오래된 듯하다. 방문을 닫고 다른 게스트룸도 샅샅이 뒤져 보았으나, 이곳에는 애초에 사람이 많이 드나들지 않았던 건지 램프 위에는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고 이불은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다. 혹시 몰라 바닥에 발자국이라도 찍히진 않았을지 살펴보려 몸을 숙이면 반질반질한 대리석의 무늬만 눈에 들어올 뿐이다. 몸을 일으켜 3층에서 2층으로 향한다. 계단 위로 내려앉는 기현의 발걸음 소리가 조용히 집 안에 울린다. 2층에는 커다란 부부의 침실이 있고, 그 옆으로는 집 안 식솔이 사용하는 듯한 작은 방 몇 개가 줄지어 있다. 부부의 침실문의 양쪽 손잡이를 잡고 조심히 당겨 열면 그 옛날 귀족들이나 사용했을 법한 인테리어의 호화로운 방이 시야에 들어온다. 잘 다듬어진 백색 석재와 금박 장식이 어우러진 방의 한쪽 면에는 열어서는 안 될 상자를 열어 본 판도라 그림이 걸려 있다. 부부의 침실에도 가구나 장식품이 바닥 위로 엎어져 있다거나, 혈흔이 튀어 있다거나 한 흔적은 조금도 없었다. 그저 그들의 자녀의 방과 같이 양쪽 이불이 가운데로 젖혀져 있는 게 다일 뿐. 방 안에서 발견된 머리카락 몇 개를 미리 챙겨 온 주머니에 담아 봉인해 둔다. 금색의 기다란 머리카락이니 이 집 부인의 것일 확률이 높겠지만, 혹시나 모르니까.

기현은 콧잔등에서 내려앉아 다소 불편한 안경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리며 안경을 고쳐 쓴다. 어쩌면 이 집에서 일하는 성실한 가정부가 자신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기 위해 이 집 안 청소를 말끔히 해 놓은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끔한 실내에 기현은 작게 인상 쓴다. 이래서 무슨 수사를 하겠다는 건지. 기현은 아랫입술 위에 검지를 올려다 대고 손톱을 세워 입술을 꾹 누른다. 자신의 오랜 버릇이었다. 아까와 달리 신경질적으로 계단을 밟아 내려오는 소리가 집안에 크게 울린다. 1층에는 주방과 이 집 주인의 서재가 있다고 했다. 우선 서재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 막 서재의 손잡이를 당겨 열려는 찰나였다.

"서재로는 주인분의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이 집에 세 번째 걸음을 한 것이었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처음이었기에 기현은 서둘러 품에 넣어 두었던 리볼버를 꺼내 목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겨누며 몸을 돌린다. 목소리가 들린 쪽은 방금 자신이 걸어 내려왔던 1층 계단의 중간 쯤이었다. 그곳에는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검은 머리에 수트를 단정히 차려입은 젊은 남자가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서 서 있다. 짙은 검은 눈썹 아래에 놓은 같은 색의 커다란 눈동자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기현을 응시하고 있었고, 그의 양손은 뒷짐을 진 채였다.

"누구십니까?"

"이 저택의 집사입니다. 그러는 그쪽은 누구십니까?"

집사. 기현은 처음 듣는 존재였다. 경찰의 수사 보고서에서도 보지 못했던 이의 등장은 기현의 머리 끝까지 소름 돋게 만들기 충분했다. 기현은 여전히 그에게 총을 겨눈 채로, 손바닥에 땀이 나 쇳덩어리에 끈적하게 붙는 것을 고쳐 쥐며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탐정입니다. 수사 의뢰를 받고 찾아왔습니다."

"수사요?"

"모르셨습니까?"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쪽이 모시는 주인댁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졌습니다."

"아, 어쩐지. 며칠 새 안 보이시길래 여행이라도 가신 줄 알았는데."

남자는 뻔뻔하게도 난처한 얼굴을 하며 입을 더욱 굳게 다문다. 볼이 살짝 패이는 것으로 보아서는 입안 연한 살을 씹는 듯했다. 기현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남자에게 겨눈 총을 치우지 않자, 남자는 계단에서 천천히 한 걸음씩 내려오며 기현 쪽으로 다가선다. 기현은 그 당당한 발걸음에 하마터면 방아쇠를 당길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 낸다. 뒷짐을 지고 내려온 남자는 멀리서 볼 때마다 훨씬 젊고 수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남자와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기현은 다시 주위를 살피며 저택의 현관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내가 이 집을 비운 사이 이놈이 도망이라도 친다면? 용의선상에 놓일 두 번째 인물을 이렇게 놓칠 수는 없는 것이었기에 기현의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우선 이 자가 진짜 이 집의 집사가 맞는지부터 시작한 의문은 끝도 없이 기현의 머릿속에서 이어진다. 그렇게 기현의 떨리는 동공을 눈치챈 듯이, 남자는 기현의 총구를 쥐고 천천히 아래로 내리면서 기현과 눈을 맞춘다. 기현은 꼭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그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이내 자신이 졌다는 듯이, 총을 다시 품에 넣은 기현은 어깨를 펴고 꼿꼿이 허리를 세우면서 남자의 시선을 맞받아친다.

"어디 계시다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저와 얘기 좀 하셔야겠습니다."

"물론이죠.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차는 무엇으로 준비해 드릴까요?"

"차는 됐습니다. 아주 잠깐이면 되니까요."

남자는 뒷짐을 풀고서 앞장 서며 서재 옆에 있는 접견실로 향한다. 접견실 문을 당겨 연 남자는 몸을 옆으로 틀고서 팔을 뻗으며 기현을 안내한다. 기현은 미심쩍은 눈으로 남자를 흘긋 보고서는 접견실 안에 놓인 깔끔한 상아색의 소파에 조심히 앉고서 녹음기를 켠다. 곧이어 남자가 맞은 편 같은 색의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서는 솟아오른 무릎 위로 두 손을 포개어 놓는다.

"이 집의 집사라고 하셨죠?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채형원입니다."

"채형원 씨. 이 집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글쎄요. 어릴 적부터 일손을 도와 왔으니까 13 년 정도 된 것 같네요."

"어우, 오래 일하셨네요. 그럼 이 집 식구분들과도 유대감이 상당히 깊으시겠네요?"

"뭐… 유대감이 깊다고 보기엔 어렵습니다. 그렇게 오래 이 집에서 지냈는데도, 그분들은 제게 정을 주지 않으셨으니까요."

"무슨 의미죠?"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그저 그분들의 뒷일을 도맡아 하는 존재였습니다."

"아, 그런데 이 댁 주인분들에 대한 동네 주민들의 평판이 좋던데요. 사장님과 사모님, 두 분 모두 인자하고 자상하시다고 들었습니다."

기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형원은 고개를 숙이고 입꼬리만 올려 피식 웃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꼬리를 가라앉히고는 텅 빈 듯한 짙은 검은 눈동자를 들어 기현을 바라본다. 그 눈동자를 마주한 기현은 왠지 모르게 자신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사람들은 그래요."

"…."

"자기네들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죠."

"…."

"자신이 보고 있는 게 진짜일까 하는 의문도 없이."

기현이 작게 미간을 찌푸리자, 형원은 꼬았던 다리를 풀고 머쓱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기현의 눈앞에 형원의 허벅지가 놓여 있음에도, 기현은 꼭 그 뒤에 더 멀리 놓인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형원의 말소리가 제 귀에 다시금 꽂히고서야 그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벌써 해가 지고 있네요. 탐정 분께서는 오늘 곧장 떠나십니까?"

"아, 아뇨. 이곳에서 며칠간 숙직하기로 계약한 터라."

"그럼 저녁 식사 준비를 해야겠네요. 우선 저를 따라오세요. 객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객실은 됐습니다. 거실 소파에서 자도 됩니다."

"불편하실 텐데요."

"괜찮습니다."

"혹시, 저 때문인가요?"

기현이 느릿하게 천천히 일어나며 바라본 형원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서운함 같은 게 묻어 있었다. 꼭 어린 아이의 그것과도 닮은 얼굴에 되려 기현은 당황스러워진다. 성숙한 어른의 모습과 이질감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현은 등 뒤로 녹음기를 숨겨 정지 버튼을 누르고서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문 앞에 서서 꼭 제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형원에 기현은 작게 한숨 쉬고는 입을 연다.

"네. 그쪽 때문이에요."

"왜죠?"

"내가 한눈판 사이에 그쪽이 도망갈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런 의심은 드네요."

기현의 단호한 대답에 형원의 얼굴에 서린 서운함이 짙어진다. 기현의 말을 끝으로 무거운 정적이 쏟아지는 방 안에서 기현은 형원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형원은 잠시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다시 기현에게로 고개를 돌리고서는 처음 봤던 그 여유로운 얼굴을 해 보인다.

"그래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죠. 이 집 사람들 모두가 없어졌는데 저만 덩그러니 남았으니."

"잘 아시네요."

"그래도 손님을 아무 데서나 재울 수 없는 게 제 일이니까, 정 그러시면 저랑 같은 방에서 주무시죠."

"네?"

"차라리 그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탐정님이 주무신 사이에 제가 몰래 창문 너머로 도망이라도 치면 안 되잖아요."

제법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일리 있는 말이라고 기현은 생각한다. 자신은 잠귀가 밝은 편이었으나, 1층에서 잠들었다가 저 자가 겁도 없이 2층이나 3층에서 도망쳐 버리면 손 쓸 수 없지 않은가. 기현은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러겠노라 답한다. 형원의 뒤를 따라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으면서 정적을 깨며 말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오직 형원 뿐이었다. 기현은 그의 말에 단서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뒷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녹음기를 다시 작동시킨다. 그는 이 저택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꽤 즐겁게 떠든다. 첫째 아들과 함께 앞마당에서 공놀이를 했던 것, 둘째 딸이 태어났을 때에는 주인댁 몰래 아기의 고사리손에 손가락을 쥐여 줬던 것과 같은 사건과는 무관한 내용들이었다. 기현은 형원이 사용하는 방 앞에 다다라서 녹음기를 끄고, 그가 방문을 열어 주는 것에 맞춰 안으로 걸음 한다. 그가 늘 사용하는 방이라고 하기에는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는 것에 기현이 작게 기침하자 형원이 머쓱하게 웃어 보인다.

"청소를 맡으신 아주머니께서 제 방은 따로 드나들지 않으십니다. 많이 지저분하죠?"

"아, 뭐, 괜찮아요. 바쁘면 그럴 수 있죠."

"그래도 침대는 깨끗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기현이 미심쩍게 침대 위를 손으로 툭툭 두들기자 형원은 민망함에 헛기침을 한다. 이불을 한번 칠 때마다 먼지가 조금 피어오르긴 하지만, 이 정도 먼지는 천이라면 다 가지고 있는 정도이니 안심하기로 한다. 기현이 코트 안에 자신의 소지품을 모두 넣어 두고 방문 옆에 놓인 스탠드 옷걸이에 자신의 코트를 걸어 둘 동안, 형원은 방 안에 커튼을 친다. 그 소리에 기현이 뒤를 돌아보자, 형원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이 입고 있던 자켓을 벗으며 입을 연다.

"건너편 건물에서 들어오는 빛이 바로 들어와서요. 혹시나 주무시는데 불편하실까 봐."

기현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서둘러 고개를 돌린다. 형원이 옷을 갈아입으려는지 셔츠 단추를 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게 편한 옷은 필요하지 않냐 물어오는 것에 괜찮다 답하고서 괜히 제 시야가 닿는 곳까지 방을 둘러본다.

"방에 거울이 없네요."

"둘 필요를 못 느껴서요. 거울 볼 일이야, 화장실에서 만으로 충분하니까요."

"그러네요. 아, 그리고 내일은 저랑 마저 얘기합시다. 그쪽도 용의선상에 있으니까."

"좋습니다."

기현은 순간 자신이 너무 예민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실마리 하나 발견되지 않은 사건에 유일한 이 집 식구의 주변인이 등장했으니, 그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샘솟을 게 당연하기도 할 것이다. 전기가 나간 집의 방 안에 커튼까지 치고 있으니 칠흑 같은 어둠만이 가득 찬다. 눈을 뜨고 있지만 꼭 눈을 감은 것처럼, 눈앞에 놓인 사물이 잘 보이지 않아 기현은 주변을 더듬거리며 침대 옆 협탁을 찾는다. 협탁이 손에 닿고, 그 위에 안경을 벗어 두고서 총은 여전히 품에 둔 채 침대에 몸을 누인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 남자가 저지해서 들어가지 못한 서재에 먼저 들어가 봐야지 생각한다. 여전히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시야 때문에 기현은 의식적으로 눈을 깜빡이기를 반복한다.


기현은 구름 뒤에 숨은 햇볕을 맞으면서 천천히 정원을 거닌다. 꼭 비가 올 것처럼 먹구름이 드문드문 껴 있는 하늘에, 기현은 제 입에서 뿜어지는 희뿌연 연기를 더한다. 입 안에 남는 매캐하고 텁텁한 느낌에 한 대를 다 태우고 나면 돌아가서 물이라도 한잔 마셔야겠다 생각한다. 정원사가 그만둔 지 오래된 건지, 잘 다듬어졌다가 인간의 손길이 떠나 삐죽삐죽 새 이파리가 돋아난 나무는 흉물스럽기 짝이 없다. 화단으로 보이는 울타리 안에는 언제 꽃이 있었냐는 듯, 버석하게 마른 짙은 베이지색의 흙 위로 개미 서너 마리가 기어 다닌다. 기현은 제 발에 밟히는 들쑥날쑥 자란 잡초가 제 발목을 간질이는 것이 불쾌해서 입에 물고 있던 담뱃불을 튕겨 내어 꺼트리고는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걷는 도중에 기지개를 켜면서 찌뿌둥한 몸을 조금이나마 풀어 낸다. 낯선 잠자리가 불편한 탓도 있었으나, 제 뒤로 언제 몸을 뉘었는지 모를 형원 때문에 잠을 설친 것도 있었다. 직업 때문에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운 건지, 잠을 설치다 몸을 돌렸을 때 등을 보이고 잠에 든 형원을 보고 흠칫 놀랐던 것을 기억해 낸다. 그는 등을 한껏 구부리고 다리를 가슴팍에 바짝 붙인 채로, 공중에서 보면 쪼그려 앉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 큰 몸을 잔뜩 구긴 채 잠에 들어 있었다. 수사에 도움이 된다거나, 그것이 걱정되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곤히 잠에 든 게 신기했을 뿐이다.

무거운 오크로 된 현관문을 열고 겨우 몸을 밀어 넣으니 뒤로 문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꼭 어제와 같은 시간이 반복되는 듯한 기분에 기현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주방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보통 물병은 식탁 위에 있을 텐데, 말끔한 식탁에 짐짓 당황하면서 마실 게 있는지 찬장을 살핀다. 실종된 건 일가족인데, 어쩌면 이 집의 식솔들까지 한날한시에 증발한 건 아닐까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도 해 본다. 주방을 이리저리 살피던 기현이 참다 참다 주방 뒤편으로 난 문을 열려던 찰나였다.

"찾으시는 게 있으십니까?"

기현은 손잡이를 쥐었던 손을 놓으면서 뒤를 돌아본다. 어제와 같은 수트 차림에 머리를 단정히 정돈한 형원이 어제와 같은 여유로운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현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물이나 마시려고' 하면서 얼버무린다. 아무래도, 주인은 없다 한들 남의 집인데 아무렇게나 뒤적거린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아, 예. 죄송합니다,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괜찮습니다, 주인분들이 안 계시니까요."

"실례했습니다."

"간단히 아침 식사라도 준비해 드릴까요? 저한테 묻고 싶은 게 많으실 텐데, 먹어야 힘이 나죠."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형식적인 대화였음에도 기현은 삐걱거리는 자신이 우습기까지 하다. 마실 물을 곧바로 찾았더라면, 한 잔 마시고 곧장 서재로 향했을 텐데. 기현은 괜히 입맛을 다시면서 접견실로 가 어제의 그 상아색 소파에 앉는다. 잠에서 깨자마자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서 챙긴 녹음기가 잘 있는지 바지 주머니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형원이 오기 전까지, 어제 미처 다 둘러보지 못했던 접견실 내부를 눈으로 찬찬히 훑어본다. 주인 부부의 침실과 비슷한 느낌으로 장식된 접견실 안에는 크지 않은 석고상들이 하얀색 서랍장 위에 드문드문 놓여 있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라면, 얇은 천을 뒤집어쓴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여성의 흉상이었다. 여성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리자, 빵 두 조각과 발라 먹을 잼과 커피 한 잔이 놓인 쟁반을 들고 있는 형원이 제 시야로 들어온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쟁반을 기현의 앞에 놓아주고는 어제와 같이 기현의 맞은 편에 앉아 다리를 꼬고 앉는다. 기현은 제 앞에 놓인 음식들 중 커피잔을 들고 씁쓸한 것을 한 모금 입 안에 머금고서 향을 음미한 뒤에 목으로 삼켜 넘긴다. 커피잔을 다시 쟁반 위에 올려 두고서 주머니 안에 넣어 둔 녹음기의 버튼을 누르고서 형원을 바라본다.

"이 집의 식구들이 사라진 날, 어디서 무얼 하셨습니까?"

"뒷산에 가 있었습니다."

"뒷산에는 무슨 일로 가셨죠?"

"주인분께서 토끼를 잡아 오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을 험하게 다루시는 분이셨거든요.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으셨죠. 동물의 경우에는 마음에 들면 박제 시켜 놓기도 하셨고요."

"그래서, 산으로 가서 무얼 하셨죠?"

"녀석을 잡기 위한 미끼와 포획할 연장을 챙겨서 혼자 뒷산으로 갔습니다. 산 중턱에서 하얀 토끼 한 마리를 봤는데 차마 죽이지는 못하겠더군요. 토끼가 도망가지 않게 멀리서 지켜만 보다가, 녀석이 경계를 풀고 다가오길래 챙겨 뒀던 미끼를 먹이 삼아 토끼에게 줬습니다. 그렇게 챙겨 갔던 미끼를 녀석에게 다 먹일 때까지 뒷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 저택으로 돌아오셨습니까?"

"해가 질 때쯤 돼서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게 몇 시였는지 기억나시나요?"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날은 시계를 챙겨 가는 걸 깜빡해서."

"뒷산에서 돌아올 때는 저택의 현관을 통해 들어오셨습니까?"

"뒷산으로 가려면 저택의 뒤에 난 쪽문으로 나가야 합니다."

기현은 작게 미간을 찌푸리면서 자신의 수첩에 형원이 하는 말을 기록한다. 쪽문으로 나갔다면 운전기사와 마주칠 일은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알리바이라도 확인이 됐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 저택 주변에는 감시카메라조차 없는 것에 한탄이 절로 나오는 기분이다.

"그 이후로는요?"

"집에 돌아왔는데 아무도 계시질 않았습니다. 사장님께서는 그날 출근을 하지 않는다 하셨는데, 사모님과 자녀분들까지 없는 걸 보고 저에게 말없이 외출하셨나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토끼를 잡으라 시켜 놓고는 확인도 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종종 그러시곤 하셨으니까요. 잡일 같은 걸 시키실 때는, 제가 맡은 바를 다 해 와도 신경도 쓰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계속 집에 계신 겁니까?"

"집 안 청소를 하다가, 먹을거리가 떨어져서 시장에 다녀왔습니다."

"시장에 갈 때는 대문을 통해 나가셨나요?"

"네, 맞습니다."

"집 앞에 운전기사가 있던가요?"

"기사님의 차량은 있었지만, 기사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확실합니까?"

"제 말을 믿지 않으시네요."

"그저 확인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럼, 제가 확실하다고 하면 믿으실 겁니까?"

기현은 허를 찌르는 듯한 형원의 물음에 마른침을 삼킨다. 형원은 그런 제 속내를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착잡한 얼굴로 기현을 바라본다. 이 남자의 죄를 입증할 확실한 무언가가 나오기 전까지는 이 자가 무죄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심증은 쉬이 가라앉지 않는 것이다. 이 남자가 하는 말을 쉬이 믿기 힘든 까닭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기현은 형원의 말에 '당연하죠'라고 답하고 수첩을 다음 장으로 넘기고 제 머리에 남은 의문들을 다시금 정리한다.

"이 댁의 일가가 집을 비운 지 시간이 꽤 지났을 때는 왜 신고하지 않으셨습니까?”

“단순히 여행을 다녀오시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은 제가 집에 있든 없든 멋대로 집을 비우시곤 하셨으니까요.”

“그럼, 식구들이 모두 집을 비웠을 때도 형원 씨는 이 집에 계셨다는 거군요?”

“시장에도 다녀오고, 뒷마당에도 다녀왔지만 줄곧 집에 있었습니다.”

“이 집에 드나드는 사람이 있었을 텐데, 못 보셨습니까?”

“글쎄요.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

기현은 경찰 측에서 전달한 수첩의 내용을 상기한다. 경찰과 형원의 걸음이 엇갈린 것일까? 이 넓은 저택에서 길이야 엇갈릴 수 있겠지만, 하루 종일 상주한 그들의 눈에 형원이 띄지 않았을 리가 없다. 게다가 형원은 이 집에 누군가 드나들었다는 사실마저도 부정하는 듯하다. 기현이 막 자신의 수첩에 ‘거짓’이라고 기재하려는 찰나, 형원이 다시금 입을 뗀다.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미덥잖은 부분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왜 못 믿으시는 거죠?”

“제가 전해 들었던 바와 엇갈리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그럼, 그들의 말에는 거짓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기현은 다시 심연과도 같은 형원의 눈을 마주한다. 나는 왜 경찰의 말을 그대로 의심도 없이 믿었던 것일까? 그들의 신분이 ‘경찰’이라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평온한 형원의 얼굴을 오래 마주할수록 자신의 머릿속은 더 이상 풀리지 않는 실타래가 저들끼리 더욱 얽히고설키는 듯하다. 결국 ‘믿음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에까지 다다르자 기현은 수첩을 덮고서 안경을 벗어 탁자 위에 얹어 둔다.

“하… 잠시 쉬었다 할까요?”

“그럼 저는 잠시 뒷마당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럼.”

근원에 대한 의문이라는 것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꼬리를 물고 늘어지고, 결국에는 답도 내리지 못한 채로 인간을 생각의 늪에 빠뜨린다. 기현이 고개를 젖힌 채로 눈을 감고 깊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다시 천천히 눈을 뜬다. 기현의 눈에 들어온 천장에는 어지러운 문양의 벽지가 붙어 있어 더더욱 자신을 정신 차리기 힘들게 만드는 듯하다.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나서 머리에 든 생각은 경찰에 어제 일과를 보고하는 걸 잊었다는 것이었다. 저 남자는 이 집안의 일에 충실한 집사인 듯 보이니 잠시 자리를 비워도 상관없겠지 하며 접견실을 나서 현관으로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주방 쪽에서 형원이 큰 보폭으로 기현을 향해 걸어온다. 왠지 모를 위압감에 기현은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기만 하고서 밀지 못한다. 형원은 순식간에 기현의 앞으로 다가서서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 눈을 맞춘다.

“누군가 마당에 있는 것 같아요.”

“네?”

“총을 들고 있었어요. 일단 어서 몸을 피해요.”

“인상착의는,”

“어서요. 저택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어요.”

잔뜩 굳은 얼굴의 형원은 기현의 등을 떠밀듯이 그를 3층의 객실로 안내한다. 영문도 모른 채로 걸음을 옮기는 기현이 뒤를 돌아볼라 치면, 형원은 그의 등을 감싼 팔에 힘을 주며 그의 걸음을 재촉한다. 기현은 제 가슴팍에 찬 총에 잠시 시선을 두고서 형원이 문을 열어 준 객실 안으로 들어선다. 그는 자신이 문을 열기 전까지 절대 나오지 말라 당부하고서는 서둘러 문을 닫는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들에 기현은 제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서는 제 머리를 감싸 쥔다.

‘그들의 말에는 거짓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형원의 물음은 상당히 중의적으로 들릴 여지가 충분했다. 그들의 말도 믿을 이유가 충분하지 않다면, 그의 말을 믿을 수는 있는 것인가. 스스로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면 어느 것을 믿어야 할까. 기현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이고서, 혹시나 침입자가 정원에 있을까 하는 의문에 창가로 다가서려던 찰나였다. 집 내부에서 들리는 총성에 기현의 눈이 크게 떠지고, 한달음에 방문 앞으로 달려가 손잡이를 잡는다. 형원은 자신이 문을 열기 전까지 절대 방을 나서지 말라고 했다. 나는 지금 총을 가지고 있고, 그에게는 무기가 없다. 내가 지금 방을 나서면 나에게 유리할까, 침입자에게 유리할까. 머릿속에 이어지는 생각들에 행동은 느려진다. 결국 문손잡이를 잡고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던 기현은 문고리가 돌아가는 것에 놀라 급하게 손을 뗀다. 그리고 제 시야에 들어온 것은, 머리가 약간 헝클어진 형원이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에요?”

“침입자를 내쫓았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대문을 나서서 도망쳤을 거예요.”

“확실해요?”

“제 말은 하나도 믿질 않으시네요.”

“방금 총성이 울렸는데,”

“제가 위협으로 침입자를 향해서 쐈습니다. 그 사람은 무사해요.”

저를 안심시키려는 듯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에 기현의 다리에 힘이 풀린다. 탐정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까지 온몸에 긴장이 들어간 적이 있던가. 어찌 되었든 소동이 마무리되었다는 것은 확실할 터였다. 그러니까 형원이 방문을 열고 저를 확인하러 온 것이겠지. 기현이 무릎을 짚고 몸을 지탱하고 있자, 형원이 그의 어깨를 감싸며 기현의 안부를 확인한다. 괜찮냐 묻는 물음도, 쉬겠냐는 물음도 기현의 귀에 웅웅거리다 허공으로 흩어질 뿐이다. 기현은 형원의 손을 뿌리치고서 욕실의 위치를 묻는다. 차라리 뜨끈한 물에 몸이라도 담그고 있으면 정신이 들까 싶은 것이다. 형원은 3층에 위치한 욕실에 물을 받아 놓을 테니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천천히 방을 나선다. 방문이 닫히고, 기현은 쓰러지듯이 객실의 침대 위로 엎어진다. 밤새 잠을 설친 까닭인지, 아까 전의 긴장감으로 인해서 몸이 노곤해진 탓인지, 평소에 낮잠 자는 버릇이 없던 기현은 자신의 눈꺼풀이 돌을 얹은 듯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기현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제 주변으로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잠결에 놀란 기현이 가슴팍에서 총을 빼 들어 허공에 쏜 것은, 아까 전 소동이 뇌리에 강하게 남았던 탓일 것이다. 팔에 제대로 힘을 주지 않아 총알이 어디로 날아갔는지도 모르고, 오로지 총성 하나에 잠이 깬 기현의 시야로는 형원의 얼굴이 가득 들어 찬다. 그의 얼굴은 기현이 볼 때마다 항상 그랬듯이 평온함만이 가득하다. 기현은 순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나 싶은 생각에 불안하게 그를 바라보자, 형원은 되려 그의 등을 다독여 준다.

“괜찮아요?”

“그건 내가 물어야죠.”

“한참 빗나갔어요.”

“그런데 왜 놀라지도 않아요?”

“탐정님이 더 놀란 것 같아서.”

“…미안해요.”

“괜찮아요.”

기현은 제 앞으로 내밀어지는 물잔을 받아 들고는 한 잔을 모조리 비워 낸다. 속으로 미적지근한 물이 들어가면서 장기가 제대로 움직이는 느낌이 든다. 컵을 다시 협탁 위에 올려 놓고서 침대에 몸을 기대자, 형원도 간이의자에 편하게 몸을 기대고서 기현을 빤히 바라본다.

“물 다 식었겠네요.”

“다시 받으면 되죠.”

“귀찮을 텐데.”

“이런 게 원래 제 일이었는걸요.”

노곤한 몸은 기현에게 어떠한 긴장감도 주지 않는다. 멍하니 이불 위를 응시하던 기현은 고개를 들어 형원을 쳐다보며 다시 천천히 입을 뗀다.

“이 집에서 어떻게 일하게 된 거예요?”

“어…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요. 쉽게 말하면 가업 같은 거라고 할까요?”

“아버님께서도 이 집안에서 일을 하셨나 봐요?”

“정원사로 일하셨습니다. 고목을 다듬으시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지셨어요.”

기현은 덤덤하게 말하는 형원의 말에 얼굴을 굳힌다. 괜한 걸 물었나 싶다가도, 이렇게 유도해서 일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자신이 지독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답답함과 투철한 직업 정신에서 야기된 본능과도 같은 것이라 합리화한다.

“충격이 컸겠네요.”

“그래도 장례는 치러 주시더군요. 평소에 그렇게 냉대를 해 놓고선.”

기현은 순간 차가워지는 형원의 말투에 그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이미 해가 진 방 안에는 달빛만이 어슴푸레 들어오고, 그 때문에 형원의 얼굴에는 푸른빛이 감돌아서 더욱 그의 얼굴에 섬찟했으리라. 기현은 그의 말을 더 끌어내기 위해 더 말을 덧붙이지 않고, 이불 안에 감춰진 자신의 손을 옮겨 주머니에 들어 있는 녹음기의 버튼을 누른다.

“그 냉대는 저에게도 이어졌어요. 그러니 당연히 제게 정을 주지 않았겠죠, 이 집에서 10년 넘게 있었는데. 처음부터 집사 일을 한 건 아니었어요. 어린 나이이다 보니 주인 남자의 시다바리 역할을 해 왔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정원을 가꾸는 일은 오로지 제 몫이 됐죠. 가지치기가 서투른 것도, 비가 쏟아져서 꽃이 시든 것도 다 제 탓이 되더라고요. 하루는 그런 적도 있었어요. 부인께서 아끼는 화병을 화단에 옮겨 심으려고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거든요. 화병은 깨지고, 꽃은 바닥에 널브러졌는데, 제 다리에도 상처가 심하게 났었죠. 그런데,”

“네, 그런데요?”

“그런 저를 뒷마당에 난 곳간에 가둬 두더라고요. 지금에야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데 그때는 엄청 무서웠어요.”

기현은 입꼬리만 올려 웃는 형원을 보면서 그가 범인이 확실할 것이라 생각한다. 실종 가족에 대한 적대감과 실종 가족과 가장 가까운 사이라는 것, 그리고 그 만큼 가까운데도 일가족이 사라졌으나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를 용의자가 아닌 범인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꼭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형원은 기현과 눈을 맞추고서는 마저 입을 뗀다.

“이 말은 믿으시네요.”

“그야, 그쪽이 진지하게 얘기하니까,”

“낮에 했던 진술도 진심이었는데.”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래요.”

“….”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죠.”

“형원 씨.”

“제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어차피 더 말한다 해도 믿고 싶은 것만 믿으실 테니까요.”


목이 타 들어 갈 것 같은 갈증에 기현은 번쩍 눈을 뜬다. 간밤에 그 일들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저 멀리 밀어 놓아져 있는 간이의자를 바라보다가 기현은 느리게 몸을 일으킨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기현은 제 바지 주머니 안에 고이 들어 있는 녹음기를 만지작거리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고 나선다. 형원은 2층에 있는 그의 방에서 잠에 들어 있겠지. 어제는 그에게도 고된 하루였을 테니 굳이 방문을 열어 보지 않기로 한다. 제 가슴팍에 총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있는 녹음기를 만지작거리면서 계단을 하나씩 밟아 내려간다. 대저택에 기현의 발소리만이 조용하게 울려서 꼭 여러 개의 발걸음 소리가 나는 듯하다. 해소되지 않은 갈증에 목을 만지작거리면서 천천히 주방으로 향한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식수의 위치를 알 수 없어서 주방을 서성거리다가, 문득 어제 채 열어 보지 못한 주방 뒤편으로 난 문에 시선이 닿는다. 허름한 나무로 된 문에 잔뜩 녹이 슨 손잡이를 바라보다가, 호기심에 이기지 못하고 결국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잡아 돌리고서 밀어 연다.

습관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경계하는 기현은 조심히 한 걸음 내디디며 저택의 뒤편으로 향한다. 기현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사그락’하며 풀 밟히는 소리가 들린다. 제멋대로 자라난 잡초가 기현의 발에 밟혀 힘없이 땅 위로 몸을 누인다. 몇 걸음 더 걸어가자, 어젯밤 꿈에서인지 생시에서인지 형원이 말했던 곳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금방이라도 삭아서 무너질 것 같은 낡은 나무로 된 곳간에 다가설수록 기현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다. 꼭 제 발에 밟히는 잡초들이 제 발목을 붙들면서 더 이상 다가서지 말라며 말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기현은 꼭 뻘에 들어온 듯 제 발이 푹푹 빠지는 느낌을 애써 이겨내며 곳간의 앞에 선다. 수십 번이고 물에 젖었다가 마른 자국이 선명한 손잡이로 손을 가까이 가져갔다가, 용기 내어 그 손잡이를 손에 쥔다. 속으로 천천히 셋까지 센 다음에 숨을 들이마시고 힘껏 손잡이를 당기고는, 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기현은 뒷걸음질 치다가 곧장 몸을 돌려 저택의 대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다.

해골이었다. 생각보다 좁은 곳간의 정중앙에 자리한 것은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는 뼛조각들이었다. 어쩌면 이 사건은, 단순 실종 사건이 아닌 살인 사건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탓인지, 아직도 눈에 생생한 그 광경 때문인지 기현은 강한 메스꺼움을 느낀다. 곧장 저택의 대문을 열고 나가 다급하게 택시를 잡아탄다. 경찰서로 가 달라는 말을 끝으로 제게 지갑이 없는 것을 깨달았으나, 사건의 심각성을 알린 대가로 택시비를 요구하는 건 괜찮겠지 하고 생각한다. 도로 위를 달리던 택시가 경찰서 앞에 멈춰 서고, 기현은 기사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 말하고서는 제게 수사를 의뢰했던 수사팀장에게로 곧장 달려간다. 수사팀장이 기현에게 가장 먼저 들은 이야기는 ‘죄송한데 택시비 좀 내 주세요’ 였고, 택시에서 내려 잔뜩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기사에게 비용을 지불한 뒤에 다시 서로 올라와서 들은 이야기는 ‘그 대저택 뒤에 있는 곳간에 유골이 있어요’ 였다. 수사팀장은 부산스럽게 팀원들을 모아서 현장으로 출동시켰고, 기현에게는 빠른 시일 내로 사례할 테니 당분간은 자택에서 쉬라며 그의 등을 토닥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기현이 제집에서 막 샤워를 끝마치고 나와서 옷을 갈아입으려 할 때였다. 자신의 집에 놓인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리기에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 내며 전화를 받고서는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혹시 모르니 녹음기를 챙겨 들고서 집을 나선다. 그 유골의 신원이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유골의 신원이 그 일가족 중 하나라면 당장에라도 채형원을 체포해야 할 터였다. 비록 그가 저택을 빠져나가 도망친다 해도, 그의 얼굴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 시간만 많이 주어진다면 충분히 그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기현이다. 택시 뒷좌석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그의 시야에 스쳐 지나가는 것은 부녀지간으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아이가 손을 잡고 길을 거니는 모습, 10대 청소년으로 보이는 사내아이들이 끼리끼리 어울려 장난치는 모습 같은 것들이었다. 그 모습들을 보며 작게 미소 지으며 시선을 떼고, 기사가 ‘기분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하는 말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택시 안에서 라디오 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던 기현이다. 기현은 그의 말에 대충 둘러대고서 택시가 경찰서 앞에 도착하자마자 값을 지불하고 서둘러 뒷좌석 문을 열어 제 몸을 꺼낸다. 오늘따라 평소보다 훨씬 큰 보폭에 기현은 제 온몸으로 심장 고동이 느껴지는 듯하다. 계단을 두세 칸씩 한꺼번에 걸어 올라가 일면식이 있는 수사팀장을 찾아 그의 앞에 마주 보고 앉는다.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서류 한 장을 계속해서 넘겼다가 다시 되돌려 보기를 반복한다. 기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다.

“아, 맞다. 죄송해요. 그 저택에 있는 동안 일과 보고를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깜빡했죠.”

“아아, 뭐, 괜찮습니다. 안전 때문이니까요.”

“전에 숙직하셨던 보고에는 집에 아무도 없다고 하셨는데, 한 사람 있더라고요.”

“사람이 있었다고요?”

“네, 채형원이라고 그 집 집사였어요.”

“…누구요?”

“채형원이라는 사람이요. 키도 크고, 눈도 크고, 서글서글하게 생긴.”

“…채형원 씨요?”

“네. 집이 워낙 크니까 엇갈렸는지,”

“유기현 씨.”

“네?”

“기현 씨가 발견한 유골, 채형원 씨 겁니다.”

“…네?”

“그 유골의 주인이 채형원 씨라고요. 돌아가신 지는 꽤 되어 보이던데, 어떻게 찾으셨어요?”

기현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짐과 동시에 제 눈앞이 하얗게 물드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제 앞에서 남자가 하는 말이 웅웅거리며 귓가에서 맴돌다가, ‘유기현 씨!’하고 소리 치는 것에 겨우 정신을 차린 기현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다급하게 말을 이어 나간다.

“그럴 리가 없어요. 제가, 제가 3일 동안, 그 사람이랑 같이 있었다고요.”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지금. 그 집에 우리 팀원 세 명이 갔다 왔어요.”

“그럼 타이밍이 안 맞았던 거겠죠. 아, 녹음. 제가 녹음도 했다고요.”

“녹음이요?”

“네, 그 사람이랑 대화한 거요.”

기현은 다급하게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어 그간 녹음했던 것들을 재생시킨다.

‘이 집의 집사라고 하셨죠?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

'채형원 씨. 이 집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

‘어우, 오래 일하셨네요. 그럼 이 집 식구분들과도 유대감이 상당히 깊으시겠네요?’

'….’

‘무슨 의미죠?’

기현은 제 뒤로 수사팀장이 저를 부르는 것도 모르고 서에서 뛰쳐나간다.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던 것은 정말 주변 소음 때문에 들리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자신이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택시를 잡아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기현은 그저 무작정 내달린다. 제 시야로 무엇이 스쳐 지나가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표지판만 확인하며 다시 그 저택을 향해 갈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래요.'

‘자기네들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죠.'

‘자신이 보고 있는 게 진짜일까 하는 의문도 없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죠.’

기현은 제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지금 당장 제 귓가에서 들리는 소리인지, 아니면 스스로가 만든 환상인지 확답 내리지 못한다. 한참을 내달려 대저택의 정문이 보일 즈음에야, 잠시 멈춰 서서 무릎을 짚고 숨을 골랐다가 보폭을 넓혀 집으로 향한다. 무거운 대저택의 대문을 힘껏 당겨 열고, 곧게 난 통로를 달리듯이 걸어가 저택의 현관문을 밀어 열면 가방을 들고 1층 계단을 내려오는 형원이 보인다.

내가 보고 있는 건 진짜 채형원인가. 내가 보고 있는 건 진짜일까.

그를 본다면 쏟아낼 말들이 한가득이었으나, 그의 평온한 얼굴을 막상 마주하고 나니 말문이 막히는 것이다.

“다시 오셨네요. 안 오실 줄 알았는데.”

“당신,”

“다 아셨잖아요, 이제.”

“….”

“그럼 남은 얘기를 마저 해 볼까요?”

“….”

“당신이 본 그대로예요. 그리고 저는 계속 집에 남았고, 그들의 잡일을 도맡아 했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기겁을 하시더라고요. 저는 그냥 제 할 일을 했을 뿐인데.”

“….”

“그분들께 오늘은 사냥 다녀오지 않으셔도 되냐고 물었어요. 평소에는 본 척도 않으시면서, 그제야 제가 보였던 건지 부랴부랴 쪽문으로 나가시더라고요.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뒤를 따라나섰죠.”

“….”

“계속 뒤를 돌아보시길래, 제가 뒤에서 잘 따라가고 있으니 안심하시라 말씀 드렸어요. 그랬더니 더 놀라서는 부리나케 산 정상으로 올라가시더라고요. 거기까지 안 가도 되는데.”

“….”

“걱정돼서 계속 뒤를 따랐어요. 결국 그분들은 혼비백산해서 제게 오지 말라고 소리 치셨는데, 어떻게 안 갈 수가 있겠어요. 당장 앞이 낭떠러지라 헛디디면 위험한데. 그래서 제 손을 잡으시라 손을 뻗고 다가갔는데, 그렇게 떨어지셨어요. 뒷산의 낭떠러지 밑으로.”

“….”

“시신은 그곳에서 수습하면 될 겁니다. 뒷산에는 등산객도 잘 드나들지 않고, 정상까지는 더더욱 가는 사람이 없으니까 아마 바로 발견하실 거예요.”

“채형원 씨.”

“주인도 없는 집에 더 있을 필요는 없죠. 저는 이제 가 봐야 해서. 그 동안 내 얘기 들어줘서 진심으로 고마워요.”

“이것만 대답해 줘요. 마지막으로 묻는 거예요.”

“네, 말씀하세요.”

“내가 보는 당신은, 진짜인가요?”

기현은 형원의 눈동자를 응시한다. 블랙홀처럼 저를 홀릴 듯하던 그 눈동자는, 탁한 빛을 내면서 되려 저를 밀어내는 듯하다. 기현이 그의 시선을 좇으며 대답을 재촉하자, 형원은 처음으로 기현의 앞에서 눈까지 접어 웃어 보이며 답한다.

“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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