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증오를 멈추는 방법
프랑켄슈타인(원작) 드림 | 괴물 드림
퍼시가 사람을 무참하게 죽인 지금 괴물은 이 순간이 왜 이렇게 슬픈지 알 수가 없었다. 눈물은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지만, 뱃속 깊은 곳에서 절규가 메아리치다가 간신히 혀 끝에서 멈췄다. 어쩌면 예상한 게 맞았기 때문일까? 퍼시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였다. 아마 지금 퍼시의 눈빛으로 보건데, 퍼시는 가책의 눈물을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것이다. 죄책감의 눈물 또한 이미 세상을 떠난 목숨에게는 가증스러운 일이 아니겠냐만은 한 생명체를 그저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놓는 것에 아무 눈물도 없을 사람이라 생각하니 슬펐다.
어째서 자신에게 슬픔을 처음 가르쳐 준 사람이, 본인이 자아낼 슬픔에는 그토록 무감각한가?
퍼시가 괴물에게 점점 다가왔다. 그의 시선은 시신에 닿아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볼 생각이었으나 퍼시가 칼을 들고 시신의 얼굴에 내려찍으려 하자 막았다. 칼과 권총을 빼앗으려고 했으나 퍼시는 놀랍도록 민첩한 동작으로 권총은 지켜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는 퍼시의 한쪽 입매만 비틀려 올라간 것이 보였다.
“신사로구나, 너.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아는.”
“……왜 이런 짓을 했나?”
“오, 저런. 너의 눈에서 실망이 보이네. 비켜.”
“그러고 싶지 않다. 멈춰라.”
괴물은 퍼시가 자신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 총알, 그 지긋지긋한 고통! 그렇지만 비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옳지 않았다. 살인 자체도 옳지 않았지만 퍼시의 태도들이 유독 더 비인간적이었다.
퍼시가 총을 든 손을 뻗기만 하면 빼앗을 수 있었다. 그럼 퍼시는 온갖 저주의 말을 퍼부을 것이다. 괴물을 친절히 대해주던 태도조차 방해물 앞에서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괴물을 한 인간으로 대하던 자는 영영 사라지겠지.
찰나의 시간동안 이런 생각들이 스쳤고 괴물은 결심을 굳혔다. 괴물은 그 총을 빼앗음으로써 인간이 되기를 마음먹었다. 한순간 인간이 되었을 때 너무나 달콤했으므로, 그것을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그러나 퍼시는 총을 겨누는 대신 오히려 총을 품 안에 넣었다.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로 괴물에게 성큼성큼 다가왔고, 괴물은 오히려 그 기세에 뒷걸음질쳤다. 아까는 잠깐 본 것이었지만, 퍼시는 괴물이 제압하기에는 빨랐다. 죽이기에는? 알 수 없었다.
퍼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시신에게 무자비한 발길질을 했다. 징 박힌 신발이었고 퍼시의 몸놀림은 어설프지 않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괴물은 퍼시를 시신과 떼어놓았지만, 이미 조금 늦은 것 같았다. 퍼시가 씨근덕거리며 말했다.
“날 막고 싶어? 막아 봐. 죽이지 않으면 그럴 수 없을걸.”
그럴 것이다. 퍼시를 온전한 형태로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딘가를 부러뜨리고 자르고 죽여야만 가능할 것이다.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물었다.”
“오, 나의 은인이여. 내 생애 유일무이한 존재이니 특별히 가르쳐 주지. 이자는 죽어 마땅한 자이니까.”
“죽어 마땅한 자라는 건 없다.”
“하! 그 말은 네가 책으로 읽은 죽은 자들이 가르쳐 줬어? 그건 죽은 지식이야. 죽어 마땅한 존재는 항상 있었어. 너에게 온 세상이 가르쳐 주지 않았어?”
그 말에는 불에 덴 듯한 충격이 뒤따랐다. 퍼시의 말이 진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책들은 모두가 평등하고 소중하다고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어떤 것들은 더 평등하고 소중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더 평등하고 소중했고, 괴물은 그렇지 않았다. 괴물이 잠깐 멈춘 사이 퍼시가 말을 이었다.
“누군가는 처음부터, 누군가는 잘못을 저질러 인간 이하가 되지. 이자도 그러한 자야. 나 또한 그러한 자이고. 네가 정 나를 심판하겠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면 내 복수를 방해하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는 퍼시의 눈은 충혈되고 흉흉한 독기로 흘러넘쳐서, 괴물은 퍼시가 ‘독약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 것을 드디어 이해했다. 괴물이 말했다.
“이제 이자가 네 복수의 마지막인가?”
“시작일 뿐이지.”
“그들이 무슨 짓을 했나?”
“나를 부쉈지. 다른 많은 사람들도.”
“멈출 방법은 없나?”
“그들의 더러운 피가 흘러 내 영혼을 전부 적실 때까지는.”
대화를 거듭하면서, 퍼시의 목소리는 문득 달콤해졌다.
“괴물, 너는 증오를 알지 않아? 난 네가 이해되지 않아. 너는 내 증오보다 더 깊은 증오를 맛보지 않았니? 난 퍼시벌 머피로 태어난 이상, 절대로 네 증오만큼을 가질 수는 없는데도…….”
그의 말이 옳았다.
괴물은 증오를 알았다. 무차별적이고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깊은 증오를 알았다. 그것은 ‘괴물’로 태어났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떤 삶을 살아왔든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증오를 괴물은 겪었다.
그래서 퍼시벌 머피가 복수자라는 것을 알자, 괴물은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데도 그를 이해했다.
괴물은 도로 물었다.
“아까 무기를 집어넣고 나에게 달려들었을 때, 두렵지 않았나?”
너의 증오는 그렇게나 강력한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괴물은 퍼시를 결국 이해해버릴지도 몰랐다. 그가 복수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찾기를 바라면서 물러날지도 모른다.
“이름 없는 괴물 씨, 신사에게 머리가 부서질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나? 난 네가 두렵지 않아.”
그러나 퍼시에게서 나온 것은 의외의 답변이었다.
신사라고. 괴물을 신사라고 믿었다. 괴물이 야만인, 동물, 죽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믿었다. 그것도 존중받을 만한 인간으로. 타인을 존중하는 인간으로. 괴물에게 그러한 의지와 능력이 있음을 믿었다. 괴물은 또다시 비통한 슬픔을 느꼈다. 왜 퍼시는 이렇게나 괴물을 인간으로 대하고 본인은 추락하는가.
그리고 왜 인간으로 대해지는 것은 눈물 나도록 달콤한가.
그래서 괴물은 퍼시에게 그의 증오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대신,
“증오 때문에 사람이기를 저버리면 안 된다.”
이렇게, 인간으로서 대답했다. 그러고는 시신을 안아들어서 떠날 준비를 했다. 사람들에게 발견될 수 있게 둘 생각이었다.
괴물 앞에 선 녹색 눈의 ‘괴물’은 코웃음을 쳤다.
“잘 가라, 괴물.”
그 말에 빈정거림이 섞여 있음을, 괴물조차도 눈치챌 수 있었다. 묵묵히 떠나려는 괴물에게 퍼시가 말했다.
“은인으로서 봐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에 네가 나에게 돌아왔을 때, 그때는 다시는 날 방해할 수 없을 거다.”
“내가 왜 너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때의 너는 증오를 이해했을 테니까.”
괴물은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길을 떠났다. 누군가의 증오에 희생된 자를 안아들고, 올바른 장소에 놓아두러. 누군가의 증오에 희생된 인간이 인간다운 끝맺음이라도 맺을 수 있도록.
앞으로 괴물이 그러한 증오를 이해한다고 말할 날은 없을 것이다. 그동안 괴물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인간인 채로. 괴물은 드디어 창조주와 대면할 것이고, 창조주는 자신의 책임을 다할 것이다. 적어도 최소한의 책임은.
그러니 거기서 괴물이 배울 것은 증오보다는 사랑이겠지. 괴물이 퍼시에게서 인간됨을 배웠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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