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
내 드림의 6.55 스토리는 이렇게 되겠지
아씨엔 X 빛의 전사(여) 드림글
이 아래로 효월의 종언 6.55 메인 스크립트가 그대로 인용된
드림 날조 연성이 있습니다.
옛 인류들과 함께 라스트 스탠드에서 시간을 보내던 베르니체는 브리안의 호출로 샬레이안의 마법 대학을 찾아갔다가 왕위 계승을 도와달라는 말을 듣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기껏 신대륙에서 이곳까지 온 이유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는 뜻이 아닌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왕녀라는 자는 투랄 대륙으로 가자고 말했다.
투랄. 마무쟈족이 통치하는 대륙이자, 신대륙이라 불리는 땅. 게다가 신대륙이라면 에메트셀크가 황금향을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기에 흥미는 있었다.
‘그래도 정치적인 일에 얽히고 싶지 않은데…… 어떡하지…….’
그라하와 브리안이 우크라마트에게 간단한 질문을 하는 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던 베르니체는 나중에 다 대답해줄 테니 하나만 알아달라는 말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가 마치 중요한 비밀을 속삭이듯 말했다.
“네가 모험가라면 손해 보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거. 이건 소문으로 들은 이야기인데, 이번 ‘계승 의식’은 아무도 가본 적 없는 ‘황금향’이나 투랄 대륙 최강의 환수, ‘발리가르만다’랑 관련이 있대. 어때? 재미있겠지?”
“오, 황금향이라……. 난 그런 이야기 정말 좋아하는데.”
“아하하, 좋아, 너, 브리안이랬지? 나랑 잘 통하겠는데? 투랄 대륙에는 그 밖에도 수많은 비경과 맹수가 있거든! 영웅, 너는 어때?”
“……황금향, 들어본 적은 있는데…….”
베르니체의 중얼거림에 우크라마트는 감격스럽다며 기뻐했다. 하지만 베르니체는 생각에 잠겨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 외에도 오간 대화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사냥하자는 말조차 듣지 못하고 생각에 잠긴 베르니체를 부른 것은 에메트셀크였다.
“가 봐. 이런 기회가 아니면 또 언제 가겠어? 우리도 따라갈 테니까 염려 말고. 안 그래도 엘리디부스가 여전히 사명감이 남은 모양이라 좀 비워줘야 하는 참이거든.”
“네가 좋지 않게 얽히거든 우리가 빼내 주마. 그러니 걱정 말거라.”
“……당신의 요구는 알겠어요. 받아들이기 전에 일단 생각을 좀 하고 싶은데…….”
“그럼 베르니체는 안 가? 마침 함 섬에 의뢰가 있다고 하던데.”
라하브레아의 말까지 듣고서야 생각을 해보겠다고 하니 브리안이 물었다. 의뢰? 그렇게 되묻는 베르니체의 말에 옆에 있던 엘리디부스가 대답했다. 물론 그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대부분이 아씨엔을 보지 못하니 그에게 직접적인 답은 하지 못했다.
“네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왕녀가 네게 서로를 알기 위해 사냥하러 가자고 했어.”
“아……. 그래요. 가요.”
“그럼 당신들 먼저 가 있어. 나는 준비할 게 있어서, 금방 뒤따라갈게.”
쿠루루가 서둘러 뛰어가는 것을 보던 베르니체는 일행이 움직이고 한참 지나 멀리 떨어진 브리안이 불러서야 에테라이트를 타고 가겠다며 작은 에테라이트로 걸음을 돌렸다. 다른 일행들을 따라가지 않고 곁에 머물던 휘틀로다이우스—두 사람이 하나가 된 채로, 묘하게 겹친 목소리가 물었다.
“베르니체는 가기 싫어?”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정치적인 게 싫은 거지. 모처럼 정치적 문제에서 해방됐나 싶었는데……. 차라리 세계 구하러 다니던 게 마음이 더 편하겠다 싶기도 하고.”
씁쓸하게 웃으며 지식신 항구의 에테라이트에 도착한 베르니체는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계속 말했다.
“물론 어떻게 보자면 정치적인 문제도 세계와 세계의 충돌이라지만, 조금 더 현실적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더 힘들어. 나와 내 주위를 해치려는 사람들도 유독 많은 기분이고.”
이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지만 한참 때는 하루에 네다섯 명도 찾아왔었다며 쓰게 웃은 베르니체는 가슴이 이어진 왼쪽 옆구리를 오른손으로 감쌌다. 이제는 흉터 하나 남지 않은 상처가 욱신대는 기분이었다.
“전에 엘리디부스가 본 광경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거든.”
집사가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 났을 것이라고 웃은 베르니체는 동료들이 보이자 그들에게 손을 들어 흔들었다. 브리안에게 직업 편성을 물은 그녀는 회복 역할을 맡아달라는 말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함 섬에서 보게 된 것은 이상할 만큼 거대한 콜리브리였다. 에메트셀크와 휘틀로다이우스의 시선이 깊은 곳에 꽂혀 있을 때부터 예상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베르니체는 브리안과 에렌빌이 보고하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러 간 왕녀를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던 중 그를 향해 날아오는 마물을 보고 달려갔다가 그보다 더 큰 콜리브리가 날아와 마물을 잡아채자 걸음을 멈추었다.
“저게 뭐야?”
“풍부한 에테르 환경 탓에 변이된 개체 같군. 베르니체, 쫓아가자. 휘틀로다이우스. 나중에 저 녀석들과 뒤따라 와.”
엘리디부스의 말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베르니체는 먼저 앞서는 그를 따라 전송 장치를 붙잡고 너머로 향했다. 쫓아가는 게 좋을 거라는 조언도 아니고 직접 ‘쫓아가자’고 하는 것은 처음인 터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어색했다.
그것이 멈춘 곳은 이전에 몸에 크리스탈이 자란 흰곰이 자리 잡고 있던 장소였다. 어마어마하게 큰 그것을 보며 에테르란 무엇인지 생각하던 베르니체는 뒤이어 일행이 따라오자, 천구의와의 에테르 연결을 다시 점검했다. 아직은 문제없었다.
“엘리디부스. 끝나고 잠깐 대화 가능해?”
“갑자기?”
“오늘따라 평소랑 좀 다른 것 같아서. 얼마 전에 거울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편속성 에테르를 묻혀온 것도 그렇고, 사명감을 비워야 한다던 말도 그렇고.”
“……일단 처음의 질문은 그때 말했다시피 개인적인 이유고, 두 번째 질문은 네가 들은 그대로야. 내가 답해줄 수 있는 건 없군.”
하지만, 하고 말을 떼려던 순간 우크라마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베르니체와 눈을 마주치자 급하게 변명했다.
“찾았다! 아, 아깐 겁먹지 않았어.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을 뿐이라고! 절대 겁먹어서 그 자리에 있었던 게 아니야!”
그게 그거 아니냐는 그라하의 물음에 서둘러 처리하고 밥을 먹자는 우크라마트를 놀리듯, 콜리브리가 말했다.
“겁먹지 않았어! 겁먹지 않았어!”
“시끄러워, 망할 새 녀석! 통구이로 만들어 주마!”
그 모습이 어찌나 불안하던지. 베르니체는 콜리브리와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하는 우크라마트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엘리디부스, 무슨 일 생기면 우크라마트를 먼저 부탁할게……. 정말 위험할 것 같을 때만. 죽기 직전이라거나, 그럴 때.”
“그래…….”
왕위 계승에 도전하는 자 치고는 이렇게 어리숙한 자라니. 물론 그의 무력은 감탄할 만했지만, 딱 그뿐이었다. 겁이 많으나, 그것을 감추기 위해 애써 당당하게 행동하는 이를 보던 베르니체는 휘틀로다이우스가 “못 도망치게 지역을 봉쇄하겠다”고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콜리브리를 보았다.
전투에서 본 우크라마트의 역량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두려움이 앞서 역량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한눈에 보이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그것만 극복한다면 그는 자신의 도움이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어디서 온 것일지 생각하던 베르니체는 엘리디부스가 앞을 막아서는 것을 보고 그의 어깨 너머로 우크라마트의 말을 따라 하는, 쓰러뜨린 줄 알았던 거대 콜리브리를 보았다.
“베르니체, 앞!”
“비겁한……! 비겁한……!”
“그렇지? 그렇지 않았다면 더 쉽게…….”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공격 기술은 소 아르카나-왕의 검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긴장한 마음과 달리 손은 이미 그 카드를 잡아 하늘로 던지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자신에게 맡기라는 쿠루루의 외침과 함께 마치 물감으로 그린 듯한 광선이 쏘아져 거대한 콜리브리를 쓰러뜨렸다.
“쿠루루……?”
“미안해, 늦어서.”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브리안의 물음에 답한 것은 에렌빌이었다. 연구자들을 피난시키던 중 때마침 달려온 쿠루루와 마주쳐 상황을 알려주며 데려왔다는 말에 타이밍이 좋았다며 미소 짓고 그 이후의 대화를 듣고 있다 보니 쿠루루가 함께 하려는 이유를 듣게 되었다.
‘브리안에 쿠루루까지 가면…… 굳이 내가 갈 필요 없지 않나…….’
“베르니체. 먼저 돌아가 있을래? 나는 우크라마트랑 같이 콜리브리 고기를 좀 발라내서 갈게.”
“응? 아, 응. 나는 먼저 텔레포로 돌아가 있을게. 당신들은 천천히 와.”
“아직도 생각이 많아 보이네. 그럼 그렇게 해. 휘틀로다이우스. 베르니체 좀 부탁할게. 먼저 가서 딕콘 씨에게 재료를 들고 갈 테니 요리를 부탁한다고도 말해주고.”
딕콘의 호의로 잡은 새를 요리한 저녁 식사는 푸짐했다. 휘틀로다이우스가 자신은 해야 할 일이 있어 따로 먹겠다며, 같이 할 사람들과 함께 먹겠다는 말과 함께 원형들의 식사를 챙겨갔음에도 호화로운 테이블을 보던 베르니체는 우크라마트가 힘을 합쳐 이뤄낸 첫 성과를 먹자며 고기를 한 입 먹으며 감탄해서야 고기 한 점을 가져가 나이프로 썰었다. 그러다가 음식을 살피던 에렌빌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뭐야, 이거……. 냄새가…… 매워…….”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솔직히 말하면 라자한에서 제로의 향신료로 만든 카레 냄새를 맡아본 적 있기에 무딜 뿐이지, 보통 매운 냄새가 아니었다. 혹시 모르니 조심하라고 말하려던 베르니체는 벌써 그것을 한 입 넣은 우크라마트의 털 덮인 얼굴이 새빨개진 듯한 착각에 눈을 깜빡이다가 그라하의 말에 작게 웃었다.
“아까 딕콘 씨한테 들었는데…… 라자한에서는 어떤 여성이 먹었던 것을 계기로, 지독하게 매운 음식이 유행한다고 하더라고. 거기서 샬레이안으로 돈 벌러 왔다가 이쪽에 정착한 사람들도 꽤 있잖아. 그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 비슷하게 만들어 봤대.”
“아, 그래서 이렇게 매운 거구나. 그래도 제로의 카레가 더 매운 것 같네. 괜찮아, 우크라마트?”
“매, 맵지 않아……. 이 정도는 하~~나도 안 매워!”
브리안의 물음에 답하는 것인지, 아니면 홀로 외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과 달리 고기를 입에 쑤셔 넣듯 먹는 우크라마트를 보고 있자니 에렌빌이 한숨을 내쉬었고, 곧 두 사람이 투덕거렸다.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보고 있자니, 그라하의 질문에서 시작된 에렌빌의 출신은 투랄 대륙에 대한 우크라마트의 설명으로 이어졌다. 그 설명을 듣던 베르니체는 고개를 기울였다.
“참가할 수 있는 왕위 계승자는 나까지 모두 4명. 각자 참가가 허용된 이유가 있긴 하지만, 사실 그중엔 왕위에 앉아선 안 되는 녀석도 있어.”
“그게 무슨……. 사리사욕이라도 있는 건가요?”
“아니. 오히려 야망이지. 갈레말 제국이 붕괴했다는 소식은 바다 건너 투랄 대륙까지 전해졌거든……. 그 녀석은 그걸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야 한다고 주장해.”
에렌빌의 보충 설명에 베르니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드디어 전쟁이 사라졌나 싶었더니, 또 생길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멍하니 에렌빌의 얼굴을 보고만 있으니 우크라마트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기껏 연왕이 모두를 한데 모아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었는데 영토를 확장하게 되면 또 전쟁이 일어나겠지.”
“……네가 여기로 온 이유를 알겠네. 너는 그걸 막고 싶은 거구나.”
“맞아. 난 그런 거 원하지 않아. 그러니까 어떻게든 '계승 의식'에서 승리해, 지금의 평화로운 툴라이욜라를 지켜낼 거야!”
브리안의 말에 우크라마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설명을 들으면 여러 종족이 어우러지는 만큼 여러 협력자를 구하는 것은 문제가 없으나…….
“그런데 왕을 결정하는 중요한 의식에 우리 같은 이국 사람이 참가해도 되는 거야?”
그라하의 말대로 베르니체를 비롯해 새벽의 혈맹은 ‘이국 사람’이라는 데 있었다. 브리안과 베르니체도 그 질문에 우크라마트를 보았고, 그는 명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그건 상관없어. 수많은 종족이 사는 투랄 대륙을 다스려야 하는 왕에게는 사람들을 통솔할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하거든. 그래서 이방인이든 누구든 자유롭게 협력자를 구하라고 연왕이 허용을……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어. 그래서 너를 만나러 온 거야. 에렌빌에게 들은 것보다 훨씬 더 실력자인 것도 마음에 들지만, 무엇보다 사냥을 같이 해보니 믿을 만한 녀석이란 걸 알았어. 그러니까 다시 한번 정식으로 부탁할게. 내가 툴라이욜라의 왕이 될 수 있도록 너희 힘을 빌려줘!”
베르니체는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평소라면 흔쾌히 허락했을 브리안도 팔짱을 낀 채 고민에 빠진 얼굴로 대답했다.
“네 의사는 충분히 알았어. 우리도 겨우 평화를 찾은 땅에 다시 전란의 바람이 부는 건 바라지 않아. 하지만, 지금 네가 준 정보에는 부족한 것이 많아. 다른 후보자들의 뜻이나 네가 평화를 어떤 방식으로 지킬지 등 말이야. 무엇보다 네가 말하는 평화의 형태가 어떤 것인지도 듣지 못했어. 물론 에렌빌의 소개이니 네가 위험한 녀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의 안전이 걸린 문제야. 쉽게 협력할 수 없어.”
“……왕이 될 그릇인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툴라이욜라의 미래에 거는 저 녀석의 마음은 진심이야. 받아들일지 말지는 천천히 생각하고 결정해 줘.”
“뭐, 바로 대답하기는 힘들겠지. 브리안의 말대로 내가 전부 말해준 건 아니니까. 하지만 툴라이욜라의 평화를 지키고 싶다는 것도, 그걸 위해 다른 왕위 계승자들을 이기려면 너희가 필요하다는 것도 사실이야. 의식에 늦지 않는 한, 얼마든지 기다릴게.”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에렌빌마저 그 의뢰를 받아줬으면 한다는 어조로 말하자 베르니체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생각의 정리가 조금 더 필요했다.
“어디 가, 베르니체?”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 생각이 정리되면 발데시온 분관으로 갈게. 식사 즐거웠어요.”
뒤에서 부르는 것조차 흘려 넘기고 길을 따라 걷고 있자니 누군가 어깨를 잡았다. 잡힌 어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던 베르니체는 볼이 찔리자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라벤더빛 사내가 서 있었다.
“후후, 아젬이 자주 하던 장난이야. 식사는 즐겁게 했어? 나는 무척 즐겁게 한 참이야. 엄청 매운 것도 있더라? 그래도 맛있었어!”
“식사가 즐거웠다니 다행이야. 나도 어느 정도 즐거웠어. 그런데 오히려 더 복잡해진 것 같아.”
“어라? 무슨 일 있는 거야?”
“……사색의 숲으로 가면서 이야기할까? 엘피스에서처럼 풀밭에 앉아 대화하고 싶어.”
기꺼이 걷겠다며 곁에서 그를 동행한 채 걷는 동안, 베르니체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옛사람들이 그러하듯 휘틀로다이우스 역시 이야기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렇게 풀벌레 소리만 들으며 사색의 숲 끝, 해안선과 맞닿은 절벽 위에 앉은 베르니체는 수많은 별을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이번 왕위 계승에 참여하는 후보자 중 영토 확장을 꿈꾸는 사람이 있대. 그런데 그 말을 듣고서도 막기 위해 협력하겠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아. 나는 투랄 대륙에 관해 하나도 알지 못해서일까……?”
“불완전하지만, 네가 꿈꾸는 이상향이지. 수인과 인간이 함께 어우러지며 살아가는 것 말이다.”
“에메트셀크.”
“들어오지 않고 다른 길로 빠지길래 심상치 않다 싶어서 와 봤어. 그런데, 역시나가 역시나군.”
기척도 없이 다가온 이는 베르니체의 곁에 털썩 앉았다. 셋이 나란히 있으니 옛날 생각 난다며 웃은 휘틀로다이우스가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말했다.
“모른다면, 직접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살아가는 일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그저 안개 속에서 헤매는 것 같지만 돌아보면 세계는 그만큼 찬란하게 빛난다고 아젬이 그랬어. 책에서 본 한 개의 단어에도 미지는 가득해. 게다가 에메트셀크가 숙제도 내줬잖아? 그래서 더 고민하는 거 아니야? 신대륙의 황금향. 너도 궁금하지?”
“……응.”
“그럼 뭘 망설여? 두 번 다시 없을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잖아. 정치? 그런 게 네 발목을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에메트셀크는 베르니체의 얼굴을 가면으로 가렸다. 앗, 하며 가면을 벗고 손에 들고 있으니, 그가 슬쩍 미소 지었다.
“너에게는 다른 녀석들이 볼 수 없는 협력자가 곁에 있잖아. 그 영감과 나, 그리고 엘리디부스에 휘틀로다이우스들까지. 뭐가 걱정이야.”
“베르니체, 여기에 있었구나.”
“에메트셀크랑 휘틀로다이우스도 있네.”
에메트셀크의 말에 답하려는 찰나 들려온 그라하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자, 대서원 방향에서 그라하와 브리안이 걸어오던 참이었다. 이곳에는 어쩐 일이냐 물으니, 에메트셀크도 있냐며 눈을 동그랗게 떴던 그라하가 아, 하고 대답했다.
“너도 그렇지만 브리안도 투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잖아. 그래서 조금이라도 정보를 찾아보러 왔어.”
“결국 이렇다 할 건 없었지만 말이지. 그 앞에서 르베유르 남매도 만났는데, 우리가 ‘계승 의식’에 협력을 요청받았다고 했더니 ‘휴가’를 알차게 보낼 방법이 떠올랐다면서 가더라.”
“그보다, 베르니체. 너는 우크라마트의 제안, 어떻게 하고 싶어? 받아들일 거야? 브리안은 현지에 가서 판단하겠다고 했거든.”
그 말에 브리안에게 시선을 돌리니, 브리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거짓은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어. 하지만, 그곳에서 보여지는 것은 꾸며낼 수 없지. 여태 그런 것처럼 직접 보고, 듣고, 생각하려는 것뿐이야. 확실하게 돕겠다는 건 아니라는 거지.”
“그렇구나. ……난 여전히 국가 문제와 관련 있는 건 싫어. 하지만, 가 보고 싶기도 하고. 그래서 망설이는 중이야.”
“그럴 거야.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곳도 아니고, 브리안처럼 도와도 될지 판단하기도 어렵겠지. 그렇다면 너도 일단 가 본 뒤에 결정하는 게 어때? 현지를 둘러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그러면 분명 그 답을 찾을 수 있겠지. 모험가란 그런 존재잖아. 아, 고마워, 휘틀로다이우스.”
천천히 걸어온 그라하는 휘틀로다이우스와 베르니체의 사이, 그러나 살짝 뒤에 자리 잡고 앉았다가 휘틀로다이우스가 옆으로 비켜 자리를 내주자, 그곳에 앉았다. 그가 고개를 까딱여 휘틀로다이우스에게 인사하고 붉은 눈에 검푸른 하늘을 담았다.
“툴라이욜라는 멀어. 대서원에도 이렇다 할 기록이 없을 만큼, 거의 미지의 나라지. 네가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할지…… 상상만으로도 나까지 설레는 느낌이야. 살아가는 것…… 그게 인간의 답이라면…… 넌 그 여정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까?”
“꼭 같이 안 갈 것처럼 말하네. 나는 네가 당연히 함께 갈 것 같았는데.”
“하하……. 아무튼, 그때까지는 그저 마음 가는 대로 걸으면 돼. 여행의 끝은 내일을 향한 한 걸음, 길은 계속될 테니까. 그렇지?”
시작한 것은 언젠가 끝나고, 또 다른 시작이 있다던 에메트셀크의 말을 떠올린 베르니체는 그의 말에 동감하며 끄덕였다. 그래.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밀어붙이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제 분관으로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서니, 그라하가 아고라에서 살 것이 있다며 먼저 가라는 말을 남기고 뛰어갔다.
모두가 대회의실에 모였을 때, 베르니체는 우크라마트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툴라이욜라의 왕녀. 그는 어떤 형태의 평화를 어떻게 지키고 싶어 하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가야 했다.
‘내가, 사람들이 지켜낸 평화를 지켜야 해. 이제 막 한 걸음 나아간 세계를 다시 전쟁 속에 떨어뜨릴 수 없어.’
그것은 영웅으로서의 결정이었다.
‘그리고, 내 세계를 더 넓히고 싶어.’
그것은 모험가로서의 결정이었다.
“얼굴을 보니…… 마음을 결정한 모양이네. 그럼 말해줘.”
우크라마트에게서 전해지는 긴장을 느낀 베르니체는 담담하던 표정에 미소를 걸었다. 그리고 답했다.
“모험가로서 그 의뢰를 받을게요.”
“역시!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기뻐하는 우크라마트를 보던 베르니체는 그가 말을 더 잇기 전 말을 덧붙였다. 그 전에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 말에 우크라마트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
“여기 있는 휘틀로다이우스를 비롯해, 제 동행자들이 곁에서 지켜보는 걸 허락해 주겠어요? 그들은 우리 일에 관여하지 않을 거고, 당신들 눈에 보이지도 않을 거예요.”
베르니체가 곁에 있는 휘틀로다이우스—원형과 그림자가 하나가 된 형태의 이를 바라보자 우크라마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휘틀로다이우스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휘틀로다이우스들의 목소리는 완벽히 하나가 되어있었다.
“휘틀로다이우스야. 늦었지만, 만나서 반가워.”
“아, 아까 그 망할 새가 도망가지 못하게 막아준 사람이구나! 함께 해준다면 더 좋겠지만, 좋아! 그 정도쯤은 얼마든지! 근데 다른 사람들은 누구고 왜 보이지 않는다는 거야?”
“평소에는 은신 마법으로 모습을 감추고 다니거든요. 저와의 약속이에요. 웬만해서는 방관자의 위치에 있겠다는 약속. 그래서 우크라마트 씨를 돕지 못해요.”
“잘 알겠어! 그럼 이야기로 돌아가자. 일단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보상은 투랄 대륙에서의 대모험이야!”
그리고 ‘계승 의식’에 참가하는 이들은 베르니체와 브리안, 쿠루루와 알피노, 알리제 그리고 가이드를 맡게 된 에렌빌이 되었다. 우크라마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갈레말드의 사람들이 다른 나라, 다른 종족과 화해하고 협력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계승 의식’을 돕고 싶다고 한 남매가 함께하고, 쿠루루가 마음껏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좇을 수 있도록 그 대신 그라하가 남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에렌빌은,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 황금향에 관한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듯했다.
베르니체는 지식신의 항구에서 오늘 하루 내내 나누었던 대화를 되짚다가 다른 이들과 돌아가지 않고 곁에 남은 에메트셀크를 보았다.
“그런데 아까 엘리디부스의 사명감을 비워야 한다고 했던 건 무슨 뜻이야? 엘리디부스한테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해주더라고.”
“말 그대로야. 여전히 세상을 되돌려야 한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 모양이더라고. 물론 우리한테 그러자고 하는 건 아니지만, 스스로 그런 충동을 느낀다고 했었어.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럴 이유가 없지.”
베르니체는 눈을 깜빡였다. 믿고 맡기겠다고 했음에도 남은 사명감을 자신이 어떻게 비워주어야 할까. 그 고민을 눈치챈 듯, 에메트셀크가 말을 이었다.
“엘리디부스는 우리 중에서도 가장 어렸고, 또 유연한 생각을 가진 녀석이었어. 그러니 네 곁에 있다 보면 조금씩 나아질 수도 있어서 말이야.”
“내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네가 아니면 안 될 거다. 너는 아젬과 닮았고, 엘리디부스는 아젬에게서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으니까. 나와 엘리디부스, 라하브레아 중 그나마 현 세상에도 어우러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엘리디부스를 꼽을 수 있을 만큼 녀석의 사랑법은 아젬과 비슷했거든.”
엘리디부스라는 좌에 있기에 직접 나서지 못했을 뿐이라며, 그는 언제든 아젬이 부른다면 도움이 되기 위해 어떤 무기와 마법이든 능숙히 다룰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했다는 말을 덧붙인 그는 바다를 보았다.
“그리고 아젬과 엘리디부스는 서로가 공석일 때 서로의 일을 처리할 수 있을 만큼 어떻게 보면 역할이 비슷했거든. 그러니 더욱 친했었지.”
“그런 적이 있어?”
“엘리디부스가 판데모니움에 가 있을 때. 평소에는 여느 시민들과 같은 검은 로브에 아젬만의 검은 가면을 쓰고 지내는 녀석이 흰 로브와 붉은 가면을 착용하고 나타났을 때는 제법 기분이 신선했지.”
좋은 기억을 떠올리듯 옅은 미소를 지은 그를 옆에서 보던 베르니체는 살며시 손을 잡았다. 바다를, 그 너머를 보는 듯하던 에메트셀크가 고개를 돌렸다.
“나중에 모두 다 같이 있을 때 그때 이야기 들려줄 수 있어?”
“뭐……. 안 될 건 없지.”
“고마워. 그럼 이제 돌아……. 어?”
에메트셀크와 잠깐의 대화를 나누고 아모로트로 돌아가려던 베르니체는 항구 방향에서 익숙한 검은 귀를 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끝이 은푸른색 털인 저 귀는 분명 자신이 아는 이의 것이었다. 에메트셀크에게는 나중에 돌아가겠다고 해두고 더 가까이 가 보니, 역시나 에렌빌이 있었다.
“에렌빌 씨!”
“여기는 어쩐 일이야? 림사 로민사에 가려고? 그럼 곧 배가 출항할 텐데.”
“아뇨, 저쪽에서 별 좀 보고 있었다가 당신이 보이길래요. 에렌빌 씨는요?”
“어쩌다 이렇게 됐나, 신세 한탄이나 하고 있었지. 왕녀님 고집은 못 말리거든.”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 이는 살짝 웃는 베르니체를 보며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확실히 안내해 줄게. 그러니 푹 쉬어 둬. 필요한 물건은 내가 조달할 테니, 댁은 마음의 준비만 하면 돼.”
“……조달이요? 준비가 아니라?”
“아차……. 미안, 습관이 돼서. 아무튼, 푹 쉬어 둬. 나중에는 쉬고 싶어도 못 쉴 거야.”
“아뇨. 당분간 쉬어도 쉬는 게 아닐 것 같으니 그 조달, 저도 도울게요. 얼떨결에 끌려가시는 건데, 그 정도는 도와야죠. 그리고 제가 직접 뭐라도 해야 여행이라는 느낌이 있을 것 같아서요.”
쉬지 못하고 위기에 맞섰던 시기들을 생각하면서도 즐거운 표정으로 답한 베르니체는 에렌빌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팔짱을 끼더니 말했다.
“당신, 이전에도 꽤 많은 일이 있었나 보군. 썩 좋은 일은 아니었나 보네. ‘새벽’ 소속이니 당연한 말인가? 기대하는 표정치고는 눈에 빛이 약하잖아.”
“네?”
그동안 누구에게도 속내를 들킨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의 말이 이해될 리 없었고,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자니 조달꾼 사내가 팔을 풀고 말했다.
“내 눈은 못 속여. 눈썰미 하나는 좋아서 말이지. 댁 사정이니 묻지는 않을게.”
“……고마워요. 그래서, 당신이 조달하려던 여행 물자 목록은요?”
“일단…… 적을 곳도 필요하니 라스트 스탠드로 가서 이야기하자. 괜찮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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