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14 드림

평행의 교차점

드림 두 개 시간선 합치기

실낙원 by 엘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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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엔 X 빛의 전사 드림글

적폐 다량 함유(공식 설정과 충돌함)

5.55 시점


세계를 이루는 것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가능성. 즉, 하나의 상황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능성이 존재하고,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보게 될 시간이 다르다는 뜻이다. 그녀와 그의 시간선이 갈리게 되는 것은 1만 2천 년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때는 세계가 갈라지기 이전, 재앙이 별을 뒤덮은 시대. 이리스는 사람들을 희생시켜 창조한 별의 의지를 먼 거리에서 바라보았다. 그것의 발치에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사랑했던 이들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이곳에서 ‘두’ ‘이리스’의 선택이 갈라지게 되었다.

 

‘그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어.’

‘내가 부족했던 탓이야. 내가 조금 더 빨랐어도…….’

 

하나는 증오를, 하나는 죄책감을. 그렇게 두 시간선이 갈라지게 되었다. 증오를 품은 자의 혼은 갈라져서도 아씨엔들에게 조금의 공감도 하지 못했다. 죄책감을 품은 자는 갈라져서도 그들을 이해했고, 소통하려 노력했다. 갈등의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 제7재해가 지나간 후의 ‘베르니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 진짜 짜증 나. 그놈의 아씨엔은 지긋지긋하지도 않나? 내가 여기에 오는 건 널 보려고 오는 거라고 몇 번을 말해야지 나한테 신경 쓰지 않을 건지. 라뭐시기는 내가 놈의 가면을 주웠던 건 녀석이 궁금증만 잔뜩 줘놓고 뒈져서 안 잊어버리려고 들고 다니다가 해결돼서 좀 측은한 마음에 여기다가 묻어주려고 갖고 왔더니, 뭐? 혼이 깃들어 있었다고? 미친 거 아냐?”

“오늘도 그 이야기구나, 친구. 그렇게 그 사람들이 싫어?”

“싫어! 난 내 혼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 그 녀석들하고 어떤 관계였는지는 관심이 요만큼도 없다고! 내가 그 시대를 기억하겠다는 건 희생해서라도 별과 사람을 살리려고 했고, 별의 기반을 만들며 살아갔던 이들에 대한 추모지, 희생시킨 녀석들을 위한 게 아니야!”

책상을 내리치며 일어섰던 베른이 문득 눈동자를 굴려 창밖을 보더니 자리에 주저앉듯 앉았다. 그를 바라보던 휘틀로다이우스도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 그 시선을 따라갔다가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유리에 비친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방 안의 풍경이 달랐다. 휘틀로다이우스가 있는 것은 똑같지만 그가 앉은 곳은 그의 책상이 아닌 접객용 테이블이고 주변에 검은 로브를 입은 두 사람과 하얀 로브를 입은 한 사람이 있었으며, 그들은 푸른 머리카락이 길게 내려온 여자를 두고 둘러앉듯 있었다.

“저, 저게 뭐야?”

“옛 풍경은 아닌 것 같은……. 베른?”

문득 앞에 있던 인기척이 사라져 다시 고개를 돌린 휘틀로다이우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텅 빈 의자였다. 푸른 눈을 휘둥그레 뜨고 둘러보던 휘틀로다이우스의 시야에 다시 창가가 들어왔다. 그 속에 ‘베른’이 있었다.


 

“……뭐야, 저건?”

“어라…….”

“얌전히 있거라, 베르니체.”

“……이게 가능할 리가…….”

“하, 씨발…….”

 

갑자기 돌연 휘틀로다이우스의 책상이 있는 곳에서 바람이 휘몰아쳤다. 베르니체가 그것을 보기도 전에 라하브레아가 잡아당겨 품에 가두고 뒤돌아보지도 못하게 머리를 감싼 탓에 영문을 알 수도 없었다. 다만 전혀 모르는 목소리가 하나 더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발소리 하나가 창문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더니 창문을 두드리고 다시 말했다. 그 말에 답한 것은 마치 멀리서 이야기하는 것 같은 휘틀로다이우스의 목소리였다.

“야, 히슬로디! 내 말 들려?”

“으응, 어떻게 들리긴 들리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알겠어?”

상당히 골치 아파하는 것 같은 목소리. 라하브레아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라하브레아가 놔주지 않았다. 팔에 바짝 힘이 들어간 것이 잔뜩 긴장한 것 같아 놔달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멀리서 들리는 휘틀로다이우스의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저기, 미안한데 우리 친구 좀 부탁할게. 이쪽에서 원인을 좀 찾아봐야 할 거 같아서.”

“뭐? 누구 멋대로?!”

“후후, 재미있는 일이 생겼는걸. ‘아젬’의 혼을 가진 친구, 당장은 방법이 없으니까, 우리랑 있자. 이름은?”

“베르니스……. 지만 베른이라고 부르면 돼. 잠깐만 자리 좀 비울 테니, 거기서 사이좋게 있어, 친구.”

“휘틀로다이우스! 야! 돌아와! 야!!!”

유리창을 손바닥으로 짚는 소리가 들렸다. 그보다, 휘틀로다이우스가 뭐라고 했지? ‘아젬’의 혼을 가졌다고? 심지어 그의 이름이 ‘베르니스’라고?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얌전히 안겨 있으니, 한숨을 푹 쉰 ‘베른’이라는 자에게서 스릉, 하고 서늘한 소리가 났다.

“너. 그 애한테서 손 놔. 일단 내 기분이 더럽거든?”

“불청객 주제에 당돌하군. 실례하겠다는 말을 해도 모자랄망정 검을 들이대?”

“그래서 어쩌라고? 한 번 이긴 것들을 두 번 이기는 게 힘들 것 같아? 백성석이 없다고 우스워 보여?”

에테르가 휘몰아치는 소리가 들린다. “하, 셋이 동시에 덤비시겠다?” 가소로워하는 듯한, 베른이라는 자의 목소리. 그리고 그것을 말리듯, 휘틀로다이우스가 말했다.

“저기, 환영 도시지만 일단 내 업무실이고……. 여기서 싸우다가 유리창이 깨지면 친구가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어. 그러니 진정하자.”

“……쳇.”

의외로 휘틀로다이우스의 말은 잘 듣는 모양이다. 피부로 느껴질 만큼 격양되었던 에테르들이 가라앉았다. 에메트셀크가 곁으로 다가오더니 라하브레아에게서 베르니체를 데려갔고, 곧 보지 못하게 하려는 듯 그녀를 끌어안고 머리를 감쌌다.

“그 여자한테서 손 떼라고! 내가 기분 나쁘니까!”

“이 녀석을 언제 봤다고 네 놈이 기분 나빠? 오히려 이쪽이 더 기분 나쁘다고. 그 혼의 농도는 둘이 될 수 없단 말이다.”

“네 말 따라 내가 ‘그릇’인데 어쩌라고?”

기세가 사나운 에메트셀크와 베른이라는 자 너머로 엘리디부스와 라하브레아, 휘틀로다이우스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들렸다. 그저 평범한 유리창이고, 방금까지도 평범했던 것이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인해 공간에 뒤틀림이 생긴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에메트셀크는 갑자기 나타난 이와 기 싸움을 하고, 세 사람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오직 소리로만 그것을 듣고 있자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이 들쯤, 세 사람의 대화가 멈추었다.

“……저건…….”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인가 했더니, 터무니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나. 그냥 거기서 살거라, 미친 사도여.”

“뭐? 돌아가면 네 놈부터 찢어버릴 줄 알아.”

“그러면 방법을 찾을 생각이 없어지는데 말이야? 지금 검 자루를 누가 잡고 있는지 모르겠어?”

멀리서 들리는 라하브레아와 에메트셀크의 목소리. 그러나 라하브레아와 에메트셀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라하브레아의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고, 에메트셀크는 지금 그녀를 끌어안고 있으니까.

“그쪽의 엘리디부스는 살아있는 건가? 아니면……. 흠. 저쪽의 미친개는 저 여자인가 보군.”

“……살아있진 않아. 상상은 자유에 맡기지. 그보다 미친개라니?”

“하는 짓이 미친개가 아니면 뭐야? 게다가 그 미친개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을 이유는 또 뭐람? 됐어, 같이 우리 쪽 미친개를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이나 찾아보자고.”

“저 새끼들이 듣자 듣자, 하니까?”

아무래도 저쪽의 라하브레아와 에메트셀크는 저쪽의 ‘이리스’의 혼을 가진 이와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앞에 있지 않은 것이 답답한지 한숨을 푹푹 내쉬던 베른이라는 자가 결국 소파로 걸어오는 듯했고, 에메트셀크는 그녀를 데리고 더 멀찍이 떨어졌다. 그것이 못마땅한지 베른이 말했다.

“야. 안 잡아먹어. 좀 놔 주지 그래?”

“뭘 믿고?”

“안 건드려, 안 건드린다고!”

“괜찮아, 에메트셀크. 놔 줘.”

잠시 답이 없던 에메트셀크가 곧 팔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베르니체는 천천히 방을 둘러보았다. 목소리만 들리던 이는 자신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다만 어딘가 독기를 품고 있다는 것 정도. 라하브레아와 엘리디부스, 휘틀로다이우스가 서 있는 창가 너머에는 늘 보이던 거리 대신 휘틀로다이우스의 방 풍경이 비치고 있었고, 그 너머는 이 방이 아니라는 것을 쉬이 알 수 있었다. 바로 곁에 서 있는 에메트셀크와 창문 앞에 서 있는 라하브레아는 장식 하나 없는 검은 로브를 입고 있으나, 창문에 비치는 에메트셀크와 라하브레아는 아씨엔 법의를 입고 있을 뿐 아니라 라하브레아 옆에 서 있는 엘리디부스도 비치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 모습까지도. 영문을 몰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으니, 방 안에 있는 라하브레아가 말했다.

“전에 이야기해 주었던 시간선에 관한 이야기를 기억하느냐?”

“기억하고 있어요. ……설마 창문 너머의 ‘방’은 지금 제가 있는 시간선과는 같은 흐름이지만 다른 상황인 건가요?”

“그래. 영리하구나. 어디서 갈라졌는지는 추측할 수 없지만, 꽤 많이 다른 상황인 것 같아.”

“……저 빛의 사도는 미친개가 아닌가 본데?”

창문 너머의 에메트셀크가 그 곁에 있는 라하브레아에게 말했다. 창문 너머의 ‘라하브레아’는 어깨를 으쓱일 뿐, 관심 없다는 태도로 방에 있는 라하브레아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이곳과 그곳의 시간선이 모종의 이유로 꼬이게 되었지. 휘틀로다이우스의 말을 들어 보니, 이쪽에서는 그냥 평소처럼 대화 중에 고개를 돌렸더니 그곳이 비치고, 그 미친개가 끌려갔다고 하던데. 특별한 일이라도 있었나?”

“유감이지만 이곳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어. 빛의 전사가 태평하게 풀어내는 일상이나 듣고 있었지.”

“그러면 마법적인 행동은 없었다는 거군. 좋아, 한 번 창문에 생긴 마력의 흐름을 그려봐야겠는데. 이봐, 협력해 줘야겠어.”

엘리디부스의 대답을 들은 너머의 ‘에메트셀크’가 방에 있는 에메트셀크를 보며 말했다. 에메트셀크가 그 말을 듣고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손가락으로 베른을 가리켰다. 그것은 삿대질에 가까웠다.

“너희가 미친개라고 부르는 녀석을 우리 쪽 녀석하고 두라고? 같은 혼의 그릇을 같이 뒀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안 건드린다니까!”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방으로 데려갈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내 도움이 필요하면 부르러 오도록 해, 에메트셀크.”

휘틀로다이우스가 아씨엔들과 두 계승자 사이를 가로막았다. 엘리디부스가 자신이 가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휘틀로다이우스는 미소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들에게 엘리디부스가 필요할지도 모르잖아. 보는 눈은 이미 세 쌍이나 있으니까 유일한 조정자가 함께하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이 친구는 너희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고. 가자, 친구들.”

“나중에 봐요, 모두.”

“흥.”

베르니체는 휘틀로다이우스를 따라 그의 방으로 가는 포탈에 올라섰다. 시야가 잠시 암전하고, 이내 그의 침실이 보인다. 깔끔히 정리된 침대로 익숙히 걸어가 풀썩 앉은 베르니체는 책상에 걸터앉은 베른을 슬쩍 쳐다보았다.

 

“저기…….”

“응?”

조금 전까지 아씨엔들에게는 온갖 날을 다 세우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그의 태도는 부드러웠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느낌. 이런 모습이라면 그녀와 닮았을지도 몰랐다. 베르니체는 몸의 긴장을 풀고 그에게 미소 지었다.

“넌……. 그 세계의 ‘베르니체’인 거지?”

“정확히는 베르니스지만, 아마 쓰는 법은 같을 거야. 베른이라고 불러. 난 널 베르니체라고 부르면 되나?”

“응. ……그 사람들하고는 사이가 나쁜 거야?”

“당연하지. 적대 관계인데. 아까 보니 넌 사이가 제법 좋던 모양인데 오히려 내가 묻고 싶다고.”

베르니체는 눈을 깜빡이며 못마땅한 표정의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친구’가 되고 싶어 하고, 원형들은–특히 엘리디부스가– ‘승자’와 ‘패자’로 관계에 선을 긋고 그녀의 여정이 끝나기를 기다리거나, 지켜보는 이들이었다. 물론 라하브레아와는 연인 관계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있나? 그렇게 한참을 대답하지 못하니 베른이 말했다.

“내가 여기에 오자마자 라하브레아는 곧바로 널 끌어안아서 감싸고, 엘리디부스랑 에메트셀크는 네 앞을 막아섰어. 꼭 보호하려는 것처럼. 그런데 왜 답을 망설이는 건데?”

“……응, 친해. 하지만 엘리디부스는 날 썩 좋아하지 않거든. 에메트셀크는……. 귀찮아하긴 하지만 늘 날 도와주고. 그렇지만 늘 내게 자신들이 다른 생각을 품게 될 수도 있으니 경계하라고 해주는 이들인걸. ……호시탐탐 날 이 도시에 붙잡고도 싶어 하고.”

“사이가 좋긴 좋은데 마냥 좋은 관계는 아니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와 생각에 잠긴 그를 보던 휘틀로다이우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나는 것을 보아하니, 궁금한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베른 친구는 그 혼의 주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

“……그런 질문은 대답하기 모호해. 명확히 물어봐.”

“그러면 그 사람은……. 위원회를 어떻게 생각해?”

“히슬로디의 말대로라면, 위원회를 이해하거나 용서하지 못했던 모양이더군. ……딱 한 번이지만, 아젬의 크리스탈을 받았을 때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한 말을 생각하면 여전히 그럴 거야. 그때보다는 누그러졌을지도 모르고.”

위원회를 적대한다는 사실은 두 사람의 갈라짐이 고대의 재앙이 닥친 시기라는 것을 의미했다. 아주 까마득하게 먼 과거다. 베르니체가 그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휘틀로다이우스가 물었다.

“뭐라고 했길래?”

“……‘난 여전히 그 사람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어. 용서할 생각도 없어. 하지만, 엘리디부스의 목적 없는 여행을 내버려 두고 싶은 생각도 없어. 그 사람을 멈춰줘.’였나.”

“베르니체는?”

“엘리디부스를 멈추고 집착과 집념, 슬픔으로부터 해방해 달라고 했었어. 그전에도 꿈에서 가끔 만났고……. 미안해하고 있었어. 위원회 사람들에게.”

베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갈등은 그저 견해의 차이였고, 그들의 선택으로 인해 수없이 많은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다. 세계가 갈라진 후로는 그들로 인해 셀 수 없는 이들이 죽었다. 그런데 그들을 이해하고 미안해한다고?

방에는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휘틀로다이우스도 생각에 잠겨 별말을 꺼내지도 않고, 두 계승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베르니체가 먼저 특별히 할 것도 없으니 잠이라도 자자며 권했고, 베른은 소파에서 자겠다며 손을 대충 휘젓고 소파로 걸어가 몸을 누였다.

“같이 침대에서 자. 넓어.”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면 에 뭐시기랑 라 어쩌고가 날 죽일 것 같았는데 굳이? 자는 사이에 습격당하는 취미 없어. 너나 편하게 자.”

좌의 이름마저 제대로 불러주지 않는 것을 보니, 정말로 깊은 골이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돌아가더라도 나아질 일은 없겠지. 쓰게 웃고서 등을 돌린 채 잠든 그를 바라보던 베르니체는 휘틀로다이우스의 품에 안겨 잠을 청했다.

그 일이 있던 후로 며칠이 지났지만 이렇다 할 해답이 나오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원형들과 휘틀로다이우스들의 눈은 더없이 빛났고, 생기가 넘쳤다. 뭍에서의 일상을 마치고 바구니를 든 채 아모로트로 돌아온 베르니체를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맞이한 것은 베른이었다.

“어서 와. 뭘 가져온 거야?”

“차랑 커피 쿠키. 다들 고생하고 있으니까 좀 쉬엄쉬엄했으면 해서. ……네 세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주지 못하는 게 아쉽다.”

“……난 진짜 네가 이해 안 가.”

그냥 견해의 차이일 뿐이지. 베르니체가 작게 웃고선 네 사람을 불렀다. 유리창 앞에 서서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던 이들이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머의 휘틀로다이우스는 자리를 비운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이거 먹으면서 잠깐 쉬어요. 그쪽은……. 미안해요. 가져다줄 방법이 없어서.”

“됐어. 어차피 안 먹어도 상관없는 몸이니까. 그럼, 잠깐 자고 올 테니 시작할 때 부르라고.”

“나도 잠시 자리를 비우지. 거기서 민폐 끼치지 말고 있어라, 미친개.”

“엿 먹어.”

건너의 두 사람이 방을 나가고 난 뒤에야 휘틀로다이우스가 바구니를 열어보았다. 갓 구워온 쿠키들이 가지런히 담겨 있고, 찻잎이 담긴 병과 찻주전자, 찻잔이 얌전히 들어있다. 향이 좋다며 들뜬 목소리로 쿠키를 집어 든 휘틀로다이우스가 가장 먼저 엘리디부스에게 그것을 권했고, 베르니체는 잔을 채웠다. 어쩐지 슬쩍 미소를 지은 것 같은 그를 보며, 베른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너네도 참 태평하다. 준다고 넙죽 받아먹고.”

“너도 알잖아? 이 녀석은 자기가 음식으로 당해서 음식에는 장난 안 쳐.”

“그건……. 아, 고마워, 히슬로디.”

꺼림칙한 표정으로 쿠키를 보던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입에 넣었다. 처음에는 조금 힘들어하는 듯 꾸역꾸역 씹던 이는 곧 표정이 편해지며 하나 더 집어 갔다.

“맛있네. 다른 사람이 해주는 걸 먹는 게 얼마 만인지…….”

“많이 먹어. 더 먹고 싶으면 가져다줄게.”

“어, 고마워. ……근데 왔을 때부터 궁금했는데, 왜 여기 라하브레아는 모습이 다른 거야?”

베른의 물음에 서로 대화를 나누던 이들이나 어디에도 시선을 두지 않았던 이도 그를 보았다. 갑자기 이상해진 분위기에 물어보면 안 될 것이었나, 하는 고민을 하던 그는 뻔뻔해지기로 결심했다.

“아니, 우리 쪽 라 어쩌고랑 모습이 달라서. 혹시 아직 기억 못 해?”

“혼이 완전하지 않아서인지 기억도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리더군. 하지만 외형이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 그냥 마지막으로 썼던 몸의 외형을 쓰고 있다.”

“혼이? ……너 혹시 신룡 죽이고 나서 눈 안 부순 거야?”

“……눈? 소환에 사용된 니드호그의……?”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달리 베르니체는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신룡과 함께 소멸했을 줄 알았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베른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건 일종의 보관함이야. 그런 게 쉽게 사라질 리 없잖아. ……여기도 에스티니앙 있지? 한 번 물어봐. 우리 쪽 에스티니앙이 그걸 찾으려다가 못 찾아서 나한테 물어본 적이 있었거든. 당연히 내가 부순 이후이니 찾지 못한 거고.”

“베르니체. 혹시나 하여 말한다만, 그가 찾지 못했다 해서 낙심하지 말거라. 혼의 일부 정도는 없어도 문제없어.”

“그래도 온전하게 돌아가게 해주고 싶단 말이에요…….”

시무룩해진 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은 라하브레아가 찻잔을 들고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잊고 있었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린 탓일지 걱정한 베르니체가 테이블에 올려진 손을 잡으니, 그가 다정한 미소를 짓고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 모습을 보고 베른이 진저리 치며 팔을 벅벅 긁었다.

“으……. 진짜 며칠 내내 봤는데도 소름 끼쳐서 못 버티겠네……. 너네는 대체 저걸 어떻게 견디는 거야?”

“견디긴, 티 안 내는 거야.”

“……라하브레아가 저자를 아끼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바로잡을 수도 없을 것 같아서 방치 중이다. 당장은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나는 보기 좋은걸. 저렇게 행복해하는데.”

베른이 질색할 때부터 급히 손을 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구는 라하브레아와 베르니체를 보며 휘틀로다이우스가 웃었다. 빨갛게 익은 얼굴로 애써 태평하게 쿠키를 집어 먹는 베르니체를 보던 베른이 피식 웃고는 찻잔을 들고 말했다.

“뭐, 잘 지내면 됐지. 지금은 딱히 세계 통합의 의지도 없다며.”

“일단은.”

“하지만 녀석이 미흡하다면 언제고 다시 시도할 거다.”

라하브레아와 엘리디부스의 단호한 말에 베르니체가 태평하게 웃으니, 베른과 엘리디부스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며칠.

베르니체가 휘틀로다이우스의 방에 들어갔을 때, 방 안과 창문 너머를 통틀어 자리를 지키는 사람은 너머의 라하브레아뿐이었다. 주변에 떠오른 술식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훑던 그가 베르니체를 보고 손을 내리자, 그 술식들이 바닥에 널린 종이들로 제각각 스며들었다.

“다른 사람들은요?”

“쉬러 갔다. 그쪽의 나도 마찬가지고.”

“그 사람이? ……당신은 안 쉬는 건가요?”

“쉬다 막 돌아온 참이지.”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하니 믿기로 한 베르니체는 창문으로 걸어가 앞에 섰다. 여전히 거리를 둔 그의 가면 아래로 무심한 붉은 눈이 빛나고, 피부색도 구릿빛에 잘 정돈된 하얀 수염까지 있었다. 라하브레아가 후드를 뒤집어써도 틈으로 흘러나올 만큼 긴 금빛 머리카락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안쪽으로 하얀 머리카락이 살짝 보이고 있었다.

‘키도 훨씬 큰데…….’

“……당신은 당신의 본모습을 쓰고 있는 건가요?”

“그래. 그곳의 나는 마지막으로 빼앗아 사용한 몸을 쓰는 모양이더군.”

“본래 모습이 아직은 기억나지 않나 봐요. 당신의 혼은 온전한 거죠?”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 미친개 덕분이지. 그쪽의 나는 불완전하다지?”

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베르니체는 베른의 말을 떠올렸다. 신룡을 쓰러뜨린 후 눈을 찾아 그 자리에서 파괴했었다고. 당연히 함께 사라졌으리라 여기고 떠났는데 눈이 남아 있었다니. 베른에게 듣고서야 찾아보고 에스티니앙에게도 물어보았을 때, 그녀의 세계에서 그 눈은 이미 에스티니앙이 파괴한 후였다. 그래서 결국 그녀의 라하브레아는 혼이 불완전하게 되었지. 베르니체가 유리창 앞 바닥에 앉자, 아씨엔 라하브레아가 그녀를 보다가 천천히 걸어와 앞에 앉았다. 확실히 그의 키는 가까운 상태에서는 고개가 조금만 더 젖히면 꺾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훨씬 컸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무엇이 궁금하지?”

“……당신은 여전히 사명을 내려놓지 못했나요?”

“이렇게 살아난 이상,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어서 말이지. 하지만 힘이 온전히 돌아오지도 않았고, 그 미친개가 살아있는 한 귀찮을 것 같아서 일단은 가만히 있지.”

아씨엔 라하브레아는 생각만 해도 짜증 난다는 듯 가면 아래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을 보고 베르니체가 입을 가린 채 웃으니,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이유를 물었다. 베르니체는 웃음을 누르고 대답했다.

“베른도 그렇고, 당신과 그쪽의 에메트셀크도 그렇고…… 서로를 정말 미워하는군요.”

“당연한 일이지. 너는 내가 증오스럽지 않나?”

“네. 오히려 이곳의 당신이 아씨엔일 때의 모습을 엿볼 수 있어서 더 좋은걸요. 무례가 아니라면 가면을 벗어 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요. ……그리고 이곳의 아젬은 누구의 탓도 하지 않으니까, 제가 물려받을 증오도 없어요. 물론 해온 일들에 관해서는 너무 증오스러워요. 그래도 그걸 따져봤자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고, 저는 그들이 죽인 생명만큼 많은 이들을 살리려 애쓰고 있어요.”

베르니체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유리창에 손을 댔다. 손바닥에 닿는 촉감은 평범한 유리창 그 자체여서 얼핏 그와 유리 벽을 사이에 두고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너머의 라하브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마주 대듯 유리에 손을 댔다. 베르니체는 그대로 그를, 유리를 바라보다가 손에 힘을 주어 밀어보았지만, 그저 평범한 유리창이었다.

“……역시 안 되네요.”

“되었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었겠지.”

떨어지는 손을 보며 마치 움켜쥐듯 유리창을 긁었던 베르니체는 등 뒤에서 누군가가 끌어안자, 손을 떼고 돌아보았다. 라하브레아가 그곳에서 유리창 너머와 자신을 번갈아 보고 물었다.

“단둘이서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나.”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질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 궁금했지만, 굳이 그에게 불안을 주고 싶지 않았다. 베르니체는 그에게 안긴 그대로 그의 팔을 안은 채 답의 절반을 건넸다.

“아젬에 대해서요. 그리고 베른에 대해서도.”

“그렇군.”

너머의 아씨엔을 흘겨본 라하브레아가 베르니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리자, 바닥에서 불씨로 쓰인 수많은 술식이 떠올라 유리창에 펼쳐졌다. 그러자 너머의 그 역시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가 가라앉혔던 술식을 다시 떠올려 주위에 펼쳤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라하브레아가 대답했다.

“당시의 현상을 재현할 수 없어서 차원 간 문을 여는 마법과 전송 마법을 동시에 사용해 보기로 했다. 한쪽에서는 열고 한쪽에서는 보낸다면 일시적으로 길이 열릴지도 몰라. 그러면 이 일은 막바지에 들어가는 거지.”

“마침 잘 됐군. 여기 있는 김에 네가 실험체가 돼줬으면 하는데.”

“……실험은 환영을 창조해서 진행할 것이다. 베르니체, 저리 가서 앉아 있거라.”

너머의 라하브레아가 한 말에 그녀를 끌어안고 있던 라하브레아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서늘한 목소리로 말하며 소파 쪽으로 등을 밀었다. 그 모습을 보고 너머의 그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같은 에테르를 가진 자만큼 실험 성공률이 높은 것은 없는데 왜 그러는 거지?”

“실패하면 어디로 가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에 베르니체의 도움을 청할 수는 없다. 위험 부담이 높아.”

“그렇게 되면 너희들 또한 이득 아니겠나. 성가신 빛의 전사가 사라지면 세계 통합을 다시 진행해도 크게 걸릴 것이 없으니.”

“닥쳐.”

라하브레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짐승이 으르렁대는 듯도 했다. 처음 보는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고 있는 것도 모르는지 그가 여전히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베르니체에게 털끝 하나라도 상할 요구는 하지 마라. 그녀에게 해가 있다면 내 너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

“하하, 넘어올 방법은 있으신가? 게다가 기억도 불완전하고 혼도 불완전한 네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너나 나나 그런 표정을 자주 보았지. 주로 사랑하는 자를 눈앞에서 잃은 자들의 얼굴이었어. 참으로 신기하군. 그를 사랑하기라도 하는 건가? 세계 통합의 걸림돌을? 정말 잃게 되었을 때의 표정이 궁금하군.”

“……베르니체. 앞으로 이 방이 비어있을 때는 들어오지 마라. 저자가 무슨 감언이설로 너를 끌어들일지 몰라. 너는 내게 무르니, 저 자에게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

너머의 자신을 사납게 노려보던 그가 고개를 돌려 베르니체를 보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아무 생각 없이 도와주겠다고 하려던 것을 라하브레아에게 제지당했고, 라하브레아가 화를 내고 있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를 말리고 돕겠다고 했을 테니까. 당황한 채 고개를 끄덕이니 그제야 고개를 다시 돌린 그가 너머의 라하브레아를 사납게 노려보다가 환영체를 만들려고 하는 듯하더니, 베르니체를 보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저자의 말도 틀리지 않으니, 네 에테르를 빌려다오.”

“네.”

뻗은 손 위로 손을 얹고 에테르를 그의 손에 맺히게 하자 그의 불꽃과 섞이며 부드러운 오색 빛의 새가 탄생했다. 그것을 본 너머의 라하브레아가 침음했다.

“그 새는…….”

“그 혼의 계승자를 미친개 취급하기에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가 보군. 그 아이를 빼닮은 베르니체는 고민도 없이 이용하려 하더니, 정작 그 아이와 관련된 것은 이용하기 꺼림칙하던가?”

“기억은 너보다 온전하겠지. 그 아이와 관련된 것이라서가 아니다. ……에테르가 부족할 것을 염려하는 것이지.”

“변명 한번 그럴싸하군. 믿어주도록 하지. 아무리 그래도 베르니체가 직접 가는 것보다 나아.”

혀를 찬 아씨엔 라하브레아의 손끝에서 술식이 빛을 발했고, 그와 동시에 라하브레아의 손끝에서도 마력이 불처럼 피어올랐다.

마력은 이내 빛이 되어 창문에 빛으로 스며들었다. 마치 창문이 수면이 된 듯 비치는 풍경이 흔들리고, 라하브레아가 만들어 낸 새가 지저귀고는 그 너머로 가나 싶더니 튕겨 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라하브레아가 조심스레 그것을 양손으로 떠내듯 안았다.

“……받아들이는 쪽의 문제인가. 아니면 보내는 쪽의 문제인가…….”

“그쪽에서도 문을 열고 이쪽에서도 소환해 보지.”

그렇다면 수식을 다시 세워야 하니 시간이 걸리겠다고 생각해 잠깐 쉬라고 하려던 베르니체는 입을 다물었다. 창문에 걸린 마법을 해제한 두 라하브레아는 다른 술식을 자아내는 일에 망설임이 없었다. 마치 언제든 술식을 덧붙이기만 하면 새로운 마법으로 탄생시킬 수 있도록 짜둔 마법을 사용하는 듯도 했다.

불씨가 모여 마법이 되고, 마법은 창문에 스며들어 다시 파동을 일으켰다. 라하브레아의 손에 있던 새가 다시 날개를 펴고 창문으로 날아가더니,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나 건너편의 휘틀로다이우스의 사무실을 날아다니더니 도로 창문으로 날아왔다.

그러나 그것이 돌아오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그것이 라하브레아의 어깨에 내려앉았다가 빛이 되어 사라졌다.

“……같은 공간에 같은 시간이라 해도 차원을 넘는 것처럼 시간이 걸리는가. 자칫하면 길을 잃기 좋겠군.”

“에테르의 양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실험을 계속 진행해야겠군. 미친개가 필요할 것 같으니, 휴식이 끝나면 함께 데려오라고 해라.”

그 이후의 진행은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에테르의 한계로 베르니체도 그것을 도울 때가 많았고 새는 곧 사람의 형태까지 되어 건너편에 다녀왔다. 베른이 다량의 에테르를 소모하고 잠시 쉬러 간 사이 에테르 덩어리라면 넘나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이들은 다음 고민에 빠졌다.

“과연 물질도 통과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야. 엘리디부스가 알고 있는 시공간 초월 마법을 응용한 것이라 하지만 말이지.”

“시체라도 하나 구해와서 실험해 볼까?”

“갓 죽은 시체 구하는 것도 일이야. 그렇다고 살아있는 사람을 실험체로 쓰는 것은 여기 있는 빛의 전사들이 허락할 리도 없고…… 무엇보다 가고 싶다고 집중하지 않으면 길을 잃겠지.”

“그럼, 제가 한번 해볼게요.”

베르니체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물론, 창문 너머에 있는 이들도 베르니체를 보았다. 집중이 흐트러지는 순간 길을 잃는다고 하는 것을 못 들었느냐는 라하브레아의 말에도 베르니체는 망설임이 없었다.

“가고 싶다는 바람이 강해야 한다면서요? 그러면…… 베른만큼이나 제 바람도 강하다고 생각해요.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저들을 직접 만나 보고 싶어요.”

“……그렇군.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라 통보로구나.”

“네. 안 된다고 하면 그냥 뛰어들 거예요.”

“우리가 저놈의 무모한 모험심을 잊었군……. 그냥 허락해 줘, 라하브레아. 그냥 뛰어들었다가 사고 나는 것보다 나아. 무슨 일이 생겼다 싶으면 아젬의 소환 마법으로 불러오면 될 테니까.”

라하브레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베르니체는 아젬의 크리스탈을 에메트셀크에게 맡기고 과감히 발을 내딛었다.

시간선을 넘는 것은 차원을 넘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 하여 차원을 넘을 때처럼 기억이 들려오는 것도 아니라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빛이 있기에, 베르니체는 그 빛을 향해 가고 싶다는 생각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곳에 있는 풍경을 보고 싶었다.

그러자 그 마음을 알아주듯 빛 또한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그 빛에 눈이 부셔 눈을 질끈 감고 있으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됐다! 응, 겉으로는 상한 곳 없이 성공이야!”

눈을 조심스레 뜨자 눈앞에 히슬로디가 있었다. 그러나 베르니체가 있던 곳의 그는 분명 머리를 묶고 있었고 눈앞에 있는 이는 머리를 풀고 있는 것을 보니, 그가 베른의 시간선에 존재하는 히슬로디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베르니체는 그를 빤히 보다가 어떤 말이라도 해보겠냐는 그의 말에 한참을 생각하다가 빙긋 웃었다.

“반가워요, 히슬로디.”

“좋아, 목소리도 멀쩡하고……. 어서 와, 또 다른 베르니체. 이곳에 온 소감은 어때? 기억이 안 나는 게 있거나 아프지는 않고?”

“음~ 제가 있던 곳처럼 편안하다? 꿈결에 바뀌어도 모를 것 같은걸요. 분명히 같은 세계일 텐데, 왠지 새로운 곳에 온 것 같아서 두근거리기도 하고. 기억상실이나 통증은 잘 모르겠어요.”

가장 먼저 원래의 히슬로디와 하듯 베른의 히슬로디와 장난스러운 말을 주고받았던 베르니체는 몸을 돌려 아씨엔 에메트셀크를 보았다. 그가 가면 아래의 금빛 눈으로 베르니체를 뚫어져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보니…… 정말 아젬이랑 똑같이 생겼네.”

“자주 들어요. 그 말.”

아씨엔 에메트셀크에게 웃으며 대답했던 베르니체는 곁에 서 있는 아씨엔 라하브레아를 보았다. 아씨엔 라하브레아도 특별한 말을 하지는 않았다. 붉은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을 뿐. 베르니체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 턱에 자란 수염을, 피부의 주름을 손끝으로 느끼다가 가면에 닿자 잠시 망설이고는 손을 떼었다.

그 행동을 가면을 벗어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던지, 아씨엔 라하브레아가 가면에 손을 올렸다가 그녀가 손목을 잡아 제지하자 도로 내렸다.

“궁금한 건 맞지만 괜찮아요. 직접 보여주는 날을 기다리려고요.”

“……이곳에 있을 생각은 없나. 저자보다 내가 더 깊이 사랑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네가 바라는 모든 것을 네 손에 쥐어줄 수도 있다. 부귀영화는 말할 것도 없지.”

“조금 설레는 말이네요. 하지만, 미안해요. 저는 저 사람이 아니면 안 돼요. 아무리 당신도 그 사람이라 한들, 제가 사랑하게 된 이는 아닌걸요. ……몸 좀 숙여줄래요?”

베르니체는 어색하게 몸을 숙인 아씨엔 라하브레아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가 그의 품에서 벗어나 아씨엔 에메트셀크와 휘틀로다이우스의 그림자의 볼에도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다시 창문 앞에 서서 가볍게 손을 흔들어 작별한 후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창문에 뛰어들었고, 짧지 않은 시간을 지나 돌아가기 무섭게 라하브레아가 끌어당겨 베르니체를 품에 가두었다. 그러고는 마치 너머의 그들에게 보란 듯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깨문 그가 입을 떼며 말했다.

“오가는 것이 문제없다는 걸 알았으니, 너희들의 미친개를 데려오도록 하지. 기다려라.”

“라하브레아. 잠깐만요. ……저들에게 주고 싶은 게 있어요. 오래 안 걸릴 거예요. 그러니 이건 가려주겠어요? 왜 갑자기 심술을 부려선.”

“……그래. 그러면 그동안 데려오기라도 하마.”

영 불만스러워하는 이에게 장난스레 투덜대자, 라하브레아의 손끝에서 피어난 불씨가 목덜미에 내려앉아 잇자국을 가렸다. 베르니체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원래 납품을 위해 구워두었던 쿠키지만, 그중 일부를 푸른 선물용 상자에 넉넉히 옮겨 담고 하늘색 리본으로 묶은 베르니체는 다시 휘틀로다이우스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베른과 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베른, 가면 또 못 만나겠지?”

“뭐, 그렇지. 너 아씨엔들 너무 믿지 마라.”

“걱정하지 마. 이 사람들은 내게 해가 되지 않을 테니까. 이거 내가 구운 쿠키야. 그 사람들하고 같이 먹어. 즐거웠어. ……그 세계를 잘 부탁해.”

베른은 베르니체가 건네는 상자를 받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깐의 시간이지만, 아씨엔들을 향한 애정이 가짜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게 되었다. 잠시 고민하던 베른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주머니를 뒤졌다. 주머니 안에서 꺼낸 것은 크리스탈이었다. 그 모양은 위원회의 크리스탈과 같았지만, 아무 문양도 없었다.

“심심할 때마다 내 에테르를 채운 거야. 만약 도움이 필요하면, 뭐……. 그거랑 아젬 크리스탈이랑 같이 써 봐. 혹시 모르니까. 아젬 크리스탈로 부르면 문제가 해결됐을 때 돌아가는 길도 열리니까 이런 짓 두 번은 안 해도 될 거고.”

“응. 고마워.”

베르니체에게 미소 지었던 그가 몸을 돌려 창문을 향해 걸었다. 그가 가까워지자 마치 수면이 흔들리듯 창문이 떨렸고, 베른은 망설임 없이 그곳을 향해 걸었다. 그가 있어야 할 세계가 그를 반겼다.

히슬로디가 누군가를 향해 잘 있으라는 인사를 건네자, 에메트셀크가 손가락을 튕겼다. 창문에 걸린 마법이 풀린 후 평소처럼 아모로트의 풍경이 그를 반겼다. 왠지 모를 아쉬움에 묵묵히 거리를 보던 베른은 그를 보는 두 아씨엔과 그림자들을 지나쳐 테이블에 베르니체가 주었던 상자를 내려두고 에메트셀크를 보았다.

“야. 나중에 먹고 일단 나랑 가자.”

“뭐? 오자마자 어디를 가는 건데?”

 “떨어져 혼자가 된 별을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릴 거야. 당장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긴 시간을 함께했던 성좌들과는 당분간 함께 할 수 있겠지.”

 

그날, 크리스탈 타워의 꼭대기에서 태양의 조각이 땅꾼의 달을 푸른 탑에서부터 떠오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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