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듀밸리/세바스찬 드림] 어느 아침
포타 업로드 백업 / 제 농장주 이름이 티아입니다...
세바스찬이 눈 뜨는 시간은 항상 이른 아침이었다. 새벽녘 동이 어슴푸레하게 터오는 시간. 하지만 아주 가끔은 그것보다 일렀다. 어떤 시간이든 눈을 뜨면 그녀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았다. 안녕, 티아. 잠든 그녀가 고르게 호흡을 내쉴 때마다 연한 푸른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그녀가 깨어나는 일이 없도록 이불이 흐트러지지 않게 주의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빠져나간 곳을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침실에 있는 창문으로,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게 보였다.
그가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커피를 내리는 것. 가끔은 그녀 몫까지 내렸지만, 오늘까지 이른 날은 예외였다. 지금 내리면 그녀가 깨어났을 때 쯤엔 향이 다 날아간다. 그는 제몫의 머그잔을 만지작거리며 오늘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기왕 일찍 일어났으니, 일을 시작하기 전에 농장에 물을 주자. 그럼 그녀가 아주 좋아하겠지. 얼굴 가득 미소를 띤 모습을 상상하자 가슴 한 쪽이 뻐근해졌다.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시간을 확인하자 벌써 시침이 숫자 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운동화 밑창으로 밟히는 흙은 부드러웠다. 새벽 이슬이 내려앉은 탓이었다. 하지만 겉만 축축한 거라, 물을 주지 않으면 당장 내일모레 식물이 말랐다. 그는 물뿌리개로 흙을 흠뻑 적시고, 대가 올라오는 고추나 완두콩 같은 식물들을 지지대에 단단히 묶고, 티아가 수확하기 전 버려야 하는 것들을 솎아냈다. 모든 일이 끝나면 어느덧 하늘이 밝아져 있었다. 모든 걸 마친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 문간에 섰다. 곧있으면 티아가 잠에서 깨어나 이리저리 돌아다닐 것이다. 자신을 찾는다고 부엌과 작업실, 2층의 방 두 개와 지하실까지 돌아다니겠지. 문간에 서서 귀를 기울이면 아주 가끔씩 그녀가 달음박질치는 소리와 제 이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세바스찬! 그리고 마침내가 그가 집에 없다는 걸 깨달으면, 잔뜩 상기된 얼굴로 현관문을 열고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 있었구나. 그 한 마디를 들으면 비로소 마당이 밝아졌다.
붉게 달아오른 뺨과 한껏 휘어진 눈을 상상하니 갈증이 일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가, 아차하는 심정에 손을 내려놓았다. 더이상 주머니에는 지포라이터도, 담배도 없었다. 결혼하면서 끊었으니까. 순전히 티아가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살아오면서 그는 자신이 사랑 때문에 바뀔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드미트리가 그랬던 것처럼. 노력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책까지 샀건만, 결국 그 또한 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았나. 펠리컨은 골짜기에 자리잡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간혹 외지인들이 찾아오긴 했지만 그에게 의미있던 사람은 없었다. 가족처럼 함께 자란 사람들과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하고, 평생 살아왔던 마을에 정착해서 다시 아이를 낳는다. 얼마나 지루한 삶인가. 다들 아는 얼굴이었고, 얼마 안되는 외지인들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그는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는 건 자신의 위치를 돌아볼 필요가 없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이가 어릴 수록 쉬웠고, 어린 시절 그에게는 '첫눈'이라고 말할 만큼 낯선 사람이 없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봤던 사람들에게 첫눈에 반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나이가 들고,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끼고, 고립된 마음 속에 풀내음이나 폭포 소리 대신 환하게 빛나는 불야성을 품었을 때엔 이제 사랑 자체도 덧없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 저 밤에도 꺼지지 않는 불빛에 있다고 믿었다. 어쩌면 맞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거기에 있었으니까. 지금은 제 곁에 있는 그녀가.
바다에서 비를 맞으며 그는 제 사랑을 자각했다. 그는 비오는 날 바다 보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들이 다돌아가서 혼자 남은 적막. 장대비 소리와 파도소리는 닮은 부분이 있었다. 눈물은 덧없지만 뺨에 물방울이 흐르는 건 좋았고, 장대비가 바다에 떨어지는 순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녹아드는 게 좋았다. 바다에 사는 것들은 비라는 걸 모르겠지. 비를 맞으면서 늘 그런 생각을 했다. 혼자만의 안식처에 그녀가 말을 걸었을 때는 다소 놀랐지만, 그녀가 곁에 있음에도 불편하지 않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비를 맞는 게 익숙한 그와 다르게 그녀의 입술은 파랗게 질려있었다. 그 모습이 빗방울처럼 그의 심장을 때렸다.
아, 바다 속에서도 비가 온다는 걸 알겠구나. 첫 감상은 그랬다.
그녀는 그가 그렇게 애타게 그렸던 도시 출신이었다. 도시에 대해 말을 할 떄마다 그녀는 미간을 모으고 입술을 오리처럼 내밀었다. 본인이 그런 표정을 짓는지 깨닫지도 못한 채로. 그녀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평생을 스타듀밸리에서 살아온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이었다. 그녀는 도시에 대해 말하는 걸 꺼려했다. 하지만 도시에 가고 싶어했던 그의 말을 기억해서 거실 벽면을 도시 야경으로 도배할 만큼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도시를 향해 갖고 있는 감정은 양가적이었다. 아직도 그녀의 부모님은 도시에서 살았고, 그녀는 자신 때문에 그가 도시에 가지 못한 건 아닐지 염려하긴 했으나 크게 미안해 하진 않았다. 도시에서의 삶을 떠올리는 그녀의 눈빛은 아주 어두워서, 바깥의 불빛이 그대로 반사되는 유리창처럼 보였다. 안까지 빛이 들어가지 못하고 겉만 반짝거리는 유리창. 가끔 세바스찬은 같이 프로그램을 개발하던 사람들이 도시로 가서 올리는 사진들을 보았는데, 아무리 멋진 사진도 그녀의 눈빛을 생각하면 딱히 부럽지 않았다. 그는 도시에 대한 갈망을 버렸다. 그녀가 돌아가기 싫어한다면, 그가 갈 이유도 없으니까.
그녀는 스타듀밸리를 사랑했다. 여기서 평생을 살아온 그보다 더했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고, 마을 행사에는 빠짐없이 참여했다. 해가 떠오른 날에는 밭을 개간하고 작물을 맸으며 잡초밭에 가축들을 풀었다. 비오는 날에는 여물을 주고 낚시대를 맨 채 계곡으로, 호수로, 바다로 향했다. 그녀는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았다. 동굴에서 지쳐 잠든 날에는 몇 번 그가 구하러 간 적도 있었다. 집으로 업고 오는 순간에도 어찌나 곤히 잠들었는지, 그녀는 다음날 아침까지 눈을 한번 뜨지 않았다. 그는 그런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고 콧등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볼 때면 그도 이곳에서의 삶이 하나하나 새롭게 느껴졌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맞춰서 심장이 뛰었다. 세상을 보는 시선을 바꿔주는 사람은 얼마나 소중한가. 그녀를 만나기 전 스타듀밸리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루하루 버텨냈던 삶에 색과 소리를 입혀줄 의미는 없었으니까.
그는 금요일 저녁마다 그녀와 주점에 가서 술을 마셨지만, 가끔은 둘이서만 집에서 영화를 봤다. 넓고 폭신한 소파에 앉아 커다란 담요를 함께 덮은 후, 리모콘을 돌리면 케이블에서 옛날 B급 공포영화들이 나왔다. 둘 다 무서운 걸 좋아하고 예측도 잘해서 공포영화를 보면 이야기할 게 많았다. 그건 그래픽이 너무 웃겼지, 완전 찰흙 같았어라던가. 이거 후속작이 나왔대, 다음에는 그걸 보자라던가. 단, 놀라지 않는 그와 달리 어디에 뭐가 나올지 맞추면서도 그녀는 깜짝 깜짝 놀랐다. 비명지르는 것도 아니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어깨만 움츠리는 게 귀여웠다. 하루는 왜 그렇게 놀라냐고 물었더니 어릴 적 언니가 하도 장난을 쳐서 티 덜나게 놀라는 법을 익혔다고 했다. 그때 눈빛이 얼마나 꿈꾸는 것 같던지. 아련하게 옛 기억을 더듬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글쎄, 티아. 너는 언니가 없잖아.
꿈꾸는 눈빛에 속이 아렸다. 내 꿈은 너와 함께 있는 이곳인데, 네 꿈은 다른 곳에 있는 걸까. 나는 네 곁에서 완벽함을 느끼는데.
가끔 그녀는 아주 무미건조하게 움직이곤 했다. 상냥한 미소도, 달콤한 목소리도 그가 스타듀밸리와 사랑에 빠지게 만든 그 사람 그대로였지만, 언제는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다.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언질도 없이 사막으로, 광산으로 가기도 했다.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날엔 침대에 멀뚱히 혼자 누워 눈을 깜빡였다. 쏟아지는 잠 속에서, 자꾸 풍선줄을 놓치는 아이처럼 흩어지는 의식을 붙잡으며 끊임없이 생각했다. 이러다가 티아는 어디론가 가버리는 게 아닐까. 내 꿈은 여기에 있는데, 그녀의 꿈은 아주 먼 곳에 있어서……. 만약 그녀가 떠나간다면 내가 없는 곳에서 그녀는 웃고 있을까, 아니면 울고 있을까.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본 적은 없었지만 가끔 보여주는 눈빛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었다. 바다에서 비를 맞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입술이 파랗게 물든 채로 머리카락을 적시고 뺨으로 흘러내리던 물방울들. 아득한 곳을 그리는 눈동자. 그녀는 울까. 달래주고 싶지만, 내겐 너무나도 멀어서 닿기도 전에 내가 흩어질 그 곳에서.
그럴 땐 잠에서 일찍 깨어나곤 했다.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때마다 그는 커피를 내리고, 농장일을 도왔다. 그리고 문간에 서서 햇빛이 모든 것을 밝힐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는 순간은 항상 기꺼웠다. 이렇게 맑은 날에는 농장을 확인하러 꼭 한번쯤은 나오니까. 그러다가 저를 보고 미소 지어주니까. 그 미소와 그 뒤에 이어지는 입맞춤이 어찌나 달콤한지. 어떤 두려움도 그 앞에서는 순식간에 녹아내리곤 했다. 따라가는 건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으나, 이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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