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끝
라하브레아 × 빛의 전사(중원 휴런 여성) 드림글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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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조차 헤맬 만큼 깊은 바다 아래에 나타난 도시는 오늘도 고요에 안겨 빛을 밝히고 있었다.
설령 그것이 일순간의 환상이라고 해도 그 거짓 속에서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은 매일 똑같은 걸음을 하고, 매일 똑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변해가는 것은 세계를 구한 영웅과 그 도시의 평화를 되찾고자 한 이들뿐이었다.
베르니체는 매일 그렇듯 휘틀로다이우스와 에메트셀크, 엘리디부스를 만나고 난 후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라하브레아의 곁으로 향했다. 상아색 거리를 지나 웅장한 대의사당에 도달해 육중한 문을 지나면 황금빛으로 가득 찬 거대한 복도가 나오고, 그 안쪽에 라하브레아의 사무실이 있었다.
문을 두드리자, 문이 천천히 열리고 너머에서는 라하브레아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는 참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면 발걸음은 절로 들뜨고, 차분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몸은 벌써 그에게 달려가 품에 안긴 후였다.
베르니체는 눈을 감고 라하브레아에게 기댄 채, 마치 투정을 부리듯 기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보고 싶었어요, 라하브레아.”
“매일 보고 싶어 할 것이라면 도시에 머물라고 한들 또 거절하겠지. 정말이지, 감옥에 가두어 네 자유를 박탈하고 내 곁에 붙잡아 두고 싶은 심정이야.”
진심이 담겼으나 악의는 담기지 않은 말을 들으며 작게 웃으면, 굵은 손가락이 귓가의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베르니체는 그 손을 잡고 뺨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온기 하나 없는 손이지만, 잉크와 종이 냄새가 묻어나는 그 손이 따뜻하다는 착각이 들었다.
“아직 해야 하는 일이 남은 거죠?”
“늘 그렇듯, 굳이 할 필요 없는 것들이지. 하지만 한번 시작했으니, 끝은 보고 싶군. 기다려 주겠나?”
“물론이에요.”
매일 같은 내용의 서류 작업이지만 라하브레아는 대충 하는 법이 없었다. 이마에 입을 맞춰주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펜을 드는 모습을 보던 베르니체는 손님용 테이블로 걸어가 늘 앉는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에는 곱게 개인 푸른 담요가, 바로 앞 테이블에는 읽다 만 책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고개를 들면, 라하브레아가 책상에 앉아있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러하듯, 어느 순간부터 그곳에 그것들이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 있었다.
라하브레아는 한참 종이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닿은 곳은 늘 베르니체가 앉아있는 소파였고, 그곳에는 늘 그렇듯 그가 앉아있었다. 오늘 하루는 고되기라도 했던지 앉은 채로 잠든 베르니체를 보던 라하브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소파로 걸어갔다.
평소라면 소파 뒤까지 갈 때쯤 깨어나 눈을 마주치고는 부끄러워할 텐데, 알아채지도 못하고 여전히 잠에 든 채 꾸벅대는 베르니체를 보던 라하브레아는 손에 들린 책을 조심스레 빼내고 책갈피를 꽂아 덮은 후 늘 두는 자리에 두었다. 그리고 무릎을 덮은 담요를 어깨까지 끌어올려 덮어준 라하브레아는 베르니체를 조심스레 안아 소파에 눕혔다. 책을 빼도, 담요를 덮어주어도, 심지어 닿기까지 했는데 깰 기미가 없는 이의 이마를 짚어보고 몸에 어떤 술식이라도 걸린 것은 아닌지 몸 상태와 에테르의 구조도 살폈다.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정말 깊은 잠이 들었군.’
그제야 안심하고 자리로 돌아간 라하브레아는 잠시 베르니체를 흘긋 보았다가 책상 위로 눈을 돌렸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서도 정해진 내용을 서술하던 펜이 그의 손에 잡히자 언제 스스로 움직였냐는 듯 라하브레아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였다.
라하브레아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도 베르니체는 그 자리에 잠들어 있었다. 자세를 바꾸며 뒤척이기라도 했는지 흘러내린 담요를 거둔 라하브레아는 잠든 이의 어깨를 가벼이 두드렸다.
“베니. 방으로 가자꾸나.”
“네에…….”
눈을 뜨기는커녕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대답하는 베르니체를 보며 미소 지은 라하브레아는 몸을 숙여 베르니체를 품에 안고 일어섰다. 발치에서 떨어진 담요가 스스로 떠올라 차곡차곡 개여 원래 자리에 놓였고, 라하브레아는 그것을 확인하고서야 그의 방으로 에테르 흐름을 만들어 냈다.
폭 안긴 채 여전히 잠에 빠져 있는 이를 침대에 눕힌 라하브레아는 로브를 벗고 옷걸이에 걸어둔 채 그의 곁에 누웠다. 곁에 인기척이 있으니 그가 뒤척이나 싶다가 다시 라하브레아의 품에 파고들었다. 품에 파고든 이의 귓바퀴를 어루만지며 고른 숨소리를 듣던 라하브레아는 잠시 그와 연인이 되기 전의 일을 떠올렸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면 눈이 마주치고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숙여 책을 읽지만, 눈동자는 심하게 동요했었다. 적으로 마주할 때도 단 한 번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 이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워낙 흥미로워 일부러 말을 붙이면, 전혀 다른 사람인 양 능청스레 대답하는 동안에도 마치 라하브레아를 외면하듯 책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했다.
먼 옛날 아젬이 어릴 적 그러했듯 무언가 일이라도 벌였나 싶어 일부러 적대감을 담아 그러는 이유를 물어본 적도 있었다. 자신의 기억으로, 그 이상 행동의 시작은 라하브레아가 자신의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준 이후였던 것 같았다.
“매일 빤히 쳐다보다가 들키는 게 일상이면 슬슬 말해도 되지 않나. 내 얼굴도 보지 못할 만큼 큰 죄라도 지었나?”
“제가 당신에게 지은 죄라고는 당신을 죽이고 조디아크의 부활을 가로막은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미안하긴 하지만,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라서요.”
“그러면 왜 시선을 피하는 거지? 네가 떳떳하다면 내 눈을 피할 이유가 없지 않나. 아니면…… 내게 고백할 것이라도 있나. 이 도시는 환영일 뿐이고 나는 이 도시를 이끌었던 라하브레아다. 탓할 생각도 없고, 부서진 것을 복구하는 것도 눈을 깜박이는 것만큼 쉬우니 지금 말하도록.”
마치 ‘무언가’에 빠진 사람처럼 행동하는 모습에 친 장난이었다. 어쩌면 약간의 기대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어색해지지 않기 위해 잘못이 있으면 말하라는 의도를 덧붙였지만, 라하브레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베르니체가 ‘고백’이라는 단어에 잠깐이나마 눈이 흔들렸던 것을 분명히 보았다. 게다가 고개를 들어 마주보기까지 했으니, 정곡을 찔렸거나 그만큼 황당했던 모양이지. 라하브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가 앉은 자리로 걸어가 손을 뻗어 그의 턱을 짚은 채 살짝 들어 올리고 시선을 마주했다.
“자, 말해보아라. 이 적막한 도시의 그림자에서 어떤 일을 벌였기에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가, 빛의 전사여.”
“……정말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안 그래도 일하는데 여기서 얼쩡거리는 게 거슬릴 텐데 일을 늘려줄 만큼 뻔뻔하지는 않아서요.”
그때 베르니체의 목소리는 태연함을 연기했지만 가늘게 떨렸다. 귀 끝도 조금은 빨갛던가. 푸른 눈을 바라보다 손을 떼고 돌아서서 책상으로 돌아가니, 베르니체도 책을 덮고 일어섰다.
“심술을 부리는 걸 보니 오늘은 더 있으면 당신 심기를 크게 건드릴 것 같네요. 이만 가 볼게요. 내일 봐요.”
그때까지만 해도 굳이 인사에 답할 만큼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기에 대꾸 없이 그가 방을 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라하브레아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시의 인형들이 정해진 대로 움직이며 걷는 거리 사이로 작은 사람이 지나가나 싶더니, 얼마 걷지 못하고 자리에 웅크려 앉았다.
“……정말 흥미로워.”
당돌함을 연기할 때는 언제고, 저런 반응을 자신 모르게 보인단 말인가. 연구 대상이라는 말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 감정은 어떤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다른 이에게도 그런 증상이 있는지. 낱낱이 파헤쳐 알고 싶었다. 다음에 오면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세세히 관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창문에서 떨어져 다시 책상으로 걸어갔다.
베르니체는 한동안 늘 같은 시간만 되면 꾸준히 찾아왔고, 이야기를 청했다. 라하브레아는 그 부탁에 따라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동안 베르니체를 은근히 관찰했다.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었는지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 즐거운 이야기도 아닐 텐데, 적으로서 관찰할 때 그의 주변 사람에게 짓던 미소나 에메트셀크와 휘틀로다이우스의 그림자에게 짓는 미소와는 미묘하게 달라 약간은 바보 같아 보이기도 했다. 무언가를 말하려 하듯 입을 벌렸다가 꾹 다물었다.
그 관찰의 결과가 점점 뚜렷한 형상을 이룰 쯤 베르니체는 갑작스레 그와의 시간을 줄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들어오라는 대답을 건네면 문이 열려도 베르니체는 들어오지 않았다. 피곤해서 밤 인사만 하러 왔다며,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말을 건네고 돌아가거나 아예 찾아오지 않는 날도 많았다.
그런 변화는 라하브레아에게도 당혹스러움으로 다가왔다. 설령 이야기를 나누지 않더라도 고개를 들면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아 눈을 마주치기 무섭게 황급히 책으로 시선을 내리던 이가 그 자리에 없고, 함께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던 목소리가 없었다.
‘이 방이 이렇게 서늘하고 고요했던가.’
“……?”
라하브레아는 그 부재가 어색하면서도 크게 다가왔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쓸쓸함이 왜 갑자기 적이었던, 어쩌면 여전히 적인 자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시작해서 자신에게 큰 구멍을 낸 것 같은지 알 수 없었다. 무심코 떠올린 생각에 멍하니 빈 자리를 보던 라하브레아는 숨을 내쉬어 감정을 가다듬고 책상 위에 놓인 종이로 눈을 돌렸다.
‘아젬과 똑 닮았으니,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지.’
애써 신경을 연구로 돌린 라하브레아는 다시 수식을 적어 내렸다. 그리고 시간이 더 깊어 심연의 고요함이 찾아올 때까지, 그는 중간중간 굳게 닫힌 문과 아무도 앉지 않은 소파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생각보다 오래 반복되니 서서히 짜증이 났었다. 마치 간이라도 보듯 가끔 얼굴을 보이고 돌아가는 베르니체를 생각하던 라하브레아는 기분 전환을 위해 거리를 걷다가 산책을 나온 휘틀로다이우스와 마주쳤다. 손을 가볍게 흔들어 인사를 건네는 휘틀로다이우스에게 고개를 가볍게 까딱여 답했던 라하브레아는 오늘도 연구 중이었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역시 만족스럽지 않군. 아, 그러고 보니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다만.”
“혹시 몰라서 말해두는데 그때의 자료라든가, 이데아라든가, 그런 거는 없으니까 있냐고 물어보지 말고. 어떤 게 궁금해?”
“빛의 전사가 피곤하다며 얼굴만 보이고 가거나 아예 찾아오지 않은 지 꽤 되었다만, 엘리디부스와 크게 맞붙고 있다고 하던가?”
라하브레아의 질문에 휘틀로다이우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더니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그런 기미는 전혀 없고, 오히려 라하브레아를 만나고 돌아와서 침실로 가서도 한참을 떠들다가 잠들고는 했다고. 그 대답이 뭐라고, 라하브레아는 주먹에 힘이 들어간 것을 겨우 풀고 깊은숨을 내쉬며 이마를 꾹 눌렀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응. 지금쯤이면 애나이더 아카데미아에 일어난 소동을 해결하러 갔을 거야. 한 번 가 보는 건 어때?”
“알겠다. 그리하지.”
혹시 모르니 조심해서 가라며 손을 흔들어 주는 이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돌린 라하브레아는 아카데미아 지부를 통해 그곳을 찾아갔다. 그날의 폐허는 너무나 생생하게 재현되었지만 이미 베르니체가 지나간 이후라 그런지 기절하거나 잠들고 혹은 진정한 것들을 자리로 돌려보내는 거품들을 지나가던 라하브레아는 얼마 가지 않아 환상 생물 창조장에서 그를 찾아냈었다.
라하브레아는 그날 자신의 맥박이 빨라지고 심장이 요동쳤던 것만 같던 감각이 진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학문적인 즐거움 때문인지, 그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짜증과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언제나 시선 안에 있다가 도망쳤던 이를 다시 담을 수 있다는 기쁨 때문인지 여전히 알지 못했다.
그래도 딱 하나는 알고 있었다. 베르니체와 함께 공유하고, 그도 확신하고 있을 사실.
이제 자신의 시선 끝에는 항상 그가 있을 것이고 그의 시선 끝에는 항상 자신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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