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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3/아스타리온 드림/아스타브

발더스게이트 3 - 버섯 연구를 해볼까 하는 이야기 * 엔딩 이후 n년 뒤

몽유기담 by 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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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악기를 다루는 손이 두꺼운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떨어뜨리거나 휘두르면 제법 무서운 둔기가 될법한 책이었다. 지성의 학회에서 출간되었다고 책등에 박혀있는 그 책에는 학회가 주력으로 연구하는 언더다크의 생태, 그중에서도 다양하고도 신비한 버섯들에 대해 실려 있었다.

언더다크는 이름 그대로 어둡고도 무서운 땅이었다. 그만큼 끝을 알 수 없는 신비로 둘러싸인 땅은 독자적인 생태계를 갖춘 채 방문자들에게 험한 환경에 적응하길 요구했다. 폭발하는 버섯, 정신 착란을 일으키는 포자, 주문을 방해하는 페어즈레스 등. 현재 바로 그 위험한 언더다크에 거주지를 꾸린 하프엘프는 진지한 눈빛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마법을 알아보는 눈은 있노라 자부하지만, 그의 재주는 연구와 고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대개 그가 천성적으로 타고난 재능에 의지했다. 노력과 연습을 통해 선율과 말로써 마법의 조화를 다루는 재주도 몸에 익히고는 있었으나, 둥그렇게 고리를 그리며 자라난 버섯들이 가진 마법을 알아보는 지식은 그에겐 없는 것이었다.

여정 속에 만난 워터딥의 대마법사 친구라면 알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연락을 넣어볼까, 하는 생각도 물론 해보았으나, 언더다크와 지상을 오가는 연락은 그리 쉬이 닿지 않는다는 점과 그가 자신을 도와주겠다며 휴가 신청서나 그 비스무리한 걸 행정처에 던져버리면 그건 그거대로 좀 미안하고 그 이후가 곤란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그 친구는 최후의 방법으로 미루어두고 우선은 스스로 찾아보자, 하는 생각에 택한 길은 지성의 학회에 소속한 홉고블린 친구에게 연락을 넣는 길이었다. 특이한 홉고블린 학자는 역시 그와 같이 특이한 일리시드 친구를 구해주었던 일로 그에게 매우 호의적이었으므로, 그가 언더다크 생태계라는 같은 주제에 관심을 두게 된 것에 기꺼이 연구자료들을 보내주며 이른 시일 내에 언제 한번 근처에 찾아올 것을 약속하였다. 블러그는 마침 그가 필요한 버섯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였으므로 그에게는 매우 기쁜 소식이었다.

바드 겸 소서러인 하프엘프는 미리 기초 자료를 습득해두기 위해 자기 키만큼 쌓인 책들을 하나씩 독파해나갔다. 내용을 모두 암기하거나 정통할 수는 없어도 봐두는 것과 봐두지 않는 것의 차이는 큰 법이다. 설명에 걸리는 시간이 줄기도 하고.

그런 이유로 한가득 쌓은 책더미를 앞에 두고 열심히 자료를 뒤진 지 며칠이나 되었을까. 찾던 버섯과 비슷한 자료가 실려 있는 부분은 모두 책갈피로 표시해두었다. 모두 블러그에게 문의하는 데 쓰일 예시 자료였다. 두 번쯤 우려 엷어진 차를 홀짝이며 스케치해둔 버섯과 도록 속의 버섯을 비교하고 있을 때였다. 반쯤 열려있던 문이 크게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찾았다.

“자기, 안에 있어?”

“응, 여기 있어.”

자연스럽게 매끄럽게 흐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고혹적인 목소리로 그를 부른 연인은 머리카락과 같이 허연 눈썹을 올리며 살짝 인상을 썼다.

“아, 유감이네. 부르면서도 여기 없길 바랐는데 말이야. 자기, 여기 박힌 지 벌써 며칠째야. 자기라서 이런 말 안 하려 했는데,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이미 한참 전에 곰팡이 피고도 남았을걸. 이 골방 구석에서 말이야.”

“아직은 안 폈으니까 괜찮아. 꼬박꼬박 삼시 세끼 밥도 챙겨 먹고 목욕도 하고 잠도 잤잖아.”

“그냥 대충 집히는 거 주워 먹었다는 말은 왜 안 해? 안 그래도 밥상에 버섯만 한가득인 언더다크인데. 봐, 이 차도 버섯 우린 거잖아.”

“어허, 주워 먹었다니. 같은 밥상에서 똑같은 거 먹었으면서. 그리고 버섯 차도 버섯 따라서는 나쁘지 않은걸. 마셔볼래?”

“겸허히 사양할게. 차를 좋아하는 자기를 위해서. 알다시피 나는 차보단 좀 더 이렇게… 붉은빛에 더 맛있는 걸 선호하거든.”

나름대로 몇 년이 지났건만 늘 똑같이 반복되는 레퍼토리의 말장난이었다. 장난스러운 화제로 빠지면서도 아스타리온은 툴툴대길 멈추지 않았다.

“이런 종이쪼가리를 파느라 날 소홀히 하다니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 역시 자기가 저번에 찾으러 간 버섯이 좀 이상했던 거 아니야?”

“너도 같이 갔었잖아. 처음에도, 저번에도 바로 옆에 있었으면서 뭘.”

“아, 자기에게만 효과가 있었을 수도 있지. 뱀파이어에게는 안 듣는다든가.”

“저기, 처음 발견했던 건 마귀할멈 오두막이었던 건 기억하는 거지? 너랑 나 말고도 다 같이 있었잖아.”

“그러게, 증상이 생기기까지 시차가 있는 녀석인가 봐. 다른 친구들이 걱정되는걸. 안부 편지라도 써볼까? 닿을지나 모르겠지만.”

유들유들 능청맞게 말하는 얼굴에 심술이 묻어났다. 말도 안 된다는 소리인 걸 자기도 알면서. 하프엘프는 부루퉁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둘이 하고 있는 건 둥그런 고리를 그리며 돋아났던 신비한 버섯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마귀할멈 오두막에서 처음 본 그 버섯들에게는 굉장하게도 거리에 상관없이 그 원진 안에 들어선 생명체와 물품을 다른 버섯원진이 위치한 곳으로 이동시켜주는 힘을 가지고 있었고, 여정 중에 몇 번 이용해본 그 신기한 길이 인상 깊게 남았던 하프엘프는 그 버섯원진을 이 스폰들의 요새에 설치할 수 없을까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혹시 이어질 수 있다면 지상이든 언더다크의 어딘가든 유용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번에 도움을 요청한 지성의 학회만 해도 그랬다. 혹시 뱀파이어나 그 스폰에 대해 더 연구하고 싶은 학자가 있거나 하면 물자나 인력 등으로 상호 지원을 약속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남몰래 생각하고 있던 하프엘프는 블러그와 오멜룸과 비정기적으로 연락을 나누는 것은 물론 그 외에도 마찬가지로 여정 중에 알게 되었던 마이코니드 군락에도 두어 번 찾아간 적도 있었다.

가능할지 어떨진 모르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역시 도움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하프엘프는 어느 정도 폐허의 요새화가 진행되어 이제는 좀 안정되었다 싶자 슬슬 자료를 모아보기로 했고, 이제 막 삽을 뜨기 시작한 참이었다. 버섯원진의 위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고 실제로 군락에 다녀오는 길에 살아있는 것을 확인도 했지만, 옮기는 순간 마법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블러그와 공유하기 위한 정보 메모와 스케치만 해왔다. 언더다크와 버섯에 대해 더 잘 아는 블러그와 함께 이야기해본 후 마귀할멈 외에 설치 및 이용은 완전 불가능 판정이 내려진다면 접고 손 털 것이고, 가능성은 있는데 방법을 찾기 힘들겠다 하면… 역시 그 친구를 찾아가야 할지도.

“차도 다 식었잖아. 이런 걸 무슨 맛으로 마시는 거야? 그냥 버섯 담근 물이잖아.”

아스타리온이 남의 선호 음료를 사정없이 헐뜯으며 잔에 있던 차를 창밖에 내버렸다. 주전자에 있는 것은 아직 따뜻한지 확인하고서 새로 차를 따라준다. 그제야 그 무겁던 책을 내려놓은 하프엘프는 보온용 워머를 뒤집어쓰고 있던 덕에 온기가 감도는 새 잔을 받아들고서 차를 홀짝였다.

안 그래도 너무 많은 글자 묶음을 독파한 탓에 슬슬 머리가 아파오던 참이었다. 연인의 하얗고 매끄러운 턱을 쓰다듬으면서 그가 말했다.

“나, 늦깎이 대학생이나 할까 봐.”

“응? 핫하, 난데없이 무슨 소리래? 뜬금없이.”

“말 그대로, 마법 공부나 좀 할까 봐. 워터딥에 가서 게일한테 입학한다고 하면 원서 접수료 정도는 깎아주려나? 입학 수속 비용 뭐 그런 거.”

“워터딥? 그런 재미있는 도시에 가서 공부 따위를 하겠다고? 자기, 재미있는 게 넘치는 대도시에서 그렇게 재미없는 것만 골라 하는 건 범죄야, 범죄.”

“그치만 열심히 공부해서 얼른 졸업해야 그만큼 일찍 돌아오지. 내 토끼 같은 배우자를 두고 오래 가 있을 순 없잖아.”

“뭐? 자기 날 두고 갈 셈이야!?”

마음에도 없이 던지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못 받아들일 소리에 그가 버럭 하면서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매가 순식간에 더욱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이 바드는 그가 이렇게 반응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한 번씩 이런 장난을 친다. 그러면 그는 그대로 또, 이 하프엘프가 누구보다 그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반응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아스타리온은 작게 이를 갈았다.

“절대 안 되지. 나만 두고 거기 가서 게일이랑 시시덕거리겠다고? 공부랍시고 책 하나 펴놓고 맛있는 요리에 술 한 잔 걸치면서? 나도 워터딥 치즈에 포도주 즐길 줄 알거든? 한 번만 더 그런 소리 하기만 해. 자기 여행용 옷들 다 옷장 속에 처박고 잠가버릴 테니까.”

“그치만 가면 넌 계속 놀러 다닐 거잖아. 나는 공부하는데 너만 놀기 있어? 너무해.”

“너무하긴, 너무한 건 자기겠지! 나도 꿈을 하나 가져야겠어. 워터딥에 가면 거기 학교 한두 군데 털어보는 걸로. 혹시 알아? 태양 빛을 막아주는 마법 뭐시기 한두 개쯤 굴러나 올지.”

“오, 그건 또 멋진 꿈이네.”

그의 말을 들은 하프엘프가 실실 웃었다. 웃음소리를 참는 것이 역력한 얼굴로 그가 아스타리온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면 오랜만에 한낮에 데이트할 수 있겠네.”

“물론이지. 그러니까 날 두고 혼자 가겠다는 허황된 꿈은 오늘부로, 아니, 이 시간부로 내다 버리는 거야. 망가진 깃털 펜보다도 못한 녀석이니까. 알았어?”

“네네, 새겨듣지요.”

그 말에 으르렁거리던 연인의 기세가 반쯤 수그러들었다. 턱과 뺨에 이어 귀를 매만지는 손길에 얼굴을 맡기며 아스타리온은 짐짓 어깃장을 놓았다.

“안 되겠어. 이놈의 책들 다 치울 때까지 자기는 감시 대상이야. 혼자 짐 싸서 도망가는 일 없게.”

“글쎄, 어떨까. 내 보기엔 너, 지루하다고 반나절이면 튀어나갈걸?”

“오, 생각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괜찮아. 심심할 때마다 자기 목덜미나 한 번씩 깨물 테니까.”

“정말? 저 책들 치우기 전에 내가 먼저 골로 가겠네.”

하프엘프가 중얼거리더니 그에게 쪽 소리 나게 입 맞추었다. 그리고서는 떨어지는 것을 아스타리온의 입술이 낚아채었다.

조금 더. 바로 전까지 차를 머금고 있던 입술은 촉촉했고 또 쌉쌀한 차 맛이 났다. 그러고서도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아 아스타리온은 혀끝으로 입술을 핥았다.

한 번만 더. 그가 세 번째로 입술을 맞대려 했을 때에는 두 입술 사이에 두꺼운 물체가 껴들었다. 눈앞에는 “언더다크 자생 버섯에 대한 도록”이라는 글씨가 금색 실로 커다랗게 엮여 있었다. 두꺼운 책 너머로 하프엘프가 웃는 것이 느껴졌다. 연인의 금빛 문신과 화장으로 둘러싸인 눈이 은색으로 반짝였다.

“이건 다 보고.”

“자기, 키스 한 번 더 한다고 책이 도망가진 않잖아.”

“안 돼. 집중하기 힘들어지니까.”

살짝 쑥스럽다는 듯이 하프엘프가 책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며 새침하게 말하자—실은 전혀 쑥스러워하고 있지 않으며 장난치는 것뿐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귀여움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아스타리온의 얼굴이 금세 활짝 펴지며 능청스러움을 되찾았다.

“하긴, 나랑 키스하는데 그런 거에 집중하긴 힘들긴 하지. 아무리 자기라 해도 말이야.”

저 좋아죽는 얼굴이 어쩜 이렇게 귀여워 보이는지. 이미 몇 년이 계속된 콩깍지가 여태 벗겨질 줄을 몰랐다. 자신의 못된 장난에 잠깐이나마 버럭했던 얼굴이 풀린 것을 확인한 하프엘프가 쓴웃음을 지으며 책을 다시 펼쳤다.

아스타리온 역시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푹 눌러앉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과장된 손짓으로 멋을 부리더니 옆에 쌓여있던 책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흠, 그러면 나도 이것들이 얼마나 재미없는지 한번 봐둘까. 좀 더 맛있는 버섯 좀 찾아둘 겸. 아니면 조금 더… 즐거운 버섯이라든가. 자기와 나 사이에.”

그렇게 말하며 턱을 살짝 치켜들고 던지는 눈빛이 쓸데없이 요염하다. 이번엔 그가 인상을 쓸 차례였다. 하프엘프는 금빛 문신으로 꾸민 눈가를 찡그리며 눈을 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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