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되는 이유

비승천 현대환생AU

가내 타브 설정이 많습니다(이름, 체형 등)

비승천 루트 아스타브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밤이었다. 귀를 기울이면 느린 숨소리 하나가 겨우 들릴 만큼 정적에 가까운 순간이었으며 침대 맡에 앉은 뒷모습은 멈춰 놓은 그림이나 다름없었다. 지나간 시간이 흔적으로 남듯 자글자글한 손이 힘겹게 아스타리온을 향했다. 들리지 않을 만큼 옅은 목소리로 짧은 대화가 오고 가나 싶다가 머지않아 짧은 숨이 빠져나가고 한 사람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아스타리온은 점점 자신과 같은 온도로 변해가는 손을 붙잡았고 조금이라도 온기를 잡아두려 얼굴을 묻었다. 몇 백 년 만에 처음으로 신을 찾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정해진 이별이라고 한들, 준비할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은 막을 수 없었다.

세상의 시작이자 끝일 것 같던 사랑이었으나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몇 년은 눈을 감았나 싶을 정도로 흐릿하게 지나가고 먼지가 쌓이면 빈 자리가 겉으로 드러날까 봐 더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다 생각이 난다는 자각이 들어 문득 고개를 들면 주변은 여전했다. 끊어질 리 없는 삶은 계속되고 있었으며 같은 일상이 반복되었다. 결국 이리엘이 바란 것처럼 혼자서도 잘 서 있었으니 거 봐, 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아 아스타리온은 햇빛이 내리쬐는 길거리에서 혼자 웃음을 터트렸다.

그 뒤로는 평소와 같은 생활이었다. 다만,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 십 년이면 산과 강이 모두 변한다지만 몇 배나 긴 시간동안 사람들이 바뀌는 속도와는 비교를 할 수 없었다. 어느 누가 고철덩어리를 달리게 할 생각을 하고, 올챙이로 연결되었을 때나 가능하던 짓을 손바닥 만한 기계로 하게 만들겠는가. 아스타리온은 여전히 낯선 세상에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그대로 커튼을 밀어 닫았다. 차라리 발더스 게이트 항구가 천국이겠어. 수많은 사람들의 말소리와 도로를 점령한 차들이 내는 소음은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따라잡기에 돈보다 좋은 것은 없었다. 시간은 곧 돈이었으니 남들보다 무한한 삶을 사는 덕을 톡톡히 보며 조금씩 제 모습을 숨기고 살았다. 어느 누구 덕분에 햇빛 아래서 다시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는 세상에서 눈에 띄는 것이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스타리온은 종종 모든 것이 보관된 미술관에 발을 들였다. 사람들이란 신기한 집단이라서, 과거에 이미 흘러간 시간을 잡아두기 위해 별것 아닌 그릇이나 옷을 모아두곤 했으니. 가끔 무언가 내릴 것처럼 흐린 저녁이면 마감 직전의 미술관을 몇 번 돌아보고 나오는 날이 있었다. 그 중에는 지난 날을 떠오르게 하는 유물이나 작품이 있어서 추억에 잠기기에는 알맞은 시간과 장소였다.

비도 아니고 예고 없던 눈이 흩날렸다. 아스타리온에게 흐린 날씨만큼 익숙한 하늘은 없었으나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얼굴이 꽤 볼 만했다. 날씨를 예언하고자 했던 자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예측을 했던 이는 드물었다. 어차피 날씨를 맞추거나, 아니거나 라는 두 가지 결과로 나오는 것은 같았다. 회색 빛의 날씨 덕분인지 미술관에는 사람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이런 날에 돌아다니는 건 뱀파이어 같은 놈들이겠지. 아스타리온이 조소하며 아직 불이 켜진 미술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특별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는 안내 문구를 지나치면 몇 번이나 보았던 익숙한 포스터가 눈을 사로잡았다.발더스 게이트, 그 영광의 도시 또한 쇠락하여 유리 칸막이 속 물건으로만 남아있었다. 살아온 세월에 비하면 찰나와도 같았던 여행을 잠시 회상한 아스타리온이 전시관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림으로만 보는 혼란스러웠던 당시는 평온하기만 했으니, 오직 그림 속 어딘 가에 서 있었을 사람만이 그날의 바람과 시끄러웠던 소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림을 따라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두 굽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어차피 아무도 없을 미술관이었다. 만약 옆에 한 사람이 있었다면 가만히 팔짱을 끼며 눈짓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스타리온은 일단 아무렇지 않았다.

과거의 흔적들에 눈을 두고 걷다 보니 멀리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런, 사람이 있었네. 발소리를 죽이며 커다란 조각상 하나를 돌자 짧은 코트를 걸친 이가 벽면 전체를 채운 초상화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어깨에 닿지 않는 짙은 회색의 머리카락이 구불거리며 흘러내렸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이 말할 수 없이 익숙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자주 서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림 속 어느 오래된 시대 복식의 푸른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 이리엘이 아닌 것처럼, 눈 앞에 있는 여행객은 단지 같은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뿐이었다. 이미 몇 번이나 회색 머리카락을 보며 더는 들이마시지도 않는 공기가 멈춰버린 경험을 했음에도 그러나 이번에는 무언가 달랐다. 발더스 게이트의 영웅이라며 자신과 동료들, 이리엘이 그려진 그림을 우연히 보았을 때보다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아스타리온은 누가 들었다면 바보 같은 짓을 했다며 타박할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소매치기를 피하기 위한 기술이 늘었다고 해도 아스타리온은 코웃음을 칠 수 있었다. 심지어 반쯤 열린 가방을 그대로 들고 다닌다면 지갑 하나를 슬쩍 손에 드는 정도는 눈을 감고도 가능한 일이었다. 검은색 지갑이 어느 새 손에 들렸고 등 뒤로 살짝 숨기며 반으로 접힌 지갑을 열었다.

이런 수고스러운 짓을 사서 하는 이유는 오직 확인이었다. 저도 모르게 뒷모습이 닮았다는 이유로 말을 걸 뻔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불확실함으로 들떴던 감정이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을 방법이었으며 혹시나 하는 마음을 밀어낼 수 있을 터였다. 닮은 사람인지, 만약 그저 우연의 일치로 닮았을 뿐이라면 얼마나 우연이 지독한지, 그리고 기나긴 기다림 끝에 인내심이 바닥난 탓을 할 뿐이었다.

슬쩍 펼쳐본 지갑에는 신분증이 바로 끼워져 있었다. 이 얼마나 현대적인 문물인가. 손바닥 절반 정도 크기의 플라스틱에 알고 싶은 모든 정보가 새겨져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손 안에서 카드를 꺼내어보고 그대로 지갑을 닫았다. 동시에 다시는 부르지 못할 것 같은 이름이, 잊었던 발음이 입 안에서 굴려지다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리엘?"

기억하는 것보다 짧아 턱 끝에서 단정하게 흔들거리던 머리카락이 고갯짓을 따라 휘날렸다. 비가 내리기 전의 먹구름 낀 하늘이 딱 저 머리카락과 같았다. 젠장. 아스타리온이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욕을 뱉었다. 웃음이 터져 나오려다 잇새로 샐 뿐이었다. 몇 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름을 부른 사람을 찾더니 그때와 똑같이 깊고 푸르게 빛나는 바다가 아스타리온을 향했다.

"제 이름이 맞는데, 절 아세요?"

"설마, 지갑이 떨어져 있길래 주웠을 뿐이라서."

애써 태연하게 말을 꺼내려 노력했지만 우습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물건을 잃어버릴 뻔했다는 당혹감이 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숨겨주고 있었다. 세상에, 짧은 감탄과 함께 가방을 뒤져보더니 아스타리온의 손에서 지갑이 넘어갔다. 지갑을 살펴보면서도 곁눈질로 아스타리온을 훑어보는 모습이 그날과 같았다. 미술관에서 지갑을 떨어트렸는데 몰랐다고? 딱 그렇게 생각하는 눈빛이었으니 환한 웃음 하나로도 넘어가기에는 충분했다.

이리엘이 눈을 크게 뜨며 웃었다. 처음 보는 낯선 이에게 갖는 경계심을 푸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 심지어 한 번 넘어오게 만들었던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쉬운 일이었다. 아스타리온이 자세를 고치는 척 거리를 좁혔다. 완전히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으나 이 정도는 허락해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기대에 부응하듯 익숙한 목소리가 인사를 전했다.

"감사해서 어떡하죠. 여행 중이었는데 덕분에 살았어요."

"그럼 잠깐 시간 내줄 수 있어요? 여기도 방금 약속이 취소된 사람이라."

환생에 관여한 존재가 있다면 손끝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황하거나 웃을 때마다 움직이는 눈꼬리를 따라 유독 도드라지는 눈 밑 점이 아스타리온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약속이라고 해도 미술관에 오는 것이 전부였으니 취소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다만, 수없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아스타리온은 거짓말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불멸의 삶에서 유일했던 사랑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시작했기 때문인지, 의심하는 눈빛으로 가득한 시선이 결국 끄덕임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고 싶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이리엘이 잠시 고민하다가 아스타리온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어쩌면 이번에는 호기심일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오래 전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절반은 성공했고, 다른 절반은 실패했기에 완벽했던 계획이었다. 두 번이 어렵지는 않을 터였다.

"좋아요. 그 쪽은..."

"아스타리온."

"아스타리온. 그럼 같이 좀 걸을래요?"

어깨에 둘러 멘 가방과 지갑에 들어 있던 온갖 패스들까지, 누가 봐도 여행을 온 사람이었으니 긴 설명 대신 이름이면 충분했다. 걷자는 말에 아스타리온은 작게 헛웃음을 삼켰다. 아마 눈이 내리는 것을 모르고 있을지도, 혹은 날씨를 무시하고도 걷기를 바라는 건가. 이리엘은 드물지 않게 하늘에서 뭐가 내리든 산책을 가자며 장난스럽게 손을 잡아 끌곤 했었다. 아스타리온이 오랜 시간 느끼지 못했던 당혹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 지었다. 걷는 것을 어찌나 좋아하시는지. 때마침 미술관 관람 시간이 끝났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마 두 사람만을 위한 안내일 것이 분명했다. 함께 가자는 제안 앞에 붙으려던 익숙한 호칭이 입 안에서만 맴돌다 사라졌다. 일방적으로 쌓아둔 애정을 잠시 내려놓고 새로 시작하는 마음에 어렴풋이 그리움이 떠올랐다.

미술관 밖으로 나란히 걸어 나오면 안개처럼 뿌려지던 눈이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내리고 있었다. “정말 산책이라도 할 생각이야?” 아무리 고대하던 첫 만남이라고는 하나 걷다가 온통 젖어버릴 판이었다. “어차피 여기 있을 수도 없잖아요.” 이리엘이 입술을 만지며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들었다. 아스타리온이 달라는 듯 손을 내밀자 주변을 둘러보고는 두 사람 사이에 우산이 하나뿐이라는 걸 눈치채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밤중의 깊은 숲 속도 아니었으며 인기척이 모두 잠들었던 발더스 게이트의 어느 새벽 산책도 아니었다. 시끄러운 차 소리와 텁텁한 공기, 눈까지 내리는 최악의 날씨에서 아스타리온은 다시 먼저 걸어가는 발걸음을 따라 밟았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기에는 완벽한 만남이었다.

“눈이 계속 내리는데, 정말 더 걸어갈 거야?"

아스타리온이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조금 더 우산을 기울였다. 그 덕에 남자가 가까워진 만큼 깊은 한숨이 빠져 나오며 하얀 연기를 만들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냥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헤어지고 싶었다. 아무리 지갑을 주워준 선의가 있다고는 하나 처음 보는 사람을, 그것도 처음 오는 도시에서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험했다. 물론 걷자고 한 건 제 쪽이었지만. 바람에 날린 눈송이가 눈꺼풀에 떨어져 어깨에도 닿지 않는 짧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슬쩍 올려다 본 남자는 날씨에 질색하면서도 입가에 웃음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단순히 호감을 사기 위한 웃음이라고 해도 뭐가 그렇게 좋은 걸까. 그러니 대뜸 대로변 한복판에서 각자 갈 길을 가자며 차갑게 떨쳐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우산도 없는 사람을 혼자 보내기에는 고작 지갑을 주워 돌려주었을 뿐인 짧은 만남에 얕은 호감 같은 것이 남은 탓이었다.

걷기에는 바닥이 미끄럽고 눈이 쉬지 않고 내려 아무리 여행 중이라고 한들 낭만보다는 막막함이 먼저 드는 날씨였다. 결국 고집을 꺾어낸 표정으로 아스타리온에게 시선을 돌렸더니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이상하게 가까이 있어도 체온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서늘했다. 날씨가 이런 탓이겠거니, 이리엘이 고개를 들어 말했다.

"...아무래도 조금 무리일 것 같은데요."

"차라리 잠깐 어디 들어가는 게 어때. 저기에 나쁘지 않은 바가 있어서."

고갯짓 끝에는 가게가 영업 중이라는 것을 알리는 네온사인이 반짝였고 이리엘은 잠시 고민하다 끄덕였다. 아직 버스를 어디서 타는지도 모르는 여행객에 불과했으며 상대는 적어도 근처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만약 이 날씨에 걷다가 여기서 감기라도 걸린다면 혼자 고생할 것이 뻔했으니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자 손님을 알리는 종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나무 냄새가 섞인 따뜻한 공기가 얼어가던 얼굴을 감싸안았다. 바에는 역시나 날씨 탓인지 사람이 적었고 아스타리온은 구석 자리를 향해 걸어가며 이리엘을 이끌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더라. 정작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오히려 텅 비어있는 기분이었다. 종업원에게 무어라 주문을 하는 아스타리온의 목소리를 들으며 대충 비슷한 걸로 달라고 말했던 것 같았다. 

"그러니까 혼자 여행 중이라는 거네. 여기가 두 번째 도시였고, 모레 떠날 예정인 거지?"

"아직 미정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그래요."

이미 정해진 일정이 있음에도 부정해버린 입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문질렀다. 쓸데없이 튀어나오는 말이 너무 많아 스스로에게 놀랄 지경이었다. 지금은? 아스타리온이 말 끝을 따라하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가볍게 잔을 흔들자 얼음이 유리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아스타리온은 그저 즐거웠다. 오래된 기억 속 얼굴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사람이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다. 올챙이에, 온갖 일에 휘말려 하루가 멀다하고 전투를 이어가던 때와 달리 한 사람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긴 손가락으로 컵에 입술이 닿는 곳을 두드리며 콧노래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입을 열었다. 

"이 도시가 나쁘지 않지. 사람도 많고, 꽤 오래된 역사도 있고. 안 그래?"

"뭐... 돌아다니기 좋았어요. 아직 못 가본 곳이 있긴 하지만-"

"그럼 너도 여기에서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아?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이리엘이 대답을 얼버무리며 잔을 입가에 기울였다. 어디를 가봐야 겠다, 혹은 무언가를 봐야겠다는 가벼운 계획을 제외하면 특별히 내세울 만한 일정이 있지는 않았다. 잠시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이 이어지던 사이 컵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팔에 떨어져 정신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이걸 왜 고민하는데? 굳이 할 필요 없는 고민에 머리를 쓸어넘기며 생각을 떨쳐냈다. 이틀 뒤면 이 도시에서도 떠날 것이고, 눈 앞의 사람은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었다. 그러니 기차표를 취소하려는 그런 찰나의 마음은 방금 마신 술 한 모금에서 비롯된 충동이 분명했다. 

그 뒤로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뭘 좋아하는지, 원래는 무슨 일을 하는지 같은 사소한 이야기에 대해 대답을 하다보니 주로 말하는 쪽이 되었다는 자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세상에나, 혼자 다니는 게 편해서 동행도 구하지 않았는데 말을 이렇게 많이 하다니. 스스로에게 놀라는 것도 잠시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물음에 대답하고 있었다. 심지어 아스타리온은 대답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굴었다. 신기하다는 태도에는 동시에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반응할 때가 많아서, 이리엘은 불만을 표하듯 잔을 들어 아스타리온의 것과 가볍게 부딪혔다. 입 안으로 얼음이 녹아버린 씁쓸한 액체가 화하게 밀려들어왔다. 

만난 지 고작 3시간이 채 되지 않은 사람에게 홀렸다고는 해도 할 이야기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화가 끊기면 말 없이 가게를 훑던 시선이 맞닿았다. 창밖이 완전히 어두워진 지 오래 되었을 즈음에야 이리엘은 그만 가야겠다며 한참 마주보고 있던 붉은 눈에서 시선을 돌렸다. 잠시만, 이리엘. 붙잡으며 부드럽게 내려앉는 목소리에 그대로 몸이 멈췄다. 오래 전 바다에서 들리는 노래에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뱃사람이 이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연락처 좀 줄래, 자기?”

아, 만약 그게 불편하면 여기로 먼저 연락 주든가. 냅킨 구석에 번호를 끼적이고 맞은 편으로 미는 손끝이 닿을 듯 스치며 멀어졌다. 바뀐 세상에서 남을 유혹하는 일은 더욱 번거롭고 오래 걸리는 과정으로 변해 있었다. 요즘 사람들을 보면 서로 이름을 말하고, 연락처를 주고 받은 뒤에 그래도 몇 번을 만나고 나서야 어느 단계를 거치고 연애를 시작하더라니. 물론 하룻밤의 짧은 인연을 찾을 게 아니라면 과거에도 똑같았겠지만, 아스타리온은 이런 수고스러운 일을 사서 할 만큼 눈 앞의 사람을 붙잡고 싶었다. 너무 오랜 시간을 지나쳐 온 만남이었다. 

당연하게도 왜냐고 묻는 것 같은 표정이 돌아왔다.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리며 웃자 시야에서 이리엘이 잠시 사라졌다. 200년을 세고도 몇백 년을 더 살아온 뱀파이어에게 한 사람을 매혹시키는 일은 눈을 감는 것보다 쉬었으니, 아스타리온은 테이블에 살짝 몸을 기대며 낮게 속삭였다.

"오, 그럼 처음 본 사람에게 시간이 있냐고 묻는 의도에 또 뭐가 있겠어?"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럴 의도가 맞았으니까 전부 거짓말은 아니었다. 물론 속인 부분은 처음 만났다는 쪽일 테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건너 편의 사람은 눈치 챌 수 없을 거짓이었다. 가만히 턱을 괴고 눈을 마주치면 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이 정도 선에서 넘어올 게 분명했다. 자기 얼굴을 보면 할 말도 못하겠다니까. 오래 전 손사래를 치며 꺼냈던 말이 머리를 스치고 아스타리온은 흐려진 기억에 오랜만에 반갑게 웃었다. 아마도 상대에게는 호감으로 다가올 미소였다. 냅킨을 가볍게 들쳐 본 이리엘이 가방을 뒤적여 펜을 꺼냈다. 펜? 의아하게 보는 사이 잠시 몸을 숙이고는 무언가를 적으며 어딘가 어색한 웃음을 짓고 눈이 마주쳤다.

"당신이 먼저 연락 줘. 아스타리온."

이리엘이 한숨을 내쉬며 이제 번호 두 개가 적힌 냅킨을 건넸다. 사람만 조심해도 반은 간다며 신신당부하던 오랜 친구의 말이 귓가를 스쳤으나 이미 건너기 시작한 강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반쯤 넘어갔다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왠지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이 사람의 계획대로 흘러가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궁금했다. 만약 선택권을 다시 손에 쥐어준다면 눈 앞의 조각 같은 남자는 어떻게 행동할지, 정말로 다시 연락해올지 알고 싶었다. 

어느 새 짧아진 말꼬리에 아스타리온이 가늘게 눈을 뜨며 웃었다. "그래야지, 뭐. 네가 그걸 원한다면 말야." 한 마디를 뱉을 때마다 유독 날카로운 송곳니에 눈이 갔다. 잘못해서 혀라도 씹으면 큰일나겠다 싶을 만큼 길고, 끝이 뾰족한 모양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데려다 주겠다는 제안까지 받아들일 만큼 얼굴에 넘어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깜빡거리는 네온사인을 뒤로 하고 멀어지려 하자 아스타리온은 별말 없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팔짱을 끼고 서서 먼저 가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짧은 인사가 건네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리엘은 걸음을 옮겼다.

길가에 쌓인 눈 위로 발자국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옅은 술냄새가 풍기는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돌리면 깜빡거리는 가로등 아래 아스타리온이 서서 가만히 떨어지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은 물결처럼 은색으로 반짝였으니 눈이 조금 쌓인다고 해서 티가 나지는 않을 것이다. 유령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순간 아스타리온을 두고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놀라 몸을 떨었다. 마지막 남은 술은 마시지 말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돌아가는 걸음을 서둘렀다.

방문을 열자 익숙한 어둠이 이리엘을 반겼다. 대강 짐을 던져놓고 옷가지를 의자에 걸쳤다. 침대 위로 몸을 던지자 종일 걸어다닌 몸에 술기운이 돌며 팔다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정말 연락이 올까? 얇은 잠옷 위로 두꺼운 이불이 덮인 무게감이 아늑하게 몸을 감싸안았다. 겨울 바람에 얼어 붙었던 살이 느리게 녹아가며 잠이 몰려왔다. 이리엘은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올리며 핸드폰의 검은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쩌면 호기심에 번호를 물어본 사람일지도 몰랐다. 눈이 내리는 저녁은 여느 날보다 조용하고, 우연치 않게 사람을 만나 고요함을 떨쳐내고 싶은 법이었으니까. 

핸드폰을 몇 번 더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하고 결국 덮어버릴 즈음에 갑자기 진동이 매트리스를 흔들었다. 근원지가 방금 머리 맡에 던진 핸드폰이라는 걸 알고 덥썩 들면 연속으로 온 두 개의 메세지가 나란히 떠 있었다.

[자?]

[안 자는 거 알아]

보낸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어도 후보는 한 명뿐이었다. 이리엘이 핸드폰을 침대 위로 던지듯 엎어뒀다. 진짜 귀신인가? 그저 짐작이더라도 어딘가 들킨 기분에 주변을 의미 없이 둘러보았다. 새로운 알림이 뜨지 않아 가만히 엄지로 화면을 내렸다가, 다시 올라가는 화면을 바라보다 무심코 어느 곳을 누르자 대화창이 가득 떠올랐고, 숫자가 사라지자마자 곧장 새로운 메세지가 튀어올랐다.

[내일 봐.]

다음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이게 끝이라는 듯 다른 연락은 오지 않았다. 답장을 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들고 그대로 침대 위로 드러누웠다. 내일도 만나는구나, 그런 생각에 오늘 있었던 일이 머릿속을 바쁘게 스쳐 지나갔다. 헤어지기 전에 들었던 낯간지러운 호칭에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가 썩 나쁘지 않은 기분에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정 이상하면 바로 도망가면 되지. 

미술관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일찍 일정을 마무리하려던 차에 우연히 홍보 포스터에 눈이 머물러 발을 들였었다. 이 도시에서는 누구도 부를 일 없는 이름에 뒤를 돌았던 순간 마주쳤던 타오르는 것처럼 붉었던 눈동자가 다시 떠올랐다. 컬러 렌즈를 껴도 저렇게 붉을 수는 없을 만큼 눈을 떼기 어려웠다. 

지난 밤 꿈을 잊어버릴 만큼 피곤했는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다만, 하나 기억하는 것이 있었다. 석양보다 붉었던 눈동자에 지금으로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상한 일이야. 처음 만난 사람이 꿈에 나왔다는 사실에 이리엘이 부시시한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다시 만나기까지 약 열두 시간이 남아있었다.

커튼 사이로 어제와 다른 강한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울 즈음에야 이리엘은 한참을 밍기적거리다가 옷을 챙겨 입었다. 아스타리온이 보낸 메세지에는 해가 거의 질 즈음의 시간이 적혀 있었지만, 하루를 그것 하나로 채우기에는 너무 아쉬운 날이었다. 옅은 아이보리 색의 코트를 걸치고 나온 밖은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남아있었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흔한 여행자의 걸음과는 다른 길로 향했고 그 끝은 도서관이었다. 책을 읽으러 온 사람이 반, 오래 된 도서관이라는 이유로 구경을 온 사람이 남은 절반이었고 이리엘은 교집합에 속한 인물이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며 찾아낸 것과 비교될 만큼 먼지가 쌓인 책을 꺼내들며 애써 재채기를 참았다.

창백한 피부와 유독 날카로운 송곳니, 붉은 눈까지. 한 가지라면 별 것 아닌 특징이었지만 둘이라면 우연으로, 셋이라면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었다. 뱀파이어라는 사실이 예전만큼 대단하게 받아들여지는 시대는 아니었다. 도시를 이동하기 쉬워졌다는 이유로 다른 종족을 더욱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으니 그저 흔하지 않은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되었다. 그러나 길을 걷다가 마주친 사람 중 하나가 뱀파이어일 가능성은 벼락을 맞는 것만큼 낮은 확률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춰봤던 오래된 책을 덮으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원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고 그럴 듯하게 꾸며놓은 도시괴담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했다.

저녁을 같이 할 예정은 아니라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나오면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시계바늘이 앞서 있었다. 도서관으로 돌아가자니 이미 문을 닫았고 다른 곳을 들릴 그 정도의 여유는 없을 것 같았다. 달리 할 일이 남지도 않아 가볍게 걸으며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길에는 지도가 함께했다. 길을 세 번은 잃어도 찾아 갈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굳이 고생을 사서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검은 코트를 입은 아스타리온이 눈을 들어 다가오는 인영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서로에게 왜 먼저 왔냐는 이야기를 할 것까지는 없었다. 어차피 이 특이한 만남에 사소한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스타리온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며 잠시 걷자고 제안하면 이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타리온이 나란히 걸으며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펜으로 그린 것처럼 뻗은 콧대는 옆에서 바라보았을 때 더욱 도드라졌다. 길어진 햇빛을 받은 눈빛이 유독 붉게 빛나 겨우 고개를 돌리자 문득 책에서 읽은 내용 중 하나가 떠올랐다. 상대를 현혹시키기 위해 아름다운 외모를 갖는 경우가 많다. 그 문장에 누구보다 어울리는 사람이 지금 눈 앞에 있었다.

“있잖아, 아스타리온.”

“왜, 자기야?”

“어… 아냐. 별 거 아냐.”

돌아온 시선은 피처럼 붉은색이었다. 오히려 확실한 색깔에 물어보는 것을 포기하고 고개를 흔들자 아스타리온이 웃으며 해가 거의 넘어가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어찌나 솔직한지, 눈에서 시선을 떼질 못하는 작은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다 보일 지경이었다. 이미 확신이나 다름없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직접 묻지는 않았으니 아스타리온은 먼저 말문을 터보기로 했다. 어차피 손등이 스칠 정도로 가까이 서 있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정보도 없었다.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말하는 정도는 이미 몇백 년을 살아온 존재라는 것에 비하면 별 것 아니었다.

“저녁에 만나서 다행이야. 아무리 자유를 찾았다고 해도 오늘처럼 햇빛이 강한 날은 뱀파이어에게 좋지 않거든.”

말을 꺼내면서 아스타리온은 오른손에 낀 반지를 매만졌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짧은 여행 끝에 얻어낸 자유였다. 한 번도 빼지 않았던 반지는 이제 신체의 일부나 다름없이 인식되었으나 저보다 더 열성적이었던 얼굴이 옆에 있으면 자꾸 손이 갔다. 그리움이거나, 혹은 반가움일지도 몰랐다.

이리엘에 얼떨결에 아스타리온과 눈을 마주쳤다. 내가 입으로 생각하는 걸 꺼냈던가? 자유를 찾았다는 말에 아침부터 종일 이어지던 생각에는 가장 중요한 사실이 빠져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뱀파이어라면 햇빛 아래 설 수 없을 텐데, 아스타리온은 노을이 지는 지금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어쩌면 햇살이 내리쬐는 하늘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서 무의식이 지워낸 정보일지도 몰랐다. 아스타리온은 머릿속을 들여다 보는 것처럼 대화를 이끌었다. 그러니 정리하자면, 아스타리온이 뱀파이어가 맞았고 다행스럽게도 어떠한 목적이 있지는 않다고 하는 말에 순간 서늘했던 목을 쓸어 만졌다.

“그렇게 보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도 돼. 뱀파이어랑 나란히 있는 상황이 흔한 건 아니잖아?”

“아니, 오래 전부터 여기서는 보기 어려워졌다고 해서…”

“확인해볼래?”

아스타리온이 길을 가로막으며 마주보고 서자 새삼스럽게 체격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스라도 할 것처럼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와, 혀로 송곳니를 핥으며 벌어지는 입술을 보며 이리엘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어주었다. 손가락을 살짝 입에 머금으면 예상한 온도와 다른 서늘함에 잠시 몸을 떨었고, 그대로 송곳니가 살갗을 찢었다. 피가 흐르는 방향이 바뀐 것 같은 느낌과 차갑고 날카로운 아픔이 잠시 손끝에 머물렀다. 손가락을 타고 피가 흐를 틈도 없이 말캉한 살덩이가 액체가 지나간 자리를 핥았고, 그리 깊지 않은 상처에서는 머지 않아 피가 멈췄다. 바람이 불었으니 그럴 리가 없는데도 비릿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지는 것 같이 어지러웠다.

짧은 시간이 지나고 아스타리온이 상처 위로 가볍게 입을 맞췄다. 누가 본다면 연인끼리 사이가 좋다며 웃고 지나갈 손키스와 같은 모양이었다. 의심할 여지도 없는 뱀파이어가 조용히 환호하듯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이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 같다는 투로 바라보는 눈빛에 의문이 들어 이리엘이 입을 열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아무리 사람이 없다고는 해도 골목 한복판에서 뱀파이어에게 피를 준 사람이 되었으니 괜한 걱정이 들었다.

“그런데 아무 사람 피나 마셔도 되는 거야?”

“이건 ‘마신’ 게 아니라 ‘맛본’ 거지. 정말로… 맛있는 피였어, 자기.”

입맛을 다시며 끌어올려진 입꼬리가 온 마음을 다해 만족스러움을 표하고 있어 이렇다 할 대꾸를 하지 못한 채 다시 아스타리온을 따라 걸었다. 아직 손끝에 남은 감각은 이가 박혀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괜히 손을 등 뒤로 숨기며 쥐었다 펴기를 몇 번, 흐르던 피가 멈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다시 확인하려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잠깐의 이벤트를 제외하면 크게 다르지 않은 만남이었다. 나란히 걷다가, 해가 완전히 지면 아스타리온이 이끌어 어제와 다른 바에 앉아 나란히 이야기를 하고, 가끔 손이 스치면 이리엘은 혼자 놀라 헛기침을 하고는 했다. 아스타리온은 근처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이제서야 꺼냈고, 그 덕에 주변은 손바닥 안이라고 말하며 턱을 괴고 웃었다. 이어서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으나 이리엘은 자신이 하는 운동에 대해 슬쩍 언급했고 아스타리온이 흥미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정말 데이트 아닌가? 부드럽게 위로 올라가는 입술를 보고 있으면 데이트와 같은 그런 만남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마주보고 앉아 웃음을 터트리고 가끔 눈살을 찌푸리며 농담을 받아치기를 한참이었다. 해가 완전히 지평선 뒤로 떨어진 뒤에야 두 사람이 거의 문을 닫기 직전의 바를 빠져나왔다. 순간 튀어나오지 않은 말에 그대로 대화가 멈추고 각자 생각에 잠겨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가로등이 고장난 것처럼 깜빡거렸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웃음 속에서 이리엘은 여행 계획을 바꾸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이 두 사람 모두가 예감하는 마지막이었다. 분명 흔들렸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더 많은 것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등을 떠밀었고 오랜 소원과 잠깐 만난 인연을 맞바꾸기에는 고민할 시간이 부족했다. 인사를 건네려는 이리엘에게 아스타리온이 몸을 기울이며 한 걸음을 좁혔다. 다가오는 걸음에 옅은 풀향의 공기가 밀려들었다. 이리엘은 처음으로 향수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꼈다.

“정말 여기 남지 않을 생각이야? 분명 돌아오게 될 텐데, 원한다면 내기라도 할 수 있어.”

“모르겠어. 너는 나에 대해 어떻게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거야?”

“아마 너는 모를 테지. 말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다만, 하나는 대답할 수 있어. 나는 너를 알고 있고, 언제나 네게 진짜를 가지게 하고 싶었어.”

조용히 한 마디씩 단어를 골라가며 뱉는 말은 확신으로 가득했다. 어째서? 의문이 고개를 들다가도 허공을 바라보며 잠시 무거워진 얼굴에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이리엘은 그것에 제게 짓는 표정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말을 이어가던 아스타리온이 작게 험한 말을 뱉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모든 것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면 이리엘은 분명 돌아와 찰나에 불과한 순간들에 함께 할 것이다. 그러나 자비로우면서도 잔인한 신이 제 편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확신과 의심은 서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처음 제 마음을 앞에 꺼내었던 날처럼 손을 내밀었다. 언제나 깊게 생각하기보다는 행동이 앞섰던 제 사랑을 떠올리며. 그리고 그 어떤 목적이 덧씌워지지 않았던 그날의 고백처럼 아스타리온은 서 있었다. 이리엘이 손을 겹치면 그 위로 더 큰 손바닥이 덮였다. 아스타리온은 웃으며 장난스럽고 다정하게 이마를 맞대었다. 부드럽게 진회색 머리카락을 넘기며 볼을 감싸는 손길에 그대로 몸을 맡긴 채 턱을 들었고, 부드럽게 입술이 닿았다. 짧게 이어졌던 키스가 끝나고 이리엘은 고개를 숙인 채 들지 않았다. 이대로 다시 눈이 마주친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애써 마음을 다잡는 중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손길에 다시 눈을 감았다.

***

또 다시 비가 내렸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서 점차 빗줄기가 굵어지고, 금방 그칠 비는 아니라는 듯 요란하게 창문을 두드렸다.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세상은 고요했으며 거슬리는 소음이 가득한 곳으로 돌아가 있었다. 비가 온다고 해서 꼭 외출을 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굳이 나갈 이유가 없었음에도 아스타리온은 투덜거리면서 우산을 챙겨 들었다. 빗물에 옷이 젖는 건 별로 좋은 기분이 들지 않았으니 제 몸을 가리고도 남을 큰 검은 우산이었다.

미술관 주변에는 비를 피하거나 일회용 우산을 쓴 관광객들이 가득했다. 빗소리에 대화가 섞여 사라지면 오히려 조용한 주변이 마음에 들어 건물로 들어가기보다는 잠시 정원을 거니는 쪽을 택했다. 들리는 건 오직 빗방울이 바닥에 고인 웅덩이를 때리는 소리뿐이었다. 걸음을 옮기다가 아스타리온의 눈을 잡아 끈 것은 연한 파란색이었다.

그것이 누군가 입고 있는 자켓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기까지는 몇 초가 더 걸렸으며, 베이지색 우산 아래 짧은 회색 머리카락이 흔들거리는 걸 먼저 눈에 담았다.

내리는 비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으나 그대로 세상이 멈춘 듯 오직 한 사람이 존재했다. 오로지 비만 내릴 뿐인 하늘을 올려다 보던 사람에게 천천히, 그러나 큰 보폭으로 다가가면 시리게 푸른 눈과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을 한 글자씩 곱씹으며 입 밖으로 뱉었다.

“이리엘.”

“나도 날 모르겠으니까 묻지 마. 그냥 너와 걸었던 길이 계속 떠올라서…”

당황하지 않은 얼굴에서는 인사보다 먼저 준비했던 것처럼 말이 이어졌다. 무어라 변명이 튀어나오기 전에 고개를 숙여 아직 말이 다 끝나지 않은 입을 막았다. 두 개의 우산 중 작은 쪽이 땅바닥에 떨어질 듯 아래를 향하는 것도 모른 채 입을 맞춘 상대의 목을 끌어 안았다. 맞닿았던 두 입술이 떨어지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아서 이리엘이 손을 들어 놀란 입을 다시 틀어막았다. 어쩌면 보채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잠시였다. 아스타리온은 우산을 들지 않은 손으로 이리엘의 허리를 감싸며 끌어당겼고 완전히 하나의 우산 아래 선 두 사람이 존재했다.

“돌아온 걸 환영해, 내 사랑.”

언제나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분명 솔직하게 드러낸 감정을 눈에 담고 있으면서도 입으로는 언제나 상황을 고려하며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다행스럽게도 그것을 사랑이라 말하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에 아스타리온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이리엘이 속삭였다. “아스타리온, 네가 여기 있을 것 같았어.” 날씨가 여전히 흐리고, 당장 천둥이라도 칠 것처럼 검은 먹구름이 가득했다. 그것이 세상으로부터 두 사람을 분리하여 오직 그들만의 세상이 있을 뿐이었다.


카테고리
#기타
작품
#bg3
추가태그
#드림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