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되는 이유 1

비승천 현대환생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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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승천 루트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밤이었다. 귀를 기울이면 느린 숨소리 하나가 겨우 들릴 만큼 정적에 가까운 순간이었으며 침대 맡에 앉은 뒷모습은 멈춰 놓은 그림이나 다름없었다. 지나간 시간이 흔적으로 남듯 자글자글한 손이 힘겹게 아스타리온을 향했다. 들리지 않을 만큼 옅은 목소리로 짧은 대화가 오고 가나 싶다가 머지않아 짧은 숨이 빠져나가고 한 사람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아스타리온은 점점 자신과 같은 온도로 변해가는 손을 붙잡았고 조금이라도 온기를 잡아두려 얼굴을 묻었다. 몇 백 년 만에 처음으로 신을 찾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정해진 이별이라고 한들, 준비할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은 막을 수 없었다.

세상의 시작이자 끝일 것 같던 사랑이었으나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몇 년은 눈을 감았나 싶을 정도로 흐릿하게 지나가고 먼지가 쌓이면 빈 자리가 겉으로 드러날까 봐 더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다 생각이 난다는 자각이 들어 문득 고개를 들면 주변은 여전했다. 끊어질 리 없는 삶은 계속되고 있었으며 같은 일상이 반복되었다. 결국 이리엘이 바란 것처럼 혼자서도 잘 서 있었으니 거 봐, 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아 아스타리온은 햇빛이 내리쬐는 길거리에서 혼자 웃음을 터트렸다.

그 뒤로는 평소와 같은 생활이었다. 다만,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 십 년이면 산과 강이 모두 변한다지만 몇 배나 긴 시간동안 사람들이 바뀌는 속도와는 비교를 할 수 없었다. 어느 누가 고철덩어리를 달리게 할 생각을 하고, 올챙이로 연결되었을 때나 가능하던 짓을 손바닥 만한 기계로 하게 만들겠는가. 아스타리온은 여전히 낯선 세상에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그대로 커튼을 밀어 닫았다. 차라리 발더스 게이트 항구가 천국이겠어. 수많은 사람들의 말소리와 도로를 점령한 차들이 내는 소음은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따라잡기에 돈보다 좋은 것은 없었다. 시간은 곧 돈이었으니 남들보다 무한한 삶을 사는 덕을 톡톡히 보며 조금씩 제 모습을 숨기고 살았다. 어느 누구 덕분에 햇빛 아래서 다시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는 세상에서 눈에 띄는 것이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스타리온은 종종 모든 것이 보관된 미술관에 발을 들였다. 사람들이란 신기한 집단이라서, 과거에 이미 흘러간 시간을 잡아두기 위해 별것 아닌 그릇이나 옷을 모아두곤 했으니. 가끔 무언가 내릴 것처럼 흐린 저녁이면 마감 직전의 미술관을 몇 번 돌아보고 나오는 날이 있었다. 그 중에는 지난 날을 떠오르게 하는 유물이나 작품이 있어서 추억에 잠기기에는 알맞은 시간과 장소였다.

비도 아니고 예고 없던 눈이 흩날렸다. 아스타리온에게 흐린 날씨만큼 익숙한 하늘은 없었으나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얼굴이 꽤 볼 만했다. 날씨를 예언하고자 했던 자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예측을 했던 이는 드물었다. 어차피 날씨를 맞추거나, 아니거나 라는 두 가지 결과로 나오는 것은 같았다. 회색 빛의 날씨 덕분인지 미술관에는 사람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이런 날에 돌아다니는 건 뱀파이어 같은 놈들이겠지. 아스타리온이 조소하며 아직 불이 켜진 미술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특별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는 안내 문구를 지나치면 몇 번이나 보았던 익숙한 포스터가 눈을 사로잡았다.발더스 게이트, 그 영광의 도시 또한 쇠락하여 유리 칸막이 속 물건으로만 남아있었다. 살아온 세월에 비하면 찰나와도 같았던 여행을 잠시 회상한 아스타리온이 전시관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림으로만 보는 혼란스러웠던 당시는 평온하기만 했으니, 오직 그림 속 어딘 가에 서 있었을 사람만이 그날의 바람과 시끄러웠던 소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림을 따라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두 굽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어차피 아무도 없을 미술관이었다. 만약 옆에 한 사람이 있었다면 가만히 팔짱을 끼며 눈짓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스타리온은 일단 아무렇지 않았다.

과거의 흔적들에 눈을 두고 걷다 보니 멀리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런, 사람이 있었네. 발소리를 죽이며 커다란 조각상 하나를 돌자 짧은 코트를 걸친 이가 벽면 전체를 채운 초상화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어깨에 닿지 않는 짙은 회색의 머리카락이 구불거리며 흘러내렸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이 말할 수 없이 익숙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자주 서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림 속 어느 오래된 시대 복식의 푸른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 이리엘이 아닌 것처럼, 눈 앞에 있는 여행객은 단지 같은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뿐이었다. 이미 몇 번이나 회색 머리카락을 보며 더는 들이마시지도 않는 공기가 멈춰버린 경험을 했음에도 그러나 이번에는 무언가 달랐다. 발더스 게이트의 영웅이라며 자신과 동료들, 이리엘이 그려진 그림을 우연히 보았을 때보다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아스타리온은 누가 들었다면 바보 같은 짓을 했다며 타박할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소매치기를 피하기 위한 기술이 늘었다고 해도 아스타리온은 코웃음을 칠 수 있었다. 심지어 반쯤 열린 가방을 그대로 들고 다닌다면 지갑 하나를 슬쩍 손에 드는 정도는 눈을 감고도 가능한 일이었다. 검은색 지갑이 어느 새 손에 들렸고 등 뒤로 살짝 숨기며 반으로 접힌 지갑을 열었다.

이런 수고스러운 짓을 사서 하는 이유는 오직 확인이었다. 저도 모르게 뒷모습이 닮았다는 이유로 말을 걸 뻔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불확실함으로 들떴던 감정이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을 방법이었으며 혹시나 하는 마음을 밀어낼 수 있을 터였다. 닮은 사람인지, 만약 그저 우연의 일치로 닮았을 뿐이라면 얼마나 우연이 지독한지, 그리고 기나긴 기다림 끝에 인내심이 바닥난 탓을 할 뿐이었다.

슬쩍 펼쳐본 지갑에는 신분증이 바로 끼워져 있었다. 이 얼마나 현대적인 문물인가. 손바닥 절반 정도 크기의 플라스틱에 알고 싶은 모든 정보가 새겨져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손 안에서 카드를 꺼내어보고 그대로 지갑을 닫았다. 동시에 다시는 부르지 못할 것 같은 이름이, 잊었던 발음이 입 안에서 굴려지다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리엘?"

기억하는 것보다 짧아 턱 끝에서 단정하게 흔들거리던 머리카락이 고갯짓을 따라 휘날렸다. 비가 내리기 전의 먹구름 낀 하늘이 딱 저 머리카락과 같았다. 젠장. 아스타리온이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욕을 뱉었다. 웃음이 터져 나오려다 잇새로 샐 뿐이었다. 몇 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름을 부른 사람을 찾더니 그때와 똑같이 깊고 푸르게 빛나는 바다가 아스타리온을 향했다.

"제 이름이 맞는데, 절 아세요?"

"설마, 지갑이 떨어져 있길래 주웠을 뿐이라서."

애써 태연하게 말을 꺼내려 노력했지만 우습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물건을 잃어버릴 뻔했다는 당혹감이 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숨겨주고 있었다. 세상에, 짧은 감탄과 함께 가방을 뒤져보더니 아스타리온의 손에서 지갑이 넘어갔다. 지갑을 살펴보면서도 곁눈질로 아스타리온을 훑어보는 모습이 그날과 같았다. 미술관에서 지갑을 떨어트렸는데 몰랐다고? 딱 그렇게 생각하는 눈빛이었으니 환한 웃음 하나로도 넘어가기에는 충분했다.

이리엘이 눈을 크게 뜨며 웃었다. 처음 보는 낯선 이에게 갖는 경계심을 푸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 심지어 한 번 넘어오게 만들었던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쉬운 일이었다. 아스타리온이 자세를 고치는 척 거리를 좁혔다. 완전히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으나 이 정도는 허락해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기대에 부응하듯 익숙한 목소리가 인사를 전했다.

"감사해서 어떡하죠. 여행 중이었는데 덕분에 살았어요."

"그럼 잠깐 시간 내줄 수 있어요? 여기도 방금 약속이 취소된 사람이라."

환생에 관여한 존재가 있다면 손끝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황하거나 웃을 때마다 움직이는 눈꼬리를 따라 유독 도드라지는 눈 밑 점이 아스타리온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약속이라고 해도 미술관에 오는 것이 전부였으니 취소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다만, 수없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아스타리온은 거짓말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불멸의 삶에서 유일했던 사랑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시작했기 때문인지, 의심하는 눈빛으로 가득한 시선이 결국 끄덕임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고 싶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이리엘이 잠시 고민하다가 아스타리온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어쩌면 이번에는 호기심일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오래 전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절반은 성공했고, 다른 절반은 실패했기에 완벽했던 계획이었다. 두 번이 어렵지는 않을 터였다.

"좋아요. 그 쪽은..."

"아스타리온."

"아스타리온. 그럼 같이 좀 걸을래요?"

어깨에 둘러 멘 가방과 지갑에 들어 있던 온갖 패스들까지, 누가 봐도 여행을 온 사람이었으니 긴 설명 대신 이름이면 충분했다. 걷자는 말에 아스타리온은 작게 헛웃음을 삼켰다. 아마 눈이 내리는 것을 모르고 있을지도, 혹은 날씨를 무시하고도 걷기를 바라는 건가. 이리엘은 드물지 않게 하늘에서 뭐가 내리든 산책을 가자며 장난스럽게 손을 잡아 끌곤 했었다. 아스타리온이 오랜 시간 느끼지 못했던 당혹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 지었다. 걷는 것을 어찌나 좋아하시는지. 때마침 미술관 관람 시간이 끝났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마 두 사람만을 위한 안내일 것이 분명했다. 함께 가자는 제안 앞에 붙으려던 익숙한 호칭이 입 안에서만 맴돌다 사라졌다. 일방적으로 쌓아둔 애정을 잠시 내려놓고 새로 시작하는 마음에 어렴풋이 그리움이 떠올랐다.

미술관 밖으로 나란히 걸어 나오면 안개처럼 뿌려지던 눈이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내리고 있었다. “정말 산책이라도 할 생각이야?” 아무리 고대하던 첫 만남이라고는 하나 걷다가 온통 젖어버릴 판이었다. “어차피 여기 있을 수도 없잖아요.” 이리엘이 입술을 만지며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들었다. 아스타리온이 달라는 듯 손을 내밀자 주변을 둘러보고는 두 사람 사이에 우산이 하나뿐이라는 걸 눈치채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밤중의 깊은 숲 속도 아니었으며 인기척이 모두 잠들었던 발더스 게이트의 어느 새벽 산책도 아니었다. 시끄러운 차 소리와 텁텁한 공기, 눈까지 내리는 최악의 날씨에서 아스타리온은 다시 먼저 걸어가는 발걸음을 따라 밟았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기에는 완벽한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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