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y me!

집밥이 평화롭게 지내다가 연애결혼하면 좋겠다

가내 타브 설정이 많습니다(이름, 체형 등)

조용할 날이 없이 귀가 따가울 정도로 온갖 지시가 이어지던 중이었다. 안타깝게도 처음 언더다크로 향하던 길에 스폰의 수가 7,000명에서 많이 줄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남은 사람들을 하루 아침에 통제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아스타리온은 오늘도 열을 내며 제멋대로 튀어나가려는 스폰들을 막아세워야 했고, 누가 가까이 온다고 해도 순간 신경 쓰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에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익숙하고도 낯설었다.

"미스터 안쿠닌?"

어느 새 다가온 목소리는 자주 입는 짙은 푸른색을 띠는 드레스에, 상체를 얇은 숄로 덮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다른 날과 같았다면 가까이 와서 일부러 크게 발소리를 내거나, 달콤하게 애칭을 입에 담았을 사람이었으나 오늘따라 분위기가 고요히 내려앉았다. 

스폰 중 하나가 악을 쓰려다가 조용히 발을 옮겼다. 아무리 그동안 당한 게 있어 생존에만 눈이 멀었다고 해도 연인관계에서 불리는 저 호칭이 얼마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아스타리온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웠던 목소리가 낮게 깔리니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영역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면 괜한 불똥이 튀기 전에 자리를 떠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아스타리온이 빠르게 멀어지는 그림자들에 몇 번 더 손가락질을 하며 이곳 저곳을 짚고는 걸음을 돌렸다. 찾으러 올 만큼 늦은 시간도 아니었으며 다른 날보다 소리를 더 지르긴 했지만 지금까지 딱히 그 문제를 언급한 적도 없었다. 크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음을 확인하고 조금 더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별다른 표정 없이 팔짱을 끼고 선 이가 가까워지는 인영에 시선을 두고 느리게 고개를 까딱였다. 아스타리온은 제 입가를 쓸어 만지며 눈앞에 선 연인을 바라보았다. 잠시 눈이 마주친 뒤에는 따라서 입을 열었고 평소에 말을 걸듯 평범하며, 오히려 기쁨에 찬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라도? 아, 물론 일이 있어야 부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내 사랑."

"하. 너무 잘 알아서 농담도 안 통하네. 자기야, 괜찮으면 잠깐 걸을래?"

순식간에 일부러 입꼬리를 끌어내리며 굳었던 표정이 녹아내렸다. 원래 호칭을 바꾸면 당황한다고는 하지만, 남을 속이고 살았던 지난 날을 밟고 일어난 연인에게는 통할 리가 없는 장난이었다. 기대하던 반응이 아니라 아쉬운 기색을 보이면 아스타리온이 일부러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미 다 들켰는데? 이리엘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아스타리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비록 낭떠러지가 곳곳에 있고, 비버뱅에, 일반적으로 꺼려지는 요소가 한 가득 있는 지역임에도 이리엘은 신기하게도 그 안에서 걷기 좋은 길을 찾아내곤 했다. 당장 며칠 전 밤을 떠올리면 부드럽게 목을 감싸 안으며 같이 걷자고 속삭이는 요청을 거절하기는 힘들었으니, 언제나 얇은 숄을 들고 활짝 문을 연 이리엘을 따랐다. 추위를 타지 않는다는 말에도 어깨에 숄을 걸친 채 팔짱을 끼며 다가오는 연인을 사랑한 탓이었다. 

뒤따라 가는 길에는 유독 발광버섯이 많았다. 손을 뻗어도 갓에 닿지 않을 크기의 버섯들이 곳곳에 있으니 울창한 숲을 걷는 것과 비슷하게 그림자가 일렁였다. 아스타리온은 이제 햇빛 아래 층층이 겹친 나뭇잎이 어떤 그림자를 만들어내는지 알고 있었다. 또한, 그림자들이 만들어낸 풍경을 함께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느낀 건 지금 옆에 있는 한 사람과 겪었던 순간이었다. 그러니 아쉬움보다는 그 순간의 찬란함을 되새길 수 있었다.

"아스타리온."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것을 끌어낸 건 정적 끝에 부른 이름이었다. 이리엘이 서늘한 손을 끌어와 잡았다. 자, 이제 내 말 끊으면 헷갈리니까 안 돼. 단단히 당부한 이리엘에게 알 수 없는 단호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곧이어 미리 준비했던 것처럼 빠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 계속 쳐다보고 싶었는데 보통은 그걸 첫눈에 반한다고 하니까."

"오, 갑자기 이런 고백이라니... 정말 사랑스럽네."

아스타리온이 눈을 크게 떴다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당황한 기색이 깊은 애정으로 바뀌는 데에는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제게 돌아오는 눈빛이 매일 밤 마주하는 것과 같아지자 이리엘은 다시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을 이어갔다.

"누가 열심히 꼬신 덕분이지. 물론 중간에 많은 일이 있긴 했지만,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어."

"많은 일?" 짧게 코웃음을 치자 아직 말이 덜 끝났다며 이리엘은 손가락을 입가에 올렸다. 처음 아스타리온이 사랑일지도 모른다 말했던 순간에 선을 그었던 사람이었다. 물론 단호한 거절이 아니었기에 이 또한 결과적으로는 사랑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승낙 뒤에 따라온 염려였으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친구이자 동료로 지냈던 시간에 조금의 접촉도 없었냐 되묻는다면 어깨를 으쓱일 수밖에 없었다. 입술이 겹쳐지고 서로가 깊은 곳에서부터 터트린 탄성을 수도 없이 듣고, 느꼈으니 결국 다른 이름으로 포장된 감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일련의 과정에 제 탓이 없지는 않았으니 이리엘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죽하면 손을 잡고 야영지로 돌아오던 순간에 모두에게 가장 먼저 들은 말이 '마침내!' 였을까. 그러니 많은 일이었다는 짧은 설명으로 치부하는 것에 아스타리온이 웃음을 터트리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다만, 여전히 웃음기가 만연한 얼굴에 눈을 한번 흘기는 정도는 허락된 선이었다. 이어서 어깨를 가볍게 밀치자 그대로 뒤에 있던 그루터기에 아스타리온이 떠밀리듯 앉았다. 거의 처음으로 늘 올려다보던 시야가 뒤집힌 순간이었다. 이리엘이 잠시 눈을 피했다가 아스타리온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맑은 하늘이 검푸른 바다에 비친 것처럼 투명한 눈동자가 분명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너와 연결되기를 바라. 확실하게 정의된 무언가로 말이야. 아스타리온.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설명하는 전부일 수는 없잖아."

만약 아스타리온을 설명하라고 한다면 사랑하는 연인, 아마 그 정도로 정리될 터였다. 그러나 이리엘이 겪을 하루는 더는 앞으로만 나아가는 여행이 아니었으며 결국 한 바퀴를 돌아 시작점으로 와야 하는 여정을 걷고 있었다. 모든 것은 아스타리온이 있었기에. 그러니 그 뻔하고도 평범한 관계로 묶이기를 바라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입이 바짝 마르며 수없이 준비했던 말이 뒤섞여 아무 것도 꺼낼 수가 없었다. 사랑을 깨달았을 때 등을 떠밀었던 와인도 없었고 처음으로 자각한 감정에 취했던 자신도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마음만큼은 그때와 같았으니, 이리엘은 크게 숨을 내쉬며 아스타리온의 손을 맞잡았다.

"결혼하자, 아스타리온. 시간이 허락하는 동안, 영원히 함께 할게."

영원을 사는 뱀파이어에게 시간을 들먹이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이 될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리엘은 제게 영원이라는 시간이 아스타리온에게는 찰나에 불과하다는 역설을 모르지 않았다. 하나, 두려움 앞에서 가장 강해지는 것이 사랑이었기에 확실하게 예정된 이별보다는 현재에 더욱 무게가 실렸고 그 대답이 지금이었다. 

눈썹이 오르내리고 붉은 눈동자가 더욱 커지며 맞은 편에 선 사람을 담았다. 아스타리온은 이제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밤에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이 되는 것은 익숙했으나 오늘이 프러포즈가 될 줄은 몰랐으니, 잠깐이라도 제게 순서가 넘어오도록 만들어야 했다.

"잠깐만. 지금 나한테도 말할 기회를 줘야 할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제 줄 때가 되지 않았어? 종일 왼손만 만지고 있으면서."

나 오래 기다렸는데, 자기야. 이리엘이 왼손을 들어보였다. 조심스럽게 흔든 손가락이 마치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동시에 아스타리온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내 사랑은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이었지. 자르 궁전에서도 대검을 손에 든 채 가타부타 말도 없이 달려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쩌면, 아스타리온과 관련된 일에만 몸이 더욱 앞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스타리온은 그런 이리엘이 싫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결혼이라는 행사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 앞에서 맹세를 하고, 서약을 담은 반지를 나눠 끼고, 축복 속에서 서로에게 키스를 하는 것. 그 뒤로는 두 사람의 앞날을 응원하는 박수갈채와 환호였다. 아스타리온이 마지막으로 결혼식에 참여했던 기억은 희미하다 못해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한 번의 죽음 이후로는 갈 수도 없었으며 가서는 안 될 존재로 살아오길 200년이었다. 설마 직접 결혼식을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반지를 준비하면서도 선수를 빼앗길 거라는 예상은 한 적이 없었다.

무심코 왼손을 내려다 보면 아무런 장신구 없이 깨끗하니 앞에 내밀어진 손과 같았다. 손이 가벼울수록 주머니에 넣어둔 반지가 무겁게 느껴졌다. 달빛처럼 푸른 불빛이 마침 앉아 있는 곳을 비춰내고 있었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굽히면 한쪽 무릎이 땅과 맞닿았다. 올려다 본 이리엘은 숄을 걷어내린 채 뚫어져라 아스타리온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사랑, 하나뿐인 나의 바다. 지금 당장 네게 할 수 있는 말은 남은 하루가 다 지나갈 정도로 많지만, 가끔은 당연한 한 마디가 가장 필요할 때가 있지."

사랑해. 상체를 숙이며 가까워지는 이리엘에게 턱을 들었다. 짧은 입맞춤에도 떨어지기 아쉽다는 듯 이리엘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어 늘렸다. 제일 중요한 걸 잊으면 안 되지. 맞닿은 입술에 직접 속삭이며 아스타리온이 주머니 속을 더듬었다. 내민 손을 받치며 한 쌍의 반지 중 비교적 작은 것을 꺼내들어 얇은 손가락에 밀어넣으면 제 것인 것처럼 자리를 찾아갔다. 이래서 잘 때 손가락만 만졌구나? 이리엘이 이제야 알았다며 입가를 가리고 웃자 손가락에서 반짝, 빛이 맴돌았다. 

아스타리온이 일어나 허리를 감싸자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살짝 뛰어올라 완전히 몸을 맡겼다. 그대로 들어 한 바퀴를 돌리고 다시 깊게 입을 맞췄다. 들뜬 마음에 아스타리온의 목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웃었다. 아스타리온이 대신 흐트러진 회색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기자 어느 때보다 깊게 반짝이는 눈과 마주할 수 있었다.

"부인, 그럼 결혼식은 어떻게 하기를 바랍니까?"

장난스럽고 다정한 존댓말에 이리엘이 아스타리온을 흘겼다. 아니, 뭐. 이런 걸 바랐을 것 같아서. 아스타리온이 짐짓 몰랐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한 마디를 하려던 이리엘이 어깨를 푹 내리고는 던져진 화제에 집중했다. 결혼식이라, 아주 어렸을 때 마을에서 작은 축제처럼 했던 기억을 제외하면 가본 적도 없는 곳이었다. 

"그것까지는... 생각해본 적 없는데. 가볍게 할까?"

"나의 유일한 한 사람이 되는 날이니 간단하게 끝낼 수는 없겠는데."

달빛이 밝은 날이면 좋겠군. 드레스는, 목이 드러났으면 좋겠지만 네 취향에 맞추도록 하고. 아, 우리의 소중한 친구들도 불러야겠지. 그들만 와도 가볍게 끝내는 건 불가능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내 사랑. 아스타리온이 고개를 돌리자 이리엘이 턱을 괴고 웃고 있었다. 웃을 때 눈가에 찍힌 점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순간은 가장 담고 싶어하는 장면이었다. 눈이 마주치면 잡은 손을 끌어와 손바닥 위로 잘게 입을 맞췄다. 이리엘이 웅얼거리며 손바닥에 입술을 묻고 꺼내는 말이 조용히 퍼져나갔다. 

"아스타리온, 자기 지금 기쁘구나. 그렇지?"

입꼬리가 올라갈 때 더욱 짙어지는 선이 보기 좋았고 둥글게 눈이 휘어질 때 짙어지는 착각이 들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다. 꺼낸 말은 흩어져 사라졌으나 아스타리온의 얼굴에는 미래의 어느 순간을 상상하며 상기되었던 감각이 남아있었다. 손바닥을 볼에 가져와 부비고 있던 이리엘에게 아스타리온이 이마를 맞댄 채 속삭였다. 

물론이지. 널 사랑한다고 했잖아. 어떻게 기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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