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s to.

편지 길이 차이 날 것 같다는 상상에서 시작된 글

가내 타브 설정이 많습니다(이름, 체형 등)

눈을 뜨면 햇빛 하나 없는 어둠이 방 안에 가득했다. 멀리서 들리는 시계 소리만이 귓가에 남았고 고요 속에서 반듯하게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먼지가 가라앉은 냄새가 퍼지다가, 그 사이에서 이리엘이 멀리 나갈 때 종종 사용하던 향수가 맡아지면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위를 향했다. 

일이 있다고 하여 종일 자리를 비우는 날 중 하루였다. 두 사람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집이 적막한 것이 여전히 익숙하지는 않았으나, 한쪽에 벗어둔 잠옷이라든지 누군가 앉아 있던 게 분명한 의자 같은 것을 보고 있으면 또 마냥 조용하지는 않았다. 곳곳에 이리엘이 손을 대었던 자리가 남아있었다.

잠시 집안을 거닐다 아스타리온은 식탁 위에 저를 위한 붉은 액체가 병에 담겨 있는 것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날 마셔요, 말하는 것 같은 한 손 크기의 유리병이었다. 귀엽기도 하지. 기껏해야 하루가 채 되지 않을 시간이었으나 마음만큼은 며칠 자리를 비울 것처럼 굴었다. 아스타리온이 뚜껑을 열며 가볍게 비린 냄새를 맡았다. 차가운 유리가 입에 닿을 때면 오히려 송곳니로 제 것이나 다름없는 부드러운 목을 물어 한 모금을 들이 마시고 싶어질 뿐이었다. 그러나 정성을 생각하자면 오전이 다 지나기 전에 마시는 게 나을 터였다. 

병을 들어올리자 밑에 깔려 있던 종이가 바닥에 달라붙었다가 팔랑 떨어지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대로 탁자 위에 놓인 종이는 다행히 구겨지지 않았고, 창백하고 긴 손가락이 종이를 집어 들자 너무 익숙한 필체가 아스타리온을 반겼다.


아스타리온,

어제도 말했지만 볼일이 있어서 잠깐 다녀올게.

저녁에 봐, 자기. 

                                                           이리엘


어디서 잘라낸 것 같은 종이에는 세 줄을 제외하고 그 무엇도 적혀있지 않았다. 물론 서명을 포함하면 4줄이라고 해야겠지만. 혹시나 해서 뒤집어 봐도 연하게 검은 글씨가 반전되어 비칠 뿐이었다. 다시 앞으로 돌려서 글씨를 읽어내려가면 애정어린 호칭에는 머뭇거린 것처럼 글자가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두어 번 읽으면 외워버릴 것 같은 짧은 편지를 보고 있다가 기분 좋은 실소가 터져나왔다. 바로 옆에 있을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일은 드물었다. 게다가 자신은 글을 쓰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며 그동안의 일을 기록해본 적도 없다 말했던 연인이었으니 더욱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혹시나 날아갈까 유리병으로 눌러놓은 이 편지는 보다시피 이리엘이 쓴 것이 맞았다. 아마도 어젯 밤, 장난스럽게 어딜 가냐며 물었던 일이 굳이 따지자면 이 편지의 화근일 것이다.


"하, 이걸 쓰려고 그렇게 돌아다닌 거야?"

입가를 매만지며 마저 웃음을 터트렸다. 잠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를 전부 무시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아스타리온은 새벽부터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레 집안을 오가는 걸음을 세어볼 수도 있었다. 어차피 깨어 있을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 마치 깊은 잠에 든 사람을 위한 것처럼 움직임을 조심했다. 서랍을 달칵거리는 소리와 펜촉이 얇은 종이를 긁어내는 작은 소음까지 들리고 나면 무거운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가 닫히고, 다시 침묵이었다. 

그렇게 수상할 정도로 열심히 돌아다니던 소음의 결과는 지금 손에 들려있었다. 사랑하는 연인이 남긴 쪽지는 말해야 하는 용건만 적혀있었고, 그마저도 짧은 문장에 바람이라도 불었다면 종이가 날아가버리고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이 어설픈 사랑에 아스타리온은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천천히 걸음을 돌려 계단을 올라가면 책장으로 가득한 방이 곧장 이어졌다.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나란히 앉아 책을 읽었으니 실제로는 구색만 겨우 맞춘 책상에 다가가 종이를 들지 않은 손으로 잉크병을 열었다. 의자를 빼고 앉은 아스타리온의 손끝에서 첫 단어가 적히고, 다음을 이어가지 않을 즈음에 현관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억세게 두드리는 것을 보니 원하는 이는 아닌 듯하여 깊게 한숨을 내쉰 아스타리온이 겨우 시작한 편지를 내려놓았다. 어쩐지 답장을 당장 적을 수는 없는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밤이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햇빛이 없는 시야가 눈이 부시지 않아 마음에 드는 것과는 별개로 공기 중에 떠다니는 포자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하지 않았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다가 재채기가 나올 것 같은 기분을 애써 몰아낸 이리엘이 다시 발을 박차며 걸음을 옮겼다. 조급한 발소리가 땅을 박차며 가까워지고, 뛰어오는 동안 갈라진 목을 가다듬으며 헛기침을 했다. 

꼬박 하루만에 보는 익숙한 건물에 그제야 뜀박질이 멈췄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 닫혀있던 문을 열면 작은 등불 하나가 이리엘을 반기듯 현관에 켜져 있었다. 덕분에 문턱에 걸려 넘어지는 일은 피했지만, 다른 인사가 없어 허전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나 왔어. 아스타리온?"

불이 밝혀져 있는 내부를 살핌과 동시에 윗층에서 느릿하게 걸어다니는 발걸음이 들렸다. 마치 찾지 않아도 여기 있다는 것처럼 일부러 낸 소리가 천장을 타고 울렸고 그제야 작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누군가 맞이해주는 일은 낯설고도, 익숙해지면 허전해지기 마련이었다. 

목소리가 들렸으니 아스타리온이 곧 내려올 터, 서둘러 짐을 내려놓으려 탁자에 가까이 가자 집을 나설 때와는 달라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쁘게도 유리병은 비어있었고 눌러놓았던 작은 쪽지 대신 베이지색 봉투가 하나. 봉투를 이리저리 살피자 한쪽 구석에 이름이 적혀있었다. 의심할 것도 없이 제 편지임을 눈치채고 천천히 어깨에 둘러 메고 있던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았다. 편지를 받아본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편지는 제 자리가 있는 사람들만이 받을 수 있었다. 늘 머물러있지 않고 어딘가를 떠돌아다녔으니 이리엘을 찾을 이도 없었으며, 여태까지는 편지를 보낼 사람도 없는 것이 당연했다. 다른 봉인도 없는 편지를 뜯으면 단정한 글씨체가 잉크 하나 번지지 않은 채 종이 위에 나열되어 있었다. 


Darling,

나의 사랑스러운 부인께서는 "자기"라고 부른다고 모든 편지가 낭만적으로 변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그래도 혼자 하루를 보낼 날 위해서 새벽부터 서랍을 덜컹거리며 적어두고 떠났으니, 답장을 해야겠지.

별다른 일은 없어. 노움에게 시비를 걸던 걸 잡아오고, 보수가 필요한 곳을 찾고. 평소와 똑같은 날이야.

다만, 네가 없으니 내게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는 놈들이 많더군.

물론 그런 것들이 나쁘지는 않아. 내 옆에 누군가 있는 모습이 당연하게 여겨진다는데, 어느 누가 사양하겠어.

예외로 나보다 널 먼저 찾는 건 따로 기억해뒀어. 걱정 마, 자기. 다른 걸 하려는 건 아니니까.

땅 위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제 곧 해가 질 시간이야. 네가 시끄럽게 현관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곧 들릴 것 같네.

짧은 여정이겠지만 어서 내 곁에 돌아오길.

                                                                                                                                                      아스타리온


달려가며 소리를 질렀을 이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있었을 모습을 상상하면 깃펜에 묻은 검은 잉크가 편지지 위로 자유롭게 글씨를 써내려가는 장면이 생생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아스타리온이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혼자 편지를 읽도록 기다리고 있던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고개를 들어 편지를 쓴 이를 올려다보면 책장 앞을 서성였던 긴 발걸음과는 달리 양손에는 종이뭉치 하나 들고 있지 않았다. "책은?" "오, 시계를 봐. 자기. 이미 한참 전에 다 읽은 지 오래야." 아스타리온이 양손을 보여주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니 오직 한 사람을 기다리며 서성이던 걸음이었고,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어렴풋이 느끼던 생각이 확실해지자 망설임 없이 편지를 들고 걸음을 움직였다.

손바닥으로 아스타리온의 손등을 덮으며 거리를 좁히자 가까워진 숨소리에 기분 좋은 긴장감이 묻어났다. 웃음기가 어린 채로 편지로 입가를 가리고 턱을 들면 그 위로 입술이 겹쳐졌다. 얇은 종이 봉투가 사이를 가로막은 것이 아쉽다는 듯 허리를 감싸는 손길이 조금 더 몸을 가깝게 붙였다. 짧은 입맞춤에 눈이 휘어지도록 웃음을 터트린 이리엘이 봉투를 탁자 위에 올려두었고 가슴팍에 이마를 기대며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 물었다. 

"자기. 당신 정말 귀엽고 날 사랑하는구나?"

"물론이지. 그 당연한 사실을 이제 알았다니 조금 서운해도 되나? 하루 온종일 혼자 두고 간 게 누군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은데."

땅을 향해 내려간 입꼬리를 장난스럽게 손으로 잡아 늘렸다. 그 탓에 잠시 놓았던 손이 다시 이리엘을 잡아 끌었다. 다녀왔어. 목을 끌어안고 속삭이는 인사가 간지러웠다. 웃은 덕분에 눈꼬리에 가깝도록 더욱 올라간 검은 점에 아스타리온이 짧게 입을 맞췄다. 고개를 들며 일부러 닿아온 살짝 벌어진 입술이 분명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빈틈없이 입술을 겹치고 천천히 혀를 밀어넣었다.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뒤섞인 살덩이에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리엘이 입천장을 쓸어내리는 움직임을 따라 잘게 몸을 떨었다. 이미 반쯤 기대다시피 한 몸이 닿는 곳마다 서늘했다. 아스타리온을 따라가다 모자란 호흡에 푸른 눈을 덮은 눈꺼풀이 들어올려지고 잠시 멀어진 틈을 타서 나른하게 숨이 빠져나와 더운 공기가 흩어졌다. 

허리를 감싸며 몸을 더듬던 손이 완전히 이리엘을 들어올렸다. 피곤하지 않은지, 다른 질문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직 더 원한다며 말 없이 매달리는 손끝이 모든 대답을 대신할 수 있었다. 입술을 가볍게 스친 아스타리온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선을 따라 짧게 맞춘 입술자국이 늘어날수록 이리엘이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입술을 탐하며 손이 잘 닿지 않을 여린 점막을 쓸어 내리자 입 안에서 새어나가지 못할 신음이 터졌다. 한참을 맞물린 끝에 겨우 마주한 다른 색의 눈이 서로를 담았다. 그 속에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른 열기가 스치고 있음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해가 뜨지 않는다는 사실이 장점이 되는 이 곳에서 아쉬울 것은 없었다. 원한다면 언제든 계속될 수 있었으며 아스타리온의 곁에서 밤은 길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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