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회전 패러디] 나쁜 주술사의 꿈 5

우리가 애가 있어서 (5)

*사투리를 하나도 몰라 고증 없이 막 적었습니다

“아빠!”

고전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어린이집 입구는 하원 시간에 맞춰 아이들을 데리러 온 보호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두 사람 토우지와 희령은 어색했던 처음과 달리 꽤 능숙한 태도로 보호자들 간의 대화에 가끔 참여하다 우렁차게 울려퍼지는 익숙한 목소리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오는 아이를 두 손 뻗어 맞이했다.

희령은 메구미의 노란색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능숙하게 아이를 안아 든 토우지의 어깨 뒤에서 장난스러운 웃음과 함께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무하네! 메구미, 나는 안 보여?”

“희령!”

감정에 솔직하며 표정을 숨길 줄도 모르는 어린아이는 희령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에 띄게 신난 얼굴을 하며 안기고 싶다는 듯 토우지의 품에서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노골적인 아들의 마음을 깨달은 토우지는 헛웃음을 지으며 안고 있던 메구미를 희령의 품으로 옮겨주었다. 좋아서 방글방글 웃음을 터뜨리는 메구미의 머리카락을 잔뜩 헤집자, 메구미는 그래도 좋다는 듯 아이 특유의 맑은 웃음소리로 마음껏 까르륵거렸다.

메구미의 하원 담당은 대부분 토우지였기에 어린이집에서 희령을 보게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늘 집에서 만나니까 서운하지는 않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아이의 마음이었다.

“일하고 왔어?”

순진한 물음 하나에 찔리는 구석 많은 어른들은 마하의 속도로 눈빛을 교환했다.

‘피 냄새 확실하게 지운 거 맞아?’

‘토우지씨는 핏자국 다 없앤 거 맞아요?’

눈빛을 교환하며 서로의 상태로 확인했지만, 여지를 남겨둘 구석은 하나도 남겨 놓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곤란했다. 어느 정도로 곤란하냐면 거의 어린이집에 처음 등교한 메구미가 부모님 직업 소개할 때 뭐라고 해야 해? 라고 물어봤을 때만큼 곤란했다. 혹시 메구미가 벌써 잔예를 볼 줄 아나? 그나마 가능성 있는 상황이었다. 특급 주술사 둘에 텐겐과도 잔뜩 비비다 왔으니 여러모로 잔뜩 묻어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기에 메구미는 아직 주술계를 모른다. 토우지와 희령이 설명해 주지 않았으니까. 자연스럽게 포위망이 집에 있을 누군가로 좁혀 가는 가운데, 희령은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우와, 대단하다 메구미! 어떻게 알았어?”

이럴 때는 당사자한테 물어보는 게 최고지. 메구미의 입에서 잔예 비스름한 거라도 나온다면 그 이후에 조져도 늦지 않는다. 메구미는 때아닌 칭찬을 받아 더욱 기분이 좋아졌는지 안긴 상태에서 발까지 동동거리며 신나게 대답했다.

“토우지도, 희령도 추리닝이 아니야!”

메구미의 말에 자신들의 차림새를 내려다본 두 사람은 바로 납득했다. 그러게 운동복이 아니네. 디자인에 일체 관심 없고 오직 편한 게 최고라는 모토를 지닌 희령과 토우지는 평소에도 넉넉한 사이즈의 무지 추리닝을 세트로 대량 구매한 후 늘어날 때까지 주야장천 입는 편이었다. 운동화 또한 걸리적거린다고 여겨 신발은 언제나 슬리퍼. 이상한 곳에서 멀끔한 면이 있는 공시우는 이런 행색을 굉장히 경멸하고는 했는데, 그런 그가 그나마 옷 다운 옷을 입었다고 유일하게 평가할 때가 바로 활동복을 입었을 때였다. 주로 움직임을 더욱 예민하게 컨트롤할 수 있도록 상체나 허리를 잘 잡아주는 옷. 신발 또한 슬리퍼가 아닌 다른 종류로 제대로 갖춰 신는다. 이런 활동복을 입는 경우는 의뢰받아 나갈 때가 유일하다 보니 메구미에게는 자연스럽게 활동복이 일하러 갈 때 입는 옷으로 각인 된 모양이다.

“이 자식, 엄청나게 똑똑하군.”

토우지는 상당한 팔불출 부모 같은 발언을 하며 즐거운 얼굴로 솟은 메구미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끄러뜨렸다. 거기에 메구미가 사소한 짜증을 부리긴 했지만, 간신히 한숨 돌린 어른들은 투정 또한 애교의 일환으로 받아들이며 어린이집 근처 주차해 둔 차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

아기자기한 주택들이 모인 조용한 동네. 그중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한 2층 짜리 단독주택이 바로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메구미는 토우지가 능숙하게 주차를 마치고 시동을 끄기 무섭게 카시트의 안전벨트를 풀고 벌컥 문을 열어 달려 나갔다. 뒤 따라 나간 희령은 아직 메구미의 키로는 혼자 열기 힘든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대신 입력해 준 후 바로 문 앞에 서 있는 메구미가 다치지 않도록 살살 문을 열었다. 아직 문을 다 열지도 않았건만 작은 틈 안으로 재빠르게 들어간 메구미를 보며 희령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문을 연 채로 조금 더 기다리던 희령은 토우지가 오자마자 활짝 문을 열었다.

“뭐하냐, 벌레 들어간다.”

현관 앞에 늘어진 사이즈가 다른 슬리퍼 두 개와 한 손에 들어올 만큼 작은 어린아이의 운동화 그리고 이 집에서는 신는 사람이 한 명밖에 없는 흰색 운동화가 하나.

“왔나.”

한 쪽 다리에 메구미를 매단 채 능숙하게 걸어 나오는 나오야가 한 손에 먼지털이를 든 채 토우지와 희령을 반겼다.

“손에 그건 뭐냐?”

“오늘 날씨가 좋아가, 청소 좀 했다.”

“형아 청소 그만 하고 나랑 놀아!”

“알았다 알았다. 쬐끄맨 게 목청도 좋구로. 뭐 하고 놀면 되는데?”

나오야가 메구미의 손을 잡고 거실로 가는 동안 희령과 토우지는 신발을 벗어 정리한 후 각자의 방에 들어가 느긋하게 씻은 후 환복했다. 덜 말린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감싼 후 방에서 나온 희령은 자신보다 먼저 나와 푸짐하게 소파에 늘어져 있는 토우지의 옆에 자리를 잡고 테이블 하나를 펼친 채 열심히 색칠 공부 중인 동그란 정수리 두 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 진짜 나오야! 거기는 까망이 아니라 노랑이라니까!”

“이해가 안 된다! 와 강새이 눈깔색이 노랭인데?”

내는 살면서 그런 강새이는 주령 밖에 못 봤다. 주령이 뭔데? 메구미 니는 아직 어려서 알 거 읎다. 원하는 대답이 아닌 데다 하필이면 가장 싫어하는 말을 들어버린 탓에 메구미는 나오야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어뜯으며 잔뜩 성질을 부렸다. 나오야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질렀다. 아무리 주술사라도 예고 없이 두피에 가해지는 충격은 아픈 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쪼끄만 애를 때릴 수도 없는 노릇. 나오야는 두피 채로 뽑히기 직전인 머리카락을 사수하며 희령과 토우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둘이 뭐 하는데! 아 좀 말려봐라! 이러다 머리털 다 뽑힌다 안 카나!”

그 목소리가 듣는 사람이 다 안타까울 정도로 간절했기에 희령은 애써 웃음을 참아가며 관전하던 걸 멈추고 소파에서 일어나 결연한 의지로 나오야의 머리카락을 잡고 있는 메구미를 살살 달랬다.

“메구미가 한 번만 봐주자. 나오야가 아직 젠인물이 덜 빠져서 그래, 착한 후시구로가 한 번만 봐주자.”

마지막으로 저녁 다 먹은 후에 후식으로 케이크까지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메구미는 씩씩거리면서도 나오야의 머리카락을 놨다. 조그마한 손바닥에 머리카락이 몇 개가 따라오는 건 애써 못 본 척하며 휘휘 날려버렸다.

“누구 자식 아니랄까 봐 힘 한 번 더럽게 세구먼.”

그 말에 혼내는 게 아니라 뿌듯하게 웃어 보인다는 점에서 모범적인 부모가 되기는 탈락이었으나, 희령 또한 딱히 좋은 보호자는 아니었기에 주의를 주는 대신 킬킬 웃어 보이며 다시 소파에 푸짐하게 늘어졌다.

“아들, 적당히 해라 너 때문에 대머리 되면 나오야 집 나가서 다시는 안 돌아온다.”

물론 토우지는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인 메구미는 갑자기 초조해진 듯 눈치를 보더니 등을 돌렸던 나오야에게 다가가 슬그머니 자기가 움켜잡았던 머리카락을 살살 매만지기 시작했다.

“형아 미안, 이제 머리카락 안 뜯을게.”

이걸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나오야는 복잡한 마음으로 메구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오야. 형아 머리털 다 빠지면 쪽팔려서 몬 산다. 어디 산속에 콱 틀어박힐기다.”

언제 싸웠냐는 듯 다시 착 달라붙은 채 사이좋게 놀기 시작하는 두 사람을 보며 희령은 간신히 참고 있지만 속으로 웃음을 참느라 숨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부터 이렇게 잘 지낸 건 아니다. 일 년 전, 갑작스럽게 생긴 형의 존재를 메구미는 낯설어했고 그건 나오야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나오야는 본가에서 돌봐주던 동생들이 있었지만, 메구미는 토우지와 희령을 제외한 타인의 존재가 완전히 처음 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특히 질투가 심했다. 동생이 생긴 첫째 마냥 토우지나 희령이 나오야에게 조금이라도 신경 쓰는 모습을 보기만 하면 엉엉 울어대는 바람에 곤란했던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더 큰 아이라지만 그래봐야 중학생 정도의 나이대. 처음으로 본가를 나와 처음 보는 사람들과 살기 시작한 나오야또한 마음고생이 심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 정도는 나오야를 데리고 오기로 한 순간부터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기에 토우지와 희령은 큰 어려움 없이 두 사람을 합사에 성공시켰다.

혼내거나 노골적으로 다정하게 대해주는 대신 안아주거나 스킨십하는 횟수를 늘리고 우리는 모두 가족임을 자주 상기시켰다. 심부름을 보내거나 둘 만 집안에 남겨 놓는 등 의도적으로 두 아이가 함께 있는 시간도 늘려주다 보니 6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쯤 메구미는 완전한 나오야 껌딱지가 되어 있었다. 책이나 애니메이션에서 보던 형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도 생긴 게 실감이 나고 퍽 신이 난 모양이었다. 나오야는 처음부터 메구미에게 적개심 자체가 없었기에 항상 자신의 옷자락을 쥐고 다니는 메구미에게 금방 마음의 문을 열었다.

“오늘도 메구미 봐줘서 고마워.”

처음 희령이 안았주었을 때는 낯선 감각 때문인지 오이 본 고양이처럼 펄쩍 놀라긴 했지만. 장난스럽게 볼에 입을 맞췄을 때 집 나갔던 걸 생각하면 그나마 양반이었다.

“나! 보여줄 거 있어!”

한 창 나오야와 신나게 놀던 메구미가 불현듯 일어서더니 자신의 어린이집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달려왔다. 새하얀 도화지 위에 크레파스로 그려진 집과 꽃 네 명의 사람. 네 살짜리가 그렸다기에 상당히 잘 그린 그림이라 바로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었지만, 가만히 그림을 보던 희령은 푹신푹신 메구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일부러 물었다.

“이게 뭐야 메구미?”

메구미는 아주 큰 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가족!”

약속이라도 한 듯 짧은 적막이 흐르고 이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잔뜩 오버하며 메구미를 칭찬했다. 토우지는 시원한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메구미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고 나오야는 그런 메구미를 끌어안은 채 정수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오야는 더 이상 뽀뽀를 한다고 해서 집을 나가지 않는다.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이면 마주 안아올 줄도 안다. 아직 어린 메구미는 세상이 오로지 즐겁고 행복한 곳이라 생각한다. 누구보다 자신의 이름을 잘 이해하고 있는 아이다. 토우지는 …웃게 되었다. 이제 그는 자신이 돌아올 곳을 안다. 그리고 희령은 비틀리지 않은 세계의 맑은 웃음소리를 귀에 담으며 스르륵 눈을 감았다.

“희령이 잔다 메구미. 나가 놀자.”

*

희령은 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몸을 일으키자 주르륵 흘러내리는 모포를 주워 담고 거실에 같은 자세로 잠들어 있는 메구미와 나오야를 보고는 실없이 웃었다.

“일어났냐?”

토우지는 약한 조명등을 켜 놓은 채 부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희령이 몽롱한 상태로 끄덕이자 토우지는 피식 웃으며 고갯짓했다.

“전화.”

진동으로 해 놓은 탓에 소리는 들리지 않는 희령의 핸드폰이 협탁 위에서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 시간에 스팸 전화가 올 리도 없고, 자기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희령은 비몽사몽인 채 걸어 나와 목소리를 줄인 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뭐야, 설마 자던 중이었어? 이 시간에?

“잠시만 기다려 봐.”

듣기만 해도 골이 울리는 까랑까랑한 목소리에 희령은 화면을 확인했다. 고죠 사토루라 표시된 이름을 보고 나서야 고전을 나서기 전 그와 전화번호를 교환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희령은 토우지에게 입 모양으로 대충 상대를 설명한 후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마당으로 나가 통화를 이었다.

“새 나라의 어린이가 이 시간에는 무슨 일이야?”

-어린이 아니거든! 임무 중이라고!

희령은 의아한 마음에 시간을 확인 했다. 자신이 일찍 잠든 게 맞기는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늦은 시간이었다. 적어도 청소년이 이 시간 까지 주령을 때려잡는 중이라고 큰 소리로 이야기하기에는 아주 부적절한.

“그 업계는 청소년 근로법이라는 것도 없냐.”

-주술계에 그런 게 어딨어. 아무튼! 이런 소리 하려고 전화한 게 아니라고! 당신! 내일 언제 올 거야?

“내일? 나 어디 가?”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반전술식 알려준다며! 당연히 고전으로 오는 거 아니었어?

아니었다. 희령은 당연히 마땅한 장소를 찾은 뒤 고전 밖에서 고죠를 만날 생각이었다. 그래서 안 그래도 결계와 충분히 멀고 반나절 안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공터 같은 곳을 찾아달라고 부탁해 놓은 참이었는데. 설마 고죠 측에서 먼저 이렇게나 당당한 태도로 연락이 올 줄은 몰랐다.

원래 고전이라는 곳이 이렇게 외부인의 출입이 자유로워도 되는 곳이었나? 희령이 의문을 표하자 고죠는 핸드폰 너머로 괴성을 질렀다.

-오늘 당신들이 무단 침입한 곳이 고전 최고 경계 구역이거든?!

고죠는 사소한 부분은 자신이 모두 해결해 놓을 테니 희령에게는 방문 시간만 미리 알려달라고 했다. 빨리 시작해서 빨리 끝내는 게 낫겠지. 이른 아침 시각을 부르자 싫어하는 티가 회선 너머로도 느껴졌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준비물 같은 게 필요하냐는 학생 다운 질문에 고민하던 희령은 막 떠오른 한 가지를 답했다.

“갈아입을 여분의 옷?”

많이 굴러야 할 테니까. 속뜻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달됐을 터다. 내일 아침 엉망이 될 자신의 모습을 상상이라도 했는지 시끄럽게 떠들던 고죠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끝났나? 대충 내일 보자는 말로 통화를 종료하려던 희령은 이어지는 말에 몽롱한 잠기운조차 쫓은 채 집중했다.

-참, 텐겐님이 전해달래. 그 주술사의 본명 말인데….

수화기 너머 고죠의 목소리가 유독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각인 되듯 선명하게 들려왔다.

-켄자쿠, 라고 했어.

“그래, 내일 보자.”

전화를 끊은 이후에도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던 희령은 짧게 미간을 짚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한밤중 길어지던 신호음은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끊기지 않고 연결되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잠들어 있던 도중 깨어났는지 수화 넘어 공시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고 푹 잠겨 있었다. 하긴 그럴만한 시간이다. 희령은 피곤한 삼촌을 위해 안부는 생략하고 짧게 용건만을 전달했다.

“당분간 나랑 토우지 스케줄 잡지 마.”

-…어디 가족 여행이라도 가?

“아니, 그냥 멀리 가야 하거든.”

어디를 가는지 정도는 알려줘야 하는 게 아니냐는 타박에 희령은 다음에, 라는 말로 줄인 후 잘 자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 가운데 아무것도 심어지지 않아 허전한 화분을 거꾸로 엎어 흙 안에 숨겨둔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처마로 돌아왔다.

토우지는 불을 붙일 즈음 창을 열고 나타나 희령에 손에 들린 담배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손을 뻗었다.

“한 입 줘 봐.”

희령은 피우던 담배를 토우지에게 넘겼고 토우지는 받아들인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후 다시 희령에게 건넸다.

“다 들었죠?”

토우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들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희령도 잘 알고 있듯 그들이 가지고 태어난 천여주박이란 그런 거니까. 드디어 아내를 죽인 살인마의 이름을 알아냈음에도 토우지의 얼굴은 지루한 책을 읽을 때와 별 차이가 없다. 희령은 대충이지만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겨우, 이름이었으니까. 5년이 걸려 이제 겨우, 이름 하나일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겨우 하나로 취급되는 이름은 발화점이 된다. 지난 5년은 길었으나 앞으로의 시간은 매우 빠르게 흘러가리라는 걸 희령은 꿈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알았다.

아주 오래전 희령은 꿈을 꿨다. 긴 꿈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았다. 그는 주력의 인과에서는 벗어난 천여주박이었으나 자신의 인과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배회자였다.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 길이 과연 맞는 길인지, 또 다른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이미 희령은 애매한 정보를 무책임하게 전달한 탓에 토우지에게 전보다 더 크나큰 상처를 입혔으니까.

다시 한번 자기 손에서 담배를 앗아가는 토우지에게 희령은 최대한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도 말했죠. 토우지씨, 당신은 아직 선택할 수 있어요.”

간신히 얻은 평화와 안정을 지금처럼 유지한 채 평범한 사람처럼 살아갈 기회. 토우지가 원한다면 희령은 얼마든지 기꺼이 그게 가능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다. 피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타올라 하늘로 향하는 담배 연기. 회색으로 변한 재를 무심하게 털어내며 토우지는 물었다.

“떠나려고?”

“필요하다면요.”

“저 애들을 두고?”

“그래야 한다면요.”

토우지는 반쯤 남은 담배를 희령에게 건넸다. 그 손길에 닿은 순간  말했다.

“그럼 나는 또 기다려야 하고?”

돌아온다는 약속은 아무 의미도 없다. 따라서 차마 그 말 만은 답할 수 없던 희령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토우지는 가끔 가능만 한다면 희령의 머릿속을 열어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대체 저 조막만 한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그리도 많이 하는지. 정작 그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토우지는 희령의 절반도 안 될 거 같은 단순한 사고로 이렇게 잘 만 살아가는데. 하지만 희령의 복잡한 그 생각 그 대부분에 자신의 비율이 크게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토우지는 짧은 한숨을 뱉고 한 손에 들어오는 희령의 머리를 잡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너는 강해. 의심할 여지가 없지. 하지만 그게 나를 지켜야만 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아.”

그래 희령은 강하다. 오늘만 봐도 세계에 세 명밖에 없다는 특급 주술사 중 최강이라 불리는 두 명을 아무런 전략도 없이 오직 능력만으로 갖고 놀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토우지는 보호받는 행위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이 알 수 없는 천여주박은 가끔 잊어버리는 듯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거야. 그러니까 너도 네가 해야 하는 일을 해. 적어도 그 앞길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 테니까.”

방해라니. 토우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에 희령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토우지씨가 방해라니. 그 정도로 성대한 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는데요.”

하. 어이가 없어진 토우지는 조막만 한 머리통을 힘주어 꽉 잡았다.

“양심 있냐? 지금까지 네가 한 짓을 생각해 봐라.”

“토우지씨 입에서 나올 말은 전혀 아니네요.”

결국 한 대 더 쥐어박히고 말았지만, 머리뼈에서 느껴지는 고통과는 별개로 희령은 하하, 실없이 웃었다. 웃는 낯에도 얼마든지 침을 뱉을 수 있는 토우지였지만 굳이 지금 그럴 이유는 없었다.

어느새 필터만 남은 꽁초를 바닥에 짓이겨 버리고 공범이라는 떳떳하지 않은 타이틀을 갖게 된 두 사람은 냄새를 빼기 위해 가로등 켜진 조용한 주택가를 산책했다.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희령은 때때로 아무것도 없는 까만 밤하늘을 바라봤다.

후시구로 토우지는 희령이 살아온 삶을 알지 못한다. 정확히 절반은 알지만, 나머지 절반은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정도다. 아마도 평생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그 절반을 평생 안고 가야 하는 희령의 짐 또한 토우지는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기억한다. 희령이 토우지에게 후시구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물한 날. 평생 잊지 못하리라 생각한 끔찍한 과거의 잔여물 같던 입가의 상처가 사라진 날. 희령은 잠든 메구미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이야기했다.

“나는 그냥 다정한 사람들이 저주받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게 자신의 꿈이라 이야기하던 희령의 모습을 토우지는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게 되리라, 그런 확신이 들었다.

5.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당신 가난해?”

예정대로 약속한 시각에 연무장에 나타난 희령을 보고 고죠는 기함을 토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나마 멀쩡한 행색이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뭔가. 본인 사이즈도 아닌 거 같은 커다란 스웨트셔츠에 발목을 넘어 발등까지 덮어버리기 직전인 어벙한 감색 추리닝 바지. 머리는 또 왜 저렇게 산발인가. 맨발에 슬리퍼까지 직직 끌고 있는 모습을 보니 방구석에서 허송세월하는 백수나 다름없는 꼬락서니였다.

비슷한 생김새의 천여주박이 둘이나 있을 리는 없을 테니 어제랑 같은 사람이 맞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저건 너무한 거 아닌가. 천여주박에 패션 감각을 앗아가는 속박이라도 있던 건가. 고죠가 경악을 하거나 말거나 익숙한 소리라는 등 태평한 태도로 손목에 있던 끈으로 머리카락을 대충 틀어 묶은 희령은 한눈에 보기에도 퀭한 인상으로 연무장에 모인 고죠 외 두 명을 훑어보았다.

“얘네는 뭐냐?”

“이에이리 쇼코.”

“게토 스구루입니다.”

“자기소개하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가뜩이나 피곤해 죽겠는데 갑작스럽게 나타난 불청객을 바라보는 희령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어제 하루 동안의 경험으로 인해 희령이 수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확신이 선 고죠는 희령의 앞에 서 일부러 방정맞은 손짓으로 시선을 끌며 최대한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이 상황을 해결하고자 했다.

“내 친구들이야! 반전술식을 배운다니까 궁금하대서 따라오라고 했어.”

“아, 그래.”

예상보다 훨씬 쉽게 수긍한 희령을 보며 고죠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또 영업비밀을 함부로 누출시키니 뭐니 하며 뭐라 할 줄 알았는데. 나쁘지 않은 분위기를 틈타 고죠는 처음부터 신경 쓰였던 희령의 안색에 관해 물었다. 한밤중에 특급 주령이라도 처치한 거야? 희령은 넋이 빠진 목소리로 차라리 그랬으면 좋았겠지. 하고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너희 특급 주령보다 무서운 게 뭔지 알아?”

사실 고죠는 특급 주령 정도 무서운 측에 들지도 않았지만, 호기심이 들었기에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뭔데? 뭔데?”

“바로 잘 자던 애가 새벽에 갑자기 깨는 거다.”

혹시나 애 낳을 생각이 있다면 한밤중에 미취학 아동에게 공포영화를 보여주는 바보 같은 짓은 절대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희령의 자세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결국 깨어난 아이를 달래다 밤을 새우고 간신히 어린이집 버스를 태운 후 전속력으로 달려오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는 눈물겨운 실상을 알게 된 고죠 사토루는 뜬금없는 교훈 하나를 얻었다. 천여주박한테도 육아는 힘들 구나.

사실 하루 정도 밤새는 건 일도 아니고, 직접적인 원인은 홍성궁에 침입하기 이전 이런저런 일로 계속 밤을 새워 일주일째 낮잠으로만 휴식을 취하던 후폭풍이 이제야 닥친 거지만 희령은 굳이 알 필요 없는 얘기를 연달아 꺼낼 생각은 없었다.

목표는 오직 수업을 빨리 끝내고 빨리 집에 돌아가 쉬는 것. 그만큼 빡세게 굴릴 생각으로 고죠의 상태를 확인한 희령은 밤늦게까지 임무를 수행한 탓에 불안정하게 돌아가는 주력의 흐름을 확인하고 머리를 툭툭 두드림으로써 단번에 상태를 안정시켰다. 이제는 익숙한 느낌에 개운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스트레칭을 시작하는 고죠를 뒤로하고 단상 위에 올라선 희령은 그보다 더 당당할 수 없는 태도로 자신을 바라보는 노골적인 세 개의 시선을 향해 외쳤다.

“미리 말하지만, 나는 반전술식 같은 거 쓸 줄 모른다!”

T :: @_HANKYEON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