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스테 드림 단편 모음집

상견례 리허설

빌 셴하이트 (+에릭 베뉴) 드림

아이렌은 본디 연예인이나 유명인사에 큰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대 보는 걸 좋아하고 영화도 챙겨보지만, 관심 있는 배우가 아니라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라고 할까.

하지만 아무리 그런 아이렌이라 해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배우를 모를 정도로 물정에 어둡진 않았다.

게다가 그 당사자가 친밀한 선배의 아버지라면? 모르는 쪽이 이상하겠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어.’

 

아이렌은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싼 채 반쯤 남은 홍차에 비치는 제 얼굴만 바라보았다. 중요한 자리인 만큼 평소와 다르게 꾸민 제 얼굴은 꽤 봐줄 만했지만, 그는 도무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맞은편에 앉아서 차를 홀짝거리며 제가 쓴 시나리오를 읽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도 눈부신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할까, 확실히 분위기 자체가 다르네.’

 

상대와 눈이 마주치지 않을 정도로 짧은 찰나에 시선을 위로 올렸다가 내린 아이렌은 의미 없이 홍차를 입에 머금었다.

그의 이름은 에릭 베뉴. 같은 동아리 선배인 빌 셴하이트의 아버지이자 유명한 배우. 그리고 최근에는 영화 제작에도 열을 올리고 있는, 제게 있어선 미래에 현장에서 만나고 싶은 관계자 중 한 명이었지.

 

‘진짜 잘생겼다.’

 

그와의 첫 만남은 이게 처음이 아니다. 빌을 따라나섰던 영화제에서 다 같이 만나 식사도 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단둘이 대면하는 건 처음이니, 눈을 못 마주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중후한 멋이 살아있는 에릭은 그야말로 미중년의 표본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멋있었고, 심지어 지금 제 결과물을 평가하는 중 아닌가. 아이렌은 사회화가 잘 된 인간이었지만 지극히 내성적인 사람이었고, 이런 자리에서 당당하기에는 에너지가 부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꾸 잘생긴 얼굴을 보고 웃음이 나오려는 것도 참기 힘들었고 말이다.

그렇게 여러모로 고통받는 아이렌의 마음이 느껴지기라도 한 걸까. 시나리오를 다 훑어본 에릭은 소리 나지 않게 공책을 덮고 상대를 불렀다.

 

“아이렌 양?”

“아, 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이건 비즈니스 자리가 아니니까.”

 

그의 말대로 이건 돈이나 거래, 계약이 오고 가는 자리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빌의 권유로 함께 휴일을 보내기 위해 만난 거고, 만난 김에 업계 선배로서 조언해 줄 게 없을까 싶어서 잠깐 글을 봐준 게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아이렌은 쉽게 부담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 시나리오는 오직 이 자리를 위해 쓰인 글이었기 때문이었다.

 

‘뭐랄까, 과제를 하는 기분이었지. 아니, 정확히는 투고 준비 쪽에 더 가까우려나?’

 

약 일주일 전 방과 후. 빌은 갑자기 아이렌에게 아버지와 식사하러 가는 자리에 같이 가겠느냐고 권해왔다. ‘오랜만에 만나시는 거니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을 텐데, 왜 자신까지 데려가려 할까.’ 유명 연예인을 볼 수 있다거나 빌과 데이트 비슷한 걸 할 수 있다는 점은 둘째치고 저런 생각부터 든 아이렌은 어째서 자신을 초대하느냐 물었고, 빌은 단호하게 이리 답했다.

 

“아버지가 네 글을 궁금해해. 다른 누구도 아니고 에릭 베뉴가 네 글을 봐줄지도 모르는데, 직접 가서 평가받아 보는 게 어때?”

 

그건 참으로 두렵고도 설레는 제안이었다. 누구든 제 글에 조언해 준다면 기쁜 일이긴 하지만, 실제로 영화 제작에 투자하고 연기도 하는 관계자가 봐준다면? 아마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미숙함을 보이는 부끄럼을 견뎌야 한다. 쓴소리도 못 견딜 정도면 창작으로 밥벌이는 할 수 없다. 그 정도는 잘 알고 있는 아이렌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제안을 받아들인 후, 그날부터 보여주기 위한 시나리오를 써 내려갔다.

 

“잘 읽었단다. 유명한 고전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구나.”

“예, 최근에 고전 소설을 각색한 작품 중 하나를 재미있게 봤거든요. 그래서 저도 한번 써봤어요.”

“그렇구나. 하긴, 좋은 작품을 보면 자신도 뭔가 쓰고 싶어지는 법이지. 나도 동료 연기자가 좋은 연기를 하면 작품을 하고 싶어지거든.”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가며 분위기를 주도하는 에릭은 공책을 바로 건네주지 않고, 제 손에 쥔 채 말을 이어갔다.

 

“배경을 현대적으로 바꾼 후 원작의 갈등 요소를 그대로 가져오지 않고 시대에 맞게 잘 바꾼 점이 좋구나. 캐릭터들은 특징이 그대로 살아있지만, 각색한 요소들과 충돌하지 않게 잘 정제한 느낌이고. 대사의 단어 선택도 고심한 티가 나구나. 캐릭터성을 잘 살렸어.”

“그, 그런가요?”

 

이렇게 칭찬을 잔뜩 해주다니. 이 이후에는 분명 쓴소리가 나올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걸 아는 아이렌은 순수하게 기뻐하지 않고 청각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 이후에는 상당히 냉혹한 지적들이 날아왔다.

 

“하지만 전문적으로 배우지 못해서 그런지 장면 전환이 어색한 부분이 많았어. 너무 장면 전환이 많아도 문제지만, 이렇게 호흡을 길게 가져갈 필요는 없는데. 영화 시나리오는 무대 각본과는 달리 공간 제약이 없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행동 지문이 꽤 자세하더구나. 이러면 배우에게 좋지 않단다.”

“앗, 그런가요?”

“응. 자신만의 해석을 해서 캐릭터에 이입할 수 있게 해야지. 이렇게나 자세하게 지시해 두면 그저 지시에 따르는 로봇같이 되거나, 각본 자체에 불만을 품기도 하거든.”

“……그건, 생각해 보지 못했어요. 그렇구나.”

 

약이 되는 조언을 귀담아듣는 아이렌의 눈동자는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열정을 포착한 에릭은 조금은 안심한 후, 조언을 마저 이어갔다.

 

“그러고 보니 빌이 그랬지. 아이렌 양은 뭐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남에게 신세 지는 걸 싫어한다고.”

“선배가 그런 말도 했나요?”

“응. 책임감도 강하고 싫은 소리도 안 하려는 게, 꼭 16살이 아니라 36살처럼 군다고 하더구나.”

“……36살은 좀 심한데.”

“하하.”

 

이 와중에도 아들이 말한 정신연령부터 지적하다니. 참으로 엉뚱하다.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어버린 에릭은 그제야 공책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소설가가 될 거라면 상관없지만, 각본가가 될 거라면 같이 일하는 사람을 믿는 연습을 하렴. 배우를 믿고, 감독을 믿고……. 그래야지 이 일을 할 수 있단다.”

“네. 마음속에 새겨둘게요.”

 

그렇게 예상보다 훈훈한 피드백 시간이 끝날 즈음. 잠깐 매니저와 통화를 하느라 자리를 비웠던 빌이 돌아왔다.

자연스럽게 아이렌의 옆자리에 앉은 그는 은근슬쩍 두 사람의 분위기를 살피더니, 아이렌에게 물었다.

 

“미안, 중요한 일이라 어떻게든 통화 좀 해달라고 해서 다녀왔단다. 각본은 보여드렸니?”

“예.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그거 다행이구나.”

 

아이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 안에 공책을 챙겨 넣었다. 손짓은 다급하여도 표정은 나쁘지 않을 걸 보면, 정말로 유용한 시간을 가진 모양이다. 빌은 어렵지 않게 그리 추측할 수 있었다.

자, 그러면 과연 제 아버지는 이 후배와 그가 쓴 글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빌은 그걸 당사자가 있는 자리에서 물을 생각이 없었기에, 작은 꾀를 냈다.

 

“맞아. 아까 통화하느라 주변을 둘러보다 알게 된 건데, 이 호텔 뒤편에 커다란 새장이 있더구나.”

“새장이요?”

“그래. 새가 많이 있어서 그런지 다들 모여서 구경하고 있던데.”

 

아니나 다를까. 동물 이야기가 나오자 아이렌이 금방 흥미를 보인다. 어느 정도냐고 하면, 당장이라도 가보고 싶어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일 정도였다.

배우인 만큼 상황파악은 누구보다 잘하기 때문일까. 분위기를 읽은 에릭은 슬쩍 아들을 도왔다.

 

“아이렌 양, 나는 아들과 몰래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깐 새 구경이라도 하고 오겠니?”

“그래도 되나요?”

“그럼. 편하게 다녀오렴.”

“감사합니다!”

 

한 번쯤은 괜찮다고 할 줄 알았는데, 아이렌은 의외로 군말 없이 바로 자리를 떠버렸다.

눈치가 빨라서 그냥 간 건가, 아니면 어지간히도 새가 보고 싶던 건가. 순식간에 카페테라스를 빠져나가는 아이렌을 곁눈질로 살핀 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릭은 복잡한 심경으로 아이렌을 바라보는 아들을 보며 쿡쿡 웃었다.

 

“아이렌 양은 어른스러워 보이는데, 그 나이대 아이다운 귀여운 모습도 있구나.”

“뭐, 아무리 어른스러워도 겨우 16살 애니까.”

“그러는 너도 18살이잖아?”

“10대에 2살 차이는 꽤 크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니? 후후.”

 

아, 어쩐지 저 웃음이 자신을 놀리는 것 같다.

빌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시나리오는 좀 어땠어?”

“비전공자에 16살이라는 걸 고려하면 재능있어.”

“그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그래도 나쁘지 않아. 졸업할 때까지 꾸준히 노력하면 작은 일부터 맡기는 건 될 정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에릭이 말하는 거니 빈말은 아니겠지. 제 아버지가 일 앞에선 누구보다 단호해지는 걸 아는 빌은 내심 안도하고 말았다. 솔직히 별로였다고 해도 아이렌에게 그걸 전해주거나 제가 품은 기대를 접거나 하진 않았겠지만, 다른 전문가의 눈에도 진심으로 나쁘지 않다 느껴졌다니 다행이지 않은가.

안도한 빌이 미지근해진 커피로 목을 축이고 있자니, 에릭이 턱을 괸 채 그의 아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상당히 노골적인 시선을 무시할 수도 없는 빌은 잔을 내려놓고 새침하게 물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야?”

“네가 참 예뻐하는구나 싶어서.”

“누굴?”

“누구겠어? 하하.”

 

그래. 알고 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주어가 없어도 대상이 될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걸.

지금은 새를 보러 가 자리에 없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린 빌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어 버렸다.

 

“딱히, 그런 건…….”

“하지만 네가 사적으로 누굴 소개해 준 적은 거의 없잖니? 특히 여자애는.”

“당신 눈으로 봐도 그 애가 괜찮은 원석인지 궁금했을 뿐이야.”

“그런 거라면 공책만 전해줘도 될 텐데?”

 

정답이다. 정말로, 반박하기가 힘들다.

제가 아끼는 두 사람을 또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고, 셋이서 함께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고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는 빌은 평소엔 잘 먹지도 않는 쿠키로 강제로 입을 막았다. 시선을 피한 채 과자만 우물거리는 아들에게서 어린 시절의 모습이라도 본 걸까. 에릭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가린 채 큭큭거렸다.

 

“웃지 마.”

“이런, 아들이 좋아서 웃는 것도 안 되나?”

“…….”

 

‘아, 얼른 아이렌이 돌아와서 이 분위기를 환기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빌의 마음이 닿기라도 한 걸까, 저 멀리서 바삐 돌아오는 아이렌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점점 다가오는 후배의 모습을 보며, 빌의 눈매가 부드러워진다. 그 미묘한 변화를 놓칠 리 없는 에릭은 ‘역시 제 아들은 귀엽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