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을 말해 봐
플로이드 리치, 제이드 리치 드림
* 22년도 리치 형제 생일 축하 글
“나, 내일 학교 쉬어도 될까?”
아이렌의 표정은 진지했다. 보아하건데, 절대 농담을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아파도 수업을 들을 거라며 고집을 부리는 그가 저런 소리를 하다니. 다른 이들이라면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거냐.’라며 걱정했겠지만, 멜로드는 무언가 짐작가는 것이 따로 있는지 평온한 얼굴로 물을 뿐이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이렌.”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혹시 선배들 선물을 아직 못 정한 거라면, 쉬어봐야 소용없을 거라고 조언해 줄게.”
“하아…….”
정답이다. 정확하게 저 이유로 한 말이었다. 아이렌은 얄미울 정도로 상쾌하게 웃고 있는 동급생을 살짝 흘겨보았다.
“그 선배들은 대체 뭘 줘야 할지 모르겠다니까.”
“사랑의 힘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게 있구나.”
“그럼 사랑 하나로 모든 게 해결될 거라는 생각을 한 거니? 여기가 RSA인줄 아는 거야?”
“하하하.”
평소라면 제 농담에 농담으로 받아쳤을 아이렌이 저렇게 뾰족하게 반응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보통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닌 모양이다. 멜로드는 평소보다 눈가가 어두워 보이는 불쌍한 홍일점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내일은 플로이드와 제이드의 생일이었다. 파티 준비는 이미 끝낸 후였고, 대부분은 선물을 준비한 상태였지. 같은 기숙사 후배로 리치 형제와 제법 친분이 있는 멜로드 또한 제 나름의 선물을 준비했었다. 두 선배가 재미있어할 만한 건 전혀 떠오르지 않아, 원하는 걸 직접 살 수 있도록 상품권을 준비했지. 그건 따분한 선택이었지만, 매우 실용적인 선택이었기에 실망할만한 선물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아이렌은 그런 걸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거겠지.’
리치 형제와 아이렌의 사이는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에서도 유명했다. 오직 흥미만으로 움직이는 형제와 그들에게 가장 극상의 흥미를 제공하는 아이렌. 그 기묘한 공생관계는 평소에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기대에 충족해줘야 하는 상황’이 오면 예상치 못한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휘둘려주고, 생각지도 못한 돌발행동으로 즐거움을 주는 이 학원의 홍일점은 리치 형제를 실망하게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특히 플로이드라면, 그의 기대를 저버리느니 다리 두 짝을 잃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이건 농담이 아니었다. 멜로드는 언젠가 아이렌이 오직 플로이드가 흘린 듯이 내뱉은 한마디 때문에 두 다리를 날려먹으려고 했던 때를 떠올리고 어깨를 떨었다.
‘그래도 선배들이라면, 아이렌이 뭘 줘도 그 나름 재미있어할 거 같은데.’
아이렌이라면 두 사람의 취향은 잘 알 테고, 지갑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적당한 선물도 고를 수 있을 거다. 그런데도 이토록 선물 선택을 망설이는 건 뭔가 특별한 걸 주고 싶다는 강박감이 있기 때문이겠지.
우습기도 하지. 정작 아이렌의 생일에는 두 선배 다 깊게 고민하지 않고 선물을 골랐는데. 물론, 이건 아이렌이 뭘 줘도 기뻐할 사람이니 그런 것도 있긴 하지만…….
“그냥 뭐든 들어준다고 하는 건 어때? 그게 제일 무난하지 않아?”
“잠깐, 지금 장난하는 거냣!”
멜로드의 조언에 답한 건 아이렌이 아니었다.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대체 언제 온 건지 모를 그림의 화난 얼굴이 보였다. 아니. 거기엔 그림만 있는 게 아니었다. 크루웰 선생에게 쪽지 시험의 점수 때문에 불려간 듀스도 함께 있었지.
두 사람은 멜로드에 얼굴에 구멍이라도 뚫을 듯 노려보며 한 마디씩 덧붙였다.
“꼬붕이 그 붕어빵 형제들에게 그런 말을 했다간, 무슨 일을 겪을지 뻔하지 않냐고!”
“그림의 말이 맞아. 다른 사람들이면 몰라도 리치 선배들은…….”
아이렌은 뭐라도 할 여자고, 리치 형제는 뭐라도 시켜 볼 남자들이다. 그러니 ‘아무거나’라는 공수표는 위험했다. 정말로. 그림과 듀스는 진지하게 그렇게 믿었고, 사실 멜로드도…… 그 점엔 크게 동의하고 있었다.
“그건 그래.”
“저기, 너희들은 선배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설마 두 사람이 날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아니, 이건 네가 더 문제인 거니까, 아이렌. 선배들도 무섭긴 한데, 가장 큰 문제는 네가 ‘선배들은 아무 생각 없는데 너 혼자 알아서 입 안에 머리를 넣을 것 같은 이미지’라는 거야.”
‘그리고 먹을 거라면 진작 먹지 않았을까.’ 그렇게 덧붙인 멜로드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내가 해줄 조언은, 그냥 좀 막 나가도 선배들은 네게 실망하지 않을 거란 거야. 플로이드 선배라면 몰라도, 제이드 선배라면 네가 편지 한 통만 써줘도 좋아할걸?”
“그건 내가 싫은데…….”
“그냥 예시일 뿐이야. 어쨌든, 괜히 이걸 핑계로 수업에 빠지진 말고. 그 선배들이라면 네가 등교 안 했다는 걸 알자마자 고물 기숙사로 쳐들어갈 거 알지?”
당연히 알지. 아이렌은 한숨을 푹 쉬며 D반으로 돌아가는 멜로드에게 손을 흔들었다.
고민이 해결되지 않아 표정이 어두운 아이렌이 걱정된 걸까. 듀스와 그림은 슬쩍 눈치를 보며 아이렌의 옆에 나란히 섰다.
“꼬붕, 그렇게 걱정이면 그냥 아무것도 안 줘버리는 게 어떠냣?”
“강제로 뜯어갈 사람……. 아니 인어들인 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거니, 그림.”
“그, 그건 그렇지.”
그림은 제 조언이 그다지 쓸모 있지 않다는 걸 인정하고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창밖만 보며 한숨을 푹 쉬던 아이렌은 가만히 곁을 지키고 있는 듀스에게 물었다.
“듀스, 혹시 나 한 대만 쳐줄 수 있어? 이틀 뒤 일어날 정도의 세기로 말이야.”
“……아이렌. 네가 얼마나 고민 중인지는 이 말만으로도 알겠으니, 그런 부탁 하지 말아주겠어?”
“미안해. 후우.”
저렇게나 고민하다니. 듀스는 죽을상을 한 아이렌이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리치 형제가 부러웠다. 아이렌이 저토록 신경을 써 주다니, 부럽지 않으면 이상하지 않나.
아이렌은 모두에게 친절하고, 배려가 몸에 익은 사람이며, 상대에 대해서도 상당히 빠르게 숙지해 올바른 대응법을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생일 선물을 고를 때도 분명 신중히 고민 하고, 결국은 괜찮은 선물을 찾아냈을 거다. 그 증거라고 하긴 뭣하지만, 자신도 저번 생일 때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을 받았기에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듀스였다.
‘그 바이크용 글러브, 편하고 좋았는데.’
그렇게 센스있는 사람이 이토록 걱정하고 고민하게 만들다니. 절대 적당한 선에선 만족하지 못한다는 의지가 느껴져, 그 두 사람이 얼마나 아이렌에게 큰 의미를 가진 사람인지 새삼 실감이 간다.
하지만 올곧은 듀스는 그 질투심을 억누르고, 상대에게 진심을 담을 조언을 해주었다.
“아이렌, 이런 경우엔 반대로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응? 반대로?”
“그래. 예를 들어……, 네가 선배들에게 선물을 하나 받는다면 뭘 받고 싶어?”
“음…….”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걸까. 아이렌은 곧바로 답하지 못하고 꽤 오래 침묵했다.
한 2분, 아니 3분 정도 지났을까. 한참이나 고민하던 그는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린 시절 사진?”
“엑?”
“어린 시절 사진을 가지고 싶어. 한 2, 3살 즈음의 사진. 두 사람의 치어 시절, 귀여웠을 거 같은데.”
아, 그건 자신도 보고 싶다. 지금 알고 지내는 사람의 어린 시절이라는 건, 한 번쯤 궁금해지는 게 아니던가. 듀스는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보고 싶네. 아이렌의 어린 시절.”
“뭐야, 그런 의미로 공감한 거야? 흐음, 보여줄 수 없는 게 유감이네. 나, 어릴 땐 제법 귀엽단 소리도 듣곤 했는데.”
“지금도 귀엽……, 아니, 지금은 어른스러운 건가.”
“응? 뭐라고?”
“아, 아냐! 아무것도! 얼른 돌아가자, 에이스 녀석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듀스가 한 말을 정말로 못 들은 건지, 아이렌은 왜 말을 하다 마냐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물론 제 말을 재방송할 생각이 없는 듀스는 급히 그림과 아이렌을 이끌고 A반으로 향할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에게 떠밀려 걸어가는 아이렌은 방금 대화를 곱씹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선배들도 내 어린 시절을 궁금해하려나?’
그런 건 들어도 재미없을 텐데. 듀스야 상냥하니까 관심 가져 주는 거지, 제이드나 플로이드가 관심을 가져줄까?
제 이야기를 떠드는 건 즐기지 않는 아이렌은 자신의 의문을 곧바로 부정했지만, 듀스의 조언이 도움이 된 건지 아까 전보다는 한결 표정이 좋아져 있었다.
다음 날. 아이렌은 엄살을 부리던 것과 달리 정상 등교했다.
하지만 수업 시간을 제외한 시간에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지 순식간에 홀라당 사라져서, 생일인 두 사람의 시야에서 귀신같이 벗어나는 기행을 보였다.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 에이스와 듀스, 그리고 그림은 필사적으로 모습을 감추는 아이렌을 안타깝다는 듯 보았지만, 그 연민도 오래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꽃게야, 고등어야. 방과후에도 아기새우가 안 보이면 그땐 너희를 쥐어짤 테니까 알아서 해? 아, 물범이도 마찬가지야.”
5교시가 마친 후 쉬는 시간. 술래잡기도 질려 인내심이 바닥난 플로이드가 저승에서 올라온 사신 같은 얼굴로 두 사람과 한 마리에게 최후통첩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아이렌이 안쓰러워도, 이런 일로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플로이드에게 쥐어 짜내질 수는 없다. 진심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들은 다음 수업이 시작하기 전 겨우 모습을 드러낸 아이렌에게 간청했다.
“아이렌, 제발 그냥 리치 선배들을 만나주면 안 될까! 선물이 문제가 아니라고, 지금!”
“이러다가 우리 다 죽게 생겼어. 우릴 살리는 셈 치고 선배들이랑 대면해주라!”
“꼬붕, 정말 선물이 없어서 이러는 거냣?! 우릴 죽이려는 거 아니지?!”
그 부탁은 처절하고 필사적이라, 없는 체력을 다 끌어다 쓰며 도망치던 아이렌조차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플로이드의 방식을 잘 아는 그는 제 친구들이 뭔가 굉장한 심문이라도 당했다는 걸 눈치채고,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
아쉽게도 아이렌은 빈손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언제까지고 문제를 회피할 수 없음을 아는 그는 결국 마지막 수업이 끝난 후, 다른 학생들이 교실을 빠져나가는 와중에도 어디로도 가지 않고 얌전히 짐만 챙긴 채 제 자리에 앉아있었다.
우당탕탕. 분주하게 오가는 학생들 너머로 요란한 발소리가 들린다.
양옆에 에이스와 듀스를 둔 채 그림을 껴안고 있던 아이렌은 그 남다른 소음을 듣곤 사형장에 끌려가는 죄수처럼 바짝 얼어 마른침만 삼켰다.
“아, 있다~!”
이번에 없으면 정말 학원을 다 뒤집어서라도 찾아올 생각이었을까. 무시무시한 얼굴로 나타난 플로이드는 자신을 기다리는 아이렌을 보곤 표정을 싹 바꾸었다.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온 그는 겨우 반나절 못 보았을 뿐인데 몰라보게 수척해진 아기새우의 얼굴이 재미있는지, 화를 낼법한 상황임에도 계속해서 피식 웃고 있었다.
“아기새우야, 오늘 종일 뭐가 그렇게 바빴어? 스마트폰도 꺼져있고. 술래잡기라도 한 거야?”
“……죄송해요, 선배.”
“나는 사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니라, 이유를 묻는 건데?”
지금은 자리를 비우는 게 신상에 좋겠다. 그리 생각한 에듀스와 그림은 재빨리 교실 밖으로 피신했다. 바쁘게 뛰어가는 두 사람과 한 마리는 느긋하게 1학년 A반을 향해 걸어오는 제이드를 발견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예의 바른 묵례뿐이었다.
도망치듯 인사하고 지나가는 후배들에게 눈인사를 돌려준 제이드는 아이렌과 제 형제가 대면 중인 교실로 들어갔다.
예상대로라고 할까, 추궁당하는 아이렌의 표정은 참으로 볼만했다.
“그, 제가 두 분의 선물을 준비하지 못해서.”
“그래서?”
“선배를 뵐 면목이 없었다고 할까…….”
“겨우 그런 이유로, 오늘 종일 도망 다녔다고? 식당에도 나타나지 않고?”
“……….”
그렇다는 말은, 오늘 아이렌은 아침 식사 외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걸까.
안 그래도 체력도 볼품없는 사람이, 빈속으로 그렇게까지 도망 다녔다? 겨우 ‘기발한 선물을 준비하지 못해 미안하다’라는 이유로?
아, 이처럼 웃긴 일이 어디 있을까. 플로이드는 결국 깔깔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하하하! 아기새우는 가끔 정말로 바보 같다니까! 아하, 아하하!”
“이런. 그렇게 웃으면 아이렌 씨가 민망해할 겁니다, 플로이드.”
“그렇지만 제이드, 지금 아기새우 꼴 좀 봐. 꼭 볕에 일주일간 말린 건어물 같잖아? 고작 그런 이유로 이렇게 되었다니 말이야. 아하핫!”
플로이드의 웃음은 자칫 얄밉다 못해 야속해 보일지도 몰랐지만, 아이렌은 전혀 기분 나쁜 기색이 없어 보였다. 아니, 아이렌은 오히려 웃는 그를 보고 안심하고 있었다.
그가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면 제가 웃음거리가 되는 일 정도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다른 이들을 상대로는 어떨지 몰라도, 플로이드 앞에서는 그저 늘 을인 존재. 그게 바로 아이렌이었다.
안도하는 아이렌과 웃음을 멈추지 않는 플로이드를 번갈아 보던 제이드는 평화로운 광경에 안심한 듯 피식 웃었다. 이번에도 아이렌이 없었다면 분명 큰 소동이 벌어졌을 텐데, 잘 마무리 되어 다행일 따름이었다.
자, 그럼 이제는 아이렌을 챙겨야겠지. 제이드는 실컷 웃고 기분이 풀린 형제를 대신해 지친 아이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렌 씨, 피곤하시지 않습니까? 배도 고프실 텐데. 생일파티장에 맛있는 게 많이 있으니 일단 같이 가도록 할까요.”
“……아뇨, 면목이 없어서 그건 좀.”
“이런, 저희 사이에 겨우 선물 정도로 파티 초대를 거절하시는 건 아니지요? 그건 저도 플로이드도 바라는 게 아닙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그들에겐 아이렌의 존재 자체가 중요한 거지, 사실 선물 같은 건 어찌 되든 좋았다. 제이드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아이렌을 가뿐하게 안아 들었다.
“자, 잠깐. 제이드 선배?”
“이런. 그간 마음고생이 심하셨습니까? 끼니를 많이 거르신 건지, 평소보다 가볍군요.”
어떻게 알았지.
아이렌은 능숙한 유도신문에 제가 3일 정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고민에 휩싸였단 사실을 토로할 뻔했다.
“기, 기분 탓일 거예요.”
“글쎄요? 어쨌든, 같이 가도록 할까요.”
“맞아, 맞아. 아기새우가 좋아하는 것도 준비해놨으니까 오지 않으면 곤란하고.”
아, 정말 이렇게 되어도 되는 걸까.
제이드에게 잡혀가는 아이렌은 즐거워 보이는 형제를 보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자신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이대로 얼렁뚱땅 넘어간다고? 리치 형제가 괜찮은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타인의 요구를 들어주는 걸 좋아하는 아이렌이기에 다들 간과하고 있지만, 사실 그는 이상한 부분에서 자기중심적이고 고집을 부리는 면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불편한 감정은, 분명 그런 면에서 돋아난 감정이었지.
“저어, 선배들.”
조심스러운 부름에 쏙 닮은 얼굴이 동시에 자신을 바라본다.
아이렌은 흥미롭다는 듯 자신을 보는 형제들에게 최후의 수단을 내밀었다.
“역시 선물은 드리고 싶으니까, 뭐든 한 가지 소원을 들어 드릴게요. 어때요?”
아마 이 자리에 그림이 있었다면, ‘그런 말을 하다니!’라며 비통하게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보다 재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법을 쓸 줄 아는 것도 아닌 제가 준비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었으니까.
제이드와 플로이드는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동시에 씨익 웃었다.
“흐음~, 소원이라.”
플로이드는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제이드에게서 아이렌을 빼앗아 안았다.
“그럼 아기새우네 세상 이야기해줘.”
“예?”
“아기새우가 살던 곳 이야기 말이야. 가끔 제이드에겐 해줬잖아. 신화가 어쩌고 하면서. 나도 듣고 싶은데. 아, 나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보다는 아기새우가 해본 것들 이야기가 더 궁금하지만.”
겨우 그런 걸 듣고 싶단 말인가. 좀 더 무리한 요구를 해도 좋을 텐데?
나름의 각오를 하고 강수를 던졌던 아이렌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너무 시시한 소원을 빌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떠벌리는 걸 즐기지 않았다. 가족 이야기는 오직 친하게 지냈던 연년생 남동생에 대한 것뿐이고, 고향에 대한 것도 바다가 있는 항구 도시라는 것 외엔 크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 외의 것은 캐물어도 모른 척 흘려넘기곤 했는데, 이렇게 묻겠다니?
“저, 정말 그런 걸로 괜찮으세요?”
“응. 필요 없는 물건을 받는 것보다는 이런 게 나은데.”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거절할 수 없다. 뭐든 들어준다고 한 건 자신이지 않나. 아이렌은 모든 걸 포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이드 선배는……, 뭐가 좋으세요?”
“글쎄요. 흐음.”
아이렌의 곤란한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제이드는 잠깐 창밖의 무언가로 시선을 돌리더니, 흘리듯 소원을 말했다.
“사진.”
“예?”
“아이렌 씨와 사진을 찍고 싶군요. 한 10장 정도. 플로이드도 함께 찍으면 좋겠지만, 서너 장 정도는 저랑만 찍은 사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거짓말이죠, 선배.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지만 아이렌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왜 그런 소원을 비는 거예요?”
“이런,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아이렌 씨. 뭐든 들어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차라리 심장을 꺼내 달라고 하세요!”
‘푸핫!’ 아이렌의 격렬한 거부반응과 극단적 대안에 플로이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제이드는 웃느라 어깨를 들썩이는 플로이드의 품에서 흔들리는 아이렌과 지그시 눈을 맞추며 매우 정중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제 소원의 이유를 설명했다.
“생각해봤는데, 아이렌 씨와 알아 온 지 제법 오래되었는데도 저희는 아이렌 씨와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더군요. 그건 너무 섭섭한 일 아닙니까?”
“겨우 그런 이유로요?”
“예.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은 게 이상한 일입니까?”
제이드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이렌이 사진을 찍는 걸 싫어한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소원으로 말했을 때도 이렇게 격렬하게 거부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대체 왜 저렇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걸 싫어할까. 아이렌은 사진을 찍는 것도, 손편지를 남기는 것도, 하다못해 마지카메의 포스트에 댓글을 남기는 일조차 싫어했다. 꼭 언제라도 사라져 버릴 사람처럼, 제 존재를 타인의 기억 외에는 남기고 싶어 하지 않았지.
원래 세계로 돌아갈 생각도 없고, 죽어도 이곳에서 죽을 거라고 말하면서, 대체 왜 저렇게 구는 걸까. 제이드는 그 점이 흥미로우면서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감질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전에 루크 씨와는 사진을 찍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저희와도 찍어주시죠.”
“예? 그걸 어떻게…….”
“루크 씨가 자랑하셨습니다. 아아, 정말 부러워서 속이 쓰리더군요.”
“…….”
아이렌은 그제야 제이드가 아까 창밖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한발 늦게 바라본 창밖 너머에는, 빌과 함께 중원을 산책하는 루크가 보였다.
‘그 때는 속아서 찍은 거였습니다’라고 변명해봐야 들어주지 않겠지.
머리가 아찔해진 아이렌은 마른손으로 제 얼굴을 몇 번이고 쓸어내리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알겠어요…….”
“이런, 그렇게 괴로워하시면 저도 속상한데요. 저희와 사진을 찍는 게 그렇게 싫으십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뭐하러 저 같은 걸 찍어요.”
이런. 저렇게까지 말하니 뭐라고 말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쑥스러워 내뱉는 말이라기엔 지나치게 큰 가시가 박힌 아이렌의 대답에 제이드는 조금 놀라 할 말을 잃었지만, 플로이드는 달랐다.
“그거야 아기새우가 좋으니까? 좋아하는 걸 찍는 게 이상한가?”
“예?”
“아기새우도 꽃이나 나무나 다른 녀석들 사진은 많이 찍잖아. 우리 사진도 찍고. 우리도 아기새우가 좋으니까 찍고 싶은데, 그게 이상해?”
단순하고도 명쾌한 논리에 아이렌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저 말을 부정한다면, 평소 사진 찍히는 건 싫어해도 찍는 건 좋아하는 제 행동이 모순됨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요.”
“그렇지? 그러니까 제이드랑 사진 찍자? 아하하, 언제 어디서 찍을까나. 그러고 보니 섬 시내에 포토 부스라는 게 생겼다는데, 거기에 가볼까?”
플로이드는 싱글벙글 웃으며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제이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의 가시를 뽑아버리는 제 형제의 대담함에 멍하니 눈만 깜빡이다가, 큭큭 거리며 웃어버렸다.
아무래도 올해 생일은 더없이 즐거울 것 같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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