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스테 생일 연성

원 캐스팅 특별공연

루크 헌트 드림


* 22년도 루크 생일 기념 글. 선배 생일 축하해요 사랑해요.

“빌 선배.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11월이 다 끝나가던 어느 날. 빌은 기숙사로 돌아가려다 말고 갑자기 자신을 붙잡는 아이렌의 말에 심각한 표정으로 멈춰 섰다.

이 학원의 홍일점이자 유일하게 마법을 못 쓰는 학생인 아이렌은, 불리하다 못해 불공평한 자신의 처지와는 관계없이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걸 꺼리는 사람이었다. 뭔가 곤란한 일이 있어도 최대한 자기 혼자서 해결해 보려 했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제야 조언이나 좀 구하는 정도였는데. 이렇게 대놓고 부탁이 있다고 하다니.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빌은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예시 몇 개를 떠올리고 물었다.

 

“혹시 무슨 일 생겼니? 드디어 그 녀석들이 사고를 쳤다던가?”

“말씀하시는 ‘그 녀석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는데, 무슨 사고가 터진 건 아니니 진정하세요.”

 

차분한 아이렌의 대답을 보아하니, 무슨 사건이 터진 건 아닌 모양이다.

빌은 속으로 안도하고 몸을 돌려 후배를 마주 보았다.

 

“그럼, 무슨 부탁을 하고 싶은 거니? 네가 남에게 뭔가를 부탁한다니. 꽤 드문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게 아니라, 루크 선배의 생일 선물 말인데요…….”

“흐음?”

 

그러고 보니 루크의 생일까지 일주일 정도 남았던가. 자신은 이미 선물을 준비했기에 꼬박꼬박 날짜를 세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 남았을 것이다.

아마 아이렌도 슬슬 선물 준비를 하려는 거겠지. 남에게 받는 건 어색해하지만 챙겨주는 건 좋아하는 그라면, 자신과 가까운 이의 생일을 그냥 넘어가려 할 리 없으니까. 빌은 상대가 뭘 물으려는지 유추하고 먼저 말을 꺼냈다.

 

“생일 선물 상담이라면 본인에게 가는 게 좋지 않겠어? 아니면, 깜짝 선물을 준비하는 거니?”

“아뇨. 선물은 이미 정했어요.”

“그래? 그럼 어떤 게 고민인 걸까?”

“실은…….”

 

주변을 슬쩍 둘러본 아이렌은 까치발로 눈높이를 맞추고 빌의 귀에 속삭였다.

‘대체 얼마나 비밀스러운 선물이기에 갑자기 이렇게 달라붙는 걸까.’ 가까이 다가오는 하얀 얼굴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뺄 뻔한 빌은 결국 귀를 빌려주었다가, 조곤조곤 속삭이는 말을 듣고 작게 탄식했다.

과연, 이런 선물이라면 최대한 비밀로 해 두고 싶을 만도 하다. 그리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 녀석이라면 정말 좋아하겠는걸.”

“그래 줄까요?”

“그럼. 그래서, 내가 어떤 걸 도와주면 되는 거지?”

“예상하셨겠지만, 연습을 좀 도와주셨으면 해서요. 좀 엄격하게 해주셔도 되어요.”

 

아이렌의 각오는 알겠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여러모로 엄격한 걸로 유명한 제게 지도를 부탁할 정도라면, 뼈가 부러지게 연습해서라도 완벽한 결과물을 내놓고 싶다는 뜻일 테니까.

혼자서도 알아서 잘하는 후배가 굳이 이런 부탁을 해오는데, 제가 어찌 거절하겠나. 빌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이왕 할 거라면 확실하게 하는 게 좋겠지.”

“예?”

“의상, 메이크업, 헤어 스타일링까지. 다 내가 책임져주겠어.”

“아니,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그럼 너무 많은 신세를 지게 되는 게 아닐까요?”

“내가 도와주는 이상 완벽하게 하고 싶을 뿐이야.”

 

그리고 이걸 기회 삼아 이 시원찮은 후배를 손봐주고 싶었으니, 제게도 손해만 있는 게 아니었다. 빌은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재빠르게 아이렌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이렌은 확실히 눈에 띄는 미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 봐줄 얼굴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모난 곳 없이 둥근 얼굴은 화려하진 않아도 수수한 친근감을 주었고, 언행이 어른스러워 특유의 성숙한 분위기가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바깥 활동보다는 앉아서 뭔갈 하는 걸 좋아해서 볕에 그을릴 일이 없는 피부는 보기 좋게 희었고, 허리 아래로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또 어찌나 검은지. 무엇보다 제비꽃을 닮은 그 눈동자. 분명 눈매가 날카로운 것도 아닌데 바라보고 있으면 말뚝이라도 되는 듯 푹 파고드는 그 보라색 시선을 마주 보고 있자면…….

 

‘조금만 더 손보면 훨씬 좋을 텐데.’

 

자신과 같은 욕심이 드는 게 이상하지 않다. 물론 이 욕심이 순수하게 원석을 발견하여 갈고 닦고 싶어 하는 보석 감정가와 같은 감정이냐 하면, 빌은 솔직하게 ‘아니다’라고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긴 하지만, 어떤 의미로든 그는 이 시원찮은 후배를 가만두고 싶어 하지 않았다.

빌의 의욕이 느껴진 걸까. 아니면 이왕 준비한 선물이니 가장 근사한 형태로 완성해 주고 싶은 걸까. 잠깐 고민하던 아이렌이 결심한 듯 답했다.

 

“뭐, 이왕 하는 김에 제대로 하는 게 좋긴 하겠죠.”

“좋았어. 그런 마음가짐으로 나서야지. 그 녀석은 까다로우니까.”

 

빌은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를 메모장에 적어나갔다.

제가 키를 잡은 이상,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생일 선물을 만들어 줘야지. 루크를 위해서, 아이렌을 위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그는 의욕을 불태우며 씩 웃었다.

 


12월 2일. 루크 헌트의 생일날.

빌은 수업을 마치고 생일파티장으로 가려는 루크를 영화연구부 동아리실로 데려왔다.

 

“빌, 정말 여기에 내 선물이 있다고?”

“그래. 아이렌이 열심히 준비한 거니, 얼른 들어가 봐.”

“흐음, 아이렌 군의 선물이라.”

 

굳게 닫힌 동아리실의 문을 보며 선물의 주인이 씩 웃었다.

다른 이들의 생일에도 가장 적절한, 상대가 기뻐할 만한 선물을 골라준 아이렌이 자신만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라. 대체 어떤 게 기다리고 있을지 두근거려서 입이 바짝 말라온다.

루크는 크게 심호흡한 후,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음?”

 

동아리실은 불을 모두 꺼놓아서 어두웠지만 딱 한 곳, 조명이 켜진 곳이 있었다.

작은 조명 아래 덩그러니 놓인 의자 하나.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 영화연구부 소속은 아니지만, 폼피오레의 기숙사생인 그 후배는 신사적인 몸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여기 앉으세요, 부사감.”

“오, 고마워. 무슈 담비 군.”

 

어째서 로랑이 여기 있는 건가.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 건지 궁금하지만, 지금은 이 흐름에 몸을 맡기는 데 우선인 듯하다. 분위기를 잘 타는 루크는 많은 걸 묻지 않고 얌전히 준비된 의자에 앉았고, 로랑은 싱글벙글 웃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저벅저벅. 로랑의 발소리가 사라질 즈음,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후우.”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의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루크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이 선물을 준비한 이라는 걸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자, 과연 뭘 준비했기에 이렇게 자신을 기다리게 하는 걸까.

루크의 기대감이 점점 부풀어가던 그때. 출입구 쪽에 서 있는 빌이 가볍게 두 번 손뼉 치자, 루크의 눈앞이 확 밝아졌다.

 

“!”

 

어둠 속에 숨어있던 이들이 드러나고, 익숙한 음악이 흐른다.

루크는 제 앞에 나타난 간이무대를 보곤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릴 뻔했지만, 본능적으로 사냥감을 찾는 한 쌍의 눈은 착실하게 조명 아래 서 있는 실루엣을 발견해 냈다.

그리 넓지 않은 무대의 한가운데 서 있는 건, 머리를 틀어 올리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블랙 드레스를 입은 아이렌이었다. 얇은 레이스 숄 아래로 팔과 어깨가 얼핏 보이는 그 복장은, 안 그래도 어른스러운 후배를 마치 다 큰 숙녀처럼 보이게 했다.

그런 아이렌의 뒤에 서 있는 것은, 서너 명의 폼피오레 학생들이었다. 그중에서는 로랑도 보였고, 원래 영화연구부 소속인 학생도 보였다. 자신들은 주역이 아니라는 듯, 부대 뒤쪽에 나란히 서 있는 그들은 스탠딩 마이크를 들고 있는 아이렌과 달리 작은 핸드마이크만 든 채 박자를 타고 있었다.

 

“―이 마을은 쥐 죽은 듯 조용해서♪”

 

노래를 시작한 아이렌은 마치 배우라도 된 듯 자연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루크는 그 모습을 보고, 문득 언젠가 무대 위 여자와 함께 보았던 뮤지컬을 떠올렸다. 환희의 항구에서 초연 후 꾸준히 인기 있는 그 뮤지컬은, 자유분방하고 모험가 기질이 강한 한 남자가 여행지에서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사건에 휘말리는 로맨스 스릴러 장르의 작품이었다.

지금 흐르는 곡은, 여주인공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나오는 노래.

아이렌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한 곡이자, 루크 본인도 마음에 들었던 넘버였다.

 

“나 같은 야심가는 팔다리도 제대로 뻗고 잘 수 없다네♪”

 

무대 위에서 스탭을 밟으며 노래하는 여인은 아이렌이 아니었다. 지금 이 현장을 휘젓고 다니는 저것은, 분명 이야기 속의 여인이었다.

루크는 관객이자 남주인공이 되어, 이방의 땅에서 노래하는 여인을 마주했다.

그가 몰입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선물을 준비한 이는 무대 구석의 앙상블들과 호흡을 맞추며 구절을 주고받았다.

 

“고래는 냇가에서 클 수 없지♪”

“바다로 가야 해!”

“송사리나 잡아먹을 순 없어♪”

“섬도 집어삼킬 수 있는 당신이니까!”

 

아이렌 만큼이나 열심히 연습한 앙상블들은 즐거워하며 코러스를 넣었다. 조촐한 무대였지만, 적어도 배우들의 합만큼은 훌륭한 공연이 아닐 수 없었다.

 

“소심한 남자들은 내 입맞춤에도 눈물 흘릴 뿐이지♪”

 

빙그르르 돌며 무대 중앙으로 온 아이렌은 그제야 루크를 바라보며 손을 뻗었고, 넘버의 마지막 가사를 내뱉었다.

 

“그럼, 거기 신사는 어떠신가?”

 

그 손길과 함께 반주가 끊기고, 모든 조명이 일제히 꺼진다.

숨 막히는 정적이 몇 초 정도 이어졌을까. 동아리실 안의 모든 불이 켜지고, 머쓱하게 자세를 고친 아이렌이 앞으로 우르르 몰려나온 앙상블들과 함께 어색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오오, 오오오……!”

 

그제야 겨우 정신이 든 루크는 참아온 숨을 몰아쉬며, 감탄과 함께 박수를 보냈다. 물론 관람이 익숙한 그는 박수갈채를 보내기 전,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뻐하는 상대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머쓱함을 거둔 아이렌은 화려한 복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수수한 미소를 지으며 유일한 관객에게 다가갔다.

 

“생일 축하드려요, 루크 선배.”

“Brava! 아아, 설마 이런 걸 준비했을 줄이야……!”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왼쪽 가슴에 손을 얹는 루크는 당장이라도 뛰어오를 것처럼 기뻐 보였다. 격렬한 반응에 어깨가 으쓱 올라간 아이렌은 평소의 겸손은 잠깐 치워두기로 한 건지 장난스럽게 으스대었다.

 

“저 아니면 누가 이런 걸 준비해 주겠어요? 그쵸? 좋아해 주시는 거 같아 기쁘네요.”

“좋아해 준다? 오, 지금 내 기쁨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니? 지금 내 심정을 표현하자면…….”

“아, 아뇨. 누가 봐도 정말 좋아해 주시는 거 같으니, 진정하세요.”

 

장난스러운 말에 진지하게 대답하는 루크를 본 아이렌이 재빨리 양손을 저었다. 제가 표현을 이렇게 했을 뿐, 지금 루크는 ‘인간이 이렇게 기뻐할 수도 있구나’라고 할 정도로 기뻐 보였으니까 말이다.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앙상블들은 히죽 웃으며 뒤에서 모든 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유일하게 단 한명, 로랑 만큼은 이 화기애애함에 끼어들고 싶은지 슬쩍 아이렌에게 말을 걸었다.

 

“후후. 코러스로 참여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사감과 아이렌이 열심히 준비한 만큼 부사감도 기뻐하는 듯해서 뿌듯하네.”

“그러게. 로랑, 도와줘서 고마워. 넌 우리 부도 아닌데…….”

“이 정도쯤이야! 부사감만을 위해 준비한 네 독무대를 볼 수 있는데, 얼마든지 객원 멤버가 되어줘야지!”

 

사실 이런 마음을 품은 건 로랑뿐만이 아니라, 다른 앙상블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귀한 구경을 할 수 있고, 주역은 아니라도 학교의 홍일점과 함께 무대에 오를 수 있다니. 폼피오레 학생으로선 지나치기 힘든 기회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들의 구경거리는, 여기 하나 더 있었다.

 

“아아, 정말 행복한 생일이야. 설마 마드모아젤 르나르가 나만을 위해…….”

 

원래도 쉽게 감동하고 모든 것에 장점을 찾아내 찬사를 내뱉는 루크라지만, 지금 그는 심하게 감동해서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초롱초롱하던 눈은 이제 눈물이 고여 밝은 방 안에서 더욱 반짝거리고 있었다.

부사감의 감동 대잔치에 앙상블들은 흥미진진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정작 선물을 준 이는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서, 선배. 우, 울어요?”

“후후, 기쁨의 눈물이니 걱정하지 말렴.”

“그건 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울 정도였나요……?!”

 

그만큼 기쁘다니 저도 기쁘지만, 그래도 우는 건 좀 당황스럽다. 아이렌은 늘 가지고 다니는 손수건을 꺼내려고 주머니를 뒤지려다가, 제가 지금 교복 차림이 아니라는 걸 떠올리고 한숨 쉬었다.

 

“어휴, 선배도 참.”

 

아무리 기쁨의 눈물이라 해도 제가 울렸으니, 제가 달래야지. 아이렌은 제 나름 책임감을 느낀 건지 루크를 꼭 안아주더니, 두 손으로 촉촉하게 젖은 눈가를 닦아주었다.

부드러운 손이 제 얼굴을 몇 번이고 쓸어내리는 걸 가만히 느끼던 루크는,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아이렌의 몸을 꽉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아아, 이대로 가져가서 방에 장식해 두고 싶구나.”

“이 모습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요? 하긴, 빌 선배가 심혈을 기울여 꾸며주신 거니…….”

 

‘아마 그 이유가 전부가 아닐 텐데.’ 앙상블 모두가 그리 생각하고 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사냥꾼이 사냥감을 탐내는 이유 같은 걸 사냥당하는 당사자에게 알려줘 봐야, 로맨틱하기보다는 무서울 뿐이지 않겠나.

물론 그 사냥감이 아이렌이라면 오히려 좋아할 수도 있지만, 그건 그거대로 곤란하다. 저 멀리서 이 모든 걸 지켜보는 빌이 있었으니까. 지금도 두 사람이 껴안고 있는 걸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그인데, 여기서 더 기름을 부어봐야 좋을 게 있겠나.

묘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중. 먼저 입을 연 건 슬슬 옷과 메이크업의 불편함을 견딜 수 없어진 아이렌이었다.

 

“일단 전 옷 갈아입고 올게요. 여기서 기다려 주실래요?”

“오, 그대로 있어 줘도 좋은데.”

“불편하니까 싫어요. 그리고 무대에서 내려왔으면 의상은 갈아입어야죠.”

 

소리 죽여 웃은 그는 제 옷을 챙겨 들고 사라졌다. 굳이 의상을 갈아입지 않고 교복 차림 그대로 무대에 오른 앙상블들은 굳이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었기에, 느긋하게 아이렌을 기다리며 오늘의 주인공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디서 연습을 했는지, 어떤 부분이 재미있었는지, 그가 궁금해할 만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멀찍이 떨어져서 이것저것 바삐 움직이던 빌이 루크에게 슬쩍 다가왔다.

 

“루크.”

“응?”

“이거, 아이렌이 주는 추가 선물이야.”

 

빌이 내민 건 특별한 디자인이 아닌, 평범한 USB였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포장 같은 것도 되어 있지 않았다. 선물로 주기엔 지나치게 수수한 USB를 얼떨결에 받아든 루크는 당장 내용물을 확인해 볼 수 없기에 눈앞의 상대를 추궁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뭘까, 빌?”

“본인이 전해주긴 부끄러우니, 녹음한 내가 전해주라고 하더라고.”

“녹음?”

 

‘설마’ 호기심으로 반짝이던 그의 녹색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녀석이 그러더라고. ‘공연은 현장감이 가장 중요하다지만 자료가 남지 않는 건 늘 아쉽다. 실황 CD도 안 주는 제작사들 같은 짓은 할 수 없다’라나 뭐라나.”

“그 말은, 즉…….”

“어제 따로 시간내어 녹음한 거야. 아주 만족스러운 음질은 아니겠지만, 최선을 다했지.”

 

설마 했던 녹음본이라니. 그것도 방금 공연의 소리만 녹음한 게 아니라, 따로 장소를 마련해 깔끔하게 녹음해 둔 음원이다?

루크는 제 귀로 대답을 듣고도 믿을 수 없는지,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혹시 내가 꿈을 꾸는 건가?”

“정말 기뻐하네, 당신.”

“당연히 기쁘지! 아이렌 군의 노래를 언제나 다시 들을 수 있다니. 정말 꿈만 같아!”

 

‘아, 또 울려고 한다.’ 앙상블들은 아이렌이 열심히 닦은 것이 무색하게도 다시 촉촉해지는 루크의 눈가를 보고 수군거렸지만, 감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음?”

 

USB를 소중하게 만지작거리던 루크는 갑자기 울리는 제 스마트폰을 꺼내, 알림의 정체를 확인했다. 도착한 메시지의 발신인은 빌. 용량이 제법 큰 메시지는 아무 내용도 적혀있지 않았고, 첨부 파일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참고로.”

 

메시지를 보낸 당사자는 얄궂게 웃더니, 제 핸드폰으로 영상 하나를 틀어 보여주었다.

그 영상은 루크에게 보내준 파일과 같았고, 내용은…….

 

“방금 보내준 이건 아이렌에게 허락받고 찍은 거야. ‘사진도 영상도 남기기 싫지만, 빌 선배의 노고가 아까워서라도 이번은 찍어두자’라고 하더라고. 원본은 내가 가지고, 네게도 보내주라 했어.”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아이렌의 모습은 꽤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스마트폰으로 찍은 것 치고는 구도도 화질도 보통 이상인 영상은 어딘가에 보여주기엔 애매할지 몰라도, 확실히 보존용으로는 손색이 없어 보였다.

앙상블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경악했다. 사진조차 찍기 싫어하는 아이렌인데, 촬영을 허락하다니. 아무리 생일 선물로 준비한 거라 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놀란 것은 루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제 스마트폰과 빌의 스마트폰을 토끼눈을 뜬 채 번갈아 보다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건 마드모아젤 르나르의 프러포즈인가?”

“저기, 착각하지 말아 줄래?”

“빌, 결혼식 축가로 뭘 불러줘야 아이렌 군이 좋아할까? 아이렌 군이 제일 좋아하는 뮤지컬의 넘버는 결혼식 용으론 좀 어두운데, 그래도 신부가 좋아하는 걸 불러주는 게 좋겠지?”

“웃기지 마, 누가 누구랑 결혼한다고? 내가 그걸 허락할 거 같아?”

 

영상을 끄고 스마트폰을 집어넣는 빌이 살벌한 눈으로 루크를 노려보았다. 그 살벌함은 당장이라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입을 꼬집어 버릴 것같이 맹렬해서, 앙상블들은 ‘왜 아이렌의 결혼인데 사감이 허락하느냐’라는 물음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황홀경에 빠진 루크는, 생명의 위협 같은 것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신혼여행은 꽃의 거리가 좋겠지, 아아……. 아이렌 군, 이제는 아이렌 헌트가 되는 건가. 그 이름도 잘 어울리는걸.”

“…….”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은 빌은, 결국 조용히 주먹을 꽉 쥐었다. 로랑은 곱디고운 사감의 손에 핏줄이 선 것을 눈치채고, 생일상을 제사상이 되기 전 두 사람을 중재하기로 했다.

 

“사감, 진정하세요. 좋은 날이잖아요? 예? 부사감이 기뻐서 저러는 거 알잖아요.”

 

능청스럽게 빌 앞에 얼굴을 들이민 그는 망상을 전개하는 루크의 말이 들리지 않게 일부러 요란스럽게 말을 걸었다.

다행스럽게도, 후배가 적절한 타이밍에 끼어든 덕에 빌의 분노는 금방 가라앉았다.

곧 아이렌도 돌아올 테니 험한 꼴을 보일 수 없다는 일념으로 주먹 쥔 손을 편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알았어, 로랑.”

“잘 생각했어요, 사감!”

 

위기를 넘긴 로랑은 그쯤에서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하지만 입으로 재앙을 만드는 반 친구와 너무 오래 붙어있었기 때문일까. 안도한 그는 저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했던 생각을 그대로 털어놓고 말았다.

 

“그리고 애초에 사감이 막지 않아도, 옥타비넬의 2학년 선배들이 쳐들어와서 말릴걸요? 그 외에 사바나클로나 디어솜니아 등등 다른 기숙사에서도 여러 명 튀어나오겠지만?”

“…….”

 

그걸 굳이 말해야겠나. 빌은 차근차근 떠오르는 경쟁자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루크는 계속 결혼 계획을 떠들고, 빌은 총체적으로 착잡한 마음에 허우적거리는 중. 옷을 갈아입고 온 아이렌이 어쩐지 묘한 분위기에 멈칫하고 멈춰 섰다.

 

“……어라? 분위기 왜 이래요?”

“아냐, 신경 쓰지 마. 아이렌.”

 

이 좋은 날, 선물해 준 당사자까지 착잡해지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 영화연구부 부원들은 입을 모아 똑같은 대답을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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