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
빌 셴하이트 드림
* 전력 드림 60분 신데렐라 [50회 주제: 등불]
* 어제 전력에서 이어지는 이야기.
지는 해가 수평선을 붉게 물들일 즈음.
아이렌에게 ‘볼일 끝났어요’라는 연락을 받고 학교 근처의 해변에 도착한 빌은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하자마자 한숨을 토해냈다.
모래사장의 끝자락에 걸터앉아 젖은 치마 끝을 말리고 있는 아이렌은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어제보다는 숨통이 트인 느낌이지만, 여전히 얼굴에 깔린 그늘이 짙었지.
“그래서, 여기서 대체 무슨 볼일이 있었던 거니?”
꼭 연락해 달라고 한 건 자신이 맞지만, 사실 정말 연락할 줄은 몰랐다.
말로만 그러겠다고 한 후 은근슬쩍 돌아와서 ‘깜빡했다’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나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다니. 언제나 제게는 이기지 못해 금방 뜻을 굽히는 아이렌이라도, 정말 고집을 부리고 싶은 일 앞에선 절대 물러서지 않았는데.
여러모로 불길한 의외성의 연속 속. 가까이 다가오는 빌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이렌이 무심하게 답했다.
“산책이요.”
“산책?”
“예. 정말이에요.”
딱히 거짓말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다. 아이렌은 생각이 많아지면 자주 걸으러 나갔고, 바다를 보는 것도 좋아했으니 여기 와서 산책하는 게 이상하지 않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산책하러 나온 걸 굳이 볼일이 있다는 식으로 거창하게 말한 게 좀 거슬리긴 하지만……. 지금은 이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그는 마치 퇴로를 막듯, 아이렌의 바로 앞에 섰다.
“좀 괜찮니?”
“네?”
“어제부터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잖아.”
그의 말을 들은 아이렌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는 마치, 중대한 비밀이라도 들킨 듯 당혹스러워했다.
“티 많이 났나요?”
뭘 당연한 걸 묻는 거지. 지금 농담하는 건가.
빌은 목젖까지 올라온 말을 이성으로 참아 억누르고, 한층 부드러운 언어로 되물었다.
“숨길 생각은 있었니?”
“아니, 당연하죠. 대부분은 몰랐을걸요. 선배야 예민하시니 눈치채신 거겠지만.”
빌은 어처구니없는 아이렌의 대답에 눈을 찌푸렸다. 아이렌이 말하는 바와 달리, 오히려 그의 상태는 대부분이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제가 예민해서 알아챈 게 아니라, 어지간히 둔하지 않은 이상 알 만큼 표정이 좋지 않았으니까.
‘하긴, 거울도 안 보는 애가 어떻게 자기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겠어.’
타인의 속내는 가만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대충 설계도를 그려내면서 제 표정 하나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니. 정말이지, 엉성하기 짝이 없는 여자다.
빌이 상대의 기형적인 능력을 속으로만 한탄하는 사이, 아이렌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래 묻은 옷을 털었다.
“걱정하셨어요?”
그런 건 굳이 묻지 않아도 알겠지만, 세상에는 뻔한 것을 확인해야 하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
빌은 한층 가까워진 제비꽃색 눈동자와 시선을 맞춘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하니? 그렇게 죽상으로 있는데.”
“죽상으로 보일 정도였군요.”
빌이 과장법을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이렌이 소리 죽여 웃는다.
그 웃음은 정말 어설픈 정도로 허술하게 꾸며낸 미소라, 빌은 따라 웃어주지도 않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니?”
어차피 아무 문제도 없다고 하겠지. 아이렌은, 그런 애니까.
생사가 걸렸을 만큼 위태로운 일이거나 사소하지만 간절한 소망이 있는 게 아닌 이상, 아이렌은 제 개인적인 문제는 입 밖으로 내지 않았으니까. 구체적인 문제를 말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아예 아무런 일이 없는 듯 군다고 할까. 그건 상대가 자신에게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들지 않게 하려는, 아이렌만의 배려 아닌 배려였다.
이건 제게만 그러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그러는 거니. 이번에도 능청을 떤다 해도 화가 나진 않을 거다. 그렇게 생각한 빌이었지만, 아이렌의 대답은 굉장히 의외였다.
“있긴 하지만, 굉장히 개인적인 문제라서요.”
살짝 시선을 피하며 담담하게 사실을 말한 그는 횡설수설 설명을 이어갔다.
“남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제 마음가짐에 관한 문제라서……. 그냥 생각이 좀 많아진 것뿐이에요. 신변이랑 아무 상관 없고,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문제도 아니죠. 명확하게 말하자면 문제라고 할 것도 아니고요. 그냥 고민이에요. 좀 더 나은 방향을 찾는…….”
아. 이건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빌은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왜, 사람은 죽기 전에 갑자기 변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유도 명확하지 않게 안 하던 짓을 하는 사람은, 여러모로 아슬아슬한 상황일 가능성이 컸다. 이건 수많은 이야기에서 클리셰로 사용된 상황이고, 실제로도 이런 경우가 많았으니까.
언제나처럼 능청 떠는 후배를 적당히 꾸짖고 살살 구슬릴 작정으로 온 빌은 이야기의 방향을 확 뒤집는 돌발상황에 저도 모르게 몇 번이고 마른침을 삼켰다.
“……왜 남이 해결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구나. 그런 식이라면 심리 상담가는 전부 실직할 텐데.”
“어라, 그러게요. 음, 방금 말은 좀 경솔했을지도.”
이 와중에도 제 의견을 고집하진 않는 아이렌은 여전히 저 멀리, 지는 해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찾아온 고민은 아니니까,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사람은 학습의 동물이라잖아요? 분명 일주일도 안 가서 괜찮아질 거예요. 아무리 곤란한 손님이라도, 얼굴을 외울 정도로 자주 찾아오면 대응법을 익히게 되는 법이잖아요? 평생 이 고민이랑 줄다리기하며 살아왔으니, 괜찮아질 거라는 건 제가 잘 알아요.”
무엇 하나 확실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두루뭉술한 설명들이지만, 빌은 아이렌이 품은 고민이 어떤 형태를 하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하던 노트. 끝없는 자기 의심. 그만둘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 열정과 욕망. 그 모든 것들을 자신도 겪어보았으니 어찌 모르겠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선배. 선배 같은 사람이 신경 써 주다니, 저는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일까요.”
저 말을 할 때가 되어서야, 아이렌은 드디어 빌과 눈을 맞추었다.
‘아, 보랏빛 안개다.’ 제 그림자에 가려져 한층 어둡게 느껴지는 눈동자에서 어제 동아리실에 엎어져 있던 아이렌의 모습을 본 빌은 머리로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예?”
아이렌이 반사적으로 되묻지만, 빌은 두 번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걱정을 덜기 위한 눈속임 따위는 용서할 수 없다. 어차피 다 들은 걸 아니까, 그 매일매일 바쁘게 굴러가는 머리를 쓰지 말고, ‘알맞은 대사’가 아니라 ‘진심’을 말해라.
꾹 다문 빌의 입술에서 그의 의지를 읽어낸 아이렌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대체 누가 빌 셴하이트의 관심을 거절하겠어요?”
“다른 사람이 어떤지는 관심 없어. 네 이야기를 해.”
“그거야, 당연히 저도 그 ‘누가’에 포함되어 있죠.”
아니다. 이건 적당한 대사일지는 몰라도, 제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다. 애초에, 이렇게 빙빙 돌려 말하는 건 NG이지 않은가. 자신은 이토록, 직설적이게 원하는 바를 말하는데.
화를 내지도, 실망하지도, 심지어 체념하지도 않는 고운 얼굴 앞. 겨우 맞춘 시선을 다시 돌리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던 아이렌은 한참 그렇게 가만히 있더니. 돌연 빌의 손을 맞잡았다.
“이렇게 선배가 마중 나와 준 덕분에, 돌아가는 길이 환해졌잖아요. 제가 왜 감사해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렌은 아주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무표정처럼 보일 정적인 미소. 하지만 그 미소는 진짜였다. 진심을 담은, 기쁨이었다.
아. 그래. 제가 바란 건, 이런 대답이다.
고집 끝에 원하는 걸 얻은 빌은 먼저 얽혀 온 손을 꽉 잡더니, 그 나름의 대책을 제시했다. 상대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줄 해답지는 아니더라도, 답으로 가는 길을 밝혀 줄 등불이 되어 줄 대책을.
“이번 주 주말에 시간 있니?”
“이번 주요? 있어요.”
“그럼 같이 영화 보러 가지 않겠니? 네가 좋아할 만한 영화가 개봉했는데.”
‘아.’ 빌의 말에 짧게 저도 모르게 헛숨을 삼킨 아이렌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제가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지 빌은 결국 눈치채 버렸다. 그걸 자각하고, 부끄러워졌기 때문이었다.
열이 오른 얼굴을 빈손으로 훔친 그는 몇 번이고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네. 꼭 데려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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