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타브] Under, dark
그곳에 너와 나의 낙원이 있다.
비승천 아스타리온 X 타브(아샤블레 리멘타)의 엔딩 후 일상을 마음대로 날조했습니다.
소소하고 고요한 행복이 가득한 단문 글입니다. 오늘도 인스턴트지만, 감사합니다. 😊
Under, dark
연고도, 살길도 없는 자들만이 제 발로 걸어들어간다는 버림받은 땅. 퀴퀴한 바람과 수서르 블룸의 푸르스름한 빛만이 마음을 달래주는 우울한 곳. 계절의 변화나 달의 위상 같은 낭만은 어린아이의 몽상을 골리기 위한 고약한 도구일 뿐인 온정 없는 땅. 나무로 지은 집은 침입자의 손에 불타기 일쑤요 빼앗은 땅마저도 영원히 내 것은 될 수 없는, 그야말로 안식이 없는 땅. 눈을 감으면 보이는 칠흑보다 더 깊은 어둠의 언더다크. 아스타리온 안쿠닌은 이 암울한 땅에서 지극히 평범한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
고약한 하루를 되짚는 명상이 끝나면 기지개를 켜며 커튼을 걷어 묶었다. 그래봤자 나무판자로 봉인된 창만이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지만, 이 언더 다크에서 제정신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의미 없는 습관들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는 삐걱거리는 찬장의 문을 열고선 산처럼 쌓인 성냥갑 중 하나를 꺼냈다. 아샤블레가 없을 때나 제 몫을 다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아스타리온은 버릇처럼 그녀가 알려준 자장가를 흥얼거렸다. 엉망진창인 노랫말 사이로 작은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덕을 따라 달리는, 아니… 오르는인가? 오르는, 작은 마차 한 대~”
정확한 가사 따위는 알 게 뭔가. 그는 입맛대로 노래를 개사하며 집안 곳곳의 촛불을 밝혔다. 채 10분도 되지 않아 모든 촛불을 밝힐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집이었다. 그는 입바람으로 성냥을 불어 끄며 부엌으로 돌아왔다. 자장가는 가사 없는 허밍이 된 지 오래였다. 환기하고 불을 밝혔으니, 다음은 아침을 먹을 차례였다. 그는 화덕 위의 주전자를 들어, 허리에 손을 짚은 채 진한 커피 한 잔을 내렸다. 이는 둘이 즐기는 몇 없는 사치 중 하나였다. 짝이 맞지 않은 커피잔은 이가 나가 잘못하면 입술을 베일 수도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이 커피잔을 볼 때마다 조심하라는 아샤블레의 다정한 말에 이제야 먹을 만 해지겠다는 짓궂은 대꾸를 했던 기억이 났다.
두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빈 꽃병이 놓아진 작은 식탁이 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식탁 귀퉁이에 삐뚤빼뚤하게 새겨진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 날짜를 어루만졌다. 균형이 맞지 않아 덜컹거리는 낡은 나무 식탁 위로 함께 새긴 과거의 어느 날. 이는 두 사람이 마침내 행복을 찾았다는 무언의 맹세였다. 아스타리온은 등이 없는 의자에 구부정하게 앉아,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어두운 창문의 틈새를 바라보았다.
십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가 이 집을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느슨하게 턱을 괸 채 두 사람이 이곳을 처음 발견했던 날을 회상했다. 신혼집을 찾기 위해 반년이 넘도록 언더다크를 헤매던 어느 날이었다. 몬스터와의 전투 끝에 아샤블레가 절벽 아래로 스태프를 떨어트렸고, 두 사람은 깃털 걸음의 힘을 빌려 어둠 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그 아래엔 짙은 이끼와 버섯 군단에 감싸인 천연 요새가 있었다. 그들은 아샤블레의 불꽃에 의지해 절벽 아래의 동굴을 탐험했다. 그곳엔 습한 동굴의 천장을 지붕 삼아 지어진, 이름 모를 사냥꾼의 버려진 오두막이 있었다. 내부가 안전할지 몰라 반신반의하며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아스타리온은 구역질을 참아내지 못한 채 다시 뛰쳐나갔고, 30초도 지나지 않아 아샤블레 또한 같은 신세가 됐다.
내부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아니, 언더다크에 세워진 바알의 신전이라 해도 믿을 법했다. 둘은 수건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은 채 조심스레 안으로 진입했다. 집, 아니, 폐허는 상상 이상으로 더럽고 불결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엔 반쯤 해체된 몬스터의 썩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1층은 이끼와 곰팡이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게다가 2층 침대에는 쥐가 파먹은 흔적이 선명한 집 주인의 육체가 있었다. 그녀만이 이 쓰레기장의 가능성을 보았다. 두 사람은 이 집을 두고 사흘 밤낮을 내리 싸워댔다.
“이것만큼은 안 돼. 아무리 잘 고쳐봤자 롤쓰 드로우의 애완 거미나 묻힐 곳이라니까?”
“당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돼. 내가 다 고칠 테니까 언더다크 관광이나 하고 있어.”
“오, 지금 나더러 너한테 모든 일을 맡겨놓고 손가락이나 빨고 있으란 거야? 다른 집을 찾으면 될 일이잖아!”
“무슨 소리야. 당신은 손가락이 아니라 내 목을 빨잖아.”
“달링, 미쳤어?”
아무리 인상을 찌푸리고 윽박질러보아도 저 뻔뻔한 농담은 배겨낼 수가 없었다. 애초에 아스타리온의 협박에 밀려날 사람이었다면 그와 결혼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언제나처럼,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싸움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이 집의 앞마당에서 결혼했다. 아스타리온은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무드 없는 첫날 밤이라며 투덜거렸고, 아샤블레는 별 대꾸도 없이 상의를 벗어 던졌다. 그날 밤이 정말로 끔찍했는지는 아스타리온의 양심에 맡길 일이었다. 물론 그의 우려대로 이곳에서의 삶은 윤택하지 않았다. 가끔은 떨어진 종유석에 지붕이 뚫리기도 했고, 절벽 위에서 떨어진 시체가 아침 인사를 건네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큼 고요했다.
두 사람의 집은 이 버림받은 땅에서도 외곽에 있었다. 그 때문에 언더다크의 수많은 괴담과 우울한 바람에서도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골치 아픈 스폰들의 문제에서도 “거기까지 가려면 2주는 걸리니 알아서 해결해.”라는 답장을 보낼 수 있었고, 아샤블레 또한 발더스 게이트의 문제와는 완전히 독립된 채로 살아갈 수 있었다. 이곳은 두 사람의 어둡고 아름다운 낙원이었다. 이제 그는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저 너머에서 도사릴 위협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하지 않았으며 사소한 일쯤은 웃고 넘길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평생토록 바라왔던 건 그저 의미 없고 고요한 아침이었다는 것을, 고립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마침 동굴 안쪽으로 큰바람이 불었다. 허술하게 보강된 창문의 틈 사이로 낯선 향기가 밀려 들어왔다. 보송한 땅의 흙먼지, 푸릇푸릇한 잡초의 비린내, 청량한 푸른 하늘의 바람과 반쯤 시든 장미꽃의 냄새였다. 깨달을 틈도 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잔을 개수대 안에 내려놓았다. 현관에 걸려있는 망토 하나를 챙겨 들고, 나무문을 활짝 열어젖힌 후 문간에 기대 언덕 너머를 바라보았다. 빛이 닿는 땅을 한가득 끌어안은 제 연인이 돌아오고 있었다.
이제 그는 빛 한 줌 없는 하늘 아래에서도 그녀를 찾아낼 수 있었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냄새만으로도 그녀의 여행이 어땠는지를 짐작했고, 입술 새로 읊조리는 제 이름 한 단어만 듣고도 그녀의 기분을 눈치챘다. 오늘은 뒷발꿈치가 떨어지는 속도가 유난히 느렸다. 게다가 이 정도 거리에서도 아직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걸 보면, 저 장미꽃 한 다발을 지켜내는 게 녹록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게 더 좋은 곳에서 살자고 했잖아, 달링. 습관처럼 떠오르는 푸념의 말과 상반되게도, 아스타리온 안쿠닌의 얼굴은 그 여느 때보다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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