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h (1)
“뭐라고?”
그건 아마도 타브가 처음으로 아스타리온에게 언성을 높인 일일 것이다.
“농담에 발끈하지 마, 재미없게.”
“날 펫이라고 부른 게 장난이었다고? 그건 카사도어의 지배를 받는 당신이 스스로 자조할 때 쓰던 단어였어. 당신은, 단 한 번도, 나에게 함부로 말한 적 없어. 그동안, 단 한 번도. 내 선택이 마음에 안 들었을 때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고!”
“너야말로 잊었나 본데, 네 보호가 필요했다고 다 말했잖아. 네 행동거지 하나하나 트집을 잡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니어서 참았던 것뿐이라고. 그리고 어차피 내가 투덜거려도 들은 척도 안 했으면서, 그걸 말할 자격은 되나?”
“그래? 그럼 지금은 힘이 생겼으니 내게 아쉬울 게 없다는 거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애완동물로 전락한 건가? 나보고 스폰이 되라고? 이게 네가 내게 주고 싶었던 진심이야?”
“하! 인제 와서 피해자인 척하는 거야? 난 그것들이 어떻게 되는지 네게 숨긴 적 없어.” 아스타리온이 타브의 양 손목을 거머쥐었다. “네 손도 내 손처럼 피로 물들었다고. 그런데 아직도 혼자서 깨끗한 척! 고고한 척! 순진한 척!” 그러다가 팍 놓고는 비죽이 웃는다. “억지로 한 것도 아니잖아.” 달링.
타브의 눈동자가 빛을 잃는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퍼렇게 질린다. 주먹을 쥐려 해도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다 결국 무릎이 꺾이고 만다. 그러나 아스타리온은 부동이다. 그가 팔짱을 낀 채로 저를 내려다보자, 타브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타브의 시선을 받은 아스타리온의 얼굴에 동요의 빛이 스쳤다. 그런 눈빛은 처음이었다. 아니, 수도 없이 많은 이에게 받아 본 시선이었지만, 타브가 저를 그리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마지막이 되리라. 타브가 아스타리온의 팔을 잡는다. 아스타리온이 이를 뿌리치려 했으나 타브가 온 힘을 다해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아스타리온을 내려다본다.
“그래, 당신은 승천 의식에 관해선 나에게 숨긴 게 없지. 모르는 게 있을지언정.” 타브가 시선을 바닥에 두고 낮게 웃는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음산한 목소리로 말한다. “자신도 몰랐던 게 분명해. 그렇지? 아스타리온, 그 영혼까지 바치는 건 줄은 몰랐잖아.”
아스타리온은 그리 말하는 타브의 시선이 저를 향하지 않는 것을 깨닫는다. 잔잔한 미소와 애정 어린 눈빛은 더는 없다. 이에 아스타리온이 눈을 홉떴다. “감히, 날 눈앞에 두고 없는 취급 하지 마.”
“가, 언데드.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여기에 남아있을 필요도 없지 않나.” 타브의 목소리가 무정하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군.”
아스타리온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조소했으나, 타브는 대꾸하지 않았다. 부정도 긍정도 더는 의미 없으니. 그러므로 아스타리온 또한 싸울 의지 없는 이에게 날 세우지 않고 돌아선다. 떠나는 등 뒤로 비명과 진배없는 찢어지는 울음소리가 들렸으나, 그것은 저와 상관없는 일이다. 더는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스타리온은 타브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을 수는 없었다. 아직 머릿속 올챙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여전히 제 의지를 거스르는 일이 남아있는 게 견딜 수 없이 거슬렸지만, 마침 원래 묵고 있던 여관과 가깝기도 해서 다시 한번 자르 궁전의 문을 밟았을 때 느낀 희열이 그 모든 걸 상쇄시켰다. 감히 저를 거부한 그 성직자 나부랭이가 하나는 맞춘 모양이다.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주인에게 허리조차 똑바로 펴지 못하는 비참하고 나약한 노예는 사라졌다. 아스타리온은 고개를 젖히고 두 팔을 벌려 가슴을 활짝 열고 큰 소리로 웃었다. 여기, 발더스 게이트의 어둠을 지배할 새로운 주인이 돌아왔다.
제 스폰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난민과 시민 간의 갈등으로 가뜩이나 혼란한 발더스 게이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땅이 흔들리는 탓에 나날이 혼돈의 도가니가 되었다. 절대자를 숭배하는 자들이 늘어났으나, 어쨌든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들은 사이비 종교는 꺼림칙 한 모양이었고, 아스타리온은 그쪽을 공략했다. 물리도록 읊어야 했던 사랑 타령도 필요 없고 제 육체를 도구로 쓰지 않아도 되는, 영생이란 이 얼마나 어여쁘고 달콤하며 향긋한 미끼인가. 거기에 카사도어가 남긴 유산도 한몫했다.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그의 사회적 지위까지 말이다. 피와 살에 영혼까지 모두 준 것으로도 모자라서 죽어서도 보탬만 되어 줄 뿐, 그 어떤 고문, 협박, 개소리도 하지 않는 완벽하게 죽은 아비. 곤죽이 되어버린 탓에 그를 기릴 방법이 없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랬다면 카사도어가 벨리오스의 해골에 그랬듯이 저도 그 옹졸하기 짝이 없는 송곳니에 뭐라도 물려줬을 텐데.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웃음이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아무도 없는 궁에 메아리친다.
흡혈 충동으로부터 해방되어 뱃속을 갉아먹는 허기가 사라졌으니 더는 피를 마실 필요가 없음에도 그 빈자리는 허세와 허영이 채웠기에 아스타리온은 매일 내키는 만큼의 피를 마시며, 고문 학대를 하진 않았으나 스폰을 도구처럼 부렸다. 그러나 입버릇처럼 난교 파티를 떠들어댔음에도, 스폰뿐 아니라 광신도나 먹이, 그 누구도 침대로 불러 취하는 일은 없었다. 생전의 저 자신만큼이나 아름다운 이를 데려다 놨어도, 동하지 않는 그 공허함이 불쾌하여 어떤 날에는 일방적으로 봉사를 시켜보기도 했지만, 단 한 번도 만족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아스타리온은 그것이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이 남아있는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광신도와 스폰을 풀어 타브 일행을 지켜봤다. 아니, 감시했다.
목적 없이 보내는 무료한 시간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지금까지 여정을 헤쳐온 속도를 생각하면 고타쉬를 처리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고, 그래서 하마터면 여전히 머리에 올챙이가 들었다는 것을 잊어버릴 뻔했다. 어쨌거나 그날은 온 발더스 게이트가 크게 흔들렸다. 이번 지진은 심상치 않았고, 그래서 아스타리온은 기체로 변신하여 제 스폰 하나가 주워온 실마리를 따라갔다. 죽는 날까지 두 번 다시는 가지 않겠다 맹세했던 하수구를. 바알 신전을 지나서 예전에 언더다크를 건넜던 것처럼 부두에 도달하자 한 때는 제 것이었던, 제가 버린 여자가 거기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추세를 지켜볼 뿐 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가 이상한 걸 알았다. 두 손을 모아 기도해도 이전처럼 빛나지 않고, 자책하듯 고개를 흔든 뒤 울 것 같은 얼굴로 제 입술을 꽉 깨물고 손에 든 무기를 마구잡이로 휘두른다. 형편없긴. 이전에 단검 다루는 법을 가르쳐준 적은 있는데, 모닝스타를 그리 써봐야 손목이 나갈 뿐이다. 혹은 무기를 놓치겠지. 아니나 다를까 타브가 무기를 떨궜다. 그 틈을 노리고 달려든 지능 탐식자를 카를라크가 걷어차고 쏟아지는 염수를 온몸으로 맞았다. 안팎으로 타들어 가는 고통에도 카를라크는 무너지지 않고 일어섰다. 윌과 게일이 원거리 마법으로 남은 탐식자를 먼저 해치운 뒤에 카를라크가 남은 포식자를 쓸어버렸다. 짧은 휴식을 취한 후, 타브가 여전히 피곤해 보이는 카를라크를 부축한다. 시커먼 물속에서 뇌가 천천히 떠올랐으나 최후의 수단이었던 네더스톤은 통하지 않고, 타브의 몸이 휘청거린다. 게일이 영창했다. 발버둥 치는 타브를 윌과 카를라크가 붙잡았다. 아스타리온은 그가 외친 주문이 무엇인지 알고 최대한 빨리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곳에 홀로 남은 게일이 단검을 꺼내 들었다.
위쪽 도시에 도달한 아스타리온은 텔레포트 한 타브를 찾아냈다. 게일이 품고 있던 오브는 발더스 게이트 아래쪽 도시의 절반을 날렸으나 네더브레인이 빠져나온 것이 먼저였다. 구형으로 패인 절벽을 향해 울부짖는 타브의 등 뒤로 무릎 꿇은 카를라크가 불꽃에 삼켜지고 곧 재가 되었다. 타브가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육척봉을 지팡이 삼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제 앞에 돋아난 가시밭길에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 마치 순교자와 같은 모습으로 가시밭 한가운데 선 타브가 저를 노리고 들어왔다가 만신창이가 된 고블린을 걷어차고, 일리시드를 넘어뜨려 수백 개의 가시 위에 굴린다. 그러는 동안에도 발더스 게이트에 남아 마지막 전투를 대비하던 동료들이 하나둘씩 쓰러진다. 섀도하트는 일리시드의 정신공격에, 레이젤은 촉수에 목숨을 잃는다. 수많은 고블린에게 둘러싸인 할신은 그대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독수리 형상이 추락하고, 두 팔을 들어 올린 채 서 있던 민스크에 비홀더가 살상 광선을 쏘았다. 윌은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다. 타브가 피투성이가 되어가며 한 자리에 묶인 채로 간신히 처리한 것은 고작 3마리의 고블린과 일리시드 하나였다. 주변을 둘러본 타브는 눈물을 흘리는 대신 그 자리에 털썩하고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았다. 그러나 신은 대답이 없고, 절망한 그가 손바닥으로 바닥을 내려치며 오열한다. 아스타리온은 조소했다. 신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통에 아스타리온이 고개를 들어 올려 처음으로 타브에게 고정된 시선을 돌렸다. 전의가 상실하는 걸 기다렸다는 듯 네더브레인이 천천히 내려오는 것이 보인다. 이런, 아스타리온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어떻게든 도망칠 생각으로 돌아섰는데 갑자기 타브가 그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른다.
“아스타리온! 아스타리온!!”
신에게 외면당한 것에 충격이라도 받은 건가, 저를 간절히 찾는 모습에 아스타리온은 동요하여 상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함께 도망치기엔 너무 늦었다. 허나 타브가 이마가 땅에 닿도록 몸을 숙이고 제 가슴을 부여잡고 울며 부르는 소리까지는 외면하지 못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고, 타브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타브는 여전히 고개를 처박은 채였다. 짧은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그와 정신이 이어졌다. 그리고 곧 모든 사고가 암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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