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h (2)
아스타리온은 무정하고 잔인한 구석이 있는 남자였지만, 제 연인에게는 가식을 덜어내고도 제법 살가웠고, 타브는 감정 표현이 풍부하지 않은 만큼 그것의 8할 정도는 제 연인에게 쏟아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둘은 서로를 아꼈다. 그랬던 만큼 승천 의식을 마친 아스타리온의 변화는 타브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거르족을 거의 도륙하다시피 한 아스타리온을 보고 카를라크와 게일은 돌아오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두 사람이 그의 돌변한 모습을 거북하게 여긴들 타브만큼 심각할 수는 없었다. 역시나 숙소로 돌아온 두 사람은 격렬하게 말다툼을 했고,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아스타리온은 그곳을 홀연히 떠났다. 그리고 이내 타브가 애끊는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앉아 통곡했다. 성직자와 언데드. 세간의 상식대로라면 천적이나 다름없는 관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하던 둘이 삽시간에 파국을 맞이한 것은 어찌 보면 예정된 일이었으나,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탈수증이 올까 봐 우려될 정도로 눈물을 쏟은 타브는 그대로 몇 날 며칠을 앓아누웠다. 어떤 병에 걸린 것은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이 간호를 받으며 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남은 일행이 탐색을 멈춘 것은 아니었지만, 개개인의 역량이 남을지언정 부족하지는 않았음에도, 리더의 부재는 조금 큰 공백이었다. 아주 조금 곤란하고.
“일단 무난하게 대화를 이어갈 사람의 존재란 정말 중요하더라고.” 사흘째 와병 중인 타브의 상태를 확인하며 게일이 농담을 건넸다.
여기 있는 놈들 죄다 괴짜라고! 그의 말을 떠올리며 타브가 웃었다. “네가 있었잖아.”
“지식으로 설득을 하는 거라면 자신 있지만, 그게, 상대가 그, 좀.”
“위브를 전혀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라서 문제였던 거야, 어설프게 다루는 사람이라서 문제였던 거야?”
“첫 번째는 문제가 안 되지. 차라리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면 그만이거든.”
게일이 한숨을 푹 쉬는 것을 보고 타브가 웃었다. 고생했다며.
“이제 안색도 돌아오고 농담도 하는 것 보니 괜찮은 거지?”
“컨디션을 물어보는 거라면, 내일부터는 움직여보려고 해.” 게일의 물음에 타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하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네.” 게일의 눈썹이 팔자 모양이 되었다. “철 왕좌에 잡혀있는 인질을 구해내야 하는데 너랑 내가 보조해야 할 거야.”
“그래서 불렀어, 게일.” 타브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나, 신성력이 느껴지지 않아.”
“언제부터 그랬어? 언제 안 거야?”
“언제부턴 진 모르겠고, 깜빡깜빡 깰 때마다 너무 어두워서 불꽃을 소환했을 때 알았어.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서 그런가 했는데 오늘도 안되네. 아무것도 안 돼. 마치 숨 쉬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위브를 다루는 데 위화감이 느껴져.”
“수십 년을 믿었던 신에게 등을 돌린 나도 아무렇지 않은데 네가 파문당했을 리 없잖아.” 섀도하트가 끼어들었다. “그걸 의심하는 거 맞지?”
“넌, 본디 셀루나의 신도였으니까, 섀도하트.”
“너도 신앙을 잃은 건 아니잖아.” 게일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모르겠어.” 타브가 고개를 떨궜다. “7천 명의 영혼을 바치는 의식을 도운 내가 신을 섬길 자격이 있는 걸까.”
“뱀파이어 스폰이잖아. 굶주린 7천 명의 뱀파이어 스폰을 풀어줄 수도 없었던 거 아냐? 안 그래?”
섀도하트가 타브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며 동의를 구했으나, 울상을 한 타브가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그러면 안 되잖아. 그들이 언데드기 때문에 우리가 퇴치해야 마땅할 대상이라면, 그 사람은?” 타브가 떨리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을 뱉는다. “그럼 이다음에는 그를 처치해야 하나.”
제 입에서 나온 말인데도, 제 것 같지가 않은 위화감에 타브가 몸서리쳤다. 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눈동자를 보고 섀도하트와 게일도 말을 삼켰다. 섣부른 판단이나 억측인가? 아닐 것이다. 자헤이라나 할신 만큼이나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의 리더는. 아스타리온은 머지않아 힘에 눈이 멀어 타락할 테지.
“일단 당면한 문제에 먼저 집중하자고.” 게일이 타브의 남은 한 손에 제 것을 얹었다. “난 이게 네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해. 여신은 생각보다 관대하니까. 나를 봐. 내가 그 증거야.” 게일이 영 설득력 없는 표정을 하고 말했다.
“맞아. 적을 물리칠 수 있는 폭탄을 안겨주는 분이지.” 섀도하트가 말했다.
“실수를 만회할 방법을 한 번 정도는 주잖아.” 게일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내게도 기회를 주시겠지.” 타브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숨 쉬었다.
“일개 신도인 나조차도 놓지 않을 정도로 쪼잔하지만, 그건 샤만의 문제이길 바랄게.”
어떤 결론은 내릴 수 없었으나, 당장 문제가 해결 나지도 않을 것이므로 타브는 현재 제 상태를 일행에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동료들을 볼 낯이 없었다.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습니다.”
“널 탓 할 생각은 없다. 매번 어려운 선택을 하게 만들었으니, 이런 건 함께 감당해야지.” 레이젤이 말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잖아, 애송이.” 자헤이라가 쓰게 웃었다. “그보단 어떻게 할 건지 생각하자고.”
“성직자는 위저드나 소서러랑 달리 무거운 갑옷을 걸치고 무기로 싸우는 법도 배우니까.”
“그건 그렇지만, 지금 당장 내가 레이젤이나 카를라크처럼 1인분을 하진 못하지.” 타브가 고개를 저었다.
“신성력을 잃었다고 해서 위브 자체를 다루지 못하진 않을 거야. 나도 여전히 마법을 쓰고 있으니까.”
“그리고 난 원래 날 때부터 위브를 다룰 수 있었어.”
“소서러란 말이야?” 게일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내 의지로 귀의했지. 사고를 너무 많이 쳤거든.”
“와일드 서지로군.” 자헤이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상황에선 여러모로 곤란하지.” 타브가 얼굴을 찌푸리고 웃었다. “그래서 세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싶어.” 타브가 할신, 자헤이라, 그리고 레이젤을 지목했다.
“좋은 생각이오. 위저드보다는 드루이드가 성직자의 마법 운용과 비슷할 테니.”
“그리고 레이젤이 날 훈련해 줬으면 해.”
“나도 잘 가르쳐 줄 수 있는데, 솔져.”
“넌 윌과 함께 대공을 구출하러 가야지. 게일하고 섀도하트가 지원할 거야.” 민스크와 눈이 마주친 타브가 급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부와 민스크도.”
“일어나자마자 너무 무리하는데. 그러지 않아도 아무도 널 쫓아내지 않아.”
“그래야 아무 생각도 안 할 수 있잖아.”
타브가 낮게 웃고는 눈을 돌리자, 자헤이라가 혀를 찼다. 그러다가 한숨을 길게 내뱉고는 할신에 눈짓을 했다. 가만히 선 할신이 잠시 고민을 하다가 레이젤의 팔을 끌었다.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니 나와 대련을 좀 하는 게 어떻겠소.”
“좋은 생각이야. 며칠 동안 이 근처만 배회했더니 몸이 찌뿌둥하거든.”
레이젤이 목을 돌리고 팔 관절을 풀며 먼저 걸어 나가는 것을 보고 할신이 시선을 건네자 자헤이라가 손으로 가볍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둘이 여관 문을 나서는 것을 본 자헤이라가 타브를 잡아끌어 억지로 앉힌다.
“이 일행 중에서 유일하게 결혼부터 이별까지 모두 경험한 사람이 들어 줄 테니. 자, 털어나 봐.”
“다 끝난 일이야.” 타브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신을 직접 등지고도 여전히 건재한 신성력의 소유자가 조금 전까지 여기에 있었거든?”
“7천 명의 영혼을 지옥으로 보내는 건 용서받을 수 없나 보지.”
“안됐지만, 신은 생각보다 우리에게 관심이 없어. 악신이 아니고서야 그 정도로는 개입하지도 않고.”
“그 사람 같은 소릴 하는군.”
“그 사람이라. 이제 이름도 부르지 못하겠나? 너무 애달파서?”
“아니, 자신이 없어서.” 타브가 울상을 지었다. “그, 아스타리온이 나와의 관계에서 가장 두려워했던 게 뭔 줄 알아?”
“일단 네게 퇴치당할 걱정은 아니란 건 알겠어.”
자헤이라의 뼈 있는 농담에 타브가 피식 웃었다. “내가 자길 연민하는 것. 몸으로 유혹할지언정 동정심을 사고 싶지는 않았던 거라고, 그래서 그건 자존심 때문일 거로 생각했는데, 지금에야 알 것 같아. 왜 가엾게 여기지 않았으면 했는지.” 타브가 제 얼굴을 감싸 쥐듯 턱을 괴었다. 타브가 젖은 눈을 깜빡이고 생각에 잠긴다. “그저 내가 나이길 바랐던 거야. 물리쳐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도 좋았지만, 무조건 편들어주는 걸 바라지도 않은 거지. 내가 자기를 남들과 똑같이, 평범하게 대해주는 것만으로도 좋았으니까. 하지만 자기 처지가 그대로여선 영영 대등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거야.” 타브가 고인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을 닦고 울음을 삼킨다. “자기가 진짜로 원하는 바가 뭔지 몰라서,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매번 모순되는 행동만 하는 바보야.” 그러다가 또 한 방울의 눈물이 볼을 따라 흐른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순간에 결국 그 사람을 동정해버렸고.” 타브가 자헤이라에게서 눈을 돌려 아스타리온이 서 있던 자리를 멍하니 쳐다본다. 그러다가 고개를 떨구고 웃음을 흘렸다. “아스타리온은 상대의 경계심을 낮추는 게 특기잖아. 사실은 긴장이 풀리는 걸 내가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게 아닐까. 그 사람도 내가 베푸는 선의를 애정이라 착각했고. 결국, 그렇게 우린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을까.”
그러자 조용히 듣고 있던 자헤이라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모순적인 바보인 건 너도 마찬가지네. 네 말에 답이 있잖아.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 줘? 그런 건 소설 속 얘기야. 그러면서도 상대가 나를 위해 변하고 양보하길 바라지. 사랑이란 건 원래 지독하게 맹목적이면서도 이기적이야. 그런데도 너희 둘은 서로 받아들였잖아. 그런 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 사랑이겠어.”
“위로될 듯 되진 않는데.” 타브가 소리 내 웃었다. 그리고는 또다시 그가 있던 자리에 시선을 던졌다. “우린 첫 단추를 완전히 잘못 끼웠어. 나는 그걸 다 알고도 다음 단추를 또 잘못된 구멍에 끼웠고. 하지만 제대로 된 관계를 맺기 위해서, 우린 이걸 고쳐나가자고 약속했지.” 타브가 눈을 내리깔았다. “아스타리온이 자기 말대로 구제할 길 없는 개자식이었다면, 우린 마지막까지 틀린 구멍에 틀린 단추를 끼워 넣고 말았겠지만, 오히려 나 때문에 마지막 구멍에 단추를 끼워 넣지 못하고 끝난 거야.” 흐으, 타브가 채 삼키지 못한 울음을 울었다.
내 탓이야.
내가 다 망쳤어.
그는 이제 없어.
카를라크의 복수를 도우려고 타브는 아직 온전하지 못한 몸을 이끌고 나섰다. 그리고 저 자신이 실전에 뛰어들기에는 아직 여러모로 미숙하단 사실을 확인했다. 거기에 더해서, 복수를 끝마친 카를라크가 격앙된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토로한 본심은 잔뜩 위축된 타브에게서 자신감을 앗아갔다. 아무것도 잃지 않고 완벽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 선택 하나하나가 남은 싸움을 좌지우지할 것이라는 책임감이 양어깨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그러나 시간을 벌 수도 없었다. 고타쉬의 네더스톤까지 회수하고 난 뒤, 엘더브레인은 통제를 벗어나려 하루가 멀다 하고 온 발더스 게이트를 흔들었다. 여기까지 오면 시간과의 싸움이다.
타브 일행은 바알 신전을 지나 부두에 놓인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도중에 배가 부서지는 바람에 퇴로가 차단되어 결의는 더욱 단단해진다. 그러나 물살에 사정없이 흔들리는 배를 타고 건너온 탓인지 불안함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타브가 심호흡하여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엘더브레인의 정신공격으로 잠시 집중이 흐트러진 사이, 지능 탐식자와 포식자 무리에게 기습당하고 만다. 타브는 습관처럼 두 손을 모아 일행의 충격을 흡수하려 했다가 곧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가다듬고 허리춤에 매단 모닝스타를 고쳐잡았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무게에 휘둘려 곧 놓쳐버리고, 자신을 감싸기 위해 카를라크가 달려들었다. 힘껏 걷어차인 지능 탐식자는 폭발과 함께 염수를 쏟아냈고, 이를 카를라크가 온몸으로 맞았다. 그러나 카를라크는 안팎으로 타들어 가는 고통에 무너지지 않는다. 겨우 익힌 회복 주문을 걸어주려 카를라크의 몸에 손을 얹은 타브가 놀란 표정을 짓자 카를라크가 뒤로 물러섰다.
“회복포션으로 충분해.” 카를라크가 말했다.
타브가 데인 것처럼 화끈거리는 손바닥을 털어내며 초조함을 떨쳐내려 애썼다. 그 사이 윌과 게일이 원거리 마법으로 남은 탐식자를 먼저 해치워서 폭발의 위험을 제거한 후에 카를라크가 영혼 동전을 사용하여 포식자를 전부 해치웠다. 짧은 휴식을 취한 후에도 카를라크가 지쳐 보여서, 일행 내에서 유일하게 그와 체격이 비슷한 타브가 부축한다. 그런 타브의 얼굴에도 피로가 역력했으나, 카를라크는 기댈 수밖에 없었다.
“Aqua pura!”
주문으로 생성한 물을 뿌려주어도 금세 증발했으나, 바글바글 끓는 몸이 식자 카를라크의 얼굴이 조금 편해졌다.
배를 잃었으니 전진하는 수밖에 없다. 타브의 표정이 내내 어둡다. 카를라크가 그런 타브를 위로했다.
“조금만 더 가면 끝낼 수 있어.”
안타깝게도 그런 행운은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여정이 내내 그랬지.
엘더브레인이 떠오르자 타브가 하나가 된 네더스톤을 들어 올렸으나, 최후의 수단이라 생각했던 것은 통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황제가 타브에게 등을 돌리고 만다. 황제가 내내 스틸메인 대공을 조종했다는 확신을 가진 후, 타브는 황제와 크게 다퉜고, 그 이후로 둘은 내내 반목했으나 목적이 같았기에 겨우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라파엘로부터 오르페우스의 망치를 회수한 것을 안 황제는 타브가 저 자신을 저버릴 것이라 결론 지었다. 레이젤과의 약속을 위해 오르페우스를 해방할 생각이었던 타브는 그를 잡을 수 없었다. 황제에게서 실망과 회한이 전해졌다. 언젠가 또 찾아올 기회를 기약하며 황제가 냉정하게 결단을 내린다. 또 한 번, 큰 갈림길에서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책임의 무게가 타브를 짓누른다. 그러나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이것으로 최후의 보호막이 사라지고, 일행은 진화한 네더브레인 앞에 알몸으로 선 셈이니. 오리무중 상태에 빠진 나머지 혼란스러워 타브를 본 게일 또한 결심한 듯 윌과 카를라크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에 카를라크가 게일과 제 사이에 서자,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타브가 발버둥 쳤으나 윌이 카를라크와 함께 온 힘을 다해 그를 붙잡았다.
“나랑 약속했잖아! 게일!! 이거 놔! 윌! 카를라크!”
“나도 이런 선택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넌 우리 리더니까, 난 너를 살리는 것에 모든 걸 걸겠어.”
게일이 조용히 주문을 읊는다. “Fugamus inferni blandimenta.” 그리고 홀로 남은 게일이 단검을 꺼내 들었다.
시간이 멈춘 듯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른 직후, 압축된 공기가 팽창하며 굉음이 천지를 흔들었다. 단번에 지반이 푹 꺼지고 발더스 게이트의 아랫도시 절반이 사라졌다. 그러나 절망은 끝나지 않았다. 상처 하나 없는 네더브레인이 이미 저 위에 떠 있는 것을 본 타브가 카를라크를 뿌리치고 뛰쳐나가 울부짖는다.
“게이이이이일!! 아아아아악!!”
그러나 친구의 개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비극은 연달아 찾아왔다. 카를라크의 심장이 한계에 다다랐다. 윌이 목이 찢어져라 카를라크의 이름을 외쳤으나, 타브는 그러지도 못했다. 일리시드와 절대자 군대의 침략으로 발더스 게이트 전역이 불타는 가운데, 카를라크는 원래 없었던 것처럼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거기에 카를라크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타브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훔쳐내고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육척봉을 지팡이 삼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Ira et dolor!”
그렇게 펼쳐진 가시밭길에 타브가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 마치 순교자와 같은 모습으로, 가시밭 한가운데 선 타브는 저를 노리고 들어오다가 만신창이가 된 고블린을 걷어차고, 일리시드를 후려쳐서 가시밭 위에 굴린다. 그러는 동안에도 발더스 게이트에 남아 마지막 전투를 대비하던 동료들이 하나 둘 씩 쓰러진다. 오우거가 타브를 엄호하던 윌을 벼랑 너머로 던져버렸다. 마지막 치유 주문까지 모두 사용한 섀도하트는 밤의 창을 높이 들었으나 일리시드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레이젤이 그런 섀도하트를 구하려다가 일리시드의 촉수에 꿰뚫렸다. 독수리로 변한 자헤이라가 추락한다. 그를 받으려던 민스크가 비홀더의 살상광선을 정면으로 맞았다. 십 수 마리의 고블린에게 둘러싸인 것이 할신의 마지막이었다.
발이 피투성이가 되어 그 자리에 묶인 채로 간신히 처리한 것은 고작 3마리의 고블린과 일리시드 하나였다. 타브가 그 자리에 털썩하고 무릎 꿇고는 두 손을 모았다. “당신의 위브에 제 탄원과 기도를 말하노니, 제 마법이 당신께서 보시기에 즐겁기를 바라옵나이다.” 수 없이 올린 기도였으나,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했다. 타브가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외쳤다. “미스트라여! 미천한 종이 당신의 은총을 지금 간청드리옵니다!” 그러나 여러 번 목이 터져라 불러도 미스트라의 개입은 없었다. 타브가 손바닥으로 바닥을 내려치며 오열한다.
오브를 피해 높이 올라갔던 네더브레인이 마치 타브 일행의 자멸을 기다렸다는 듯이 천천히 내려와 지척까지 도달했다. 절망스러움조차도 잊어버릴 정도로 머리가 터질 듯 아파왔다. 수없이 많은 가시에 찔리는 고통으로도 의식이 잠식되어간다. 마지막 순간, 타브는 그라도 살아남길 바랐다. 언젠가부터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타브는 그의 이름을 외쳤다.
“아스타리온! 아스타리온!!”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와 정신이 이어졌다. 그리고 곧 모든 사고가 암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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