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3/아스타리온 드림/아스타브
발더스게이트3 - 아스타리온 드림
루즈는 생각보다 잘 번지곤 한다. 성가시게도. 이번에도 검은색 물감은 어김없이 창백한 피부에 길게 흔적을 남겼다. 또다시 발라야겠지. 더 성가신 건, 검은색 자국을 묻힌 눈앞의 남자는 그걸 재미있어한다는 점이었다. 부끄럽진 않지만 그래도 조금은 쑥스러움 정도는 알아주면 좋겠는데. 그러나 아스타리온은 쑥스러워하기는커녕 그 희고 잘생긴 얼굴에 번진 검정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더없이 즐거워했다.
“이렇게 매번 자국을 남겨주다니 깜찍하기도 하지. 확실하게 도장을 찍어줘서 고마워, 자기.”
“천만에.”
창백한 바탕에 번진 얼룩은 도장이라 말해주기엔 너무 지저분했다. 도장도 도안으로서 예술이라 한다면 예술에 대한 모욕이 아닐지. 나름대로 일정 부분 예술에 종사하는 바드로서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상대가 요령이 좋은 덕에 그 본인 얼굴엔 그리 티가 나지 않았지만, 정작 요령 좋은 상대는 피부가 너무 하얀 탓에 숯 검댕을 묻힌 것마냥 방금 입술을 부볐노라고 온 세상에 티를 내고 있었다. 키스는 부끄럽지 않지만, 아스타리온의 당당하고 능청맞은 분위기에 덩달아 사방에 외치는 듯한 그 느낌이 그를 쑥스럽게 만들었다.
근처에 있던 은잔에 얼굴을 비춰보며 정돈하는 것으로 신경을 돌리는 그에게 질리지도 않고 아스타리온이 입을 놀렸다.
“할 때마다 매번 지우고 다시 바르는 거 너무 귀찮지 않아?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닌데.”
“싫어?”
“내가? 내 입술에 바르는 게 아닌데 왜? 오, 혹시 내가 자기에게 직접 발라줬으면 하는 거야? 내가 그런 건 또 잘하지. 말만 해, 어디든 예쁘게 발라줄게. 어디든.”
“아니, 매번 지우는 게 귀찮냐는 말이었는데.”
때와 장소에 맞지 않는 농담 사전에 칼같이 차단하며 그가 이야기를 본 줄기로 돌려놓았다. 뭐, 입담으로 못 받아줄 것도 없지만 그런 분위기나 기분이 아니고서야 굳이. 물론 일로써 해야 할 땐 기분 여하와 별개의 문제가 되겠지만은. 다행히 아스타리온은 별다른 탈선 없이 질문에 대해 대답했다.
“설마. 아, 물론 거울 없이 지우는 게 귀찮냐는 거면 뭐, 쪼끔은? 거울을 안 봐도 잘 생겼다는 건 분명하지만, 어떻게 번졌는지는 봐야 아니까. 이해하지?”
그거야 그렇겠지. 그렇지만 나불댄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태도와 내용은 긍정해주고 싶지 않다는 반발심을 자극했다. 타브 안에서 뛰어오르려는 청개구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모를 얼굴로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아, 그렇지만 키스가 귀찮냐는 거면 절대로 NO야. 이렇게 질리지 않는 게 세상 또 어디 있겠어?”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허리를 잡는 손놀림이 자연스럽다. 은잔에는 비치지 않아도 아스타리온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는 머릿속에 충분히 그릴 수 있었다. “그건 다행이네.”라고 말하며 타브는 익숙한 품에 등을 기대었다. 입맞춤은 나도 좋아하니까. 따뜻하진 못해도 차갑지도 않은 손이 스트로베리 블론드로 염색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허연 손에 푸르게 선 핏줄, 깔끔한 모양의 손톱과 날렵한 손가락이 짧고 뾰족한 귀를 스치는 것이 기분 좋다.
“자기는 은근히 화장엔 열심이란 말이지. 이유라도 있어?”
“흐음. 이유라면 잔뜩 있지, 아무래도.”
타브는 천천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하나씩 꼽아보았다.
“우선, 나는 바드니까. 이목을 모을 땐 이미지가 강렬한 게 좋지. 얼굴 생김새나 색채나 뭐든.”
“호오? 직업의식이다?”
“취향 문제도 있지. 문신, 예쁘잖아?”
“자기가 한 건 뭐든 깜찍하지. 얼굴이든, 어디든.”
그렇게 말하며 문신한 곳을 짚으려는 허연 손을 타브의 손이 꼬집었다. “심미안을 칭찬해줘서 고마워. 마음에 들거든.” 그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건데,”
“중요한 건데?”
“커버가 필요해.”
타브가 단호하게 말했다. “커버? 무슨 커버?”하고 아스타리온은 어리둥절 해했지만, 그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문제였다. 아마 잘생긴 연인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뒤이어 나올 말이 재수 없으리라는 것도 예상한 후에 타브는 살짝 숨을 들이마셨다.
“내 얼굴, 완전 억울 상이잖아? 가만히만 있어도 왜 그렇게 울상이냐고들 한다고. 만만해 보여도 피곤하고, 거기다 일할 땐 무대에 따라 분위기도 맞춰야 하니까, 그때그때 화장으로 맞추는 게 편하지.”
그동안의 설움과 고충이 꾹꾹 눌러 담긴 한 마디였다. 그리고 그의 반응은 예상 범위 안에 있었다.
“뭐야, 그런 이유야? 뭐, 자기가… 세 보이는 얼굴은 아니긴 하지. 뭐, 그래. 어딘가 서럽고 억울하다는 눈매랄까. 나 호구예요, 하기 좋은 얼굴이긴 해.”
“바로 이래서 화장을 해야 하는 거야.”
많이 듣던 말에 미간에 깊은 금이 가고 한숨이 나왔다. 그런 의미에서 검은색은 좋다. 어쨌든 강렬하고 센 인상을 만들어주니까. 온갖 곳에서 야영하며 모험을 할 땐 햇빛을 막아주고, 도시에선 호구 잡히기 쉬운 얼굴을 커버해준다. 좋아할 수밖에 없는 색이었다.
“그럼 염색도 그런 이유인 거야?”
“무겁고 우울해 보이는 것보단 이 색이 예쁘지 않아?”
원래 머리카락이 검은 탓에 더 그랬다. 그의 질문에 아스타리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다른 색을 못 봐서 뭐라 말할 순 없지만… 지금 색이 잘 어울리긴 해. 자기에게 잘 맞는 색이야.”
“그래? 어떤 점이?”
타브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등을 대고 올려다본 탓에 거꾸로 보임에도 애인의 얼굴은 완벽한 미남 상을 하고 있었다. 그가 자기 얼굴이 어떤지 잘 알고 있단 점에서 가끔 짜증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런데도 외모가 아름답다는 것만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외양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단 점은 부럽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직 직접 속삭여줄 생각은 없었다. 아스타리온의 손가락이 그가 매일 밤 물고 있는 목을 스쳤다.
“어떤 점이냐고 하면… 그렇지, 우선은 맛있어 보이는 색이야. 딸기 같기도 하고, 어쨌든 잘 익은 과일 같은 느낌이… 한 입 베어 물면 단 즙이 쏟아질 것 같은 색이지.”
“아, 그래.”
노골적이다. 타브는 일부러 모른 척했다.
“또?”
“눈에 띄고, 귀엽지. 사람 모인 주점에서도 찾기 쉽거든. 물론, 좀 높은 곳에 앉아있거나 사람들이 앉아있을 때 말이지만.”
“아, 내 키가 작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내 사랑. 그냥… 그렇다는 거지.”
타브의 장난기 어린 대답에 작은 가시가 알아차린 아스타리온이 어물어물 넘어갔다. 실제로 그의 키는 동족들에 비하면 작은 편이긴 했다. 말만 하기 시작하면, 노래하고 연주를 하기 시작하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지만 사람 많은 곳에서 놓친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마지막 이유가 있는데 말이야.” 하고 이 이상 말꼬리를 잡히기 전에 얼른 아스타리온이 말을 이었다.
“흐응, 마지막? 그리고?”
“그리고.”
그가 강조했다.
“뭐랄까…, 노을이 떠오른다고나 할까, 일출이 떠오른다고나 할까. 밤이 시작되는 색이라는 점도 좋고, 태양이 나오는 색이라는 점도 좋지. 밤은 내가 자기를 독점하는 시간이고, 태양은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 녀석이니까.”
창백한 손이 타브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반딧불도 아니니 그렇게 빛나는 색은 아닐 텐데도, 그가 속삭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비로소 마음에 드는 애인의 정담에 타브가 살짝 웃었다.
“방금 건 꽤 괜찮네. 나쁘지 않아.”
“하, 정말? 다행이네. 내 말빨이 녹슬지 않아서. 원한다면 더 속삭여줄 수도 있어.”
“아냐, 충분해. 좋았어.”
타브의 손가락이 아스타리온의 턱 끝을 짚었다. 머리카락도, 피부도 모두 하얀 얼굴에서 유일하게 색을 가진 건 그를 보는 붉은 핏빛 눈뿐이었다.
“다행이야, 한동안은 색을 바꿀 필요 없겠네.”
“자기가 원하지 않는다면 일평생이라도 바꿀 필요 없지.”
아스타리온이 그의 머리끝을 정돈해주면서 덧붙였다.
“화장을 하든 안 하든, 염색을 했든 안 했든 자기는 매 순간 완벽하니까.”
진심 어린 한 마디였다. 그가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하고. 사랑을 부르는 예쁜 말에 타브는 포상으로 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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