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더스게이트3

[BG3] 파이퍼와 추적자 下

현대AU 타브아스타브

틴케이스 by 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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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안함!

그래서 연애……. 하는걸 쓰고싶었는데 결국 반전없이 제 테이스트로 가게됐습니다. 그렇게됐다…….

지인이 그래서 아스타리온이 밴드 작업실 소파에 앉아서 헤일 내려다보는게 보고싶대서 ㅋㅋㅋㅋㅋㅋ.. 저도 재밌어보여서 결말부가 이렇습니다.

여기서 '그'는 무성을 표시하는 인칭대명사입니다.


아스타리온은 아침을 일깨우는 바이올린 음색에 눈을 떴다. 내면의 소용돌이칠 감정을 정제해 부드럽고도 그 끝은 날카롭게 끝났다. 위층에 위치한 연습실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음색의 한 자락을 잡고 올라가보면 편안한 옷차림으로 바이올린을 연주중인 헤일이 있었다. 그는 누가 올라오든 신경쓰지 않았다. 오선지 위에 그려진 음표들을 따라 활이 각양각색의 음을 자아내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을 뿐.

헤일리 하메른은 그 사건을 금기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냥 패인 상처를 살로 묻어두고 잊어버리면 더 이상 기억은 안 날 거라고 생각하고 묵혀뒀을 뿐. 다만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라고 했을 때 이미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코끼리가 한 자리를 차지하듯, 그 사건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이미 꿰뚫린 상처는 그의 머리에 꽉 들러붙어 있을 것이다.

아스타리온은 스며드는 끔찍한 기억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가혹행위에 대해선 누구보단 잘 알지, 당했었으니까. 등에 지져지듯 남은 흉터도, 원하는 목표가 있다면 언제든, 어떤 방식으로든 몸을 던질 수 있다던가. 이런 상황에서도 상대를 백 퍼센트 믿지 못하게 된 것이……. 다만 아스타리온은 카사도어의 심장에 납탄을 박아넣고 대서양 한가운데에 떨어뜨려놨을 때 이리 외쳤다. 버리는 삶은 맞지 않았고, 잊기엔 선명히 남았으며, 그러니 그 모든 것이 나였음을 알고 받아들이노라.

곡은 쉬이 끝나지 않았다. 음절의 세기와 표현 방식을 통째로 외워 허상의 관중들에게 뿌려내고 있었다. 곡 자체야 클래식을 자주 들었다면 익히 들었을 법했지만 표현 방식은 달랐다. 마치 하나의 극을 보듯, 작곡가가 이 곡을 쓰며 표현했을 감정들을 가지고 섬세히 풀어낸다. 마치 자신이 겪었다는 듯. 한 악장이 끝나면 저절로 손이 박수소리를 내어 연주자에게 찬사를 주고야 말았다.

“몸은 괜찮으신가 보네요.”

“다친 건 아니니까요. 곤히 주무시던데, 괜히 깨운 거 아닐까 걱정되네요.”

“일어날 때가 되긴 했죠. 세상에서 가장 감미로운 모닝콜이 따로 있을까.”

하하. 헤일은 멋쩍게 웃고 넘겼다. 그는 아침, 아스타리온이 잠 든 사이에 윌에게 연락해 밤중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털어냈다. 공항에서 아스타리온과 마주쳤는데 하필 환상통이 와서 꼼짝없이 그의 힘을 빌려 지금은 개인 연습실에 와 있단 이야기였다. 헤일의 말을 다 들은 윌은 일단 몸이 괜찮은 상태라면 된 거라며, 여유가 된다면 밴드 연습실에 와서 합이나 맞추자며 조언을 했다. 오스트리아에 있을 일정과 밴드 일정까지 이래저래 많았다.

익숙하게 바이올린을 꺼내들어 연습을 시작했다. 아스타리온을 배웅하고 나서야 밴드 연습실에 들어갈 수 있었으므로 우선 오케스트라 협연 연습부터. 그렇게 한 악장을 끝내니 이 창백하고도 아름다운 남자가 듣고 있었다고 박수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헤일은 순간 연주자, 무대 위에 서는 연기자 중 하나로서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를 못하고 기뻐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하도 많은 사람들을 봐서 외관 보는 걸 돌 같이 하는 헤일의 시선으로 봐도 아스타리온은 잘생겼다. 몇 년 일찍 만났으면 아베르누스의 생존자들에게 밴드 보컬 구했다고 자랑할 수 있을 정도로 감미로운 목소리가 먼저, 그 다음에 무릇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이끌만한 외모와 그에 어울리는 붉은 눈, 그리고 희고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모든 걸 받치고 있었다. 으레 많은 이들의 선망을 받을만한 인상이다.

그런 사람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친절을 베푸는 걸로 보였다. 분명 안전할 수 있는 집까지 보내주는 것까지야 그럴 수도 있지만, 이 이상으로 더 붙어 있을 이유가 있나? 헤일은 이 사람을 돌려보내고 싶지만 이미 곱슬거리는 머리의 남자는 의자를 끌어와 맞은편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에서 들을 곡을 다 들으셨네요.”

“제가 가지 못한다 그랬더니 여기까지 오셔서 친히 연주까지 해 주신다라, 과한 친절 아닙니까?”

헤일은 바람빠지는 소리와 함께 허탈히 웃으며 어깨에 힘을 풀었다. 무슨 곡을 연습할까 싶다가, 문득 자신이 작곡했던 곡이 생각나 활을 들어 그었다. 그때는 분명 대중음악계에 빛날 친구들을 축복하며 즐길 목적으로 써 줬던 곡이었다. 그 때의 설렌 마음, 앞날의 미지를 즐기는 마음을 담아 현을 마찰시켰다.

그 다음 곡도 클래식이 들릴 법해 지루한 표정을 어떻게 지울까 고민하던 찰나였는데, 막상 들려온 건 그가 익숙하게 들어왔던 곡이었다. 아베르누스의 생존자들의 정규 1집, 타이틀 곡이 아닌 수록곡이었다. 파이퍼의 이름이 맨 처음 대중에게 알려진 곡이었다. 강렬한 기타리프와 중간에 있는 베이스 솔로, 이 모든 걸 한 데 모으는 드럼비트와 보컬까지. 프로씬에 처음 올라왔을 텐데도 완성도가 높은 곡이란 평가가 다수 존재하는 곡이었다.

“그 노래는…….”

“파이퍼가 만든 곡이죠. 아스타리온 씨께서 그렇게 찾으셔서 저도 한번 들어봤어요.”

“이렇게 바이올린으로 재해석하실 줄은 몰랐어요. 꽤나 격정적인 곡인데도.”

그 말에 헤일리는 머쓱하게 머리를 만졌다. 그야 멜로디라인을 바이올린으로 먼저 잡았으니까! 그가 바이올린으로 점철된 파일럿 곡을 듣던 멤버들의 얼굴을 봤어야 했는데. 작곡 비화를 알려주기엔 아직 둘 사이의 벽에 많았다. 그 김에 생각난 앨범 수록곡들도 섞어 연주해주니 상대는 꽤 만족한 듯 빙긋 웃으며 감상했다.

“그러고보니, 헤일. 언제까지 여기 있을 예정인가요?”

“아마 사흘정도는요.”

“그렇다면 내일 같이 콘서트 가시겠어요? 물론 그쪽이 주신 티켓으로 이런 말씀 하는 건 좀 웃기긴 하지만.”

손가락으로 일정을 계산하던 아스타리온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헤일은 속으로 펄쩍 뛰었다. 헤일은 해당 공연의 관객이 아니라 공연자로 나와서 연주할 예정었다. 그것도 바이올린과 기타 둘 다 들고 가서! 그런 헤일의 마음을 모르는 아스타리온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으로 그의 수락 여부를 기다렸다.

“그날 일정이 어떻게 될 지 몰라서요. 답은 나중에 드려도 될까요? 적어도 내일 오전까진 연락 드릴게요.”

진짜 일정을 몰라 난감하단듯 눈썹을 한데 모으는 연기와 양해를 구하는 목소리까지. 아주 거절은 아니지만 안 될 가능성이 높다는 얼굴로 보여주면 상대도 알아서 빠져줄 수 있었다. 것보다 더 궁금한 건…….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이면 좋은 사람과 같이 보러 가실 수도 있을텐데요.”

“좋은 사람이라면?”

“뭐 미래를 약속한 멋진 파트너라던가.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던가요.”

흐음. 헤일의 설명에 아스타리온은 비음을 내며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이 주욱 응시하면 저도 모르게 뭐든 불어버릴 느낌이라 헤일은 슬금슬금 시선을 피했다. 장난이었다는 듯 아스타리온은 어깨를 으쓱였다. 헤일은 답지않게 우물쭈물거리며 변명했다.

“어제 도와주신 건 감사하지만 제가 그렇게 마음에 들만한 행동을 한 적은 없었거든요.”

“오, 솔직히 말할까요……. 다른 어떤 교류보다 어제 당신이 제게 의지하는 걸 보고 우리 사이가― 좀 가까워진 걸 느꼈거든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도와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도대체 어떤 점 때문에 가까워졌는진 모르겠지만! 헤일은 속으로 외쳤다. 어제 공항에서 봤을 때와 지금은 확실히 다른 분위기긴 했지만 왜 그런지 알지 못했다. 아스타리온이야 자신의 마음을 정해둔 상태니까 확고했지만 헤일은 혼란만 가져올 뿐이었다. 지나치게 시선을 돌리며 할 말을 고르는 헤일을 보며 아스타리온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런 쪽에서는 자신에 대해 확신이 별로 없나보네.

“우리 둘 다 평범한 종류는 아니잖아요. 안 그런가요, 제 멋진 연주자님Darling?”

헤일은 그 목소리에 우뚝 멈춰 아스타리온을 바라봤다. 헤일은 몰랐지만 아스타리온은 편하거나 한번만 보고 말 상대에게 달링이란 칭호를 달아주는 게 일상이었다. 다만 그걸 처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저런 말을 쓸 정도로 우리가 가까웠나 싶었지. 연주자는 이 시점에서 고민했다. 한없이 진지하게 가버리면 저 사람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줄 것 같아서. 그는 분위기를 바꿨다. 밴드의 타이틀 곡 도입부를 짧게 연주하고 나서 익살스레 말했다.

“뭐 제가 파이퍼와 어느정도 공통점이 있기도 하고요.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점에서?”

“―무대센스와 팬서비스도 좋죠.”

아스타리온은 분위기를 틀어버린 헤일을 보며 일어나 고개를 끄덕이며 작별인사를 나눴다. 헤일은 닫힌 연습실 문을 한참 쳐다봤다. 분명 방어적으로 나선 것임에도, 상대는 상처받고 먼저 사라졌다. 바이올린을 든 연주자는 자신이 왜 그랬는지 그제야 복기하며 음을 끊어 연주했다.


윌에게서 전후사정을 다 들은 카를라크는 헤일이 작업실로 들어오자마자 그를 꽉 안아들었다. 겨우겨우 사람들 시선을 피해서 작업실로 들어선 헤일은 난데없이 들려 빙글빙글 두바퀴 정도 돌고 나서야 발을 지상에 드리울 수 있었다. 카를라크는 자기보다 한 뼘은 작은 헤일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

“또 환상통 왔다 그래서 걱정 많이 했어. 역시 그럼 공연은 참석 안 하는 걸로?”

“참석할거야.”

“무대 위에서 다시 도지면 어쩌려고? 너 그거 일주일은 가잖아.”

“어제가 좀 심했던 거지, 막상 무대에 올라가면 괜찮을 거야.”

양 팔로 허리를 짚고 고개를 까딱이며 멀쩡하단듯 한바퀴 돌며 멀쩡하단 제스처를 하자 못 이기겠다는 듯 다들 한숨을 쉬었다. 아직까진 무대 위에서 고통을 호소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무대 위로 올리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본인이 선다니 존중해 줘야지. 지금 그 문제보단 다른게 더 문제였지만.

“윌에게서 이야기 들었어. 그럼 그 아스타리온이란 사람은 내일 콘서트에 올건데. 네가 파이퍼일지도 모르겠단 의문이 더 강화되는 거 아닐까? 차라리 네가 참석하고 대역이 무대에 서는 건 어때? 파이퍼 부분만 핸드싱크하면…….”

“절대 그럴순 없지! 난 내 무대 절대 못 놓아.”

헤일은 어깨에 매고 왔던 바이올린 가방을 내려놓곤 펄쩍 뛰었다. 무대가 있으면 올라야 한다는 게 그의 신조, 사전에 합의된 무대에 오르지 못한 적은 없었다. 대신 뭔가 생각한 것이 있단 듯 작업실 한 구석에 있던 어쿠스틱 기타를 들어보였다.

“아스타리온이 온 이상 내가 여기 있으니 내가 파이퍼란 의심은 사겠지. 적으로 돌리면 꽤나……. 아니,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아. 그러니 지금 밝히는게 맞다고 생각해.”

어깨 띠를 매고 천천히 현을 퉁겨내 만든 멜로디라인. 밴드의 차기 타이틀 곡. 오랜 시간동안 밴드보다 자신이 눈에 띄면 안 되니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지만 서로가 이젠 그래도 됐다. 라는 생각이 들었던 지점에 헤일이 제시한 곡이었다. 하드 내에 러프하게 뼈대만 만들어 세상 빛을 보기엔 아직, 싶은 것들을 최대한 깎아내고 천천히 수정과 살을 붙이는 작업을 거쳐 밴드 멤버들이 잘 하는 것과 자신이 낼 수 있는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만든 곡이었다.

헤일은 그를 생각했다. 과연 얼마 만나지도 않은 사람을 이렇게 감으로만 믿고 따라도 괜찮은지. 하지만 헤일은 마지막에 그와 나눴던 대화를 놓칠 수 없었다. 우리 둘 다 평범한 종류는 아니잖아요.

“그러니 남들에게 내가 파이퍼란 의문을 돌림과 동시에 한 사람에게는 확신을 줘야지.”

헤일은 그때 해야 할 말을 이제야 생각해냈다. 우리 둘 다 평범한 종류는 아니지만, 당신은 혼자였다. 세상에 대한 저항과 어린아이같은 시선을 가진 어른들. 결성된 밴드에 헤일은 멤버의 일원으로 소속돼 서로와 생각을 함께하곤 했다. 호화롭고 장대하며 아무도 없는 빈 공간이 아닌. 작지만 바글바글 모일 수 있는 소파와 소리가 나는 악기들, 그리고 거친 음악들이 섞이는 이 장소에. 가능하다면 좋아하는 이에게 보이고 싶었다.

“그러니 내가 생각한 퍼포먼스를 실행해줄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어?”


아스타리온은 상기된 얼굴로 그룹 안을 돌아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우리 실세 생각보다 기분 좋은 상태에요. 란 걸 이마짝에 붙이고 다니듯이. 일이 있어서 못 오게 될거란 말이나 들을 줄 알았는데 그날 오후 늦게 온 전화의 내용은 꽤나 좋은 방향으로 그를 자극시켰다. 헤일은 주변이 사람 소음으로 가득한 곳에서 전화를 걸었다. 워낙 왁왁거리는 소리와 함께 섞여서 그가 알아들을만한 사람의 목소리를 구분할 수 없었다.

“직접 뵈는게 낫겠지만 그게 밤새 일이 있을 예정이라……. 내일 콘서트에서 뵙게 될거 같아서요. 일정이 빠듯하긴 한데 달리면 도착할거 같네요.”

“회장에서 만나잔 말씀이실까요. 티켓 두 장 제가 다 들고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건 괜찮을 거 같아요. 그리고 공연 끝나고 시간 나세요? 저랑 뒷풀이 좀 하시죠.”

“음, 일자리에 같이 끼는 건 그렇고. 친구로서 같이 가자면 승낙하죠.”

“당연히 친구죠. 저만 그렇게 생각했나?”

헤일의 실망한듯한 목소리에 아스타리온은 나직하게 웃으며 콘서트 이후 일정을 죄다 날려버렸다. 전화를 끊은 뒤, 아스타리온은 기대되는 마음 반, 헤일이 초대한 자리가 어떨지 걱정되는 마음 반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자리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지만 아스타리온의 경우에는 온갖 자리를 다 봐왔으니.

아스타리온은 헤일 만큼은 아니었지만 후드로 복슬거리는 머리를,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공연장에 들어왔다. 대다수는 스탠딩 존이었고. 일부 노약자나 관계자들의 손님들 자리에만 의자가 조금 있었다. 물론 카를라크가 일상 브이로그에서 그런 자리들도 결국은 서서 보게 될 거라고 말 하긴 했지만.

후드를 푹 눌러 쓴 아스타리온은 좌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며 헤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의 소음이 점차 늘어나는 걸 보자니 슬슬 옆 좌석의 사람이 왔어야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오지 않았다. 공연장에서 만나자고 했으니 제 시각에 맞춰 오긴 그른걸 알고 있었지만 첫 곡이 시작할 때까지 헤일은 오지 않았다.

갑자기 모든 것이 재미 없어졌다. 이럴 정도였나? 분명 무대 오른 사람들은 프로답게 열정적이고 멋지게 곡을 소화해내고 있는데, 관객들도 흥에 겨워 팔을 들어 흔들고 즐기고 있는데……. 이상했다. 분명 헤일이 곡을 연주했을 때와는 달랐다. 동떨어진 감각이 들었다는 인식이 들고, 역시 아니었나, 싶어 돌아가야겠다 생각할 즈음에 그의 어깨를 잡는 손길이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달린 손을 떼내려 하자 헤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려오느라 숨을 헐떡이고 있었지만 명확히 그의 목소리였다.

“늦어서 미안해요! 일이 좀 늦게 마무리돼서…….”

헤일은 공항에서 만났을 때와 같이 후드를 뒤집어쓰고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낀 채로 나타났다. 아스타리온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보이곤 무대를 바라봤다. 그제야 그냥 옆에 같이 볼 사람이 없어서 흥미를 잃어버렸단 사실을 깨닫는 건 머지 않았다. 곧이어 파이퍼가 쓴 곡도 연주되자 흥이 저절로 올라 일어서고 싶은 감정이 들었다. 그런 걸 알아챈 건지 아닌지, 헤일이 먼저 일어나 다른 관객들과 같이 손을 들고 흔들었다.

결국 서서 보게 될거라더니 진짜 그리 됐다. 아스타리온은 카사도어를 죽였을 때와는 다른, 처음 맞이하는 해방감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들의 강렬한 음악 소리에 손을 흔들었다. 헤일은 그가 락 콘서트를 처음 즐기는 어린 아이처럼 보였다. 고개를 흔들어 선글라스가 떨어져 나갈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그 누구도 그를, 그들을 신경쓰지 않았다. 공연에서 가장 많은 이목을 끄는 사람은 무대 위에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많은 곡들을 연주하고 슬슬 콘서트의 끝이 다가오자 카를라크가 마이크를 들고 안내를 시작했다. 분명히 퇴장 안내나 그런 소리가 섞여있었겠지만 관객들은 이미 한참 콘서트의 흥에 이끌려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콘서트에는 특별한 곡을 보여주기로 했어요. 준비 됐나요?”

“물론이지.”

“그럼 바로 시작합니다.”

곡명을 이야기하지도 않고 베이스 솔로가 먼저 시작됐다. 심장을 간질이듯 베이스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누구도 이 음에 대해 아무런 감상을 내놓지 못했다. 타이틀과 수록곡과 크로스오버 곡을 뒤져봐도 밴드의 발표곡 중 같은 라인으로 흘러가는 곡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스타리온도 들어본 적 없는 음색에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었지만 더 놀라운 건 바로 옆에 있었다. 흥분한 카를라크가 아스타리온이 있는 쪽을 향해 손을 뻗어 까딱거렸다.

“파이퍼, 튀어나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스타리온이 있는 자리로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졌다. 그는 순간 자기를 파이퍼로 지목한 줄 알고 어리둥절함을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정답은 그의 옆에 있었다. 헤일이 어디서 꺼내왔을 지 모를 바이올린을 들고 좌석에서 뛰어나와 무대로 올라갔다. 나무로 된 바이올린, 그 음색이 거칠게 베이스와 섞여들어갔다.

헬멧을 쓰진 않았지만 후드와 선글라스, 마스크 같은 것들이 그것을 대신해주고, 바이올린이 오프닝을 이끌고 기타에게 그 뒤를 이끌었다.도망치다보니 달려나아갔고, 가야하는 길을 찾는 내용의 가사가 흘러나왔다. 스포트라이트가 무대 위로 돌아가자 어떤 말이 아스타리온의 머리를 때렸다. 특별한 이벤트.

“이게, 뭔…….”

혼이 빠진 느낌으로 아스타리온은 자리에 앉았다. 바이올린을 들고 자신의 다음 파트를 기다리던 헤일이 문득 얼빠진 채로 자리에 앉아 무대를 보던 아스타리온에게 활을 흔들어 보였다. 저 악동의 마스크 속을 보면 분명 웃고 있을 거다! 아스타리온은 나쁘지 않은 배신감에 얼빠지게 웃고만 있었다. 그의 이름따라, 사람을 현혹시키는 파이퍼였다.


작업실의 1인 소파는 대체적으로 밴드의 모든 멤버들이 두루두루 앉긴 했지만 오늘은 처음 와 보는 손님의 몫이었다. 상석이고 뭐고 그런 의미로 손님에게 준 건 아니었다. 도리어 마지막 이벤트를 보고 나서 아무런 말도 못 하는 그를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이정도 충격을 줄 줄은 몰랐던 헤일과 공동으로 같이 이번 이벤트를 계획했던 카를라크는 쭈뼛쭈뼛 카우치에 바른 자세로 앉아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한참의 침묵 뒤에 창백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나를 속였…….”

“그, 그러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만약 그랬다면 아예 이런 계획 잡지도 않았겠죠?”

헤일이 빠르게 치고 나왔다. 바이올린 연주자 헤일리 하메른은 오스트리아에 있고 파이퍼는 뉴욕에 있다고 동일인물 의심설을 떨어뜨리면서 동시에 그에게 준 서프라이즈 선물이었다. 물론 처음 게일이 세운 계획과는 좀 다르게 끝났지만. 아스타리온은 슬슬 제정신이 돌아오는지 팔짱을 끼며 헤일을 바라봤다.

“진짜 파이퍼라고요?”

“헤일은 밴드 결성때부터 있었고, 작곡 멤버로 같이 있고 싶었지만 그 당시에 솔리스트 일정이 많았거든. 지금도 그렇지만!”

카를라크가 끼어들어 설명했다. 서로 다른 장르를 개척하기 위해 떨어졌단 이야기, 그래도 무대는 서고 싶어서 고안한 방법. 다음 앨범에는 타이틀 곡으로 참가하게 됐다는 이야기까지.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나서야 헤일이 덧붙였다.

“쓸쓸해하는 걸 외면할 수 없었거든요. 아스타리온씨는 친절하니까.”

“그런 착각 해봐야…….”

“그러지 않았으면 전 공항 길가에서 엎어져 있었을걸요. 뉴스 대문짝만하게 나고.”

헤일은 생각만 해도 아찔해지는 감각이었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헤일은 또 자신감 없이 소극적으로 대응하려는 아스타리온을 보고 씨익 웃어보였다. 비밀 지켜주겠냐는 암묵적 신호에 아스타리온은 못 이기듯 팔짱을 풀고 한숨을 쉬었다. 헤일은 아스타리온의 푼 손을 꼭 잡고 그제야 자신의 욕망 일부를 풀어냈다.

“그러니까 혹시 보컬 해보실 생각 없어요? 저처럼 머리 가리고 하시면…….”

“이게 무슨 소리야!”

그게 조금은 다른 방향이었지만. 펄쩍 뛰는 아스타리온을 보며 헤일이 털털히 웃음 내뱉었고, 이어 밴드의 멤버들이 새로운 멤버를 보고 박수를 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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