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3

BG3/아스타리온 드림/아스타브

BG3 - 대충 엔딩 이후 시점

몽유기담 by 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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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자신의 상처를 고백한 날, 사실 아스타리온은 굉장히 긴장하고 있었다.

의심과 경계심으로 무장하고 살아야만 했던 이백 년간 그는 자신의 상처와 염증과 대면한 적이 없었다. 염증으로 인한 열에 거세게 시달려도, 스폰으로서 죽었다 되살아난 몸은 자신의 안위보다도 철저하게 카사도어에게 종속되었다. 풀어낼 길 없는 열과 분노는 자신을 구제할 수 없는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하고 힐난하는 것으로 화했다. 안위를 위한 선제 위협과 공격, 기만은 몸에 배다 못 해 녹아들었다.

그랬던 그가 자기 정당화란 붕대를 제 손으로 걷고 처음 염증을 내보인 것이다. 그조차 일각일 뿐이라 해도 그에겐 큰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도, 그 상대도.

처음으로 그의 말을 믿어주고 스스로 제 목을 내어준 이는 이번에도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가 원하지 않는 그 어떤 것도 거절할 수 있다고, 거절해도 된다고 말했다. 자신은 그에게 그런 걸 시키고 싶지 않고, 그러길 원치도 않는다고. 아스타리온이 이용하려 유혹했다는 것을 알고도 그저 놀랐을 뿐 화를 내지도, 돌아서지도, 그를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때의 기분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른 것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뒤섞여 있었는지 일일이 나열할 수도 없었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데도 이백 년간 그를 묶어두고 있던 무언가의 매듭이 풀려나간 듯 했다. 풀 수는 없지만, 뭔가를 움직여볼 수는 있을 것 같은 느낌. 이백 년간 죽여온 자신이 처음 고개를 들고 있었다.

손만 잡고 끌어안은 그 날, 이것만은 정말 좋다고 말한 것은 진심이었다. 거짓도 기만도 위압도 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로 나눈 좋다는 감정, 이백 년 만에 찾아온 따스함이었다. 진심이 아닐 리가 없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초조했다. 아스타리온은 그의 말을 믿어준 이를 믿었다. 동시에 그런 이가 몸을 섞는 농밀한 시간을 원해올까봐 불안함이 생겨났다. 스스로는 기억도 안 나는 아름다운 얼굴과 몸, 매력적인 목소리만이 타인이 그에게 갈구하고 기대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에 부응해 이백여 년간을 색기를 휘감은 방탕한 모습만 가장해왔다.

‘그런’ 명령을 받기 시작하고 괴로워하던 때에는 최대한 아름답고 마음에 드는 이를 찾아 하다못해 ‘즐기기’라도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항상 그 밤의 끝을 장식하는 건 카사도어의 증오스러운 모습뿐인데 어떻게 즐길 수 있을까. 모두 ‘마음에 드는 이’를 찾는 것은 그에게서 빠르게 의미를 잃어갔다.

‘이백 년 만에 처음’이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의미 있는 이가 생겨버렸다. 원치 않는 그에겐 바라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렇지만, 혹시라도. 다른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이마저도 그에게 욕정과 쾌락을 원한다면, 원할까봐, 원하면― 아마 거부할 수 없겠지. 바라는 대로의 모습을 연기하고, 가장하고, 원하는 대로 몸을 섞어주고, 쾌락이 남은 몸으로 혐오감과 자괴감과 경멸에 젖어 누워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이와 수많은 밤을 그렇게 수없이 보냈지만, 이 이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먼저 몸으로 유혹했던 밤을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요구임을 알기에 아스타리온은 믿음 속에서도 마음 한 켠에 있는 일말의 초조함을 의식했다.

그리고 이 이는, 그에게 너무 많은 의미를 가져간 이는 정말로 몸의 한구석 어디도 요구하지 않았다. 손을 잡아주고, 한 번씩 입을 맞추고, 등이며 어깨를 다독여주었을 뿐이다. 때때로 끌어안는 손길에도 친밀함 외의 것은 없었다.

네 안전이 가장 중요해, 네가 행복하길 바랄 뿐이야.

그 속삭임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스타리온이 바라는 그림에 한 폭이 더해졌다. 카사도어의 승천을 가로채고 완전한 뱀파이어 그 이상의 존재가 된 자신의 모습, 그리고 그 옆에 함께하는 한 명, 영원히 안전하게 그들 사이를 이어줄 피의 매듭. 아스타리온은 그의 세상 속에서 가장 큰 의미를 지니는 모든 것을 쏟아줄 생각이었다. 힘, 안전, 쾌락 모든 것을. 갖춰지기만 한다면. 만약, 정말로 성공만 한다면.

바꿔 말하면, 성공하는 그 날이 오기 전에는 그에겐 줄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과 같았다. 줄 수 있는 건 쾌락뿐인데 저 이는 괜찮다고, 그가 준비되기까지 마다하고 사양하며 그 말을 지켰다.

신뢰에 보답해주고 싶었다. 믿어주고 모든 걸 걸어준 만큼 자신도 돌려주고 싶었다. 태양마저 두고 함께 와준 이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을 안겨주고 싶다. 승천을 포기하고, 스폰으로 남는다 해도 더 나은 삶을 살기로 한 후에도 마음만큼은 그대로였다. 종속되어 있거나 명령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의지로, 사랑하니까.

그 날 아스타리온은 그의 무덤을 앞에 두고 많은 것을 확인했다. 기쁘면서도 두려운 자유와 너무 오랜만에 되찾은 삶, 처음 찾아온 사랑과 행복까지.

모든 것에 단 한 명이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목덜미에 이를 세운 채 입 맞추며 속삭였다.

“자기, 내가 어떻게 해줄까?”

 

그렇게 말해도.

이제는 익숙해진 질문이지만 그래도 곤란함은 가시질 않았다. 하프엘프는 목덜미와 어깨, 등을 훑는 그의 입술을 느끼며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에 안도했다. 혹시라도 곤란해하는 것을 눈치채게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바라는 건 그저 약간 눅눅한 체온과 친밀한 숨결, 온기와 살가운 말 몇 마디―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쾌락이 싫은 건 아니지만, 굳이 그걸 타인과 함께 해야 할까? 그 시간과 체력과 마음으로 차라리 다른 것을 함께 하는 것을 더 좋지 않나? 이를테면 인사, 포옹, 가벼운 입맞춤과 다정한 몇 마디 같은.

함께 책을 보는 것도 좋고, 누워만 있어도 OK다. 장난삼아 몸싸움하며 굴러다니는 것도 즐겁지. 향수 만드는 것을 보는 것도 제법 재미있었으므로 다음번엔 같이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지 싶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라면 더 즐겁게 느껴질 만한 것들이 그 외에도 한참 많이 있었다.

몸을 섞는 건 수많은 활동 중 하나일 뿐이었다. 질색팔색하며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몸도 피곤하고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하는 것도 피곤한데 굳이?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꼭 살을 섞어야만 할까?

그렇다고 이걸 입 밖으로 말하진 못했다. 몸을 겹치고 배를 맞대는 것이 좋든 싫든 그에게 너무 많은 의미를 가진다는 걸 알고 있는데 쉽사리 꺼내놓을 순 없었다. 아마 아스타리온은 모르겠지. 안다면 하자고 하지 않을 테지만, 그 뒤에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무서웠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생각할지, 아니면 날 위해 자기 욕구를 상자 안에 가둬두고 꽁꽁 덮어버릴지. 그 활동에 별 흥미가 없을 뿐인데 혹시라도 그걸로 아스타리온이 상처받거나 움츠러드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엇나갔을 때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가끔은 정말로 그가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랑이나 자유를 확인하고 싶은 것인지 분간이 잘 가질 않았다. 어쩌면 둘, 혹은 전부일 수도 있겠지. 구별하기엔 너무 많은 것이 한데 녹아 들어있었다.

“글쎄, 네가 좋아하는 거?”

그렇게 말하자 아스타리온이 웃었다. 살짝 몸을 틀어 그의 얼굴을 보자 예쁘게 휜 눈썹 사이로 붉은 눈이 짓궂게 웃고 있었다.

“오, 어디 보자, 내가 좋아하는 거라. 너무 많은데? 자기 자신 있어?”

“추려 봐. 얼마나 센스 있게 고르는지 정도는 봐줄게.”

“흠, 내가 자기 취향은 또 잘 알지.”

정말로 기쁜 듯이 웃는다. 기뻐하는 너를 보는 게 나도 좋아. 하프엘프는 창백한 뺨에 입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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